피에르 오주로는 1757년 10월 21일에 Faubourg Saint-Marceau (파리 교외) 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파리에서 과일을 판매하는 상인이었다. 오주로는 아버지의 일을 돕다가 17세의 나이에 군대에 입대하여 근위 용기병 연대에 배속되었다. 그는 곧 검술에서 두드러진 재능을 보였고, 검투를 자주 벌였다. 그런데 어느날, 오주로는 프랑스 장교와 시비가 붙어 검투를 벌였다. 검투 도중 그만 장교가 오주로의 칼에 찔러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그 바람에 오주로는 국외로 달아나야 했다.
프랑스에서 달아난 오주로는 러시아에 가서 오스만 투르크 제국에 대항하는 임무를 띈 러시아 특수 부대에서 복무했다. 하지만 그는 러시아에서 적응하지 못하고 프러시아로 도망쳐버린다. 프러시아로 간 오주로는 경비대에 입대했다. 그런데 오주로는 프러시아에서도 달아나버렸다. 그는 작센의 국경에서 정착해 살다가 나폴리 군대에 복무했다. 그런데 그는 그곳에서도 탈영한다. (그는 이렇게 4번이나 탈영했다.) 1788년엔 포루투갈에 가서 1791년까지 그곳에 머물렀다.
프랑스에서 왕정이 정지되고 공화정이 수립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오주로는 프랑스에 귀국하여 군대에 입대한다.그는 남부 프랑스 군대에 배속되어 방데 반란 진압과 스페인군 격퇴에 공을 세운다. 오주로는 빠르게 승진하여 1793년 12월 23일에 사단장이 되었다. 그의 사단은 이탈리아로 이동했을 때 더욱 큰 활약을 보였다. 그리고 얼마 뒤, 나폴레옹이 이탈리아 전역 총사령관에 취임하자, 그는 나폴레옹을 따르면서 Millesimo 전투(1796)에 참가했고, 1796년 4월 14일에는 Cosseria 성 수비대장에 임명되었다.
[카스틸리오네 전투 당시 오주로]
1796년 8월 5일, 오주로는 카스틸리오네 전투에서 인생 최고의 활약을 선보였다. 장 밥티스트 앙투안 마흐쓸랭 장군은 오주로를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오주로는 보나파르트가 전투 전에 혼란에 빠져있을 때, 그를 격려함으로서 용기를 불어넣을 수 있는 인물이다."
(그런데 마흐쓸랭의 회고록은 거의 신뢰할 수 없는 부분이 많다. 그리고 카스틸리오네 전투는 나폴레옹이 의심할 여지 없이 유리한 상황이었으니, 그가 혼란에 빠졌을 거라는 가능성은 낮다.)
나폴레옹은 오주로의 군사적 자질에 대해 이렇게 표현했다.
"그의 기개, 용기, 엄격함, 활동력은 대부분 전쟁에서 발휘되었다. 또한, 그는 군사 훈련에 있어서 매우 훌륭한 운영을 했다."
1797년, 나폴레옹은 오주로를 파리로 보냈다. 오주로는 자코뱅 당원들이 나폴레옹을 지지하도록 만들라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중도파가 장악한 의회에 주도되었기에, 이 임무는 실패로 끝났다. 얼마 뒤, 그의 사단은 라인강에 주둔하고 있는 프랑스군에 배속되었다. 그는 그곳에서 상당기간 머물렀다.
1799년 11월, 나폴레옹은 쿠데타를 일으켰다. 이때 오주로는 이 쿠데타에서 약간의 역할을 담당했다. 하지만 오주로는 뒤이어 벌어진 라인강 전역에서 그다지 두드러진 역할을 하지는 못했다. 그렇지만, 나폴레옹은 자신의 기반을 다지기 위해서는 오주로의 그의 군사들의 지지가 절실했다. 또, 오주로는 자코뱅을 지지하는 성향이 있었는데, 나폴레옹은 자코뱅을 포옹하여 자신의 편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오주로의 손을 잡는 게 필요했다. 그래서, 1804년에 나폴레옹이 황제에 즉위한 뒤, 오주로는 정치적인 타협에 의해 원수에 임명되었다.
황제에 즉위한 직후, 나폴레옹은 영국 침공을 위한 준비를 착수했다. 그동안에, 오주로는 황제의 명령에 따라 브레스트, 브리트니에서 군대를 야영시켰다. 그런데 얼마 뒤, 오스트리아-러시아 연합군이 나폴레옹을 노린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나폴레옹은 일단 이들을 격파하기 위해 해안가에 주둔하고 있던 프랑스군을 불러모았다. 이에, 오주로의 군단은 제 7군단으로 탈바꿈했다. 오주로의 군단은 전쟁 기간 동안 전선을 굳건히 지탱했다. 그는 또 Konstanz 전투, Bregenz 전투 등 각지에서 전투를 벌였으며, 나폴레옹의 승리에 일조했다.
1806년, 나폴레옹이 프러시아를 침공했을 때, 오주로는 예나 전투에 참가하여 원정군의 좌측 측면에 배치되어 프러시아군을 격퇴하는 데 일조했다. 얼마 뒤, 그는 열병에 시달렸고, 한동안 병원에 입원해야 했다. 1807년 초에 열이 내린 오주로는 나폴레옹의 폴란드 원정에 동행했다. 그런데 얼마 뒤 나폴레옹은 아일라우에서 러시아군의 습격을 받고 크나큰 위기에 직면했다. 그때 오주로는 자신의 말에 간신히 매달리며(병이 도졌기 때문이었다.) 군단을 이끌고 러시아 군이 나폴레옹을 위협하지 못하도록 최선을 다해 싸웠다. 그는 간신히 나폴레옹을 지킬 수 있었으나, 그 대가로 거의 모든 병력을 잃고 말았다.
1808년 3월 19일, 그는 카스틸리오네 공작에 임명되었다. 이는 그의 1796년 당시 카스틸리오네에서 큰 활약을 한 것을 기념하는 의미였다. (이 명예직은 이후 가족들에게 세습되어왔다.) 얼마 뒤, 오주로는 반도 전쟁에 파견되어 카탈루니아 주둔군을 통솔했다. 그는 그곳에서 몇몇 승리를 거뒀으나, 잔인한 행위를 서슴지 않았고 약탈을 프랑스 장수들 중 가장 심하게 일삼았기 때문에, 스페인 인들은 그를 증오했다. 그리고 그는 웰링턴을 상대로 별다른 전과를 거두지 못했고, 악화되어가는 반도 전쟁을 수습하지 못했다.
1812년, 오주로는 황제의 부름을 받고 러시아 원정에 참가했다. 그러나 그는 이 원정에서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했으며, 뒤이은 1813년의 대 전쟁 당시에도 평범한 정도의 활동밖에 보여주지 못했다. 라이프치히 전투 전, 나폴레옹은 오주로에게 실망한 나머지 그를 꾸짖었다.
"카스틸리오네 공작의 직위를 박탈해야겠구려!"
이에 오주로는 간단히 대답했다.
"제게 이탈리아 전역 당시 싸웠던 노병들을 주십시요. 그러면 저는 당신에게 그때의 모습을 보여드리겠습니다."
1814년, 연합군이 프랑스를 침략하자, 나폴레옹은 오주로로 리옹 수비군을 통솔하는 임무를 맡겼다. 하지만 여러번의 격전을 벌인 오주로는 더이상 연합군을 막을 수 없으며, 더이상의 저항은 무의미하다고 판단했다. 그는 얼마 뒤 오스트리아 군에 투항한다.
나폴레옹이 엘바섬으로 유배된 뒤, 오주로는 루이 18세에 충성을 맹세한다. 그러나 나폴레옹이 복귀하자, 오주로는 다시 나폴레옹에 충성을 맹세했다. 하지만 이것은 잘못된 선택이었다. 나폴레옹은 워털루 전투에서 패하고 완전히 몰락해버렸고, 오주로는 부르봉 왕가로부터 반역자로 지목되어 재판에 기소되는 신세가 되어버렸다. 루이 18세는 오주로의 목숨은 살려줬으나 그의 원수직을 박탈하고 연금을 몰수했다. 오주로는 가난한 생활을 살며 실의에 잠기다가 1816년 6월 12일에 자신의 저택에서 사망했다.
[출처] http://cafe.naver.com/booheong.cafe
오주로 편입니다.. 오주로는 능력있는 장군이었죠.. 하지만 허풍도 심하고 고압적인 면도 많았습니다..
(이탈리아 방면군에 사령관 임명을 두고 마세나와 오주로가 물망에 올랐는데 마세나가 임명되자. 왠 애송이가 임명되었다고 노발대발 했다는...)
하지만 나폴레옹은 오주로의 군사적인 재능보다는 공화파로서의 오주로를 보고 원수로 임명했죠... 나폴레옹의 황제즉위시
여러세력을 포용해야 하기 때문이 었습니다.. 어찌보면 정치적인 능력이 뛰어났다고 해야 하겠죠..
하지만 개인적으로 오주로의 최대 업적은 따로 있다고 봅니다.. 그건.. 장 란느를 나폴레옹에게 천거한 쿨럭...ㅎㅎ
첫댓글 탈영을 4번씩이나ㅋㅋㅋㅋㅋ
이탈리아 방면군 사령관 이야기는 언제인가요? 제가 아는한 마세나와 오주로가 함께 이탈리아 방면군 사령관후보에 오른 것은 1794년인데 이때 뜬금없이 나폴레옹이 사령관으로 부임해오자 오주로가 입에 거품물긴 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