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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건너지지 않는 '로댕의 바다'
전강옥
김승웅 방장님,
안녕하십니까.
요즘은 글방에 南佛 프로방스 향기가 가득 피어오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
덕분에 저도 남불 여행기에 올라오는 사진들을 들여다보며
미스트랄(mistral)에 묻어오는 지중해의 내음을 흠뻑 들이마시고 있습니다.
서울 편집국에 신고도 하지 않으시고 남불(南佛)로 떠나신 방장님이
여관 뒷마당에 오줌 싸려다 발견한 프로방스의 커다란 별들 이야기는
알퐁스 도데의 <별>이야기만큼이나 낭만적입니다.
역시 낭만파 방장님의 풍모를 드러내는 에피소드 인 것 같습니다.
영화 <금지된 장난(Jeux Interdits)>의 흔적을 찾아
남불의 알프스 산록을 이리저리 헤매시는 방장님의 젊으실 때 모습이
제 눈에도 선하게 떠오를 지경입니다.
그리고 그 때의 일을 회상 하시며 박흥진 선생님께 꼭 南佛의 주먹만 한 별들을
찾아보라고 말씀하시는 모습은 마치 <메밀 꽃 필 무렵>의 장돌뱅이 허 생원이
젊었을 때 봉평 물방앗간에서 치른 하룻밤 일을 항상 그리워하고 회상 하며
틈날 때 마다 조 선달에게 그 때 일을 들려주는 모습과 비슷합니다.
<메밀 꽃 필 무렵>에서는 메밀꽃과 둥근달이 이야기의 매개체가 되고 있지만
방장님의 회상 속에는 항상 별이 등장합니다.
마침, 이 번 일요일에 EBS 일요 시네마에서 프랑스 대 문호 마르셀 파뇰의
어린 시절을 그린 <마르셀의 추억>이라는 영화를 방송해 주었습니다.
영화: "마르셀의 추억"
마르세이유 근처의 한 시골 마을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한 소년의 가족 이야기는 아주 단순하지만
조그만 일들에 잠 못이루는 남불 사람들의 소심하고 우유부단한 모습,
정직하고 소박한 인심이 아름다운 영상과 함께 잔잔하고 생생하게 펼쳐집니다.
방장님, 이번 주에 쓴 로댕에 관한 졸고 한 편 보냅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전강옥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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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댕의 사랑과 예술
파리 로댕 미술관의 전시실 가운데 하나는
카미유 클로델의 작품들로만 구성되어 있다.
오르세 미술관의 조각 전시실에도 그녀의 작품은 로댕의 대작들 사이에
절묘하게 배치되어 있다.
로댕 작품을 보러 갔던 관람자가 자연스럽게 클로델이라는 조각가를 발견할 수 있도록
동선(動線)이 만들어져 있다. 두 사람 작품의 유사성을 통해 관람자들은
로댕의 명성에 가려져 빛을 볼 수 없었던 클로델의 비운에 동정심을 갖는다.
다음 순간 결코 의심해 본적이 없던 로댕 작품의 위대함이 혼란스럽게 느껴진다.
로댕의 제자이자 연인이었으며 비운의 천재 조각가로 묘사되는 클로델.
19살의 클로델을 처음 만난 로댕은 미모와 재능에 반해 사랑에 빠진다.
두 연인은 예술적 영감을 나누며 서로의 작품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이 무렵 로댕은 <입맞춤>, <영원한 우상>처럼 사랑에 빠진 연인상을 만들었다.
사랑과 영감의 교차 속에 만들어진 이 시기,
두 사람의 몇 작품은 누구의 것인지 쉽게 알아 볼 수 없을 만큼
유사한 형태를 보인다.
클로델 또한 로댕의 영향을 받아 사실주의 성향의 작품을 만들었다.
로댕에게 클로델은 작품의 영감을 주는 뮤즈였지만 클로델에게 로댕은 인생의 전부였다.
그것이 그녀의 비극이자 클로델 예술의 정점이기도 하다.
조강지처와 다름없는 로즈 뵈레를 떠나지 못하는 로댕에게
클로델은 사랑의 확신을 갖지 못한다. 그의 아내가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그녀는
결국 심한 언쟁 끝에 로댕을 떠난다. 하지만 로댕을 벗어날 수는 없었다.
카미유 클로델 작: '왈츠'
그녀의 가장 탁월한 작품으로 평가되는 <왈츠> <중년> <운명> <애원> 같은 작품은
모두 로댕과의 이루어 질 수 없는 사랑을 주제로 하고 있다.
"당신 두상을 만들 거예요/흙으로 빚고 석고를 떠서 내 방에 놔 두겠어요
/사랑이 식을 때 쉽게 깨뜨려 버리게요" 라고 했던 한 시인의 시구(詩句)처럼
그녀의 예술은 언제든 깨져 버릴 것 같은 불안한 사랑을 노래한다.
그녀의 대표작은 모두 한쪽으로 심하게 기울어 곧 쓰러질 것만 같은 사선 구조로 되어있다.
한 쌍의 남녀가 껴안고 춤을 추는 <왈츠>처럼
작품을 지배하는 기울어진 형태야 말로 로댕을 벗어나 온전하게 홀로 설 수 없었던
자신의 불완전한 일생과 이루지 못한 사랑을 가장 잘 설명하는 극적 구조이다.
자신의 예술적 성공에 충실하고자 했다면 어떻게든 로댕을 극복해야 했으나
클로델은 이미 사랑하기 때문에 연약해져 버린 여인이다.
그녀가 로댕에게 보이는 애증은 자신의 이름대신 남편의 이름으로 살아온
보통의 아내들이 갖는 상실감과 비슷하다.
열렬히 로댕을 사랑했고 젊음과 재능, 모든 것을 헌신했지만
그녀에게 남은 것은 자의식의 허탈감이다.
오랜 시간이 지나 사랑과 예술이라는 이름의 욕망을 포기하고서야
클로델은 마음의 평온을 얻는다. 정신병원에 입원하고 난 뒤였다.
소나기 같은 젊음의 격정이 지나고 나서 비로소 로댕을 극복 할 수 있었다.
그녀는 동생 폴 클로델에게 편지를 보낸다.
"내겐 건너지지 않는 바다 하나가 너무 깊다.
이제 혼자서 노를 저을 수 있겠다.
로댕이란 바다를 건널 수 있겠다."
그러나 정작 클로델을 영원히 떠날 수 없었던 사람은 로댕이었다.
그는 죽기 직전 건립되고 있는 로댕 미술관에 클로델의 작품을 소장해 줄 것을 부탁한다.
거장의 요청으로 두 사람의 작품은 영원히 한자리에 놓일 수 있게 되었다.
이로써 두 사람의 예술적 교류와 사랑은 그들의 작품에서처럼
영원한 생명으로 거듭난다. - 한국일보 5월 18일字 [삶과 문화/5월 18일]에서 轉載
<조각가/동아대 대학원 초빙교수/조형예술학 박사(소르본느大)>
#2 로미오와 줄리엣
박흥진
사랑이 이뤄지려면 죽는 수밖에 없다는 것은
트리스탄과 이졸데와 로미오와 줄리엣의 죽음에서 깨달을 수 있는 운명이다.
특히 로미오와 줄리엣의 죽음은 이제 열너댓 살된 철없는 것들의 죽음이어서
아름다울 정도로 비극적이다.
사랑이란 어쩌면 이렇게 세상물정 모르는 순진한 어린 것들의 가슴에서만
생존할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사랑을 하게 되면 물불을 안 가린다더니
어린 것들이 독약과 단검으로 제 목숨들을 끊은 것을 생각하면
살아서 사랑한다고 떠드는 우리들이 계면쩍어진다.
이탈리아 베로나의 줄리엣의 집을 방문, 줄리엣이 로미오를 그리워하며
“오 로미오, 로미오 님은 어찌하여 로미오인가요”라고 나이팅게일처럼 읊조리던
발코니 밑에 서니 주위를 둘러싼 현실이 극으로 변한다.
발코니를 올려다보면서 사랑에 달아오른 로미오의 심정을 헤아려보자니
나의 세월들이 가슴에까지 와 닿는다.
줄리앳 역(役)의 올리비아 핫세
집 뜰에 있는 줄리엣 동상의 오른쪽 젖가슴은
방문객들이 하도 어루만져 금빛 색깔이 벗겨진 채 반짝반짝 윤이 난다.
나도 가슴을 어루만지고 그 가슴에 입까지 맞추었는데 손바닥 만한 마당에
관광객들이 빼곡히 들어차 시장바닥을 이루고 있었다.
줄리엣의 집에 들어오는 입구 양쪽 벽에는 줄리엣에게 보내는
사랑의 하소연을 적은 편지들이 덩굴처럼 덮고 있다.
로미오와 줄리엣은 허구이련만 그것을 믿으려는 사람들의 심정이
참으로 갈급하게 느껴졌다. 하긴 사랑이란 허구인지도 모른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얘기는 영화로도 여러 번 만들어졌다.
그 중에서도 뛰어난 것은 둘 다 나이 먹은 레슬리 하워드와 노마 쉬어러가 나온
‘로미오와 줄리엣’(1936)과 당시 각기 나이 17세와 15세였던 레너드 와이팅과
올리비아 허시가 나온 ‘로미오와 줄리엣’(1968).
프랑코 제피렐리가 감독한 1968년 작(作)은 의상과 세트와 컬러
그리고 젊은 배우들의 열띤 연기 및 니노 로타의 달콤하고
서럽게 아름다운 음악 등 모든 것이 훌륭한 명작이다.
베를린을 떠나 지난 1일 감상적인 로맨스 영화 ‘줄리엣에게 보내는 편지’(현재 상영중)의
배우들과의 인터뷰 차 베로나에 도착했다.
인구 24만 정도의 도시 베로나는 모든 것이 낡아 곧 무너져 내릴 것만 같았다.
냄새마저 낡은 냄새가 난다.
우리가 묵은 좁은 골목길 비아 아두아에 있는 호텔 빅토리아는
로마시대 별장을 개수한 것인데 별장에 사용된 역사의 곰팡이가 슨 로마 돌들을
신주단지 모시듯 간수하고 있었다.
호텔을 빠져 나오면 또 다른 골목과 골목이 이어지면서 이어 광장이 나온다.
이탈리아의 도시 구조가 다 이런가 본데 돌투성이 고도의 골목 양 옆으로
루이 뷔통을 비롯해 최고급 패션 상점들이 늘어서 고약한 불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관광객들로 복작대는 거리를 걷다 보니 ‘줄리에타와 로메오’라는 이름의 호텔과
식당이 눈에 띈다. 나는 로미오보다 줄리엣이 더 매력적인 인물이라고 생각해
줄리엣을 로미오 앞에 놓은것이 마음에 들었다.
좀 과장해서 몇 집 건너 성당인데 고풍 창연한 한 성당의 문이 열려 있어 안으로 들어갔다.
높은 돔 천장과 양쪽 벽에 성화가 그려 있는 성당에서는 저녁미사가 진행 중이었다.
나도 신도들과 함께 자리에 앉아 잠시 감사하고 편안한 시간을 가졌다.
도착한 이튿날은 3만명 이상을 수용할 수 있는 옥외 극장 아레나를 찾아갔다.
로마의 콜러시엄 모양인데 이곳은 프랑코 제피렐리가 연출하는 오페라로 유명한 곳이다.
아레나 앞에 ‘투란도트’ ‘아이다’ ‘나비부인’ ‘카르멘’ 및
‘라 트라비아타’가 공연된다는 포스터가 보인다.
시골역 같은 베로나 공항에 도착했을 때 구내에 피라밋과
비올레타의 세트 형상이 있는 것을 보고 그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으면서
의아하게 생각했었는데 아레나를 찾고 나서야 그 이유를 알게 됐다.
돈을 내고 아레나에 들어가 돌계단에 앉아 기원 후 30년에 건축된 이 극장에서
로마 사람들은 무슨 쇼와 경기를 구경했을까 하고 궁금해 했다.
고대 관중들의 “와 와”하는 함성이 환청처럼 들린다.
내가 간 날은 저녁에 알리시아 키즈의 공연이 있어
무대를 설치하느라 방망이 소리가 요란했다.
오후에는 비가 내렸다.
‘줄리엣에게 보내는 편지’에 나온 아만다 사이프리드와 크리스 이간 및
가엘 가르시아 베르날 등과의 인터뷰를 마친 뒤 저녁 어둠 속을 우산을 받고 걸었다.
노천카페에 앉아 외이트 와인을 마시며 광장을 바라보니
제법 세차게 내리는 빗소리가 역사의 발음 같이 들렸다.
내일이면 LA로 돌아가는 날. ‘아리베데르치 베로나’. - 배로나에서
<미주 한국일보 편집위원/헐리웃 외신기자협 회원>
#3 "박흥진 임종건 임철순 김훈"
김승웅 - 글방 횡적(橫的)진단
- 그림: 김정
윗글을 쓴 필자 박흥진은 경복고-서울대 사대 독어교육과를 졸업 후
경기도 이천북중(北中)에서 영어교사를 4~5년 하다 기자 되기로 결심,
한국일보 견습기자 29기로 시험쳐 늑장 입사했습니다.
당시 입사 경쟁률이 200대 1이 넘었던 걸로 미뤄
대갈통들이 그다지 나쁘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의 입사 동기인 이 글방 식구 임철순(현 한국일보주필)은
이천북중 재직당시 "내 밑에서 교생 실습을 했던 새까만 후배였다"는 것이
당시를 말하는 박흥진의 회고담이고... 아무튼 둘은 입사 시험장인 한국일보 인근의
수송공고 시험장에서 만나 운좋게 공동 합격함으로서 입사동기가 됩니다.
朴의 본처 김화숙 여사도 같은 이천북중의 국어교사로,
임철순의 목격담에 의하면 朴이 매일 밤 "화숙아, 날 살려라!"고
그녀의 하숙집을 찾아와 절규하는 바람에 할 수 없이 결혼을 한 건데,
결혼일자는 朴이 한국일보 기자가 된 후 1~2년 지나서였답니다.
임철순은 툭하면 신혼 단칸 셋방을 찾아 술 실컷 얻어마신 후
셋이서 한 방에서 잤다는 거구요. 셋이서 이불은 과연 어떻게 덮고
잤는지... 이 대목에 관해서는 세 사람 가운데 누구도 코멘트를 하지 않습니다.
글방식구인 임종건도 29기 동기가운데 하나로,
서울경제신문 부회장, 동 사장 등을 역임하다 얼마 전 은퇴,
36년간의 언론 생활을 마감했습니다.
朴이 친했던 또 한명의 한국일보 입사동기 가운데 김훈이라는 인물도 있는데,
지금은 "칼의 노래", '남한산성' 등의 소설로
독자들을 사로 잡는 인기작가로 바뀌어 있습니다.
넷 다 개성이 강하고 재조들이 뛰어나,
그 시절 만사 귀찮고 세상 살기 싫었던 나한테 큰 관심과 자극이 됐던 인물들이었고,
제가 한국일보 사보(社報) 편집장을 맡던 3~4년 동안 사보기자로 뛰느라
저한테 기압 많이 받았지요.
당시 임철순은 이틀 건너 밤을 홀딱 홀딱 새야하는 편집기자였던지라
사보기자가 될 수 없었고, 아무튼 이들은 제가 20년 간 한국일보에 몸 담다가
타언론사로 옮긴 후에도 계속 친해왔고, 그래서 지금도 이렇게 글방의 식구가 돼 있겠지만,
저는 당시 이들 네명의 후배들 보는 재미로 출근했고,
이들이 한없이 자랑스러웠고,
또 지금도 이렇게 보고 싶고...해서 글로 대신하는 겁니다.
임종건 박흥진 임철순 김훈
작가 김훈도 이 글방 식구가 됐더라면 더 좋겠지만
그는 지금도 한글 자판 두드리는 걸 한사코 거부,
죽어라고 연필로만 글을 쓰는 작가인지라 글방식구로 영입할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그를 자유롭게 해 주는 것이라는, 선배 나름의 도리라 여기기 때문이지요.
(저까지) 다섯 사람 모두가 술 좋아하고 특히 여자를 좋아한다는 점에서
(어떤 스타일을 좋아하는 지는 각각 다릅니다만) 많이 닮았습니다.
박흥진은 그후 헐리웃이 인접한 LA로 이민가서,
꿈에도 소원인 대한민국 최고의 영화 대(大)기자가 되어
이렇게 30년 넘게 영화에 미쳐 삽니다.
글과 필자를 소개하는 이 글방의 포멧에서는 한참 벗어났지만,
글방에 새 식구가 많이 늘어 모르시는 분들도 적지 않을 듯 싶기에
이렇게 새삼 글을 통해 소개해 드리는 겁니다.
그 당시 한국일보... 참 좋았는데.
<김승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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