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 15:19]
이 일로 인하여 내가 예루살렘으로부터 두루 행하여 일루리곤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편만하게 전하였노라..."
이 일로 인하여 - 바울은 원인 및 결과적인 접속사 '그러므로'를 사용하여 그가 18절에서 말한대로 그리스도의 복음의 일꾼으로 이방 전도 사역에 부름받아 여러해에 걸쳐 전도 활동을 하였음을 언급하고 있다. 따라서 '이 일로 인하여'라는 말은 18절과 19절을 한데 묶어주는 역할을 한다. 내가 예루살렘으로부터 두루 행하여 일루리곤까지 -
바울은 세 차례에 걸쳐서 소아시아와 지중해 북부 지역을 두루 다니며 전도 여행을 하였다, 그가 복음 전도를 시작한 것은 다메섹과 아라비아 지방에서부터였으며, 본격적으로 이방인의 사도로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한 것은 안디옥에서였다. 그런데 어째서 그의 전도 사역의 출발점을 예루살렘으로 말했는가 ?
여기에 대해서 혹자는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전도할 기회가 여러 번 있었던 것을 염두에 두고 말하였다고 한다. 또한 혹자는 복음 전도의 출발점과 중심이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였기 때문에 그곳을 언급했다고 한다후자가 좀더 타당한 의견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행 1:8에서처럼 복음은 예루살렘으로 시작해서 땅끝까지 전파될 것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루리곤은 아드리아 해의 동쪽 연안, 마게도냐에 근접해 있는 로마의 속령으로 오늘날의 유고슬라비아 영토에 해당한다.
공식 명칭은 일루리아로 바울은 3차 전도 여행 중 고린도에 체류하는 동안 일루리곤 지역을 방문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아무튼 사도는 여러 해에 걸친 자신의 사역의 결과를 언급하는데서 자기에 의해서 세워진 교회나 회심자의 수효, 또는 러한 사역에 뒤따른 고난 등에 관한 설명을 생략하고 단지 자기가 수고한 경로를 표시하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부터 일루리곤까지' 이르는 넓은 지역을 인용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편만하게 전하였노라 - 이것은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일루리곤까지 이르는 넓은 범위의 지역을 나다니면서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했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렇다고 목적지를 향해 곧바로 서둘러간 것도 아니었다. 단지 그는 복음을 편만하게 전했다고 말하고 있다. '편만하게 전하다'의 헬라어 '페플레로케나이'는 '플레로오'에서 파생된 단어로서 '부족한 것으르 보충하고 완결짓는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직역하면 '복음을 채웠노라', '복음 전하는 일을 완성했노라'로 번역할 수 있다. 또한 복음을 모든 곳에 전파하여 '완전히 밝히 드러내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칼빈은 이것을 '바울이 부족된 것을 보충하면서 복음 전파를 넓게 퍼뜨렸다'는 뜻으로 해석하고 있다. 따라서 이 구절을 통하여 바울의 전도 활동을 짐작해볼 수 있는데 그는 전도 여행을 하면서 큰 도시에서 복음을 전파하고
그곳에 교회를 세운 다음 그 지역의 새로운 회심자들에게 그 교회를 맡겨 그들로 하여금 그 주변 지방들을 보다 강력하게 그리고 지속적으로 복음화시키도록 한 듯이다.
[롬 15:20]
또 내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는 복음을 전하지 않기로 힘썼노니 이는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아니하려 함이라..."
내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는 복음을 전하지 않기로 힘썼노니 - 바울은 이방인들에게 자신의 사도직의 진실성을 확증하기 위해 지금까지 동양에서의 자신의 활동이 거둔 성공에 대해서 언급하였다. 그리고 이제 본절에서는 서양에서의 미래 사역과 로마 방문에 대한 생각을 피력하기 위해 그가 항상 자기 사역의 지침으로 삼아온 원칙을 상기시키고 있다.
이러한 고백은 이미 다른 전도자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한 곳에서는 전도하지 않겠다는 바울의 확고한 선교 정책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자기 자신에게 닥치는 희생과 고난이 아무리 많더라도 복음을 위한 길잡이가 될 책임을 맡겠다는 그의 소망을 표현해 주고 있다. '힘썼노니'라고 번역된 헬라어 '필로티무메논'은 '필로스''사랑함'와 '티메'명예'가 합성된 단어로 '힘쓰다'는 의미 외에 '명예를 사랑한다' 또는 '영예로운 일로 간주한다', '열성으로써 노력하다'의 의미를 가진다.
이것은 바울 자신이 개인적인 영예를 구한다는 뜻이 아니다. 그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그의 사도적 책임이었다. 사도란 단순한 목사니 전도자가 아니다. 바울 자신이 고전 3:10에서 말한대로 그의 사명은 '터'를 놓아 다른 사람이 그 위에 건축할 수 있게 하는 것, 즉 남들이 아직 가지 않은 곳,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지 않은 곳에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다. 이것을 바울은 영예로운 일로 여겼고, 이 일을 사랑했으며 또한 최선을 다해 열정적 노력을 기울인 것이다.
따라서 본문은 바울의 성스러운 자랑과 열망을 표현하는 것으로서 여기서 어떤 새로운 사상을 표시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가 현재 목표를 향해서 다가가고 있는 선교 사역의 진행 방법과 정책 및 그 성격을 규졍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아니하려 함이라 - 그리스도의 복음을 온 세상에 전파해야 할 막중한 사명을 갖고 있는 바울이 여기서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아니한다는 자신의 선교 정책을 말한 것은 단순히 사도직의 구별 의식이나 우월 의식에서 한 말이 아니다.
이것은 바울의 사역의 독특한 특징으로 땅끝까지 복음을 전해야할 신성한 일을 자기 혼자 독불장군식으로 주장하지 않고 다른 사역자들의 전도 활동과 열매를 존중한다는 의사 표현이다. 즉 이미 복음이 전파된 곳에 또 가서 전하는 이중적 일을 하지 아니하여 하루라도 빨리 땅끝까지 그리스도의 이름을 전파하고자 한 열망에서, 바울은 그러한 선교 원칙을 취한 것이다.
바울의 이런 선교 원칙은 그 결과 얻어지는 공적을 독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전체 기독교 선교의 경제성을 위해서였다. 아직도 미개척지가 많은데 한 곳에 사역자들이 모이는 것은 기독교 전체의 공동 사역이란 관점에서 볼 때 비효율적이므로 자신이 먼저 앞장서서 고통을 무릅쓰겠다는 순교적 자세를 바울은 항상 갖고 있었던 것이다.
[롬 15:21]
기록된 바 주의 소식을 받지 못한 자들이 볼 것이요 듣지 못한 자들이 깨달으리라 함과 같으니라..."
본절은 사 52:15의 70인역의 문자적 인용으로서 앞절에서 말한 바울의 선교 정책이 자기 고집이나 자랑이 아님을 입증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바울의 이방인을 위한 전도 사역이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에 일치하고 있음을 증명하고 있다. 그리고 이 구절은 그 유명한 이사야의 '종의 노래' 즉 메시야의 자기 비하와 고난과 승귀가 완벽하게 응결되어 있는 사 52:13-12의 내용으로서 그 종이 많은 민족과 왕들에게 미치는 영향을 언급하고 있다.
주의 소식을 받지 못한 자들이 볼 것이요. '주의 소식을 받지 못한 자들' 사 52:13-15에서는 '왕들'로 표현되었으나 본문에서는 유대인과 대조되는 이방인을 가리킨다. 듣지 못한 자들이 깨달으리라(카이 호이 우크 아케코아신) - '듣지 못했다'는 것은 유대인들처럼 고난의 종되시며 메시야이신 주님에 관한 소식을 듣지 못했다는 뜻으로서 역시 이방인을 염두에 둔 것이다.
그리고 '깨달으리라'는 말은 사도들이 전파한 주님의 소식, 곧 복음을 듣고, 예수를 메시야인 구세주로 알게 되어 믿음에 이르른 것을 뜻한다. 앞 구절의 '볼 것이요'란 말과 대등 소이한 표현이다. 이렇듯 열방에 복음의 빛이 비춰지므로 주께 돌아온 자가 역사상에 일어난 것은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새로운 시대가 도래한 것을 보여주는 획기적인 사건이다.
이런 관점에서 바울은 자기의 선교 사명을 인식하고 구약성경을 인용하여 자신의 선교사역의 결과를 증거한 것이다. 한편 혹자는 이러한 예언이 바울의 사역에서 성취되고 있다는 사실을 통해서 그의 사도직이 명백하게 드러나고 있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이 말씀은 특별히 사도들에게 위임되었고 그들에 의해서 이 말씀이 성취되어졌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