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전쟁이 터지자 친지가 살고 있는 서울 근교의 일원동(지금의 강남구
일원동)으로 피난하다.
1951년 1·4 후퇴 때 대구로 피난하여 곤궁한 생활을 하다.
1952년 부산으로 피난지를 옮기고 전시 임시 교사를 차린 서울중학교에 입
학하다. 이 시절에 윤동주와 김소월의 시를 대하면서 최초로 시를
인식하게 된다. 황동규는 습작한 시를 『학원』지에 투고하여 조지
훈 선생으로부터 우수상을 받기도 한다.
1953년 피난 생활을 마치고 환도하다. 이때부터 15년1 동안 남산 밑 회현동
에자리잡은 이층집에서 살게 된다. 서울중학교와 서울고등학교에 다니
며, 평생의 지우인 마종기와 사귀게 되고, 문학과 음악에 심취한다. 고
등학교 2학년 때 작곡가의 꿈을 버리고 문하겡 전념하다.
1956년 대학 입시 공부를 하면서 김소월과 『두시언해』에 심취하다. 『두시
언해』로부터 우리말의 어휘와 리듬을 익힌다. 이 무렵 서울고등학교
교지에 「즐거운 편지」를 투고하고 졸업 때 이 책을 받게 된다. 1년
연상의 짝사랑 연인에게 보내는 연가였던 이 시는, 후에 수동적이 아
니라 `적극적인 기다림의 자세'를 노래했다는 점에서 우리의 전통적인
연시(戀詩) 계보에서 새로운 영역을 개척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1957년 서울대학교 영문과에 우수한 성적으로 입학하여 국비 장학생이 된다.
정치과에 입학한 김병익과 사귄다.
1958년 『현대문학』 2월호에 「시월」이, 11월호에 「즐거운 편지」와 「동
백나무」를 미당이 추천하여, 공식적으로 등단한다. 등단한 후에는
「겨울 노래」와 같은 겨울을 형상화한 시를 많이 쓴다.
1960년 대학 4학년. 4·19를 겪다.
1961년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에 진학하다.
시집 『어떤 개인 날』(중앙문화사)을 상재하다. 대학원 한 학기를 마친
후 군에 입대하다. 국방부에서 번역 사병으로 근무하다. 이 무렵 친구인
서울 미대에 다니던 김정강의 죽음으로 몹시 괴로워하다. 「비가」 연작
에 착수하다.
1964년 군에서 제대하고 대학원에 복학하다.
1965년 두번째 시집 『비가』(창우사)를 출간하다.
1966년 대학원을 마치고 금란여고 교사 생활을 한다. 이무렵 정현종, 김화영,
박이도, 김현 등과 『사계』 동인 활동을 하다. 금란여고 교사로 한
학
기 재직한 후 영국 에든버러 대학으로 유학을 떠난다. 이듬해 이 대학
에서 디플로마 과정을 수료하고 미국과 유럽을 기행하기도 한다. 이
무렵 「전봉준」, 「삼남에 내리는 눈」 등의 사회 비판적인 시를 발
표한다.
1968년 서울대 교양학부 전임강사로 자리잡고, 대학원 시절부터의 연애에 종
지부를 찍고 같은 과 대학원에 다니던 고정자(高靜子)와 결혼한다. 시
집 『태평가』를 출간한다(『태평가』는 마종기·김영태와 같이 발간한
>
3인 시집 『평균율 1』의 황동규 편이다). `현대문학상'을 수상하다.
1969년 딸 시내 출생.
1970년 `국제 창작 캠프'의 일환으로 미국 아이오와 대학에 체류하다. 이 무
렵 「아이오와 일기」 등의 작품을 쓴다.
1972년 시월 유신을 겪고, 동아일보에 「계엄령 속의 눈」을 발표한다 (발표
당시의 제목은 「흙빛 눈」이었다). 12월에는 조부상을 당하다.
『열하일기』(『평균율 2』의 황동규 편)를 현대문학사에서 간행하다.
아들 순신 출생.
1974년 1월 조모상을 당하다.
1975년 서울대 인문대학 조교수로 임명되다. 시선집 『삼남에 내리는 눈』
(민음사)을 출간하다.
1976년 시론집 『사랑의 뿌리』(문학과지성사)를 출간하다.
1978년 시집 『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문학과지성사)를 출간
하다. 이 무렵부터 김현, 홍신선, 김정웅 등과 어울려 자주 여행을 다
닌다.
1979년 산문집 『겨울 노래』(지식산업사)를 출간하다.
1980년 `한국문학상'을 수상하다.
1982년 시선집 『열하일기』(지식산업사)를 출간하다. 유럽과 중동 지방을
여행하다. 「풍장」 연작에 착수하다.
1984년 문학선집 『풍장』(나남)을 출간하다.
1986년 시집 『악어를 조심하라고?』(문학과지성사)를 출간하다.
1987년 교환 교수로 미국 뉴욕 대학에 적을 두고 뉴욕에 체류하다. 「브롱스
가는 길」, 「견딜 수 없이 가벼운 존재들」 등의 시를 쓰다. 이 시들
은 시 속에서 삶의 질적 변화를 지향하는 것으로 극서정시로 명명되
기도 한다. 이후 극서정 양식은 황동규 시의 큰 특징이 된다.
1988년 뉴욕에서 귀국하다. 시선집 『견딜수 없이 가벼운 존재들』(문학과
비평사)을 출간하다. `연암문학상'을 수상하다.
1991년 시집 『몰운대행』(문학과지성사)을 출간하다. 1월에는 `김종삼문학
상'을, 9월에는 `이산문학상'을 수상하다. 8월 서울대 대학신문 주간
을 맡아 무척 바쁜 시간을 보낸다.
1993년 시집 『미시령 큰바람』(문학과지성사)을 출간하다.
1994년 2월에 인도를 여행하다. 『문예중앙』에 연재하던 자작시 해설을 『나
의 시의 빛과 그늘』(중앙일보사) 이라는 이름으로 출간하다. 이 책에
는 황동규 시의 생성과 과정을 `염탐'할 수 있는 각종의정보가 수록되
어 있다.
1995년 14년 간의 노력 끝에 5월 『풍장』 연작 70편을 완성하다. 가을에 『풍
>
장』(문학과지성사)을 출간하다.
1996년 시집 『외계인』(문학과지성사)을 출간하다. 시집 『비가』(문학동
네)를 재간하다. 『풍장』이 독일 괴팅겐의 에디치온 페페코른 출판사
에서 독일어로 번역 출간되다(김미혜, 질비아 브레젤 공역).
1997년 8월, 6개월의 일정으로 미국 버클리 대학에 머물다. 여러 차례 문학 강
>
연을 하다.
1998년 2월 귀국하다. 회갑을 맞이하다. 2권으로 된 『황동규 시전집』(문학
과지성사)을 간행하다.
* 황동규 시인의 시
[ 즐거운 편지 ]
1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 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보리라.
2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버린
데 있었다. 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뿐이다.
그 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
[ 기도 ]
1
내 잠시 생각하는 동안에 눈이 내려 눈이 내려 생각이 끝났을 땐
눈보 라 무겁게 치는 밤이었다. 인적이 드문, 모든 것이 서로 소
리치는 거리 를 지나며 나는 단념한 여인처럼 눈보라처럼 웃고 있었다.
내 당신은 미워한다 하여도 그것은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과 마찬가
지였습니다. 당신이 나에게 바람 부는 강변을 보여주며는 나는 거기에
서 얼마든지 쓰러지는 갈대의 자세를 보여주겠습니다.
2
내 꿈결처럼 사랑하던 꽃나무들이 얼어 쓰러졌을 때
나에게 왔던
그 막막함 그 해방감을 나의 것으로 받으소서.
나에게는 지금 엎어진 컵
빈 물주전자
이런 것이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는 닫혀진 창
며칠내 끊임없이 흐린 날씨
이런 것이 남아 있습니다.
그리곤 세 명의 친구가 있어
하나는 엎어진 컵을 들고
하나는 빈 주전자를 들고
또 하나는 흐린 창 밖에 서 있습니다.
이들을 만나소서
이들에게서 잠깐잠깐의 내 이야기를 들으소서.
이들에게서 막막함이 무엇인가는 묻지 마소서.
그것은 언제나 나에게 맡기소서.
3
한 기억 안의 방황
그 사방이 막힌 죽음
눈에 남는 소금기
어젯밤에는 꿈 많은 잠이 왔었다.
내 결코 숨기지 않으리라
좀더 울울히 못 산 죄 있음을.
깃대에 달린 깃발의 소멸을
그 우울한 바라봄, 한 짧고 어두운 청춘을
언제나 거두소서
당신의 울울한 적막 속에.
[ 조그만 사랑 노래 ]
어제를 동여맨 편지를 받았다.
늘 그대 뒤를 따르던
길 문득 사라지고
길 아닌 것들도 사라지고
여기저기서 어린 날
우리와 놀아주던 돌들이
얼굴을 가리고 박혀 있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추위 환한 저녁 하늘에
찬찬히 깨어진 금들이 보인다.
성긴 눈 날린다.
땅 어디에 내려앉지 못하고
눈 뜨고 떨며 한없이 떠다니는
몇 송이 눈.
[ 더 조그만 사랑 노래 ]
아직 멎지 않은
몇 편의 바람.
저녁 한 끼에 내리는
젖은 눈, 혹은 채 내리지 않고
공중에서 녹아 한없이 달려오는
물방울, 그대 문득 손을 펼칠 때
한 바람에서 다른 바람으로 끌려가며
그대를 스치는 물방울.
[ 어떤 은유(隱喩 ]
이제 무얼 더 안다 하랴.
저 맑은 어스름 속으로 막 지워지려 하는
무릎이 안개에 걸려 채 사라지지 않고 있는
저 조그만 간이(簡易) 역,
안개 밖으로 잘못 얼굴 내민 코스모스 몇 송이
들켜서 공중에 떠 있다.
한 줄기 철길이 숨죽이고 있다.
아 이 찰나 이 윤곽, 어떤 추억도 끼어 들 수 없는,
새 한 마리 그림자처럼 느릿느릿 지나간다.
윤곽 모서리가 순간 예민해지고
아 가벼운 지워짐!
을 나는 어떤 은유,
내 삶보다 더 X레이 선명한, 더 이상 다른 처방 찾지 않아도 되는,
삶의 그릇 부신 물음으로 받아들인다.
[ 비가 제11가 ]
내 노래한다 겨울 항구를,
한겨울의 우울을.
어두운 선창에는
이리저리 몰려다니는 눈
배 떨어진 항구의
밀집한 밤을,
수평선 위에 잠시 뜨는
수성(壽星)을.
사리 무렵 달이 질 때
내 들었노라
달을 받는 큰 물의 배음(背音)을
들었노라
저 습기찬 커다란 원의 흔들림을.
가만히 생각해보라.
네 마음속에는
다 빈치가 잡은 성(聖) 안느의
조용한 어린 계집앳적 얼굴을 가진
가난한 소년이 살고
낡은 초가집을 심은 마을
몇 그루의 어린 나무가
그의 뒤에 서서
거부하는 거부하는 몸짓으로
그를 언제나 항구로 내몬 것을.
항구에는 이리저리 몰려다니는 눈
가만히 생각해보라
항구의 하루를
찢겨진 그물
삭구, 해초, 몇 마리 생선의 안착(安着)
뒤집어논 목선 몇 척
생선뼈 박힌 주막.
가만히 생각해보라
며칠 밤
가설철도와 같은 잠을,
마지막 배가 뜨고
불이 꺼진 후
머리보다는
배로 온 잠을.
나는 안다
우리는 비유할 수 없는 그 무엇이 아님을,
이름 모를 들꽃을 뽑을 때
안쓰러이 따라나오는 뿌리와 같이
좀더 간단하고 그리운 어떤 것임을.
나는 안다
모든 출발에 따라가는
뽑혀진 뿌리의 길이를,
지도 지닌 자들의 잠을,
그들의 얼굴을 지키는 어두운 등불을……
한없는 봄날에
등을 잡고 아깝게
서 있고 서 있고 할 따름이로다.
[ 풍장 27 ]
내 세상 뜰 때
우선 두 손과 두 발, 그리고 입을 가지고 가리.
어둑해진 눈도 소중히 거풀 덮어 지니고 가리.
허나 가을의 어깨를 부축하고
때늦게 오는 저 밤비 소리에
기울이고 있는 귀는 두고 가리.
소리만 듣고도 비 맞는 가을 나무의 이름을 알아맞히는
귀 그냥 두고 가리.
[ 방파제 끝 ]
언젠가 마음 더 챙기지 말고 꺼내놓을 자리는
방파제 끝이 되리.
앞에 노는 섬도 없고
헤픈 구름장도 없는 곳.
오가는 배 두어 척 제 갈 데로 가고
물 자국만 잠시 눈 깜박이며 출렁이다 지워지는 곳.
동해안 어느 조그만 어항
소금기 질척한 골목을 지나
생선들 함께 모로 누워 잠든 어둑한 어물전들을 지나
바다로 나가다 걸음 멈춘 방파제
환한 그 끝.
[ 버클리풍의 사랑 노래 ]
내 그대에게 해주려는 것은
꽃꽃이도
벽에 그림 달기도 아니고
사랑 얘기 같은 건
더더욱 아니고
그대 모르는 새에 해치우는
그냥 설거지일 뿐,
얼굴 붉은 사과 두 알 식탁에 앉혀두고
간장병과 기름병을 치우고
수돗물을 시원스레 틀어놓고
마음보다 시원하게,
접시와 컵, 수저와 잔들을
물비누로 하나씩 정갈히 씻는 것,
겨울비 잠시 그친 틈을 타
바다 쪽을 향해 창 조금 열어 놓고,
우리 모르는 새
언덕 새파래지고
우리 모르는 새
노란 유채꽃이 땅의 가슴 언저리 간질이기 시작했음을
알아내는 것
겁없이.
[ 어떤 개인날 ]
未明에
아무래도 나는 무엇엔가 얽매여 살 것 같으다
친구여, 찬 물 속으로 부르는 기다림에 끌리며
어둠 속에 말없이 눈을 뜨며
밤새 눈 속에 부는 바람
먼 창 가에 서서히 새이는 밤
훤환 未明, 외면한 얼굴,
내 언제나 버려두는 者를 사랑하지 않았는가
어둠 속에 바라지 않았는가
그러나 이처럼 이끌림은 무엇인가
새이는 未明
얼은 창 가에 외면한 얼굴 안에
외로움, 이는 하나의 물음,
침몰 속에 우는 배의 침몰
아무레도 나는 무엇엔가 얽매여 살 것 같으다.
저녁무렵
누가 나의 집을 가가이 한다면
아무것도 찾을 수 없으리
담은 문에 눈 그친 저녁 햇빛과
문 밖에 긴 나무 하나 서 있을 뿐
그리하여 내 가만히 문을 열며는
멀리 가는 친구의 등을 보게 되리
그러면 내 손을 흔들며 木質의 웃음을 웃고
나무 켜는 소리 나무 켜는 소리를 가슴에 받게 되리
나무들이 날리는 눈을 쓰며 걸어가는 친구여
나는 요새 눕기보담 쓰러지는 법을 배웠다.
박명(薄明)의 풍경(風景)
눈 멎은 길 위에 떠러지는 저녁 해, 문 닫은 집들 사이
에 내 나타난다.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는다. 아는 살고 깨
닫고 그리고 남 몰래 웃을 것이 많이 있다. 그리곤 텅 비
인 마음이 올 거냐. 텅 비어 아무데고 이끌리지 않을 거냐.
우는 산하(山河), 울지 않은 사나이, 이 또한 무연(無緣)한
고백이 아닐 거냐. 개인 저녁, 하늘을 물들이는 스산한 바
람소리, 뻘밭을 기어다니는 바다의 소리, 내 홀로 서서 그
소리를 듣는다. 내 진실로 生을 사랑했던가, 아니었던가.
[ 내가 만난 황동규 ]
술과 불*
홍신선[황동규]
꽤 오래 전, 시인 신대철과 한 동네에서 산 적이 있었다. 결혼 얼마 만
에 겨우겨우 손바닥만한 시민아파트를 나는 장만하여 살고 있었고 신
대철은 아파트 아래 평지 동네의 작은 한옥집에 살던 시절이었다. 신
촌로터리 근방 동네에서의 일이다. 때마침, 신대철 시인은 시집 『무인
도를 위하여』를 갓 상자했던 터여서 우리는 가끔 만나 시와 사는 이야
기를 나누고는 했었다. 특히 몇 차례 남가좌동의 황동규 선생댁을 함께
방문하기도 했다. 그 무렵의 황 선생 역시 남가좌동 얕으막한 언덕배기
동네 단독주택에 살고 있었다. 하늘이 무겁게 내려앉고 싸락눈발이라
도 비치는 전형적인 겨울날 오후인 경우 황 선생은 동네 초입의 포장
마차로 우리를 곧잘 안내하곤 했다. 닭똥집이나 돼지갈비를 구워놓고
우리는 소주를, 그것도 쓴 진로소주를 주로 마셨다. 당시 젊음 탓이었
거나 유신체제라는 시절 탓이 컸었겠지만 술은 아무리 마셔도 취하지
않았다.
……사람, 사람다움, 자유, 대포로 쏘아도 들리지 않는 말들. 다
비었다 속삭이는 술병처럼 너는 두 손을 벌린다.……
ㅡ 황동규, 「수화(手話)」의 일부
극도로 언론이 통제되던 시절이어서, 당시 사람들 사이의 의사소통은
인용된 시구 그대로 `대포로 쏜 말'도 들리지 않는 최악의 상태였다. 그
러나 우리 일행의 술자리에서는 유신에 관해서, 시에 관해서, 드물게는
음악에 관한 화제들로 열기가 금새 달아오르고는 했었다. 화제는 황 선
생이 주로 이끌었다. 이따금 신대철의 고향 칠갑산 이야기도 나왔고 나
의 시골 형편도 그 화제에 끼이고는 했었다.
여러 병째 소주가 비워지고 시와 삶에 관한 도수 높은 이야기에 흠뻑
취하다 보면 황 선생은 일어나 춤을 추었다. 그 춤은 내면의 열정이 폭
발하는 데 따른 무작위의 몸짓이고 `세상이 온통 춤밭이 되는' 동작이
었다. 말하자면 형식 없는, 그러나 온몸의 열기를 다 실어서 엮는 `황홀
한' 춤 동작인 것이었다. 또 그만큼 그 춤은 드물게 선보이는 것이기도
했다. 아주 자주 빈번하게 끼이지 못한 탓이겠지만 술자리에서의 그 춤
동작을 나는 지금껏 3, 4회 정도밖에는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무튼, 당시의 우리는 통금시간인 밤 12시의 안과 밖 경계를 아슬아
슬하게 넘나들며 술을 마시고는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신대철은,
“황 선생님, 보통 정열 덩어리가 아니신 분이에요. 만날수록 그분의 뜨
거움같은 걸 절감하고는 해요.”
라고 황 선생에 대한 자신의 평소 느낌을 털어놓았다. 그리고는 이렇게
또 덧붙였다.
“아마 학교에서의 학생 지도나 강의도 그 불같은 열정 때문에 시종 열
강으로 일관할 겁니다.”
신대철 시인의 당시 이 말은 정확한 것이었다. 최근 회갑맞이에 맞추
어 나온 『황동규 깊이 읽기』에 실린 서울대 동료인 김명렬 교수의 글
이 이와 같은 사실을 실감 있게 뒷받침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가 맡았던 대표적인 보직 가운데 하나였던 대학신문 주간으로 봉사
(?)할 때에도 이 면모는 그대로 드러났다. 시인 김정웅과 함께 만나는
자리에서 황 선생은 늘 학생기자들의 무례나 오만을 개탄하고 또 어떻
게 힘겹게 그들을 이끌었는가를 이야기했다. 때로는 밤 12시 가까이까
지 신문사에 머물면서 학생기자들과 끊임없이 토론하고 설득하기도 했
었음을 괴롭게 전했다. 아마도 그 무렵의 설익은 거대담론에 심취한 학
생들을 지도해 본 이들은 정황을 쉽게 이해하리라. 특히 당신의 오랜
고심거리인 혈압을 그 일로 말미암아 더할 수 없이 조심해야 했었다고
한다.
일찍이 시인 신대철이 말한 저 황 선생 내면의 그 불덩어리(정열)는
그의 시를 사십 년 넘게 고압의 감성으로 일관하게 만든 근본 힘이다.
뿐만 아니라, 문학동네라는 `링' 위에서 한번도 몸 비키거나 내려가지
않도록 만든 동력이기도 했던 것. 황 선생은,
“시에 정열이 담겨 있지 않거나 자기 삶이 묻어있지 않다면 그게 무슨
좋은 시가 되겠어요?”
라고 우리 후배 시인들과 어울린 자리에서 늘 단호한 어조로 말하고는
했다. 쓴 사람이 보이지 않는 시를 그는 언제나 낮게 평가했다. 말하자
면, 추상적 관념이나 손끝의 기교만으로 씌어진 작품들을 울림이 없는
‘가짜 시'라고 좋아하지 않았다.
이와 같은 시관(詩觀)은 그가 좋아하는 선배 시인 김수영의 어떤 면모
를 연상케 하기도 하고, 또 시의 극화를 힘주어 말할 때에는 신비평가들,
특히 C. 브룩스의 생각을 떠올리게도 만든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이러
한 영향관계나 발신지 추적이란 마치 문학을 무슨 고적 발굴이나 상류
찾기 놀음 정도로 깎아내리는 것밖에 더 되는가.
그의 찬연한 30대 시절인 저 남가좌동 시대에 황 선생은 이런 인상 깊
은 이야기도 들려준 적이 있었다.
“예술가들 사이의 만남이란, 그것도 진정한 만남이란 서로간의 정신적
만남이자 상호 성장하는 혼의 교통 같은 겁니다. 보세요, 블라크와 피카
소가 어떤 식으로 만났고 어떻게 자기 예술들을 만들어 나갔는가를. 예술
가에게 있어서 일방적 영향이란 있을 수 없는 겁니다. 무슨 삼류들의 세계
라면 모르지만……”
“시에 관한 지식이란 거 아무 쓸모 없는 겁니다. 말하자면 그 지식과 싸
워서 자기 것으로 만들지 않는 한 의미 없는 것이죠.”
황 선생의 이상과 같은 생각은, 특히 두 번째 생각은 실제로 그의 산문들
에서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그의 힘 있는 산문 어디에도, 아주 예외
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외국의 아무개 씨나 생경한 어설픈 이론들이 들
어가 있는 경우란 없기 때문이다. 그의 방대한 독서량과 전문지식들은 모
두 그 자신의 이야기들로 `번역'되어 있을 뿐인 것이다(이러한 황선생의
태도를 실은 나도 그대로 어설프게나마 뒤쫓고 있다). 예술가들, 또는 시
인들간의 만남이 과연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정답은 분명 있을 수
없을 터이다. 다만, 황 선생 자신이 바람직스럽게 생각하는 만남의 한 본
보기를 또 그 이상형을 위와 같이 말했던 것이다.
황 선생은 사람들, 그것도 후배문인들과 만나기를 즐거워한다. 아마도 이
는 선배·동년배들과 만나는 자리에 내가 없었던 탓이라고 하는 것이 좀더
정확하리라. 지금도 황 선생과의 만남자리에는 나와 동년배 시인들이나
좀더 젊은 사람들이 자주 끼고는 한다. 김명인, 김윤배, 임영조, 조정권,
남진우 등을 비롯하여 하응백이나 이광호 등이 지금껏 술모임자리의 꾸준
한 멤버들이다. 지하철역이 있는 사당동 동네에서 우리는 삼삼오오 만나
고는 한다. 주로 남원식 추어탕집이거나 「피카소」란 꽤 술값이 저렴한
맥주집에서 만나는 것이다. 대부분 추어탕에 소주를 곁들여 저녁을 먹고
그리고 그 뒤 입가심으로 맥주를 마시는 것이 거의 정례화되다시피한 이
모임의 식순이다. 상당한 주흥이 오르면 황 선생은 `한 송이 눈을 봐도 고
향눈이요……'라는 유일한 십팔번 노래를 또 열창하기도 한다. 그 노래는
앞에 말한 `황홀한 춤' 못지않게 우리 주변에서는 유명한 것.
황 선생은 음악을 즐겨 듣는다. 그의 음악에 대한 교양은 아는 이들은 이
미 다 아는 것이지만 프로급이다. 일찍이, 작고한 떠돌이 선배 시인 김종
삼도 음악에 대한 남다른 조예를 지니고 있었다. 그가 동아방송에서 오랫
동안 음악에 대한 소양으로 밥을 먹었던 일은 널리 알려진 일이다. 실제로
그의 시 가운데에도 음악에 관한 작품들은 상당수 있다. 황 선생도 그의
젊은 시절 한때 시가 아닌 음악을 전공하고자 했었다고 한다(이 사정은
그의 시적 자서전 『나의 시의 빛과 그늘』에 밝혀져 있다). 그러나 친구
마종기에 의해 이 꿈은 산산조각이 나고 대신 그는 문학의 길로 접어들었
다고 한다. 지금 큰 따님이 외국에서 작곡 공부를 하고 있는 일을 황 선생
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 것인가 궁금하기도 하다(자신이 못 이룬 꿈을
자식이 대신 이뤄준다고 생각할까).
아무튼, 황 선생의 노래 실력. 그것도 가창력은 그의 음악 교양과는 다
르게 썩 사줄 만한 수준은 아니다. 내가 아는 한 그와 자주 만난 후배 시
인들은 모두 이 말에 예외 없이 공감할 터이다. 노래도 식고 난 술자리에
서 황 선생은 대개 밤 열 시 지나 일어서고는 한다. 나이듦이 눈에 띄게
나타나는 근년에 와서 이 같은 자리 이석은 더욱 빈번해지고 있다. 그러
나 내가 아는 한 황 선생은 귀가한 당신의 서재에서 다시 소주나 스카치
위스키를 분명 마실 것이다. 설 취하면 깊은 잠에 이를 수 없기 때문이다.
황 선생의 술 실력은 이미 정평이 나 있다. 사람들과의 술모임 통음도 `통
음'이지만 황 선생은 집에서도 술을 늘 마신다고 한다.
“대개 하루 일 마치고 한 잔 할 생각을 하면 가슴 설레이죠. 그것도 정
말 좋은 술이 있을 경우에는 더 말할 나위 없고…….”
한 해에 작품 2, 30편씩을 생산하는 황 선생이고 보면 이 말의 참뜻이
무엇인가 짐작이 간다. 요즈음도 시와 술 모두에서 형편없이 빌빌거리는
나 같은 후배로서는 저 같은 황 선생의 술담론이야말로 도무지 아득한
높이의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 황동규의 유멍 '역마끼'인 여행에 관해서는 이미 『황동규 깊이 읽기』에 쓴
바 있다. 그 글과 함께 이 글을 읽어 주시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