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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 法慧菩薩의 說法
1. 讚歎許說
爾時에 法慧菩薩이 告精進慧菩薩言하사대
善哉라 佛子여
汝今爲欲多所饒益과 多所安樂과 多所惠利로
哀愍世間諸天及人하야
問於如是菩薩所修淸淨之行하나니
佛子야 汝住實法하야 發大精進하고
增長不退하야 已得解脫하며
能作是問하야 同於如來하니
諦聽諦聽하야 善思念之하라
我今承佛威神之力하야
爲汝於中에 說其少分호리라
이때 법혜 보살이 정진혜 보살에게 말하였다.
" 잘하는 말이로다. 불자여,
그대가 지금 여럿을 이롭게 하고 안락케 하고 은혜롭게 하기 위하여,
세간의 하늘들과 사람들을 가련히 여기어
보살이 닦는 그렇게 청정한 행을 묻는도다.
불자여, 그대가 실상법(實相法)에 머물고
크게 정진하는 마음이 증장하고 퇴전치 않게 하며,
이미 해탈을 얻고 이렇게 묻는 것이 아래와 같느니라.
자세히 듣고 잘 생각하여라.
내 이제 부처님의 위신력을 받들어 그대에게 조금만 말하리라."
讚歎許說(찬탄허설).
질문한 사람을 찬탄하고 그 다음에 설할 것을 허락한다. 이 뜻입니다.
爾時에 法慧菩薩이
告精進慧菩薩言(이시법혜보살고정진혜보살언)하사대,
그 때에 법혜 보살이 정진혜 보살에게 고해 말씀하사대,
善哉라 佛子(선재불자)여, 훌륭하십니다. 불자시여,
汝今爲欲多所饒益(여금위욕다소요익)과,
그대가 지금 多所饒益과 = 많이 요익하려고 그리고
多所安樂(다소안락)과, 많이 안락하고, 또
多所惠利(다소혜리)로, 은혜와 이익을 얻고자,
‘많이 얻고자’ 그런 뜻입니다.
哀愍世間諸天及人(애민세간제천급인)하야,
세간과 그리고 모든 천신과 사람들을 애민이 여겨서
問於如是菩薩所修淸淨之行(문어여시보살소수청정지행)하나니,
이와 같이 보살이 닦을 바 청정한 행을 묻나니,
佛子야
汝住實法(여주실법)하야, 그대는 실다운 법에 머물러서
發大精進(발대정진)하고, 大精進을 발하고 정진하여 더욱 더
增長不退(증장불퇴)하야, 나아가서 물러서지 말고,
已得解脫(이득해탈)하며, 이미 해탈을 얻을 것이며, 그래서
能作是問(능작시문)하야, 능히 이러한 질문을 지어서
同於如來(동어여래)하니, 여래와 같으려고, 여래와 동등하려고 하나니,
諦聽諦聽(제청제청)하야, 자세히 듣고ㆍ자세히 들어서
善思念之(선사념지)하라. 잘 생각하고ㆍ잘 생각할지니라.
我今承佛威神之力(아금승불위신지력)하야,
내가 지금 부처님의 위신력을 받들어서
爲汝於中(위여어중)에, 그대를 위하여 이 가운데서
說其少分(설기소분)호리라. 조금만 내가 이야기하겠습니다.
내가 많이 모르기도 하거니와 또 할 수도 없고 하니까 說其少分.
조금만 말하겠습니다.
**********
사리불이 처음에 마승비구를 보고, 하도 품격이 있어서 마승비구한테
“어떤 가르침을 듣고 당신은 그렇게 인격이 고준해 보이냐?
얼른 좀 설명해 달라.”고 하니까 마승비구가 그러지요.
“나는 싯달태자가 성도를 해서 우리에게 가르치긴 하지만,
나는 둔하고 또 입문 한지도 오래 되지도 않고...”사실 그 분이 5비구거든요.
5비구중의 한사람입니다. 5비구중의 한사람인데 그렇게 겸손해요.
“나는 들어 온지도 얼마 안 되고, 초보자고 그래서 아는 것이 별로 없습니다.”
그래도 사리불이 하도 조르니까
“그럼 조금만 이야기하겠다.”= 少分. 이 말입니다.
“少分만 이야기하겠습니다.” 그렇게 했지요. 그래서 연기법을 이야기하잖아요.
그래서 물론 보살행을 대승불교에서는 높이 강조 하지만, 이 현실.
존재의 실상을 우리가 파악하는데 있어서는, 연기법 이상 가는 것이 없습니다.
인연법 이상 가는 것이 없어요. 연기나 인연이나 같은 말인데요.
“인연생기”그러잖아요. 因緣生起. 또 因果. 因故. 그것이 전부 같은 맥락인데요.
그것 보다 더 가는 이치는 없습니다.
존재의 실상을 우리가 이해하고 풀어내는 데는 연기법 이상 가는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도처에 연기 이야기가 있지 않습니까?
이 화엄경에서도 보현행을 주장하면서도
연기 이야기가 늘 나오잖아요. 밑에 깔렸잖아요.
우리 개인 문제를 우리가 이해하고 해석하고, 문제를 풀어나가든지,
아니면 어떤 한 가정의 문제를 해결해나가든지,
아니면 한 사회 문제를 이해하고 해결하든지 간에,
그 근본 원리는 연기법에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은 그것 알면 다 간단합니다.
모든 것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그럴만한 이유가 무엇인지
그것 찾으면 간단한 겁니다. 예를 들어서 돈을 빌려줬다가
도저히 금생에는 받을 계약이 없어져 버린 그런 상황에 처했다.
우리는 흔히, 불자들은 흔히 하는 소리 있잖아요.
‘아, 전생에 내가 빌리고 안 갚았는가 보다.
전생에 진 빚을 갚았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
내 자신도 편하고 사실은 그것이 어떻게 보면 이치에 맞기도 하고요.
정확한 흐르는 무슨 숙명통을 못해서 모른다고 하지만,
사실은 어쩌면 그것이 맞는 이치이기도 합니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고요.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겁니다.
그것이 연기법 아닙니까?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난다는 것도
옛날부터 우리 조상들이 불교를 도입해서
그런 인과를 잘 알고 실천 했다는 뜻이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그것이 개인문제ㆍ또 세상문제를 이해하고 해결하는데는,
불법 가운데 연기법 이상가는 것이 없다.
그러나 대승불교에서는 거기서 더 한발 나가서
물론 그 문제에 대한 돌아가는 귀추는 그렇다손 치더라도
당장에 지금 병고에 앓고 있는 사람을 도와줘야 될 것 아니냐?
그것이 보살대승불교가 출발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는 것이지요.
연기법이든 공이든 뭐든 그런 것 다 제쳐놓고,
그저 중생을 위하는 그런 길입니다.
근래에 우리불교계도 무슨 봉사 단체라든지,
그 다음에 급식문제라든지, 이웃을 생각하는
그런 운동ㆍ그런 활동들을 많이 하는 것을 보게 되는데,
그것은 참 좋은 현상이지요. 거기다 제가 늘 이야기하듯이
‘불교를 좀 더 보태서 연기법 하나만이라도 같이 베풀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는가?’제가 늘 그러지요. 기독교는 저 아프리카에 가서
봉사활동을 해도 먼저 교회부터 지어놓고 한다.
가서 의료봉사를 하든지 무슨 구제 사업을 하더라도
나머지 시간은 교회 와서 예배 보게 하고,
성경 가르치고 그렇게 하는 겁니다.
그 사람들은 봉사를 하되 당신들의 종교를 얹어서 봉사하는 겁니다.
우리불교는 봉사만 하고 빈손으로 돌아옵니다.
학교만 잘 지어놓고 빈손으로 돌아와요.
그것이 무주상이라면 또 무주상일 수도 있지요.
불법이 더 가치 있는 것 아닙니까?
불법 전하려고 학교 지어준 것 아닙니까?
불법 전하려고 우물 파준 거거든요.
사실은 이것이 앞뒤가 전도 되면 안 되는 겁니다.
그 사람들은 기독교 전하려고 학교 지어주고ㆍ의료봉사 하는 겁니다.
그 사람들은 앞뒤가 전도가 안 되었어요. 불교는 앞뒤가 전도 됐어요.
불교 전하려고 우물 파 줬는데, 우물만 남고 불교는 어디 가버렸어요.
그것 뭐 승복 입고 왔다ㆍ갔다 하지만,
저 사람들 국민복이 저런 옷인가 보다 하지,
그 속에 들어있는 깊은 뜻을 알려고 안 하거든요.
그런 점들도 2차 적으로 좋은 일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좋은 일이긴 한데, 욕심을 더 부린다면
거기다 불교까지 얹어서 같이하면 오죽 좋을까?’
그런 생각을 늘 하지요. 그 다음에
*
법혜보살(法慧菩薩)의 설법(說法): 법혜보살의 설법
*
찬탄허설(讚歎許說): 물음을 찬탄하고 설할 것을 허락하다
*
이시(爾時)에: 그 때에
법혜보살(法慧菩薩)이 : 법혜보살이
고정진혜보살언(告精進慧菩薩言)하사대 : 정진혜보살에게 고해 말씀하대
*
선재(善哉)라 : 훌륭하도다
불자(佛子)여 : 불자시여
여금위욕다소요익(汝今爲欲多所饒益)과: 그대가 지금 많이 요익하고
다소안락(多所安樂)과: 많이 안락하고
다소혜리(多所惠利)로 : 은혜와 이익을 많이 얻고저
애민세간제천급인(哀愍世間諸天及人)하야 :
세간과 그리고 모든 천신과 사람들을 애민히 여겨서
문어여시보살소수청정지행(問於如是菩薩所修淸淨之行)하나니 :
이와같은 보살의 닦은 바 청정한 행을 묻나니
*
불자(佛子)야 : 불자야
여주실법(汝住實法)하야 : 그대는 실다운 법에 머물러서
발대정진(發大精進)하고 : 정진하야 더욱더 나아가서
증장불퇴(增長不退)하야: 물러서지 말고
이득해탈(已得解脫)하며: 이미 해탈을 얻을 것이며
*
능작시문(能作是問)하야: 그래서 능히 이러한 질문을 지어서
동어여래(同於如來)하니: 여래와 동등하려고 하나니
제청제청(諦聽諦聽)하야 : 자세히 듣고 자세히 들어서
선사념지(善思念之)하라 : 잘 생각하고 잘 생각할지니라.
*
아금승불위신지력(我今承佛威神之力)하야 :
내가 지금 부처님의 위신력을 받들어서
위여어중(爲汝於中)에 : 그대를 위하여 이 가운데서
설기소분(說其少分)호리라: 조금만 이야기하겠다.
내가 많이 모르기도 하려니와 할 수도 없으니까 조금만 말하겠다.
사리불이 처음 마승비구를 만나서 “당신은 무슨 공부를 하여서 그렇게
인격이 고준해 보입니까? 얼른 좀 설명해 주십시오.”라고 물었다.
그러자 마승비구는“싯달 태자가 성불을 해서
우리에게 가르치기는 하지만은 나는 둔하고 입문한지도 오래되지 않아서 아는 것이 별로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사실 마승비구는 석가모니의 최초제자인 오비구 중에 한 사람인데
그렇게 겸손한 것이다. 그래도 사리불이 하도 조르니까
“그럼 조금만 이야기 하겠습니다”하고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 대목에 지금 여기 나오는 ‘소분’이라는 말이 나온다.
소분만 이야기 하겠다고 하면서 마승비구는 연기법을 이야기 한다.
대승불교에서는 보살행을 높이 강조하지만
존재의 실상을 파악하는 데 있어서는 연기법 이상 가는 것이 없다.
연기나 인연, 인과 응보가 다 같은 말이다. 인연생기(因緣生起)라고 한다.
존재의 실상을 우리가 이해하고 풀어내는 데는
연기법 이상 가는 것이 없기 때문에 도처에 연기 이야기를 하고,
화엄경에서도 보현행을 주장하면서도
연기의 이야기가 늘 배경으로 깔려있다.
개인의 문제를 이해하고 해석하고 풀어나가거나 한 가정의 문제,
한 회사의 문제를 이해하고 해결하는 데도 그 근본 원리는 연기법에 있다.
모든 것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고 하는 것이 연기법이다.
그럴만한 이유가 무엇인지 그 이유를 찾으면 문제는 간단히 해결된다.
예를 들어서 돈을 빌려주었다가 도저히 금생에는 받을 기약이
없어져 버렸다고 한다면 우리 불자들이 그런 상황에서 흔히
‘전생에 내가 빌리고 안갚았는가 보다’라고 한다.
‘전생에 지은 빚을 갚았다’고 생각하면
내 자신도 편하고 어떻게 보면 그 생각이 이치에 맞다.
숙명통에 이르지 못해서 그 정확한 흐름은 잘 모른다고 하더라도
그럴만한 이유는 반드시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콩심은데 콩나고 팥 심은데 팥난다는 말이 옛날부터 내려오는 것도
우리 조상들이 불교를 도입해서 인과를 잘 알고 실천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말이다. 세상문제, 개인문제를 이해하고 해결하는 데는
연기법 이상 가는 해결책이 없다.
그런데 대승불교는 거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간다.
세상 돌아가는 이치는 그렇다손 치더라도
당장에 지금 병고를 앓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이유를 따지기 전에
먼저 도와주어야 한다는 것이 보살불교이고 대승불교이다.
연기법이니 공이니 제쳐놓고 그저 중생을 위하는 것이 대승불교의 길이다.
근래에 우리 불교계에도 봉사단체라든지 급식,
이웃을 생각하는 운동, 활동들을 많이 한다. 참 좋은 현상이다.
내가 늘 이야기 하듯이 거기에 불교만 좀 더 보태어서
연기법 하나만이라도 알려주고 이치를 베풀 수 있으면 더 좋을 것이다.
기독교는 아프리카의 여러 국가에 가서 봉사활동을 해도
먼저 교회부터 지어놓고 다른 사업을 한다.
의료사업을 하든 부대사업을 하든
교회에 먼저 와서 예배를 하게 하고 성경을 가르치는 것이다.
봉사를 하되 당신들의 종교를 얹어서 봉사를 한다.
그런데 불교는 봉사만 하고 빈손으로 돌아온다.
학교만 잘 지어놓고 빈손으로 돌아오는 것이
무주상이라면 무주상일 수도 있겠지만,
그런 물질의 베풂보다는 불법이 더 가치있는 일이 아니겠는가?
불법을 전하려고 학교를 지어준 것이 아니겠는가?
불교를 전하려고 우물을 파준 것이다. 앞뒤가 전도되면 안되는 것이다.
기독교인 사람들은 기독교를 전하려고 학교를 지어주고
의료봉사를 한다. 그 사람들은 앞뒤가 전도 되지 않는다.
그런데 불교는 앞뒤가 전도되어서 불교 전하려고 우물을 파줬는데도
나중에는 우물만 남고 불교는 어딘가 가버리고 없다.
승복을 입고 왔다 갔다 한다고 해도 ‘그 나라 복장이 그런가보다’하고
누구든 크게 관심두지 않는다.
그렇게 봉사활동을 하는 것이 일차적으로 좋은 일은 틀림없지만
거기에 욕심을 더 부려서 불교까지 얹어서 같이 하면
좋을 것이라고 나는 늘 생각한다.
2. 離癡莫放逸
佛子야
菩薩摩訶薩이 已發一切智心인댄
應離癡暗하고 精勤守護하야
無令放逸이니라
"불자여,
보살마하살이 온갖 지혜를 얻을 마음을 내고는,
마땅히 어리석음을 여의고 부지런히 수호하여
방일하지 말게 할지니라."
**離癡莫放逸(이치막방일). 어리석음을 떠나고 방일하지 말라.
어리석은 사람이 게으릅니다. 게으른 사람이 어리석은 겁니다.
어리석어서 게으른 겁니다. 몸이 아파서 더 힘찬 정진을 위해서
쉬는 것이야 그것은 쉬는 것이 아니지요.
정말 그것은 낮잠을 자도 그것은 정진입니다. 그렇지만 선천적으로,
또는 습관적으로 방일하는 것은 그것은 어리석은 짓입니다.
佛子야 菩薩摩訶薩이
已發一切智心(이발일체지심)인댄, 일체 지혜의 마음을 발했을진댄,
應離癡暗(응리치암)하고, 어리석음의 어둠을 응당히 떠나보내고,
精勤守護(정근수호)하야, 정근하고 잘 지켜서
無令放逸(무령방일)이니라. 하여금 방일함이 없게 할지니라.
이치막방일(離癡莫放逸): 어리석음을 여의고 방일하지 말라
*
어리석은 사람이 게으르다. 게으른 사람이 어리석다.
어떤 사람이 몸이 아파서 더 힘찬 정진을 위해서 쉰다면
그 사람은 누워서 낮잠을 자도 정진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습관적으로 방일한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어리석어서 게으르다.
*
불자(佛子)야
보살마하살(菩薩摩訶薩)이
이발일체지심(已發一切智心)인댄 : 이미 일체 지혜의 마음을 발했을진댄
응이치암(應離癡暗)하고: 어리석음의 어둠을 떼어버리고
정근수호(精勤守護)하야 : 정근하고 잘 지켜서
무령방일(無令放逸)이니라: 하여금 방일함이 없게 할지니라.
3. 十種法과 不放逸
佛子야 菩薩摩訶薩이
住十種法을 名不放逸이니
何者가 爲十고
一者는 護持衆戒요
二者는 遠離愚癡하야 淨菩提心이요
三者는 心樂質直하야 離諸諂誑이요
四者는 勤修善根하야 無有退轉이요
五者는 恒善思惟自所發心이요
六者는 不樂親近在家出家一切凡夫요
七者는 修諸善業호대 而不願求出世間果報요
八者는 永離二乘하고 行菩薩道요
九者는 樂修衆善하야 令不斷絶이요
十者는 恒善觀察自相續力이라
佛子야 若諸菩薩이 行此十法하면
是則名爲住不放逸이니라
"불자여, 보살 마하살이 열 가지 법에 머물면
방일하지 않는다 이름하나니,무엇이 열인가.
하나는 여러 가지 계율을 보호하여 가짐이요,
둘은 어리석음을 여의고 보리심을 깨끗이 함이요,
셋은 마음에 질박하고 정직함을 좋아하며 아첨과 속임을 여읨이요,
넷은 부지런히 선근을 닦아 퇴전하지 아니함이요,
다섯은 자기가 발심한 것을 항상 생각함이요,
여섯은 집에 있거나 출가한 범부에게
친근하기를 좋아하지 아니함이요,
일곱은 선한 업을 닦으면서도 세간의 과보를 구하지 아니함이요,
여덟은 이승(二乘)을 길이 여의고 보살의 도를 행함이요,
아홉은 모든 선을 닦아서 끊어지지 않게 함이요,
열은 스스로 계속 하는 힘을 항상 관찰함이니라.
불자여, 보살이 만일 이 열 가지 법을 행하면
방일하지 않는 데 머문다고 이름하느니라."
十種法과 不放逸. 열 가지 법하고 방일하지 않는 법.
佛子야 菩薩摩訶薩이
住十種法을, 10종법에 머무는 것을
名不放逸이니, 이름을 불방일이라 하나니,
방일하지 않는 것이라 하나니,
何者가 爲十(하자위십)고?
一者는 護持衆戒(일자호지중계)요.
여러 가지 계를 보호해 가지는 것이고,
일차적으로 5계만 잘 가져도 되지요.
그 다음에 근본 10계 잘 가지면 더욱 좋고요. 5계가 기본입니다.
二者는 遠離愚癡(원리우치)하야, 어리석음을 멀리 떠나서
淨菩提心(정보리심)이요. 보리심을 청정하게 하는 것. 佛心.
불심이라고 합시다. 제일 좋아요.
불심 속에는, 부처 마음속에는 좋은 것은그 속에 다 있는 겁니다.
제가 그 전에 적어보니 한 30가지는 적을 수 있더라고요.
배려 심ㆍ자비심ㆍ지혜 심ㆍ사랑하는 마음ㆍ따뜻한 마음.
그런 마음들이 불심 속에 다 들어가요.
그런 불심을 청정하게 하는 것이요.
三者는 心樂質直(심락질직)하야,
마음에 質直. 정직하고 순박하고 곧고, 그것을 즐겨해서
離諸諂誑(이제첨광)이요. 구부러지고 속이는 것을 떠나는 것이다.
요즘 우리나라, 요즘뿐만 아니라 그 전 부터도 늘 신문에 보도 되고,
뉴스에 나오는 것 보면 전부 그저 속이고,
월급 받고는 신고 안 해서 청문회 가서 개망신하고,
그런 것 있으면 장관하라고 하면
“아이고 난 허물이 많아서 못합니다.” 하고 아예 사양을 하지,
혹시 안 걸리면 ‘장관이라도 한번 해볼까?’하고,
아마 지금 이 시간도 청문회 열리고 있지요?
그래서 온갖 자기도 모르는 것 전부 들통 다 나잖아요.
과거에 몇 년 전에, 몇 10년 전에 잘못 해놓고 자기도 잊어버린 것.
그것까지 다 파내는 겁니다. 흔적이 다 있으니까요.
한번은 해보려고 했다가 오지게 망신만 하고 결국은 떨어져버리고요.
그러니까 참, 質直하지 못해서 諂誑, 이것이 문제입니다.
순박하고ㆍ진실하고ㆍ정직한 것. 정직한 사회가 제일 중요합니다.
四者는 勤修善根(근수선근)하야, 부지런히 선근을 닦아서
無有退轉(무유퇴전)이요. 퇴전함이 없는 것이고,
五者는 恒善思惟自所發心(항선사유자소발심)이요.
자기가 발심한 바를 항상 잘 思惟하는 것. 중요한 것이지요.
뭘 하겠다고 마음을 딱 냈는데,
잊어버리고 다른데 가서 딴 짓하면 그것 흐지부지 돼버리잖아요.
자기가 발심한 바는 늘 사유하는 겁니다.
연구하고ㆍ검토하고ㆍ사유하고ㆍ어디 가서 또 질문하고ㆍ
서로 의논해보고ㆍ물었던 것 또 물어보고ㆍ검토한 것 또 검토하고ㆍ
또 검토하고... 제 도반이 저기 강원도에서 토굴을 하나 짓는데,
그림 그려 본 것이 두꺼운 대학 노트 하나입니다.
그 안의 설계도를 자기가 여러 수 10번, 수 100번 그려 본 것이
몇 권이 된 것 같아요. 몇 년을 대학 노트에다가 설계해서...
편리하게 한다고 하면서 방을 얼마나 복잡하게 했는지
우리는 어디에 뭐가 있는지 몰라요. 하하하하하하
아무튼 그렇게 신중하고 철저하게 검토하고 또 검토하는 것, 중요합니다.
이 화엄경도 물론 세 번ㆍ네 번 반복해서
예습 복습 다 하시는 분도 있지만, 요행히 공부하러 오는 날
날짜는 안 잊어버리지만 책은 어디 놔뒀는지 모릅니다. 하하하하하하
그래가지고 한참 찾다가 겨우겨우 찾아서 오는 사람 많지요?
많지는 않아도 몇이야 있겠지요? 마음에 계합이 되는가?
자꾸 웃네요. 웃음이 나오는 사람들은
그것 다 마음에 탁 계합이 되니까 웃는 겁니다.
六者는
不樂親近在家出家一切凡夫(불락친근재가출가일체범부)요.
재가자나 출가자나 一切凡夫 = 이것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정법을 모르고, 정법과 거리를 멀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친근하지 말라 이랬습니다. 그것은 재가자든 출가자든
물질에 너무 미혹 되어있는 사람들, 가까이 할 것 없습니다.
가까이하면 손해 봅니다. 마지못해서 만날 수는 있지만,
가까이 할 것은 아니다. 친근하지는 말라.
七者는 修諸善業(수제선업)호대, 여러 가지 선한 업을 닦되,
而不願求出世間果報(이불원구출세간과보)요.
세간과보를 구하지 말라. 말입니다.
세간과보를 바라고, 세속적인 과보를바라고 선한 일을 하지 말라.
이 말입니다. 선한 일은 그냥 선한 일을 해요.
하면 자기 닦은 공이 자기한테 오지 어디 가겠습니까?
아무리 피하려야 자기 지은 복은 피할 수가 없습니다.
자기 지은 죄는 아무리 피하려야 피할 수가 없습니다.
복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범어사에 살 복이 하도 있어서, 제가 범어사에 살면서
양산으로 울산가는 데로 서 남해 쪽, 김해 쪽은 자주 안 가 봤지만,
제일 자주 가 본 곳이 온양으로 울산으로 바닷가 쪽.
양산부근에 토굴 장만하려고 여러 수 10번 돌아다녔어요.
그런데 저는 하도 복이 많아서 그것이 안 되더라고요.
범어사에, 큰 고래 등 같은 기와집에 살 복이 있는데,
조그마한 그런 암자 하나해서 나 혼자 편안하게 살면
얼마나 편안하게 살겠다고 그렇게 구해봐야,
수 10번 돌아다녀도 안 구해지는 겁니다. 다른 도반들은 잘도 찾아요.
잘도 찾아서 토굴도 짓고ㆍ뭐도 짓고 굴 택 장만해서 잘 사는데,
저는 암만 돌아다녀 봐도 눈에 들어오지도 않고, 없고요.
그것이 복이 있으니까 그런 겁니다.
범어사에 살 복이 있으니까 도저히 그것이 안 되는 겁니다.
자기에게 정해져있는 복은요?
아무리 물리치려고 해도 물리쳐지지가 않습니다.
복도 마찬가지고 죄업도 마찬가지고
박복하게 사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가 지은 복 없는 삶은 남에게 주려고
아무리 해도 자기가 지었기 때문에 남에게 안 갑니다.
결국 지가 받고 마는 겁니다. 복이나 그 반대 것이나 똑 같습니다.
제가 제 자신에게 그것을 깨닫는 겁니다. 남은 어쩐지 모르고요.
저는 그 좋은데 살면서 괜히 지복 까먹으려고 양산으로 온양 쪽으로
그렇게 돌아다니면서 구했다고요. 안 구해지는 겁니다. 왜냐?
저는 큰 절에 살 복이 있으니까요.
그것이 눈에 들어올 일이 없는 겁니다. 야~, 그것 신기하더라고요.
어지간하면 그래도 하나 구할 것 아닙니까?
해인사 밑에 있는 어느 암자에 잠깐 있었어요.
늘 왔다ㆍ갔다하느라고 얼마 있지도 않았지요.
그런데 그것도 금방 제 손에서 떠나더라고요.
큰 절에 살 복이 있으면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뭐든지 무리하면 안 됩니다.
그것이 제가 지혜가 부족해서 쓸데없이 괜히 시간허비 했지요.
그래 어떤 일에도 자기가 지은 데로 가는 것이지, 무리할 것 없다.
修諸善業호대 出世間果報를...
修諸善業호대 而不願求出世間果報를 구하지 않는다.
이것 하나만 해도 우리가... 좋은 일 많이 하세요.
하되 구태여 그 과보ㆍ그 공덕 바랄 것은 없어요.
八者는 永離二乘(영리이승)하고,
성문ㆍ연각, 소승이지요. 성문연각을 멀리 떠나고,
行菩薩道요. 대승보살행을 닦아야 된다. 이 말입니다. 대승불교.
아주 바람직한 불교는 보살도거든요. 대승보살도입니다.
자기만을 생각하고... 아까도 이야기했지요?
무슨 치유ㆍ치유, 힐링ㆍ힐링하는 그런 소승불교가 들어 와서 막 그냥
횡행하는데, 그것은 二乘불교 = 소승불교 = 성문연각불교입니다.
보살도가 아닙니다. 보살도는 쫓아다니면서 빈민구제하고
우물이라도 파주고, 북한이나 어려운 곳에 문맹퇴치, 병고퇴치,
그 다음에 빈곤퇴치, 문맹ㆍ빈곤ㆍ병고.
이 세 가지가 근본적으로 해결해야할 문제입니다.
이것은 무슨 사상이니 국가니 분별할 것 없이
우리가 힘을 써야 될 일입니다.
여러분 사찰에, 주변에도 우리가 돌봐야할 그런 이웃이 많겠지요.
그 중에 딱 세 가지를 정해야 됩니다.
아주 돈이 없어서 치료를 못 받는
그런 병고에 시달리는 사람. 끼니를 못 때우는 아주 빈곤한 사람.
그리고 돈이 없어서 공부를 못 하는 사람. 문맹ㆍ빈곤ㆍ병고.
그것은 크게 보살도라고 명칭을 붙이지 않더라도
우리가 해야 할 그런 일입니다.
九者는 樂修衆善(낙수중선)하야, 여러 가지 선을 즐겨 닦아서
令不斷絶(영불단절)이요. 여러 가지 선 닦는 일,
선행하는 일을 끊지 말고 계속해라 이 말이지요.
十者는 恒善觀察自相續力(항선관찰자상속력)이라.
자기가 화엄경공부를 한다든지, 기도를 한다든지,
자기 나름대로 수행을 한다든지 하는 그것이 계속 상속 되는가?
자기의 상속하는 힘 = 相續力을 항상 잘 관찰해야 됩니다.
‘내가 또 깜빡하고 까먹진 않는가?ㆍ빼먹진 않았는가?’
그것을 늘 관찰하는 것. 이 이야기입니다. 恒善觀察自相續力.
佛子야
若諸菩薩(약제보살)이, 만약 모든 보살이
行此十法(행차십법)하면, 이 열 가지 법을 행할 것 같으면
是則名爲住不放逸(시즉명위주불방일)이니라.
不放逸에 머무는 것이라고 이름 할 수 있다.
그 사람은 방일하지 않는 사람이다.
게으르지 않는 사람이다.이 말입니다. 부지런한 사람이다.그 말입니다.
*
십종법(十種法)과 불방일(不放逸): 열 가지 법에 머물면 방일하지 않는다
*
불자(佛子)야
보살마하살(菩薩摩訶薩)이
주십종법(住十種法)을: 십종법에 머무는 것을
각불방일(名不放逸)이니 :
이름을 불방일이라고 하니, 방일하지 않는 것이니
하자(何者)가 : 무엇이
위십(爲十)고: 그 열 가지인가?
*
일자(一者)는
호지중계(護持衆戒)요: 여러 가지 계를 보호해 가지는 것이다.
일차적으로 오계만 잘 가져도 된다.
근본 십계를 잘 가지면 더욱 좋지만 오계가 기본이다.
*
이자(二者)는
원리우치(遠離愚癡)하야 : 어리석음을 멀리 떠나서
정보리심(淨菩提心)이요 : 보리심을 청정하게 하는 것이다.
보리심을 불심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제일 좋다.
부처님 마음속에는 좋은 것이 다 있다. 전에 내가 한 번 적어보니
불심속에 들어있는 뜻이 30가지가 넘었다. 배려심, 자비심, 지혜심,
사랑하는 마음, 일체 따뜻한 마음 그런 마음들이
전부 불심속에 들어간다. 그런 불심을 청정하게 한다.
*
삼자(三者)는
심락질직(心樂質直)하야 :
마음에 정직하고 순박하고 곧고 그것을 즐겨해서
이제첨광(離諸諂誑)이요 : 속이고 구부러진 것을 떠난다.
우리나라 신문에 보도되고 뉴스에 나오는 것을 보면
전부 속이는 일들 뿐이다. 지금 이 시간에도 청문회가 열리겠지만,
장관후보자가 월급을 받고 신고를 안해서 청문회에 가서 망신을 한다.
그런 일이 있다면 후보자로 지명되었을 때,
‘나는 허물이 많아서 못합니다.’ 하고 사양을 하면 되는데
‘혹시 안걸려서 장관 한 번 해볼까’ 하는 심리로 나아가서는
자기도 잊고 있던 과거 잘못까지
전부 들통이 나고 까발려져서 망신만 당하는 것이다.
순박하고 진실하고 정직하지 못하고 첨광하는 것이 문제다.
정직한 사회가 제일 중요하다.
*
사자(四者)는
근수선근(勤修善根)하야: 부지런히 선근을 닦아서
무유퇴전(無有退轉)이요 : 퇴전함이 없는 것이고
*
오자(五者)는
항선사유자소발심(恒善思惟自所發心)이요:
자기가 발심한 바를 항상 잘 사유하는 것이다. 이 점이 중요하다.
무엇을 하겠다고 마음을 한 번 냈는데 잊어버리고 다른 짓을 하면
그 일은 흐지부지 되어버린다.
자기가 발심한 것을 늘 사유하고 연구하고 검토해야 한다.
어디 가면 질문하고 서로 의논해 보고 물었던 것도 또 물어보아야 한다.
내 도반은 강원도에 토굴을 하나 짓는데
자기가 설계도를 그려본 것이 두꺼운 대학 노트 여러 수십권이었다.
몇 년을 대학 노트에다가 설계를 해서 그림을 그렸다는 것이다.
편리하게 한다고 하면서 얼마나 복잡하게 했는지
우리는 어디에 뭐가 있는지 봐도 모를 지경이긴 했지만, 무슨 일을 할 때는 그렇게 신중하고 철저하게 검토하고 또 검토하는 것이 중요하다.
화엄경 공부도 세 번 네 번 반복해서 예습 복습 다 하시는 분도 있지만
공부하러 오는 날 요행이 날짜는 안 잊어버렸는데,
책은 어디 놔뒀는지 몰라서 부랴부랴 찾다가
겨우 찾아서 가지고 오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이 이야기가 마음에 계합이 되는지 자꾸 웃는다.
웃음이 나오는 분들은 마음에 계합이 되기 때문이다.
*
육자(六者)는
불락친근재가출가일체범부(不樂親近在家出家一切凡夫)요 :
재가자나 출가자나 일체 범부를 즐겨 가까이 하지 마라.
그런 이들을 가까이 하면 손해다.
여기서 범부는 어리석은 사람들을 말한다.
정법을 모르고 정법과 거리가 멀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즐겨 친근하지 말라. 재가자나 출가자나
너무 물질에 미혹되어 있는 사람들을 가까이 하면 손해다.
마지 못해서 만날 수는 있지만 가까이 할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
칠자(七者)는
수제선업(修諸善業)호대 : 여러 가지 선한 업을 닦되
이불원구출세간과보(而不願求出世間果報)요: 세간 과보를 구하지 말라.
세속적인 과보를 바라고 선한 일을 하지 말라는 말이다.
선한 일을 하려면 그냥 하는 것이다.
자기가 닦은 공덕이 자기에게 오지 어디로 가겠는가.
지은 죄는 아무리 피할래야 피할 수가 없다. 지은 복도 마찬가지다.
나는 범어사에 살면서 토굴을 하나 구하려고
양산으로 울산으로 서남해로 김해로 언양으로 수십 번을 돌아다녔다.
그런데 내게 범어사 고래등 같은 기와집에 살 복이 있었는지,
작은 암자 하나 구하는 일이 쉽지 않았다.
다른 도반들은 잘도 찾아서 토굴도 짓고 뭣도 짓고 굴택 장만을 잘하는데 나는 아무리 돌아봐도 눈에 들어오는 자리도 없고,
도저히 진행이 안되었다.
한번은 해인사 밑에 어느 암자를 잠깐 구했는데,
그것도 늘 왔다갔다 하느라고
오래 있지도 못하고 금방 내 손에서 떠나고 말았다.
그런 것은 내가 범어사에 살 복이 있기 때문이었다.
자기에게 정해져 있는 복은 아무리 물리치려고 해도 물리쳐지지가 않는다.
복도 마찬가지고 죄업도 마찬가지다.
박복하게 사는 것도 그렇다. 복없는 삶은 자기가 그렇게 지었기 때문에
아무리 남을 주려고 해도 결국 자기가 받고 마는 것이다.
남은 어떤지 모르지만, 토굴을 구하면서 내 자신에게서 그것을 깨달았다.
좋은 범어사에 살면서 공연히 그 복을 까먹으려고
양산이고 언양이고 그렇게 돌아다니며 구해도 토굴이 구해지지 않았다.
큰 절에 살 복이 있으니 그런 것이 눈에 들어올 리가 없었던 것이다.
뭐든지 무리하면 안된다.
내가 지혜가 부족해서 공연히 쓸데 없는 일에 시간을 허비했을 뿐이다.
세간 과보를 구하지 말라는 이 말만 잘 알아도 대단하다.
우리가 좋은 일을 많이 하되 그 과보와 공덕은 구태여 바랄 것이 아니다.
*
팔자(八者)는
영리이승(永離二乘)하고 : 성문 연각을 이승을 널리 떠나고.
이승은 소승을 말한다. 소승을 널리 떠나고
행보살도(行菩薩道)요 :
대승보살행을 닦아야 된다. 바람직한 불교는 대승 보살도다.
앞서 이야기 했지만, 치유니 힐링이니 하면서
소승 불교가 들어와서 횡행하는 것은
이승 불교인 성문 연각 소승불교이지 보살도가 아니다.
보살도는 쫓아다니면서 빈민 구제하고 우물이라도 파주고
북한 같은 어려운 곳에 가서 병고와 문맹과 빈곤을 해결해 준다.
‘문맹, 빈곤, 병고’ 이 세 가지는 사상이나 국가의 분별없이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힘을 써서 근본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다.
여러 스님들의 사찰 주변에도 돌봐야할 이웃이 많을 것이다.
그 중에 돈이 없어서 치료를 못받고 병고에 시달리는 사람,
끼니를 못 때우는 빈곤한 사람, 돈이 없어서 공부를 못하는 사람을
도와줘야 한다. 문맹, 빈곤, 병고를 없애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굳이 보살도라고 명칭을 붙이지 않더라도 우리가 해야할 일이다.
*
구자(九者)는
낙수중선(樂修衆善)하야 : 여러 가지 선을 즐겨 닦는 일을
영부단절(令不斷絶)이요: 끊임없이 계속한다.
*
십자(十者)는
항선관찰자상속력(恒善觀察自相續力)이라:
화엄경을 공부하든지 기도를 하든지 자기 나름대로의 수행이
잘 진행되는지 항상 자신의 상속하는 힘을 잘 관찰해야 한다.
내가 또 깜빡하고 까먹진 않는가, 빼먹진 않았는가 늘 관찰하는 것이다.
*
불자(佛子)야
약제보살(若諸菩薩)이 : 만약 모든 보살이
행차십법(行此十法)하면 : 이 열 가지를 행할 것 같으면
시즉명위주불방일(是則名爲住不放逸)이니라:
불방일에 머무는 것이라고 이름할 수 있다.
그 사람은 방일하지 않는 사람이다.
게으르지 않는 사람, 부지런한 사람이다.
첫댓글 법혜보살(法慧菩薩)의 설법(說法): 법혜보살의 설법
찬탄허설(讚歎許說): 물음을 찬탄하고 설할 것을 허락하다
이치막방일(離癡莫放逸): 어리석음을 여의고 방일하지 말라
어리석은 사람이 게으르다. 게으른 사람이 어리석다.
어떤 사람이 몸이 아파서 더 힘찬 정진을 위해서 쉰다면
그 사람은 누워서 낮잠을 자도 정진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습관적으로 방일한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어리석어서 게으르다.
십종법(十種法)과 불방일(不放逸): 열 가지 법에 머물면 방일하지 않는다
자기가 발심한 바를 항상 잘 사유하는 것이다.
자기가 발심한 것을 늘 사유하고 연구하고 검토해야 한다. _()_ _()_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