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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여러분에게 어떤 자랑거리가 있습니까? 집에 금송아지가 있든지, 물러 받은 희귀한 물건이 있든지, 잘난 자식을 두었든지, 하다못해 코가 잘 생기고, 눈이 예쁘다고 자랑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까?
남에게 내놓고 말하기는 뭐하지만 속으로 ‘그래 이만하면 자랑해도 돼지’ 하는 것이 있을 것입니다. 그래요. 없는 것보다 야 있는 것이 좋겠습니다. 저에게도 그런 것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사도 바울에게도 있었습니다. 그는 태생적으로 금수저에 해당되는 바리새인 족보에,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가말리엘 학파 문하에서 공부한 학력과 유대 사회에서 율법에 투철한 선생으로 인정 받았던 사람입니다.
그가 예수님을 믿고 난 후에 그가 이룩한 일들은 그 어떤 사도들도, 제자들도 흉내 낼 수 없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업적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자랑한다면 밑도 끝도 없이 밤새도록 미주알고주알 말할 거리가 있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의 고백을 들어보십시오.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14)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내가 가진 자랑거리가 남들보다 많습니다만 예수 십자가에 비하면 그것들은 아무것도 아니기에, 비교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예수 십자가 외에 자랑거리로 삼지 않겠다는 고백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 주사 내 죄를 사하여 주시고, 의롭다 칭해 주신 은혜와 사랑이 너무나 크고 놀랍기에 다른 어떤 것과 비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 십자가의 은혜와 사랑이 사도 바울을 사로잡았습니다. 그를 움직였습니다. 그를 감동케 했습니다. 그로 하여금 전하게 했습니다. 예수 십자가의 은혜와 사랑으로 살려고 했습니다.
그렇게 하니까 그에게 따라온 것이 무엇입니까? 동족 유대인들로부터 견제를 받고, 핍박과 환란이 뒤따라왔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율법주의자들이 예수 십자가를 믿으므로 구원이 아니라 할례를 받고 율법을 행한 공로가 있어야 구원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오직 믿음, 예수 십자가를 이야기하는 사도 바울을 반대하고 괴롭혔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율법주의자들이 교회 안에 있었기에 교회가 어지럽고 갈등했습니다. 바울은 괴롭힘을 당했습니다. 그래서 이제 갈라디아서 마지막에서 말했습니다.
“이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17)
얼마나 많은 괴롭힘을 받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랑하는 일에는 괴롭힘을 당합니다. 예수 이름을 위하여, 예수 복음을 위하여,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충성하는 일에는 괴로움이 있습니다. 핍박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사도 바울에게는 그것을 멈출 수 없습니다. 포기할 수 없습니다. 타협할 수 없었습니다. 최고의 자랑거리요, 삶의 목표요 목적이요, 삶과 죽음의 동력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는 말합니다.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17)
내 안에 예수의 흔적을 지녔다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새 사람이 된 그에게는 예수의 흔적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뉴질랜드의 원주민이라고 할 수 있는 마오리족은 타투로 아주 유명합니다. 문신을 얼굴과 온 몸에 새깁니다. 문화요 전통입니다.
마오리 사람들에게 문신(타투)는 특별합니다. 문신의 문양에는 문신한 사람의 조상과 부족 대대로 내려오는 메시지, 가족과 부족이 속한 이야기를 담고, 자신의 사회적인 지위 등을 표시합니다.
몸의 왼쪽 문신은 모계 가족의 이야기와 계보를 나타냅니다. 오른쪽은 부계 가족의 이야기와 계보를 나타냅니다.
태양무늬의 문신을 했다면 이는 재물이 많거나 뛰어난 리더를 뜻합니다. 거북이 문신은 장수를 기원하거나 사회적 지위가 높음을 나타냅니다. 마오리족들은 문신을 하는 행위를 대단히 신성하게 여깁니다.
그렇지만 생살에 문신을 새기는 일이 어떻겠습니까?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이 따릅니다. 오늘날처럼 마취제가 없을 때는 더욱 그러했을 것입니다. 하루 이틀 만에 새겨 넣는 것이 아니라 문신을 완성하기까지 족히 몇 년씩 걸린다고 합니다. 그들의 인생을 새겨넣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오리 사람들은 얼굴에 몸에 역사와 삶과 정체성의 흔적을 몸에 새기고자 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의 삶에는 어떤 흔적을 새기고 있습니까? 남기고 있습니까?
사도 바울은 자기에게 예수님의 흔적이 있다고 했는데, 그 흔적은 무엇일까요?
아씨시의 프란시스라는 성인은 예수님께서 가지신 상처의 흔적을 깊이 묵상하는 가운데 자신의 몸에도 똑 같은 상흔이 나타났다고 간증을 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상흔을 깊이 묵상하는 가운데 손과 발 그리고 옆구리에 거무티티한 상처의 돌기가 생겼을 것이하고 합니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학자들은 그런 실제적인 흔적이 아니라 예수님 때문에 받은 핍박의 상처일 것이라고 합니다. 예수님 때문에 받은 고난의 흔적을 말합니다.
사도행전 9장에 보면 다메섹 동산에서 예수님을 나타나실 때에 강력한 빛으로 인한 시력의 문제가 생겼다면 예수의 흔적이라면 흔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14장에 보면, 바울은 루스드라에서 돌을 많이 맞았습니다. 그 때에 사람들은 바울이 죽은 줄로 알고 그의 몸을 성밖으로 내동댕이 쳤습니다. 이때에 바울의 몸에는 상처가 심하게 생겼을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1장에서도 매를 수없이 맞았는데, 유대인들에게 40에 하나 감한 매를 5번 맞았습니다. 세번 태장으로 맞고 한번 돌로 맞았다고 했습니다. 이때에 얼마나 심각한 상처가 생겼겠습니까?
고린도후서 6장에서도 많은 고난, 많은 핍박, 많은 상처들을 예수님 때문에 받았다고 열거하고 있습니다(4-5).
그러기에 사도 바울에게 있는 예수님의 흔적이란 무엇이겠습니까?
1, 앞서 말했듯이 예수님 때문에 당하는 고난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십자가의 은혜와 사랑에 젖어서 그의 전생애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교회를 위해 내어놓았습니다. 그 때문에 따라왔던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핍박을 당했습니다. 감옥에 갇힙니다. 수많은 매를 맞고 돌멩이로 얻어 맞기도 했습니다. 배가 파선 당하는 위험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예수님 믿기 전에 그가 핍박했던 것 이상으로 많은 핍박을 바울은 받았습니다. 헐벗고 굶주림고 정처 없는 나그네 생활을 했습니다. 그의 간증에 의하면 세상에 지저분한 찌꺼기 같은 생활을 하기까지 했습니다.
결국 무엇입니까? 바울은 믿음의 선한 싸움을 위하여 낮아질 대로 낮아져서 고난의 자리를 지켜내었습니다.
범브랜드 목사라는 분이 있습니다. 그는 유대계 루마니아인이었던 그는 나치로부터 모진 박해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공산주의 국가였던 루마니아에서도 14년 동안 지하 감옥에 갇혀 있었습니다. 그러다 서방세계의 구명 운동으로 석방되어 미국에 망명한 뒤 공산권 내 지하교회 지원 운동을 펼치기도 했습니다.
그가 선교보고를 하는 시간에 그는 설교 대신에 그의 윗저고리를 벗어 상처 입은 몸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는 어떤 웅변보다 복음을 전하다가 수많은 매를 맞고 고문을 당하기까지 하면서 믿음을 지켰고 복음을 전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받은 심하게 상하여 남은 흉터를 많은 성도들이 보고서는 교회에 모여든 성도들이 모두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아마도 사도 바울이 여기에 서서 옷을 벗으면 우리는 그에게 예수님 때문에 입은 수많은 흉터를 보게 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에게 예수님 때문에 입은 상처가 있습니까? 몸에 마음에 ….
예수님을 믿으면 얼굴의 주름살의 방향이 바뀐다고 합니다.예수님을 믿으니, 마음의 편안이 있고, 삶의 여유가 생기고, 어떤 상황 속에서 온유한 마음을 가지게 되니 그것이 얼굴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비록 인생의 굴곡에 의해 파여지는 주름살은 어떻게 할 수 없다고 할지라도 예수님 때문에 그 방향은 바뀌었다면 이것 또한 예수님의 흔적이라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2. 두번째로 사도 바울에게 있는 예수님의 흔적은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어진 흔적일 것입니다. 보통 사람에게서 찾아볼 수 없는 흔적입니다. 갈라디아서 4:19에서 그는 말했습니다.
“너희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사도 바울이 교회와 성도들을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기까지 힘쓰고 애를 썼습니다. 해산의 고통은 인간에게 있어서 최고의 고통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왜 이런 해산했습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왜 했을까요?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을까요?”
“그의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도들의 심령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그는 해산하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1차 세계 전도 여행 당시에 갈라디아에 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바울이 전한 복음을 받아드리고 예수님을 믿으며 교회를 세워갔습니다. 그런데 유대주의자들의 유혹에 많은 교인들이 넘어졌습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에 대하여 의심했습니다.
그러한 소식을 듣고서 편지를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이런 상황이면 얼마나 짜증이 나겠습니까? 함께 있을 때는 말씀을 듣고 은혜 받았다고 야단이었던 사람이 떠나자마자 그렇게 빨리 유혹에 빠져 떠나갔던 것입니다.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귀가 얇을 수 있는가? 도대체 믿음을 가졌는가? 사람이 저렇게 약아빠질 수 있는가? “
괘씸한 마음이 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이런 연약한 성도들을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습니다. 끝까지 인내하면서 그들을 바르게 세우려 했습니다. 사랑했습니다.
무엇이 그렇게 했겠습니까? 다름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형상을 지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의 낮은 마음을 가졌습니다(빌 2:5). 예수 그리스도의 뜨거운 심장으로 나아갔습니다(빌 1:8). 나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품고 인자한 마음에 품고서 기도했던 것입니다(잠 3:3).
지금은 고인이 되신 신 장로님이라는 분이 계십니다. 그분과 함께 제가 처음 교회를 개척할 때였습니다. 젊은 집사님들이 교회에 이런 저런 불만을 터뜨렸습니다. 그리고 장로님에게 딴지를 걸었습니다. 인간적으로 볼 때에 정말 짜증이 납니다. 정말 한소리를 해주고 싶도록 얄밉게 행동을 했습니다.
그렇지만 성질이 보통 아니신 장로님께서 속으로 삭였습니다. 막내 동생뻘 되는 집사님에게 고개를 숙이고, 항의하는 일에 대해서 부족해서 미안하다고 사과했습니다. 얼마든지 따지고 주장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참았습니다.
왜 그렇게 했을까요? 왜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요? 장로님께서는 먼저 된 자로서, 또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자 했기에, 교회를 세우고, 성도를 품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므로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어 가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을 보십시오. 그는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성도들을 대했기 때문에 그는 말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은 자 된 것같이 나를 본받는 자 되라”(고전 11:1)
참으로 대단하고, 담대한 위대한 신앙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도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어 가는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3. 세번째로, 바울이 지닌 예수님의 흔적은 무엇일까요? 바로 예수님과 함께 동행하는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5장에서 예수님께서 포도나무 비유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가지가 둥지에 붙어 있어야 살고 열매를 맺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주님과 동거동락하는 거룩한 삶이요 열매 맺는 삶이요. 예수님의 흔적을 지닌 삶이 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2:20에서 사도 바울이 강조한 말씀을 보십시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우리는 때로 내 자존심을 못 버릴 때가 있습니다. 조금만 내려 놓으면, 조금만 주님을 더 묵상하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넘어갈 수 있는 일인데, 고집을 부립니다. 주장합니다. 자신의 의를 주장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충분히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생각을 가지는 것 맞습니다. 옳습니다. 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 됩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하기를 포기합니다. 안합니다. 져줍니다. 손해를 봅니다. 바보가 됩니다.
왜요. 주님 때문에… 주님의 마음을 더 헤아려 보았기 때문에 …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손해를 보고, 그래서 속 상해 보기도 하고, 그래서 어리석다는 소리를 들어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과 동행하므로 가지는 예수님의 흔적이지 않습니까?
성도 여러분, 너무 똑똑해 지려고 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너무 이기려고 하지 마십시다. 너무 드러내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렇지만 주님과 동행하므로, 주님과 함께 죽고, 주님과 함께 사므로 알 수 없는 은혜를 누리고, 헤아릴 수 없는 충만함을 고백하고, 하나님께 되게 해주시는 삶의 고백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여러분과 저의 삶 속에 “내 몸에 그리스도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라는 고백이 있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우리도 사도 바울이 갈리디아 교회 성도들에게 하는 마지막 인사처럼 우리도 인사하십시다.
“형제 여러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이 여러분의 마음에 내리기를 빕니다. 아멘.”(18, 공동번역)
예수님의 흔적을 지닌 여러분의 심령과 삶 속에 값없이 부어 주시는 그리스도의 은혜가 충만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찬송 / 주님의 마음을 본 받는 자 455, 5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