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로베스 피에르의 일생
프랑스혁명 기의 정치가로서 프랑스 북부의 아라스 출생이다. 아버지는 변호사였는데 어머니가 사망한 후에 행방을 감추었다. 외조부모의 손에서 자라나면서 불행한 소년시절을 겪은 뒤, 파리의 루이르그랑학원에서 장학생으로 법률을 배우고 1781년 아라스에 돌아와 변호사가 되었다. 오래지 않아 명성을 얻었고 주교관구의 성직자에 대한 사법권을 갖는 주교법원(Salle Episcopale) 판사로 임명되었다. 한편 개인적으로 법률사무소를 운영해 넉넉한 수입을 올렸다.
1788년 무렵에 이미 이타적(利他的) 행위로 유명해졌다. 가난한 사람들을 대변하는 변호사로 활동하면서 〈뒤퐁 씨를 위한 비망록 Memoire pour le Sieur Dupond〉이라는 논문에서 왕권 절대주의와 제멋대로인 재판에 항의함으로써 특권계급에 경종을 울렸다. 1614년 이래 소집되지 않았던 삼부회 소집이 선포되자 〈아르투아 삼부회를 개혁할 필요성에 관해 아르투아 민중들에게 드리는 글〉이라는 제목의 호소문을 냈다. 1789년 3월 아라스의 시민들은 로베스피에르를 대표의 1사람으로 뽑았으며 아르투아 지구의 제3신분(평민계급)회는 아르투아 8인 대표위원 가운데 5번째로 그를 선출했다. 이렇게 해서 로베스피에르는 30세의 나이로 정치활동을 시작했다.
1789년 삼부회(三部會) 의원에 당선되고, 혁명이 일어나자 자코뱅당(黨)에 가입하였다. 의회에서는 소수 민주파에 속해 있었으며 국왕의 거부권에 반대하였다. 1791년 왕 일가가 바렌으로 도망친 것을 계기로 입헌왕정파가 자코뱅당에서 탈퇴하였을 때, 자코뱅당에 남아 그 재건에 힘써 사실상의 당 지도자가 되었다.
1792년 4월 혁명전쟁이 일어나려 할 때, 재야(在野)의 몸으로 반대성명을 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왕정폐지의 계기가 된 1792년 8월 10일 봉기 후에 급진적인 사건 처리안을 기초하여, 파리코뮌으로부터도 대표로 추대되었다. 즉, 프랑스가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에 선전포고를 했을 때 로베스피에르는 프랑스 군대가 패배하리라고 예견했으므로 적군의 침입이 눈앞에 닥치자 민중들은 그에게로 모여들었다. 로베스피에르는 봉기의 목표를 명확히 제시했지만 봉기를 지지하는 것은 망설였으며, 지방에서 모여든 의용군들에게 "오직 법률의 칼로써 공동의 적과 싸우자"고 호소했다. 그럼에도 마침내 1792년 8월 10일 봉기가 일어났으며 이때 로베스피에르는 튈르리 궁 공격에 가담하지 않았다. 그러나 같은 날 오후 로베스피에르가 속한 '레피크' 지구(파리의 소단위 행정구역)는 그를 봉기 지도기관인 코뮌 정부에 파견할 대표로 지명했다.
그 해 9월 국민공회(혁명의회)에는 파리에서 1위로 당선되었다. 당통 및 마라와 더불어 산악파(山岳派) 거두로 일컬어졌다. 1793년 6월 2일 산악파가 독재체제를 완성한 후로는 농촌의 봉건제도 불식, 소농민과 소생산자층에 바탕을 둔 국가체제의 실현을 서둘러, 공안위원회에 가입하여 공포정치를 추진하였고, 1794년 3월 자코뱅당 좌파인 에베르파(派)를 반란죄의 명목으로 숙청하였다. 이어 4월 우파인 당통파(派)를 일소하여 독재체제를 완성하였다. 즉,
지롱드당이 몰락하자 산악당이 나라의 절박한 처지를 해결하는 과제를 떠맡았다. 당시 상황은 안으로는 연방주의 운동과 북서부 방데에서 일어난 반(反)혁명 반란으로 위협받고 있었고, 밖으로는 반프랑스 연합군과 대치하고 있었으므로 혁명의 승리를 위해서는 모든 역량을 동원해야 했다. 로베스피에르는 필요한 것은 바로 '단일한 하나의 의지'(une volonte une)라고 일기에 썼는데 이러한 독재 권력이 혁명정부의 성격을 규정했다. 혁명정부의 필수 권력기관들이 창설되고 로베스피에르가 직접 나서서 그 기관들을 움직였다. 1793년 7월 27일 로베스피에르는 4월에 창설된 공안위원회에서 직책을 맡았다. 동료들이 외교사절로 떠나 있거나 특별한 임무에 몰두해 있는 동안 로베스피에르는 자코뱅파 단체와 자경단을 동원해 혁명세력의 분열을 방지하기 위해 애썼다. 이후 그의 활동은 전반적인 정부활동과 떼놓을 수 없는 관계에 있었다. 자코뱅당 당수이자 국민공회 의장으로 있으면서 로베스피에르는 식량난을 이용해 파리 시민들을 선동한, '앙라제'(Enrages:'성난 사람들'이라는 뜻)라고 하는 파리 급진주의자들의 음모를 적발해냈다. 로베스피에르는 9월 5일 시위군중들에게 모든 식료품의 최고가격을 정하고 국내 치안에 혁명민병대를 동원해 반혁명분자와 곡물 사재기 행위를 단속하겠다고 약속했다. 대규모 징병, 독재적 경제관리, 전면전을 위해 로베스피에르는 공포정치를 강화할 것을 촉구했다. 그러나 무분별한 처형에는 반대했으며, 지롱드 당원과 국왕의 누이를 체포하는 데 대해 항의했던 의원들을 보호했다. 로베스피에르는 '순찰의원'(지방의 반대파를 분쇄하기 위해서 파견된 국민공회 의원들)이 저지르는 학살행위에 염증을 느끼고 '혁명을 모독하는' 그들의 소환을 요구했다.
로베스피에르는 혁명력 원년 니보즈(눈의 달) 5일(1793. 12. 25[1793년부터 프랑스 혁명력을 썼음])의 보고서에서 국민공회의 집단적 독재와 행정의 중앙집중화 및 지방 관헌의 축출을 정당화하면서 정부를 위협하는 각양각색의 파벌들에 대항했다. 에베르파(派), 코르들리에파, 투쟁적인 대중들은 모두가 더욱 급진적인 조치를 요구했으며 비(非)그리스도교화 조처와 식량 매점매석 행위자 처벌을 주장했다. 이들의 지나친 행위는 농민들을 겁먹게 했으며 반혁명 용의자의 재산을 몰수해 빈민들에게 분배하겠다고 밝힌 혁명력 2년 방토즈(바람의 달) 8일(1794. 2. 26)과 13일(3. 3)의 포고령도 농민들을 만족시킬 수 없었다.
1개월 동안 병을 앓은 뒤 자코뱅 클럽의 모임에 다시 모습을 나타낸 로베스피에르는 급진 혁명주의자 자크 르네 에베르와 그 지지자들을 고발했으며 이들은 3월 외국인 앞잡이 몇 명과 함께 처형당했다. 조르주 당통처럼 공포정치와 전쟁의 중단을 바라던 사람들은 공안위원회의 정책을 점점 더 격렬하게 비난했다. 로베스피에르는 여전히 망설이는 태도를 보이면서도 그같은 이른바 관용파들을 거스르는 방향으로 국민공회를 이끌어갔다. 당통파 지도자들과 의원들은 프랑스 동인도회사를 청산할 때 불명예스러운 행동을 저질렀다는 죄목으로 4월 단두대의 제물이 되었다.
루소식(式)의 이신론자(理神論者)였던 로베스피에르는 반(反)그리스도교 운동과 이성숭배라는 '가면무도회'를 인정하지 않았다. 5월 국민공회에 제출한 한 보고서에서 로베스피에르는 신의 존재와 영혼의 불멸성을 긍정했으며 혁명세력을 하나의 시민종교와 '최고 존재'에 대한 신앙으로 결집시키고자 했다. 로베스피에르가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는 사실은, 5월 22일 그의 목숨을 노린 앙리 아드미라의 계획이 실패한 뒤 그가 대중의 열렬한 환호를 받았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다. 국민공회는 6월 4일, 220표 중 216표의 지지로 로베스피에르를 의장에 선출했다. 국민공회 의장으로서 로베스피에르는 6월 8일 튈르리 공원에서 최고 존재를 기리는 제전을 벌였는데 이는 그의 적들에게 그를 공격할 또다른 무기를 제공한 셈이었다.
7월 27일 부르주아 공화파를 중심으로 하는 의원들의 반격을 받고, 28일 생쥐스트 등과 함께 처형되었다. 즉, 혁명 체제의 모든 적들을 심판하기 위해 1793년 3월에 창설한 혁명재판소를 개편하는 프레리알(초원의 달) 22일(6. 10)의 법령이 공포된 뒤 로베스피에르에 대한 반대는 더욱 커져갔다. 이 반대세력은 로베스피에르가 공격했던 '순찰의원'들이 이끌고 있었다. 로베스피에르의 영향력은 공안위원회 내에서도 도전받았으며 로베스피에르, 조르주 쿠통, 루이 드 생 쥐스트가 이끄는 경찰총국에 무시당했다고 느끼고 있던 보안위원회는 훨씬 더 큰 적대감을 보였다. 찻집에서조차 로베스피에르는 온건파라는 비난을 들었고 재무장관인 조제프 캉봉도 로베스피에르를 싫어했다.
로베스피에르는 입법의회와 자코뱅 클럽에서의 쉴 틈 없는 업무와 빈번한 연설(회기 시작부터 총 450회 가량)에 쫓겨 건강이 나빠졌고 신경과민에 쌀쌀한 성격으로 변해갔다. 왕당파뿐 아니라 산악당 동료들까지 갖은 중상모략과 독재자라는 비난을 퍼뜨려 마음이 상한 로베스피에르는 국민공회를 떠났으며 6월 28일부터는 공안위원회에서도 물러나 자코뱅 클럽에서만 반혁명 음모를 규탄하는 연설을 했다. 또한 프랑스가 거둔 승전에도 불구하고 대중들의 생활은 여전히 곤궁했으며 이에 따라 그의 지지는 점점 떨어졌다. 몇몇 직위에서 은퇴한 후 로베스피에르는 1794년 여름 공포정치의 종말과 반대파의 급격한 부상을 한꺼번에 맞이했다.
로베스피에르는 다시 여론의 지지를 얻을 목적으로 7월 23일 공안위원회와 7월 26일 국민공회에 모습을 나타내 자신에 대한 공정한 판단을 호소했다. 로베스피에르의 마지막 연설은 처음에는 박수갈채를 받았으나 곧이어 동요가 일면서 끝내는 의회의 대다수가 그에게 등을 돌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날 저녁 자코뱅 클럽에서 뜨거운 환영을 받았지만 다음날 적대자들은 로베스피에르의 입법 의회 연설을 저지하는 데 성공했으며 입법의회는 로베스피에르와 그의 동생 오귀스탱 및 동료 3명을 고발했다. 로베스피에르는 뤽상부르 감옥으로 호송되었으나 그곳의 간수장은 그를 투옥시키기를 거부했다.
그뒤 로베스피에르는 시청으로 갔는데 마음만 먹었다면 그곳에서 투쟁을 계속 벌여나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파리 코뮌 정부가 시내 몇몇 지구에 무장부대를 소집해 놓고 시청에서 그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로베스피에르는 봉기 주도를 거부했고 충성스러운 그의 부대도 결국은 해산하기 시작했다. 국민공회에 의해 범법자로 선포된 로베스피에르는 시청에서 스스로 자신의 턱에 권총을 쏴 중상을 입음으로써 친구들을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국민공회의 병사들은 시청을 공격해 손쉽게 로베스피에르와 그 추종자들을 생포했다. 테르미도르 10일(7. 28) 저녁, 유죄선고를 받은 사람들 중 로베스피에르를 비롯한 최초의 22인이 환호하는 군중들 앞에서 혁명광장(지금의 콩코르드 광장)의 단두대에 올랐다. 그뒤 모두 108명이 로베스피에르의 이념을 지지한 죄로 죽었다. 그는 청렴결백하였으나 그 반면 남에게는 냉담한 인상을 주었다. 일생동안 독신으로 정치에만 열중하여, 루소를 숭배하고, 소(小)부르주아적 혁신을 수행하려다 중도에서 쓰러졌다.
자코뱅당
본래는 본부를 파리의 생토노레가(街)의 자코뱅 수도원에 둔 헌법옹호를 위한 의원과 시민의 조직인 ‘헌법을 위한 우인(友人)의 모임’에 불과하였다. 1791년 7월 입헌왕정파가 탈회하여 푀양클럽을 창설하여 남아 있는 로베스피에르, 페시옹 등을 중심으로 소시민 ·상퀼로트 등 저계급층과의 접촉이 긴밀화하였다. 1792년 8월 10일 파리 시민의 봉기를 기화로 혁명을 사회혁명으로까지 추진시키고자 하는 강령을 수립하였다. 동시에 혁명전쟁 수행을 위하여 지롱드당의 자유주의 경제, 부르주아 본위의 정책에 대항하여 인민주의의 입장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파리의 자치시회(自治市會), 각구 위원회에 동지들을 많이 모아 산악당 독재의 사회기반을 구성하였다. 독재완료 후 지방 지부는 약 5000개, 당원은 50만이라고 하였다. 다만 산악이 제패함에 따라서 우파의 당통과 좌파의 에베르 등 사이에 대립이 생겨 결국 공안 ·보안 양 위원회를 수중에 넣은 로베스피에르, 생쥐스트 등 관료파에게 지도권이 넘어갔다. 이른바 자코뱅주의란 로베스피에르 등 고유 당원의 정치구상으로서 덕(德)을 공화정의 중추로 하고 근로에 의하여 공사(公私) 모두 충실한 생활을 하는 소농민이나 소생산자층의 국가를 수립하는 것을 이상으로 하는 것이었다. 로베스피에르 사후에도 잔존하여 총재정부하에서도 자주 반란을 계획하였다.
출처-네이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