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어 있음을 이루는 것이 궁극이고 고요함을 지키는 것이 독실함이다.(비어 았음을 이루는 것이 사물의 궁극과 독실함이고, 고요함을 지키는 것이 사물의 참과 바름이라는 말이다.)
만물이 다 함께 흥기할 때에,(만물이 움직이고,흥기하며,낳고,그리고 성장한다.) 나는 비어 있음과 고요함으로 만물이 되돌아가는 것을 살펴 헤아린다.(‘비어 있음과 고요함’으로 만물이 되돌아가는 것을 살펴 헤아린다. ‘존재하는 것들‘은 모두 비어 있음에서 생기고, 움직임은 모두 고요함에서 일어난다. 그러므로 만물이 다 함께 움직일지라도 끝내는 비어 있음과 고요함으로 되돌아가니, 바로 사물의 궁극과 독실함이다.
사물들이 무성하지만 제각기 원래의 뿌리로 되돌아간다.(각각 자신이 시작된 곳으로 되돌아간다.) 뿌리로 되돌아가는 것을 고요함이라고 하고 이것을 일러 ’명‘을 회복한다고 한다. 명을 회복하는 것을 ’치우치지 않음‘이라고 하고,(뿌리로 되돌아가니 고요하다. 그러므로 고요함이라고 했다. 고요하니 명을 회복한다. 그러므로 ”명을 회복한다“라고 했다. 명을 회복하면 성명의 치우치지 않음을 얻는다. 그러므로 치우치지 않음이라고 했다.)
치우치지 않음을 아는 것을 ’밝음‘이라고 한다. 치우치지 않음을 알지 못하면 함부로 움직여서 흉하게 된다.(치우치지 않음이란 편중되지 않고 드러나지 않으며, 밝거나 어두운 모습도 없고 따뜻하거나 쌀쌀한 흔적도 없다. 그러므로 ”치우치지 않음을 아는 것을 밝음이라고 한다“라고 했다. 이것을 회복해야만 만물을 포용하고 통달할 수 있어서 용납하지 않는 것이 없다. 이것을 상실하고 나아가면 잘못되어 분별에 빠지니, 사물이 분별에 얽매인다. 그러므로 ”치우치지 않음을 알지 못하면 함부로 움직여서 흉하게 된다“라고 말했다. 치우치지 않음을 알면 포용하고(포용하고 통달하지 않는 것이 없다), 포용하면 이에 공평해지며(포용하고 통달하지 않는 것이 없게 되니, 이에 더없이 넓은 공평함에 이른다.), 공평하면 이에 왕이 되고(더없이 공평함에 이르게 되니, 이에 두루 미치지 않는 곳이 없게 된다.), 왕이 되면 이에 하늘처럼 되며(두루 미치지 않는 곳이 없게 되니, 그제야 하늘과 함께함에 이른다.), 하늘처럼 되면 이에 도를 체득하게 되고(하늘과 덕을 합치하게 되고 도를 체득하여 크게 통달하게 되니, 이에 ’비어 있음‘을 극진하게 함에 이른다.), 도를 체득하면 이에 영원하니(’비어 있음‘을 극진하게 하고 도의 치우치지 않음을 터득하게 되니 이에 끝없음에 이른다.), 죽을 때까지 위태롭지 않다.(없음이란 물과 불이 해칠 수 없고, 쇠나 돌이 부수어 버릴 수 없다. 그것을 마음에 사용하면 호랑이나 외뿔소가 이빨로 물어뜯고 뿔로 받을 곳이 없으며, 창이나 칼이 창끝으로 찌르고 칼날로 벨 곳이 없으니 무슨 위태로움이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