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글은 서울대 불교학생회 동문밴드에 올라온 공대80 홍병득님의 글로서, 저자의 허락을 받아, 달오가 반복된 말을 줄이고 편집한 글임>
인간몸 세포수는 1000조(10^^15)정도라고 한다. 23쌍으로 이루어진 46개의 염색체를 가지고 있고 배우자와의 결합을 통해 유전자는 후손에게 복제된다(유성생식). 내 손자손녀는 내 유전자를 4분의 1가진다. 이렇게 몇 세대를 내려가면 나의 유전자는 온전히 보전되는 것이 아니라 그릇에 잉크가 번지듯이 퍼져버린다. 윤회가 있기는 한 것일까? 나의 자식이 바로 나의 윤회는 아닐까? 나의 다음 생은 지금 나의 아들이나 딸로 인해 벌써 시작된 것은 아닐까? 아들이나 딸이 내가 아닌데 무슨 윤회라고 반박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당장, 나와 100% 똑 같은 DNA를 가진 사람이 복제된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이 나와 같은 사람이란 것을 내가 느낄까?
스티븐 스필버그의 영화 AI는 자식이 없는 부모를 위해 만들어진 아이 로봇이야기이다. 그런데 나중에 엄마가 임신이 가능해져 친아들이 생긴다. 로봇아이는 자기가 인간이라고 느끼고 엄마를 향해 끝없이 사랑을 갈구하지만 채워지지 못한채 결국 버려진다. 지구는 환경이 변해 망해버리고 바다밑에 잠겨 수천년이 지난 로봇을 외계인이 건져낸다. 외계인이 요즘 말로 포렌식을 해서 아이의 기억을 되살려 낸다. "이 아이에게는 행복했던 기억이 없어." "이 아이에게 뭔가를 해주면 어떨까?" 그 후에 로봇에 남아있는 머리카락을 근거로 엄마를 복제해서 아이로봇과 하루 지내게 해준다. 로봇은 엄마를 위해 커피도 타주고.. 즐겁게 하루를 보내지만 복제된 엄마는 왠지 잠만 오고 몽롱하다. 그래서 하루가 지나가는 것으로 영화는 슬프게 끝난다.
이 영화를 보고 윤회, 부모자식간의 정이란게 무엇일까 깊이 생각해보게 되었다. 지금의 내 기억,이 프로그램된 모습이 나중에라도 구현되면 그게 윤회가 아닐까? 내 아이들을 통해서 (부분)복제가 일어나고 있으니, 나도 전생의 내가 (부분)복제된 것인지도 모를 것이다. 사실 내가 지금 살아있어도 어제의 내가 오늘의 내가 아니고, 예전에 내가 겪었던 일도 전부 압축해서 기억해버리는 게 우리의 삶이다. 하물며 여러생에 있어서는 더욱 그럴 것이다. 나의 윤회는 나의 죽음을 기다릴 필요도 없다. 선한 일을 하면 나의 다음 생에 복을 받는 것이 아니라 벌써 시작된 나의 아들 딸의 삶을 통하여 내유전자는 어떤 형태로든 혜택을 받을 것이고, 나쁜 짓이나 치명적 경제적 실수도 다음 생을 기다릴 필요없이 거의 리얼타임으로 반영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우리의 정신작용이라는 것도 뇌에서 일어나는 일종의 화학물질 전달과 반응이라는 현대 생물학계의 연구결과가 쏟아져 나오고 있다. 색즉시공 공즉시색이 맞다는 말이다. 생각은 화학물질의 전달과 반응이므로, 우리가 죽으면 영혼이라는 작용도 그대로 로봇의 스위치 꺼지듯이 꺼져버리는 것이 아닐까? 내생이 온전히 그대로 1:1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몇 세대 지나가면서 많은 사람들을 통하여 다시 사는, 지금의 나는 느끼지도 못할 또 다른 나의 분신들로 잘 살아갈 것이다. 바꾸어 생각하면 우리의 흔히 만나는 이웃들도 우리가 유전자를 공유하는 인연있는 사람들일 확률이 높다.
징기스칸은 생전에 이런 말을 했다. 남자 최고의 즐거움은 정복해서 그 왕비나 딸들을 범하는 것이다... 그 결과 징기스칸의 유전자는 그 어떤 남성보다 아시아권에 많이 퍼져 있다. 우리 고려의 백성들도 노예로 원나라에 많이 팔려갔고 그 일부는 원나라의 황실에 들어갔을터이다. 나도 징기스칸의 후예일지도 모른다. 실제로 징기스칸 Y 염색체 유전자 연구에 의하면 아시아 남성의 8%가 징기스칸의 유전자를 가지고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것을 전 세계적으로 환산하면 남성 200명당 한 명 꼴로 동일한 남성의 후예라는 것이다. 좁은 한반도라면 그 확률은 훨씬 더 올라간다. 지나가다가 마주치는 많은 사람들이 나와 같은 조상을 두고 있는 사람이란 뜻이다. 내가 좋은 일을 하면 내 유전자들이 그 혜택을 본다. 그래서 옷깃만 스쳐도 억겁의 인연이 닿아야한다는 부처님의 말씀이 생물학적으론 확실하다고 생각된다.
불교에서 출가해서 스님들이 수행하는 것은 윤회의 사슬을 끊고 깨달음을 얻는 것인데, 깨달음은 다른 문제지만 윤회의 사슬을 끊는 것은 출가해서 다시 이성 인연을 만들지만 않으면 쉽게 성취된다. 그러니 결론적으로 스님들은 윤회의 사슬을 끊는다는 발원은 굳이 하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여기까지 생각하면 삶이 덧없어질지도 모르지만 다른 의미에서는 내가 세상에 대해 좋은 일을 하고 복을 쌓는다면, 확산해 퍼져갈 나의 다음 생들이 혜택을 입을 것이니까.. 아무튼 그런 발원이라도 해서 살아가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다.
-----------------
댓글: 이창석(달오) 공불76
통찰있는 좋은글 감사합니다. 제가 오랬동안 해 왔던 생각들과 거의 대부분 겹쳐 반갑습니다. 붓다께서 현대과학적 지식을 가지셨다면 충분히 이와 같이 사유하셨을 수 있을 것입니다.
생각의 바닥을 치는 이같은 사유는 매우 요긴한 단서를 제공해 주고, 현실에서의 고통이 있다면 상당한 부분, 이를 통해 완화될 것입니다. 위 님의 글에도 무상과 무아가 함축되어 바탕에 깔려있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그러나 역시 더 궁극적 사유의 돌파구는 무상과 무아의 직면이지 않을까 생각들어 한마디 더 합니다. 사실 윤회사상은 붓다의 사상이라기 보다 그 당시 인도인들의 믿음이자 문화였고 붓다는 수용이라기 보다는 정면거부를 피하셨던 것으로 이해됩니다. 붓다에게서 윤회와 고통의 끝은 역시 무상과 무아에 대한 통찰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봅니다. 모든것은 연기를 통해 무상하게 작용하며 흐르고 있을뿐, 주체적 실체는 없다는 것이죠.
그래서 붓다께서 정리하셔 가르치셨던 것이 팔정도이었겠지요. 바른 이해를 바탕으로 한 바른견해가 모든 것의 나침반이고 그리고 나날의 삶에 사언행을 바로 하면서 바른 생계수단을 가지고 바르게 노력하여 깨어있음과 그것의 안정인 사마디를 완성해 가면 삶은 행복할수 있다는 것이죠. 이것은 아는 것이 아닌,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것이고 그것을 될때까지 반복적으로 이해하고 연습하는 것을 수행이라고 하는 것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