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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12월20일(수)맑음
자신이 욕계에 안주하고 있다는 걸 모르거나, 알더라도 그 앎이 경각심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면 그는 욕계에 기생하는 벌레 같은 삶을 살고 있을 뿐이다. 그래도 좋다, 벌레일지라도 자신이 벌레라는 걸 알면 언젠가는 껍질을 벗고 날아가는 꿈이라도 꿀 수 있으니까. 그래도 좋다, 벌레에게도 해는 뜨고 진다. 오늘은 어떤 날인가? 고양이의 콧김에도 날아갈 만큼 섬세한 티끌우주에 <20.Dec.2017>이란 이름표가 붙은 시간단위가 째깍대다가 소멸된다. 우물쭈물할 새가 없다. 이것이라 하면 벌써 이것이 아니고, 잡았다하면 이미 새나갔다. 한 자리 차지했다싶으면 헛다리짚은 지 오랜 줄 알아야한다. 급하게 흘러가는 물에 비친 달이 그 자리에 있느냐, 없느냐?
오늘은 무얼 했나? 아미화, 연경, 문인과 현정보살과 함께 남원 백장암 선원으로 대중공양 갔다. 백장선원은 동안거 결재중이다. 대견스님이 입승을 보면서 보름마다 포살을 하고, 일주일마다 법에 대한 토론을 하면서 서로 탁마한다고 한다. 이는 선일스님과 행선스님이 주도하여 벌이는 새로운 방식의 결재이다. 그렇게 시작한지 벌써 세 철 째이다. 결과가 좋고, 그 좋은 결과가 제방선원에 좋게 퍼져나가길 바라는 바이다. 내년 동안거는 대견스님과 대만에서 함께 하기로 약속하였다. 선원에서 점심공양을 하고 주지실에서 차담을 나누고 돌아오다. 진주 엠비씨네 극장에서 <신과 함께, 죄와 벌> 영화를 보다. 사람이 죽어 저승에서 겪는 중음의 과정을 일곱 개의 관문을 통과하면서 죄와 벌을 심판받아 마침내 환생하게 된다는 스토리이다. 영화는 웹툰에서 인기 있던 만화를 영화화한 것으로, 불교의 업설과 윤회설에서 영감을 받아 창작된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중년이상의 어르신과 불자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관람을 많이 한 것 같았다. ‘지나간 과거에 새로운 눈물을 낭비하지 말라. 가해자가 이승에 지은 죄를 진심으로 뉘우쳐 피해자에게 진정으로 용서받는다면 저승에서 판관이 그 죄를 다시 묻지 않는다.’는 말이 기억난다. 어머니는 자식의 죄를 용서한다. 어머니에게 용서받지 못할 자식의 죄가 어디 있겠는가? 제가 낳은 아들이 죄를 지었으면 어머니는 자기가 잘못 낳아 잘못 길러서 그렇게 되었다며 자기책임이라 여긴다. 어머니는 자식에게 죄를 묻지 않고 자기잘못으로 덮어주고 짊어진다. 이것이 어머니 마음이다. 보살도 그렇다. 일체중생의 업을 대신 짊어지리라는 보리심을 발한 보살이 어찌 기대를 저버린 중생에게 실망하고 환멸을 느껴 중생을 버릴 수 있을까? 그런데 하늘처럼 넓은 마음을 쓰기가 어디 쉬운 일인가? 보리심을 발한다고 말하는 것이 가당찮아 부끄럽다. 보리심을 발하는 연습을 하는 것과 보리심을 실천하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다. 이것을 분명히 느낀다. 이렇게 하루를 흐르는 물에 띄우고 나는 돌을 달고 물속으로 가라앉는다.
2017년12월21일(목)맑음
바다 밑에서 아침이 솟아오른다. 동지 팥죽 끓이러 문인과 현정보살 오다. 팥을 씻어 돌을 골라내고 얕은 불에 지긋하게 끓인다. 오후에 아미화와 연경보살이 와서 삶은 팥을 짓이겨 팥물을 내다. 하심보살이 와서 새알 빚기에 동참하다.
雨村우촌 南尙敎남상교(1784~1866)의 ‘동지 후 서울에 들어와 자다 至後入城宿版泉’을 조금 바꾸어 동지풍속에 맞는 시를 짓다.
人生聚散總雲烟, 인생취산총운연
且可相逢一燦然; 차가상봉일찬연
作客因緣多雪夜, 작객인연다설야
吟詩次第到梅天, 음시차제도매천
在家行禪同山寺; 재가행선동산사
晨起讀經薰法恩, 신기독경훈법은
冬至風光煖有餘; 동지풍광난유여
豆粥洗邪腹中潤. 두죽세사복중윤
인생에서 모였다 흩어지는 건
구름과 안개 같은 것
다 제쳐두고 서로 만나
한바탕 웃으면 반짝이는 걸
나그네 되는 인연 눈 오는 밤에 만들어지고
시 읊는 자리는 매화 필쯤 차례 오네,
집에서 선정 닦으니 절에 온 것 같고
새벽에 일어나 독경하니 법의 은혜 깊어지네,
동짓날 풍광이 따사롭기 그만인데
팥죽 먹어 삿된 기운 씻어내면 뱃속이 든든하리.
드디어 팥죽이 끓어 완성되어 부처님께 공양 올리다. 상을 차려서 팥죽을 한 그릇씩 먹다. 팥죽에는 국물이 시원한 동치미가 곁들여져야 제격이다. 개성식 동치미를 연경보살이 담아서 가져왔다. 초당거사, 향원보살, 명성보살도 와서 팥죽을 공양하다. 이어서 자연스레 초발심학생모임이 이뤄지다. 초연, 초아, 진주보살, 김현미 보살에게 회장이신 아미화보살이 우리는 법인연으로 이뤄진 가족이니 모두 함께 열심히 공부하자고 당부하다. 팥죽과 팥떡을 한 봉지씩 나누어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다. 아름다운 동지 전야 팥죽모임이 이렇게 마쳤다.
2017년12월23일(토)맑음
어제 아침에 동지 마지 독경법회 했다. 오늘 저녁 강변을 걷다. 물에 잠긴 풍경은 젖지 않고, 거꾸로 선 나무는 바르게 앉아있다. 하늘이 무거운지 구름이 가벼운지 눈은 알지 못한다. 눈에 가득한 광경에는 원근고저와 방향과 색의 구별도 없다. 눈은 전체를 볼 뿐, 조각내어 차별하지 않는다. 그러면 보는 게 아니라 보는 것을 보는 것이다. 오리가 날아가니 물결이 일어나고 오리날개 짓에 공기가 움직여 물질파가 뺨을 때린다. 찰나의 꿈에 고락과 희비가 교차하네. 한 생각에 무한한 시간과 공간이 벌어지니 물거품 속에 또 물거품 또 그 속에 또 물거품. 우주적인 물거품 꺼질 때 긴 꿈에서 깨어나리. 순간의 갈림길에서 우리는 무얼 찾고 있나? 네가 원하는 걸 왜 원하는지 다시 물어보라. 그렇지 않으면 발밑이 꺼지는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리. 밤이 눈을 뜨고 다가오니 뿌리는 어둠을 섭취한다.
2017년12월24일(일)흐림
유튜브에서 밀라레파(Milarepa,1012~1097)존자의 일생을 읽어주는 것 12부를 듣다. 스승이신 마르빠(Marpa,1052~1135)존자는 밀라에게 9층탑(티베트 남부 로작Lodrak지방에 세카르 구톡Sekhar Guthok이라는 탑으로 아직 남아있다)을 세 번이나 고쳐 다시 쌓게 하였다. 탑을 쌓을 때 온전히 자신의 손과 발과 어깨와 등으로만 해야 했으니 육신의 노고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나는 그와 같은 불퇴전의 신심으로 스승의 말에 따를 수 있는가? 불법의 진리를 체득하기 위해서라면 당장이라도 몸과 마음을 초개와 같이 버릴 수 있는가? 진리를 위하여 어떤 굴욕도 감수하고 어떤 난관도 뚫고 나갈 수 있는가? 진리를 위하여 너의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는가? 진리를 위하여 지금 죽어도 좋다고 할 수 있는가? 진리가 아닌 것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남아있다면 너는 뭐 하는 수행자인가? 진리를 생명으로 삼지 않는다면 너는 어떤 물건인가? 진리가 아니라면 네가 살아있다고 할 수 있는가? 네가 이미 진리에 바쳐진 삶이라면 죽든지 살든지 무슨 상관인가? 네 삶이 이미 불법에 바쳐진 것이라면 생노병사와 희로애락이 무슨 상관인가? 모든 법이 열려있다면 三乘삼승과 宗派종파가 무슨 상관인가? 마르빠 스승은 밀라레빠에게 최고의 공양은 종신토록 수행에 헌신하는 삶이라 하셨다. 如說修行供養여설수행공양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수행하는 것이 중생에 대한 공양이다. 밀라레빠 존자의 일생은 불법실현에 바쳐진 헌신이었다. 조건 없이 바침, 순수한 바침, 완전한 바침이었다. 너는 무엇을 바치려하느냐? 아니 바칠 것이 있기는 한가? 아니 바칠 마음이라도 있느냐? 이것이 문제다. 밀라레빠 존자의 마지막 유언이 여기에 있다. 조용한 곳에서 수행하라. 육도의 모든 중생을 공경하라. 모든 법에 신심을 길러라. 마음에 미안함에 남지 않게 하라.
2017년12월26일(화)맑음
요가 수업하다. 공양하고 내일 대중공양 가기 위한 시장을 보다.
2017년12월27일(수)맑음
아침 날씨가 차갑다. 여러 해를 세상 널리 떠도는 행자에게서 얼마만큼의 삶이 깨달음의 끝 내지 완성이라고 생각되는지요? 라는 질문을 보내왔다. 깨달음의 길에 오른 행자에게 그 완성이 있느냐, 만약 그 완성이란 게 있다면 얼마큼 오래 살면서 수행해야 이룰 수 있는 건지 이런 것을 물은 걸까? 이런 문제는 초기불교의 니까야와 아비담마에 다 나와 있다. 이런 교리적인 문제를 물을 건 아닐 것이다. 가진 것 없고 의지할 데 없는 수행자가 세상 속에서 무엇 때문에 언제까지 무엇을 하며 살 것인지 라는 근원적인 질문을 한 것이라 보인다. 글쎄. 살아있으니까 사는 거지, 죽을 때가 올 때까지 사는 게지. 이런 답은 하나마나한 것일 뿐. 깨닫기 위해서라거나, 중생제도를 위해서라거나, 숙세에 세운 원력 때문에 산다는 답도 또한 불교집안에서 유행하는 때 묻은 말이다. 그러면 나는 왜 사느냐? 나는 벌써 이만큼 오래 동안 별 탈 없이 잘 살았는데 굳이 더 살 필요가 있을까? 이 생에 무엇을 얼마나 더 할 일이 있고 이루어야 할 것이 남아있는지 나에게 물어본다. ‘내’가 꼭 살아가야할 필연적인 이유는 없다. 사는데 까지 살뿐, 그 전에 예고 없이 죽더라도 여한이 없다. 그래도 최소한 어머니가 살아계신 동안 자식 된 내가 먼저 죽으면 불효이니까 그때까진 살아야겠다. 그리고 진주선원에서 가르치는 몇 몇 학생들이 홀로 설 수 있을 때까지는 살아야겠다. 올해 이미 육십이다. 다행히 좀 더 산다면 4가행정진을 해서 공덕을 쌓고 대승보살의 업을 증장하고 싶다. 다음 생에 어느 때 어느 곳에 환생할 것인지에 대한 확신을 갖고 죽고 싶다. 이런 관점으로 본다면 깨달음이란 어느 한 때에 완성하면 모든 것이 끝나는 단선적인 결말이 아니다. 오히려 깨달음이란 무시무종의 과정에서 통과하는 하나의 관문이지 그 자체로 완성이고, 끝이며, 종말이 아닐 것이다. 삶이란 용수존자의 八不中道팔불중도이어서 不生不滅불생불멸 不斷不常부단부상 無去無來무거무래 不異不一불이불일 일 것이다. 그러니 얼마만큼의 삶이 깨달음의 끝 내지 완성이라고 생각되는지요? 에 대한 답은 왜 그런 식으로 질문하게 되었는지 자신의 처해진 상황과 그 사유과정을 다시 되짚어보라고 반문하고 싶다. 잭 콘필드Jack Kornfield는 깨달음 이후에 빨래를 한다고 했다. After the Ecstasy, the Laundry. 깨닫기 전에도 정성스레 살고 깨닫고 나서도 정성스레 살 뿐. 출가했다는 것은 부처님께 몸과 마음을 바쳤다는 것이기에 나는 이미 내 몫이 아닌 삶을 덤으로 살고 있다. 이미 내 몫이 아닌 삶을 사는데 언제까지 사느냐, 왜 사느냐고 묻는 것은 염치없는 일이다. 하루 하루가 감사해야할 선물이지 살아내야 할 숙제가 아니다. 자신의 삶을 사는 게 아니라 삼보에 바친 삶을 살고, 부처님께 바친 삶을 사는 것이다. 밀라레빠 존자는 자기의 한 생을 부처님께 아낌없이 바쳤다. 나도 그러고 싶다. 내게 복이 있다면 그런 삶을 완성할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인연에 맡길 따름이다.
옥과 성륜사로 달리다. 성륜사는 청화선사가 창건하신 선종사찰이다. 雪山설산이라고 이름 붙은 명산이 뒤를 받히고 좌청룡 우백호가 잘 감싸인 도량이다. 미리 전화를 받은 명섭스님이 우리 일행을 기다리신다. 점심 공양을 하고 금강선원으로 올라가 공양물을 내려놓고 차 대접을 받다. 이어서 선감이신 경진스님과 입승이신 보화스님에게 인사드리고 차를 나누다. 경진스님은 1991년 헤어지고 처음 만나는 것이며, 보화스님과는 1995년에 보고 이제 다시 보게 된다. 운수승은 한번 헤어지면 강산이 두 서번 바뀌어야 다시 만나게 된다. 운수행이란 게 그만큼 기약이 없는 삶이기 때문이다. 환담을 나누고 헤어지다. 솔바람 흰 구름 뒤에 두고 자취를 남김없이 돌아오다.
2017년12월28일(목)맑음
밤부터 한기가 들며 몸이 괴롭다. 몸살 전조다. 아침에 겨우 밥해먹고 문인보살을 오라고 하다. 족탕을 하고 생강차를 끓여 마시다. 마죽을 끓여 점심으로 먹다. 아미화, 문정, 현정, 문인이 인도성지순례 때 먹을 부식거리를 시장 봐가지고 와서 봉지에 나누어 담는다. 현정이 몸살 약을 지어 와서 복용하다. 자리에 누워 쉬다. 무릎이 시리다. 스님들이 무릎에서 찬바람이 난다는 말을 하는 걸 예사롭게 들었는데 내가 이제 그걸 실감한다. 이럭저럭 하루가 간다. 살아있으니까 살 수 밖에 없는 하루가 떨어졌다. 이런 식으로 하루를 보내는 건 정말 무익하고 무의미하다. 그러나 살다보면 이런 날도 있는 것이려니 하고 넘겨야지 별 수 없다.
2017년12월29일(금)맑음
잠들기가 어려워 꾸물거리다가 늦게 잠들다. 밤을 지내고 나니 몸살이 조금 나은 것 같다. 고통의 터널을 빠져나온 기분이다. 문인보살이 와서 점심 공양해준다. 오후에 하대동 축협에 가서 6천만 원 빚을 내는 서류작업을 하다. 짐을 싸다. 무슨 짐이라고? 몸뚱아리 자체가 한 개의 짐인데 다시 무슨 짐을 싸냐고? 몸을 보존하고 유지하기 위한 물자를 모은 것이 짐이다. 그러면 좁게는 옷가지와 세면도구, 돈과 약, 넓게는 비행기와 시간과 공간이다. 이렇게 말해놓고 보니 삶이 하나의 짐이요, 나아가 세계가 하나의 짐이다. 산다는 게 곧 짐이다. 짐은 불편하고 괴로운 것이지만 편리하고 유익한 점도 있다. 주인이 짐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그 용도가 달라진다. 어떤 사람은 짐 하나 없이 맨 몸으로 잘 사는데, 어떤 사람은 짐이 너무 많아 짐에 치여 죽기도 한다. 타인의 삶을 대신 살아줄 수 없듯이, 타인의 짐을 대신 들어줄 수는 없다. 삶이 곧 짐이기 때문이다. 자기 삶은 자기가 지고 가야한다. 자기가 자신의 업의 생산자이며, 업의 상속자이다. 자기가 지은 업은 자신이 지고 간다. 그래서 이런 짐을 싼다.
나는 홀연히 인적이 끊어진 설산의 동굴에 있다. 사방은 깜깜하고 눈에 덮여있다. 인적이 끊어진 얼어붙은 얼음동굴. 환상처럼 스쳐가는 장면. 환상이었다.
2017년12월30일(토)맑음
아침에 고려병원 가서 초암보살의 도움으로 진료 받고 감기주사 맞다. 점심 혼자 해먹고 몸을 추스르다. 저녁에 초록보살 와서 대화 나누다. 초록보살은 평정을 누리는 삶을 살고 있다. 초록보살이 일광스님, 지견스님께 저녁 공양 올리다. 그런대로 한 해를 보내는 조촐한 망년회가 된 셈이다. 돌아와 짐을 꾸리며 일기를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