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분의 문화산업이 그렇듯 애니메이션 역시 진입이 어렵다. 특히나 관련 학과 출신도 아니고, 딱히 경력이 있는 것도 아니면서 나이까지 많으면 진입의 벽은 “더럽게” 높을 수 밖에 없다.
아직 통과의례를 치르느라 쌍코피 터지던 시절. 약속 하나 없는 토요일 저녁을 보내기 위해 CD 한 장과 소주 한 병 그리고 깍두기 한 종지를 준비했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1992년 작 “붉은 돼지”
1.
꿈이란 건 양날의 검이다. 무언가를 향해 달려간다는 것은 나머지로부터 멀어진다는 것이며, 목표를 갖는다는 것은 좁은 지향“점”을 제외한 나머지를 가려버린다는 것이다. “나”를 구체적이고 특정한 “무엇”으로 만들어 버린다는 것이다. 겁나게도 말이지.
그리하여, 목표에 다가갈수록 더 많은 상실과 희생이 필요하고, 더 많은 둔감과 방기를 저지르고야 마는 건지도 모르겠다. 이제 겨우 30대 초반, 그리고 멋진 애니메이션 한번 만들어보겠다 큰소리치지만 초입에 서 있을 뿐인 주제에 너무 거창한 이야기는 주제 넘을터.
허나, 요 몇 년간 뭐 좀 해보겠다고 버벅거리고 있는 사이 늙은 손발로 스스로를 책임져야 했던 부모님들과 나도 모르는 사이 나를 위해 이런저런 양보를 해주었던 주변 사람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답답하고 멍해지기만 한다.
2.
“붉은 돼지”. 주인공은 아드리아 해를 주름잡는 파일럿. 그러나 그는 “돼지”다. 허나 애니메이션답게 그리고 미야자키 하야오답게 “돼지” 주인공이 사람들 틈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웃고 떠들고, 싸우고 하늘을 난다.
1차 대전 후 전쟁의 상흔이 채 아물기도 전, 이탈리아에서는 파시즘이 대두된다. 또다시 전쟁의 조짐이 하나 둘 껴지고, 군대는 왕년의 격추왕 롯소를 불러들이려 한다. 그러나 전쟁과 전쟁을 낳는 체제가 싫어서 아니 그 안에서 전쟁 기계가 되었던 자기 자신이 싫어서 스스로를 돼지로 만들어버린 남자는 조국의 부름을 거부하고 떠난다. 그러나 갈 곳이 없는 그는 그저 하늘을 떠돌뿐이다.
우습게도 이 구질구질하고, 늙다리 남정네의 쉰 냄새가 폴폴 나는 애니메이션을 보며 나는 눈물을 글썽였다. 병나발을 불고, 깍두기를 집어먹는 “딱” 그 수준의 풍경을 연출하면서 말이다. 나는 왜 중년의 미야자키가 그려낸 하늘을 보며 슬퍼졌던 걸까? 어쩌면 롯소에게서 풍기는 좌절과 회한을 냄새를 맡아버린 게 아닐까? 설명할 수도, 설명할 필요 없는 전조를 맡아버린 것은 아닐까?
3.
꿈이 실은 양날 검임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예가 “붉은 돼지”를 만든 “미야자키 하야오”다. “미래소년 코난”,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을 만든 저 위대한 저패니메이션의 대부는 그러나 지브리의 도제 시스템을 통해 작품을 만들고 있다. 수없이 많은 애니메이터들 위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며 미야자키”의” 작품들을 만들어내고 있는 거다.
애니메이션은 정말이지 독한 노동이다. 몇몇 핵심 스탭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애니메이터들에게 작품을 만들어가는 과정은 예술 혹은 창작 이라기보다는 지루하고 반복적인 노동이기 쉽다. 영화처럼 야망을 불태우며 덤벼드는 축은 소수에 불과할 뿐, 비록 그림이 좋고, 애니메이션이 좋아 시작했고, 그래서 힘들어도 떠나지 않은채 묵묵히 일하고 있다 해도 대부분의 애니메이터들은 어디까지나 직업인이다. 게다가 몇 컷 안되는 동화를 받아다 가사를 돌보는 틈틈히 그림을 그리는 수 많은 아줌마 동화맨들을 보고 있노라면 애니메이션은 그냥 보통의 제조업은 아닐까 하는 생각에 빠져든다. 허나 이들은 노동자 하다못해 직업인으로도 취급되지 못한 채 때로는 자영업자 내지는 개인 사업자로 때로는 예술가, 창작자로 취급되어 독한 노동에는 미치지 못하는 박봉과 취약한 노동조건과 고용불안에 시달리고 있다. 물론, 이곳에도 크리에이터로 살아가는 사람은 있지만 말이다.
그래서 양날 검이다. 저 대단한 미야자키의 작품들은 실은 도제 시스템으로 운영되는 스튜디오의 독재자가 만들어낸 것이다. 또, 감독이 제 아무리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할지라도 결국은 스탭의 한명에 불과할진데 우리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붉은 돼지라 부른다. 그나마 지브리는 돈과 고용 안정성, 그리고 애니메이터 개인의 전망과 성취욕에 있어 아시아권 애니메이션 산업계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으리만큼 후덕한 곳이다. 그런 특수한 예외를 빼고 나면 박봉에 독한 노동을 감내하는 수많은 애니메이터 덕에 작품이 만들어지고 있는 셈이다.
헌데, 이 관료적인 중앙집중제와 기층 애니메이터들의 저임금 구조가 오늘날의 애니메이션을 지탱하고 있는 뼈대라는 것이 문제다. 운영이라면 또 모르겠지만 불행히도 민주주의는 작품을 만들어내는 것에서는 별 도움이 되지 못하며, 현재의 산업 구조는 저임금 구조를 끊임없이 재생산하고야 만다.
4.
나는 애니메이션 PD다. 이번에 극장용 장편 애니메이션 제작에 들어간다. 나 자신은 밖에다 이렇게 얘기한다. “우리는 감독을 중심으로 한 철저한 도제 시스템의 스튜디오를 갖고 있다”고. 그것이 우리의 “장점이다”라고. 또 우리는 수없이 많은 애니메이터들과 일하게 될 것이다. 물론 우리는 그들에게 “국내 최고 수준의 대우”를 할 것이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국내”다. 변명으로는 쓸만해도 거기서 거기일뿐이다. 구조는 재생산될 것이다. 우리들 자신까지 포함하여.
꿈은 양날 검이다. 지금 이순간에도 나는 누군가의 희생과 양보를 밟고 전진 중이다. 내 옆에는 슬쩍 눈감아버린 “타인의 사연”들로 가득하다. 그러나 나는 그리고 우리는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래 멈출 수 없다. 꿈이 문제가 아니다. 심장이 뛰는 한 살아지게 되는 법, 살기 위해선 무언갈 해야 하는 법. 하다면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의 문제가 된다. 그리하여 눈 앞에 던져지는 것은 “좀 더 나은”이라는 과제. 그래. “좀 더 나은”.
5.
이 노래를 한번 들어보라. “Walking in the air” 레이먼드 브릭스 원작, 다이앤 잭슨 감독의 단편 애니메이션 “스노우 맨”의 테마 곡이다.
어느 눈 내리는 겨울날, 소년은 눈사람을 만든다. 추운 밤이 되자 눈사람이 살아나 소년을 데리고 북극에 있는 눈사람들의 나라로 안내한다. 다음날 아침, 침대에서 눈을 뜬 소년이 달려나가지만 어느새 태양은 떠오르고 눈사람은 녹아 없어져버렸다.
노래는 이야기 만큼이나 순수하고 몽환적이다. 하지만 그만큼 우울하고 묵직하다. 목소리에 어울리지 않는 삶의 무게, 상실의 무게가 느껴진다. 어째서일까? 아마도 그것이 순수의 운명이기 때문이 아닐까? 어디에도 영원의 샘물은 없다. 소년의 여행은 끝나버렸고, 태양이 떠오르면 눈사람은 녹아서 사라져버린다. 남겨진 소년은 두렵다. 그래서 그날의 아름다운 밤하늘을, 낭만적이었던 비행을 떠올려 보지만 알고 있다. 이제 다시는 그런 낭만과 환상을 맛보지 못하리라는 것을. 소년을 기다리는 것은 세상, 성인이 되길 요구하는 엄격한 세상이라는 것을. 그래서 소년의 순수한 꿈은 상실과 체념으로 묵직하기만 하다.
6.
“자연”은 근대 이후의 개념이라 한다. 그처럼 “순수한 동심”와 “따스한 이상향” 역시 삶이 힘겨운 어른들이 세상의 거침 탓에 빚어낸 것일 게다. 아이들과 10분만 있어보면 안다. 그들의 세계에 “순수” 따윈 없다. 그래, 순수 따위는 없는 거다. 오히려 문제는 존재하지 않는 순수가 있는 현실을 단죄하고 부정하게 하는 것일 게다. 세상은 원래 그렇고 그런 것이거늘, 순수 따윈 존재하지도 않는 것이거늘. 그래서 삶이란 그리 깨끗하지도 더럽지만도 않다는 것을 아는 게 유용한 건지도 모르겠다.
결국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작품은 만들어질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우리는, 우리들은 지금 하고 있는 이 일을 혹은 다른 어떤, 하여간 무언가를 계속해서 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요는 이 작품을 만드는 과정에서 조금이라도 나은 무언가를 쌓아가는 것일 게다. 무수한 시행착오를 거치리라. 말이 시행착오지 그저 진저리 나는 살이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별볼일 없는 흡혈귀 같은 중년이 되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하겠지. 그러나. 그러니. 그래서 말이다. 우리는 걸어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7.
마지막 장면에서 “붉은 돼지” 프로코 롯소는 하늘로 사라진다. 그 후 사람들은 그가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고 한다. 그러나 사라진 것은 돼지. 자기 부정을 통해서만 존재할 수 있었던 “돼지” 롯소는 아닐까? 이제 롯소는 돼지가 되어서라도 머물고 싶었던 아드리아해의 하늘을 인간의 얼굴로 날고 있는 건 아닐까? 이제는 인간의 얼굴로 세상을 마주하고 있는 건 아닐까?
첫댓글 와우 Good Job!!!놀라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