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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피렌체에서 태어나 13세기 말에서 14세기 초에 활동했던 이탈리아의 위대한 시인이며 서유럽의 문학의 거장으로 이름이 난 단테라는 인물이 있습니다. 그가 만든 여러 작품 중 최대의 걸작은 종교적 서사시『신곡』입니다. 이 『신곡』은《지옥편》,《속죄편》,《천국편》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기독교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장대한 상징의 형태로 내세에 대한 관념을 예술화하여 만든 작품으로 사상적인 깊이와 창조적 상상력, 고뇌와 정열의 강렬함과 언어의 아름다움을 평가할 때 어느 작품에 비해 뒤지지 않을 최고의 명작으로 손꼽힙니다. 이 위대한 중세문학작품은 인간의 속세 및 영원한 운명을 심오한 그리스도교적 시각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이『신곡』이라는 작품 1부《지옥편》에 보면 지옥의 가장 밑바닥에 로마황제 시저의 믿음직한 시종이었지만 결국 시저를 암살한 ‘브루투스’, 로마제국 전쟁사에 나오는 또 다른 배반자 ‘카시우스’, 그리고 예수님을 배반하고 대제사장에게 예수님을 팔아넘긴 ‘가룟 유다’ 이렇게 세 명이 그 곳에 있다고 묘사합니다. 이 세 명이 얼마나 악독했기에 이 세 명만 지옥에서도 가장 밑바닥에 있는 지 알 수 없지만 이들은 정말 14세기까지의 인류 역사중 도무지 용서해줄 수 없는 배반자라고 이 책에서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그 중 성경속의 인물, 기독교적인 가장 큰 배반자로 보여지는 가룟 유다에 대해 살펴볼까 합니다. 가룟 유다의 배반을 보면서 우리는 과연 예수님을 어떻게 섬기고 있는 지 우리를 돌아보고 가룟 유다의 배반과정을 보면서 혹 우리 또한 잘못된 길로 가게 되지나 않을까 조심하면서 우리는 그 배반의 길에 함께 하지 않도록 우리를 점검해보는 귀한 시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예수님을 배반하며 부인하며 떠나는 사람의 첫 번째 단계는 악한 마음을 품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14장 10절입니다.
“열둘 중의 하나인 가룟 유다가 예수를 넘겨 주려고 대제사장들에게 가매”
예수님의 열 두 제자 중 열 한 명은 갈릴리 출신이었고 가룟 유다만 유대지역 출신입니다. 지역적인 차이로 인해 가룟 유다는 다른 제자들과는 좀 다른 대접을 받았든지 개인적인 가치관속에서도 다른 제자들과는 다른 제자라는 의식을 가지고 살았을 것으로 보여집니다. 가룟 유다는 태어나서 자라면서도 자급자족생활을 하며 농사나 어업에 종사했던 다른 제자와는 달리 시장경제를 바탕으로 각종 실물경제생활을 하는 지역에서 살았던 것이 아마 예수님의 제자중 회계 담당을 하게되는 결정적 요인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해보게 됩니다. 하지만, 이렇게 어릴 때부터 살아가면서 돈의 가치를 잘 알고 있던 가룟 유다였기에 오히려 재정적인 유혹에 쉽게 빠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이미 그런 가치관은 예수님께서 가룟 유다 어떻게 배반할 지를 잘 알고 계셨던 것을 보여줍니다. 성경에는 “그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가룟 유다는 돈에 대해서는 솔직하지 못하고 악한 마음을 가지기 쉬운 사람이었습니다. 돈 문제에 대해서는 너무나 쉽게 무너지고 돈에 대한 악한 마음을 항상 품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가룟 유다의 연약한 부분, 가룟 유다의 이런 죄악성을 아시면서도 열 두 제자중 한 사람으로 가룟 유다를 택하셨습니다.
요한복음 6장 70,71절을 보십시오. 같이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의 한 사람은 마귀니라 하시니 / 이 말씀은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를 가리키심이라 그는 열둘 중의 하나로 예수를 팔 자러라”
누가복음 22장 3절에는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열둘 중의 하나인 가룟인이라 부르는 유다에게 사탄이 들어가니”
예수님께서는 가룟 유다를 보시며 항상 돈문제를 일으키며 돈에 대해 연약한 모습을 보일 때에도 여전히 참으시며 인내하시고 함께 제자로 데리고 다니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유월절을 준비하시며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고 이제 조만간 십자가에 잡혀 죽으실 날을 알고 계시면서도 굳이 가룟 유다를 지칭하시지 않으시면서 만찬식사중에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 이 이야기를 듣고 제자들은 모두 당황하여 예수님께 묻습니다 “주님 저는 아니죠?”. 이렇게 묻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그가 나를 팔리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유대인의 보편적 식사형태를 보면 손으로 빵을 집어 빵을 조금씩 뜯어 과일이나 식초를 혼합해서 만든 소스 그릇에 담긴 소스에 빵을 찍어 먹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최후의 만찬식사 중 예수님과 함께 그릇에 손을 넣은 사람 단 한 사람을 지정하기는 대단히 어렵습니다. 유월절 저녁식사 만찬시간이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하시기 전 함께 했던 마지막 저녁식사 자리에서 각자가 자기 앞에 놓여진 그 소스그릇에 손을 넣어 빵을 찍어 먹었기 때문에 예수께서 손을 넣으실 때 함께 손을 그릇에 넣은 사람이 여러 명일 가능성은 충분합니다. 예수님과 동시에 소스에 빵을 찍어먹기 위해 소스 그릇에 몇 명의 사람이 손을 넣었는 지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예수님께서 소스를 찍어먹기 위해 그릇에 손을 넣었을 때 함께 손을 넣었던 사람중 한 명이 가룟 유다인 것은 틀림이 없을 것입니다.
시편 10편 3절입니다.
“악인은 그의 마음의 욕심을 자랑하며 탐욕을 부리는 자는 여호와를 배반하여 멸시하나이다”
예수님께서는 가룟 유다의 악한 모습을 제자로 부르신 이후에 계속 보아왔지만 여전히 인내하시며 참으시며 그를 제자로 인정하시며 데리고 다니셨습니다. 무한한 인내가 담겨 있고, 끝까지 지켜보시고 자원하는 마음으로 주께로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며 가룟 유다를 데리고 다니셨습니다. 억지가 아닌 자발적인 사랑으로 포용하고 지내셨습니다. 하지만, 이제 가룟 유다는 예수님의 그런 용서와 인내를 배반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넘겨줘야겠다는 마음을 품게 되었습니다. 그가 약했던 부분에 사탄 마귀는 공격했고 그 공격에 심적인 동요가 일어났던 것입니다.
잠언 4장 23절입니다.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가 가장 무너지기 쉬운 것은 우리의 마음가짐입니다. 우리의 가치관을 사탄마귀는 제일 먼저 공격합니다. 우리의 심적 정체성, 우리 마음의 굳건한 다짐이 무너지게 될 때 우리의 모든 인생이 무너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탄마귀는 우리의 마음부터 흔들어놓습니다. 마음이 요동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떤 환경속에서도 우리의 마음이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은 예수님을 향한 신앙가운데 어떤 요동도 없이 주님만 따라가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예수님을 배반하며 부인하며 떠나는 사람의 두 번째 단계는 실제적으로 악행의 방법을 찾아나서는 단계입니다.
마가복음 14장 10절입니다.
“열둘 중의 하나인 가룟 유다가 예수를 넘겨 주려고 대제사장들에게 가매”
예전 우리나라 제 4공화국, 제 5공화국 때 위장취업이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학벌도 좋고 유명한 대학을 나온 사람인데 생산직 노동자가 일하는 노동현장에 자기의 모든 학력을 숨기고 자신의 모든 경력을 감추고 들어가서 노동현장에서 노동자들을 선동하고 노동운동을 함께 하며 반정부활동을 하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이 노동현장에 노동운동을 하기 위해 취업하는 것을 ‘위장취업’이라고 했습니다. 예전에는 그렇게 노동현장에 위장취업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는데 이젠 정치권에도 위장취업이 있습니다. 경력을 다 위조하고 자기의 범죄사실을 감추고 일상생활에서 범했던 잘못들을 감추고 출마하고 당선되는 경우 위장취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정치하는 사람들은 선거에 나오려면 납세내역, 병역활동, 전과 이런 것을 다 공개해야하는데 자기에게 불리한 것은 감추고 유리한 것만 보여주려고 하다가 결국 허위로 드러나게 될 때 공직선거법 위반에 걸리기도 합니다. 어쩌면 예수님께서 택하신 가룟 유다는 예수님께서는 다 알고 계시기는 하지만 어쩌면 많은 사람들에게는 위장취업한 사람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로서의 삶이 아닌 인간의 욕심으로 자신의 명예를 위해 예수님을 따라다닌 사람입니다. 그렇게 자신을 위해 예수님을 따라다니다 이제는 더 이상 숨길 수 없으니 예수님을 배반할 결단을 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을 배반하는 행위로 그는 대제사장을 찾아갔습니다. 세상의 권력, 세상의 명예, 세상의 재력이 더 크게 보이기에 그런 권력과 명예, 재력을 가진 대제사장과 결탁한 것입니다.
잠언 24장 1절입니다.
“너는 악인의 형통함을 부러워하지 말며 그와 함께 있으려고 하지도 말지어다”
유유상종(類類相從)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같은 무리끼리 서로 왕래하여 사귄다’는 뜻입니다. ‘비슷한 부류의 사람들끼리 잘 모인다’는 뜻이지요. 서양에는 이런 속담도 있습니다. “친구를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 여러분은 누구를 가까이하며 사십니까? 주로 어울리는 친구는 어떤 사람입니까? 매일 나의 속얘기까지 털어놓으며 서로 마음이 통하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문자나 카톡을 하며 일상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사람은 가까이에 있는 사람을 학습하며 닮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서로 오래 만나고 함께 있다 보면 닮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부부가 닮아간다고 합니다. 학생은 스승을 닮게 되어있고 성도는 목회자의 신앙을 닮게 되어 있습니다. 심지어 애완동물은 주인을 닮게 되어 있다고 합니다. 주변에 ‘늘 투덜대는’ 가까운 사람이 있으면 나도 어느 순간에 투덜대고 있는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주변에 항상 남 얘기하기를 좋아하는데 그게 좋은 얘기가 아니고 ‘남의 흉을 보는’ 사람이 가까이 있다면 나도 어느 순간에 다른 사람의 흉을 보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주변의 사람들의 모습이 나를 그렇게 만들어가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쉽게 화를 내는 친구의 주변에는 똑같이 화를 내는 친구들이 많습니다. 너무나 거친 말투를 하며 욕설이 많이 섞인 대화를 하는 친구들끼리는 똑같이 거칠고 욕설이 많은 대화가 일상적인 대화가 됩니다. 욕 잘하는 친구의 친구들은 똑같이 욕을 잘하는 것입니다. 제가 이번에 휴가로 고향인 부산을 다녀오면서 친구들을 몇 명 만나고 제가 사역했던 교회의 성도와 제자들을 몇 명 만났습니다. 경기도에서 부교역자 사역도 오래 했고 교회 부목사과정중 몇 년을 다시 부산에서 사역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서울경기권에서 살았던 날이 햇수로만 따지면 20년가까이 되는데 군생활까지하면 20년이 넘는데 이젠 표준말이 더 익숙하고 표준말만 하며 살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근데 제가 휴가 때 부산에서 살고 있는 성도, 부산에서 살고 있는 제자들, 부산에서 살고 있는 친구들 만나면서 대화할 때 어떤 말이 더 편했을까요? 당연히 제가 자랄 때 했던 말, 지금도 그 지역의 사람들이 쓰는 부산사투리가 저의 입에서도 더 쉽게 나오더라구요. 모든 사람들이 부산사투리를 쓰니까 나도 그 곳에서 태어나서 자랄 때 했던 말이니까 오랫동안 안써도 그냥 자연스럽게 써졌습니다. “나도 어쩔 수 없구나”라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가까이 있는 사람들의 언어습관, 가까이 있는 사람들의 가치관, 가까이 있는 사람들의 행동이 나에게 큰 영향을 끼칩니다. 결국 “누구를 가까이 하는냐?”가 중요합니다. 그래서 부모님들은 자녀들이 어떤 환경에서 지내는 지, 자녀들이 어떤 친구들과 함께 하는 지, 자녀들이 가까이하는 사람들의 신앙적 가치관이나 언어생활, 행동모습이 모습은 어떤 지 관심을 가져야 하고 이런 일을 위해 기도 많이 해야 합니다.
야고보서 4장 8절입니다.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는 악한 자들과 가까이 해서는 안되고, 악한 가치관과 가까이 해서는 안됩니다. 세상의 모든 악에서 우리는 거리를 두어야 하고 잘못된 가치관에 대해서는 조금이라고 생각조차 해서는 안됩니다. 저와 여러분이 악한 생각을 하며 악한 방법으로 뭔가를 해내려고 하려고 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우리는 하나님과는 적이 되는 것이고 반대의 길을 걸어가는 것이고 배반자가 되는 것입니다. 가룟 유다가 배반하는 것의 시작은 그 마음부터 시작했고 결국 예수님의 대적자들과 결탁하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이런 유혹에 빠지지 않고 하나님의 길만 걸어가는 충성된 하나님의 종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예수님을 배반하며 부인하며 떠나는 사람의 세 번째 단계는 결국 자신의 이익을 우선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14장 11절입니다.
“그들이 듣고 기뻐하여 돈을 주기로 약속하니 유다가 예수를 어떻게 넘겨 줄까 하고 그 기회를 찾더라”
가룟 유다는 이전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하여 팔리리라”는 예언의 말씀을 성취하는데 일조하는 가장 확실한 배반자가 됩니다. 예수님을 넘기기 위한 방안을 대제사장과 짜고 그들과 흥정해서 은 삼십을 넘겨받기로 약속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그냥 대제사장이 가룟 유다에게 예수님을 넘겨받는 대가로 돈을 주기로 했다는 기록만 되어 있지만 마태복음에서 정확하게 그가 받은 돈이 ‘은 삼십’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가룟 유다는 이미 예수님께서 자신을 대제사장의 손에 넘길 것을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마태복음 26장 24,25절입니다.
“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 예수를 파는 유다가 대답하여 이르되 랍비여 나는 아니지요 대답하시되 네가 말하였도다 하시니라”
예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 중에 가장 저주를 담은 것을 표현이 이 본문에 나왔습니다. 그런 저주의 말씀을 들으면서도 가룟 유다는 뻔뻔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랍비여 나는 아니죠?”라면서 끝까지 예수님을 속이고 자신의 정체를 숨기려고 발버둥을 치고 있습니다. 그런 유다에게 예수님께서는 단호하게 “네가 말하였도다”고 하십니다. 적어도 이 정도 상황이 되면 회개하고 주님앞에 용서를 빌고 “이제는 잘 해봐야지”라고 생각하는 것이 보통의 인간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가룟 유다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가롯유다에 대한 여러 가지 설명이 성경에 많이 있습니다. 그는 일단 열혈당원이었습니다. 열혈당원은 로마로부터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노력한 사람들입니다. 일종의 독립운동가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들은 무력으로 이스라엘을 해방시키려는 노력을 했습니다. 그들이 아무리 무력으로 독립운동을 했지만 실제적 결실이 나타나지 않던 차에 예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이 그들을 로마로부터 독립시켜주실 정치적 메시야로 생각하며 예수님을 따라다녔습니다. 그 중의 일원이었던 가룟 유다도 처음엔 ‘정치적 메시야’ ‘독립운동가 예수님’이라고 생각하며 따라 다녔지만 예수님께서는 꾸준하게 ‘영혼의 구원’, 저 ‘천국으로 인도하실 메시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메시야관의 차이도 어쩌면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포기하고 대제사장에게 달려가서 은 30세겔에 예수님을 팔아넘길 결심을 하는데 큰 영향을 끼쳤을런지도 모를 일입니다. 이런 모습을 보면 가룟 유다는 완전히 인간적 목적으로만 예수님을 따라다닌 듯 합니다. 자신의 영적인 문제를 모르고 자신의 잘못된 삶을 뉘우치지 못하고 인간적인 목적을 위해서 살았습니다. 그리고 죽을 때에도 자신의 범한 이 큰 일에 대한 뉘우심을 목매달아 죽는 것으로 갚으려고 하였습니다.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예수님께 죄사함을 구했다면 구원받았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도 생각해볼 수 있지만 가룟 유다는 죄를 짓는 것도 죄를 회개하는 것도 자신의 생각, 자신의 판단, 자신의 결단으로 해결하려고 했습니다. 그러기에 성경의 말씀을 근거로 가룟 유다는 창세 전에 택한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는 결론을 얻을 수밖에 없습니다. 택한 자녀라면 반드시 성령을 주시어 죄를 깨닫고 예수님을 영접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교회에 다니다가 주님을 떠난 사람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판단할 수 없지만 하나님의 자녀라면 반드시 다시 돌아오게 하실 것임을 성경에서 증거하고 있으므로 이들에게도 계속 전도를 해야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모든 제자들도 예수님을 뿌리치고 자기 고향, 자기 살던 곳으로 도망가 버렸습니다. 그들은 제자 이전의 삶을 다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제자들 모도 가룟유다와 똑같은 배반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가룟 유다를 제외한 열 한 명의 제자와 가룟 유다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나머지 열 한 명의 제자는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예수님앞에서 회개하며 다시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비록 예수님을 부인하는 말을 했고 예수님을 배반하며 제자의 삶을 포기하고 현실로 돌아가 제자가 되기 전의 삶을 살았지만 예수님앞에 회개하며 다시 예수님을 영접했고 더 열심히 제자의 삶을 살았습니다.
로마서 2장 4,5절입니다.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느냐 / 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캘리포니아 대학원에 재학 중이던 알코올 중독자가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빌리그래함집회에 참석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는 알코올 중독으로 인하여 가정이 파괴되어 버렸고, 두 번씩이나 금문교에서 투신자살을 시도하였습니다. 그러나 어떤 이유에서인지 그의 비극적인 시도는 좌절되었으며 결국 집회에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집회에 참석해서 그가 보여 준 첫 반응은 냉소적이었습니다. 예배순서가 진행되는 중에도 별 감흥이 없었습니다. 이윽고 헌금시간이 되어 헌금바구니가 자기까지 전달되어 왔을 때 속으로 ‘참 웃기는 짓을 하고 있네’라며 입으로 “진짜 웃기네” 중얼거렸습니다. 그 날 목사님의 말씀은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내용의 말씀이었습니다. 이 날 집회 중에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바로 그 알코올중독자가 죄를 뉘우치고 기쁜 마음으로 회개하는 일이 생긴 것입니다. 그가 회개하고 다시는 술을 마시지 않겠다고 다짐한 이후 알코올 중독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훗 날 그는 그 때의 일을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그 날 밤 저는 하나님과 화해했습니다. 그 때까지 저는 제 인생에서 어떤 변화가 가능하리라고는 꿈조차 꾸지 못했었습니다. 우리 가족도 다시 하나로 뭉쳤고, 매일 함께 예배하고 기도하는 기쁨의 생활을 누리고 있습니다.”
디모데전서 6장 9,10절입니다.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가룟 유다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살아가면서도 세상적인 삶에 빠져 살았고 특히 자신이 약했던 돈에 대한 가치관을 버리지 못하고 세상적 가치관으로 주님안에서 돈에 대한 집착을 가지고 살았던 것을 성경을 통해 엿볼 수 있습니다. 결국 그런 삶이 예수님을 배반하고 예수님을 팔아넘길 생각까지 들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도 주님을 따른다고 하면서 세상에서 가장 약한 부분 물질적인 부분에 대한 가치관을 바꾸지 않으면 예수님을 버리게 되는 유혹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세상의 물질 가치관, 세상적인 재물가치를 버리고 예수님의 재물적 가치, 예수님의 재물관을 가지고 살아가면서 자족함과 감사함으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말씀을 맺을까합니다.
가룟 유다의 배반은 정말 기독교인들에게 있어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행위였습니다. 우리의 신앙으로는 가룟 유다는 정말 엄청난 죄인이고 도무지 용서가 되지 않을 행위를 했다고 말하면서 우리는 기독교인으로서 가룟 유다의 삶은 가장 저주받을 삶이라고 판단합니다. 하지만, 정말 우리 자신은 가룟 유다같은 신앙가치관으로 예수님을 따르고 있지나 않는 지 우리 자신을 돌아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면서도 가룟 유다가 버리지 못한 권력욕, 물질욕.... 가룟 유다가 버리지 못한 자존심과 돈욕심을 우리도 버리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러기에 가룟 유다가 잘못을 범하고 예수님을 배반했지만 그럼에도 회개할 기회가 생겼음에도 자존심이 강해서 죄를 회개하지 못했던 것처럼 우리 또한 그런 자존심이 강해서 우리도 죄를 범했을 때 회개하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저와 여러분, 정말 주님을 배반하는 행위로 우리의 삶이 나타나지 않을지라도 우리의 가치관이 변화되지 않고 우리의 인생의 기준이 바뀌지 않는다면 우리는 계속 배반의 유혹을 받을 수밖에 없음을 깨닫고 정말 우리의 신앙가치관, 인생가치관이 바뀌어지기를 기도하며 변화되는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