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1:1의 '땅'과 창1:10의 '땅'의 의미들에 대한 저의 의문들을 들으시고
여러분들께서 좋은 의견들을 나눠주셔서 감사를 드리는 마음이 가득합니다.
실은 해결할 수 없는 질문을 던진 것은 아닐까 하는 마음도 없쟎습니다만
주신 의견들로 인해서 더 많은 생각을 하고 묵상을 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학문이란게 배우면서(學) 질문을 하는 것(問)이라고 할 때
저에게는 오히려 '질문'이 더 늘어나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지금 논의하는 삶의 정황은 결국 21세기의 포스터모던사회이고
그 사회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것은 진화론적 합리적 무신주의나 신비주의일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의 질문 자체나 관심 자체도
이런 '삶의 정황'에서부터 나온 것이어서
창세기의 장면을 주로 과학적 논의와 관련시켜보려는 경향을 갖고 있음이 분명해집니다.
제가 질문을 하게 되는 것은,
과연, 창세기1장이 '과학적 관심'에서 씌여진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질문을 던진다고 해서, 창세기1장이 비과학적이라고 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과학적 관심'이 일차적인 관심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그것에 의한 기술은 얼마든지 과학적인 개념과 일치할 수 있겠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창세기1장이 처음 기록되었을 때 그 1차독자들이었던 사람들이 가지고 있었을
'삶의 정황'은 도대체 어떤 것들이었을까를 질문해 보는 것은,
이 창세기1장을 21세기적 삶의 정황에서 나온 질문들에 답변을 하기 전에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보기 때문입니다.
이런 질문은, 이 창세기1장의 기록자가 모세라는 것을 전제할 때
그리고 전출애굽설을 주장하는 보수적 견해를 취한다고 하더라도
충분히 의미가 있습니다.
과연, 이 창세기1장의 기록을 '듣고'는 제1청자들이었을 그들은
어떤 '충격'을 받게 되었을까?
어떤 삶의 영향력을 행사하는 메세지가 이것에 담겨져 있었던 것일까?
또 다시 이렇게 질문하는 저를 책망하시겠습니까?
혹시, 이 질문의 노정에 함께 길동무가 되어주실 분은 없으신지요?
첫댓글 출애굽기로 되돌아가서 이 창세기를 관조해보는 것도 오히려 창세기1장의 해석에 빛을 얻는 것은 아닌가 생각되어서 이 글을 올려둡니다. ^^
아이러니 하게도, 과학적 관심으로 많은 부분을 확장시키려고 했던 저의 생각을 돌려놓는 계기가 될 것 같습니다. 글을 올리고 나서 보니, 비숫한 생각을 하신것 같습니다. 아뭏튼 감사드려야 할것 같습니다. ^^
창세기 저자를 모세로 볼때 독자는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당시 이스라엘은 애굽을 비롯한 고대근동사회의 신관에 물들어 있을 가능성이 많은데 그런 백성을 향하여 온 세상과 우주의 창조주가 여호와하나님이라는 선포는 굉장한 의미가 아닐까요?
아마도 그들의 당시 정황은 그들이 성막을 만드는 그 모습(열심?)을 통해 알 수 있지 않을까요?
하나로님께서 저의 뜻을 이해해시주니 감사합니다. 과학적인 관심을 결코 무시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도 기억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한우리님께서 보시는 '애굽을 비롯한 고대근동사회의 신관에 물들어 있을 가능성'을 좀 더 구체적으로 접근해 보면 어떨까 하는 것이 저의 입장입니다. 그런 구체적인 접근으로 인해서 창세기1장의 이해에도 구체적인 것이 가능하지 않을까 싶은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미님께서 제시하신 관점도 무척 흥미롭습니다. 혹시, 좀 더 설명해 주실 수 있으신지....^^
'애굽을 비롯한 고대근동사회의 신관에 물들어 있을 가능성'을 좀더 구체적으로 접근해 보는 것에 대해서 방향을 말씀해 주시면, 많은 가르침이 될 듯합니다. ^^
하나로님께서 올려놓으신 한글자료를 참고로 해서 좀 더 깊은 논의로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아서 기쁩니다.
성경에 농부가 밭 갈다가 밭 속에서 보화를 발견하면.. 자기의 모든 재산을 다 털어서 그 밭을 사버린다고 하지 않습니까? 즉 이집트의 역사를 보면 혼합 민족 속에서 노예 살이로 살면서 400년 동안 각 민족들의 반란과 정권 차지의 모습을 보면서 자신들이 얼마나 초라해서 느껴졌을 것이며, 또한 각 부족들이 정권을 잡으면 자신들의 신을 얼마나 찬양하고 높이겠습니까? 그러한 모습들이 세대를 거쳐 가면서 자신들의 하나님 여호와가 얼마나 힘없는 존재로만 여겨졌겠고 인식되었겠습니까?.. 다른 부족들은 그래도 반란이라도 일으켜 봤는데.. 이스라엘은 영... - -; 요셉 이후로는 한마디로 반짝 스타.. 그러다가 자신들의
하나님이 얼마나 크고 놀라우신 분이시고 유일하신 참신 이심을 알게 되었을때.. 그들은 정말 보화를 얻은 기분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성막을 지을때에 즉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기 위해(영광 돌리기 위해) 자신들의 모든 금은 보화를 다 주 앞에 드림으로 인해서 .. 그 드림의 정도가 상당했지요.. 그들의 이러한 모습.. 모든 것을 주님께 다 드려도 성에 차지 않을 정도의 그 기분 아닐까요... 갑자기 이런 생각이 나서..
모세에게 고하여 가로되 백성이 너무 많이 가져 오므로 여호와의 명하신 일에 쓰기에 남음이 있나이다 (출36:5)
바로미님의 설명을 듣고 나니, 그들이 성막세우는 재료를 그렇게도 많이 그렇게도 풍성하게 가져온 이유들이 좀 더 실감나게 이해가 되는군요. 출애굽기 장면들이 다시 새롭게 조명되기도 합니다. 출애굽기와 창세기의 동시조명이라....좋은 주제입니다. ^^
창세기는 <시작>의 책입니다. 창세기의 Context 는 이집트에서 세뇌되고 찌들려 민족근원의 자아정체성이 전혀 없는 떠돌이 부랑민족 이스라엘에게 <세상의 시작>과 <이스라엘 조상들의 시작>을 알려줌으로써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갖추게 하는데 목적이 있습니다.
빚진자님께서 저의 의도를 이해하시는 것 같군요. 바로 그 정체성상실의 이스라엘백성들에게 어떻게 정체성을 정립시킬 수 있게 하는가 하는 그 문제를 좀 더 구체적으로 이해해야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좀 더 이 문제를 더 추구해 가고 있습니다. 이집트와 바빌로니아, 혹은 가나안의 신화들과 창세기를 대조시킴으로 인해서, 그런 구체적인 이해가 가능하다고 보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이 지으신 인간에서 요구하시는 것이 지음 받은 "인간으로서의 정체성을 찾는 것" 이고 문제는 이 "정체성"이 과연 성도들 개인에게 어떻게 정립되는가인데.. 회심하고도 관련 있는 것 아닙니까? - -? 정체성 이야기가 나오니까 그렇게 연결되는군요?
당연히 고대근동의 신관과 창세기의 신관을 비교하게 되면, 어느 신이 참된 신인가 하는 질문과 함께 그 참된 신에게로 회귀하는 과정으로서의 '회심'이 논의될 수 있다고 봅니다. 실은, '창조'란, '새창조'를 염두에 둔 것이라고 보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이런 면에서, 어거스틴의 '고백록'의 마지막 부분이, 바로 창세기를 해석하는 문제와 씨름하고 있는 것은 바로 '회심'의 문제를 '창조'와 연관시키고 있다는 것을 암시해주는 것이 아닐까요? 하지만, 창세기의 '창조'기록 그 자체의 '의미'(meaning)과 그 의미로부터 파생되는 '의미성'(significance)을 차이가 있다고 보아야 하겠지요. '회심'은 창세기1장의 '의미'에 관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의미에서 파생된 '의미성'에 관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이전에 호목사님이 어거스틴의 회심부분을 번역해 놓으면서 하셨던 몇말씀들이 기억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