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7장을 보면 임마누엘 아기가 나타납니다. 특별히 아하스 왕이 언급이 되는데, 그는 임마누엘, 즉 거룩한 씨가 아닙니다. 주전 735년 아시리아를 대적하기 위해 아람과 북이스라엘(에브라임) 연합 전선을 형성하고, 이들이 남유다를 공격합니다. 그때 아하스 왕은 아람과 북이스라엘을 선택할지, 아시리아를 선택할지의 갈림길에 섭니다. 겉으로 드러난 것은 이것이고, 실제는 하나님을 선택하는가에 대한 거룩한 씨의 일종 시험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거부합니다. 그러므로 아하스 왕은 거룩한 씨가 아니고 임마누엘 아기를 통하여 거룩한 씨가 연결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임마누엘”이라는 말은 “임”(함께), “아누”(우리), 엘(하나님)의 합성어로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God with us)로서 하나님의 임재, 동행을 의미합니다.
이사야 11장을 보면 “싹”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한 싹”은 이사야 6장의 “거룩한 씨”가 “싹”이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새의 줄기”는 “그루터기”로 번역이 가능합니다. 왜 “다윗”이 아니고 “이새”인가? 다윗의 아버지로부터 새롭게 시작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다윗을 낳았던 이새에서 나옵니다. 다윗을 닮은 사람이 아니라 다윗과 같은 사람이 나옵니다. “한 싹”이 다윗이 아니라 제2의 다윗이 될 것을 말씀합니다.
2절을 보면 “싹” 위에 “하나님의 영”이 임합니다. 사무엘상 16:13절을 보면 사무엘이 다윗에게 기름을 부었더니 여호와의 영이 임합니다. 여기서는 제2의 다윗에게도 하나님의 영이 임합니다.
하나님의 영이 임하므로 능력을 줍니다. 여호와의 영이 주는 능력이 어떤 것들인지 풀어서 설명합니다. “지혜와 총명, 모략과 재능,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를 하나님의 영이 공급하십니다.
원문을 보면 “지혜(호크마)와 총명(분별력), “명철”(깨닫다), 모략(에짜, 모사 요에쯔의 명사형, 조언, 지혜), 재능(게부라, 전능하신으로 번역된 깁보르의 명사형, 전쟁하는 능력), 여호와 경외(이르아, 경외, 두려움)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가지지 못한 것을 하나님의 영이 공급하여 줍니다. 불가능한 것을, 가능한 것을 공급하심으로 일하는 것으로 말씀합니다.
4절의“공의”, “정직”은 “정의”와 “공의”를 의미합니다. “심판하고”(샤파트), “판단하고”(아카드)는 심판 용어가 아니고 하나님의 통치가 실현되는 것을 의미합니다(이사야 2:4). 새로운 통치자는 “정의”와 “공의”로 판단합니다. 가난한 자에게 임하는 회복과 구원입니다.
하반 절은 “그의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 그의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일 것이며”라고 말씀합니다. 이는 악한 자들에 대한 심판입니다. “입의 막대기”, “입술의 기운”으로 심판합니다. 새로운 이상적인 통치자는 약한 자를 존중하고, 악한 자는 심판합니다.
5절의 “공의”와 “성실”(에무나 – 신실함, 믿음직함/하바국 2:4)로 구원의 역사를 성취합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싹”에 하나님의 영이 임하므로 가능합니다.
11:6~8절은 하나님의 영이 공급됨으로 나타나는 결과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왕국이 회복됩니다. 즉, 에덴동산이 회복됩니다. 하나님의 왕국이 궁극적으로 회복이 되어서 평화가 찾아옵니다.
특별히 인간과 동물의 화평을 보여줍니다. 현재의 모든 피조물은 사람의 죄로 인하여 모든 관계가 깨졌습니다. 창세기 1:30절을 보면 사람과 동물이 초식동물이었습니다. 육식하지 않았습니다. 이때는 평화로웠습니다.
그런데 노아의 대홍수 이후에 사람과 동물 사이에 평화의 관계가 깨집니다. 창세기 9:2~3절을 보면 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땅에 기는 모든 것과 바다의 물고기가 사람을 두려워하고 무서워합니다. 홍수 이후에 육식이 허용되었기 때문입니다. 타락 이후에 사람과 동물 관계가 깨진 것입니다.
이상적인 평화 세상은 약자가 강자를 두려워하지 않는 세상입니다. 이사야 65:17, 25절을 보면 정복과 지배가 없는 세상입니다. 사자가 소처럼 짚을 먹어야 합니다. 사자가 불편합니다. 뱀이 흙을 양식으로 먹습니다. 뱀이 불편합니다.
힘 가진 자가 힘을 내려놓는 것에서 시작이 됩니다. 자기 비움에서 시작합니다. 이리와 표범이 가지는 포학성, 맹폭성, 육식성, 야식성 등 이것을 버려야 평화가 이루어집니다.
9절을 보면 “여호와를 아는 지식”에서 “지식”은 히브리어로 “데아흐”입니다. “싹”이 보고 듣게 되는 것뿐만 아니라 지식을 가지게 됩니다. 공동체가 지식으로 충만하게 됩니다. 지식이 확장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확장은 열방의 회복입니다(10~16절)
하나님의 영을 가진 통치자가 오면, 평화의 나라를 이룹니다. 평화의 나라는 하나님의 영이 임하는 나라, 힘 있는 사람이 자기 비움으로 자기 부정을 하는 나라, 가난한 사람의 눈물을 닦아 주는 나라, 억울함이 신원 되고 해결 받는 나라입니다. 인애/공의/의가 통치하는 나라입니다.
평화의 나라는 원수가 없는 것이 아니라, 원수 감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세상은 저 인간 없어지면 또 다른 사람이 옵니다. 적대감이 사라져야 합니다. 같이 공존해야 합니다. 이런 이상적인 통치자가 마태복음 1:20절을 보면 하나님의 영으로 잉태합니다. 하나님의 영이 와서 공생애를 시작합니다. 자기 비움, 자기 버림을 보입니다. 죽기까지 순종합니다(빌립보서 2:5~11). 가난한 자를 위해 사십니다(고린도후서 8:9). 원수 적대감을 몰아냅니다(누가복음 23:34). 예수님은 평화의 사도로, 평화의 삶을 살았습니다(마태복음 26:52~53). 평화 나라는 현재 진행형이고 재림 때까지 평화의 나라는 이루어집니다.
고린도후서 6:1절을 보면 하나님은 평화의 동역자로 우리를,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평화는 선물(gift)인 동시에 우리가 힘써야 할 책임(task)입니다. 평화는 선물이기에 위에서 와야 합니다. 이사야 32:15절을 보면 “마침내 위에서부터 영을 우리에게 붙어 주시리니 광야가 아름다운 밭이 되며 아름다운 밭을 숲으로 여기게 되리라”라고 말씀합니다.
인애/공의/의의 열매는 평강입니다. 우리가 인애/공의/의를 행할 때 열매로 평강이 주어집니다. 그러므로 정의를 이루는 것이 평화로 가는 지름길입니다. 임마누엘이신 주님의 평강과 사랑이 우리 교회 안에, 가정 안에, 민족과 열방 가운데 넘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