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 2일차 일정이 빡빡하다.
저녁에는 길음동 성당 같은 구역에서 신앙생활을 한
대자 류 제네시오 부부를 만나기로 했다.
지금은 안젤라 자매님 건강이 좋지않아 곤지암 부근에 집을 짓고
전원생활을 하면서 건강관리를 한다고 한다.
좋은 숙소에서 꿀잠을 자고 여명이 가시지도 않은 시각에 숙소를 나왔는데
근처에 기사식당이 있었다.
도회지에서 벗어난 곳을 여행할 때는 아침 식사를 할 수 있는 곳이 없어서
차에서 간단히 간식으로 때웠는데, 도심지로 들어서니 식사문제는 없었다.
뷔페음식인데 집밥처럼 맛있고 종류도 많았다. 1인당 7천원
숙소 → 성모당(성모순례지) → 답동주교좌 성당 → 제물진두성지 → 이승훈묘
20.6Km 2.9Km 1.4Km 18Km
6. 성모당(성모순례지)
인천교구 성모당은
성모에게 전구를 청할 수 있는 기도장소를 원하는 교구민들의 청원에
제2대 교구장 고(故) 최기산 주교가 응답하며 마련된 곳이다.
최 주교는 2015년 12월 ‘성모당 조성에 대한 사목서한’을 발표하고
2016년 5월 30일 갑작스레 선종하기 전까지
부지 선정과 설계 승인 등 성모당 조성을 추진했다.
최 주교의 선종 이후 교구는 그 뜻을 이어 파티마 성모 발현 100주년인
2017년 기공식을 갖고, 2018년 10월 13일 성모당 봉헌미사를 거행했다.
돔 형태로 제작된 성모당은 중앙의 최대 높이가 11.55m에 달하는 건축물로,
파티마 현지에서 제작한 높이 2.3m의 성모상이 안치돼 있다.
파티마의 성모는 발현 당시 ‘세계 평화’와 ‘죄인·냉담교우들의 회개’를 강조했는데,
성모당은 이 메시지를 새롭게 전파하는 장소로 의미를 가진다.
성모당은 나아가 가정성화, 남북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 공간이다.
7. 답동주교좌성당
인천교구 최초의 본당이자 주교좌 본당.
인천시 중구 답동 3 소재. 설립 당시의 이름은 ‘제물포(濟物浦) 본당’이었는데,
그 후 ‘인천 본당’으로 불리다가 1958년경부터 ‘답동 본당’으로 불리게 되었다.
1889년 7월 1일 설립되었으며, 주보는 성 바오로.
인천 지역에 복음이 전파된 것은 1839년의 기해박해 이전으로
기해박해와 병인박해 때 인천 · 부평 · 강화 등지에서 순교자를 탄생시켰으며,
박해 후에 살아남은 신자들은 각처에서 신앙생활을 하다가 답동 본당 소속이 되었습니다.
답동 본당의 설립은 조선교구에서 개항지인 제물포 지역의 발전 가능성을 예상하고
1888년부터 대지를 물색한 데서 비롯되었습니다.
대지 매입을 결정한 조선교구는 페낭 신학교에 있던 파리 외방전교회 빌렘 신부에게
새 본당을 맡겼고, 빌렘 신부는 입국하자마자 제물포에 진출하여 본당을 설립하였는데,
이때가 바로 1889년 7월 1일이었습니다.
제물포 본당(현 답동 본당) 초대 주임이 된 빌렘 신부는 이듬해 3천여 평의 대지를 매입하여
성당 건축을 계획하다가 용산 예수성심신학교로 전임되었고,
이어 부임한 르비엘 신부가 추가로 부지를 매입하여 1891년 임시 성당 겸 경리부를 건축했습니다.
1893년 3대 주임으로 부임한 마라발 신부는 수녀원 건립을 시작하는 동시에
코스트 신부에게 성당 설계도를 받아 기초 공사를 시작했습니다.
이듬해 8월 수녀원이 완공되자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부원이 설립되어
보육과 무료진료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성당 건립 공사는 1894년의 청일전쟁으로 중단되었다가 재개되어
1895년 8월 정초식, 1897년 7월 4일 축성식을 가졌습니다.
당시 성당은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전면에 세 개의 종탑을 갖췄는데,
1937년 확장 개축을 거쳐 1981년에는 사적 제287호로 지정되었습니다.
마라발 신부는 성당 건립 외에도 1900년 9월 ‘박문소학교’(현 박문 초등학교)를 설립했습니다.
1958년 10월 인천과 부천, 그리고 인근 도서 지역이 서울교구에서 분리되어
‘인천 감목 대리구’로 설정되고, 그 사목이 메리놀 외방전교회에 위임되면서부터
답동 본당에 큰 변화가 있게 되었습니다.
1961년 6월 ‘인천 대목구’로 승격되고 맥노튼(나길모) 주교가 초대 교구장으로 임명되면서
본당이 주교좌 본당으로 설정되었습니다.
2001년 9월 박문 초등학교를 연수구로 이전하고 이를 리모델링하여
2002년 1월 새 교구청사 축복식을 가졌습니다.
2009년 본당 설립 120주년을 앞두고 성당 성역화 작업을 전개하여 성당 마당을 공원화하고,
정부 지원을 받아 성당 보수 공사를 진행했습니다.
2010년 8월에는 인천시 중구와 함께 답동 성당 일대에 대한 역사문화공원 조성사업을 통해
성지를 보존하고 지역주민들과 역사 · 문화적 가치를 공유하는 공간으로
거듭나도록 협력하기로 했습니다.
8. 제물진두 순교성지
선교사들의 선교활동 거점이자 인천 지역 최대 순교 터
문서상으로도 병인박해 때 제물진두에서 많은 이들이 순교하였다고 쓰여 있으나
정확한 위치가 고증되지 않았다.
인천교구 성지개발위원회 부위원장이었던 고 김진용(마티아) 씨는 제물진두 연구에서
제물진두는 ‘인천광역시 중구 항동 파라다이스 호텔이 위치한 언덕에서 자유공원 방향으로,
인천교구 해안동 성당 뒤편 벼랑 아래에 이르는 장소’라고 추정하고 있다.
인천교구에는 교구내 다른 순교지보다 더 많은 순교자가 처형되었으면서도,
잘 알려지지 않은 또 다른 순교터인 제물진두가 있다.
이곳은 병인박해 때 프랑스와의 병인양요, 미국과의 신미양요 등을 치른 후,
“외적과 내통한 천주교 신자들을 처형하여 주민들에게 경계심을 심어 준다.”는 의도에서
대원군 정권이 서울 한강변의 양화진두(楊花津頭, 절두산)와 함께
천주교인들에 대한 공개 처형장으로 택한 곳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진두(津頭)는 곧 나루터로서 외국 선박과의 접촉을 시도하는
군중들의 왕래가 잦은 이곳에서 공개적인 처형을 함으로써 서양 세력에 대한 배척과 함께
천주교 금단(禁斷)의 효과를 극대화하려고 하였다.
박순집 베드로의 외가쪽 집안과 이승훈 베드로의 후손들이 치명한 순교터다.
1868년 4월 15일에는 부평읍내에 살던 손 베드로 넓적이(박순집의 이모부, 1801∼1868, 베드로),
김씨(손 베드로의 부인, 박순집의 이모, 1811∼1868), 백치문(손 베드로의 사위, 1827∼1868, 사도 요한)은
포졸에게 잡혀 서울 포도청에서 신문을 받고 인천 제물포로 압송되어
제물진두에서 4월 20일 참수형을 받아 각각 68세, 58세, 42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인천 지역에서의 박해는 다시 신미양요(1871년)를 전후하여 세차게 일어났다.
1871년 5월 17일경에는 남양에 살던 이승훈(李承薰, 1756∼1801, 베드로)의 증손자이며
이재의(李在誼, 1808∼1868, 토마스)의 두 아들 이연구(李蓮龜, ?∼1871), 이균구(李筠龜, 일명 筠鶴, ?∼1871)가
인천 바닷가에서 미군 함정을 살피다가 체포되어 미군 배에 들어가 길 안내를 하려고 하였다는 죄목으로
효수경중(梟首警衆, 목을 잘라 매달아 대중에게 경각심을 줌)을 받아 순교하였다.
1871년 5월 21일에는 인천에 살던 이재겸(李在謙, 이승훈의 손자, 이신규의 아들)의 부인 정씨
(이승훈의 손부이며, 이신규의 자부이자 이재겸의 부인), 이명현(정씨의 손자), 백용석,
김아지(김애기) 또한 사학죄인으로 이곳에서 효수경중 되었다.
이와 같이 인천 제물진두에서는 기록상 나타난 것만 해도
천주교 신자 9명이 처형된 것으로 나온다.
9. 이승훈 베드로 묘
한국 천주교회는 평신도 스스로 천주교 신앙을 받아드리고
자발적으로 공동체를 시작한 세계에서 유일한 교회이다.
그 시작점의 뿌리는 바로 인천 남동구 장수동 산132번지에 묻히신
하느님의 종 이승훈 베드로 이다.
이승훈의 묘는 천주교의 성지일 뿐만 아니라 문화재이다.
이승훈 베드로의 삶에 대한 역사적 가치를 인정하여
인천시에서는 2011년 문화재 63호로 지정하였다.
인천교구는 2013년 인천시와 남동구에 이승훈 베드로 역사 문화체험관을 제안하면서
이승훈 베드로 성지 조성 사업을 추진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이곳은 개발제한 구역이며 상수원 보호 지역이라
성지를 조성하는데 많은 어려움이 있는 곳이다.
성지조성은 인간적인 차원을 뛰어넘는 일이라 하느님께 기도를 우선해야 하므로
매월 셋째 주 목요일에 관할 본당인 만수1동성당에서 미사와 묘역까지
도보로 묵주기도와 순례를 5년째 해오고 있다.
기도와 많은 분의 헌신적 도움으로 산재한 어려움을 해결하여
마침내 2018년 5월 인천시에서 이승훈 묘지 일대45,831㎡를
이승훈 역사공원으로 지정함으로써 성지 조성이 가시화 되었다.
인천시에서 부지를 마련해주고 교구에서 50억 원의 예산을 투입하여
한국천주교 역사문화 체험관 ‘이승훈 기념관’을 건립하는 사업이 추진되고 있다.
현재 기념관 건물에 대한 건축설계도는 확정되었고, 2020년 공원 조성에 대한 인허가,
2021년 착공이 목표인데 코로나19로 모든 일정의 조정이 불가피한 실정이다.
우리 모두의 기도와 희생으로 극복해야할 몫이 아닌가 한다.
순교자의 후손은 거의 대가 끊기거나 신앙을 거부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승훈 베드로의 후손은 100년 넘는 박해시기 내내 대를 이어 교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이승훈 베드로는 순교 후 선산인 이곳에 묻히게 되었고, 자녀들은 부친의 묘 근처에 터를 잡았다.
한 번 배교했지만 순교로 신앙 고백
이승훈 베드로는 부친 이동욱과 모친 여주 이씨 사이에서 태어나 24세에 진사시에 합격했지만
벼슬길보다는 진리탐구에 열정이 많았다.
그래서 새로운 학문을 접하게 되고 또한 당대 명문가인 마제 정씨가문 정약용의 누이와 결혼하여
그들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당대 석학 이벽과도 교분을 쌓은 그는 정약용 형제들과 천진암 강학회를 주도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 1783년 말 동지사 서장관에 임명된 부친을 따라 북경으로 가게 된다.
1784년 그라몽 신부로부터 조선 천주교의 초석이 되라는 의미로
베드로라는 세례명을 받고 한국 최초의 영세자가 된다.
그는 세례를 받고 돌아온 뒤 1784년부터 1801년 순교하기까지 신앙공동체를 위해 헌신했다.
하지만 박해시기에 바로 순교하지 못하고 부친과 문중의 압력에 의해
혹은 자신을 총애하던 정조 임금을 생각해 그리고 인간적 나약함으로 인해 박해를 모면한 적이 있다.
그 이유로 그는 한국천주교 안에서 그동안 크게 조명 받지 못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그렇게 된 것임을 순교로 증명하였다.
여기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그가 박해로 체포 되었을 때
개인적으로 그 상황만을 모면하였기에 천주교 신앙 공동체는 계속 유지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가 진심으로 배교하여 자신이 세례를 주고 가르침을 준 사람의 이름과 장소를 거명하였다면
신앙 공동체는 완전 초토화 되었을 것이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이승훈은 다시 체포되었고,
결국 하느님을 위해서 또 자신이 전한 신앙으로 인해 하나뿐인 목숨을 바쳐
서소문밖에서 참수 당하게 된다.
이승훈 베드로는 순교하면서
“달이 비록 진 것처럼 보이더라도 하늘에 남아있고,
물이 솟구치더라도 연못에서 다하는 것같이 내 신앙은 천주 안에 있다.
(月落在天 水上池盡)”라는 글을 통해 자신의 신앙을 고백한다.
이승훈 베드로의 묘는 큰길가에서 산길을 따라 1.4km 정수장 철조망 울타리를 따라 올라가다보면
십자가의 길이 나오고, 1km 가까이 이어진 십자가의 길 끝에
순교자 이승훈 묘가 묘비와 함께 모셔져 있다.
아직은 초라한 모습이지만 우리 모두 신앙의 후손으로서 자주 찾아뵙고 기리며
요즘의 어려운 시기가 빨리 지나 순교자의 역사관이 건립되는 날을 위해
기도와 희생이 이어지기를 기도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