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감고 앞으로 만날 악연들을 두려워하는 대신 . . 역을 가진 도시의 이름을 수첩에 적어두면 얼마 못 가 그 수첩을 잃어버릴 거라는 이상한 예감들을 만들어냈습니 다 . . 혼자 밥을 먹고 있는 사람에게 전화를 넣어 하나하나 반찬을 물으면 함께 밥을 먹고 있는 것 같기도 했고
눈썹 -1987년 __ 박준
엄마는 한동안 머리에 수건을 뒤집어쓰고 다녔다
빛이 잘 안드는 날에도 이마까지 수건으로 꽁꽁 싸매었다
봄날 아침 일찍 수색에 나가 목욕도 오래 하고
화교 주방장이 새로 왔다는 반점(飯店)에서 우동을 한 그릇 먹은 것까지는 좋았는데
우연히 들른 미용실에서 눈썹 문신을 한 것이 탈이었다
아버지는 그날 저녁 엄마가 이마에 지리산을 그리고 왔다며 밥상을 엎으셨다
어린 누나와 내가 노루처럼 방방 뛰어 다녔다
인천 반달 __ 박 준
혼자 앓는 열이 적막했다
나와 수간(手簡)을 길게 놓던 사람이 있었다
인천에서 양말 앞코의 재봉 일을 하고 있는데
손이 달처럼 자주 붓는 것이 고민이라고 했다
나는 바람에 떠는 우리 집 철문 소리와 당신의 재봉틀 소리가 아주 비슷할 거라 적어 보냈다
학교를 졸업하면 인천에 한번 놀러가보고 싶다고도 적었다
후로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종이에 흰 양말 몇 켤레를 접어 보내오고 연락이 끊어졌다
그때부터 눈에 반달이 자주 비쳤다
반은 희고 반은 밝았다
[ 박준 시인 약력 ] 1983년 서울에서 출생 학력 : 경희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2008년 실천문학 으로 등단 '모래내 그림자극' 등단 수상 : 2013 제31회 신동엽문학상 시 부문 시집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