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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성(濟州城)의 지세(地勢)와 형편(形便)
조선인(朝鮮人)에 의한, 조선(朝鮮)을 위한, 조선사(朝鮮史)해설(解說)
○ 반도(半島) 땅의 남쪽 바다 가운데에 있는 제주도(濟州道)! 이 제주도(濟州道)를 <반도사학(半島史學)=식민사학(植民史學)>에서는, 옛날에는 탐라(耽羅)라고 불렀다고 설명(說明)한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옛 고전(古典)에서 말하는 제주도(濟州道) 또는 탐라(耽羅)에 관한 이야기는 전혀 다르다. 이게 어찌된 일일까?
누군가 하나는 분명(分明), “거짓을, 진실(眞實)인 것처럼, 전파(傳播)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무엇이 진실(眞實)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 <반도사학(半島史學)과 식민사학(植民史學)>을 증오(憎惡)한다.
▣ 『구사당(九思堂) 김낙행(金樂行, 1708~1766)』에 대해서 : 고전번역원의 구사당(九思堂)집(集) 해제(解題)를 참고(參考), 인용(引用)한 것임.
➊ 구사당(九思堂)은 1708년(숙종34)에 안동(安東) 천전리(川前里)에서 태어났는데, 18세 때에 당시 문명을 날리던 「강좌(江左)」 권만(權萬)의 칭찬을 받았고, 이어 부친의 명으로 밀암(密庵) 이재(李栽)의 문하에 들어가 근사록(近思錄). 심경(心經)을 익히며 사문(師門)의 칭찬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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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좌(江左) = 강동(江東) 이야기》
▣ 반도(半島) 땅에서 『강좌(江左)』라고 불렸던 곳은 어딜까? 모르긴 몰라도 “경상도(慶尙道)”에 있는 “낙동강(洛東江)의 동(東)쪽” 지방(地方)이라고 말할 것이 틀림없다. 그렇다면 말이다. 아래 기록(記錄)속의 『강좌(江左)』란 반도(半島) 땅, 어느 지방(地方)을 말하는 것일까? 이곳도 강좌(江左)지방이니 반도(半島) 경상도(慶尙道) 동쪽 모퉁이를 말하는 것일까?
○ 북사(北史) 백제(百濟) :《百 濟 之 國, 蓋 馬 韓 之 屬 也, 出 自 索 離 國. (中略). 東 明 之 後 有 仇 台, 篤 於 仁 信, 始 立 國 于 帶 方 故 地. 漢 遼 東 太 守 公 孫 度 以 女 妻 之, 遂 為 東 夷 強 國. 初 以 百 家 濟, 因 號 百 濟. (中略). 自 晉, 宋, 齊, 梁 據 江 左,〔三一〕 亦 遣 使 稱 藩, 兼 受 拜 封. 亦 與 魏 不 絕. 其 人 雜 有 新 羅. 高 麗. 倭 等, 亦 有 中 國 人. : 백제라는 나라는 대개, 마한의 속국으로 색리 국(索離國)에서 나왔다. 동명의 후손 중에 구태가 있었는데, 인정이 많고, 어질고 믿음이 있어 나라를 세우니 대방의 옛 땅이다. 한(漢)의 요동태수 공손도(公孫度)의 여자를 처로 삼으니, 동이의 강국이 되었다. 처음 백가(百家)로 시작하니 이로써 백제(百濟)라 하였다. (중략). 진, 송, 제, 양이 강의 왼쪽【교감(校勘) 31】에서 일어났는데, 역시 사신을 보내어 번(藩)이라 칭하면서, 봉함을 받았고, 위(魏)와도 끊어지지 않았다. 그 나라의 사람들은 신라(新羅). 고려(高麗). 왜(倭)등이 서로 섞였는데, 또한 중국인도 있었다.》 고 하였다.
➥ 열전(列傳) 말미(末尾)의 『교감기(校勘記)』를 보자. :〔三一〕 《自 晉 宋 齊 梁 據 江 左 諸 本 「左」 下 衍 「右」 字 , 據 周 書 刪 : 『진(晉), 송(宋), 제(齊), 양(梁)이 강(江)의 왼쪽(左)에서 의거하였는데』, 여러 제본【당시에 있던 여러 가지 저본(底本)을 말한다.】은, 『좌(左)』 아래 줄에는 『우(右)』자로 되어 있는데, 주서(周書)에 의거해서 삭제하였다(刪)》고 하였다.
➥ 위 교감기(校勘記)에서 말하는 내용(內容)은, 『북사(北史) 열전(列傳) 백제(百濟) 편을 편찬(編纂)할 때, 옛 역사서(歷史書)를 참고하였는데, 저본(底本)으로 한 “여러 역사서(歷史書)”에 기록(記錄)되어 있기를, 『강좌(江左)』의 아래 줄에는 『강우(江右)』라고 되어 있는데, 지금【북사열전을 편찬할 때】『“주서(周書)”를 참고(參考)하여 “강우(江右)”를 삭제하고, “강좌(江左)”라고 했다.』는 설명(說明)이다.
주서(周書) 열전(列傳)을 보면 :《주서(周書) : 自 晉、宋、齊、梁 據 江 左, 後 魏 宅 中 原, 並 遣 使 稱 藩, 兼 受 封 拜. : 진, 송, 제, 양이 강의 왼쪽에서 의거하였는데, 후위(後魏)가 중원(中原)에 자리 잡고 있어, 역시 사신을 보내어 번(藩)이라 칭하면서, 겸하여 봉함을 받았다. 》고 하였다. 이것은 『중원(中原) 땅에 위(魏)가 있었다는 것을 강조(强調)하고, “강우(江右)”라는 말은 빼버리고, 오직 “강좌(江左)”란 글자만 기록(記錄)되어 있다.』
➥ 『강좌(江左)』와『강우(江右)』의 의미(意味)는? / <반도사학(半島史學)/식민사학(植民史學)>에서는, 어차피 의미(意味)없는 내용(內容)일 것이나, “대륙조선(大陸朝鮮)” 입장(立場)에서는 엄청난 영역(領域) 파괴(破壞)을 일으키는 기록(記錄)이다.
ⓐ『강좌(江左)』로 할 경우(境遇) : 『진(晉), 송(宋), 제(齊), 양(梁)이 강(江)의 왼쪽(左)에 의거하였다』는 말은, 근대(近代)역사해설(歷史解說)로써, 『진(晉), 송(宋), 제(齊), 양(梁)』등의 나라가 “장강(長江)의 동(東 : 左)쪽에 있었다.”는 이야기고,
ⓑ『강우(江右)로 할 경우(境遇) : 『진(晉), 송(宋), 제(齊), 양(梁)이 강(江)의 오른쪽((右)에서 일어났다』는 말은, 『진(晉), 송(宋), 제(齊), 양(梁)』들의 나라가 “장강(長江)의 서(西 : 右)쪽에 의거하였다.”는 말이 된다.
ⓒ 위 글 ⓑ에서 말한 것처럼, 『강우(江右) 땅에서, 진(晉), 송(宋), 제(齊), 양(梁)등의 나라가 의거하였고, 강좌(江左) 땅에는 백제(百濟)가 오랜 세월 자리 잡고 있었다.』는 설명(說明)이 된다.
ⓓ 강우(江右) 곧 강서(江西) 땅은 : 장강(長江)의 서쪽 상류(上流)측을 말하는 것으로, 사 천 성(四川省)과 귀주 성(貴州省)지방을 일컫는다.
ⓔ 강좌(江左) 곧 강동(江東) 땅은 : 호남 성(胡南省). 호 북 성(胡北省). 강서 성(江西省). 절강성(浙江省). 강소 성(江蘇省)등지를 일컫는다.
➥ 백제(百濟)가 ‘강좌(江左)=강동(江東)’ 에 터전을 닦고 있으면서, 강우(江右)에 있었던 진(晉), 송(宋), 제(齊), 양(梁)등의 여러 나라들을 속국(屬國)으로 다스렸다는 것이 곧 대륙조선사(大陸朝鮮史)다. 그리고 이때, 남진(南進)정책(政策)을 펼치던 북위(北魏)가 수십만(數十萬) 기병(騎兵)군단(軍團)을 발동(發動)하여, 백제(百濟)를 쳤으나, 백제(百濟)가 길목을 차단(遮斷)하고는, 기습공격(奇襲攻擊)을 감행(敢行), 북위(北魏)의 수십만(數十萬) 기마군단(騎馬軍團)을 대패(大敗)시켰다는 것이 남제서(南齊書)의 이야기다.
● 우린 조선사(朝鮮史)의 실체(實體)를 알아야 한다. 반도사학(半島史學)=식민사학(植民史學)에서 말하는 비굴(卑屈)하고, 사대(事大)에 목매고, 구걸(求乞)하는 조선왕조(朝鮮王朝)의 이야기가 아니라,
● 많은 제후국(諸侯國)을 거느리고 사해(四海)를 통치하며, 만인(蠻人)들을 교화(敎化)시키는 천자(天子)의 나라로써, 봉건왕조(封建王朝)의 종주국(宗主國)으로써의 위상(位相)을 뒤 높인 조선왕조(朝鮮王朝)의 실체(實體)를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 위 해제(解題)에서 설명(說明)하는, 『강좌(江左)』지방(地方)은, 반도(半島) 땅에서 그렇게 불렸던 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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➋ 30세인 1737년(영조13) 5월, 부친 제산(霽山)이 그 스승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을 변호하는 소를 올렸다가 의금부 옥에 잡혀 들어가서 여러 차례 국문을 받게 되었다. 이에 구사당(九思堂)은 음식을 전폐하고 밤에도 방에 들지 않고 금옥 밖에서 밤낮 울부짖었다. 두 손으로 땅을 후벼 파서 열 손가락이 모두 피가 흘렀고 때로는 기진맥진하여 쓰러지기도 하니, 시정(市井)의 남녀가 모두 달려와서 술을 입에 넣어 주기도 하고 거적으로 햇볕을 가려 주기도 하며 구해 주었다. 옥졸조차 “우리들도 사람이니 어찌 차마 규정을 지키느라 효자에게 인정을 쓰지 않겠는가.” 하고 옥중 소식을 알려 주거나 약물과 음식을 성심으로 전달해 주었고, 비록 당로자나 정적(政敵)일지라도 지나가면서 보고는 또한 효자라고 칭탄(稱歎)하였다. 중략.
➌ 그해 9월에 풍원군(豐原君) 조현명(趙顯命)의 항소(抗疏)로 인하여 극형을 면하고 제주 정의현(旌義縣)에 유배하라는 명이 내려졌다. 중략. 49세 때인 1755년(영조31)에 ‘선친께서 「북협(北峽)」에 이주하실 뜻이 있었다.’라고 하며 「봉성(鳳城)」으로 이거(移居)했다가 2년 뒤에 다시 「임하(臨河)」로 돌아왔다. 중략. 55세 때인 1762년(영조38)에 모친상을 당했을 때에도 부친상 때처럼 슬픔과 예제를 다하여 집상하였다. 그러나 상중에 지나치게 슬퍼한 까닭으로, 상복을 벗은 2년 뒤 1766년(영조42)에 병이 이미 깊어 59세를 일기로 세상을 마쳤다. 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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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협(北峽). 봉성(鳳城). 임하(臨河)! 이러한 지명(地名)들은 어디에 있었을까?
㉮ 북협(北峽) / 대산(大山)집 제9권 서(書) 최여호ㆍ진숙ㆍ입부께 답함 신미년(1751, 영조27)〔答崔汝浩進叔立夫 辛未〕 : 《지난번에 북협(北峽)에 일이 있어 열흘 만에 돌아왔더니.......》하였고. 향산집 제3권 / 서(書) / 유 석사께 답함〔答柳石舍〕 : 《조문하는 예절과 의리의 창도(唱導)는 자연 경중이 있기 마련이니, 진실로 북협(北峽)의 옛 약속이 서악(西岳)의 새 약속보다 낫지 않음을 알겠습니다.》라고 하였으며, 澤堂先生集卷之九 / 記 /《鬱巖寺記 : 鬱巖寺。在原城之北峽江之沜巖壁之巓.》하였으며, 魯西先生遺稿卷之十八 / 墓誌銘 / 通訓大夫行軍器寺副正金公墓誌銘 :《九歲遭倭亂。避兵入北峽。轉于西關。蒼黃之際。與母相失。適遇舅氏。取以歸.》하였다는 것을 보면,
반도사학(半島史學)에서 : 반도(半島) 땅 원성(原城)의 북쪽에 북협강(北峽江)이 있으며, 이곳을 북협(北峽)이라고 불렀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북쪽의 산골짜기에 있던 어떤 강(江)을 말하는 것인지, 북협강(北峽江)이라고 불리는 강(江)이 있었는지, 알 수 없다.
㉯ 봉성(鳳城) / 반도사학(半島史學)에서는 : 《임금이 거처하는 집. 궁궐을 둘러싼 성벽. 백과사전 / 부리태니커 : 삼가현(지금의 경남 합천군 삼가면 일대)의 옛 별호.→ 삼가현》이라고 설명(說明)하고 있는데, 이게 영 미덥지 못한 것은 무엇 때문일까?
㉰ 임하(臨河) / 반도사학(半島史學)에서는 : 《조선시대에 금소천(琴召川: 지금의 半邊川) 유역에 자리 잡았던 임하는 안동과 청송을 잇는 교통의 요지였다. 당시에 이곳에는 임하창(臨河倉)과 금소역이 있었다.》고 설명(說明)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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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사당집 제1권 / 시(詩) / 제주성의 모습을 기록하여 돌아와서 아버님께 올리다〔記濟州城形 歸呈大人〕
외딴섬 보루 서쪽의 아득히 바라보이는 땅 : 別 島 堡 西 莽 蒼 地
한라산 북쪽 팔뚝이 바다로 드리워진 곳에 : 漢 挐 北 臂 垂 海 流
평평한 언덕 둘러싸고 중간에 국면이 열리니 : 平 岡 環 合 中 開 局
이곳에 바로 천 년 된 웅장한 고을이 있다네 : 乃 有 千 年 古 䧺 州
석성이 견고하고 치밀하여 방어해낼 만한데 : 石 城 鞏 緻 可 阻 守
그 높이 여러 길 되고 둘레는 오 리쯤이라네 : 數 丈 其 高 五 里 周
성벽 아래의 가시나무숲은 너무도 무성하고 : 城 下 枳 林 何 茂 密
성벽 위의 날렵한 용마루는 늘어선 문루이네 : 城 上 飛 甍 列 譙 樓
판교를 참호에 걸쳐서 인마가 다니게 하니 : 板 橋 駕 塹 通 人 馬
양쪽의 나무인형에 쇠사슬 갈고리 감겨있네 / 兩邊木偶鐵索鉤
성에 올라 쇠사슬 당기면 판교가 설치되니 / 登城引索橋拆開
급변이 있을 때에 외침을 막기 위함이라네 / 蓋云緩急備外憂
굽은 성첩 겹겹이 둘렀고 쇠 빗장 웅장하니 / 曲堞回複鐵關壯
육지의 고을이라도 이와 짝할 곳 드무리라 / 陸地州郡鮮此儔
바다 너머 완벽한 성곽과 서로 안팎이 되니 / 完城隔海相表裏
국가가 정히 남쪽 변방을 걱정하지 않겠네 / 國家政不憂南陬
북쪽 언덕의 석문이 무지개처럼 누웠으니 / 北岸石門虹霓卧
바닷물이 달려와서 성의 도량에 들어오네 / 海水走入一城溝
성 남쪽의 땅 형세는 산에 기대어 높으니 / 城南地勢依山高
또렷한 성의 형세는 앉아서도 알 수 있네 / 歷歷城形坐可收
성문 밖의 몇 리쯤에 연무당이 있으니 / 門外數里演武堂
이곳이 바로 훈련하던 장소가 아니던가 / 莫是是處閱操不
성 밖의 풍경은 두루 돌아볼 겨를 없으니 / 城外未暇周覽遍
우선 성 안에 나아가서 하나둘 찾아보리라 / 且就城裏一二求
관덕정이 큰 길거리 가에 있고 / 觀德亭在衢路上
관덕정 앞 백 보 밖에 과녁이 내걸렸네 / 亭前百步懸鵠帿
무기고 서쪽은 정사를 펼치는 관아이니 / 武庫西畔布政司
그 가운데 병영 건물은 깊고도 그윽하도다 / 其中營舍深而幽
겹겹 문과 에워싼 담장은 길을 헤매게 하고 / 重門繚垣迷所向
영롱한 단청 빛은 사람 눈을 어지럽게 하네 / 朱碧玲瓏盪人眸
연희각과 와선각이라는 두 누각 안에는 / 延曦卧仙兩閣裏
추위와 더위에 맞추어 고을 원이 앉아있네 / 凉燠隨宜坐州侯
누각 아래의 벽돌 정원은 넓고도 시원하고 / 閣下庭甓曠且闊
당의 처마는 밤에 푸른 휘장이 드리워지네 / 堂簷夜垂靑布幬
남쪽 담장의 푸른색은 과수원의 빛이니 / 南牆碧色是果園
천 그루 감귤나무 유자나무 뒤섞여있네 / 橘柚千樹相綢繆
누각 동쪽 가까운 곳에 망경루가 있으니 / 閣東近有望京樓
붉은 기둥 단청한 들보가 구름 밖에 떠있네 / 朱楹畫棟雲外浮
누각에 올라 만 리 바다를 굽어보노라니 / 登臨俯視萬里海
먼 곳의 손과 나그네가 시름을 풀 수 있네 / 遠客羈人可暢愁
넓은 처마가 정히 종각 북쪽에 서 있으니 / 廣宇正臨鐘閣北
애매헌이라 이름 한 곳은 고을 원의 휴식처네 / 軒名愛梅侯所游
매헌에 이르기 전에 동쪽으로 걸음 옮기면 / 未及梅軒東轉步
긴 행랑에는 여섯 개의 벽유가 늘어 서있네 / 長廊布列六碧油
약방의 동쪽 가에는 공장이 연이어져 있으니 / 藥房東邊工肆連
벽 위에는 활고자와 화살이 무수히 걸려있네 / 壁上無數掛彄鍭
또 들으니 그 중간에 홍화각이 있다 하고 / 又聞中有弘化閣
매헌 머리에 또 감영 청사가 있다고 하네 / 營廳更在梅軒頭
그 밖의 관아 건물들 모두 크고 화려하지만 / 其餘堂廨俱鉅麗
뒤섞여 있고 중첩되어 모두 구경하기 어렵네 / 錯落重疊難悉搜
북쪽에 객관이 있고 서쪽에 이아가 있으며 / 北有客館西貳衙
향교와 서원은 남쪽 언덕에 놓여 있다네 / 黌堂書院直南丘
서원 사당에 제향되는 분은 누구이던가 / 院祠躋享問誰某
충암공과 청음공과 송우암 공이라네 / 冲庵淸陰與宋尤
향교 건물 뒤에 두 개 당이 우뚝하니 / 黌堂之後屹兩堂
그 이름은 운주당과 찬주헌이라네 / 名以運籌及贊籌
여염집이 즐비하여 천 호는 될 만하고 / 閭閻櫛比可千戶
인구는 자못 내륙에 비길 만큼 많다네 / 人物頗與中土侔
길 양쪽 비석은 돌과 구리로 만들었는데 / 夾道荒碑石兼銅
그 옛날 어진 원님의 공덕이 남아 있네 / 古昔賢侯功德留
바위 표면에 붉은 글자로 누대 이름 새겼네 / 石面紅字臺名鏤
낙육재 가운데서 고을 선비를 길러 내니 / 樂育齋中養州士
건물의 건립은 옛 원님에서 비롯되었네 / 建置云自舊侯由
옛 원님 김공에게는 남다른 공적 많으니 / 舊侯金公多異績
곳곳을 중수하느라 부지런히 힘을 다했지 / 在在修葺勤度謀
성 동쪽 작은 정자가 국도에 임했으니 / 城東小榭臨官道
배전과 연사가 여기에서 거행되었네 / 拜箋延赦於焉庥
예전엔 노천에서 거행되어 몹시 설만하더니 / 昔時露設多褻慢
김공이 창건하여 그 일이 더욱 아름답다네 / 金公刱之事尤休
이 섬은 본래 탄환처럼 좁은 땅이지만 / 此島本是彈丸地
흥망의 유래는 수천 년을 이어져 왔네 / 興廢由來幾千秋
지난 일은 아득하여 누구에게 물을까 / 往事茫茫憑誰問
산의 구름과 바다 빛이 모두 유유하네 / 山雲海色同悠悠
○ 제주(濟州)에 제주성(濟州城)이 있었을 것이며, 그곳은 탐라(耽羅)라는 곳이다. 그렇다면 :
㉮《난중잡록(亂中雜錄)에서는 :〔緬 惟 海 東 之 耽 羅. 無 異 中 華 之 冀 北 : 멀리 생각건대, 해동(海東)의【바다 동쪽의】탐라(耽羅) 땅은, 중국의 기북(冀北)과 다름이 없어서〕라고 하였는데, 이게 무슨 말인가? 반도(半島) 땅 동(東)쪽에 탐라(耽羅)가 있었다는 말일까? 그러면 경상도(慶尙道) 동(東)쪽에 탐라(耽羅)가 있었다?
㉯ 제주(濟州)에서는 :《남쪽 담장의 푸른색은 과수원의 빛이니 : 南牆碧色是果園 / 천 그루 감귤나무 유자나무 뒤섞여있네 : 橘柚千樹相綢繆》라고 하였으니, 이곳의 토산물로 유명한 것이 바로 귤(橘)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반도(半島) 땅 제주(濟州)의 귤(橘)나무는 근세기(近世期)에 열도(列島)로부터 들어온 것이 시초(始初)라고 한다. 무엇이 거짓이며, 무엇이 진실(眞實)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
㉰ 제주(濟州)에는 :《여염집이 즐비하여 천 호는 될 만하고 : 閭閻櫛比可千戶 / 인구는 자못 내륙에 비길 만큼 많다네 : 人物頗與中土侔 / 길 양쪽 비석은 돌과 구리로 만들었는데 : 夾道荒碑石兼銅》라고 하였으니, 당시(當時) 제주(濟州)는 대도회지(大都會地)였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또 제주(濟州)에는 비석(碑石)이 많았는데, 돌과 구리(銅)로 만들어져 있었다는 이야기다. 이러한 당시(當時)의 제주(濟州)에 대한 설명(說明)이, 반도(半島) 땅 제주(濟州)와 어울릴 수 있을까? 전혀 아니올시다. 위에서 말하는 제주(濟州)성(城)에 대한 이야기는, 대륙조선(大陸朝鮮)의 제주(濟州)성(城)에 대한 설명(說明)이다.
○ 또 다른 제주(濟州)에 관한 시(詩) 한 수를 보면서, 제주(濟州) 곧 탐라(耽羅)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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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암(及菴)시집 민사평(閔思平) 충렬왕 21년(1295) 12월 29일 - 공민왕 8년(1359)
제1권 / 고시(古詩) / 제주에 가는 계명숙 진 을 보내며〔送季明叔之濟州 晉〕
탐라는 예부터 나라라고 일컬어졌으니 / 耽羅古稱國
산 기이하고 물 역시 빼어나네 / 山奇水亦秀
거주하는 백성들은 여전히 순박하고 / 居民尙淳朴
그 공물은 오직 귤과 유자라네 / 厥 貢 惟 橘 柚
문신을 하고 사냥에 능하며 / 文 身 能 射 獵
갈옷 입고 밭 갈고 김맬 줄 아네 / 卉服知耕耨
준마 만 필이 모여 있으니 / 驊 騮 萬 疋 屯
지금 천자의 해외 마구간일세 / 今天子外廏
선생은 충신을 따르니 / 先生仗忠信
여기에 살아도 무슨 누추함이 있으랴 / 居之亦何陋
급직은 회양 태수 직책을 하찮게 여겼고 / 汲直薄淮陽
장사정왕은 춤추는 소매가 긴 것을 꺼렸지만 / 長沙嫌舞袖
관직이 한가로워 한 가지 일도 없으니 / 官閑無一事
단지 진한 술을 마실 만하리라 / 只可飮醇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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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의 구절(句節) 역시(亦是)도, 제주(濟州) 곧 탐라(耽羅)에 관한 이야기지만, 도무지 이해(理解)하기 어려운 지형지세(地形地勢), 풍속(風俗)등을 말해주고 있다.
㉮ 귤(橘)은, 고려(高麗)때도 이곳의 토산물(土産物)이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데, 수백(數百)년이 흐른 뒤의 제주(濟州)와 관한 내용(內容), 역시(亦是) 똑같다.
㉯ 제주(濟州)인(人), 곧 탐라(耽羅)인(人)들이 사냥(狩獵)에 능하고, 문신(文身)을 좋아했다고? 고전(古典)에서 말하는 탐라(耽羅)와 반도(半島)의 탐라(耽羅)라는 곳은, 같은 곳이 『절대 아니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은, 『지형지리(地形地理), 방향(方向), 토산물(土産物)과 풍속(風俗)』등이다. 또 같은 점(同質性)이 전혀 없는, 이질(異質)스러움 뿐이다.
㉰『송(宋)과 왜(倭)와 고려(高麗)의 땅이, 개 이빨처럼 서로 엉켜있는 곳에 “탐라(耽羅)”가 있었다.』는 원사(元史)의 말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 오늘도, <반도사학(半島史學)=식민사학(植民史學)>의 추종자(追從者)들은, 옛 조선(朝鮮)의 정체성(正體性)을 깨기 위해, 많은 자(者)들을 동원(動員)하여, 반도(半島) 땅에, 옛 조선(朝鮮)의 유적(遺跡)을 심는데, 노력(努力)을 기울인다. 정권(政權)의 힘과 재벌(財閥)들의 후원(後援), 그리고 동료(同僚)들의 아낌없는 박수(拍手)속에 말이다. 나라의 주인(主人)들인 국민(國民)들은, 그저 멍하니 하늘만 바라본다. 무엇이 거짓인지, 무엇이 진실(眞實)인지, 분별(分別)할 수 없다. 이것을 어쩌란 말인가! 이게 문제(問題)인 것이다.
2015년 05월 31일 <글쓴이 : 문무(文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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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1987년 까지만 해도 제주도에서는 농장물이 없었습니다. 여수나 도시에서 사가지고 와서 팔았었지요.
소금도 자체적으로 만들지 못 해서 육지에서 사다가 썼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당시 음식들은 정말
싱거웠습니다. 그리고 12년후 가보니 수박도 제배를 해서 자체적으로 먹고 소금은 자체적으로 만들었는지
싸게 사가지고 온 것인지는 모르지만 음식도 간간하더군요. 물어보지 못 했는데 수박도 실하게 크더군요.
현지인들에게 물어보니 밭농사는 그리 오래 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있었을까요? 혹시 관광산업이 발달해서 다들 때려쳐서 없어진 것은 아닐까요? 무척 궁금한 부분입니다.
조선사에 기록된 탐라(제주)와 현 반도의 탐라(제주)는 전혀 다릅니다. 고전에서 말하는 탐라에 대한 설명은 누구라도 그것을 보기만 해도 알 수 있는 것인데, 우리나라 국민들은 전혀 개의치 않습니다. 그러려니 하는 것인지, 체념한 것인지, 분별할 수 없는 것인지, 하여튼 누구도 이에 대한 문제제기를 하지 않습니다. 반도의 현 제주는 당연히 옛 조선의 탐라였다는 고정관념을 탈피하지 못합니다. 아마도 이것은 공교육의 가장 큰 폐혜중의 하나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반도사학=식민사학의 이상적 목표는 조선인의 후예들이 조선역사의 진실을 알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이들이 바라는 대로 가고 있는 중입니다.
이곳에서 보내는 공물은 오로지 유자와 귤이라하니 한가지 분명한것은 기후가 제법 따듯한 지대임이 확실해 보입니다. 그런데도 대륙의 어느곳에 제주가 있어야할지 도무지 알 수 없습니다. 혹 탄환처럽 생긴 섬이 있다면 윗글에서 말한대로 바로 그곳이 제주이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추정 할 뿐이니 이것마저도 불확실한건 사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