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신문>>에서는 올해를 나타내는 사자성어로 짙은 구름이 드리웠으나 비는 오지 않는다는 뜻의 ‘밀운불우’로 정하였다. <<주역>> 소축괘의 괘사에 나오는 말이다. 이런 말에 공감하는 사람이 많든 적든 이런 작업은 이제 그만두어야 할 때이다.
먼저 사자성어가 대부분 우리말이라 보기 어렵다. 한자를 빌어 적지 않으면 말뜻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한자로 적어도 그 뜻을 알기 쉽지 않다. 중국 고전에 나온다고 우리말 어휘 체계의 시민권을 얻게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런 말이 국어사전에 올라 있을 수도 있겠으나 국어 사전들이 별로 믿을 게 못 된다는 게 문제다. 흔히 쓰이는 사자성어도 아니다. 말본으로 보아도 우리말이 아닌 것이 매우 많다.
다음으로 중국 고전에 대한 비판 없는 태도를 부추긴다. 중국 고전의 중화주의적 성격 때문에 이것은 작은 문제가 아니다. 사자성어의 뿌리라 할 수 있는 <<천자문>>은 <<논어>>와 더불어 강한 중화주의적 색체를 띠고 있는 책이다. 유럽 중심주의에 대해서는 눈을 뜨고 있으면서도 오랫동안 우리를 옥죄던 중국 고전의 중화주의적 세계관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은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중국 고전의 개념으로 한 해를 마무리하는 일은 우리가 중화주의적 교양을 깊이 내면화하고 있음을 뜻한다. 실질적으로 중국의 연호를 쓰던 시대의 눈으로 현실을 보는 것과 다르지 않다. ‘밀운불우’는 주나라의 문왕과 은나라 주왕 사이의 옛일에 뿌리를 두고 생긴 표현이다. 이같이 우리 현실을 중국의 역사와 문화의 눈으로 보게 된다. 우리 현실을 보는 준거틀이 중국의 역사와 문화가 되기 때문이다. <<서경>>, <<춘추>>, <<시경>>은 말할 것도 없고 <<주역>>도 은나라와 주나라의 역사적 체험을 정리한 것이다. <<중용>>은 춘추전국시대의 정치적 혼란을 끝낼 최고 권력자의 지도력을 강조한 정치 철학서이다. <<주례>>는 이상화된 주나라의 관료 직제를 상상으로 그린 것이다. 두루 알다시피, 유학은 존왕양이라는 그 시대의 문제 의식에서 나왔디. 그러나 방어적이었던 존왕양이의 이념은 중국이 통일되면 끝없는 팽창주의가 될 수밖에 없었다.
더욱 큰 문제는 중국 고전 속에 그려진 참담한 우리 모습이다. 유학적 세계관 속에서 우리는 흔히 ‘동쪽 오랑캐’로 나타난다. ‘오랑캐’는 그 풍속을 고치지 않으면 ‘중화’가 될 수 없다. 유학적 세계관을 받아들일 때, 중국과 다른 우리의 고유한 문화는 설 땅을 잃어 버린다. 중국 한족과 같거나 어긋나지 않아야 ‘문화’가 된다. 유학적 세계관은 주변의 ‘오랑캐’를 한족 문화로 동화시키는 강력한 메카니즘이었다. 주 희는 그의 대화록에서 고려가 오랑캐 풍속을 갖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다. 중국이 우리를 ‘예의의 나라’로 보고 있다고 감격하는 유학자들도 적지 않았다. 이는 무척 소박한 태도이다. 이 말이 사대 외교에서 나온 것이든 나날의 삶에서 나온 것이든 이는 우리가 중국의 눈에 어긋나지 않도록 많은 값을 치른 결과이다. “한결같이 중화의 제도를 따라” 중화와 엇비슷해진 결과다. 또 ‘오랑캐’를 면한 것은 흔히 기자가 끼친 가르침 덕분이라 표현되었다. 사실상 그 뜻은 오랑캐가 뜻밖에도 중화의 문물을 잘 받들어 기특하다는 것에 가깝다. ‘예의의 나라’는 곧 ‘작은 중화’와 나 그 알맹이는 같아진다. 중국의 역사서는, 고려와 조선을 그들의 동쪽 울타리라고 보았고 이는 군사적 측면에서 중화주의적 관점을 드러내는 것이다. 오늘날에도 그들이 우리를 보는 관점은 아무런 변화도 없다. ’예의지국, 작은 중화, 동쪽 울타리‘는 유학적 세계 질서 속에서 우리에게 할당된 자리였다. 중국 고전이 전한 중화주의는 우리 스스로의 삶의 방식을 긍정하지 못 하게 만들고 스스로의 삶을 끊임없이 부정하게 만들었다. 남의 눈에 기대어 현실을 보고 스스로의 눈으로 세계를 읽고 풀이하는 일을 우리 스스로가 해내지 못하였다. 이런 일을 하려면 먼저 우리말과 글을 자유자재로 써야 생각을 표현할 수 있는데, 우리말과 글에는 ’‘방언, 언문”이란 딱지를 붙이여 외면하는 게 자랑이었다. 중국 역사와 문화를 우리 것보다 더 질 알게 된 것이다.
‘조선의 공자’는 없고 ‘공자의 조선’만 있다는 우리 유학사에 대한 진단은 한때의 감정적인 주장이 아니다. 작은 중화되기는 우리가 한문을 소리로만 읽고 한문을 중국인과 맞먹는 수준으로 쓰려고 노력해 온 것과 결코 무관한 일이 아니다. 극단적 한문 숭배와 우리 말글에 대한 외면은 한 동전의 앞면과 뒷면처럼 연관되어 있었다. 한문 잘 하는 게 큰 자랑이 될 수록 중화주의의 늪 속으로 깊이 빠져 들어간 것이다. 인과 예와 같은 유학의 덕목에서도 나름대로 지역이나 인종을 뛰어넘는 보편적인 지향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는 지역적 인종적 색체가 두렷하다. 일본의 유학사만 보아도 우리와 매우 다르게 전개되었다.17세기의 야마자키가 공자가 인과 예를 내세우면서 군사를 이끌고 쳐들어 와도 맞서 싸워야 한다고 말한 데서 보이듯 유학의 중화 이데올로기적 성격에 대한 자각이 엿보인다. 한문을 대하는 태도에서도 우리와 차이를 보인 일본은 미국말도 한문을 대하던 태도로 받아들이고 있다. 우리는 머지않아 초등학교 입학 때부터 미국말을 가르치게 된다. 혀 수술에 조기 유학까지 거침없다. 미국말로 하는 강의는 자꾸 늘어나고 있다. 학문과 교육에서 취업과 승진에서 미국말이 차지하는 비중이 옛날의 한문이 차지하던 자리와 무엇이 다른가. 계층 이동에서 한문이 차지하던 자리를 미국말이 차지하였다. 교육이 한문 배우기였던 것처럼 미국말 배우기와 교육이 사실상 동일시되고 있다.
주 시경과 조선어 학회에서 비롯된 한글 사랑 운동은 한글만 쓰기나 말다듬기에 한정되지 않는다. 중화주의적 세계관을 비판하면서 우리 지성사를 다시 해석하고 우리 학문 정책과 말글 정책을 세우기 위해 빼놓을 수 없는 근본 원칙이다. 한문학 연구나 중국 철학 연구도 텍스트를 해석하는 차원을 너머 우리 역사에서 한문학 연구가 어떤 의미를 갖고 있으며 겨레 문화의 앞날에 한문학이 어떤 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가를 진지하게 생각해야 할 때이다. 역사는 그냥 되풀이되는 것만은 아니다. 값진 보물은 중국 고전이란 골동품 창고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최근 노 무현 정부가 추진했던 일들이 지지 기반을 스스로 허물며 한 일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한미 자유 무억 협정이 좋은 보기다. 이를 생각한다면 조건은 갖추었으나 일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밀운불우’라는 낯선 말보다 ‘제살 깎아 먹기’나 ‘도끼로 제 발등 찍기’가 올 한 해를 적절하게 그려내는 말이 아닐까. 겨레의 삶과 슬기가 배인 속담으로 눈을 돌리는 게 훨씬 나을 것이다.
첫댓글김영환 교수님은 서울대 철학과를 나온 분입니다. 저는 서울대 국문과 이희승교수와 그 제자, 후배들이 한글을 짓밟는 것에 몹시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서울대 출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기분입니다. 그러나 저와 함께 국어운동을 한 서울대 국어운동학생회 초대 회장 이봉원님과 김영환 교수님, 전 한겨레신문 김종철 논설위원님은 제가 좋아합니다. 이 분 들 때문에 서울대를 터놓고 비판하지 못합니다. 서울대 출신이면서 다르니까...
첫댓글 김영환 교수님은 서울대 철학과를 나온 분입니다. 저는 서울대 국문과 이희승교수와 그 제자, 후배들이 한글을 짓밟는 것에 몹시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서울대 출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기분입니다. 그러나 저와 함께 국어운동을 한 서울대 국어운동학생회 초대 회장 이봉원님과 김영환 교수님, 전 한겨레신문 김종철 논설위원님은 제가 좋아합니다. 이 분 들 때문에 서울대를 터놓고 비판하지 못합니다. 서울대 출신이면서 다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