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합천군 해인사(海印寺) 한시(漢詩)편 3.> 총4편 中
해인사에 관한 종합적인 문헌으로 「가야산 해인사고적(伽倻山海印寺古籍)」이 있는데, 이는 해인사의 연기(緣起), 실화(失火)와 중창의 역사, 대장경의 인경(印經)에 관한 여러 사적과 문헌들을 모아 고종 11년(1874)에 판각한 것이다. 이「가야산해인사고적」에 수록된 문헌가운데 똑같은 이름의 「가야산해인사고적」(고려 태조 26년에 이루어진 것)과 신라 최치원(崔致遠)이 지은 「신라가야산해인사선안주원벽기(新羅伽倻山海印寺善安住院璧記)」의 두 기록은 해인사의 창건에 대하여 비교적 소상하게 전해주고 있다.
창건 이후 해인사의 중창에 관한 기록은 최치원이 쓴 「신라 가야산 해인사 결계장기(結界場記)」에 있는데 그 내용을 보면 해인사는 창건 당시 터가 험하고 규모가 작았는데 약 100년이 지난 효공왕 1년(897) 가을 다시 중창할 것을 합의하고 90일 동안 참선한 뒤에 3겹의 집을 세우고 4급의 누(樓)를 올려서 사역을 확정하였다고 한다. 또한 해인사 중수에 관한 기록은 창건으로부터 130여년이 지난 고려 건국 초기의 『균여전』에 보인다. 이곳 기록에 의하면 해인사의 희랑(希朗)대사는 신라말 왕건을 도와 견훤을 물리치는데 도움을 주었다. 이에 대한 대가로 경중봉사(敬重奉事)하여 전지(田地) 500결(結)을 시사(施事)하고 옛 사우(寺宇)를 중신(重新)하였다고 한다. 이로 미루어 고려 태조 때 해인사는 창건 이후 희랑대사에 의해 확장되고 새로워진 것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하였다. 그 때가 바로 930년 경이였다. 그 후 고려시대에 들어와 해인사는 균여(均如)대사, 대각(大覺)국사 등 많은 고승대덕을 배출하였다. 그러나 사우(寺宇)의 중수에 관한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다만 실록을 보관한 일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태조 2년(1393)에 정중탑을 중영(重營)하고 해인사는 여러 차례 중수를 한다. 이는 조선 왕실이 해인사에 힘을 기울인 결과라 생각된다. 특히 태조 때 고려대장경판이 해인사에 봉안 되었다. 태조실록 7년(1398)에는 강화에 보관되어 있던 대장경을 서울의 지천사(支天寺)로 옮겼다는 기록이 나오고 정종실록 원년(1399)에는 해인사에 대장경이 있다는 기록이 있다. 따라서 태조 때 장경판이 해인사로 이운(移運)되고 이때부터 법보종찰로 유명하게 되었다. 또한 기록에 의하면 세조 3년(1458)에 임금이 죽헌(竹軒)에게 명하여 대장경 50벌을 인경(印經)하고 신미(信眉), 학조(學祖) 두 스님에게 장경판전을 시찰하게 하고 그 결과 보고에 따라 판고가 비좁고 허술하므로 경상감사에게 명하여 판전 40칸을 다시 짓게 하였다고 한다.
그 후 세조가 1468년 승하하자 정희(貞熹)왕후는 해인사를 중건하기 위한 원력을 세우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1483년 세상을 떠난다. 해인사가 현재의 규모로 확장된 시기는 대체로 성종 12년(1481)에서 21년(1490) 사이라고 본다. 성종 19년(1488) 덕종의 비 인수(仁粹)왕비와 예종의 계비 인혜(仁惠)왕비가 선왕의 뜻을 받들어 도목수 박중석(朴仲石) 등을 보내어 학조(學祖)대사로 하여금 판전 30칸을 짓게 하고 보안당이라 이름을 붙였다. 그리고 1490년까지 많은 전각과 요사 등 160여칸을 완성하여 사찰의 면모를 일신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들은 성종 22년(1491) 조위(曺偉)가 쓴 『해인사 중수기』에 기록되어 있다. 그 후 해인사는 임진왜란 때도 전화(戰禍)를 면했으나 그 후 여러 차례 화재를 입었다. 1695년부터 1871년까지 해인사에는 일곱 번의 큰 화재가 있었으나 판전 건물은 피해가 없었다. 해인사에서 비교적 오랜 건물은 대적광전, 응진전, 퇴설당, 구광루, 해탈문 등이며 대장경판전 외에는 모두 순조 17년(1817) 직후의 건물이고 나머지 건물은 훨씬 후의 건물들이다.
9) 해인사 차운하여 쓰다[次韻題海印寺] / 백비화(白賁華 1180∼1224)
石徑幽深鳥伴行 돌길 깊숙하여 새를 친구하여
滿軒煙月放歡情 마루에 가득한 안개 속 달에 즐거운 정 쏟는다
憧憧掩映溪涵影 깃대는 빛을 가려 개울물에 그림자 일고
鍾梵鏘洋谷答聲 종소리 울리니 골짜기에 메아리 소리
坐欠洞雲生又滅 오랫동안 앉으니 골짝구름 피었다 사라지고
談餘籠燭暗還明 끝없는 이야기에 둘러앉은 촛불 어두웠다 밝아진다.
許多風物▦取拾 허다한 풍물 다 수습하려니
作記吾今愧李程 글을 쓰는 내가 지금 이정에 부끄럽구나.
10) 해인사[海印寺] / 이덕형(李德馨 1561∼1613)
夕陽漸下亂峯西 석양이 점점 아래로 내려가니 서산 봉우리가 어지러운데
老樹陰中信馬蹄 늙은 나무 그늘 아래서 말에다 몸을 맡기며 간다네.
借問洞天深幾許 묻노니 동천(洞天)은 얼마나 깊숙이 있으려나?
白波紅葉使人迷 하얀 물결 붉은 단풍잎이 사람을 미혹케 하네.
11) 해인사[海印寺] / 이주(李冑 1468~1504)
石橋斜入訪禪門 돌다리를 비껴 들어와 선문(禪門)을 방문하여
暫借瓊樓倚夕曛 아름다운 누각을 잠시 빌려 저녁 어스름에 섰노라
蒲盎苔深涼意在 부들 무성하고 이끼 덮이어 서늘한 기운 있는데
渚蓮風度好香聞 물가의 연꽃에 몇 번의 바람 불어 좋은 향기 맡노라
流回禁液西湖水 궁궐의 서쪽 호수를 돌아 흐르다가
淸透重簾萬壽雲 겹 주렴에 스며들어 만수무강하시길
閬苑篷萊尋不得 선경(仙境) 봉래(篷萊)를 찾을 수가 없었는데
仙凡疑比路中分 미혹되게도 선계와 속계가 길 가운데에서 나누어질 것 같구나.
12) 해인사[海印寺] 임억령에 차운(次林(億齡)韻) / 하항(河沆 1538~1590)
檜蔽中天旭 전나무에 가린 하늘 가운데 해가 떴는데도
山含萬古曛 산이 머금어 만고에 어스레하구나.
舂潢噴虎豹 해질녘 웅덩이에는 범과 표범이 온갖 무늬를 내뿜고
滿壑雪紛紛 온 골짜기에는 눈이 분분하네.
<경남 합천군 해인사(海印寺) 한시(漢詩)편 4.> 총4편 中
해인사는 가야산의 서남쪽 기슭에 있는 사찰로, 현재 절 안에는 고려 고종 23년(1236)에서 1251년까지 15년간에 걸쳐 완성된 호국안민의 염원이 담긴 고려대장경판(국보 제32호)이 있다. 그 밖에 장경판전(국보 제52호), 반야사원경왕사비(보물 제128호), 석조여래입상(보물 제264호), 원당암다층석탑 및 석등(보물 제518호), 합천 치인리마애불입상(보물 제222호)이 있다. 대장경은 경(經)·율(律)·논(論)의 삼장(三藏)을 말하며, 불교경전의 총서를 가리킨다. 이 대장경은 고려 고종 24∼35년(1237∼1248)에 걸쳐 간행되었다. 이것은 고려시대에 간행되었다고 해서 고려대장경이라고도 하고, 판수가 8만여 개에 달하고 8만 4천 번뇌에 해당하는 8만 4천 법문을 실었다고 하여 8만대장경이라고도 부른다. 국보 제32호이다.이것을 만들게 된 동기는 고려 현종 때 새긴 초조대장경이 고종 19년(1232) 몽고의 침입으로 불타 없어지자 다시 대장경을 만들었으며, 그래서 재조대장경이라고도 한다. 몽고군의 침입을 불교의 힘으로 막아보고자 하는 뜻으로 국가적인 차원에서 대장도감이라는 임시기구를 설치하여 새긴 것이다. 새긴 곳은 경상남도 남해에 설치한 분사대장도감에서 담당하였다.
해인사 고려각판은 경상남도 합천군 해인사에 소장되어 있는 고려시대의 불교경전, 고승의 저술, 시문집 등이 새겨진 목판이다. 이 목판은 국가기관인 대장도감(大藏都監)에서 새긴 해인사대장경판(국보 제32호)과는 달리, 지방관청이나 절에서 새긴 것이다. 현재 해인사 대장경판전 사이에 있는 동·서 사간판전(寺刊板殿)에 보관하고 있다. 이 목판에는 『금강경』, 『화엄경』 등의 대승경전과 신라·고려·중국의 고승이나 개인의 시문집 및 저술들이 있는데, 경전류는 대부분 간행기록이 있어 고려시대 불교경전의 유통 등 불교신앙의 경향을 알 수 있다. 고승이나 개인의 시문집 및 저술 등은 비록 간행기록이 없고 전권을 갖추지 못한 것이 많으나, 그 내용이 전하지 않거나 역사적으로 희귀한 자료들이다. 국보 제206호이다.
13) 가야산 해인사 운[伽倻山海印寺韻] / 홍성민(洪聖民 1536∼1594)
曲曲層崖疊疊巒 굽이굽이 층암절벽 첩첩의 산봉우리
不敎仙訣漏塵間 번뇌 사이에 신선의 비결 가르침 없어라.
臨流說與潺潺水 계곡물은 잔잔하게 흘러가는데
有底奔忙便出山 무슨 일로 산에서 나와 분주하더냐.
珠樹瓊枝擁作巒 아름다운 나뭇가지가 산을 가리는데
梵宮飛入白雲間 사찰로 흰 구름이 날아 들어오네.
溪流莫放桃花去 시냇물에 복사꽃 흘러가니 방해하지 말라
恐遣漁郞便入山 어부가 산에 들어오길 두려워할라
14) 가야산 해인사 운[伽倻山海印寺韻] / 홍성민(洪聖民 1536∼1594)
層層琪樹擁重巒 층층 옥 같은 나무가 산을 겹겹이 덮었는데
淸磬如何落世間 여하간 맑은 경쇠소리가 세간을 두르네.
觸石淸泉磨濯盡 돌에 부딪친 맑은 샘물이 모두 갈고 씻어냄은
嫌他陳跡溷仙山 신선의 산에 더러워진 옛 자취가 싫어서라
15) 해인사[海印寺] / 홍위(洪葳 1620∼1660)
山擁觀音殿 산은 관음전을 둘러싸고
雲晴學士臺 구름은 학사대를 맑게 드리웠네.
興來無遠近 즐거움은 멀고 가까움이 없으니
佳處輒徘徊 아름다운 곳으로 늘 배회한다.
石老莓苔合 오래된 바위엔 이끼가 덮이고
溪香躑躅開 시내엔 철쭉꽃이 피어 향기롭네.
詩仙今不在 시선(詩仙)은 이제 계시지 않으니
誰與勸深杯 누구와 더불어 술잔을 권하랴
여기 학사대는 최고운 선생이 노닐던 곳이다.(學士臺是崔孤雲所遊處)
16) 해인사[海印寺] 고운에 차운하여 즉시 짓다(走筆 次孤雲韻) 1724년(甲辰) / 조구명(趙龜命 1693~1737)
道體無言自融釋 도(道)를 닦는 몸으로서 말이 없어도 깨끗이 이해가 가는데
筌蹄何事經文譯 전제(筌蹄)하려 한다면 무슨 일로 불교의 경전을 풀이하나?
縱能譯得恒沙多 비록 많은 모래같이 번역하여 얻는다 해도
不是精微是粗迹 이러한 거친 자취를 정밀하고 자세히 밝히진 못하리라.
[주] 전제(筌蹄) : ‘고기를 잡는 통발과 토끼를 잡는 올가미’라는 뜻으로, 목적을 달성하기 위 한 방편을 이르는 말.
17) 해인사[海印寺] / 최흥원(崔興遠 1705∼1786)
東入紅流洞 동쪽 홍류동으로 들어가
西登學士臺 서쪽 학사대로 올랐다.
徘徊想像處 상상하던 곳을 배회하다가
得月故鄕來 달을 따라 고향으로 왔다네.
18) 가야산에서 노닐다 해인사에서 숙박하다[遊伽倻宿海印寺] / 전성세고(全城世稿)
微雨依山過 보슬비는 산을 따라 지나가고
寒泉繞枕流 찬 샘물이 빙 둘러 흐르네.
上方僧語細 주지 스님의 말이 가늘더니
窓外月如鉤 창밖의 달도 갈고리 같아라.
19) 높은 산에 올라 해인사를 바라보며[登高望海印寺] / 강운(姜橒 1772~1834)
紅是溪流碧是巒 붉게 물든 골짜기 시냇물에 푸른 산봉우리
至今爭道別人間 지금도 별천지 사이라고 다투듯 말하네.
孤雲去後雲猶在 고운이 가고난 후 오직 구름만 남았으나
籠鎖伽倻處處山 채색 대바구니에 가둔 듯 곳곳에 산이로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