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각은 아름답다......마광수
'착각'은 우리의 생활을 훨씬 윤택하게 만들어 주기도 하고, 정반대로 비참한 지경에 빠
뜨리기도 한다. 이를테면 그저 그런 외모를 가지고 있는 사람의 경우 매일 30분씩 거울
들여다보기를 계속하다 보면 스스로 미남 미녀가 된 듯한 착각에 빠질 수가 있다. 일종
의 '자기애(나르시시즘)'심리인데, 이런 종류의 착각은 스스로의 '외모 열등감'을 치료
해 주어 자기의 얼굴을 보다 아름답게 가꾸기 위해 용맹 정진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해 준
다.
이와는 반대로 나폴레옹이나 히틀러 등 독재자들이 빠진 '세계 정복 가능성'에 대한 착각
은 스스로뿐만 아니라 국민 전체를 고통의 구렁텅이로 빠뜨려 넣을 수밖에 없었다.
'아름다운 착각'은 확실히 고난으로 가득 찬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도움을 준다. 그중 가
장 대표적인 예가 바로 '돈키호테'의 착각이다. 그는 늙은 나이인데도 불구하고 '기사((騎士)
로맨스'를 탐독하다가 착각에 빠져들어, 스스로를 용감한 미남 기사라고 단정했다. 그리고는
비루먹은 말인 '로시난테'를 씩씩한 준마로, 못생긴 촌뜨기 처녀 '돌시네아'를 천하절색의 공
주님이라고 착각하였다. 남들이 보기엔 정말 실성한 사람과 다름없는 행동을 했지만, 돈키호
테의 착각은 자신의 정신연령을 더 젊게 만들고, 스스로의 마음을 보다 낭만적으로 만들어
주어 세속에 찌든 스트레스를 말끔히 가시게 해줬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여성을 만날 때도 착각 속에서 만나는 것을 좋아한다. 대낮에 만나는 것보다
는 늦은 저녁때의 카페나 뽀시시한 조명이 흐르는 디스코텍 같은데서 만나는 것이 좋고, 화
장기 없는 맨 얼굴보다는 화장과 치장을 많이 한 여성을 만나는 것이 더 좋다. 타고난 미인
이 아닌 다음에야 옷으로든 화장으로든 외모를 어느정도 포장하여 '관능적 착각' 또는
'관능적 환상'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낫기 때문이다. 또 음악이 시끄럽게 흐르고 불그레
한 조명이 에로틱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디스코텍 같은 곳에서는, 청각과 시각이 착각을
일으켜 어느 정도 에로틱한 만남이 가능해 지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자면, 같이 술을 마
시면서 하는 데이트가 맨정신으로 하는 데이트보다 훨씬 더 에로틱한 분위기를 만들어 주
는 것과도 같다.
인생은 어차피 괴로움의 연속이다. 아무리 "비켜라 운명아, 내가 간다"고 외쳐대며 운명의
심술과 맞대결을 해나간다 해도, 우리는 생로병사(生老炳死)의 고통을 극복할 수 없다. 그러
므로 우리는 되도록 운명의 실체를 직시하지 말고 우회적으로 바라보면서, 그때 그때의 고
달픔을 환상적 착각 속에다 묻어두는 것이 좋다. 말하자면 끊임없이 백일몽을 꿈꾸는 자세
로 인생을 살아나가는 것인데, 그런 방식으로 살아가다 보면 자신이 어느새 낭만주의자가
되어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되고, '철부지 낭만주의자'의 기쁨을 만끽할 수 있는 것이다.
어린이들은 동화를 즐겨 읽는다. 그런데 유명한 동화라는 것이 몽땅 '착각 덩어리'이다. 그
래서 [신데렐라],[백조왕자],[백설공주] 등을 읽다 보면 우리가 마치 왕자나 공주(그것도
기가 막히게 잘 생긴)가 된 듯한 착각에 빠져들어 한동안 행복할 수 있다.
그런데 어린 시절을 지나 성인으로 성장한 뒤에까지 동화를 읽는 사람은 퍽 드문 것 같
다. 나는 어린이든 어른이든, 동화속 나라에서 헤매며 살아가는 것이 현실 속에서 눈 똑
바로 뜨고 살아가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어른들에게도 동화 속 나라
에서 헤매며 살아가기를 권하고 싶다.
나는 글을 쓰는 사람이기 때문에 스스로 작품 속의 세계를 창조해 보며 한동안 즐거울 수
가 있었다. 장편소설 [권태]에서는 손톱 발톱이 무지무지하게 긴 여자, 그리고 나를 진실로
사랑해 주는 '희수'란 여자를 창조해 내어 그녀와의 사랑을 즐겼고, 연작소설 [광마일기]에서
는 모란의 요정인 '강설(降雪)', 30년 연하인 '지나', 고려시대 때 죽은 처녀귀신인 '야희' 등
과 작품 속에서의 로맨스로 행복할 수 있었다. 그리고 [즐거운 사라]와 [불안],[자궁 속으로]
에서는 내가 남 주인공이 되어 야한 여주인공들과의 로맨스 속에서 행복한 착각을 하기도
하였다.
소설을 읽든 쓰든, 우리는 '야한 환상'을 주는 글을 통해 낭만적 착각에 즐겁게 빠져들 수
있다. 영화도 그렇고 만화도 그러한데, 다만 우리 나라의 검열제도나 예술에 대한 검찰과 사
법부의 개입이 너무 심하여 '행복한 착각', '에로틱한 착각'을 방해하고 있다는 것이 내 개인
적인 생각이다.
아름다운 착각을 불러일으켜 주는 것은 비단 예술작품뿐만이 아니다. 술도 그렇고 담배도
그렇고 광적인 취미생활도 그렇다. 특히나 사랑은 더더욱 '착각'의 연속이다. 우리는 '아름다
운 착각'속에서 사랑에 빠지고 '맨정신'으로 이별한다. 그러므로 쌍방이 다 착각 속에서 사랑
했다가, 헤어질 때가 되면 '내가 언제 그랬냐'는 듯 이모저모 이별의 책임을 상대방에게만
전가시키는 태도는 온당치 못하다고 생각한다. 과거를 '아름답고 달콤했던 착각'의 시간으로
돌리며, 또다시 '새로운 착각'을 찾아 나서는 자세가 더욱 소중하지 않을까.
그래서 나는 착각을 주는 여성이 좋고, 그런 여성이 진정 사랑스러운 여성이라고 생각한다.
착각을 주는 여성은 스스로도 착각에 빠지기를 잘하는 여성이다. 자기가 빼어난 미인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여성은 화장과 몸 가꾸기에도 신경을 많이 써 가지고 남자를 즐거운 착각에
빠뜨린다. 성형외과 의사의 말을 들어봐도, 미인들일수록 성형수술에 관심이 더 많다고 한
다. 말하자면 보통 수준 이상의 외모를 가진 여성들일수록 더욱더 아름다워지고 싶어한다는
얘기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완벽한 미모를 가지고 있는 여성은 이 세상에 단 한 명도 없다.
그러므로 '예쁜' 여성들은 다 착각에 빠진 여성들이요, 상대방에게 착각을 주려고 노력하는
여성들이라고 볼 수 있다.
'아름다운 착각', 더 나아가서 '마취적이고 도피적인 착각'이 건강한 사회문화로 정착될 수
있을 때, 우리 사회는 보다 더 즐겁고 명랑한 사회로 변할 수 있다. 우리의 인생은 낮으로만
이어지는 게 아니다. '낮 생활'도 중요하지만 '밤 생활' 역시 중요하다. 그런데 우리가 밤에
꾸는 꿈은 아름다운 착각, 관능적 착각의 연속인 것이다. 꿈속에서라도 우리는 아름다운 착
각 속에 마음껏 몸을 맡길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