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를 성숙시켜준 그레이스 홈 아이들>
권삼승 / 서양숙
우리들의 나이 40이 넘어 2000년 6월 29일 우리는 태국 치앙마이로 발걸음을 옮겼다. 170여년의 선교 역사를 가진 나라 그러나 기독교인은 1%가 안되는 나라, 더위 가운데 언어를 배우며 우리는 선교지에 조금 더 일찍 나오지 못했음을 주님께 죄송했다. 언어를 배우며 사역에 대한 고민을 하면서 사람을 키워야 한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언어를 배우며 매주 금요일이면 한국 음식을 마련하여 그레이스 홈 아이들을 찾아갔다. 올망 졸망한 눈이 큰 아이들, 언어를 거의 마쳐갈 무렵 그레이스 홈을 하시던 선교사님은 자신들은 미국으로 돌아 가야 한다며 우리가 남자 아이들을 맡아주기를 원하셨다. 우리가 언어 시험을 볼 때까지 기다려 주셨고 11명의 아이들과 함께 그레이스홈 사역을 시작하게 되었다
조그만 2층집을 빌려서 남자 아이들 11명 살다 보니. 이것 망가뜨리고 저것 망가뜨리고… 집을 빌리는 일이 어려웠다. 이사를 다니기 어려우니 조그만 집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기도했다. 우리의 생각보다 크신 하나님이 모든 과정을 은혜로 인도하셨다. 우리가 아는 사람도 없고, 한번도 방문한 적이 없는 광주 월광교회를 통해 현재의 자리에 건축을 할 수 있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이다.
<아이들 스스로 생각하고 묵상하고 말하게 해라!>
그레이스 홈을 건축한 후에 우리는 주일에는 우리 스스로 태국어로 예배를 드리기로 하였고, 평일에는 새벽5시 30분과 밤 7시에 모임과 예배를 드렸다. 아침에는 성경 본문을 같이 읽고, 본문에 나타난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오늘 하나님이 나에게 원하시는 것은 무엇인가? 오늘 내가 기도할 것은 무엇인가? 를 기록하게 하고 모두가 기록한 것을 그대로 읽도록 하였다. 그후부터 내가 설교 할 때 보다 아이들의 생각이 자라고 믿음이 자라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매일 저녁 모임 에서는 월요일은 묵상 나눔, 화요일은 찬양. 수요일은 하나님이나 이웃에게 잘못한 것을 나누는 쏘리 타임, 목요일은 한주간의 감사를 나누는 감사의 시간, 금요일은 중보 기도의 시간, 토요일은 집안일을 의논하는 가족회의. 주일은 설교를 듣고 깨달은 바를 나누는 시간으로 교체하여 모두가 매번 자신이 생각하고 깨달은 것을 발표하도록 하였다. 아내와 나는 말하기보다는 아이들의 말을 잘 경청하고 감사하는 시간이 되었다.
<육체적으로 연약한 나를 회복시켜주신 하나님>
그레이스 홈을 건축하고 아이들이 늘어났다. 단기도 없었고 우리는 아이들과 모든 시간을 같이했다. 방학 기간이면 학교처럼 시간표를 작성하여 영어, 성경, 수학 등 공부를 하고 오후에는 운동을 했다. 아이들은 늘 “아빠 축구하러 가요?” 했다. 사실 당시 나는 위가 좋지 않아 잘 먹지못했다. 그래도 같이 가자고 하니 가는 수 밖에. 오후 네시, 40도를 오르내리는 더위에 아이들과 함께 뛰었다. 첫날은 단 5분도 뛸 수 없었다. 서있는 것도 힘든 일인데 뛰라고. 한시간을 어떻게 버텼는지… 땀에 흠뼉 젖은 아이들과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사서 입에 물렸다.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축구를 하러 갔다. 나의 출전 시간도 늘었고 뛰는 시간도 늘었다. 중간에 구안와사가 오고 어려움도 있었지만 사춘기의 청소년들과 함께 뛰다 보니 어느새 내가 건강해졌다. 건강은 아이들과 함께한 나에게 주신 하나님의 선물이었다.
<국적이 없는 아이들도 대학에 가서 공부할 수 있다!>
초기 그레이스 홈에 온 아이들중에는 국적이 없는 아이들이 여럿 있었다. 그들은 중국이나 미얀마에서 태어나서 무작정 태국으로 넘어온 사람들이었다. 부모가 없는 아이도 있었고, 아버지가 없는 경우가 많았다. 태국 정부는 그들에게 바로 국적을 주기보다는 임시 거주증을 주어 그곳에서 사는데 문제가 없게 하였다. 20년이 넘게 거주하면 태국 국적을 준다고 한다.
하루는 신문을 보는데 버마 난민촌에 사는 학생이 대학에 들어가 공부한다는 기사가 났고 태국안에 있는 모든 청소년은 교육을 받을 권리가 있다고 써있었다. 마침 대학에 가야하는 가장 큰아이가 국적이 없어서 다른 지방으로 가야하나 생각하고 있던 차였다. 대학에 확인하니 국적이 없는 그런 학생을 받아본 적이 없어서 안되는 것으로 말하기에 시청의 담당자에게 알아보라고 하였다. 시청에 확인하니 국적이 없어도 가능하다고 하였다. 아이는 시험을 봐서 합격하게 되었고 국적이 없는 아이가 치앙마이 라차팟대학에 처음으로 들어가게 되었고 2학년때는 한국어 경시대회에서도 우승하였으나 국적이 없어 포상으로 받은 한국 방문의 기회를 것을 포기해야 했다. 국적이 없는 아이도 대학에 갈 수 있게 한 그것은 우리 아이들을 위해 이 땅에 마련해주신 특별한 은혜였다.
<사춘기 아이들의 넘치는 에너지를 건강하게 표현하기 위해 검도를 시작하다>
사춘기를심하게 하는 아이들이 늘어나자 매일 하는 축구로는 넘치는 그 에너지를 감당할 수 없었다. 방콕에서 이슬람 사역을 하는 임 선교사가 검도를 하고 있었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검도를 가르치면 좋겠다고 했는데 그의 제자가 치앙마이로 온다고 하였다. 그는 태국 챔피언을 하였고 동남아대회에서도 수상한 형제였다.
2007년 11월, 우리 아이들에게 검도를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당시 우리에게는 검도복이나 호구가 하나도 없었고 단지 죽도가 몇 자루만 있을 뿐이었다. 우리는 란나 검도 클럽이라 이름을 정하고 매주 월,수,금 오후 5시에 운동을 시작했다. 열심히 기본기를 쌓기 위해 최선을 다헀고 아이들도 호응했다. 검도를 가르치던 형제는 2년여만에 그만두었지만 우리끼리 연습은 계속되었다. 우리가 사범이 없다고 방콕의 임태순 선교사도, 치앙마이의 유일한 일본 침례교 선교사인 오사또 6단, 홍콩의 6단인 야마다와 이시가와 그리고 리코, 동경에서 이마이 5단, 자신의 휴가에 아내에게 가는 대신 우리를 찾아와준 무레이 6단 등 많은 사범들이 자비를 들여 찾아와 우리 아이들에게 특별 훈련을 시켜주셨다.
그들의 희생과 헌신에 보답하듯 아이들은 열심히 연습했고 탁월했다. 2010년 우리 아이들이 처음으로 NHK에 나오고 처음으로 일본 검도고등학교 학생인 챔피언을 이기고 챔피언이 되자 자신의 일처럼 기뻐해주었다. 한때는 초등부, 남중고부, 여성부와 남 일반부 등 4부문중 3개 부문에서 우승을 하기도 했다. 이후 9년 동안 우리가 번 갈아가며 태국 고등부 챔피언을 계속한 것은 그들의 수고와 헌신에 대한 작은 보답이었다. 우리는 작으나마 검도장을 지었고 아이들은 계속 바뀌었지만 지금도 검도는 계속되고 있다. 검도를 배우고 난후 사춘기의 아이들은 더 이상 사춘기를 심하게 앓지 않았다.
<아이들의 미래를 준비하기 위한 직업훈련학교>
치앙마이에는 회사나 공장들이 많이 없어서 성장한 청년들이나 대학을 졸업한 아이들이 적절한 직업을 찾기가 쉽지않다. 그래서 대부분은 방콕으로 직업을 찾아 떠나곤 한다. 우리는 아이들이 고등학생이 되면서 아이들에게 직업훈련을 계획했다. 한국에서 외국인 노동자 사역을 하시는 몇분이 아이들의 직업 교육을 위해 트립티 까페를 열도록 도와주셨다.
ㅌ립티 까페에서 아이들은 바리스타 교육은 물론이고 쿠키 만들기, 김밥이며 태국 음식을 만드는 법을 배웠다. 그리고 아이들은 시급을 받고 일하기도 하였고 스스로 매니저가 되어 커피숍을 운영해보게 했다. 치앙마이에서 취직하기 어려운 아이들에게 이것은 좋은 기회가 되었다. 이 과정을 마친 아이들이 이제는 여러 곳에서 매니저로 일하고 있다.
<우리는 아이들이 건강한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하여 그리스도인 가정을 이루게 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우리에게 왜 아이들을 신학교에 많이 보내지 않냐고 질문한다. 하지만 나는 아이들이 건강한 그리스도인이 되어 건강한 가정을 이루어 이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그래서 나는 아이들에게 신학을 하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한다. 진정한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면 자신의 삶을 기꺼이 하나님과 이웃을 향해 드리게 될 테니까. 그리고 그때 하나님의 부르심에 이이 스스로 응답 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매일 아침 스텝들과 같이 성경 공부를 하였는데 방식은 성경 본문을 읽고 본문에 나오는 질문들을 수없이 하고 스스로 대답하도록 하는 것이다. 특정한 주제가 있는 것도 아니지만 모든 것이 주제가 될 수도 있다. 이렇게 성경을 공부하던 스텝중 신학교를 가고 싶다고 하여 환영하며 보냈다. 하지만 졸업을 해도 우리와 다시 일한다는 보장은 해주지 않았다. 왜냐하면 소명은 본인이 하나님께 받는 것이라고 믿고 갈 곳이 없으면 우리와 함께 하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말은 안했다. 늦은 나이임에도 열심히 공부를 하였고 일본 선교사가 같이 일하자고 하여 같이 일하다가 사고로 먼저 소천하였다.
감사하게도 그레이스 홈에서 성장한 아이들 대부분이 대학에 진학하게 되었고 다양한 직업을 갖게 되었다. 초기에는 한국어 전공자가 많았지만 물리, 화학, 간호학, 영어, 신학, 디자인 등 다양 하게 전공을 하였고, 한 아이는 디자인으로 중국에서 대학원을 마치고 돌아와 외국인 회사에서 일하고 있다.
우리 아이들중에는 자신들의 고향에 사역자가 없음을 안타까워하며 컴패션 간사로 가르치며 사역하였던 아이도 있었고, 성경학교를 졸업하고 사역자로 일하는 아이도, 한국어를 전공하고 CGN TV에서 통역을 하며 일하는 아이, 그리고 한 아이는 라오스에 2년간 단기 선교사로 파송되어 그곳의 몽족교회를 섬기며 대학에 북까페를 개설하여 바리스타를 양성하였고 라오스의 청년들에게 검도를 가르치고 그곳에 란쌍 검도클럽을 설립해주고 돌아왔다. 최근에는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을 잘 다니던 아이가 YM 훈련을 받고 2년 동안 간사로 헌신하여 선교사처럼 후원을 받으며 사역을 감당하고 있다.
우리는 지난 23여년을 부모가 없거나 부모의 도움을 받지 못하는 아이들과 함께 했다. 우리가 부족함이 많은 사람들이지만 우리는 그들이 일어설 수 있도록 버팀목이 되어주기를 원했다. 그들이 이 사회에서 잘 적응하며 살아갈 수 있으면 했다. 하나님은 우리의 작은 몸짓에도 기꺼이 커다란 은혜를 부어 주시며 살아계신 하나님이심을 온전히 나타내 보이셨다. 우리가 아이들을 돌보고 섬긴다고 했으나 생각해보니 하나님은 그레이스 홈 사역을 통해서 부족한 우리를 훈련시키시고 성장시키기 원하셨다는 것을 세월이 한참 지난 후에야 깨달아 알게 되었다. 이것은 말로다 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이다. 남은 날도 그분의 은혜에 묻혀 살고 싶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