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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212 살림교회 주일공동예배(주현절 후 여섯째 주일)
기억과 순종
신30:15~20; 고전3:1~9; 마태5:21~37
오늘 우리가 읽은 제1독서 신명기는 구약성경에서 매우 중요한 책입니다. 율법서가 구약성경 66권의 중심이라면 신명기는 그 율법서의 중심이 되는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구약성서의 중심이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어떤 구약학자들은 “신명기가 그 중심이다” 라고 말할 정도로, 신명기는 구약성경의 핵심이 되는 책입니다.
신명기 말씀은, 출애굽 이후에 광야생활을 마치고, 이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기 직전 모압 광야라는 곳에서 모세가 광야를 지나온 백성들에게 마지막 설교(유언)를 하는 책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신명기는, 모세가 시내산에서 받은 율법 (12~25장)의 말씀을 중심에 두고 그 앞과 뒤에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거든 이 율법의 말씀을 잘 지키라는 설교를 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지요. 신명기를 영어로 Deuteronomy라고 하는데 이는 duetero(두 번째)라는 말과 nomos(율법)라는 말이 합쳐진 것으로, 우리 명칭 신명기, 거듭 신(申)자에 명할 명(命)자가 거기서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신명기 전체의 핵심 키워드가 있다면, “기억하라”(츠콜)라는 말과 “들으라”(쉐마, 순종하라)라는 말입니다.
신명기는 기억하라는 말씀을 반복합니다.
“너희는 이집트에서 종살이 하던 때를 기억하여라.”
“너희가 이집트 땅에서 종살이 할 때 주 너희 하나님이 강한 손과 편 팔로 너희를 이끌어 내었음을 기억하여라.”
“너희가 광야를 지나온 사십년 동안 주 너희 하나님이 너희를 어떻게 인도하셨는지를 기억하여라.”
“너희는 광야에서 주 너희의 하나님을 얼마나 노엽게 하였던가를, 잊지 말고 기억하여라.”
또 반복해서 나오는 단어가 “들으라”(순종하라)라는 단어입니다. 신명기 6장 4절의 “쉐마 이스라엘”은 유명합니다. “쉐마 이스라엘(이스라엘은 들으십시오), 주님은 우리의 하나님이시오, 주님은 오직 한 분뿐이십니다. 당신들은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당신들의 하나님을 사랑하십시오....”
오늘 우리 본문에도, “내가 오늘 당신들에게 명하는 대로, 당신들이 주 당신들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길을 따라가며, 그의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면...”이라는 말과 “그러나 당신들이 마음을 돌려서 순종하지 않고(듣지 않고), 빗나가서 다른 신들에게 절을 하고 섬기면...”을 대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잘 듣는다(순종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명령과 법도를 지키는 것이라고 요약할 수 있습니다. 사실 이것은 신명기의 전체 요약이라고 할 수 있고 구약성경 전체의 요약이라고 할 수 있지요.
그래서 오늘 우리 본문에서도 모세는 설교를 마무리하면서 결단을 요청합니다. 생명과 번영, 죽음과 파멸 앞에서 생명과 번영을 택하라고 합니다. 그것은 주 당신들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말씀을 들으며 그를 따르는 것입니다. 그러면 살 것이고, 하나님이 조상들에게 주시겠다고 맹세하신 그 땅에 들어가 잘 살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신명기의 말씀은 이렇게 참 단순합니다. 그런데 사실, 이런 말씀들을 우리 삶 가운데서 온전히 실현하기는 참 어렵습니다. 전에도 말씀드린 것처럼, 헨리 나우웬이 갤커타의 마더 테레사를 만나 자신이 얼마나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들을 안고 있는지 납득시키려고 10분간 자신의 입장을 데레사 앞에서 열심히 설명했지요. 그때 데레사가 조용히 했던 말, 기억하지요? “글쎄요, 당신이 하루 한 번씩 주님을 찬양하고 당신이 알기에 나쁜 일은 하지 않는다면... 모든 일은 잘 될 거예요.” 나우웬은 너무 뻔한 말이어서 처음에는 충격을 받았지만, 사실 이 말이 진실한 말이었음을 인정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말씀, “예 할 때에는 예라는 말만하고, 아니고 할 때에는 아니오라는 말만 하여라.” 라는 말씀도 그런 맥락에서 단순하지만 참 어려운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아직 우리의 기억이 정화되지 않았고, 그래서 아직 제대로 듣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집트의 노예로 살다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는 노예근성을 벗고 온전한 자유인으로 자신들의 참된 주인이신 하나님을 섬기려고 합니다. 이것은 이집트의 노예에서 하나님의 노예로 대체된 것이 아닙니다. 만일 그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 다시 가나안의 신들(바알과 아세라)에게 유혹되어 절하고 섬긴다면, 그들은 섬겨야 할 주인을 단순히 대처한 것이 되겠지요.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긴다는 것은 그런 수평적인 이동이 아닙니다. 돈의 노예로 살다가 단순히 힘과 권력의 노예로 바뀌는 수평적인 대체가 아니지요.
그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며 그의 명령과 법도를 지킨다는 것은 그들에게 코페르니쿠스적인 전환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 전에는 자신이 추구하는 자기가 자신의 중심이었다면, 이제는 자신의 에고가 자기의 중심이 아니라, 오직 자신의 바탕이신 하나님만이 자신의 중심임을 알고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노예에서 자유인으로 사는 것이고, 하나님만을 섬긴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신명기가 전하는 율법을 외적인 법으로만 이해하면, 또 다시 율법의 노예가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의미에서 우리를 다시 율법에서 해방시키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기억의 정화”가 필요한 것이지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를 떠나 40년간 광야 생활을 했던 것도 바로 “기억의 정화”를 위한 것입니다. 자신들이 이집트에서 노예생활을 했던 것을 직시하고, 그것이 자신들의 진정한 신분이 아님을 깊이 기억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사실, 우리가 영적 여정을 걸어간다는 것은 한마디로 우리의 기억을 정화하는 일을 한다는 말입니다.
오늘 주보의 테오리아에 올린 토머스 머튼의 글이 있습니다.
기억(Memory)은 무수히 많은 “기억들(memories)”에 의해 오염되고 못쓰게 됩니다. 내가 하나의 진정한 기억을 가질 것이라면, 반드시 먼저 잊어야 하는 수많은 것들이 있습니다. (그렇지요, 우리는 하나의 진정한 기억, 내가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라는 기억을 갖기 위해 수많은 기억들을 잊어야(unlearn) 합니다.) 기억이 단지 과거에만 닿을 때(과거의 상처에만 매몰되어 버릴 때) 그것은 그 자체로 충만하지 않습니다. 현재에 생생하게 살아있지 않은 기억은 지금 여기를 “기억하지” 못하고, 참된 정체성을 “기억하지” 못하기에, 기억이 전혀 아닙니다. (현재에 생생하게 살아있는 기억은 진정한 나의 정체성을 통해 기억하는 것입니다) 사실들과 과거의 사건들 외에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해서 결코 현재로 돌아오지 못하는 사람은 기억상실의 희생자입니다.
기억의 정화는 과거 자신이 상처들을 바로 이해하고 상처와 상처 받은 이에게 제자리를 잡아 주은 일종의 치유 행위입니다. 그래서 과거의 상처가 바로 자기 자신은 아니며, 그 상처로 인해 자기 자신 전체가 상처 덩어리가 된 것은 아니라고 하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지요. 오히려 그런 상처들로 인해 하나님의 은총을 입을 수 있게 되었고, 상처받은 우리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의 중심임을 새롭게 깨닫게 되어 우리 행복의 방향을 바꾸어 지금 여기를 상처받은 치유자로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지요.
여러분, 우리의 기억은 어떻습니까? 우리는 기억조차 못하는 과거의 기억을 단지 정서로만 기억하면서, 일상의 삶 속에서 내가 왜 그런지도 모르면서 숱한 정서적인 영향을 받고 있다는 것, 이것이 우리의 현실이고 조건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이렇기 때문에 신명기는 거듭 반복하지요.
“너희는 이집트에서 종살이 하던 때를 기억하여라.”(우리가 환자라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지요)
“너희가 이집트 땅에서 종살이 할 때 주 너희 하나님이 강한 손과 편 팔로 너희를 이끌어 내었음을 기억하여라.”(우리의 진정한 정체성은 상처받은 노예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임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너희가 광야를 지나온 사십년 동안 주 너희 하나님이 너희를 어떻게 인도하셨는지를 기억하여라.”(우리의 무지함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은총으로 망가지지 않았고 오히려 여기까지 왔음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너희는 광야에서 주 너희의 하나님을 얼마나 노엽게 하였던가를, 잊지 말고 기억하여라.”(그럼에도 우리는 또한 얼마나 함정에 계속해서 빠지면서 구습에서 벗어나지 못했는지 기억하는 것입니다)
이런 기억의 정화를 통해서 우리는 잘 듣게 됩니다. 순종할 수 있게 되는 거죠. 잘 듣기 위해서는 자기를 비워야 합니다. 자기가 달라붙어 있는 것들에서 떨어져야 합니다. 그래서 오래전 사막의 교부들은 잘 듣기 위해서(순명하기 위해서) 그렇게 자기를 갈고 닦았던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기 식 대로 보고 자기 식 대로 듣게 되어 진정한 순종에 이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것은 우리에게도 매우 중요합니다. 잘 들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수없는 생각으로 들끓는 생각들에서 자유로워져야 합니다. 자신의 생각들을 하나의 생각으로 흘러버릴 수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렇지 않고 자신의 어떤 한 가지 생각에 꽂혀 거기서 떨어질 수 없다면 우리는 제대로 들을 수 없습니다. 공감과 연민은 잘 들을 수 있는 능력에서 나옵니다. 자신의 생각에서 떨어질 수 있는 능력에서 나옵니다. 자신의 생각에 괄호를 칠 수 있는 여유에서 나옵니다. 계속해서 자신을 변명하고 해명하고 증명하려고 해서는 남의 소리를 잘 들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들을 수 있다면 남의 소리도 잘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의 말씀은 잘 듣는다면서, 남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오늘 고린도전서 3장의 말씀은 이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번 주일에 말씀드렸듯이, 고린도교회가 여러 분파로 나누어져 있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분열의 문제를 “사람의/세상의 지혜”와 “하나님의 지혜”라는 개념을 대립하여 설명했지요. 왜 교회에 분열이 생기는가? 바로 사람들이 “하나님의 지혜”를 알지 못한 채 “사람의/세상의 지혜”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바울이 말하는 사람의 지혜가 뭘까요? 이는 사람의 꾀나 꼼수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신념, 고집, 주장을 전부라고 생각하고 자기중심에서 생각하는 사고를 말합니다. 여기서 비교의식, 경쟁의식, 비난의식에 빠져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회 안에 바울파니, 게바파니, 아볼로파니, 그리스도파라는 분열이 생긴다는 것이지요.
이에 반하여 “하나님의 지혜”란 자기의 생각을 비우고 좀더 큰 생각, 좀더 큰 전체로 옮겨간 것을 말합니다. 바울은 이런 행위를 하나의 상징으로 요약하는데, 그것이 바로 “십자가”라는 말입니다. 여기서 바울은 십자가를 “하나님의 지혜”라고 말합니다. 바울에게, 십자가는 우리의 모든 것을 제로로 만드는 원점이었습니다. 자신들이 가진 것, 자랑스러운 것, 강한 것, 소위 세상에서 먹히는 모든 것, 세상의 지혜가 원점(제로)이 되는 자리가 십자가였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이런 자랑스러운 것들만 제로가 되는 자리가 아니라, 세상에서의 패배, 사람의 절망, 좌절도 제로로 만드는 자리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세상의 것들이 상대화되는 자리고, 사람들이 벌거숭이, 빈손이 되는 자리가 십자가였습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전체로서의 하나님이 계시는 겁니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십자가에 진정한 승복이 있고, 진정한 자유가 있고, 깊은 유연성이 있으며, 따라서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난다는 겁니다.
세상의 화려한 지혜로 보면, 이 벌거숭이, 비움과 빈손은 어리석어 보일 것입니다. 그것은 불안하고 초조한 것이지요. 뭔가 더 있어야 하고, 더 소유해야 하고, 더 붙잡아야 살 것 같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비움을 경험한 사람, 특히 바울은, 십자가, 이 비움과 빈손이 진정한 하나님의 능력임을 고백합니다. “십자가의 말씀이 멸망할 자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지만, 구원을 받은 사람인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고전1:18)
그러면서 바울은 오늘 영에 속한 사람과 육에 속한 사람을 대조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영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빈손으로 승복된 상태, 그러니까 가난한 마음, 마음에 장애물이 없이 정화되어 하나님의 영이 활발히 활동하게 되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영을 받은 사람은 어떤 특별한 영적 체험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에고를 비우고, 잘 듣는 사람, 그러므로 하나님께 온전히 승복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지요.
이런 작은 빈손이 모여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선물들을 점점 깨달아 알게 되는 겁니다. 그 선물들은 이 세상이 줄 수 없는 평화일 수도 있고, 이 세상을 담대하게 살아가는 믿음일 수도 있고, 참된 자유와 삶의 유연성일 수도 있고, 진정으로 말없이 섬길 수 있는 사랑의 덕일 수도 있고, 어떤 상황 속에서도 절망하거나 좌절하지 않는 희망일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우리가 알아차리지도 못하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일 수도 있습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고린도교인들을 향하여, 여러분은 영에 속한 사람(영적인 사람, 프뉴마티코스)이 아니라 육에 속한 사람(육적인 사람, 사륵키노스, 까로)이라고 직설적으로 말합니다. 왜냐하면, 여러분 가운데 시기와 싸움이 일고 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분열되어 싸우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러니 여러분은 육에 속한 사람이고, 육에 속한 방식대로 살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반문합니다. 자기주장과 자기 합리화와 그럼으로써 남과 비교하고 남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지혜를 사랑하는 사륵키노스(육적인 인간)이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묻습니다. “아볼로가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입니까?” 아볼로와 바울은 당신들을 믿게 한 일꾼들이고, 주님께서 맡겨주신 일을 하는 도구들일 뿐이라고 상대화시킵니다. 그러면서 나 바울은 심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고, 오로지 하나님께서 자라게 하셨다고 합니다. 심는 사람과 물을 주는 사람은 각각 수고한 만큼 자기 삯을 받는 것이고, 진정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겁니다.
여러분, 우리 중에 누구도 생각을 다 비운 사람은 없습니다. 자신의 에고를 다 내려놓은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우리의 생각에 머물고 살면서 어떡해서든지 자기의 중심을 스스로 만들어 보려고 애쓰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자주 겸허하고 빈 마음으로 돌아와 주여, 제게 자비를 베푸소서, 고백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기도의 자리를 마련하는 것이 기억의 정화의 중요한 훈련입니다. 이것이 순종과 승복의 훈련이지요. 하나님 앞에 자신의 모든 생각을 거두고 앉아 있는 관상기도, 하나님의 말씀을 거듭 반복해서 읖조리는 묵상, 일상에서 잠깐 잠깐 자신 안에 머물러보는 머무름.
기도하겠습니다.
사랑의 주 하나님,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우리는 생명과 복을 택하기보다 오히려 죽음과 화를 택하고 살아가는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기억을 정화하시어 우리의 신원을 똑바로 기억하게 하시고, 우리가 이 땅에서 잘 듣고 사는 순종의 사람이 되게 하게 주옵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