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숙 황인숙(1958년 ~ )은 대한민국의 시인이다. 서울특별시에서 태어나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1984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시〈나는 고양이로 태어나리라〉가 당선되어 등단했다. 1999년 제12회 「동서문학상」, 2004년 제23회 「김수영문학상」을 수상했다. 1999년 제12회 「동서문학상」 2004년 제23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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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wang In-suk (Hangul: 황인숙) is a modern South Korean poet. Life Hwang In-suk was born December 21, 1958 in Seoul, South Korea. She debuted in 1984 with the poem I'll Be Born as a Cat. As the title of her debut poem suggests, Hwang is deeply interest in society's "alley cats", the lonely, isol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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뻔뻔스러울 정도로 떳떳하기를
등록 :2016-10-21 23:39수정 :2016-10-21 23:52
[토요판] 이주의 시인, 황인숙
그 젊었던 날의 여름밤
새벽에 전화벨이 울렸다
자냐고, Y가 물었다
아니, 전화 받고 있어
내 대답에 그는 쿡쿡 웃더니
그냥 나한테 전화하고 싶었다고 했다
무슨 일 있냐고 묻자
그냥, 그냥만 되풀이하다가
그냥… 살고 싶지가 않아… 라고 했다
그리고 그는 울고
나는 울음소리를 들었다
울다가 그는
툭,
전화를 끊었다
아직 젊었던 날의
계절은 기억나지 않지만 또
한 새벽에
전화벨이 울렸다
나, K인데…
오래 사귄 애인과 헤어졌다는 K는
어린 여자에게 가버린 애인에 대해
K를 못마땅해하던 애인의 가족에 대해
지운 아기에 대해
물거품이 돼버린 그림 같은 집과
토끼 같은 자식들에 대해
설움과 분노를 토했다
그리고 울먹이면서
죽고 싶다고 했다
잠 못 이루다 새벽에
전화로 나를 찾았던 Y와 K는
둘 다 별 연락 없이 지내던
먼 친구였다
그 뒤 Y와 K가
어떻게 살았는지
나는 모른다
지금까지 살아있다는 건 안다
나도 살아있다
우리를 오래 살리는,
권태와 허무보다 더
그냥 막막한 것들,
미안하지만 사랑보다 훨씬 더
무겁기만 무거운 것들이
있는 것이다
이달 출간 예정인 시집 <못다 한 사랑이 너무 많아서>(문학과지성사) 수록
“특별한 일들이 일어나기를 바라는 사람도 있겠지만 평범한 나날이 이어지기를 바라는 사람도 많습니다.” 한 달 안짝에 본 글인데 누가 어디에 쓴 글이었는지 기억이 안 난다. 한 친구의 농담대로, 머리에 든 게 많다 보니 별게 다 생각이 안 나네. 이키, 내 나이에 까불거리는 글은 부박해 보인다고, 나이에 맞게 언어를 고르라고 또 한 친구가 충고했는데. 참, 내 늙음을 깨우쳐주지 못해 안달하는 분들이 왜 이렇게 많은지. 아무렇게나 입고 다니지 마라, 특히 짧은 바지 입지 마라, 머리 모양을 짧게 자르고 다듬은 스타일로 바꿔라, 생활의 격을 갖춰라 등등. 이제는 말과 글에 대한 나잇값을 요구받누나. 나를 걱정하는 마음들 고마우시지만, 내가 그렇게 배우는 거 좋아했으면 서울대학교 갔을 거다. 아, 서두에 인용한 글의 원전과 필자를 밝히지 못한 께름칙함에 말이 딴 데로 길게 갔다. 하지만 딴 데건 같은 데건 길이가 늘어나서 흡족하다. 써야 할 원고를 앞에 두면 늘 공황장애 비슷할 압박감을 느낀다. 이 매수를 채울 수나 있을까? 그리하여 ‘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해야만 하니까!’라는 배수의 진을 치고, 일단 할 말 못할 말, 싱거운 말 무거운 말 가리지 않고 말 달리는 것, 말이면 다 해보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할당된 분량이 차고 넘치면 그제야 비로소 숨을 돌리고 나름 격을 생각하면서 글을 다듬는 게 내 원고 작성법이다. 이번에는 그나마 그렇게 하기 어려울 것 같다. 지금 나는 너무 피곤하고 우울하고 시간이 없다. 어서 글을 맺은 뒤 글 바깥에서 해결해야 할 일이 도처에 쌓여 있기 때문이다. ‘아, 평범한 나날이 이어진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특별한 일들이 일어날 글을 쓸 수 있으련만!’ 동서고금의 얼마나 많은 문인들이 이런 한탄을 했을까.
“언니, 우린 이제 어떻게 살지!?” 한 시인이 전화해서 절망적인 목소리로 느닷없이 토해낸 일성이다. 나만큼이나 사면초가에 삶의 대책이 없는 친구다. 나는 “몰라…”라고밖에 대답할 말이 없었다. 생각해 보니 나를 포함해 내 주위 친구들은 하나같이 패배자들, 젊은이들이 성공적인 삶을 사는 데 반면교사가 될 사람들이다. 우리가 처음부터 그랬던 것 아니다(나는 처음부터 그렇게 생겨먹었던 것 같지만). 초년 복보다 노년 복이 중요하다는데, 노년에 들어서 기쁨이나 희망은커녕 당장 살아갈 길이 막막한 처지가 됐다. 가장 큰 원인은 우리 모두 제 인생에 노년이 있을 줄 예상하지 못하고 노년이 됐다는 것이지만, 거기에 더해 우리가 노년에 들어선 이 시간은 인류에게 전망은커녕 아무 가망이 없어 보이는 시대다. 멀쩡히 사는 친구들도, 전에는 우리에게 너그러웠건만, 이제 우리의 비참이 옮을세라 피하고 싶어 한다. 그들은 남은 충정을 다해 충고한다. 앞으로는 더 엄혹한 시절이 올 거라며 정신 차리라고. 맞는 말이겠지만 정신 차려봤자 골치만 아프다. 그래서 상위 1% 사람들은 아무런 수치심도 없이 짐승처럼 부를 쌓아 지키고, 나머지 사람들은 아무 저항 없이 전전긍긍 살아간다. 이 야만의 시대에 가난한 노년을 맞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 그리고 필경 우리보다 나을 것 없는 노년을 맞을 듯한 수많은 오늘날의 청년들은? 그들에게는 학자금 대출 말곤 빚을 질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을 테니 우리보다는 나으려나? 어떻게 살아야 할까.
시 ‘그 젊었던 날의 여름밤’을 에두르면서 여름과 젊음에 대한 달콤 쌉쌀한 얘기를 풀어낼 생각이었건만, 늙은 시인 생활인의 한탄만 늘어놓았다. 청년들에게 연애가 사치이고, 예술가들에게 상상력이 사치인 시절이다. 위 시의 마지막 연 마지막 시구 ‘사랑보다 훨씬 더 무겁고 무겁기만 한 것들’에 이미 치여 사는 청춘들을 생각하니 가슴 아리다. 그래도 이 궁핍한 시대에 저항할 길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닐 테다. <문학동네> 이번 가을호에서 평론가 신샛별이 ‘88만원 세대의 감정생태학’이라 명명한 김금희의 소설들에도 길 하나가 엿보인다. 오늘 청춘들이여, 아직 디엔에이(DNA)가 바뀌지는 않았겠지. 그 뜨겁고 싱그러운 피와 감정을 소중히 여기고 따르며 자기만의 삶을 가꾸기를! 세상에 지지 말기를! 뻔뻔스러울 정도로 떳떳하기를! 떳떳함은 삶의 가장 큰 가망이리라. 부디 책 좀 읽으시라. 어떤 책은 세상을 이기는 힘을 키워준다.
황인숙 시인
*1984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새는 하늘을 자유롭게 풀어놓고> <슬픔이 나를 깨운다> <꽃사과 꽃이 피었다> 등의 시집과, <지붕 위의 사람들> <도둑괭이 공주> 등의 소설과, <인숙만필> <해방촌 고양이> <우다다, 삼냥이> 등의 산문집을 냈다.
내 노년의 영원한 트라이앵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