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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가 반복될 때 식은 전환된다― 頓悟와 漸修 사이에서, 轉識得智를 다시 생각하다
우리는 수행을 두 가지 방식으로 생각해왔다.
하나는 홀연히 깨어나는 것이다.
어느 순간 지금까지 붙잡고 있던 모든 것이 무너지고,
생각 이전의 자리를 보고,
분별 이전의 마음을 보고,
본래 그러했던 것을 문득 알아차린다.
이것을 頓悟라고 부른다.
다른 하나는 조금씩 달라지는 것이다.
오늘 한 번 덜 화내고,
오늘 한 번 더 알아차리고,
욕망이 일어날 때 한 번 멈추고,
생각을 생각으로 볼 수 있는 시간이 조금 길어지고,
어제보다 조금 덜 집착하는 것.
이것을 漸修라고 부를 수 있다.
문제는 이 둘이 자주 서로 배타적인 것으로 이해되어왔다는 데 있다.
돈오를 강조하는 사람은 말한다.
깨달음은 누적된 수행의 결과가 아니다.
본래 그러한 것을 문득 보는 것이다.
반대로 점수를 강조하는 사람은 말한다.
한 번의 체험만으로 식의 습기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오랜 습관과 업력은 반복적인 수행을 통해 조금씩 변화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묻게 된다.
차이의 반복으로 깨달음이 가능한가?
매일 조금씩 달라지면,
그 작은 차이가 축적되어
어느 순간 돈오라는 질적 비약을 만들어낼 수 있는가?
나는 여기에서 조금 조심스럽게 대답하고 싶다.
그렇게 말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돈오는 결국
'점수의 충분한 축적'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천 번의 좌선이 모여 천한 번보다 더 큰 깨달음을 만들고,
만 번의 알아차림이 쌓여 마침내 깨달음이라는 결과를 만들어낸다면,
깨달음은 하나의 생산물이 된다.
그러나 선종이 말하는 頓悟는 바로 이러한 인과적 계산을 거부한다.
깨달음은 99%까지 수행하고 마지막 1%를 채우면 도달하는 것이 아니다.
깨달음은 양적인 축적과 질적으로 다른 사건이다.
그렇다면 점수는 무의미한가?
그렇지도 않다.
오히려 이 지점에서 識轉變이라는 개념이 중요해진다.
1. 식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전환될 수 있다
유식에서 인간의 의식은 단순히 세상을 비추는 거울이 아니다.
식은 대상을 분별하고, 분별한 것을 다시 저장하고,
그 저장된 흔적이 다음의 인식을 조건 짓는다.
한 번의 분노는 사라진다.
그러나 분노의 경험은 사라지는 동시에 어떤 흔적을 남긴다.
그 흔적은 다시 다음의 분노를 쉽게 만들고,
다음의 분노는 다시 그 흔적을 강화한다.
이것이 훈습과 종자의 구조이다.
따라서 우리는 같은 방식으로 반복해서 생각하고,
같은 방식으로 욕망하고,
같은 방식으로 상처받고,
같은 방식으로 반응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이것이다.
반복은 단순히 과거를 복제하는 것이 아니다.
반복할 때마다 아주 작은 차이가 생긴다.
오늘은 화가 나도 10분 뒤에 알아차린다.
내일은 화가 나는 순간 알아차린다.
어느 날에는 화가 일어나는 것을 보면서도 그 화를 따라가지 않는다.
그리고 어느 순간에는
'화를 내는 나'라는 것 자체를 하나의 현상으로 바라본다.
무엇이 일어난 것인가?
화가 사라진 것이 아니다.
생각이 사라진 것도 아니다.
식이 사라진 것도 아니다.
식과 대상과 자기 자신을 관계 맺는 방식이 달라진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식의 전환'을 생각할 수 있다.
2. 차이를 만드는 차이가 반복된다
수행의 가장 중요한 변화는 어쩌면
'좋은 상태가 오래 지속되는 것'이 아니다.
같은 상황에서 이전과 다르게 반응하는 것이다.
똑같이 비난을 받았는데 예전과 다르게 반응한다.
똑같은 욕망이 생겼는데 예전처럼 그것을 따라가지 않는다.
똑같은 외로움이 찾아왔는데 예전처럼 무언가로 그것을 채우려 하지 않는다.
똑같은 생각이 떠올랐는데 이번에는 그 생각을 사실로 믿지 않는다.
이것은 작은 차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차이가 다음 순간의 조건이 된다는 것이다.
차이를 만들어낸 차이가 다시 새로운 차이를 만들어낸다.
처음에는 아주 작은 어긋남이다.
그러나 그 어긋남이 반복되면서
식의 흐름 전체가 조금씩 달라진다.
이것이 앞서 말한 들뢰즈의 통찰과 만나는 지점이다.
반복은 동일한 것을 복제하는 것이 아니다.
반복은 차이를 발생시킨다.
그리고 그 차이가 다시 다음 반복의 조건이 된다.
불교적으로 말하면 훈습의 구조를
반대 방향으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다.
무명과 집착이 반복되어 번뇌의 종자를 강화한다면,
알아차림과 지혜의 반복은 다른 종자를 훈습한다.
그러므로 수행은 단순한 '좋은 습관 만들기'가 아니다.
식의 자기반복 구조에 다른 반복을 개입시키는 일이다.
3. 그러나 여기에서 돈오의 문제가 발생한다
그렇다면 질문이 다시 돌아온다.
이 차이가 계속 반복되면 어느 순간 깨달음이 오는가?
여기에서는 아니라고 해야 한다.
차이의 반복이 돈오를 생산한다고 말하는 순간, 돈오는 다시 점수의 결과가 된다.
그러나 돈오의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면 또 다른 문제가 생긴다.
그렇다면 수행은 무엇을 위해 하는가?
결국 우리는 이 둘을 다른 차원에서 보아야 한다.
점수는 식의 구조를 변화시킨다.
돈오는 식을 실체화하던 관점 자체를 전환한다.
점수의 차원에서는
'내가 어떻게 달라지고 있는가'가 중요하다.
돈오의 차원에서는
'달라져야 할 나라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가 문제된다.
점수에서는 내가 조금씩 변한다.
돈오에서는
그 '나' 자체가 식의 구성물임을 본다.
이것은 단순한 정도의 차이가 아니다.
4. 돈오는 '마지막 차이'가 아니다
돈오를 점수의 마지막 단계라고 생각하면,
수행 1
→ 수행 2
→ 수행 3
→ 수행 4
→ ……
→ 수행 100
→ 깨달음
이라는 모델이 된다.
그러나 이것은 돈오라기보다 완성된 점수에 가깝다.
돈오는 오히려 다음과 같은 사건이다.
계속해서 같은 방식으로 반복되고 있다고 생각했던 삶 속에서,
'반복하고 있는 자'와 '반복되는 현상'을 동일시하고 있었음을 문득 보는 것.
화가 일어난다.
욕망이 일어난다.
생각이 일어난다.
그러나 그것을 경험하는 '나' 역시
그것들과 마찬가지로 연기된 하나의 현상임을 본다.
그때 무엇인가가 뒤집힌다.
수행의 대상이었던 식을 바라보던 내가
갑자기 그 식의 일부였음을 본다.
이것이 돈오의 급진성이다.
돈오는
'내가 더 나은 내가 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더 나은 내가 되어야 한다는 구조 자체를 보는 것'이다.
5. 그렇다면 漸修는 무엇인가? 점수는 필요 없는가?
오히려 반대다.
돈오 이후에도 식은 계속 작동한다.
몸은 반응하고,
감정은 일어나고,
기억은 떠오르고,
습관은 움직인다.
한 번의 깨달음이 생물학적·심리적 인간의 모든 조건을 즉시 삭제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돈오 이후에도 삶은 계속해서 차이를 만들어야 한다.
이것이 頓悟後漸修라는 문제와 연결된다.
깨달음은 본질적인 관점의 전환일 수 있지만,
그 전환이 삶의 모든 층위에서 구현되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따라서 점수는 돈오의 원인이 아니라
돈오가 삶 속에서 작동하는 방식이라고 볼 수 있다.
돈오가 방향을 바꾼다면,
점수는 그 방향으로 계속 걸어가는 것이다.
돈오가 식의 구조를 꿰뚫는 것이라면,
점수는 그 통찰이 다시 습관과 관계와 행동 속에서 살아 움직이게 하는 것이다.
6. 轉識得智는 '새로운 지식을 얻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보면 유식의 轉識得智도 새롭게 읽을 수 있다.
식이 지혜로 변한다는 것은
무언가 새로운 정보를 얻는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같은 식이 더 이상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작동하지 않는 것이다.
분별은 계속되지만 분별에 붙잡히지 않는다.
감정은 일어나지만 감정이 곧 '나'가 되지 않는다.
대상은 나타나지만 대상에 대한 집착이 절대적인 실재처럼 굳어지지 않는다.
즉,
識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識의 작동 방식이 전환된다.
이것이 '轉識'의 핵심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전환된 식의 작용이 지혜가 된다.
그러므로 轉識得智는 '무지한 식이 지식을 얻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식의 동일한 활동이 지혜의 활동으로 전환되는 것이다.
7. 轉迷開悟도 같은 구조다
미혹과 깨달음도 두 개의 별도 세계가 아니다.
미혹 속에 있던 식이
어느 순간 깨달음이라는 다른 식으로 교체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미혹을 만들어내던 바로 그 식의 작동이
자신의 구조를 비추어 보기 시작한다.
생각을 믿던 마음이
생각을 바라보기 시작한다.
욕망을 따라가던 마음이
욕망을 알아차리기 시작한다.
'나'라고 믿었던 것을
하나의 연기된 구성으로 보기 시작한다.
그때 미혹은 사라져야 할 하나의 물질이 아니라
그 구조가 드러난다.
그래서 轉迷開悟는
미혹을 깨달음으로 바꾸는 것이라기보다,
미혹의 구조를 보는 순간
미혹이 더 이상 이전과 같은 힘을 갖지 못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8. 그래서 돈오와 점수는 어느 하나를 선택할 문제가 아니다
돈오만 강조하면 위험하다.
'본래 부처이므로 닦을 것이 없다.'
'무수무증이므로 수행도 필요 없다.'
'한 생각에 깨달으면 끝이다.'
이렇게 되면 돈오는 쉽게 개념적 자기확신으로 변한다.
반대로 점수만 강조해도 위험하다.
조금씩 좋아지고,
조금씩 지혜로워지고,
조금씩 깨끗해져서
언젠가 완전한 내가 된다는 생각.
이것 역시 미세한 아상일 수 있다.
나는 아직 부족하고
더 수행하면
언젠가 완전한 내가 될 것이라는 생각은
'깨달은 나'를 미래에 투사하는 또 하나의 욕망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양쪽 모두 놓칠 수 있다.
돈오 없는 점수는 끝없는 자기개량이 될 수 있고,
점수 없는 돈오는 자기기만이 될 수 있다.
돈오는 방향을 열고,
점수는 그 방향에서 삶을 살아낸다.
돈오는 '무엇이 본래 그러한가'를 보고,
점수는 '그 봄이 삶 속에서 어떻게 구현되는가'를 묻는다.
9. 차이의 반복은 돈오를 '만들지' 않는다
이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자.
차이를 만들어가는 차이가 반복되면 돈오할 수 있는가?
정확히 말하면,
돈오는 차이의 반복이 만들어내는 최종 결과가 아니다.
그러나 차이의 반복은
돈오가 일어날 수 있는 조건을 정화하고, 시야를 열고, 집착의 구조를 약화시키는 과정이 될 수 있다.
더 나아가 돈오가 일어난 뒤에도
차이의 반복은 계속된다.
그래서 양자의 관계는
점수 → 돈오
라는 직선이 아니다.
오히려
점수 → 돈오 → 다시 점수 → 더 깊은 전환 → 다시 점수
와 같은 상호작용에 가깝다.
그리고 여기서 중요한 것은 두 번째 점수가 첫 번째 점수와 같지 않다는 것이다.
돈오 이전의 수행은
'깨달음을 얻기 위한 수행'일 수 있다.
돈오 이후의 수행은
'깨달음을 구현하는 수행'이 된다.
같은 좌선이지만 전혀 다른 좌선이다.
같은 계율이지만 전혀 다른 계율이다.
같은 일상이지만 전혀 다른 일상이다.
차이가 반복되면서 수행 자체의 의미가 달라진다.
10. 가장 실용적인 길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실제 수행자에게 어떤 태도가 더 유용한가?
나는 일상의 점진적 차이를 견지하는 점수적 태도가 훨씬 실용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을 돈오와 대립시키지는 말아야 한다.
'나는 조금씩 변하고 있으니 언젠가 깨달을 것이다'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대신,
오늘의 식이 어제와 조금이라도 다르게 작동하도록 하는 것.
화가 났을 때 한 번 더 알아차리는 것.
욕망이 일어났을 때 한 번 덜 따라가는 것.
상대방을 판단하기 전에 한 번 멈추는 것.
'나'라는 생각이 일어났을 때 그것을 실체화하지 않는 것.
이 작은 차이를 계속 만들어가는 것.
이것은 매우 현실적인 수행이다.
그리고 그 작은 차이가 반복될수록
식의 훈습 구조가 달라진다.
그러나 어느 순간 무엇인가가 문득 보일 수도 있다.
내가 바꾸려고 했던 '나'가 처음부터 고정된 나가 아니었다는 것.
그 순간 점수의 길은 돈오의 문을 만난다.
하지만 그 문은 점수가 만들어낸 결과물이 아니다.
문은 언제나 거기에 있었다.
점수는 문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문을 가리고 있던 반복적 구조를 조금씩 다르게 만드는 일이다.
11. 결국 수행은 '나를 바꾸는 일'에서 '나의 반복을 보는 일'로
처음 수행을 시작할 때 우리는 자신을 바꾸려고 한다.
더 고요한 사람이 되려고 하고,
더 자비로운 사람이 되려고 하고,
더 지혜로운 사람이 되려고 한다.
그러나 조금 깊이 들어가면 알게 된다.
문제는 '나'가 충분히 좋은가 나쁜가에 있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나'라는 것이 어떻게 반복해서 만들어지고 있는가에 있다.
생각이 반복되고,
감정이 반복되고,
기억이 반복되고,
욕망이 반복되고,
그 반복이 하나의 '나'라는 감각을 만들어낸다.
그렇다면 수행은 그 반복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반복을 투명하게 보는 것이다.
그리고 그 투명함 속에서
아주 작은 차이가 생긴다.
화가 일어나지만 화가 곧 내가 아니다.
욕망이 일어나지만 욕망이 곧 나의 명령은 아니다.
생각이 일어나지만 생각이 곧 진실은 아니다.
'나'가 나타나지만 그것 역시 하나의 식의 현상이다.
이 작은 차이가 반복된다.
그리고 어느 순간,
더 이상 '차이를 만들어내는 나'조차 붙잡을 수 없게 된다.
그때 차이는 누구의 차이인가?
반복은 누가 반복하는가?
식은 어디에서 전환되는가?
바로 여기에서 돈오가 열린다.
12. 轉識得智 — 반복은 전환된다
그러므로 수행을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처음에는
내가 식을 바꾸려고 한다.
다음에는
식이 어떻게 반복되는지를 본다.
그다음에는
반복 속에 작은 차이를 만든다.
그리고 그 차이가 다시 다음 반복을 바꾼다.
그러다 어느 순간,
식의 반복 자체가 하나의 연기임을 본다.
그때 식은 더 이상 이전과 같은 식이 아니다.
識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識이 轉한다.
迷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迷가 轉한다.
그리고 그 전환을 불교는
轉識得智, 轉迷開悟라고 표현해왔다.
그러므로 깨달음은
수행의 반복을 부정하는 것도 아니고,
수행의 반복을 무한히 연장하는 것도 아니다.
반복 속에서 차이가 생기고,
차이가 반복의 구조를 바꾸며,
마침내 반복하고 있던 식의 성격 자체가 전환되는 것.
그것이 점수와 돈오가 만나는 하나의 자리일 것이다.
돈오는 점수의 마지막 계단이 아니다.
점수는 돈오의 단순한 원인도 아니다.
돈오는 방향의 전환이고,
점수는 그 전환이 삶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과정이다.
그리고 수행이 깊어질수록
둘 사이의 경계도 희미해진다.
오늘 한 번 덜 집착하는 것이
이미 작은 전환이고,
한 번의 알아차림이
이미 작은 개오이며,
한 번의 무집착이
이미 식전변의 미세한 징후다.
그러나 그것을 붙잡아
'나는 조금씩 깨달아가고 있다'고 말하는 순간,
다시 하나의 아상이 생긴다.
그래서 마지막에는 이것도 놓아야 한다.
차이를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마저 놓는다.
그때에도 삶은 계속된다.
생각은 일어나고,
감정은 움직이고,
행동은 이어진다.
그러나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반복되지는 않는다.
같은 삶이되 다른 삶.
같은 식이되 다른 식.
같은 반복이되 더 이상 동일하지 않은 반복.
그리고 그 차이가 반복되는 자리에서,
識은 智로,
迷는 悟로,
生死는 涅槃으로
전환된다.
아니,
어쩌면 전환될 것도 없었음을
문득 보게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