道家수련과 전통무예의 고수
박 현
4살 때부터 산중에서 스승께 호흡법, 무예, 진법, 산차(차력) 등 좌방 도술을 배웠다는 박현씨는 그러나 현실세계에 내려와서는 고려대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은 지식인으로 ‘위장해’ 살아가고 있다.
안영배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한국의 도가(道家)는 크게 두 흐름이 있다. 좌방도가와 우방도가가 그것이다. 수레인 몸을 잘 달궈나가면 수레에 탄 마음도 저절로 달궈 깨닫게 된다는 게 좌방도가 수련의 핵심이라면, 아예 처음부터 마음을 잘 다스리면 몸인 수레도 달궈진다는 게 우방도가 수련의 고갱이다.
두 흐름의 수련이 마음을 깨치는 데 목표를 두고 있지만, 방법론이 다르다보니 세월이 흐를수록 수련자들의 심성이나 신분도 뚜렷하게 구별됐다. 직접적으로 마음의 세계를 추구하는 것은 수련의 대중화 작업에 한계가 있다고 생각한 좌방도가 사람들은 무예니 진법(陳法, 주변 환경의 기운을 돌리는 술법)이니 산차(차력)를 표면에 들고 세상에 나섰다. 그러다 보니 조선의 신분사회에서 불이익을 받는 중류층이나 아예 글을 배우지 못한 하층민이 다수 좌방도가에 몰려들었다.
반면에 고요히 앉아서 마음을 다스리는 데 열중하는 우방도가 사람들은 혼자서 양생법을 익히는 편이었다. 또 이들은 대개 조선의 유가(儒家) 양반층이었으므로 신분상 드러내놓고 도가수련을 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화담 서경덕, 남명 조식 등이 우방도가 계열에 가까웠던 인물이다.
좌방도가는 그 근본을 고려 말 이비(李裨, 흔히 이고로 잘못 알려져 있음)에게 둔다. 일명 ‘자하선인(紫蝦仙人)’이라 불리는 그는 태백산 구화동에서 살았다 전해지는데, 그때까지 흐트러졌던 수련의 체계를 바로잡아 좌방수련을 중창(重創)했다 한다.
그런데 자하선인이 남긴 좌방 선맥을 정통으로 이어받았다고 분명하게 밝히는 사람이 있다. 현재 ‘바나리’라는 닦음 공동체 모임을 이끄는 박현씨(朴賢·한국학연구소장)가 그 주인공. 고려대 대학원에서 한국사를 전공한 현대 지식인인 그가, 무예와 진법 등을 얘기하는 좌방수련의 계승자임을 자처하는 것이 흥미롭기도 하다. 아무튼 그가 처음으로 대중에 공개한다는 좌방수련의 계보는 도가 역사를 연구하는데 자료적 가치가 있으므로, 다소 길지만 소개하기로 한다.
“여말 선초에 ‘부루아니’ 자하선인께서 ‘비루비니’ 공공(空空)선생에게 좌방수련 맥을 전했습니다. 스승과 제자 사이인 두 분께서 남긴 글이 요즘 세상에 전해지는 ‘신교총화’라는 책입니다. 공공선생은 ‘아시가비’ 무갑(無甲)선생께 맥을 전하셨고, 다시 ‘마니가비’ 고중(古中)에게 전해집니다. 고중선생은 세상에 격암 남사고(南師古)로 알려진 분으로 제 고향이기도 한 일월산에서 수도하셨는데, 역학 풍수 천문 복서 등에 달통한 사람으로 조선 중기 사회의 지식인이었습니다.
다음으로 그 맥을 이은 분이 ‘수바가미’ 은신(隱身)이고, 그 다음이 ‘서이도리’ 삼주(三柱)선생인데 이분이 바로 저의 사조(師祖)입니다. 이분은 한국에서 우방 수련을 표방하는 한 단체의 사조 이야기에도 잠깐 스쳐가듯 등장합니다. 당시만 해도 좌방과 우방이 서로 연결고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희 전통은 자하선생께서 정리해 남기신 840자 ‘천부경습유’에 따라, 스승이 4명의 제자에게 맥을 전하는 것입니다. 삼주 사조께서는 ‘큰 대’자 돌림으로 대공(大共) 대초(大草) 대연(大燕) 대전(大全)을 제자로 두었고, 이중 막내인 ‘하나오니’ 대전선생이 그 맥을 받았습니다. 대 자 돌림의 제 사백부님들은 동학전쟁 때 전봉준, 서장옥 계열에 서서 잠시 활동하기도 했습니다. 좌방도가 사람들은 고통받는 현실을 외면하지 않는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대전선생은 관동(關東)선생께 맥을 전했는데 바로 저의 스승입니다. 스승님은 산와 진법을 하는 사람 정도로만 세상에 알려져 있었고, 원(元) 자 돌림의 제자 4사람을 두었는데, 막내인 ‘아라가비’ 원중(元中)이 바로 저입니다. 저는 4살 때(1960년)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스승님을 만나게 됐습니다.”
박현씨의 부친이 철부지 어린 아들의 손을 이끌어 좌방수련 ‘도사’에게 맡겼다는 것이 이채로운 대목. 그러나 영해 박씨인 그의 가계(家系)를 훑어보면 그럴 만한 사연이 있다. 그의 고조부, 증조부는 동학 활동과 관련해 여기저기 숨어다니다가 조 부대에는 경북 영양의 삼의계곡이란 곳에 은거했다. 수련공부를 한 증조부(박종덕)의 영향을 많이 받은 아버지(박성호)는 8·15광복과 6·25전쟁을 겪으면서 더 깊은 산골인 일월산 자락으로 들어가 집 한칸 지어놓고 살게 된다. 이때 아버지는 ‘선도(仙道)선생’이 근방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아들인 박현을 맡긴 것이다. 60년대 초에 선도선생에게 맡겨진 이 어린이는 어떻게 공부했을까?
4살 때 입문한 좌방수련
“처음에는 아버지와 동갑인 맏사형으로부터 글 공부와 호흡 공부를 했어요. 한문은 천자문부터 시작했는데 8살까지 사서삼경을 다 외웠습니다. 그리고 호흡공부를 해 영적인 체험 정도는 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8살부터 16살까지는 스승님께 본격적인 호흡 공부와 함께 무예, 진법, 의학(치료학)을 배웠고, 그 이후부터는 자력으로 공부했습니다.”
그는 때때로 대중을 상대로 한국학 강의를 하면서 한문 경전을 보지 않고 줄줄 칠판에 써나간다. 어릴 때 외운 경전이 머릿속에 컴퓨터처럼 저장돼 있기 때문이다. 그는 도가의 학문 습득법은 일반인의 그것과 차이가 있다고 밝힌다. 인체에는 두 눈 외에 보이지 않는 세 개의 눈이 있는데, 이를 활용해 책을 마치 사진촬영하듯 찍어서 머리에 저장하는 방식이다. 그래서 어느 책, 몇 페이지 몇째 줄에 무슨 글자가 있는지를 필요할 때마다 꺼내 쓴다는 것이다. 또 호흡수련을 하면 저절로 뇌가 활성화돼 창조력이나 기억력이 높을 수밖에 없다고 한다.
그는 17살 되던 겨울에 도시로 나와 고등학교를 다녔고 고려대에 진학했다. 80년대 암울한 시절이었다. 그의 스승들이 나라가 혼란할 때 외면하지 않았듯이, 또 좌방수련의 현실참여적인 성격 때문에, 그 역시 세상 흐름을 따라 사회운동에 뛰어들었다. 그는 운동권의 대표적인 이론가로 변신해 ‘변증법적 지평의 확대’ ‘민중민주운동론’ ‘한국경제사입문’ 등 10여 종의 책을 집필했다. 그는 이를 ‘제2의 동학운동’이라고 규정했다. 동학의 ‘반봉건’ 운동이 현대의 민주화 운동이요, 동학의 ‘반외세’ 운동이 현대의 자주화라는 것이다.
그러다가 90년에 붙잡혀 감옥에 갔다온 뒤 운동권 생활을 마무리짓고, ‘본업’인 좌방수련 계승자 노릇을 하게 된다.
그가 제시하는 수행법은 당연히 몸을 잘 달구어 마음을 찾아가는 것으로, 입문자인 행자(行子)에서 수인(修人) 수자(修子) 대수자(大修子) 등의 단계가 있다. 이 수련법의 근본은 구궁기로식(九宮氣路息)이라는 호흡법. 1좌(坐)에서 9좌까지의 단계가 있는데, 행자(입문자)가 기초호흡법(지중신주념, 묵룡토주납, 백우중식좌)을 거친 뒤 본격적으로 1좌에서 5좌까지 닦으면 수련이 일단락돼 ‘수인’ 자격을 갖추게 된다.
또 수인이 됐을 때부터 무예와 진법 등을 전수받을 수 있다. 이 역시 몸을 단련시켜 마음으로 가기 위해 하는 것이다. 무예에는 구궁휴장, 구궁검식(검법) 등의 이름으로 역시 9단계가 있다. 전통무예에 대한 박현씨의 설명.
“저희는 무예를 안공(安功)이라 부르는데, 거의 하지 않고 있습니다. 예전에 산에서 수행할 때는 산짐승 때문에 익혔는데, 지금 현대 세상에는 필요가 없습니다. 누구랑 싸우자고 무예를 익히는 게 아니잖습니까. 다만 안공의 자세가 저희 수련회의 기초 행공으로 응용돼 있으므로 필요하면 배울 수는 있겠지요. 저희 식구 가운데는 수인의 자격을 갖춘 사람이 몇 명 있는데, 저는 그분들에게 무예를 모르는 삶이 좋다고 말합니다.”
고구려 벽화에 있는 무예 동작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박현씨 역시 20대 이전 혈기가 왕성한 시절에 스승에게서 배웠던 무예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한 적이 있다. 그는 웃음을 띠며 “간판을 건 데는 거의 가봤지요” 하면서 “젊은날의 객기(客氣) 아니겠습니까” 하고 어물쩍 넘어간다. 그러나 그를 아는 주변 사람들은 그가 측량할 수 없는 ‘무예의 고수’임을 부인치 않는다. 박씨는 다만 “세상에 전통무예라는 이름을 건 곳의 행공법과 박현씨가 배운 그것이 다른가”는 질문에는 상당히 다르다는 쪽으로 고개를 끄덕거린다. 수인의 자격으로 박현씨에게 전통 몸공부를 전수받고 있는 서해진씨(도서출판 바나리 대표)의 말.
“선생님을 만나기 전에 이미 다른 곳에서 무예를 익혀 지도자 길을 걷던 중이었습니다. 그러다 무예 자체가 주인이 아니라 기와 마음이 주인이 되어야 한다는 박선생님의 말에 충격을 받아 따라나서게 됐습니다.”
무예는 크게 수행에 초점을 맞춘 내가무예와 건강과 자기보호에 초첨을 둔 외가무예로 나뉜다. 자신의 내부에서 기의 운행체계를 따라, 즉 기가 가는 길을 따라 검이나 춤의 형태로 표출하는 것이 내가무예라면 외부(혹은 상대방)의 움직임에 맞추어 표현되는 것이 외가무예다. 이를테면 외가무예인 검도에서 대표적인 동작인 ‘내려치기’는 내가무예에서는 ‘살수(殺手)’라 하여 금기한다. 이는 그 동작이 자기 자신을 상하게 하는 기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내가무예, 즉 기 수련의 전형을 보여주는 동작이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등장한다는 점이다. 고구려시대 무덤인 삼실총에 그려진, ‘역사상’이란 이름의 벽화가 사실 박현씨가 스승에게 배운 무예의 한 동작인 ‘반역근세’와 똑같다고 한다. 박현씨의 설명.
“반역근세 자세를 취하면 인체의 혈해 영대 등의 기혈이 열리는데, ‘역사상’의 인체를 자세히 보면 바로 그런 혈에서 상서로운 기운이 솟아나는 것을 묘사하고 있어요. 무용총의 무희들도 수련하는 동작으로 해석이 가능하지요.”
박씨는 요즘 앉아서 잠을 잔다. 이것은 특별한 사람만이 하는 것이 아니라 앉아서 자는 것이 편안해서라고 한다. 그는 “이 세상에서 등을 대고 자는 동물은 인간밖에 없습니다”고 화두 같은 말을 던진다. 몸이라는 수레를 달궈 마음을 달구는 것이 왜 중요하고, 사람이라면 꼭 해야 하는지는 그의 저서 ‘나를 다시하는 동양학’에 차분히 밝혀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