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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리가 몰려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새 예수는 게네사렛 호숫가에 서서
호숫가에 배 두 척이 있는 것을 보시니 어부들은 배에서 나와서 그물을 씻는지라 예수께서 한 배에 오르시니 그 배는 시몬의 배라 육지에서 조금 떼기를 청하시고 앉으사 배에서 무리를 가르치시더니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그렇게 하니 고기를 잡은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들에게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 하니 그들이 와서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이는 자기 및 자기와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이 고기 잡힌 것으로 말미암아 놀라고 세베대의 아들로서 시몬의 동업자인 야고보와 요한도 놀랐음이라 예수께서 시몬에게 이르시되 무서워하지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시니 그들이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순종이 쉽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어린 시절 부모님의 심부름에 기쁨으로 다녀올 때는 어떤 보상이 있을 때였습니다. 하지만 보상이 없다면 신경질도 부리고 짜증도 내곤 했습니다. 보상이 전제되지 않는 순종에 대해서 우리는 기쁨으로 순종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래서 순종이 힘이 듭니다.
아브라함의 아버지를 두고 고향을 떠나는 순종, 100살에 얻은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는 순종, 자신의 목숨을 십자가에 못박는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예수님의 순종은 우리를 숙연하게 합니다. 순종은 자기의 편안함이나 이익을 포기해야 하는 걸림돌 때문에 힘이 듭니다. 그래서 사람의 인격 가운데 순종적인 태도는 그 사람의 가치를 높이는 요소가 됩니다.
순종의 훈련이 되면 어떤 일이든지 안된다 못한다는 생각대신 어떤 장에물도 극복하려는 긍정적인 태도를 갖게 됩니다. 신앙생활은 그 자체로 순종의 생활입니다. 5,6,7장 산산수훈을 읽으면서 “이런 말씀을 어떻게 실천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모두 해봤을 것입니다. 오른 뺨을 맞으면 왼뺨도 대줘라, 5리를 가자고 하면 10리를 가라, 겉옷을 달라고 하면 속옷도 줘라, 너를 미워하는 자를 축복하라. 이런 말씀을 기쁨으로 실천할 수 있을까요?
주님은 우리가 이런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래야 우리를 통해서 이 땅위에 주님의 거룩한 교회를 세우고,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할 수 있기 오늘 말씀을 통해서 순종의 결단이 새로워지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우리 죽으러 가자”고 하셨을 때 도망쳤던 제자들이 되지 말고 “네 주님 죽으러 갑시다.”아멘하는 영적으로 성숙한 성도들이 되기를 주의 이름르로 축복합니다.
순종의 삶의 시작은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성도는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소명을 깨닫습니다. 말씀을 들을 때 오병이어의 식탁이 펼쳐지고, 병자가 낫고, 죽은 자가 살아나며, 하늘의 능력이 임하여 홍해가 갈라지는 기적을 체험합니다. 말씀을 들어야 세상속에서 믿음의 가치관으로 세상을 변화시킬수 있습니다. 세상을 이기는 믿음의 능력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1절에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새”라는 구절을 마음에 새기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그 자리가 하나님의 새 역사가 일어나는 자리임을 믿고 기대하기 바립니다. 예수님은 말씀을 가르치기 위해 배가 필요했습니다. 그런데 그 배들은 그물을 씻고 있었습니다. 그물을 정리하여 다시 고기잡이를 준비하는 중이었습니다. 피곤했을 것입니다. 농부와 어부, 모두 고단한 삶을 대변하는 단어입니다. 도시의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사람들이 농촌과 어촌을 떠났겠습니까? 자기 부모 같은 가난과 고된 노동을 하며 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2천년전 갈릴리 호수 주변에 살던 어부들의 삶도 고달팠을 것입니다. 그물을 정리하고 집에 들어가 밥을 먹고 한 잠 자고 싶은 피곤이 몰려오는 때에 시몬에게 예수님이 “배를 육지에서 조금 떼어 줄수 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피곤한 줄 알고, 더구나 밤새 고기 한 마리 잡지 못해 베드로의 심사가 결코 편하지 않은 줄 알면서 배를 육지에서 떼라는 말은 어부로서는 화가 날만한 일이었습니다. 순종의 요구는 우리가 가장 피곤하고 지쳤을 때 밤샌 수고가 헛된 것이 되었을 때 즉 우리의 감정 상태가 잔뜩 짜증이 나서 순종하고 싶지 않을 때 우리에게 요청될 수 있습니다.
순종은 우리가 지치고 피곤할 때, 우리가 처한 상황이 실망이 가득할 때와 상관없이 하나님의 필요에 의해서 요청됩니다. 그래서 순종이 어렵고 힘들지만 순종은 때로는 생명이 걸린 일이 될만큼 가치있는 일입니다.
헨리 & 리처드 블랙커비가 쓴 책 <하나님의 음성에 응답하는 삶>이란 책에 리처드 블랙커비의 간증이 있습니다. “그가 처음 집례한 장례식은 어린 아이의 장례식이었는데 교회에 출석하는 부부의 첫 아이고, 조부모의 첫 손녀였습니다. 어느날 그 집에 심방을 가서 보니 그 아이는 부모의 말을 대놓고 무시했다. 오라고 하면 갔고, 앉으라고 하면 일어섰다. 부모는 그런 행동을 나무라기보다는 그저 귀여워했다. 하루는 그 집 앞마당 문이 열려 있었다. 딸아이가 마당을 빠져나가 길 쪽으로 가는 것을 부모가 보았다. 저쪽에서 차 한 대가 무서운 속도로 달려오고 있었다. 그 아이는 주차해 둔 두 대의 차 사이로 빠져나가 도로 쪽으로 달려갔다. “안돼! 돌아와!” 부모가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아이는 잠깐 서서 부모를 보고 씩 웃더니 다시 돌아서서 달려오는 차 쪽으로 곧장 뛰어들었다. 차는 아이를 세차게 들이받았다.
아이의 주검앞에서 통곡하는 부모는 단장(斷腸)의 아픔을 나타냈다. 그것은 한 아이가 부모 말에 순종하도록 훈련되어 있지 않아서 일어난 비극이었다. 나는 그 사건을 통해 큰 교훈을 얻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그분의 음성이 들릴 때 반드시 즉각 순종하도록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 음성을 듣고 그분께 순종하는 것은 유익을 얻는 것이 아니라 생명이기 때문이다.
출애굽의 역사가 우리에게 이야기해주는 것도 동일합니다. 순종하는 대신 원망과 불평을 쏟아 놓은 60만명의 장정들이 광야에 묻혔습니다. 광야 40년은 죽음의 행진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매일 41명씩을 광야에 묻었습니다.
만약 그들이 순종했다면 그들은 10여일만에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하나님께서 430년전에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주었던 약속을 실현하는 기쁨을 누렸을 것입니다. 순종은 생명이다.! 가슴에 새기며 살기 원합니다.
그렇게 예수님은 베드로의 순종을 통해서 배에 오르셔서 바닷가에 있는 사람들에게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나의 배가 쓰임받는 기쁨이 피곤을 이기는 힘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나의 순종을 주님이 사용하시는 것이 성도의 축복이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재능과 시간과 물질과 의지를 사용하시기를 원하시는 주님께 순종하여 쓰임받는 기쁨이 넘치는 삶이 되기를 원합니다.
첫 번째 순종은 무엇입니까? 상황을 이기는 순종입니다. 그물을 정리하고 집에 들어가 쉬어야 하는 상황, 밤새 수고를 했지만 한미라도 잡지 못한 실망감을 극복해야 하는 상황, 겟세마네 동산에서 졸음이 밀려오는 고단함을 이겨내는 상황, 코로나19로 인해 신앙의 장애물들 - 물질적 곤란, 건강의 문제, 관계의 아픔,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안등- 을 우리도 경험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어떤 상황이든지 순종의 장애물이 되지 못하도록 지금 우리가 처한 상황이 무엇이든지 순종으로 나가는 예신가족들이 되길 원합니다.
한걸음 더
베드로의 순종을 귀히 여기신 주님이 말씀을 가르치고 난 다음에 다시 말씀하십니다.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사실 이 말씀은 배를 떼어달라는 요청과는 전혀 다른 성격의 순종을 요구하는 말씀입니다. 사람이 살면서 여간해서는 포기가 안되는 것이 경험의 영역입니다. 지식에 대해서는 우리의 부족함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알수 없고, 나보다 더 전문적인 지식을 가진 사람이 있음을 인정하기 때문에 우리의 지식의 부족함에 대한 지적은 겸손하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경험의 영역으로 들어오면 여간해서는 다른 사람들의 말을 받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농부앞에서 “농사는 이렇게 지어야 한다.”거나 수십년을 과수원을 경영한 분앞에서 “과수원은 이렇게 관리해야 한다.”고 하면 지렁이 앞에서 주름잡냐?고, 공자 앞에서 문자 쓰냐고? 한마디 듣기 딱 좋은 경우입니다.
그래서 성도의 신앙생활에서도 자기가 경험한 일을 내려놓고 충고를 받아들이는 것, 순종을 받아들이는 것이 가장 어려운 일입니다. 국민일보 겨자씨에 올린 동숭교회를 섬기는 서정오목사님의 이야기입니다. “북한강의 한 지류인 소양강변에서 자란 내게 강물은 언제나 동에서 서로, 또는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중학생 시절 대관령을 넘어 강릉으로 가다가 동쪽으로 흐르는 강물을 보면서 충격을 받았습니다. ‘아니 어떻게 강이 동쪽으로 흘러갈 수 있지?’내게 익숙했던 경험과 상식이 통하지 않는 세상을 발견하면서 그동안 믿었던 ‘내 안의’ 세상이 얼마나 작은 곳이었는지 절실히 깨달았습니다. 말 그대로 ‘우물 안 개구리’였던 것이지요. 우리는 자신의 지식이나 경험을 절대화하는 오류를 조심해야 합니다. 세상은 우리의 경험보다 훨씬 넓고, 인생은 인간의 이성보다 훨씬 복잡하고 오묘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겸손해야 합니다. 우리가 붙잡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것은 오직 세상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 단 한 분뿐이십니다. 다윗은 시 39:6∼7절에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 같이 다니고 헛된 일로 소란하며 재물을 쌓으나 누가 거둘는지 알지 못하나이다 주여 이제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이 세상에 가장 확실한 것은 경험이 아니요 우리 주님 한분이라는 고백입니다.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베드로의 자존심에 상처를 줄 수도 있는 말씀이었습니다. 어려서부터 고기를 잡으며 잔뼈가 굵은 베드로에게 고기잡이를 가르치다니? 그것도 어부로 산 경험이 1도 없는 분 아닙니까? 목수로 나무 만지고 사셨던 분이 깊은데로 가서 그물을 내리라니, 베드로 입장에서 오히려 예수님을 가르쳐야할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선생님, 고기는 그렇게 잡는 것이 아닙니다. 뭘 알고 말씀하셔야죠?”핀잔이라도 줘야 라는데 베드로는 피곤한 가운데도 주님의 가르침을 들으며 은혜를 받은 것이 확실합니다. 순종할 마음이 생겼습니다. 사랑하는 예신가족 여러분! 말씀을 들어야 은혜를 받고, 은혜를 받아야 믿음이 생기고, 믿음이 생기면 순종하게 되고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하게 될 줄 믿습니다.
그가 대답합니다.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믿음이 무엇입니까? 말씀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자기 생각으론 그물을 내릴 수 없습니다. 자기 겅험으론 그물을 내리지 못하지만 말씀에 은혜받으면 그물을 내릴 수 있습니다.
순종의 두 번째 차원은 무엇입니까? 자기 경험과 생각을 내려놓는 순종입니다. 여기까지 가야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하는 믿음으로 성숙해가는 것입니다.
기적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렇게 하니 고기를 잡은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이럴수가? 밤새 잡히지 않던 고기가 깊은 데서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잡혔습니다. 상식이나 경험에 배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믿음은 우리의 상식과 경험을 뛰어 넘는 능력입니다. 밤새 수고하며 허탈하게 빈 그물만 끌어올리던 베드로가 그물이 찢어질만큼 많은 고기를 잡았습니다. 옆배의 어부들도 불러 그물을 올릴 정도였습니다. 사람이 가장 기쁠 때는 자기의 수고에 기대하지 못했던 놀라운 열매가 맺어질 때입니다. 두 배가 물에 잠길 만큼 물고기로 가득 채웠습니다. 어부들이 얼마나 기뻤을까요? 밤을 새운 헛수고를 잊을 만큼 많은 물고기를 잡았으니 놀랍고 행복한 일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기뻐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이 놀라운 광경앞에서 이상한 행동을 했습니다.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그는 노예가 주인 앞에 하듯 엎드렸고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베드로가 함께 기뻐하면서 예수님에게 “정말 감사하다”고 하는 것으로 끝날 수 있는 장면은 다른 결론을 맺었습니다. “그들이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저는 이 장면에서 기적을 보게 됩니다. 이 이야기가 한 나절에 이루어진 일이라면 한 사람의 인생에 일어난 이 놀라운 사건은 그 자체가 기적입니다.
베드로는 40년이상 의지하여 살아왔던 배를 버리고 새로운 삶을 살기로 결단합니다. 다른 배에 있던 어부들도 베드로처럼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르기로 결단합니다. 살아보니 새 삶의 결단이 쉽지 않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옛사람의 습관을 버리고 새로운 목적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이 된다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압니다. 누구나 새 삶을 살려다가도 먹고 사는 문제에 무딪쳐서 좌절하기 쉬운데 이 사람들은 뭘 믿고 어부로 살아왔던 삶을 한 순간에 정리할수 있었을까? 이 결단이 믿음의 기적입니다.
두 배에 가득차게 물고기가 잡힌 것이 기적이 아니라 이 어부들의 삶을 완전히 새로운 삶으로 바꾸어 놓은 것이 기적입니다. 우리는 이 본문에서 복음의 능력을 봅니다. 그 결단은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아서 순종했기 때문에 일어났습니다. 자기의 상황을 이겨낸 순종, 자신의 경험과 지식을 초월한 순종이 그들의 삶을 새롭게 하는 기적을 만들었습니다. 이 기적이 우리 모두의 삶에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한 것 이상, 상상할 수도 없는 놀라운 일을 행하실 주님을 기대합니다. 추석 모임 가운데 은혜를 나누고 그 은혜로 말미암아 기적을 체험하는 순종의 마음들이 일어나기를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