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 이야기(3) 효시(嚆矢)
매년 정월 대보름 때가 되면 우리는 활터에 모여 야사(夜射)를 하곤 했다. 밤하늘에는 보름달이 휘영청 떠 있고, 겨울의 찬바람이 옷깃을 스치는 밤. 과녁에는 불빛이 비춰지고 차가운 밤공기를 가르며 화살을 날렸다. 과녁을 맞출 때마다 명중을 알리는 소리가 어두운 밤하늘에 울려퍼지고 그때마다 우리는 환호하곤 했다. 그때 우리는 일 년의 시작을 알리는 효시를 쏘았다. 효시란 화살의 일종으로 화살촉이 있는 부분이 살상하기 위한 날카로운 촉이 아니라 마치 피리처럼 바람이 통과하여 소리를 낼 수 있도록 공간이 있고, 구멍이 있는 뭉툭한 촉이 달린 화살을 말한다. 그래서 효시를 쏘면 그 촉 부분의 장치가 공기와 마찰하면서 소리를 낸다. 효시의 효(嚆)자는 소리를 낸다는 뜻이다. 그러니 효시란 소리를 내는 화살을 말한다.
효시는 살상이 목적이 아닌 신호용이다. 전투의 개시를 알리는 첫 신호가 바로 효시이다. 그래서 지금은 이 효시란 단어가 어떤 사물이나 현상이 시작되어 나온 맨 처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 되었다. 예를 들면 홍길동전은 국문소설의 효시이다라고 말할 때이다.
밤하늘을 가르며 슝-하는 소리를 내며 날아가던 효시. 효시는 목표를 겨누지 않는다. 그저 빈 하늘을 향해 쏠 뿐이다. 살상을 위해 상대를 목표로 조준하는 무기들이 난무하는 전장에서도 효시는 그저 허공을 향할 뿐, 전장의 모든 무기가 가지고 있는 목표를 겨누는 살상의 전장 논리를 부정한다. 목표를 겨눈다는 것은 긴장을 한다는 것이다. 긴장하지 않으면 목표를 맞출 수 없기 때문이다. 목표까지 도달하기 위해서는 팔의 근육을 긴장시켜 활을 힘껏 당기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정확히 표적을 맞추려면 모든 감각기관들이 세밀하게 작동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우리가 효시를 쏠 때만큼은 편한 마음으로 활을 잡는다. 목표가 없기 때문이다. 그저 활을 잡고 효시를 얹어 목표 없는 허공에 대고 쏘기만 하면 된다. 맞춘 사람도 없고, 못 맞춘 사람도 없다.
효시는 날카롭게 날아가지 않는다. 앞에 달린 뭉툭한 소리기관이 공기의 저항을 많이 받아 둔탁하게 날아간다. 그래서 느리다. 멀리 날아가지 못한다. 그렇다고 살상력도 없고, 느리고, 멀리 까지 날아가지않는 효시의 역할이 다른 화살에 비해 미미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오히려 모든 전투의 개시를 알리는 중요한 역할을 가지고 있다. 효시가 쏘아지지 않으면 모든 화살들은 침묵한다.
내 삶의 효시는 어디였을까. 나의 생물학적 효시는 당연히 어머니의 뱃속에서 태어날 때 울었던 그 울음소리였다. 그때 나는 효시를 쏘았을 때 슝-하고 소리를 내며 전투의 시작을 알렸던 효시처럼, 힘찬 울음소리를 내며 내 삶의 출발을 시작했다. 그러나 생각해보니 그 첫 울음소리는 진정한 내 삶의 효시는 아니었다는 느낌이 든다. 그저 본능적인 울음이었을 뿐, 효시가 의미하는 그런 울음이 아니었다. 그 이후 나의 삶은 효시가 아닌, 날카롭게 목표를 날아가는 살생의 화살이었다. 정신없이 빠르게 달려야 했고, 무엇을 이루기 위해, 또 무엇이 되고자 날아갔던 나의 화살은 때론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기도 했다.
그렇다면 내 삶의 진정한 효시는 언제인가. 바로 지금이 아닐까. 치열한 삶의 목표에서 빗겨선 지금이 나의 효시적 삶의 시작점이다. 목표를 쏘아 맞춰야 한다는 긴장감에서 벗어나니 승자와 패자의 개념도 모호해지고, 마음은 한없이 여유로워진다. 무엇을 이루고자 하는 것은 스스로를 묶는 것이며, 그러면 자신은 점점 작아지고 자유롭지 못하게 된다. 소망하는 것을 버리면 나는 무애(無涯)의 자연인이 된다.
그리고 효시처럼 한층 짧아진 삶의 사거리를 나는 빠르게 달려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느리게 걸어가고 있다. 앞만 보고 달리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천천히 주변의 아름다운 풍경을 즐기면서 산책하듯 걸어가고 있다. 그러니 이전에 보지 못했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전에는 짧은 지식을 가지고 세상을 재단하려고 했고,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려고 했다. 그리고 남의 비판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해 마음은 항상 불편했다. 생각해보니 지금까지 남이 나를 구속해서 나를 묶은 것이 아니라 내 스스로가 나를 묶어 왔다. 이제부터 나는 먼지를 훌훌 털고 효시처럼 자유롭게 살리라. 무엇이 되려고도 하지 않고, 무엇을 이루려고도 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매일매일 새로운 삶의 출발선상에 있다. (2022. 8.16)
첫댓글 지금의 지금까지의 삶중 가장 성숙된
순간이지만 남은 여생중 가장 젊은 순간입니다.
지금 이순간은 모든것들로부터 해탈
된 참다운 대자연인의 삶이 시작되
는 효시가 되겠지요.
많은것들을 생각케하는 좋은글, 감
사드립니다.😛
백강이 활의 효시로 인생의 효시를 나타내주셨군요. 많은 것 생각케하는 의미가 깊은 주제로군요. 오늘 이 시간 또 새로운 각오를 다집니다.
효시의 의미와 지금의 삶이 잘 맞아 떨어지는군요. 효시 이후의 삶의 모습이 어떨지 기대됩니다.
나의 훌쩍 떠나버린 폴란드행도 어쩌면 효시가 아닐런지? 이 나이에 아내도 동반하지 않고 혼자서.....ㅋㅋㅋ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단어의 어원을 살펴보는 것도 재미있는 공부이지요, 언젠가 잡학사전이란 책을 읽으면서 늦게나마 상식을 많이 깨우쳤던 적이 있지요. 나도 얼마 전 <그냥 살아> <오늘 하루도 갔네요> 등의 글을 쓴 적이 있지요. 최근에는 <무위락>과 <김장 배추모종을 심으며>란 글을 쓰면서 유유자적의 마음을 드러내기도 했지요. 하루하루 죽어간다는 것이 실감나는 나이, 나도 인간의 사회적 의미보다 실존적 의미에 더 충실한 삶을 살고 싶네요.
자유로운 영혼으로 살고싶은 것은 모두의 로망민데 효시의 참 뜻을 알게되니 더욱 그렇게 보내려는 생각이 더욱 간절해 집니다~한 수 배우고 갑니다.
내 삶의 진정한 효시는 바로 지금이라는 말이 마음에 와 닿습니다. 먼저 쏘는 화살이 효시라는 것은 어렴풋이 알았지만, 그 생김새 등이 다른 화살과 다른다는 것도 알게 되었어요.
숨과 숨 시이에 살아 있는 이 순간이야말로 오직 나 자신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탓 해 보아야 지나가버린 과거, 아직 오지않은 알 수 없는 미래. 카르페디엠, 바로 지금이야말로 내가 존재하며 살아가고 있는 시간이지요. 효시가 그걸 깨닫게 해주네요. 사랑하면서 자유롭게 살 수 있는 바로 지금의 소중함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