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은 달력을 볼 때 교회력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지난주 3월 5일은 참회의 수요일 또는 재의 수요일이라고 부릅니다. 이날부터 사순절이 시작되어 주일을 제외한 40일간을 그리스도인이라면 성경을 읽고 참회와 금식을 통해 몸과 마음을 정결하게 하여 부활절(4/20)을 맞이하는 삶을 살아가는 기간입니다. 무엇보다 예수님께 초점을 맞춰 복음서를 읽고 예수님을 따라 사는 삶의 훈련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사순절 기간 동안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을 복음서를 통해 살펴보면서 이 시대에 사는 그리스도인으로써 우리 예수님 지금 나에게 오셔서 만나주실 때 나는 어떤 자세로 예수님을 만나 뵐 것인가 깊이 응답하는 절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오늘 본문말씀 첫 번째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을 보면 여러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그 현장은 가버나움 어느 가정인데 먼저 2절을 보면 많은 사람이 모여서 라고 했습니다......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 가는 곳곳마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 들었습니다. 마4:25하반절에 ...허다한 무리가 따르니라 막3:7.. 큰 무리가 따르며.....
이런 말씀을 보면 많은 사람들이 예수의 소문을 듣고 모여들었지만 아쉽게도 오늘은 무슨 이적을 베풀까 구경하려온 구경꾼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 행하시는 일을 단순히 구경하고 기대가 충전되면 미련 없이 떠나는 사람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음 어떤 사람입니까? 3절에 보면 한 중풍병자와 4명의 친구가 나옵니다.
이 광경은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먼저 중풍병자는 한 마디의 말도 기록이 되어 있지 않습니다. 몸이 마비되었고 걸을 수도 없고 일어날 수도 없는 질병에 걸렸습니다. 본문 열 두절 속에 나타난 중풍병자의 침묵은 그의 마음속에 또 다른 좌절과 실망의 모습을 암시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얼마나 오랫동안 상실의 마음을 가지고 살아 왔을까? 어쩌면 어릴 때부터 이런 병에 걸려서 꼼짝달싹 못하고 지내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혹은 어릴 때에는 여기저기 잘 뛰어다니다가 성인이 되어서 이런 질병에 걸려 더 아픈 추억에 몸서리를 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질병이란 몸만 아픈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까지 아프게 만듭니다. 아마 중풍 병자는 매일매일 수없이 되뇌었을 것입니다. ‘나는 버려진 존재야. 내 인생은 끝이야. 나는 누구에게 사랑을 받을 만한 가치가 없어. 나는 누구도 사랑할 수가 없어.’ 이렇게 자기를 비하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중풍병자에게는 아름다운 4명의 친구가 있어서 참으로 위로가 됩니다.
중병풍자는 일상생활이 안되어도 평소에 좋은 이웃을 두었습니다. 네 명의 이웃은 예수의 소문을 들려준 친구요.... 혼자 일어 설 수도 없는 그를 예수님께 데리고 온 것도 친구들 입니다.
아마 친구들이 그랬을거예요 “ 우리가 둘러 업고 가자 그런데 다른 친구가 아니야 둘러 업으면 몸이 아프니까 아예 침상 채 들고 가자 그런데 집 안에 들어 갈 수 없으니까 어떻게 지붕에 올라가 지붕을 뜯을 것을 생각하겠습니까? 그리고 지붕을 뜯고 예수님 앞에 침상을 내릴 정도이니~~ 이 얼마나 좋은 친구요 아름다운 협력 한 마음 한 뜻을 가진 친구들입니까?.... 이런 모습을 중풍병자도 보고 흐뭇해 하였을 것입니다.
우리 인생 가운데 친구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친구 중에 나를 정말 편안하게 해주는 친구가 있어요...... 나를 위로해 주는 친구가 있어요 더 진솔한 친구가 있다면 요나단이 다윗을 향해 자기 생명처럼 사랑하니라(삼상18:1) 정말 이런 친구들이 있다면 성도여러분들은 인생을 잘 살아오신 분 들입니다.
독일의 시인 ”에센 바흐“ 사람이 이런 멋진 말을 했습니다......... “한 사람의 진실한 벗은 천명의 적이 우리를 불행하게 만드는 힘 이상으로 우리를 행복하게 만든다.”고 했습니다.
한 사람의 멋진 친구가 있으면 천 명의 사람이 나를 불행에 빠트린다고 해도 훨씬 더 큰 행복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중풍병자에게 이런 아름다운 친구가 있는가 하면 많은 사람중에 6절에 보면 서기관도 있습니다.
서기관은 율법에 능하고 말씀을 잘 아는 학자입니다. 당시 서기관이 되려면 어려서부터 집중적으로 율법 교육을 철저히 받아야 하고 40살이 되면 안수를 받아 정식 서기관의 반열에 이르게 됩니다. 서기관들은 유대 신앙의 핵심적 지위에 있었기에 유대인들에게 늘 주목받는 자입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과 구별을 짓기 위해 긴 옷을 입고 다녔고, 시장에서 문안 인사를 받는 것을 좋아하였습니다. 회당에서 높은 자리와 잔치 자리에서 늘 윗자리를 원하였습니다. 서기관들은 구약의 율법을 잘 알고 있고, 그 율법을 풀어 가르쳤으나 그 말씀대로 온전히 살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겉으로 들어난 율법적 지식이나 성품 모든 것을 갖추었기에 당시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지만 서기관의 생각은 저 청년 예수가 어떤 말을 할까?
자기가 쌓은 지식으로 예수님 도의 말씀을 전할 때 단어 하나 문장 하나를 지적하고 판단 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면 많은 사람 중에 또 다른 한 분 누가 계십니까? 그 분은 예수님입니다.
가버나움 어느 가정에 찾아오신 예수님!!~~~~ 대부분의 사람들은 청년 예수가 무엇을 행하는가 구경꾼으로..... 중풍병자와 네 명의 친구는 오직 병에서 놓임 받는 일에 협력자로...... 서기관은 어떻게 하면 예수를 책잡아 고발하고자 왔다고 한다면...........오직 예수님은 저들에게는 관심조차 없는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이 땅에 오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이름의 뜻에서도 이땅에 오심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마1:21.....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니라..... 그렇습니다. 말씀과 같이 인류의 죄 문제 저와 여러분의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 예수님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제 집에 모여있는 사람들이 예수님 말씀을 들고 있는데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예수님이 계신 집안에 느닷없이 지붕을 뜯어 내는 소리가 나더니 침상이 지붕위에서 중풍병자를 4명의 친구들이 매워 가지고 예수님이 계신 곳으로 일어나지도 걸어보지도 못한 중풍병자가 내려왔으니 온 시선이 중풍병자에게 집중하고 있습니다.
우리 예수님 이런 광경을 보시고 어떻게 하셨습니까? 5절입니다.......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모인 사람들이 하나같이 청년예수가 중풍병자를 어떻게 고칠까? 여기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중풍병자를 바라보는 긍휼 이전에 예수님은 시급한 것이 죄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중풍병자의 병을 고쳐주는 것보다 내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죄 문제를 우선순위에 두고 계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근본 목적은 병이 낫고 건강하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공하고 소원성취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근본적이고 우선적인 것은 죄 사함 받는 것입니다...... 죄 사함 받은 연후에 병 낫고 돈벌고 할 것입니다.
근본적인 것은 사죄(赦罪)입니다. 사죄의 은총을 힘입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구원받은 의무로 서야 합니다.
뿐만아니라 죄 사함을 받았다는 확신을 갖는다면 병 걸린 그것으로 고민할 것 없습니다........설령 사업 좀 실패했다 해도 그리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죄 사함을 받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 예수님 죄에 대해 전혀 모르고 왔던 무리들을 향해 말씀하십니다.
10절 보세요.....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그리고 중풍병자에게 11절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중풍병자 침묵 중에도 죄사함의 권세를 가지신 예수님 말씀에 순종하여 건강하게 집으로 갔습니다. 죄 사함을 받았고 병 나음도 받은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런데 왜 하나님 말씀을 많이 안다는 서기관이 죄 사함의 권세를 말씀하셨는데 신성모독이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다시말하면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는 것입니다. 서기관의 말은 맞습니다.
시130:3-4... 여호와여 주께서 죄악을 감찰하실진대 주여 누가 서리이까 그러나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은 주를 경외케 하심이니이다.
시130:7-8... 이스라엘아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여호와께는 인자하심과 풍성한 속량이 있음이라 저가 이스라엘을 그 모든 죄악에서 속량하시리로다.
이처럼 구약시대 유대인들은 “죄 사함”의 권한이 오직 여호와하나님께 있음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 예수님도 백성들에게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주시면서 죄 용서를 위하여 하나님께 이렇게 간구하라고 가르치십니다. 마6:12..“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그렇습니다. “죄 사함의 권세”가 오직 하나님께만 있다는 분명한 사실을 알고 계신 예수님께서 서기관을 향하여 10절....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 당신 자신만이 죄 사함의 권세를 가지고 있음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서기관 뿐만아니라 모든 무리들에게 알도록 인식시키고 계십니다.....
그렇습니다. 카토릭 신부 교황이 죄 사함의 권세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세상에서 지은 죄를 판사가 판결하니까 판사가 권세가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판사도 인간인지라 죄인입니다. 양심의 죄.. 자신이 지은 죄를 자신이 해결 할 수 없습니다
오직 죄 없으신 예수님만이 죄를 사 할 수 있는 권세가 있는 것입니다.
요일3:5... 그가 우리 죄를 없애려고 나타나신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
어느 목사님이 집회를 인도하면서 죄가 얼마나 무거운 것이며, 그 죄가 우리를 어떻게 억누르는가에 대하여 설교했습니다. 예배를 마친 후 어떤 청년이 찾아와서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목사님, 죄의 무게가 얼마나 됩니까? 저는 죄의 무게를 전혀 느낄 수 없습니다. 죄의 무게가 50Kg입니까? 아니면 100Kg입니까?” 이때 목사님은 청년에게 이렇게 되물었습니다. “이보게 청년, 죽어있는 송장 위에 100Kg의 짐을 얹어 놓아 보게. 그 시체가 그 무게를 느끼겠는가?” 청년은 “죽은 송장은 느낄 수가 없지요.” 죄에 대해 목사님과 청년의 대화 내용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져 있으면 영적으로 무감각한 상태에 놓여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하게 됩니다.
이것이 모든 현대인들의 상태입니다...... 거리로 나가 “당신은 죄인입니다”라고 전도해보면 거의 대부분 죄인임을 거부하고 반발할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죄의 무게를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사울이 바울로 개종하여 그의 고백중에 가장 무게감이 있는 회개는 자신이 다메섹도상에서 부활의 예수님을 만나고 자신이 죄인인 것을 신앙고백 할 때 자신을 향하여 죄인 중에 괴수라고 했습니다. (딤전1:15a)
하늘아래 모든 것 중에 중요한 것은 죄 문제가 선결되어야 합니다....... 중병풍자도.... 네 명의 중풍병자 친구도..... 서기관도..... 가버나움 집안에 있는 모인 모든 사람도...... 오늘 우리도 가장 큰 문제는 죄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데 죄 사함 받도록 우리 모두를 초청하신 분이 누구입니까?....... 오직 예수님!!~~~ 그리스도이신 예수님 한 분 뿐입니다.
♭♭주의 보혈 능력있도다 주의 피 믿으오 주의 보혈 그 어린양의 매우 귀중한 피로다 ♪♬
주향 성도 여러분!! 죄를 사하신 예수님의 권세가 중풍병자에게 임한 것처럼 여러분과 저를 향하여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선포하셨음을 믿습니다. 보혈의 은총의 감격....... 하나님의 자녀된 감격...... 구원받은 감격으로 살아가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