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극기 휘날리며> 홈피에서 퍼온것을 다시 퍼왔습니다.
이 글이 게시되고 나서 홈피에서 반대하는 의견들이 쏟아졌었다고 합니다. 지금 태휘홈피 게시판은 반대의견은 삭제하고 있어서 이글이 남아있지는 않는것 같습니다.
영화 '태극기휘날리며'를 보신분은 소감을 달아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반공영화 '쉬리', 태극기를 휘날리며 화려하게 돌아오다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에 대한 비평
이 글을 읽으며, 한국영화가 천만관객 시대에 들어선 이 때, 연일 승승장구하는 한국영화에 격려와 찬사를 보내지는 못할망정 웬 시비질이냐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물론 나도 한국영화가 헐리우드 영화를 누르고 자국민에게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현실을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한국영화를 사랑해 주는 관객들의 뜨거운 애국심에 진한 감동을 받고 있는 것이지, 현재의 한국영화를 그리 높게 평가해 주고 싶은 생각은 없다. 다시 말해 지금의 한국영화들이 국민들의 폭발적인 사랑을 받을 만큼의 가치가 있는 영화들인지 의심스럽다는 것이며, 한국영화가 가야할 길은 아직도 멀고 험하다는 것을 절감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중심에 바로 화제의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가 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바로 그 유명한 반공영화 <쉬리>의 강제규 감독이 만든 영화라서, 또한 제작과정부터 너무 요란한 소리가 나는 떠들썩한 영화라서 무척 궁금했는데, 역시 기대이상(?)의 영화가 탄생했다. 한마디로 '잘 빠진'
이 영화는 화려한 헐리우드식 기교와 연출로 범벅된, 2004년 판 블록버스터 '배달의 기수'라고나 할까.
어쩌면 나에게 무수히 쏟아질지도 모르는 비난의 화살을 충분히 예상하면서도, 나는 영화를 보는 내내 참기 힘들 정도로 짓밟힌 자존심을 찾기 위해 이 글을 쓴다. 나처럼 이 영화로 인해 자신의 민족적 자존심에 조금이라도 상처를 입은 사람들이 응원해 줄 것이라 믿으며, 그리고 이미
700만 고지를 향해 달려가는 '태극기'의 돌격에 미약한 제동이나마 걸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심각한 사명감을 느끼며 말이다.
용공 시비가 붙은 희한한 반공영화
한나라당의 한 국회의원은 이 영화에 용공 시비를 들이대며 수구보수 대표정당에 대한 우리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국군의 합법성과 정통성을 훼손했대나 어쨌대나... 조선일보는 웬일로 잠자코 있는 것일까. 바다 건너 일본의 한 신문은 이 영화의 흥행요인을 '한국인들의 반공의식 결여'로 분석했다. 세상에... 여전히 우리 민족을 우습게 여기는 그 구역질나는 오만함에 할 말을 잃게 된다. 많은 네티즌들은 이 영화가 한국전쟁을 다룬 영화 중 비로소 마침내 반공에 마침표를 찍은 위대한 영화이며 '휴먼전쟁스펙터클'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한 영화라고 평가한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들을 다 뒤로하고, 나는 이 영화를 반공영화라 결론지었다. 형제애로 매우 잘 포장했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는...
그런데 참으로 이상하지 않은가. 말하자면 하나의 영화에 극과 극의 엇갈린 평가가 내려진 것이다. 그럴 만도 한 것이, 강제규 감독은 국군, 인민군, 반공청년단, 빨갱이 사이를 쉴 새 없이 오고 가며 사람들을 헷갈리게 만드는 묘한 균형감각을 끝까지 놓치지 않았다. 학도의용군을 강제로 징집하는 장면도 있고, 보리쌀을 타기 위해 보도연맹에 가입한 주인공의 약혼녀를 반공청년단이 빨갱이로 몰아 죽이기도 하며, 인민군 포로들을 소각하라는 국군 대대장의 무자비함도 숨기지 않고 과감하게 드러내는 식으로 말이다. 좀더 적나라하게 말하면, 용공의 오해까지 불러일으킬 정도로 세련되게 반공을 그려냈다는 것이다. 더 이상 우리 국민들에게 노골적인 반공이 통하지 않음을 간파해 낸 감독의 판단력 덕분일까. 흥행에 성공하려면 국민들의 정서를 파악하고 편승하는 것이 기본이라 했을 때, 강제규 감독의 영화마다 흥행을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지 않을까 싶다.
이 영화의 평가에 아무리 화려한 수식어가 붙는다 해도 결국은 반공영화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이 영화가 한국전쟁을 제대로 된 역사의식 없이 다뤘기 때문이다. 물론 한국전쟁을 다루면 무조건 반공영화라는 억지를 부리고 싶은 것은 아니니 안심하시라. 다만 우리는 매우 일방적인 시각에서의 한국전쟁만을 배웠고, 엄밀히 말하면 전쟁은 아직 현재 진행형이며, 게다가 이 나라는 여전히 레드 콤플렉스로부터 법적으로, 사회적으로 자유로울 수 없기에 제대로 된 시대인식과 역사의식을 갖추지 않고서는 반공영화로 굴러 떨어질 수밖에 없는, 엄연한 우리의 현실을 확인하고자 함이다. 물론 한 영화에 대한 평가가 용공으로부터 반공에까지 넘나드는 희한한 광경만으로도 우리의 현실은 여지없이 확인되고 있지만 말이다.
'한국전쟁' 영화의 변함 없는 딜레마
한국 사회에서 한국전쟁을 다룬 영화는 언제나 딜레마에 빠진다. '적'이 있으면 '아'가 있는 것이 전쟁인데, '적'도 우리 민족이고 '아'도 우리 민족이며, 나아가서 누가 '적'인지, 왜 '적'인지, '적'과 '아'를 가르는 기준은 무엇인지가 도무지 명확하지가 않다. 그럼에도 분단국가의 법적 테두리 안에서 '적'과 '아'를 상정한 한국전쟁 영화는 노골적인 반공영화가 되기 일쑤였다. 왜냐, '북'을 '아'로 '남'을 '적'으로 그리거나 '외세'를 적'으로 그린 영화는 한국 사회에 태어날 수조차 없을 테니까! 게다가 실컷 반공을 부르짖던 영화의 결말은 대부분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더 이상 이런 비극적인 전쟁은 없어야 한다'로 끝난다. 물론 항상 전쟁을 부추기는 것은 '빨갱이'라며 책임을 떠넘기는 것은 절대 잊지 않는다. '적'을 때려잡자고 목청 높이면서 '반전평화'를 말하는 것 자체가 딜레마가 아니고 무엇인가. 진정으로 '반전'을 말하고자 하는 영화라면 애초부터 한 민족을 '적'으로 규정하는 짓은 하지 말았어야 한다. 그렇지 못할 거라면 아예 전쟁 영화를 찍지 말던지, 아니면 전쟁을 통해 진정한 평화의 메시지를 전달하니 어쩌니 하는 황당한 설명일랑 진작에 때려치워야 할 것이다.
<태극기 휘날리며>도 딜레마에 빠져 버렸다. 그러고 보면, 강제규 감독이 이 영화를 만들게 된 동기부터가 딜레마다. 사람들은 강제규 감독의 영화 제작동기를 '전쟁영화를 대하는 새로운 접근'이라고 평가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반공영화라는 오명을 처음부터 피해가고자 함이 아니었을까 싶다. 감독은 지금까지 누가 전쟁을 일으켰는가를 중심으로 한국전쟁을 다뤘던 이데올로기적 접근을 피하고,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에서 싸워야했던 개인에게 일어난 일들을 누군가는 정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며, 이 영화는 '전쟁'이나 '이념'에 관한 영화가 아니라고 했다. 그러나 어떻게든 '적'과 '아'의 구분이 있어야 하고 그래야 싸움이 되며 그래야 이야기가 전개되는 것이 바로 전쟁을 다룬 영화다. 전쟁영화에서는 다루는 초점이 형제애든, 전우애든, 가족애든 결국은 '적'과 '아'의 싸움 속에서 그것이 전개되는 것이기 때문에 정치성과 이념을 배제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이념을 배제하고 만들었다는 헐리우드 전쟁영화들에도 결국 미국중심의 이념이 알게 모르게 녹아들어 있듯이 가장 첨예한 이념의 대립인 전쟁을 이념과 관계없이 영화로 만든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인 것이다. 특히 '한국전쟁'은 세계적인 정치적 대립의 산물이었으며, 외세에 의해 같은 민족끼리 죽고 죽인 가장 가슴 아픈 특수한 전쟁이었기에 더더욱 그 깊은 정치적 본질을 제대로 다루지 않으면 안 된다. <태극기 휘날리며>에는 정치적 본질을 외면한 '이념'의 색깔만이 화려하다. '적'이 없는 것 같으면서도 '적'이 수시로 등장하는 그런 영화가 된 것이다. 우리 민족사에 한국전쟁이 마지막 전쟁이길 간절히 소망하며 이 영화를 찍었다는 감독은, 적어도 한국전쟁을 평화와 통일의 방향에서
다룰 준비가 전혀 되어있지 않았음을 스스로 증명했다. 전투장면의 처참함으로써 '반전'을 이끌어내겠다던 감독의 의도는 오히려 '반전=반공'이라는 냉전 시대의 울타리를 적나라하게 확인시켜주었다.
조선일보의 'NK 조선'에서 북한영화 <월미도>를 본 기억이 난다. 같은 '한국전쟁'에 대해서 다뤘건만 이 영화에서 '적'은 '국군'이 아니라 '미군'이다. 이토록 남과 북에서 '한국전쟁'을 바라보는 시각은 다르다. 오해는 마시라. 나는 영화의 내용을 객관적으로 이야기하고 있을 뿐이다.
옳고 그름을 떠나, 적어도 '한국전쟁'에 대한 이런 상반된 시각과 정보들이 사회적으로 충분히 공유되고 증명되고 토론될 때, '한국전쟁' 영화는 딜레마에서 빠져나올 구멍이라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형제애'로 전쟁광을 용서하다
'진태'와 '진석'은 '국군'이다. 자신의 의도가 아니었다해도 결국 그들에게 '인민군'은 '적'이다. 그래서 처음엔 왜 싸워야 하는지도 모르면서 싸운다. 후퇴와 반격을 반복하는 싸움의 과정에서 '적'을 죽여야 하는 동기들이 부여된다. 처음에 '진태'는 오로지 동생 '진석'을 살리기 위해 싸운다. 물론 야수처럼 '적'들을 쓸어눕히는 '진태'의 행위는 영웅처럼 묘사되고 동생을 위한 사랑이라는 명분 하에 이해되고 용서된다. 그러다가 인민군의 양민학살을 목격한 '진태'는 인민군의 잔혹성에 분노하여 총을 잡는다. '적'을 죽이는 동기가 새롭게 부여되는 것이다.
사실 전쟁 전 평화로운 시절의 두 형제, 그리고 수십 년의 세월이 흘러 노인과 유골로 다시 만난 두 형제의 모습을 제외하고는 두 형제의 깊은 형제애가 감지되는 부분은 극히 적다. 그러하기에 참혹한 전투장면 속에서 펼쳐지는 '진태'의 광기 어린 살육은 그것이 오로지 동생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기엔 좀 억지스럽다. 심하다 싶을 정도로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무의미한 전투 장면엔 피가 튀고 팔다리가 떨어져 나가는 잔혹성만 있을 뿐, 동생을 위한 형의 마음을 깊이 이해할 수 있는 생활의 논리와 설득력이 턱없이 부족하다. 오히려 죽이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는 전쟁이라는 극단적인 상황과, 은근히 부추겨진 영웅심과, 곳곳에서 확인되는 인민군의 만행에 대한 분노가 '진태'를 전쟁광으로 몰고 간 실질적인 동기가 아닌지 헷갈릴 정도이다.
그러다가 '진석'이 죽었다고 생각한 '진태'는 스스로 '적'이 된다. 이 영화에서는 핵심적인 반전이다. 인민군으로 둔갑한 '진태'를 보는 관객들은 뜨거운 형의 사랑을 느끼기보다는 미치광이 '진태'의 광기 어린 모습 그 자체로 '적'을 느끼게 된다. 영화 중 가장 강력하게 '진태'를 비판하고
견제하는 역할을 하는 인물인 '진석'도 영화의 후반부에서는 형의 마음을 이해하고 포용하게 됨으로써 앞서 보여진 '진태'의 모든 행위는 눈물나도록 아름답게 정당화된다. 살아남은 '진석'은 한국전쟁을 겪은 가장 대표적이고 보편적인 인물로 묘사되어 '한국전쟁'의 의미를 일방의 입장에서 정리해 버린다. 한국전쟁 당시 겪어야 했던, 남과 북의 구분을 떠나 말로 차마 표현할 수도 없는 기가 막힌 민족 전체의 비극은 결국, 두 형제 이야기로 대표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묻혀버리고 만다.
'한국'에서 '한국전쟁'을 이야기한다는 것
영화는 '영만'의 대사를 통해 '일제시대야 일본놈 때려잡으려고 싸웠다지만 지금은 우리 민족끼리 왜 싸워야 하냐'며 우리 모두에게 '한국전쟁'의 의미를 물어오지만 '인민군이 먼저 쳐들어왔으니 어쩔 수 없다'며 생각할 틈도 없이 답을 내려준다. '진석'의 대사를 통해 '사람을 죽이는
것에 있어서 인민군과 우리가 다를 것이 뭐냐'고 슬쩍 물타기를 시도하지만 '먼저 시작한 게 누구냐'며 다시 확실하게 쐐기 박는 걸 잊지 않는다.
'영신'은 빨갱이가 아니다. 그런 '영신'이 빨갱이로 몰려 반공청년단에게 총살을 당한다. '영신'의 죽음이 가슴아프면서도 나는 관객들에게 '그러면 진짜(?) 빨갱이는 죽여도 괜찮은가' 묻고 싶었다. 빨갱이로 몰려 죽임을 당한 '억울함'도 가슴 아프지만 더욱 가슴 아픈 건 빨갱이면 무조건 모조리 죽어야 한다는 말도 안 되는 횡포,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국군'인 '진석'이 '같은 편'인 '반공청년단'을 향해 주먹을 날리는 장면은, 보릿쌀 몇 줌에 이름 석 자 적었다가 수십만 명이 빨갱이로 몰려 목숨을 잃은 이른바 '보도연맹' 사건에 대해 정의로운 '응징'을 하는 듯한 인상을 풍기며 슬쩍 면죄부를 넘겨주기까지 한다.
'최민식'이 등장한다. 순간, 그가 맡은 인민군 대좌의 영상에 영화 <쉬리>의 북한테러범 '박무영'의 영상이 겹쳐지면서 '인민군=테러범', '북한=악의 축'이라는 등식이 뇌리를 스친다. 아무리 우정 출연이라고는 하지만 참으로 기가 막힌 배역설정이 아닐 수 없다. 왜 꼭 '최민식', 아니 '박무영'이어야 했을까. 감독의 순수하지 못한 의도와 더불어 위험한 역사의식이 깜찍하게 돋보이는 컷이다.
악마처럼 변해버린 빨간 얼굴, 빨간 눈의 '진태'가, 자기 동생도 몰라보는 미치광이 '진태'가, '깃발소대'를 이끄는 인민군 영웅으로 활약한다는 설정은 인민군을 머리에 뿔 달린 빨간 늑대로 표현한 만화영화 <똘이장군>을 능가한다.
영화 중반부의 처참한 양민학살 장면은, 이미 밝혀진 바 있듯 '노근리'를 비롯한 우리나라 전역에서 100만 명이 넘는 양민을 학살한 미군의 참혹한 살인행위를 그대로 인민군에게 뒤집어씌우는 엄청난 역사왜곡을 단행한다.
두 형제의 운명은 매우 비극적이다. 그것이 사람들의 눈물을 자아낸다. 자신이, 또는 아버지가 겪었을지도 모르는 우리 민족 공통의 슬픔이 진하게 전해져 오는 것이다. 영화를 보고 난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비극의 발단을 생각하게 된다. 생각의 결론은, 사건의 본질을 떠나 결국 누가
먼저 쳐들어와서 이런 비극을 만들었는가로 귀착될 수밖에 없으며 형제의 비극이 가슴 아플수록 전쟁을 일으킨 '적'에 대한 분노도 커지게 마련이다. 물론 이 영화의 줄거리 상 '먼저 쳐들어온 쪽'은 '북'의 '인민군'이다. 결국 '전쟁'과 '이념'이 아닌 형제애를 중심으로 새롭게 한국전쟁을 다루겠다던 감독의 의도는, 형제의 비극이 어디로부터 출발하는가를 도리어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것으로 그 방향이 완전히 전환되고야 만다.
그렇다. 한국에서 한국전쟁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이런 것이다. 아무리 다른 시각으로 다룬다해도 결국은 '누가 먼저 시작했느냐', '누구에게 책임이 더 크냐'의 문제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2004년 지금도 우리는 분단 상태에 있으며 '한국전쟁'은 아직 완전히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까지 대부분의 '한국전쟁' 영화는 그 다양한 주제와 소재와 설정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이 문제에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반공'이라는 똑같은 답을 내려왔다. 물론 <태극기 휘날리며>도 예외일 수 없음을 확인했다. 그것이 분단 조국의 현실임도 가슴 아프게 확인했다. 외세가 깊숙이 개입된 전쟁을, 외세의 영향에서 여전히 자유롭지 못한 지금의 현실에서 제대로 밝힌다는 것 자체가 어쩌면 무리스러울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면서도, 함께 영화를 보던 아들에게 '6.25 전쟁 때에는 저렇게 인민군들이 쳐내려와서 사람을 죽였다'고 절절하게 설명하는 한 엄마의 모습을 보며, 우리 아이들을 미래의 통일된 나라를 짊어질 세대로 키워나가는데 이 영화가 얼마나 못된 짓을 하고 있는지 새삼 걱정이 밀려왔다. 또한 학교에서는 제대로 배울 수 없었던 '한국전쟁'을 너무도 궁금해하는 청소년들이 극우 성격의 반공 싸이트를 통해 일방적인 정보만을 접하는 모습을 보며, 이 영화의 폐해성이 영화의 내용뿐만 아니라 그 파장에까지 널리 미쳐있음에 화가 치밀었다.
진실로 이념의 장벽을 뛰어넘을 수 있는 영화는, 드라마틱한 형제애나 전우애로 전쟁의 본질을 왜곡하고 슬쩍 피해 가는 영화가 아니라, 외세에 의한 전쟁의 본질을 정확히 밝혀내고 진정한 민족애로 서로의 상처를 치유하며 분단의 역사를 청산하는 길을 보여주는 영화가 아닐까. '반공'의 시각으로는 그 안에 아무리 찡한 휴머니즘을 집어넣는다 해도 민족의 대립을 부추길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한국전쟁을 다룬 영화는, 민족 공동의 통일행보에 기여하고 외세에 의한 한국전쟁의 아픔과 상처를 본질적으로 치유하는데 자기 역할을 다해야 비로소 가치가 있을 것이다.
이 땅엔 통일의 봄바람이 불고 있다. 반백년 동안 반목과 질시의 사나운 분단바람이 꽁꽁 얼려 놓았던 우리의 마음에도 통일의 훈풍이 불고 있다. 새로운 세기, 2000년대를 맞으며 우리민족끼리 힘을 합쳐 조국을 통일하자고 손잡고 눈물 흘리며 약속하지 않았는가. 전쟁이 남긴 분단의 상처가 통일에 대한 염원으로 치유되고 있다. 북에 대한, 인민군에 대한 증오와 분노보다는 같은 민족이라는 민족애와 단결의 기운이 더 커지고 있다.
이렇듯 민족의 동질성을 회복하기 위한 노력들이 연일 벌어지는 지금의 시기에 국군과 인민군 사이에 건널 수 없는 선을 그어버린 이 영화는 시대의 변화와 민족의 소망을 외면하고 있다. 우리 민족이 서로 힘을 합쳐 통일을 하고, 무엇 때문에 우리 민족이 서로 총질을 했는지 그 숨겨진
역사적 진실이 만천하에 밝혀지는 날, 아마도 이 영화에 대한 평가는 지금과는 사뭇 다른 방향에서 다시 내려지지 않을까 싶다.
오늘, 우리에게 '태극기'는 무엇인가
영화를 보며 나는 내내 영화 제목에 신경이 쓰였다. 생각해 보니 '태극기'는 너무도 상반된 두 가지 뜻을 동시에 담고 있다. 그것이 바로 우리 민족이 처한 현실이라는 생각 때문에 가슴 한켠이 아릿했다.
태극기는 대한민국의 국기이다. 그러므로 태극기는 애국심을 상징한다.
80년 광주에서, 87년 6월 항쟁의 거리에서 태극기를 흔들며 이 땅의 민주화를 외치던 사람들에게 태극기는 애국심의 상징이었다. 2002년 거리를 붉게 물들인 월드컵 응원의 장에서 펄럭이던 태극기는 우리나라 사람임을, 우리 민족임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자부심 그 자체였다. 미군 탱크에 올라가 시위하던 대학생들이 목에 두른 태극기는 미국에 당당히 맞서는 민족적 자존심의 표출이었다.
태극기는 남한의 국기이다. 그러므로 태극기는 분단을 상징한다.
미군의 인천상륙 소식에 기뻐하며 '기어이 백두산 정상에 태극기를 꽂자'는 대사에서 태극기는 '남'과 '북'의 대결에서의 '남'의 승리를 상징한다. 물론 그 승리는 미군과 합세한 '남'이 무수한 '북'을 죽였을 때만이 가능하다. '진태'가 수여 받은 '태극무공훈장'에 박힌 태극기는 같은 민족을 가장 많이 죽인 댓가로 주어진 '반공'의 표창이다.
같은 태극기지만 그 의미는 완전히 다르다. 그렇다면 이 영화 제목에서의 태극기는 무엇을 상징하며 지금 우리가 손에 들어야 할 태극기는 어떤 의미여야 할까. 나는 오만한 일본놈들, 미국놈들의 코앞에서 '태극기'를 흔들며 우리 민족이 제일이라고 당당히 말하고 싶다. 나는 하루 빨리
'태극기'를 흔들며 북한 사람들의 방문을 환영할 날이 오기를 기대한다. 나는 '태극기'를 휘날리며 통일의 광장으로 달려가 '인공기'를 든 북한 인민을 얼싸안고 춤을 추고 싶다. 적어도 이 영화에서의 '태극기'가 나의 이런 바램과 전혀 맞닿아 있지 못함을 알았기에 나는 이 영화를 반공영화라 낙인찍었다. 이 영화가 라는 제목으로 해외시장에, 그것도 고액에 팔려나간단다. 이 영화를 보는 외국 사람들은 '태극기'를
과연 어떤 의미로 받아들이게 될까. 나아가 우리나라, 우리민족, 우리영화를 어떻게 여기게 될까. 생각만 해도 얼굴이 화끈거리지 않을 수 없다. 다시는, 분단과 대결의 상징으로서의 '태극기'가 영화 속에서든 현실에서는, 그리고 어떤 이유에서든 휘날리지 않게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두려워할 것은 흥행실패가 아니라 역사의 평가임을 잊지 말라
스크린쿼터를 지키기 위해 싸우는 한국 영화인들에게 박수를 보낸 적이 있다. 물론 당연히 그 싸움은 계속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제 싸움은, 영화의 스크린 수를 지키기 위한 싸움이 아니라 한국 영화 그 자체를 지키기 위한 싸움이 되어야 한다. 아무리 많은 스크린을 장악한다 해도 거기서 상영되는 한국영화가 헐리우드 영화와 다를 것이 없다면 우리는 도대체 무엇을 지켰다 할 수 있겠는가.
한국 감독이, 한국적인 소재를 가지고, 한국 배우들로 영화를 찍었다고 다 한국영화일까. 요즘 들어 새롭게 던지는 질문이다. 감독과 배우, 소재가 한국 것일 뿐 영화는 국적불명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아마도 수십 년간 헐리우드 영화에 의해 입맛이 길들여진 탓에 우리는 헐리우드 영화와 가장 비슷한 한국영화들에 박수갈채를 보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한국영화를 사랑하는 관객들의 애국심을 의심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한국영화 천만 관객 시대에 감격해 얼이 빠져 있는 동안 헐리우드 영화는 '직수입'이라는 방법을 버리고 '한국영화의 헐리우드 영화'라는 새로운 방법으로 우리 국민들의 눈과 귀와 머릿 속을 장악해 들어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니 우리의 모습이 우스워지는 것이다. 8, 90년대를 거치며 국내 가요와 해외 팝송의 경합에서 가요가 이겼다고 좋아하다가 그 가요라는 것이 팝송과 다를 것 없이 변해 버리는 모습에 뒤통수가 얼얼했는데, 이제 한국영화 지켰다고 좋아하다가 또 뒤통수 맞지 않을지 걱정이라는 얘기다.
한국영화에 열광하며 뜨거운 사랑을 보여주는 관객들에게 영화인들은 어떻게 보답할 것인가. 그 애국심을 흥행의 열쇠로 이용할 것인가, 아니면 자존심 있는 진짜 우리 식의 영화를 만드는 원동력으로 삼을 것인가. 시대는 영화인들에게 매우 무거운 사명감을 안겨 주고 있다. 금기시 되어있던 민감한 문제를 건드려 영화의 소재로 삼는 것만으로 사회적 소임을 다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커다란 착각이다. 영화인들은, <실미도>를 보며 684 부대를 죽인 직접적 요인이 '7.4남북공동성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아주 많다는 것, <태극기 휘날리며>를 보며 우리 국민을 위해 '인민군'을 물리쳐 주신 국군장병들에게 다시 한 번 감사드린다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는 것에 대해 어떻게 책임질 것인지도 생각해야 한다. 그만큼 영화는 사회적 영향력이 큰 예술이기 때문에 영화인들도 사회적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얘기다. 앞으로는 광기 어린 개인의 파편화된 모습에 복잡하고 방대한 정치적 문제, 민족문제를 어설프게 담아내는 서구식 시도는 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 게다가 그 연출 방법과 형식에서 헐리우드의 뒤꽁무니를 따라가는 듯한 냄새가 난다면 우리의 자존심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한 번 찍은 영화는 길이 남는다. 필름을 없앤다 해도 그 영화를 본 사람들의 가슴속에 영원히 남게 되는 것이다. 흥행 실패를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훗날 자신의 영화가 어떤 역사적 평가를 받게 될 것인가를 두려워할 줄 아는 영화인만이 관객들의 한국영화 사랑에 진정으로 보답할 수 있을 것이다. 몇 편의 블록버스터 영화가 독식하는 한국영화계의 현실은 심히 우려스럽다. 이에 대한 구조적 대책이 시급히 필요하다고 생각하면서도 한국영화 발전에서 가장 중요한 첫걸음은 영화인들 스스로의 강한 사명감이라는 생각에 감히 충고 한마디를 던진다.
마지막으로, 나의 영화평이 친북적 혹은 좌경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오히려 되묻고 싶다. 실미도 684 부대를 무장공비라고 속였던 분단 시대의 국가권력이, 한국전쟁인들 국민 앞에 솔직히 말해 왔을까 싶은 의심을 떨쳐버릴 수 없는 우리의 현실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라고 말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