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 평소에 낯익은 그러한 반가운 불자님들도 많이 나와 계시고 또는 새삼스럽게 잘 만나뵙지 못하는 그러한 불자님들도 계시고 모두가 다 반가운 그러한 얼굴들입니다. 대단히 반갑게 생각합니다. 부처님께서 열반涅槃 들으신 나이가 팔십입니다. 팔십이고 또 근래 우리네 큰스님들도 보통은 칠십부터서 팔십세에 다 몸을 바꾸어서 가시고 하셨습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공자님도 성인聖人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자기가 믿는 종교의 교조敎祖만 성인聖人이라고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정평있는 도인들 공자라든가 또는 노자라든가 또는 예수라든가 그런 분들도 다 똑같이 하나같이 성자입니다.
우리 범부 중생과 성자의 차이는 성자는 그 생명의 근본根本을 알으신 분들이란 말입니다. 모든 존재의 그 본 바탕 그 본분자리를 깨달으신 분들이 성자고 깨닫지 못한 분들이 범부중생 아니겠습니까.
우리 인간이 금생今生에 태어난 것은 자기 생명의 그 본 바탕, 생명의 그 실상을 깨닫기 위한 지극히 소중한 목적을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금생에 자기 생명의 본 바탕을 깨닫지 못하면은 몇만 생 윤회한다 하더라도, 다시 사람으로 태어났다가 잘못 살아서 또는 짐승으로 태어났다가 더 못 살아서 지옥으로 갔다가 조금 더 잘 살아서 천상으로 올라갔다가 이렇게 우리가 윤회輪廻합니다.
불경에 보면은 가사백천겁假使百千劫하니 (소작업불망所作業不忘이라.) 가사백천겁이라. 한 겁劫이라는 것도 무량세월이 겁입니다. 그런데 그 백천겁이니까 인제 또 무량세월, 또 무량세월 한없는 세월이 인제 백천겁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 백천겁 동안이나 된다 하더라도 소작업불망所作業不忘이라. 우리 한번 지은 업業은 없어지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불자님들이 그때그때 기분 좋아서 그 남한테 그 미소를 띄우고 또는 좋은 그런 포근한 말씀을 하시고 그런 것도 모두가 그것은 선업善業이라 좋은 업이란 말입니다. 그런 업도 가시지가 않지만은 그 순간 찰나라도 아 저 사람 몹쓸 놈이구나 저 사람 좀 나 안 보는 가운데서 없어져 버렸으면 되겠구나 이렇게 생각하는 마음을 순간 찰나라도 낸다고 생각할 때는 그 업도 도저히 없어지기가 않습니다.
인연회우시因緣會遇時 과보환자수果報還自受라 금생에는 과거세에 지은 선업따라서 자기가 지은 나쁜 업의 그런 보상을 않는다 하더라도 어느 생엔가 어느 생엔가 틀림없이 어김없이 빠짐없이 꼭 그 우리가 보상을 하고(받고) 맙니다. 몸이 아파서도 이제 할 수도 있는 것이고 또는 사업에 실패해서도 할 수가 있는 것이고 모두가 다 우리가 지은 업業을 지금 그런 행위로 해서 보상을 다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 법은 안심법문安心法門입니다. 안심법문이라. 특히 달마대사. 달마대사 법문은 안심법문安心法門의 핵심을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안심법문은 어떠한 것인가 내내야 대체로 다 아시는 바와 같이 안심安心은 편안할 안安자 마음 심心자 아니겠습니까.
마음이 어떻게 해야 편안해질 것인가 또 마음이란 존재는 어디가 있는가 말입니다. 마음心 깨달으면 성자聖者고 마음을 깨닫지 못하면은 범부중생凡夫衆生 아니겠습니까 그 마음이란 것이 대체로 어떠한 것인가 마음은 모양이 없습니다. 우리가 지금 살아있다는 것은 새삼스럽게 그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내가 생각하니깐 나는 분명히 있단 말입니다.
내가 생각하지 않고 있어 놓으면 그때는 내가 살아있다고 할 수도 없겠지요. '나'라는 존재란 것은 내가 생각하니까 존재하고 있다고 볼 수가 있단 말입니다. 그 '나'라는 것은 그러면 어떠한 것인가? 그 '나'라는 것은 내내야 인제 마음이 있으니까 '나'라고 할 수가 있지 않겠습니까. 그 '나'라는 존재에 관해서 성인들 외에는 똑 떨어지게 바로 해답을 못 내렸습니다.
성인들은 진실로 진실로 있는 대로 보십니다. 우리 중생은 사실대로 보지를 못합니다. 어째서 보지를 못하는 것인가? 그 업덩어리 우리 업으로 보기 때문에, 카르마로 보기 때문에 인제 우리가 할 수가 없단 말입니다. 업이 있으니까 그러면 어떻게 보는 것인가? 우리 중생들은 그 아견我見이라. 나 아我자 볼 견見자 아견이라. '나'라는 그 관념이란 것이 딱 우리한테 기본적으로 그 업으로 지금 뭉쳐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 중생들이 보는 '나'라는 것은 무엇인가? 금강경金剛經에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여래설명如來說名 통달무아법자通達無我法者 진시보살眞是菩薩이라. 그 내가 없다는 것을, 내가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그래야 참다운 불자란 말입니다. 내가 없다고 봐져야 그래야 인제 바로 보는 것입니다. 우리 중생이 내가 있다고 보는 한에는 그것은 절대로 바로 보지를 지금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 식구 또는 내 재산 내 사업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모두가 다 내가 있다는 그런 것에 기준해서 보지 않습니까 우선 이 몸뚱아리 이것은 내가 금쪽같이 아끼는 '아! 내몸이 아닌가.' 내 몸뚱이 자체가 이건 실존적인 것이 못됩니다 인연 따라서 잠시간, 잠시간 있는 것 같이 보이는 것이지 사실로 있지가 않습니다.
불교와 불교가 아닌 다른 사도邪道와의 한계가 무엇인고 하면은 불교는 무아無我라 없을 무無자 나 아我자 무아라. '나'라는 거는 있을 수가 없단 말입니다. 내가 생각하니 나는 분명히 있는데 무아無我라고 하면 그때는 그냥 허무하지 않는가 우리 중생이 보는 것은 아까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참다운 나를 보는 것이 아니라 거짓 나를 봅니다.
거짓 가假자 나 아我자 가아假我라. 또는 망령될 망妄자 나 아我자 망아妄我라 말입니다. 우리가 보는 자기라는 이 존재 이것은 하나의 에고의 이기심의 즉 말하자면 하나의 표본이란 말입니다. 아까도 말씀드린 바 같이 부처님 가르침은 내가 없다는 데서(무아에서) 출발합니다. 내가 없으니까 분명히 내 소유도 있을 수가 없겠지요. '나'라는 관념이 있으니까 내 소유가 있고 내 남편 내 아내 내 가족이 있는 것이지, '나'라는 것이 그것이 실존적인 그런 개념도 못 되는 것이 한다고 생각할 때는 다른 모두가 그때는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 불자님들! 부처님 말씀은 아까 말씀드린 바 같이 사실대로 하신 말씀입니다. 다른 성자도 마찬가집니다. 그 성자들은 그럼 어떻게 볼 것인가? 성자들은 모든 존재의, 모든 존재의 바탕을 봅니다. 우리 중생들은 바탕을 보는 것이 아니라 이 현상적인 상相만 봅니다 이 현상이라는 것은 모두가 다 그 근본 바탕에서 잠시간 인연因緣따라서, 인연따라서 있는 것 같이 보일 뿐이란 말입니다.
바다에서 그 바람 따라서 인제 파도가 솟구치고 그러겄지요. 그 파도 자체가 그것이 원래 있는 것이 아니라 바다 물에서 바람이라는 연緣 따라서 잠시간 이제 솟구쳐서 파도같이 보일 뿐인 것이지, 내내야 결국은 다 물이라는 말입니다. 그와 똑같이 이 우주에 보이는 모든 것은 우리 중생이 겉만 보니까 이 현상적인 상相만 보니까 있는 것 같이 보이는 것이지, 중생은 그런 자리에서 따지고 분별하고 아까 말씀드린 바 같이 내 소유다, 내 식구다, 인제 내 몸뚱이다, 이렇게 되는 것이니까 그 자연적으로 그때는 마음이 불안해지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사실은 그 성인들이 말씀한 대로 인제 보면은 보면은 아까도 말씀드린 바 같이 성인의 말씀대로 인제 본다고 생각할 때는 그 본래 바탕을 보기 때문에 본래 성품性品을 보기 때문에 성품 자리에서 보면 모두가 다 하나의 거란 말입니다. 파도가 높이 솟구치고, 낮게 솟구치고 해도 결국은 다 물이듯이 그 물 그 자,리 그 바탕 그 자리, 본래本來의 성품性品자리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너와 나도 없고 모두가 다 불교적인 전문말로 하면은 일미평등一味平等이라 평등무차별平等無差別의 하나의 진리란 말입니다.
소승과 대승도 그래요, 소승들은 바탕에서 미처 잘 보지를 못합니다. 그러니까 자꾸만 이렇게 인제 갈래를 많이 내세우지요. 그러나 대승들은 바탕에서 본다는 말입니다. 그 바탕을 불교 전문적인 술어로 해서 어떻게 말하는 것인가 그 자리가 바로 인제 진여불성眞如佛性자리입니다. 부처 불佛자 성품 성性자 진여불성眞如佛性자리입니다.
가령 우리가 인제 참선을 한다 하더라도 덮어놓고서 그냥 화두를 의심하고 덮어놓고 염불을 하고, 그렇게 덮어놓고 하더라도 공功이 다소 안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근본 자리를 놓치지 않고 생각생각에, 생각생각에 근본자리를 놓치지 않고 공부를 해야(염념상속念念相續) 비로소 참다운 공부고 그래야 비로소 참선이라고 볼 수가 있단 말입니다.
일반 보통 공부는 근본자리를 모른다 하더라도 이 상相만 눈에 보이는 현상적인 상 차원에서 공부를 해도 공부라고 그렇게 아주 방편설로 해서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이른바 안심법문安心法門이라. 우리 마음이 불안하지 않고서 편안한 공부 이른바 대승大乘의 그 본래적인 공부 다시 바꾸어서 말하면은 돈오頓悟적인 문득 깨달아서 하는 공부 이것은 내 본질이나 모든 존재의 본 바탕이 그 진여불성眞如佛性이다. 진여불성이다. 참 진眞자 같을 여如자 모두가 다 진리 아님이 없단 말입니다. 부처 불佛자 마음 심心자 그 자리가 바로 진여眞如 그 자리가 바로 부처의 마음입니다.
우리 마음과 부처의 마음이 따로 있다고 생각하면 그도(그것도) 마음이 불안스럽습니다. 기독교도 그 예수님의 본래 가르침은 훌륭한 가르침이고 훌륭한 깨달음의 가르침인데, 그게 그 교회가 생기고 뭣 생기고 그래서 갖다가 하나의 제도가 생겨놓으면 그 제도의 권위를 지키기 위해서 자꾸만 거기에 편리하게 그것이 꾸며진단 말입니다. 예수님의 본뜻은 하나님이 갖다가 우주를 창조하고 아담과 이브가 갖다 죄를 지어서 인간은 모두가 다 아담 이브의 자손이다 그런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본디 그거 없습니다. 예수님의 본 가르침은 모두가 다 일체 존재가 하느님이 아님이 없단 말입니다. 불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불교의 그런 깨달음의 경계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어떠한 것이나 모두가 다 어떠한 것이나 모두가 다 일미평등一味平等한 진여불성眞如佛性이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진여불성眞如佛性자리를 대총상법문大總相法門 그래요. 대총상법문이라. 꼭 잘 외어두십시오. 대총상법문大總相法門이라. 모두를 다 포괄해있다는 말입니다. 가장 궁극적인 동시에 가장 보편적인 모두를 다 포함되어 있다는 그런 의미가 이제 대총상법문大總相法門입니다. 큰 대大자 그리고 모두 총總자 말입니다 그리고 서로 상相자 대총상법문大總相法門이라.
법성法性이나 법계法界나 진여眞如나 모두가 다 대총상법문大總相法門을 달리 말씀한 것입니다. 대아大我나 또는 참 진眞자 나 아我자 진아眞我나 말입니다. 그래서 대총상법문을 딱 외두셨다가, 대총상법문 가운데는 나나 너나 미운 사람 고운 사람이 거기에 다 들어갑니다. 또 그 자리는 밉고 곱고 그런 것을 다 떠나 있는 자리입니다. 우리가 아까도 말씀드린 바 같이 자기 에고에서 자기 이기심에서 보는 것이니까 나 따로 너따로 있는 것이지, 근본 성품을 본다고 생각할 때는 모두가 다 일매지게 하나의 성품입니다. 하나의 성품자리까지 가버려야 우리가 참다운 이른바 안심법문이 된단 말입니다.
우리 불자님들 상당히 여러분들이 아이 또 지난 겨울에 선방에서 공부를 하셔서 대단히 대견스럽게 인제 생각합니다. 집안에서도 공부하신 분들이 많이 계시겠지요. 그러나 공부를 특히 참선 공부할라면은 소견所見이 발라야 됩니다 소견이. 소견이 발라야 한다는 것은 무슨 말인고 하면은 아까 말씀드린 바 같이 우리가 눈에 보이는 현상적인 그 두두물물頭頭物物 분별시비分別是非를 떠나서 근본적인 진여불성眞如佛性자리에다가 우리 마음을 딱 못박아야 한단 말입니다. 이 세상에는 진여불성眞如佛性 외에 다른 것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아까도 말씀드린 바 같이 우리 중생은 겉만 보고 상相만 보고 사는 것이고 깨달은 분들은 항시 마음이 진여불성하고 하나가 돼 있단 말입니다. 진여불성眞如佛性이 그 말로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진여불성이 하나의 생명이란 말입니다. 하나의 생명인 동시에 그 자리는 만덕장萬德藏이라. 만덕장이라.
우리가 불교심리학에서 이른바 아뢰야식阿賴耶識(종자식種子識)이라. 아뢰야식이라는 식識을 말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지금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인 육식六識가지고 중생은 지금 지내고 있고, 그러나 우리 의식의 잠재의식 그 육식六識의 그 바탕에 숨어 있는 의식은 또 한도끝도 없이 깊습니다. 우리 육식六識 다음에 있는건 제 7 말나식末那識이라. 또 그 밑에는 무엇인가 그 밑에는 제 8 아뢰야식阿賴耶識이라. 또 그 밑에는 무엇인가 제 9 암마라식菴摩羅識이라. 암마라식菴摩羅識은 무엇인가 암마라식은 바로 불심佛心입니다.
우리 마음을 파고 들어가면은 마음 바탕자리는 바로 불심佛心입니다. 바로 부처님입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우리가 과소평가해서는 안됩니다. 지금 치매증이 걸렸으나 아주 미련해서 그야말로 참 다시없이 투명한 사람이나 또는 천재적인 사람이나 모두가 다 모두가 다 마음의 본 바탕은 다 불심佛心입니다. 불심佛心 자리에는 불심은 이것은 만덕萬德의 자리입니다. 만덕의 자리입니다. 불교적인 전문말로 하면은 상락아정常樂我淨이라.(열반사덕涅槃四德) 열반경涅槃經에 있는 그 말씀인데 우리한테는 어느 누구나가 다 근본적인 상락아정常樂我淨을 다 갖추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 한문자漢文字를 많이 써서 대단히 죄송합니다. 저란 사람은 이렇게 한문세대기 때문에 그럴 수 밖에는 없고 저는 사실은 한자의 폐지를 저는 굉장히 제가 반대한 사람입니다. 왜 그런고 하면은 우리 문화는 대체로 일본 중국 우리 한국은 한문 문화권에 가 있지 않습니까. 폐지할래야 폐지가 안됩니다. 우리 고전古典은 다시 말할 것도 없고 보통 우리를, 우리들이 쓰는 일상용어의 그런 숙어를 보십시오. 마을 이름이나 무슨 산 이름이나 다 모두가 다 대체로 한문 의미에서 왔습니다.한문을 폐지해서 아무 일이 없습니다. 적당히 제한해 쓰는 것은 좋겠지요.
그러나 그 어떻든간에 어떻든간에 아까 말씀드린 바 같이 그때그때 그 정치인들, 훌륭한 사람도 있고 하지만은 정치인이란 것은 역시 마땅히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자기 아我를 떠난 아견我見을 떠난 정도의 그러한 덕과 소양이 있어야 됩니다. 여러분들 플라톤(B.C 424? ~347?) 은 잘 아시지 않습니까 플라톤 지금부터서 (기원전) 한 300, 20년 전의 분입니다. 소크라테스(B.C 470년 경 ~ B.C 399)의 제자 아닙니까. 플라톤은 평생 독신으로 지내다가 가신 성자 같은, 거의 성자가 다 된 위대한 분입니다. 그런데 그분은 일반 사람들은 모르거니와 적어도 남을 지도하고 또는 한 나라를 지배하고 할 사람들은 자기 소유를 가지지 말라. 자기 소유를 가지지 말라는 것은 그냥 재산만, 재산만 가지지 말라는 그런 뜻은 아닙니다. 가족도 가지지 말라. 자기가 갖다 모범적으로 자기 독신으로 평생을 지냈다는 말입니다. 왜 그런고 하면은 우리 범부중생은, 우리 범무중생은 그 가족을 가지면은 아직은 그 인정人情을, 사정私情을 끊어 버리지 못하는 그러한 번뇌 중생이기 때문에 당연히 그때는 우리가 인제 대중을 위해서 온전히 다 봉사할 수가 없단 말입니다. 그래서 플라톤의 그 공화국을 보면은 가정을 가지지 말고 자기 소유를 갖지 말고 맙입니다. 그렇게 한 사람만이 비로소 한 나라를 지배할 수 있는 이른바 정치가가 철학을 하고, 철학자가 정치를 해야 한다는 그런 그이가 논리를 폈지요.
우리 중생들은 너무나 시야가 좁습니다. 부처님 가르침 같은 그 광대무변廣大無邊한, 물리학적으로 보나 어떠한 면으로 보나 모순이 없고, 아까 말씀드린 바 같이 그 모든 사실을 사실대로 그대로 보시는 부처님 가르침인데 (부처님은) 우리 행복에 대해서도 조금도 흠결欠缺이 없이 완벽한 행복을 말씀하신 분입니다. 라서 그 완벽한 행복은 무엇인가. 이것은 사실에 입각해야 그래야 인제 완벽한 행복을 알 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헌데 우리 중생들은 중생들이 아는 것은 사실로 아는 것이 아니라 허상虛像을 봅니다.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가 우선 자기의 존재를 본다고 생각할 때도, 자기 실존을 보는 것이 아니라 자기 실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허상을 본단 말입니다. 내 몸뚱이를 '나'라고 보는 것은 내 몸뚱이는 무엇인가? 인연 따라서 잠시간 산소 수소 질소 탄소 그런 원소가 인연따라서 잠시간 결합된 즉 말하자면 업의 뭉치란 말입니다. 업의 덩어리가 이것이 내 몸뚱입니다. 업의 덩어리니까 인제 인연따라서 그때는 팝십년이나 몇십년이나 업이 그 흩어지면 이제 소멸이 되겠지요. 어디 간 곳도 없습니다. 화장하면 재만 남고 재 뿌려버리면 그때는 그만 아닙니까. 그러나 우리 생명은 우리 생명은 불생不生이 불멸不滅이라. 우리 생명은 본래 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고, 그 어느 때나 영생불멸한 그러한 이른바 그야말로 참 모든존재의 근본 자리가 바로 생명자리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생명은 아까도 말씀드린 바 같이 생명이 겉에 든 상은 그렇지 않지마는 생명의 본 바탕은 본 바탕은 우주가 모두가 다 하나의 생명입니다. 하나의 생명 자리가 납득이 되겠습니까? 그러나 그것이 사실입니다.
현대 지금 물리학적으로 생각해 봅시다. 우리가 지금 우리 몸뚱이나 다른 뭐다 우리 눈에 보이는 건 다 지금 파괴하고 인제 분석하면 원자가 되지 않습니까. 내내야 원자란 것은 전자나 양성자나 중성자나 또 그런 것으로 해서 구성이 되었단 말입니다. 전자나 양성자나 그런 것은 또 무엇으로 구성이 되었는가. 눈에도 보이지 않는 소립자素粒子로 또 구성이 돼있습니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가까스로 가정으로 볼 수밖에 없는 그 소립자는 또 무엇인가 그건 하나의 에너지라는 말입니다. 물질이 아니라 하나의 에너지입니다. 그 에너지는 또 그것은 무엇인가. 물질이 아닌 것은 우리가 측정 할 수가 없습니다. 물질이 돼야 인제 시간성이나 공간성이 있어서 측정이 되겠지마는 물질이 아닌 것을 우리가 어떻게 잴 수가 있습니까. 그래서 끄트머리에 가서는 이 물질이란 것은 결국은 물질이 아니어 버린다는 말입니다. 물질이 아닌 물질의 실상은 현대물리학은 모릅니다 측정을 못하니까 말입니다.
성인들은 성인들은 그러한 측정할 수 없는 그 존재의 실상實相을, 그 모든 존재의 근본을 깨달은 분들입니다. 도道나 또는 진리眞理나 모두가 다 그래요 소위 이제 그런 자리입니다. 그런 자리는 우주에 그때는 조금도 차이없이 우주에 충만해 있습니다. 내 존재의 뿌리나 남의 존재의 뿌리나 독사의 뿌리나 다 가장 근본적인 것은 결국은 모두가 다 하나의 에너지로 돌아가는 것인데 에너지 바로 그 정체가 에너지 정체가 그것이 인제 이른바 진여불성眞如佛性이라는 말입니다. 하이젠베르크(독일 물리학자, 불확정성 원리)나 그런 위대한 물리학자도 역시 그런 것을 어떻게 다 규명할 수가 없단 말입니다. 모양이 없기 때문에 규명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성자들은 규명할 수 없는 그 자리 모든 존재의 근본을 그때는 훤히 깨달아 버린다는 말입니다. 그 자리는 하나의 빛의 자리입니다. 광명光明의 자리입니다. 우리가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나무아미타불 하지 않습니까.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을 다른 말씀으로 하면은 그때는 무량광불無量光佛이라. 무량광불無量光佛이라. 한도 끝도 없는 우주의 충만한 광명光明이란 뜻이어요 청정광불淸淨光佛이라. 조금도 번뇌가 없는 청정한 그런 빛의 또 생명이라는 뜻입니다. 부처라는 것은 하나의 생명이라는 뜻이에요. 부처라는 것은 우주에 충만한 생명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집니다. 말만 다른 것이지. 내내야 그쪽도 성자가 깨달았으니까 성자라는 것이 깨달아야 성자라고 말로 붙이지 않습니까. 성자의 가르침이 아니면은 2000년 이상이나 그대로 모든 사람이 신봉하고 나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안심법문 우리 마음이 불안한 마음이 없이 안심이 될라면은 무엇이 마음에 막힘이 없이 그야말로 광대무변廣大無邊한 하늘같은 마음이 돼야 됩니다. 우리의 마음은 본래로, 본래로 하늘같은 마음인데 그 자꾸만 마음을 갖다가 그 옹졸하게 쓴단 말입니다. 옹졸하게 안 쓰면 부처님 얼굴같이 항시 그 달덩이같이 훤할 것인데, 그 마음을 그냥 남 미워했다 좋아했다가 금방 금방 그렇게 변덕을 부리니까, 얼굴도 자꾸만 그렇게 그 찌푸려지고 우리 아픈 것도 그래요. 그것이.
우리 불자님들! 우리가 금생에 부처님을 믿고 지내는 것이 얼마나 행복스러운 것을 깊이 느낀 적이 있으십니까? 부처님 가르침은 아까도 말씀드린 바 같이 사실을 사실대로 말씀한 가르침입니다. 사실을 사실대로 우리가 믿고 나가는 것이 제일 편하고 제일 쉬운 것입니다. 비록 금생에는 인연이 못 닿아서 부처님 가르침을 사실대로 못 믿었다 하더라도 어느 생엔가는 그렇게 할 수밖에는 없어요.
모든 존재는 이렇게 이루어졌다가 다시 또 돌아갔다 합니다. 공空으로 갔다가 공 속에서 다시 또 역시 마이너스 플러스 그런 기운이 갖다가 인제 서로 피차 합해져서 다시 또 모양이 생겨나고 합니다. 불교우주관에서 성겁成劫이라. 성겁은 재료가 텅텅 빈 데서 이제 그 가운데 기운들이 이제 또 합해져서 하나의 형체를 이루는 것이 인제 이것이 성겁成劫입니다. 우주가 생성한단 말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한 것이 아닙니다 우주의 갖추고 있는 생명 그 힘으로 해서 갖다 그때는 인제 우주가 이루어진다 말입니다. 이루어지면 그때는 생물이, 식물이나 다른 동물이나 사람이 살 때는 그때는 인제 살 주住자 주겁住劫이라. 주겁住劫 되면 또 오랜 세월 동안에 엔트로피의 그 법칙이라. 모든 물질이 그때는 또 변화해 간다 말입니다. 그러면 그것이 갖다가 우주가 그때는 차근차근 이제 파괴돼 가지요. 지금도 갖다가 인제 지리리 인간이 애 쓰고 원자력 만들어 놓으니까 원자력이가 갖다가 지금 폭력화되어서 자칫 원자핵 때문에 사람이 인제 지금 멸망할 수 있는 위기에 닥쳐 있지 않습니까. 그것이 아니더라도 원자력에 의해 스스로 우리가 자폭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차근차근 세계는 그대로 파괴가 돼갑니다. 파괴돼가면 그때는 나중에는 텅텅 비어버립니다. 그러면 갖다가 빌 공空자 공겁空劫이란 말입니다. 그러나 다행스러운 것은 무엇인고 하면은 우리 인간을 그대로 지구덩어리에다가 그대로 놔둔채로 파괴가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사람이 그 본래면목이 우리 본래성품이 본래 생명이 바로 부처기 때문에 차근차근 사람이 선량히 돼갑니다.
어느 사람들은 지금 말세이니까 지금 사람들 마음이 차근차근 나빠간다고 그러지만 그렇지가 않아요. 그것이. 그것이 현재 그 정보지식화시대라는 것이 얼마나 좋은 사회입니까. 이렇게 따지고 저렇게 따지고 보면 결국은 인간이라는 것이 이성적 동물인지라, 이치가 합리적으로 봐야 그래야 옳다고 따르지 않겠습니까. 차근차근 이 정보도 차근차근 인제 부처님 가르침같은 그런 가르침으로 해서 정화가 돼갑니다. 지금은 기독교인들도 신부님이나 목사님이나 부처님 법을 상당히 애쓰고 지금 연구를 하고 있어요. 어째 그런고 하면은 적어도 합리적으로 생각을 한다고 생각할 때는 기독교 진리로 해서는 어떻게 풀어나갈 수가 없습니다. 창조 문제나 무슨 문제나 다 그래요. 하나님이 '자연을 창조했다' 이렇게 한다고 생각할 때는 마땅히 그때는 창조주와 창조자연과 이때는 둘로 갈라지지 않겠습니까 둘로 갈라지는 것들은 창조한 자연이 되는 것들은 훨썩 차원이 낮은 거란 말입니다. 하나님이나 그 존재는 훨씬 차원이 높은 것이고 그런 그것 자체에 가서는 벌써 이제 하나의 그게 이분법二分法이라. 그와 같이 차별이 생긴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자연들은 우리가 마음대로 우리 인간의 행복을 위해서 파괴해도 무방하고 산도 갖다가 마음대로 허물어도 무방하고 그런 또 논리가 서겠지요.
그러나 이 불교인생관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자연이고 뭣이고 다 모두가 다 생명이란 말입니다. 자연을 파괴하면 같은 생명인지라 본래가. 같은 생명인지라 그때는 우리 인간이 바로 해害를 입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그 우주 전체가 모두가 다 모두가 다 신이 아님없고 부처 아님이 없다는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은 한 말로 말하면은 천지우주가 모두가 다 부처님 뿐인 것이고, 기독교 가르침 예수님의 가르침도 한 말로 말하면은 천지우주가 모두가 다 하나님 뿐입니다. 성자의 가르침은 똑같습니다. 하나님 뿐이고 부처님 뿐입니다. 하나님 부처님은 저쪽 이쪽 말만 다른 것이지 개념 내용은 똑같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그렇게 인식을 해야 그래야 철학적으로도 모순도 없고 또는 물리학적으로도 모순도 없고 다 그러는 것입니다. 과거 성자들 말씀하고도 조금도 그때는 상치相馳가 안되고 말입니다. 그렇게 되어야 우리 마음의 불안의식을 넘어서 안심법문이 될 수가 있습니다.
우리 마음이 지금 모양이 있습니까. 모양이 없지 않습니까. 부처라는 것은 우리가 부처를 믿으니까 부처가 그래도 어디가 있으니까 부처를 믿지 않습니까. 석가모니 부처님이 역사적인 하나의 인물로 해서 그 부처의 그 자리 과거나 현재나 미래나 영원히 존재하는 그 법신法身부처님 자리를 깨달은 분이 석가모니 부처님인 것이고, 석가모니 부처님 말씀마따나 석가모니가 나오고 안나고 상관이 없이 참다운 부처님은 언제나 계신단 말입니다. 언제나 계십니다. 그 부처님은 석가모니 부처님한테만 그렇게 훌륭하니 잘 나타나는 그런 부처님이 아니라 내 마음 가운데나 도둑놈 마음 가운데나 또는 그야말로 다른 동물 가운데나 또는 식물 가운데나 모두가 다, 모두가 한결같은 한결같은 그런 즉 마음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인제 선방에서 공부를 하신다 하더라도 이 가부좌跏趺坐를 트는 이 자세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이 자세가 즉 말하자면 이렇게 해서 피라미드형 아닙니까. 인간의 지혜 가운데서 인간의 지혜가 가장 발동하기 쉬운 자세가 이 피라미드 자세가 제일 지혜가 발동을 빨리 하고 또는 정확히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일체여래지인一切如來智印이라. 모든 부처님의 상징을, 즉 말하자면 이렇게 정삼각형으로 해서 그렇게 상징적으로 표현을 해요 그것이 일체여래지인一切如來智印입니다.. 지혜 지智자 도장 인印자. 모든 부처님의 지금 상징적인 모양이 이와 같이 정삼각형이라는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가부좌라하는 것은 결국은 정삼각형 이 모양 아닙니까. 이집트의 그런 피라미드도 내내야 인제 정삼각형을 따서 그와 같이 한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그런 점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에 가부좌를 해서 앉는 것과 또는 그렁저렁 자리에 누워서 그냥 그렁저렁 참선하는 것과는 그런 상당히 차이가 있습니다. 소화도 제일 잘 되는 것이고 또는 그와 동시에 우리 피순환도 잘 되고 말입니다. 어떤 면으로 보나 가부좌하는 모습은 가장 우리 자세로해서는 중요한 그런 자세입니다따라서 가급적이면은 가부좌하는 자세로 공부를 하셔야 됩니다.
그러나 그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무엇인고 하면은 드러누워서 하든 앉아서 하든 또는 길 가면서 하든 우리 마음의 소재가 어디가 있는가, 우리 마음 자리가 어디가 있는가 그 문제는 훨썩 더 소중합니다. 생각 생각에 앞 생각, 두 생각, 뒤 생각 그 사이에도 끊어짐 없이(무간수無間修) 생각 생각에(염념상속念念相續) 우리 마음이 아까도 말씀드린 바 같이(대총상법문) 그 본래의 자리 우리의 생명의 본래의 자리에서 여의지 아니한단 말입니다. 그렇게 되어야(무간수無間修) 그렇게 되어야(염념상속念念相續) 삼매三昧에 들어갑니다. 선정禪定에 들어갑니다.
재주가 있고 하면은 이치로 인식론적으로 그야말로 참 체體가 있고 용用이 있고 또는 그야말로 참 본체가 있고, 여러 가지 그런데 있어서 그런 것을 좀 외이면은 상당히 뭐 깨달은 말을 할 수가 있겠지요. 그러나 그걸로 해서는 참다운 진리와, 참다운 진리와 계합契合이 안 됩니다. 하나가 안 됩니다. 깊은 명상. 삼매三昧는 깊은 명상이 삼매입니다. 마음이 분열이 안되고서 오로지 통일된 그 상태가 삼매입니다. 그래서 어떠한 도인들이나 깨달은 분들은 모두가 다 깊은 명상 깊은 삼매에 들었어요. 예수님도 그 광야에서 40일 동안 금식기도 하실 적에 그때 그 모든 사탄 마구니를 다 조복을 받고서 천지우주의 도리를 깨달은 것입니다. 또 마호메트도 힐라산 동굴에서 3년 동안이나 모든 번뇌 망상을 싸우면서 극복을 하고서 갖다가 그때는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지요. 우리 불교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조금 참선을 했다 말았다 했다 말았다. 안한 것보다는 그건 낫겠지요. 그러나 그런 걸로 해서는 삼매三昧에 못 들어갑니다. 생각 생각에 생각 생각에, 끊임없이 끊임없이 이어가야(염념상속念念相續) (삼매에 들어갑니다.) 이어가야 그래야 인제 마치 흐린 탁수가 흘러가다 보면 차근차근 앙금 가라앉고서 맑은 물로 돌아가지 않습니까. 그와 똑같습니다 똑같이 자정작용自淨作用이라. 스스로 자自자 맑을 정淨자. 우리 마음의 바탕이 원래 부처인지라 그 부처의 자리를 안 떠나고서 공부를 하다 보면 차근차근 마음이 스스로 맑아져요. 마음이 그때는 본래 마음자리 부처하고 그때는 하나가 된다는 말입니다.
부처님 공부는 따지고 보면 세상에서 제일 쉬운 것입니다. 사실 있는 그대로 공부하니까 말입니다. 우리 중생은 엉뚱하니 있는 것을 우리가 없다고 생각하고 없는 것을 억지로 있다고 하니까 그때는 인생고人生苦가 생기지요. 일체만유一切萬有 인연소생법因緣所生法이라. 모든 법이 인연따라서 잠시간 있는 것 같이 보이지 않습니까. 어느 것도 조건부로 있는 것이지 실존적으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조건부로 있는 것은 그때그때 시간적으로 무상無常하고, 시간적으로 무상無常한 것은 공간적으로 그때는 인제 있다 볼 수가 없이 그때는다 공空이란 말입니다.
시간적으로 무상無常하고 공간적으로 공空인 것은 그때는 인제 '나'라고 할 수 없기 때문에 무아無我라. 부처님 말씀은 하나의 다 공식이에요. 모두가 조금도 흠이 없습니다. 모든 존재는 인因과 연緣 따라서 잠시간 되었기 때문에 그때그때 시간시간 그때그때 머무름이 없이 항시 변화무쌍합니다. 그러기에 무상無常이라. 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 한 찰나도 1초의 몇 억분의 일 동안도 머무름이 없이 움직이기 때문에 움직이기 때문에 그때는 공간적으로 봐서 공간이 있다고 할 수가 없지요. 실지로 인제 공空이란 말입니다. 무상無常한 공空이기 때문에 '나'라고 고집할 것이 어디가 있겠습니까. 수학의 참 공식 같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그러기 때문에 가만두어도 이 복잡한 정보화사회에서 우리 총명스러운 엘리트들은 차근차근 부처님 공부를 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어요. 그러기 때문에 지금 목사님들도 기독교의 그 진리가 원래 예수님의 진리는 옳지만은 나중에 그 스콜라철학이나 뭐다 그런 데서 이루어진 그런 교회를 지키기 위해서 하나의 교권을 지키기 위해서 한 그런 것은 굉장히 모순이 많습니다.
아까 말씀마따나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했다 또 기독교 진리에서 태양이 지구를 돌고 우리 지구는 가만히 있다는 것이지요. 그러기에 중세기에 인제 기독교에서 갖다가 이른바 아주 그야말로 외도라고 해서 사탄이라고 해서 불에 태워서 죽인 것은 가장 큰 원인이 무엇인고 하면은 그 불교와 같은 모두가 다 부처가 아님이 없다 신이 아님이 없다 그런 가르침 바꿔서 말하면 범심론汎神論이라. 범신론을 제일 두려워했습니다. 그와 동시에 아까 말씀드린 바 같이 그 천동설이라 지금 지구라는 것은 우리 지구가 지금 태양을 도는 것이지. 태양이 지구를 도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가 눈으로 상식으로 봐서는 태양이 지구를 돌고 있다고 보겠지요. 그래서 중세 기독교에서는 그와 같이 지구는 그대로 가만히 있는데 태양이나 다른 위성 같은 것이 모두가 다 우리 지구를 돈다고 느꼈단 말입니다. 그러나 코페르니쿠스(1473 ~ 1543) 그분들은 갖다가 하나의 물리학을 또 공부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것을 수긍할 수가 없습니다. 코페르니쿠스나 갈릴레이(1564 ~ 1642)나 그런 사람은 갖다가 물리학자기 때문에 스스로 인제 측정도 하니까 말입니다. 그러니까 인제 지구가 태양을 도는 것이지 태양이 지구를 돌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 태양이 지구를 돈다는 그런 것을 부인하고서 자기들이 느낀 그런 물리학 대로 우리 지구가 태양을 돈다 그런 말을 했다고 해서 또 이제 잡아가서 자기 평생 하여튼 그 구금당해서는 다른 자유스런 몸이 못됐습니다. 중세에는 그런 짓이 많이 있었어요. 그 부르노(1548 ~ 1600) 같은 사람은 17세기 분인데 그분이 아까 말씀마따나 모든 존재는 불교와 같이 다 부처가 아님이 없고 진리 아님이 없다 이렇게 느꼈다는걸로 해서 가장 큰 죄목을 삼고 또 한 가지는 방금 제가 말씀드린 바 같이 지구가 중심으로 태양이 지구 주위를 돈다 이런 것을 또 아주 그야말로 자기들 그 교회에서 말하는 그대로 안 들었다고 그래서 또 역시 이단시해서 그런 죄목을 해서 그렇게 똑똑하고 그렇게 훌륭한 그분도 수사인데 수사라는 것은 카톨릭 즉 수도인 아닙니까. 잡아다가 결국은 불에 태워 죽였다는 말입니다. 10년 동안에 이단이라고 해서 불에 태워죽인 사람이 한 9만쯤 돼요. 10년 동안에. 9만이라는 수가 그것이 적은 수입니까. 조그만한 도시 인구입니다. 9만이라는 수가. 그런 수를 이단이라고 해서 잡아죽였다는말입니다. 그것도 불태워서 죽였습니다. 그렇게 그 진리에 대해서 어두우면 그와 같이 잔인한 그런 짓을 한단 말입니다.
그런 때에 비교해서는 현대는 굉장히 행복스러운 그런 시대입니다. 우리는 지금 행복스러운 시대에 태어나서 합리적이고 더구나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진리의 큰 집이 우리 불교입니다. 어떻게 따져보나 어디로 따져보나 물리학적으로 따져보나 철학적으로 따져보나 또는 종교적인 신비로운 면으로 보나 어떤면으로 보나 부처님 가르침은 완벽합니다.
어떤 사람은 부처님 가르침은 그 초인적인 힘을 부인한다. 참선한 사람들은 정말로 참 '배고프면 밥 먹고 오줌 마려우면 오줌누고 그런 것이 도道인것이지 무슨 도가 따로 있는 것인가.' 신통神通이 따로 있는 것인가 그러나 분명히 신통이 따로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인간성을 절대로 제한해서는 안됩니다. 비록 자기 공부가 지금 미숙해서 자기가 하는 것은 내내야 뭐 신통은 커녕 이치로도 모르는데 어떻게 신통을 감히 얘기를 하겠습니까마는 사실은 부처님 가르침은 삼명육통三明六通이라. 우리가 바로 깨달으면 어느 누구나가 바로 깨달으면 어느 누구나가 다 삼명육통三明六通을 다합니다. 부처님 당시에는 그 무수한 사람들이 무슨 아라한들은 모두가 다 삼명육통을 다 한 사람들이어요.
그래서 삼명육통은 누구나가 다 누구나가 다 할 수가 있는 것인데 그 어째서 지금 사람들은 상당히 공부가 되었다 그래도 별로 신통을 할 것이 없는가. 공부가 안된 것이 아니라 약간은 됐어도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깊은 명상을, 깊은 명상에 못들어 있단 말입니다. 즉 말하자면 명상瞑想 기운氣運이 부족합니다. 명상에 들어갈라면은 그렁저렁 먹고 그렁저렁 살고 명상에 들어갈 수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철저한 계행戒行을 지켜야 됩니다. 고기 먹고 이거 먹고 함부로 먹고 남녀 이성간에 함부로 사귀고 그런 사람들은 절대로 명상에 못 들어갑니다. 신부나 또는 수녀나 또는 비구나 비구니나 왜 출가를 하는가. 인간의 욕망 가운데 가장 하품 가장 하품 욕망이 먹는 것과 이성문제 아닙니까.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면은 '아 저 노장이 나이 먹어서 지금 노망들어서 현실에 맞지 않는 얘기를 한다' 이렇게 생각도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올해 지금 81세인데 제가 무슨 억하심정抑何心情으로 거짓말 하겠습니까.
우리 불자님들 부처님 가르침. 그 백천만겁난조우百千萬劫難遭遇라. 어쩌다가 어쩌다가 만난 부처님 가르침 그대로 믿으시는 것이 우리 인간의 최상의 길입니다. 불교말로하면 최존最尊이라 가장 존엄스럽고, 또는 최상最上이라 가장 높고, 최제일最第一이라 제일가는 가르칩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인제 부처님 가르침을 만났을 때에 정말로 최선을 다해야 됩니다. 내외간도 하나의 가장 가까운 동기 가까운 동기로 생각해서 그렇게 생각을 하셔야 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두 분의 행복을 위해서나 건강을 위해서나 또는 자녀간을 위해서나 제일 좋아요 그것이. 사회를 위해서나 말입니다.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그 먹는 것과 남녀 이성간의 관계 이것이 제일 욕계欲界의 번뇌 가운데서 우리 인간이 욕계를 못 떠나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 때문에 못떠납니다. 금생에 또 만나놓으면 또 정情이 붙어서 또 내생가도 또 만나야 되겟구나. 그러면 다생겁래多生劫來로 윤회해서 또 만나고 또 만나고 하겠지요. 그러게 참다운 좋은 동기를 삼아서 말입니다 동지애를 하도록 그렇게 하십시오. 과거 숙세부터서 인연이 있어서 같이 내외간이 됐으니까 말입니다. 가장 그 가까운 참 동기 아닙니까. 가장 가까운 동기를 제일 좋은 법으로 인생의 최상의 행복의 길로 인도한다는 것은 얼마나 그것이 보람있는 일이겠습니까.
아까 말씀드린 바 같이 대총상법문大總相法門이라는 것은 천지우주가 모두가 다 부처님이 아님이 없단 말입니다. 참선이란 것은 그 대총상법문인 그 자리 다시 말씀드리면 진여불성인 그 자리, 그 자리에다가 마음을 두고 공부해야 참선이 됩니다. 염불을 한다 하더라도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하는 것이 그것이 단순히 기복적인 공부다 이렇게 우리가 폄하할 것이 아니라 같은 염불도 복을 빌고 하면은 그때는 그야말로 방편염불이 되겠지요. 참다운 염불이 못됩니다. 그러나 천지우주가 모두가 그대로 부처님이다 이렇게 생각하고서 염불을 한다고 생각할 때는 그때는 그것은 바로 염불참선念佛參禪이 됩니다.
우리 마음이라는 것이 바로 부처고 우리 마음에 만덕萬德을 갖추고 있어 가지고 있어놔서 우리가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을 생각하면 나무아미타불 아미타불의 기운이 우리한테 다 실리는 것입니다. 우리의 우리 인간성이 참다운 자비가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이고 우리 인간성의 참다운 지혜가 문수보살文殊菩薩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관세음보살을 생각하고, 관세음보살을 외이면은 관세음보살 기운이 우리한테 실리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성은 그렇게 소중한 것입니다. 만덕을 다 갖추고 있습니다. 그런 마음을 우리가 어떻게 써야 되겠습니까? 대총상법문大總相法門을 떠나지 말고서 자나깨나 앉으나 서나 (떠나지 말고서) 그 영원히 하나의, 이 세계는 하나의 자리인데 하나의 자리가 실상實相인 것이고 우리가 보는 것은 다 가상假相입니다. 우리는 뿔뿔이 봅니다. 그것은 허망한 것입니다. 영원한 자리, 가장 행복한 자리, 우리가 어느 때 가도 그 자리(진여불성자리, 대총상법문)를 통해서 우리가 성불해야 될 그 자리입니다. 그렇게 하셔서 부지런히 공부하시기 바랍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 청화큰스님 법문 20030216 광륜사 정기법회
- 녹취(2023.11.) 무주선원 카페 황금님
첫댓글 황금님께서 유튜브 영상법문을 위해 광륜사 정기법회를 녹취 법공양 하시었습니다.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