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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동문회 4월 교육법회가 2022년 4월 8일 금요일 7시 조계사 극락전에서 정수사 주지 지월 스님을 모시고 개최됐다.
지난 2월에 이어서 계초심학인문 2강을 들으며 초발심의 의미와 이후의 수행정진에 대한 법문을 들었다.
포교팀의 "노래로 떠나는 구법여행"으로 찬불가를 같이 합송하고, 삼조 정진경 선배님의 오카리나 연주를 듣고
시작된 법회는 삼귀의와 반야심경독송으로 마음을 정화하고 해월 권순석 동문회장님의 인사말, 스님을 모시는
청법가, 그리고 법문의 순서로 진행됐으며, 법회말미에 발원문 낭독과 총무부장님의 공지사항 안내, 사홍서원과
산회가를 부르며 4월 교육법회를 끝내고 기념촬영을 끝으로 법회를 마쳤다.
지월 스님 법문 요약
지난 시간에는 처음 시간이라서 불교전반 어떻게 공부를 하고 신행을 할 건지 큰 기초를 놓았다면
오늘은 본문으로 들어가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사실은 이렇게 계초심학인문은 출가한 스님들을 대상으로 하는 법문이라서 재가자들 한테 딱 맞을지는 모르겠는데, 어쨌든 출가한 스님이나 재가나 할 것 없이 다 우리가 부처님 가르침을 토대로 신행을 하는 거기 때문에 크게 어긋나지 않는 다 라고 그렇게 생각이 됩니다.
어쨌든 출가한 스님들한테 해당하는 얘기를 토대로 해서 우리 생활에 적용할 수 있는 그런 부분들을 중심으로 해서 간략하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계초심학인문을 크게 줄거리를 나눠보면, 초심자였던 마음가짐, 대중생활, 공양할 때 또 예불 올릴 때, 대중생활에서, 어떤 생활 부득이 마을에 갈 때 전반적으로 공부하는 스님들, 법문을 들을 때
생활할 때 마음가짐 이런 것들에 관한 얘기를 상세하게 하신 말씀입니다.
사실을 좀 읽어보면 스님들 법문이 결국은 다 그렇지만 어떻게 보면 참 꼰대도 이런 꼰대가 없다 싶어요..... 하나하나 꼬치꼬치, 이래라 저래라, 이러지 마라 뭐 내용을 보면 다 아는 얘기고 어렵지도 않아요..그런 얘기를 이렇게 펼쳐놓고 보면 젊은 분들이 들으면 참 꼰데도 저런 꼰데가 없다
싶을 정도로? 참견들을 하셨습니다.
저도 이제 포교를 한다고 십 년 넘게 이렇게 하다 보니까 스님들 법문이라는 게 참 뻔해요
욕심 부리지 마라, 화내지 마라 특히 이제 잘못되고 부족한 부분을 콕 찝어 가지고 지적을 하고 어떻게 어떻게 해라 이런 얘기들이거든요, 그런 얘기들 스님들 법상에 앉아서 이렇게 이렇게 하니까 들어주지
일상생활에서 그러면 참~ 듣기가 거북한 내용들이 많죠? 근데 이제 매주 이렇게 법회를, 강의를 하면서
그런 게 아예 되다 보니까 일상 대화에서도 자꾸 그런 모습이 나오는 것을 스스로 발견을 하게 돼요..
그래서 야 이거 참 법사의 업 이라 는 게 또한 이런 것도 있구나 싶을 정도로 좀 그럴 때가 많습니다.
어쨌든 초발심자경문 가운데 계초심학인문을 주제로 해서 이렇게 말씀을, 얘기를 해달라고 해서 준비를 해갖고 왔는데, 지난 시간에 이 초심에 대해서 간략히 좀 새롭게 한번 정리를 해보자라고 해서 말씀을 드렸는데, 저한테 처음 얘기할 때 이제 초심으로 돌아가서 뭐 이렇게 한다고 해가지고 이 과목을 택하셨다 이렇게 했거든요.. 그랬을 때 제가 한번 지난 시간에 한번 물었죠? 이 초심이라는 것이 우리가 처음 불교에 입문할 때 크게 발심을 해서 입문을 한 건지, 부처님 가르침이 이런 것이구나 하고 큰 어떤 감동이 있어서 입문하신 분도 있겠지만 대체적으로 많은 분들이 어떤 타력신앙에 기대서 입문하는 경우가 많아요..
그 초심으로 돌아간 다라고 했을 때 처음 입문했을 때 타력 혹은 기복 이런 데로 돌아가자는 얘기는 아니다 라는 거죠, 그러면은 초심이라는 말이 사실은 초발심 이렇게 얘기를 해야 된 다 라고 지난번에
같이 공유를 했었습니다.
그러면 초발심이라고 하는 것은 뭐냐면 기억하십니까? 우리 마음을 크게 두 그룹으로 나누어서
중생의 탐,진,치 삼독으로 물든 마음,또 부처님과 같이 청정한 진여의 마음 이 두 부분으로 좀 구분되어서 봤을 때 우리의 탐,진,치 삼독 으로 물든 중생의 마음이 청정무구한 진여 부처님 마음과 다르지 않다 라고 하는 본질에 있어서 다르지 않다 라고 하는 믿음, 확신! 이게 초발심이다 라고 할 수가 있다는 겁니다. 다시 말하면 현실적으로는 내가 범부중생일 망정 본질은 부처와 다르지 않다, 이렇게 아는 것, 이렇게 믿는 것이 초발심 이라고 할 수 있다 라 는 겁니다.
기억나시죠? 그러면 초발심시 변정각 그랬죠? 그러면 이 물든 중생의 마음이 부처님 마음과 다르지 않다 라 고 하는 믿음, 확신이 확립되면 초발심이고 초발심이 곧 변정각 이 다 라는 거예요..
그러면 그때부터의 수행이, 초발심으로 부터의 수행이 본격적인 수행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내 중생의 물든 마음이 부처와 다르지 않다 라 고 하는 그런 믿음이 수립되기 이전에는, 확립되기 이전에는 그저 타력신앙이고 기복적인 어떤 신앙에 지나지 않는 다 라는 그런 가운데에서의 어떤 신행, 공덕을 쌓고 혹은 예경을 올리고 또 기도를 하고 이런 것들은 본격적인 수행으로 볼 수가 없다 라 는 거예요.. 다만 본격적인 수행으로 나아가기 위한 예비적인 단계로서의 자량을 모은 다음에.. 우리가 사업을 한다고 했을 때 자본이 있어야 사업을 하겠죠? 사업이 크건 작건 자본이 있어야 어떤 사업을 펼칠 수가 있듯이 본격적인 수행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자량을, 공덕을 쌓아야 된 다 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초발심 이전에는 이전에 쌓는 어떤 그런 수행은, 본격적인 수행으로 나가기 위한 공덕자량을 쌓는 단계예요.. 그래서 그런 어떤 자량이, 공덕이 쌓여서 또 그런 쌓는 동안에 법회에 참석하고 경전을 읽고 하면서 이 중생의 물든 마음이 부처의 마음과 다르지 않구나..하는 믿음 ,확신이 생겨야 된다.
그럼 그런 확신이 들면 그때부터는 이제 원이 생겨요.. 원을 세울 수가 있습니다.
그런 어떤 초발심이 이루어지기 전에는, 나의 물든 마음이 부처라고 하는 확신이 서기 이전에는 원을 세울 수가 없어요.. 그니까 원을 세우지 못하고 부처님 전에 와서 소소한 어떤 것들을 비는 타력, 기복신앙에 지나지 않게 된다는 거예요 그런데 나의 물든 마음이 부처님 마음과 다르지 않다 라 고 하는 어떤 확신, 믿음이 생기면 이제 원을 수립할 수가 있습니다.
나의 어떤 물든 마음을, 중생의 마음을 부처님 마음으로 향해서 나아가는 이런 수행의 원, 원을 세울 수 있다는 겁니다.
원이 있으면 그런 원을 이루기 위한 실천수행 을 할 수가 있게 되는.. 그래서 신,원,행 그래요
믿음이 있고 믿음이 있으면 원을 세울 수 있고 원이 있으면 그 원을 이루기 위한 구체적인 어떤 실천수행의 길로 나아갈 수가 있다 라 는 거예요 그런데 그러한 믿음이 없으면 그냥 부처님 전에 어떤 복을 비는 이런 정도의 신행에 머문다 라 는.. 그러니까 대부분 많은 분들이 한 칠,팔정도 가 이 타력기복적인 신앙을 토대로 해서 입문을 하죠..그게 나쁜 건 아니죠.. 어쨌든 그런 어떤 순수한 그런 마음으로 입문을 해서 일년, 이년, 삼년 지나면서 이런 공부도 하고 경도 읽고 법문도 들으면서 이런 바른 믿음으로, 바른 믿음을 확립하고 그런 믿음을 토대로 해서 다른 수행, 신행을 배워가는 노력, 그런 것들이 초발심자의 마음이라고 할 수 있다 라 는.. 그렇게 해서 그러한 초발심, 그렇게 해서 초발심이 이루어지는 분들, 그런 분들한테 이제 그렇게 초발심이 되고 나면 그야말로 그 전보다도 더 어려운 이런 수행 의 길로 나가야되겠죠, 그러다 보면 더 막막하고 참 어렵고 힘든 단계로 진입하게 되는 겁니다.
그랬을 때 이제 꼭 필요한 것이 사실 말씀을 드리겠지만 초발심 이후에는 어떻게 되냐 라는 거예요
그런 초발심자 들을 상대로 해서 하신 법문이 이 계초심학인문 이다 라 는 겁니다.
초심자, 초발심자 들이 어떠어떠한 공부를 지어 나가야 되는지 이런 세세하게 하신 법문이다 라 는.. 앞서도 말씀드렸듯이 이 법문은 출가한 스님들을 상대로 하신 법문이고 출가한 스님들이라고 하는 것은 단체생활, 공동생활 이고 개인, 어떤 개인의 수행이 아닙니다.
전체 대중의, 대중생활을 하면서 서로 간에 도움이 될 수 있는 그런 어떤 마음가짐, 예절 이런 것들에 관한 얘기 라 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좀 나눠드린 자료를.. 한 장짜리 이죠 그걸 위주로 하고 본문 내용은 필요할 경우에 펼쳐서 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초심자의 마음가짐 가운데 첫 번째가 뭐냐 하면 친근현선하라 그랬어요 친 하라는 게.. 가까이 친하라.. 누구를? 현선을, 현인과 선인을.. 지금 늘 가까이하라는 거에요
여기 모이신 도반들, 혹은 어떤 스승들 이런 나보다 좀 나은 어떤 그런 선지식,선우,도반들 과 늘 함께 가까이 하라는 거죠..다시 말하면 이런 법회 있을 때마다 빠지지 말고 가급적 참석을 해서 이런 공부를 지어 나갈 수 있도록 해라..이런 얘기입니다.
그래서 입법계품, 화엄경 입법계품 에 보면 발 보리심자는 반드시 선지식을 찾으라고 했어요
스승을 찾으라는 거에요.. 발 보리심자면.. 그럼 여기서 보리심자는 뭡니까? 이 보리심을 발 한 자..
좀 전에 말씀드린 대로 나의 물든 마음이 부처의 마음과 다르지 않다 라 고 하는 확신을 발 보리심 그랬지요.. 초발심 그랬지요..그렇게 초발심이 되고 나면 그냥 뜻이 아니라 그때부터 본격적인 수행 이기 때문에 반드시 선지식을 찾으라 그랬어요..조금 전에 말씀드린 대로 이런 법회에 꼭 반드시 필참을 하라는 얘기에요..이게 입법계품에 나오는 얘기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선지식을 찾아서 물으라는 거에요..멀 물어야 되겠어요? 이사를 어디로 가는지?
자녀들 혼사날짜는 언제가 좋은지? ..이런걸 물으라는 거에요?
아니면 뭘 물으라고 하는 거예요?
입법계품 에서 선재동자가 오십삼 선지식을 찾아서 한결같이 묻는 얘기가 지금 요약해 놓은 바로 이겁니다.
거룩하신 이 여.. (스승께..) 거룩하신 이 여! 저는 이미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내 었으나.. (보리심을 냈어요) 그런데 보살이 어떻게 보살행을 배우며,어떻게 보살행을 닦으며 내지, 어떻게 해야 보살행을 빨리 원만 하는지 알지 못합니다. 어떻게 해야지 부처를 증득 할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듣기로 거룩하신 이 께서는 잘 가르쳐 주신다 하니 대자대비 하신 마음으로 말씀하여 주소서..
어찌 하오면 보살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성취할 수 있습니까? 이렇게 물으라는 거예요
선지식을, 반드시 선지식을 찾아야 되고, 선지식을 찾아가서는 이러한 어떤 질문, 청법을 하라는 겁니다
친근현선 해서 늘 선지식, 선우로 도반들을 찾고 그리고 나서 수 5계, 10계,..5계를 받고 10계를 받으라는 겁니다. 이 10계는 이제 출가해서 예비 수행자인 사미, 사미가 받는 계지요..
재가자는 삼귀의 5계입니다. 그래서 이제 수행자를 막 출가한 스님들을 상대로 한 법문이라고 했죠.
그래서 5계, 10계 더 나아가서 구족계를 받았다는 겁니다.
여기 계신 분들은 다 삼귀의 5계를 수지 하셨죠?
그리고 나서 이 계행을 지키는 데 있어서는 어떠한 자세로 어떻게 계율을 지켜야 되냐면 지범개차 하라 그랬어요. 그러니까 대승의 계율에 대한 해석은 이렇게 포용력이 있고 계율에 대한 재해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소승에게는 무조건 곧이곧대로 지켜야 되는 것이 소승의 계율 이예요.
우리가 이제 소승, 소승불교하면 남방불교를 칭하는 게 아니라 자기 위주로 수행하는 자,
편협한 자기 중심적인 어떤 수행자를 소승이라고 그러죠. 그런 어떤 자기중심적이고 자기만을 위한 어떤 수행을 염두에 두는 사람들을 그냥.. 곧이곧대로 살생 안하는 것이 능사고...
그렇게 여기지만 대승의 계율은 그렇지가 않아요, 지범개차 라고 했어요. “지‘는 지키는 거예요
일차적으로 지켜야 되겠죠.. 그리고 범하는 거예요 범할 때는 범해야 된다 라 는 거죠..
예를 들자면 조선의 선지식 가운데 서산, 사명스님 같은 경우에 출가자로서 살생을 하지요..
임진왜란이나 이런 왜구 들이 침략 했을 때 어떤 수행자의 신분으로서 그야말로 그냥 뭐 살생을 하는 어떤 이런 계를 범 했어요.. 그것도 이제 보는 입장이나 생각 하는 입장에 따라서는 있을 수 없는 일 이 다 라고 평가하는 경우도 있어요.. 수행자가 전장에 나가서 그런 살생을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
그렇게 보는 입장도 있고 또 다른 입장도 있어요.. 그런데 개인적인 판단에 맡겨야 되지만
사명 스님 같은 경우에 그렇게 이제 전장에서 선봉에 나서가지고 승군을 이끌고 그렇게 많은 살생을 하고 그러면서 이제 민족의 큰 환란을 지켜냈죠... 지켜낸 부분은 공이 예요.
그렇지만 개인적으로 봐서는 엄청난 실이 있어요.. 개인적인 수행자의 입장에서 보면 엄청나게 많은
민족을 구하고, 많은 백성들을 구한 측면은 있지만, 살생을 했다라고 하는 그 자체에서 어떤 과 또한 면할 수가 없다 라 는 거죠...
그 부분은 그 부분대로 스스로가 감당하고 짊어지고, 또 그런 부분들을 상쇄시키기 위해서,또 전장에서 고통 받고 힘들었던 이런 백성들을 위해서 같이 동사섭을 하면서 또 그러한 어떤 업보 아닌 업보를 짊어져야 하는거죠... 그런 어떤 이차적인 수행을 펼쳐 나갑니다.
그렇게 계율을 해석하라는 것이 어떤 대승의 계율 이예요, 그래서 지범개차 열 때는 열고 막을 때는 막고, 법 할 때는 범하고, 지킬 때는 지키는 이런 식으로 계율을 좀 포용적으로 해석을 해서 지키는 것을 지범개차 라고 그래요..
그리고 그 밑에 삼취정계 라고 하는 것은 원효스님의 어떤 계율에 관한 해석 부분인데
계율을 그냥 소극적으로 지키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 이렇게 세 가지 측면에서 계율을 이해를 하는 겁니다. 첫째는 섭률의계, 섭률의계는 계를 하나하나 조목조목 그대로 받아 지니는 거예요..
그런 측면이고 그 다음에 섭선법계는 이 계율을, 내가 이러이러한 계율을 지키는 것이 사회 전반의 어떤 정의에 부합하냐 정의에 부합하지 않나 이런 측면을 보는 게 섭선법계예요.. 정의로운 것이냐
나를 위해서는 그냥 지키는 게 좋지만 전체 사회 전반을 위해서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서
이게 내가 파 하는게, 지키는 게,. 어느 게 더 나았냐?
이런 것들을 보는 측면이 섭선법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섭중생계라고 하는 것은 이 중생사회 전반의 이익을 보는 거예요..
이렇게 좀 포괄적으로 재해석을 하는 것이 삼취정계라는 겁니다.
그래서 초심자는.. 초발심자는 이렇게 친근현선 해서 5계, 10계 등을 받아 지키되, 지범개차하라! 잘 알아서 지키고, 범하고 열 때는 열고 막을 때는 막아라..
그럼 무엇을 기준으로 이렇게 지범개차 할 것인가?
삼취정계 즉 섭율의계, 섭선법계, 섭중생계라고 하는 이런 측면에서 계율을 유연하게 융통성 있게 해석하고 지켜나가는 노력, 이러한 것들이 처음 초심자들의 그 다음의 마음가짐 이 다 라는 겁니다.
그 다음에 상념유화선순 이언정 부득아만공고 다..
이런 것은 선지식을 모시고 도반들과 함께 공부하면서 늘 이렇게 유연한 마음 자세를 지니라는 거예요
아만, 교만 이런 것들을 내세워서 주장하고 이러지 말라 는 겁니다.
많은 지역에서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서 대중을 이루고 공부를 하다 보면 각자의 생각이 있고
각자의 어떤 입장이 있을 수 있고. 이런 것들이 있겠죠.. 그럴 때마다 각자의 어떤 입장만을 고수하고
자기의 어떤 생각만을 고수하고 이러다 보면 대중 전반에 어떤 화합을 깰 수 있는 경우들이 많다 라 는 거죠... 그러니까 늘 하심하면서 유연한 마음으로 열린 자세로 상대방이 어떤 입장이나 이런 것들을 고려하면서 자기 수행을 지어 나가야 된 다라고 하는 이런 부분들 이죠...
그러니까 지금 말씀드린 이런 부분들은 출가나 재가 할 것 없이 늘 우리가 초발심자 들의 어떤 마음가짐으로 지니고 있어야 되는 어떤 그런 마음들이라고 할 수 있겠죠...
그 다음에 대중생활에 관한 예절은, 하나를 뽑아 가지고 화쟁 이랬는데..
당유쟁자 하거든 이게 어떤 시비가 생겨가지고 쟁문이 생기면, 옳고 그름에 관한 어떤 이런 부분들이 논쟁이 생기면 양서를 화합하야 참 이 사람 저 사람 어떤 입장을 들어보고 그런 입장들을 고려해서 그 양설, 양쪽의 어떤 입장들을 들어보고 양측 입장을 화합하는 이러한 측면으로 자비로운 마음으로 얘기를 하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어떤 한 측면만을 고수해 가지고 또 다른 어떤 입장들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이런 어떤 것을 하지 말라는 거죠 그게 이제 화쟁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대중생활 전반에 관한 어떤 이런 부분들은 뭐 그야말로 대중 생활에 필요한 어떤 이런 얘기들
이기 때문에 요 부분만 하나 뽑아봤고 대중생활 전반에 대한 얘기는 우리 재가자들 한테 적용을 해보면
우리도 서울 같이 복잡한 도시에서 살다보면 많은 입장 차이가 있어 생각들이 다를 수 있죠 그럴 때
이제 우리가 최소한 지켜야 할 어떤 기초 예절들이 있는 거죠.. 예를 들어 가지고 요즘은 이제 주택과 다르게 걸을 수 있는 조그마한 어떤 길들이 많죠.. 그런 길들이 좀 넓으면 좋은데 좁은 가운데서 이렇게
오솔길 같이 좀 조그마한 걸을 수 있는 길들을 많이 내 놨어요. 그러면 많은 분들이 나와서
이렇게 걷다보면 서로 부딪치기도 하고 이런 경우들이 있죠.. 그러면 그러니까 어떻게 해야 되겠어요?
서로가 기초 질서를 지켜야 되는데 좁은 길을 넓게 쓰려면 우측통행을 하면 돼요 그렇지 않아요? 예전엔 좌측통행 했죠? 요즘에는 우측통행이에요.. 그리고 좁은 길에서 이렇게 서로 교차해서 지나가다 보면 서로가 이렇게 피하는데 이쪽분도 반대로 같은 방향으로 피하는 경우가 더러 있죠?
있습니까? 없습니까? 그 왜 그럴 것 같아요? 우측통행을 안 하니까 생겼는데 그러니까 그럴 경우에 무조건 우측으로 고수하면서 우측으로 나아가면 안 부딪혀요.. 그런데 그거를 지키지 않으니까
서로 이렇게 같은 방향으로 해가지고 또 반대로 양보하고, 또 그분은 또 어떻게 해요?
그분도 양보심이 좋아가지고 서로 몇 차례 이렇게 그래서 부딪치는 경우가 있죠?
그러니까 자동차를 운전하면 그런 경우가 없어요.. 자동차는 그렇게 안 비켜요.. 왜 그래요?
자동차는 면허 시험 문제로서 그렇게 그냥 딱 사실이 결정돼 있어요..그러니까 왼쪽으로 비키는 경우가 없습니다.
그런데 보행자같은 경우에는 서로 이렇게 부딪치는 경우가 많아요..
제가 그럴 때 무조건 우측으로 우측을 향해서 걷는 게 습관화되면 그런 경우가 없어요..
그러니까 무조건 우측을 고수해서 나아가면 되요. 그래서 나중에 이제 어떤 소송에 걸려도 이길 수가 있어요.. 우측으로 가서 부딪치면.. 소송 까지는 안 가겠죠?...
그 다음에 이제 대중생활가운데 중요한 부분이 공양예절이에요.. 수행이라는 게 별게 없습니다.
취침,기상, 공양, 예불 이런 것들이 가장 수행자들의 기본적인 지켜야될 어떤 시간 규정이거든요
공양할 때, 예불할 때 이런 것들이 대중생활의 전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공양할 때도 발우공양, 다 해보셔서 알겠지만 지켜야 될 예절들이 참 많아요.
음식을 씹을 때도 너무 그렇게 맛있게 먹으면서 쩝쩝거리지 말고 등등입니다.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관 삼륜청정 이라 했어요..
스님들한테 해당되는 문제 입니다.
그런데 우리도 한번 같이 생각해 볼 수 있는 그런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해서 가져왔습니다.
삼륜이 청정한가를 늘 관해라! 이 삼륜 이라고 하는 것은 지금 공양을 받는 나, 공양을 올린 시주
또 공양물 이 세 가지를 관 하 라 는 거예요.
나도 상대방도 이 세 가지가 실체가 없이 공 하다라는 것, 이걸 관 하 라는 겁니다. 공하다 라 는 게 뭐겠어요? 조금 전에도 반야심경을 지성독성을 하면서 공이 몇 번 나왔죠? 공 이 라는 게 뭡니까?
반야심경에 나오는 공! 일차적인 의미는 없다는 말이에요.. 공 이 라는 말은 텅 비어 없다.
그럼 뭐가 없느냐면 단순히 공이라는 말이 일차적인 의미는 없다는 말이지만 없다는 말로만 이해를 해버리면 허무단멸 이에요 단멸에 지나지 않아요.. 그런데 없는데 뭐가 없냐면 자성이 없다 라 는 거예요.. 공 이 라는 말은 일차적인 의미가 자성이 없다 라 는 거죠.. 자성이 없다 라 고 하는 것은
개별적인, 독자적인 어떤 성품, 성질이 없다 라 는 거예요.. 그러면 자성이 없다 라 고 하는 말은 있다 라 고 하는 측면에서 해석하면 연기하고 있다 라 는 거예요..
연기적 존재로서 있다 라는 말 이예요.. 연기라는 말은, 인과 연의 화합에 의해서 생겨난 것이다.
인연생기라는 말의 줄임말이죠..
중생의 삶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 마음 가운데는 나만! 여기 계신 분들은 아니겠지만
나만! 이런 마음으로 사시는 분은 없죠?
그래도 나부터죠, 저부터 예외가 아닙니다. 나만은 아니어도 나부터 이런 것까지는 그냥 봐줄 수 있죠..
그런데 그 마음 조차도 사실은 연기설을 토대로 해서 보면 맞지가 않다.
우리가 어떤 범부중생으로서 나만은 아니어도 나부터 라는 마음을 완전히 제거하기는 좀 어렵지만
그것 또한 사실은 부처님의 가르침과 백퍼센트 부합 하는건 아니다. 왜 그러냐면 나의 삶 자체가 이 많은 사회적 관계, 중생들과의 함께하는 어떤 삶이기 때문에, 연기적 삶이기 때문에 나부터라는 말 자체도 부처님의 말씀에 백프로 부합하는 것은 아니다 라는 거죠..
어쨌든 공 이 라는 말은 연기라는 말, 자성이 없다는 말, 긍정적, 부정적 측면에서 보면 그렇게 해석할 수 있다 라는 말입니다.
지금 내가 수행을 위해서 받는 이 밥 한그릇, 물 한 잔 이런 것들이 다 이렇게 연기적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라 고 하는 것을 관 하면서 수용을 해야 된다 라 는 거예요..
그러면은 이제 그런 공양물을 받아쓰는 데 있어서도 욕심을 내지 않고, 욕심을 과하게 부리지 않고
필요한 만큼 적당하게, 아주 검소하게 받는 그런 어떤 자세로 임할 수 있다 라 는 겁니다.
스님들은 발우공양에 습관화돼서 공양할 때도 보면 밥을 먹고 나서 발우공양이 아니어도
밥이나 밥그릇이나 그것을 씻어 먹는 게 이렇게 습관화 되어 있어요..
그래서 이제 저도 이렇게 김치국물도 씻어서 이렇게 먹으니까 옆에서 이렇게 보더니
김치 국물까지 다 이렇게 드셨어요? 그러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게송을 외우기를
한방울의 김치 국물에도 일억 마리의 유산균이 들어있고....(웃음)
더 구체적으로 이해가 되죠? 그랬는데 어쨌든 공양, 밥 한 그릇 물 한 잔을 먹더라도
이러한 것들이 그렇게 실제로 그냥 있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어떤 중생들의 노고, 이런 이런 것들이 서려 있고, 내재 되어 있다 라 고 하는 그런 어떤 관찰 속에서 받아 수용해야 된 다 라고 합니다.
그리고 나서 예불을 올릴 때 어떤 마음으로 어떻게 해야 되는지 첨경존안 그랬죠?..
첨경존안 하라.. 첨경존안 이라고 하는 것은 부처님의 어떤 존상을 우러러 보라는 거예요..
자연히 뭐 말할 필요도 없을 정도로 지극히 당연한 어떤 그런 말입니다.
그러면서 예불할 때 가장 중요한 여기 계초심학인문 에서의 키워드는 참회 라 고 뽑아봤습니다.
수지자신죄장 이 유여산해 하여 수지이참사참 으로 가이소제 이니라.
모름지기 나의 어떤 자신이 했던 죄업장이 유여산해 산과 바다와 같이 그렇게 높고 많음을, 많다 라고 하는 어떤 자각! 그런 것들을 토대로 해서 그렇게 산과 바다와 같이 높고 많은 어떤 자신의 죄업장을 소멸참회를 해야 되는데 어떠한 자세로 어떤 마음으로 자신의 이런 죄업장을 참회 해 야 되냐면
수지이참사참 이라야 가이소제 라, 이참,사참 이라야 소제 할 수 있다 라 는 것을 알아야 된다 라 는 거예요... 그냥 무조건 그냥 절만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라는 거예요 이참을 토대로 사참을 해야 된 다 라는 거예요, 이참이 없는 사참은 참 힘들고, 부질없는 짓에 지나지 않아요..
그럼 이참을 토대로 하지 않는 그러한 사참, 어떤 백팔배, 삼천배, 만배 뭐 독경 이런 사참은 진정한 어떤 참회가 안 된다 라 는 거예요..
우리가 이제 초발심자 는 이미 이참이 이루어졌다라고 볼 수 있어요..
근데 초발심이 안 되고.. 초발심이 뭐라고 했습니까? 중생에 물든 삶, 삼독으로 물든 마음이 본질에 있어서는 부처와 다르지 않다!
이렇게 확신하는 것이 초발심 이라고 했죠? 그럼 발심이 이루어진 거예요..
그걸 토대로 해서 수행을 하지 않는 그런 어떤 사참은 이거는 진정한 수행이 아니라는 거예요..
유루업에 지나지 않는다, 유루업에 지나지 않는다는 거예요...
이참을 토대로 하지 않는 다양한 어떤 수행, 이거는 유루업에 지나지 않는 다 라는 ..유루업에 지나지 않는다.
전라도 분들이 그러죠? 뻘짓, 뻘짓에 지나지 않는다 .. 그러니까 이참이 안 된, 발심이 이루어지지 않은 가운데 아무리 열심히 하더라도 그거는 유루행, 뻘짓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참을 토대로 해서 사참을 해야 된다.
나의 업장이 산 과 같고 바다와 같이 많은데, 그거를 진정으로 제대로 닦아 없애려면 이참을 토대로 한
사참을 해야 된다라는 겁니다. 그러면은 제가 구체적으로 우리의 업장이 얼마만큼 많길래
산과 같고, 바다 같은 지를 예를 들어서 구체적으로, 실제적으로 한번 말씀을 드려보면
예전에 큰 스님들 법문 가운데 중생들의 마음이 찰나에 구백생멸을 한다.
이런 얘기를 하시는 걸 많이 들었어요.. 찰나에 구백생멸이 됩니다.
그럼 찰나가 얼마 만한 시간이냐 하면 20분의 1초예요..
20분의 1초에 구백 번의 마음이 생멸한다면 하루에 몇 번입니까?
900 곱하기 20 곱하기 60 곱하기 60 곱하기 24 그럼 얼마예요?
지난 시간에도 말씀드렸는데 1,555,200,000번, 십오억오천오백이십만번 마음의 변화가, 의식의 변화가 일어나요 그럼 그 중에서 몇 번을 알아차려요? 제가 이렇게 말씀드리기 전에 하루에 몇 번이나 마음이 변합니까? 그러면 수도 없이 변한다 라 고 해요.. 그런데 이렇게 구체적으로 십오억오천오백이십만번 가운데 몇 번 알아 차리냐? 그러면 열 번도 못 알아차려요...
그렇게 많은 어떤 생각에 의식의 변화가 있는 가운데 열 번을 못 알아 차리고 지나가요...
그럼 그게 다 뭘로 쌓이겠습니까? 그것이 업으로 쌓이고 모인다 라 고 생각하면
나의 업이 얼마만큼 많은 지가 대체적으로 짐작이 가죠?
그러니까 이 산, 해와 같다 라 는 것을 좀더 실감이 나게 표현하기 위해서 제가 이렇게 한번 말씀을 드려본 거예요...
그럼 업의 무게가 그렇게 된다면 그 업을 토대로 한 업력은 몇 마력이나 될 것 같아요?
업력,... 뻔히 아는데도 욕심이 나고 뻔히 아는데도 화가 나죠.. 그건 다 업력 때문에 그런 거예요 이참을 했다면, 내가 본질적으로 부처와 다르지 않다 라 고 앎이 생겼는데,
부처가 욕심을 내겠어요? 부처가 화를 내겠어요? 그런데도 우리 입장에서 욕심도 나고, 화가 나죠.. 부처라는 것을 알았는데도 욕심이 나고 화가 나요..
왜 그런 거예요?
그게 바로 업력 때문에 그렇다.. 저도 화가 나기도 하고, 욕심이 나요...
근데 알지만 욕심이 나오고, 화가 나.. 그게 다 업력 이예요..
그럼 나의 업력은 어느 정도일 것 같아요? 제가 업력의 공식, 업력이 얼마만큼 되는지
계산할 수 있는 공식을 만들었어요. f=ma
이게 무슨 법칙 입니까? 뉴턴이 발견한 힘의 법칙이죠.. 그러니까 업력이 우리의 어떤 업의 무게,
조금 전에 말씀드린 데로 하루에 십오억오천오백이십만 번이나 생멸변화하는 그 업의
어떤 쌓이고 모여서 생긴 업의 무게, 무게가 결국 업력으로 작용 한다 라 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많고 많은 업을, 업력을 어떻게 해야 소제 할 수 있냐?
가이소제, 소제를 할 수 있겠냐는.. 얼마만한 시간이 걸리겠어요?
아비달마구사론이나 이런데 보면 세친 보살이 삼 아승지겁 을 닦아야 소멸할 수 있다~
그래요 그런데 그거는 부파의 생각이고...
방법이 있어요..삼 아승지겁이 필요 없고, 단 한방에 해결하는 방법이 있어요..
우리가 예경할 때 지송하는 천수경에 보면 백겁적집죄 일념돈탕진 그랬죠?.
백겁적집죄가 일념 한 생각에 돈탕진 이에요 어떻게? 요여화분고초 멸진무유여
그럼 이게 무슨 수로 가능하겠어요? 백겁적집죄가 일념돈탕진 할 수 있는 방법이 뭐냐라는 거예요!
할 수 있는 방법이 뭐냐 라는 거예요?
그게 죄무자성 종심기, 죄는 자성이 없어요
자성이 없다는 말이 뭐에요? 공하다는 말이라고 했죠?
무자성이라는 것은 공 이라는 거에요.. 공이에요 성이없어요 없지만 또 있죠..
어떻게 있어요? 연기하고 있어요! 그렇게 알으라 는 거예요 죄라고 하는 것은 자성이 없어요..
다만 연기할 뿐이에요 연기하고 있을 뿐이에요.. 그러니까 마음을 좇아서 일어난 것이다.
이렇게 아는 것이 죄무자성 종심기라는 거예요.. 그러면 그 마음이 심약멸시죄역망 그런 마음이 멸하면
죄 또한 멸 한다. 그래서 죄도 없어지고 죄망심멸양구공 죄도 마음도 다 공 해버리면 그게 뭐에요?
이게 진참회 라는 거죠.. 이렇게 하는 것이 이참 이예요..이러한 걸 토대로 해서 이제 업을 소멸 하기 위한 구체적인 사참 을 할 때, 제대로 된 참회가 가능하다 라는 겁니다.
이러한 원리를 알지 못하고 참회를 한다고 이를 악물고 하는 참회는 진정한 참회가 아니라는 거예요..
유루업 이에요 유위행이고 유루업에 지나지 않는다.
진짜 참회를 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이참과 사참 이라 야 된다.
제가 이 조계사에 소임을 볼 때 이제 불대동문들이 일 년에 한 번씩 삼천 배를 한다고 해서
이제 주지 스님 법문을 청해 듣는데 주지스님이 바쁘셔 가지고 제가 대신 나가서 인사 말씀을 드리면서
예배라는 것은 달마스님 달마어록에 보면 진성공경할 “예”요 무명굴복할 “배”라 그랬어요 우리가 예배를 드린다 할 때 그 예배가 진성을 공경하는 것이 예고, 무명을 굴복하는 것이 배다 라는 거예요..
삼천 배 너무 많다!..이렇게 전제를 하고 그 말씀을 드렸어요.. 그러면 그렇게 알 때 우리가 절 하는 것이 단순히 무릎을 굽히는 것이 아니라 저는 마음을 굽히는 거다 라는 거예요..
그런데 이 마음이 굽혀져요? 안 굽혀져요? 안 굽혀지죠? 존심이 잘 안 굽혀져요.. 무릅은 굽혀도 마음이 잘 안 굽혀지죠? 그러고 나면 이제 삼천 배가 많아요? 적어요? 삼천 배 갖고도 안 돼요 이 마음이 진정으로 마음을 굽히려면.. 삼천 배가 굽혀지겠어요? 안굽혀 지겠어요?
그러면 이제 삼천 배 도 부족하다 처음에는 삼천 배가 많다 라고 해놓고 이제 삼천배도 부족하다 라는 겁니다..
그래서 예불을 하고 우리가 이제 불전에, 부처님전에 이게 예경을 올리고 참회를 한다라고 했을 때는
이러한 자신의 죄업장이, 죄장이 산과 같이 바다와 같이 높고 많은 이 죄장을 참회하기 위한 것인데
참회를, 진정한 참회를 하기 위해서는 이참과 사참이라야 가이소제, 가히 소멸할 수 있다!
이렇게 알고 절을 한번을 하더라도 이러한 자세로 마음으로 해야 된다라는 겁니다.
그리고 이제 대중방 에서의 어떤 예절 가운데
하나를 뽑은 것이 부득양어가추라 그랬어요.. 이것은 무슨 말이냐면.. 다양한 사람들과 어떤 다른 처소에 왔을 때, 이리저리 얘기할 때, 대중 가운데 참 마음에 안 드는 경우도 있고 대중 생활을 하다 보면 대중에 좀 마음에 안 드는 경우도 있을 거고 또 옆에 어떤 분들이 참 마음에 안 드는 경우도 있고
그럴 경우에 어떤 개별 상대로 해서 집안이었던, 내 마음에 맞지 않는 다 라고 해서
집안에 같은 대중 으로서 이런 도반이나 선지식 들에 관한 얘기들을, 험담을 늘어놓지 말라는 거예요
외부 사람들한테 그러니까 우리도 이제 불교집안에서 이렇게 보면 스님들도 허물이 있고 또 많은 어떤 허물들이 있을 수 있죠... 그런 것들을 가지고 이렇게 외부에 대외적으로 얘기를 하지 말라는 겁니다.
그런 경우들을 많이 보게 되죠.. 그러지 말라는 이게 가장 기본적인 필수적인 얘기죠..
이런 것들은 그야말로 누워서 침밷기 이죠.. 나의 어떤 집안의 허물을 밖에다 이렇게 드러내는 것
특히 보살님들 같은 경우에 마음이 좀 찔려요? 안찔려요?
대체적으로 만나서 얘기하는 게 누구 흉을 봐요? 누구에 관한 허물을 막 풀어 놓습니까?
없는 거 보니까 말을 안 해도 잘 아시는 것 같은데 어떤 그런 부분이 부득양어가추라 이런 얘기고
좀 긍정적이고, 좋은 쪽 이런 쪽을 얘기를 하라는 거죠.. 그 다음에 마을을 왕래하는 경우에
이건 절대적으로 스님들한테 해당되는 얘기죠,..그러니까 스님들이 대부분 산중에서 수행처소의 생활을하다가 또 어떤 여러 가지 이유로 해서 밖에 외출을 하고 나가는 경우들이 있죠..
그랬을 때 어떤 마음가짐에 관한 어떤 그런 얘기들입니다.
저도 이제 이런 도시에서 생활을 하고 포교를 한다고 생활하다 보니까
스님들은 산에 있어야지 제 값을 받아요 도시에 나오면 일단 반값..
어디 뭐 물건이 필요해서 어떤 가게나 이런데 가면 참.. 좀.. 별로 안 좋은 경우들이 많아요..
우리는 교회 다니는데요.. 이렇게 얘기하는 경우도 있고.. 누가 다니지 말라 그랬나?
어떤 그런 등등을 해가지고 참 많은 시선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다가 또 나가서 이제 외식을 해야 될 경우 이거는 거의 똥값.. 반값이 아니라 똥값..외식, 밖에서 하고 이런 경우에는 거의 스님들이 안 먹는다고 하는 걸 먹는 경우가 많죠..
그랬을 때는 거의 똥값 정도로 이렇게 받아요..그러니까 스님들은 그냥 산중에서 이렇게 있어야 제 값을 받지 밖에 나오면 거의 반값,똥값 이란 말이죠.. 그러니까 이런 마을에 도시에 나왔을 때 수행자로서 이렇게 지켜야 될 어떤 품위,예절.. 이런 것들을 참 잘해야 된다 어떤 그런 얘기들입니다.
그니까 이건 직접적으로 재가 자들한테 해당되는 부분은 아니지만 그래도 우리가 어떤 불자로서 지켜야 될 어떤 기본적인 소양이나 예절 이런 것들은 한 번씩 이렇게 생각을 해볼 수는 있겠죠..
그리고 이제 또 공부하는 자세, 수행자가 어떤 자세로 공부를 지어 나가야 되냐? 타인의 시비를 논하지
말라! 수행자들의 가장 중요한 부분들이 그런 부분들 이예요..
내 눈에 좀 안차는 경우들이 많아요..또 다양한 어떤 생각들이 있기 때문에 그때그때마다 시비를 논하게 되면 이게 참 많은 문제를 생기게 합니다.
시비를 논하지 마라! 속된 반연에 이끌리지 마라.. 이 속된 반연..
이런 저런 것 뭐 대중처소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 이제 어떤 속된 반연이라고 하는 것이 스님들한테 해당되는 경우인데 다양한 어떤 재능이 있고 포교를 위해서는 재능도 필요 하고 하지만 개인적인 수행자로서 입장에서 보면 다양한 어떤 재능들 이죠..
그런 것들을 하다보면 스님 출가한 어떤 본분으로 부터 좀 멀어지는 경우들이 있다 라 는 겁니다.
그런 부분들을 경계하고 하는 그러니까 늘 내가 출가한 어떤 본분이 무엇인지를 잊지 않고
공부를 지어 나가라 이런 관련된 얘기고...
그 다음에 법문 듣는자세!
마음을 비우고 법문을 들어라.. 이건 무슨 얘기냐면 여기 계신 분도 지금 불대동문회 하면 벌써
기본교육으로부터 또 불교대학 이 년, 다른 절들은 한 일 년 정도 에서도 끝내는데 조계사는 이 년,
더 나아가서 대학원 등등 해가지고 이렇게 하게 돼요
그러다보면 불교 스님들이 하시는 얘기들은 이미 다 알고 계신다 라고 볼 수 있어요..
뭐 그 얘기가 그 얘기고 비슷해요 그럼 다 아는 얘기에요 그랬을 경우에 이제 뭐 다아는 얘기다..
뭐 이러지 말라는 거예요 마음을 비우고 다시 한번 그법문을 통해서 나한테 적용해보고
다시 한번 나의 내면을 성찰해보는 그런 어떤 시간으로 계기를 삼아야지 뭐 다 아는 얘기인데..
또 스님들도 얘기를 하다 보면 약간 좀 다르게 잘못 얘기할 수 있을 수도 있겠죠
그럴 경우에 또 어떤 자기의 어떤 앎을, 견해를 내서 이렇게 하는 그런 등등 이런 것들을 좀 내려놓고 지금 법사스님이 어떠한 취지로 어떠한 얘기를 하시는지 그 얘기가 내가 실질적으로 신행을 하는데
있어서 실천을 하고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 이런 것들을 한번 되새겨보는, 다시 한 번 나를 점검하는
그런 시간으로 삼아야지 뭐 다 아는 얘기인데 이러구 말면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 그런 얘기죠..
그리고 이제 고요히 앉아서 사유하라!
이런 얘기들은 있지 않은 얘기들, 들은 얘기들 읽은 어떤 경,론 또 어록 이런 얘기들을 그냥 들은
것으로서 지식으로서 받아들이고 끝내면 아무 의미가 없어요 이거를 깊이 사유해서 내 것으로 만드는 노력 이게(전정사유)예요.. 깊이 생각을 해서 그것을 내 것으로 체화 시켜야지 그게 내 것이 되지
그냥 지식으로서 한번 들은 것으로서 족하면 그런 크게 내 공부에 도움이 안된다 라는 거예요..
깊이 사유해서 내 것으로 만드는 그런 노력이 고요히 앉아서 사유하라는 겁니다.
그런 법문을 듣는 자세에 관한 얘기고 또 수행하는 마음가짐에 관한 것은 뜻과 절개를 굳게 가져
항상 게으름을 채찍질하고 잘못을 깨달아 (함대로 옮겨서) 허물을 뉘우치고 마음을 조복하라!
그러니까 우리가 경전을 읽는 이유, 스님들의 법문을 듣는 이유는 자신을 성찰하기 위한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 중생의 마음이 하루에 십오억오천오백이십만 번 어떤 마음의 의식의 흐름, 변화가
있다 라 고 했을 때, 몇 번 알아차리느냐는 거예요? 열 번을 못 알아차린다 라고 하는 것은,
그러니까 열 번을 넘어도 사실은 뭐 많이 못 알아차리죠, 못 알아차린 다고 하는 말이 자기가 자기
자신을 성찰하지 않는 다 라는 얘기에요..
그냥 보면 보는 대로 보면 듣는 대로 마음이 외부를 향해서 밖으로 나가 있다 라 는 거예요 외부 대상에 깔려서 내면을 성찰하지 못 한다 라 는 거예요 이거를 전문용어로 뭐라고 하냐면 넋빠진 상태!
정신 나간 상태다! 보면 보는 대로 들으면 듣는 대로 외부 대상을 향해서 나가있어요..
마음은 밖을 향해 있어요 내면을 돌아보질 않아.. 내면을 성찰하지 않고 보고 듣고 하는데
밖으로 향해 있는 상태, 이건 전문용어로 뭐라고요? (웃음) 넋빠진 상태, 정신 나간 상태라는 거예요..
제가 그런 것들이 다 자기 자신을 성찰하지 않는 것이다. 그럼 어떻게 무슨 수로 십오억오천오백이십만 번이나 되는 의식의 흐름, 마음의 변화를 알아차릴 수 있겠어요? 무슨 수로 그게 가능하겠어요?
수행이죠, 염불, 참선.. 염불을 하고 참선을 하면 보여요.. 그렇지 않아요?
평소에 이렇게 안 하다가 염불이든 참선이든 하려고 가만히 앉아 있어 보면 염불좀 좀 많이 하시고,
참선좀 하셨다면 그 다음날 와가지고 아..스님 망상 때문에 못 하겠어요..
평소에는 마치 아무 생각도 없이 고요했던 것처럼 염불을 할라니까 망상때문에 못하겠데..
평소에는 고요 했어요? 시끌벅적했는데 못알아 차렸죠!
그런데 염불이나 참선을 하다 보니까 그렇게 시끌벅적한 마음이 이제 보여요? 안보여요?
보이기 시작하죠!
그럼 이제 공부가 되는 거예요? 안 되는 거예요? 그만큼 내가 내 내면을 성찰하기 시작한 거예요..
성찰을 하다 보니까 내 마음이 고요해요? 아니면 시끌벅적해요? 시끌벅적 하다는 거 그걸 알아차리는 공부가 염불수행이고 참선수행 이예요 그러니까 우리가 염불을 어떠한 자세로 했어요?
관세음보살님이 나한테 복을 주고 지장보살님이 나한테 어떤 구원을 준다라 고 생각하고 타력적으로 기복적으로 매달리다 보니까 자기 내면을 성찰하는 염불수행을 못했던 거에요..
그런데 기복이 아니라 하나의 수행으로서의 염불을 하다보면 그런 자기 내면에 어떤 의식의 변화..
이런거 를 성찰하기 시작 한다 라 는 겁니다.
그럼 알아차리는 순간 그 마음을 어떻게 하겠어요?
그런 식으로 어떤 염불수행이나 참선수행을 통해서 시끌벅적한 내 내면을 성찰하고 다스리는 노력..
그러한 것들이 수행이라는 거죠.. 그래서 그러한 어떤 것들을 게으르지 않고 꾸준히 열심히, 열심히
수행해 나가는 것 그러면서 자신의 어떤 허물을 돌아보는 것 이런 것들이 어떤 수행의 본질이라고
할 수가 있다는 거죠..
그리고 나서 마지막으로 불법을 만나기는 어렵다는 생각을 일으키면 도 닦는 마음이 늘 세워지고
항상 다행하다는 마음을 가지면 마침내 물러나지 아니한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천만다행으로 사람 몸을 받아서, 또 사람 몸을 받았어도 이러한 정법을 만나서 수행하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사람 몸을 받았고 또 이렇게 참 불보살님의 가피로 정법 을 만나서 바른 수행으로
나갈 수 있는 기회를 얻었는데 이 기회를 놓치면 언제 다시 수행을, 이런 정법을 만나서 수행을 할 수 있겠냐는 거예요.
이제 기회가 없다 라 고 봐야 돼요.. 금생, 지금 아니면 없다 라 고 봐야 된다 라 는 겁니다.
이렇게 이제 간절하고 절실한 마음을 내는 것, 이게 초발심이라고 할 수가 있다! 아시겠죠?
사실 이런 얘기들이 저도 부처님의 경전을 토대로 또 큰 스님들의 어떤 법문을 토대로
이렇게 말씀을 중계방송 하듯이 말씀을 드리지만 사실 쉽지 않아요..
참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또 포교 한다고 이렇게 도시에 나와서 개별적으로 생활을 하면서, 그런 마음을 견지하면서
쭉 나간다 라 는 것은 더더욱 어려워요. 대중생활을 하면서 대중스님들과 탁마를 하면서
정진하는 것은 대중의 어떤 힘으로, 이게 앞으로 앞으로 나가는데, 진일보하는데 도움이 되지만
수행을, 포교 한다고 이렇게 불대 나와서 개인적인 생활을 하면서 이렇게 해나간다는 것은 참으로
어렵고 어려운 일이에요..
앞서 말씀드린 대로 이 수행 이라고 하는 것은 그만큼 어떤 자량공덕을 쌓아야 수행을 하시는
복도 있다 라 는... 우리가 이런 정법을 만나 수행할 수 있는 거는 복이 있어야 돼요
복이 없으면 안돼요 저는 출가를 했는데도 복이 없으니까 그런 어떤 깊은 수행을 하지 못하고
도심에서 포교 한다고 이러고 있는 거예요.. 제가 참 제가 저를 돌아봐도 참 안됐어요 (웃음)
불쌍해요..어쨌든 우리가 이렇게 정법을 만나기는 참으로 어려워요 그런데 우리가 이렇게 사람몸을
만나, 정법을 만났으니까 금생에 우리가 불자로서 세워야 될 목표가 있어요 최소한의 목표 그것을
저는 뭐라고 하냐면 수다원과에 오르는 것, 성문사과 가운데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 이걸
사과라고 하죠.. 수다원과에 오르는 것이 금생의 최소한의 목표로 삼아야 되요..
수다원과에 오르기 위한 목표를 세우고 나가야 한다는.. 가능하겠어요?
불가능하겠어요?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래가지고 안 돼요 이거는 확고하게, 확실하게 목표를 수립하고
그 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방법, 이것을 아셔야 돼요 수다원과는 한마디로 얘기하면 세 가지 번뇌를
끊으면 돼요 간단해.. 이 자리에서 제가 해결해 드릴게요 이 자리에 오늘 참석하신 분들은 다
수다원과에 오를 수 있도록 해결해 드리겠습니다.
수다원과에 오르면 일곱 생 이내에 아라한과를 얻어서 삼계를 해탈한다 했어요
금강경 다 읽어 보셨죠? 수다원이 몇 왕래예요? 7 왕래 그랬죠? 그게 바로 수다원과에 오르면
인간과 천상을 일곱 번을 왕래하면서 아라한과가 열린다. 부처가 된다라는 거예요..
그러면 수다원과에 오르기 위해서는 세 가지 번뇌를 끊으면 된다 라는 거예요..
간단해 많지도 않아 세가지만 끊으면 돼!
첫째가 유신견, 유신견은 반야심경 에서 오온 이 곧 공, 공 이 라는 것을 알면 돼요..
유신견은 이 오온 으로 구성돼 있는 오온신을 나라고 집착하는 아집, 그게 유신견 이예요..
그런데 오온이 실체가 없다는 건 다 알죠? 오온이 개공 이라는 걸 아까 읽어서 다 아시죠?
읽기만 했어요? 안 믿어요? 오온이 곧 공이라는 걸 믿어요? 안 믿어요 ? 믿죠? 믿습니까? 믿죠!
그러면 유신견이 떨어진 거예요 오온이 곧 공이라고 알면 유신결은 해결 된 거예요..
그 다음에 의견, 먼저 회의적 의심 지금 앞서 서두에 말씀드렸던 물든 삼독 탐진치 삼 독으로 물든
중생의 마음이 청정한 부처의 마음과 다르지 않다 라 고 하는 이 사실을 확신을 하면 돼요..
거기에 대한 회의적 의심이 없으면 돼요 그리고 중생의 오온이 공하다 라 는 것을 믿으면 돼요..
이런 등등의 부처님의 정법에 대한 가르침에 회의적 의심이 없으면, 확고하게 확신을 갖고 믿으면 돼요.
그게 두 번째 회의적 의심이 의견 이예요.그러니까 그런 가르침을 믿지 못하는 것이 회의적 의심이에요
그럼 그거를 해결하면 돼요 그걸 끊으면 돼요 부처님의 가르침이 그게 아닌데 하는 생각이 있어요?
없어요?
금강경을 읽어보고 아 이건 아닌데 이런 생각이 들어요?
아니면 맞습니다~ 맞습니다~
이런 생각이 들어요? 고개가 좌우로 흔들려요? 아래위로
흔들려요?(아래위로요~) 반야심경을 읽으면?(아래위로요~) 화엄경을 읽으면?(아래위로요~)
팔만대장경 어느 경전을 읽어봐도 고개가 아래위로 흔들려요?
좌우로 흔들려요?(아래위로요~) 그건 졸면서 흔들리는거 아니예요?(웃음)
그러니까 불교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스님들의 법문을 듣고 고개가 아래위로 흔들리면 돼!
좌우로 흔들리면 그건 회의적 의심이 있는 거예요 제 고개가 아래위로 흔들리죠.. 좌우로 안 흔들리죠?
그러면 두 번째 의심 해결됐죠!
그다음에 세 번째가 뭐냐면 계금취견 이에요 계금취견은 정법이 아닌 사법을 토대로 해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것들.. 그러면은 자신의 죄업장이 저 수미산에 산과 바다와 같이 많다.
이것은 누구의 문제예요? 나의 문제지요.. 그러니까 이 문제의 원인이 외부에 있어요?
내부에 있어요? 나의 문제가 밖에 있어요? 내면에 있어요? 그러면 답은 어디에 있어요?
안에 있어요? 밖에 있어요? 안에 있죠.. 문제도 나한테 있고 답도 나한테 있어요..
그런데 우리는 문제를 어디에서 찾아요? 밖에서 찾죠? 그러면 답은 어디에 있어요?
아니 밖에 있다면 문제가, 문제가 밖에 있으면 답은 어디에 있어요? 밖에서 찾죠.. 문제가 밖에 있다면
다 이게 팔자 탓이다~이래요.. 이러면 답을 어디가서 찾아요? 미아리 가서 찾죠..
이러면 안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계금취견 이라고 하는 것은 문제의 원인을 외부에 있다 라고 보고
답을 밖에서 찾는 것이 계금취견 이예요..
그러니까 예를 들어서 입춘.. 뭐 한다고 할 때 삼재 풀이한다고 쓰는 어떤 여러가지 것들이 있죠?
그게 밖에 찾는 거예요?안에서 찾는 거예요? 그러니까 문제가 밖에 있다 라 고 생각하니까
밖에서 찾아요, 내 내면의 문제가 아니고 밖에서 찾아요.. 그러니까 머리카락 자르고 손톱깎고
입던 빤스 태우고 이런 걸로 삼재풀이 한다 라고 생각하는 게 계금취견 이라는 거예요..
근데 여기 있는 분들이 오온을 나라 하고 고정불변의 실체로서의 나라고 여겨요? 안 여겨요?(아니오)
그럼 해결됐죠!
두 번째 부처님의 경전이나 스님들 말씀 듣고
고개가 좌우로 흔들려요? 아래위로 흔들려요?(아래위로요~)
그럼 그건 해결됐죠!
문제를 밖에 찾아야 되겠어요? 안에서 찾아야 되겠어요?(안에서요~) 안에서 찾죠!
그러면 수다원 이예요! 그걸 토대로 해서 이제 수행을 해 나가면 수다원인 거예요!
그럼 일곱생 이내에 아라한과를 증득할 수 있다. 참 쉽죠?
어려워요? 쉬워요?
아니 조리적으로, 이론적으로 이해가 돼요? 안 돼요?(됩니다~)
그걸 물은 거예요.. 그럼 쉽지 않죠.. 쉽겠어요?(웃음)
쉬운일은 아닙니다. 그런데 지금 제가 말씀드린 것이 이해가 되요? 안되요?
그러면 된거에요
일차적으로 거기까지 해결이 되면 그걸 토대로 해서 신행수행을 지어나가면 된다.
이런 얘기.. 아시겠죠? 그럼 마치겠습니다. (박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