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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의민주주의에 관한 (01)에서 연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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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식화한 선호취합적 민주주의관으로부터 확실하게 차별화된다.
몇몇 심의 민주주의자들은 공동선의 개념의 성립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는
입장을 거부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하였다. 심의 민주주의관에 대해 공감하는
논평을 발표한 프리만(Samuel Freeman)은 공동선의 성립을 부정하는 극단적인 입장의 예로서 슘페터(Schumpeter)를 언급하였다.135) 슘페터는 어떤 정치적 조치(any political measure)도 모든 이들이 이해관심에 부합할 수 없다는
사실을 들어서 공동선 개념을 부정한다.136) 그런데 이러한 슘페터의 관측은 나름대로 일리가 있어 보일 수 있다. 여론 조사를 해보면 한 사회의 구성원 모두가 추구하는 단일한 목표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전쟁이
없는 평화의 상태조차 모든 이들이 바라는 것이 아닐 수 있다. 하지만 프리만은 이렇게 공동선 개념을 거부하는 시각의 근저에는 한 사람에게 좋은 것(a
person's good)을 그 사람이 표출한 선호(revealed preference)나 현재 일어나는 욕구(occurrent desire)와 동일시하는 관점이 자리 잡고 있다고 분석하면서, 표출된 선호는 한 개인의 선이나 한 사회의 선을 구체화하기에 충분하지 않다고 지적한다. 한 사람의 이해관심을 선호에 기초하여 설명할 때는 그러한 선호가 적어도 충분한 정보에 근거해야한다는 것과 어느 정도 이성적임이 가정되어야 한다는 것이 프리만의 설명이다.137) 그리고 이러한 프리만의 가정이 수용된다면 충분한 정보와 이성적 판단에 의해 무엇이 공동선인가에 대한 판단이 어떤 지점으로 모일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린다고 볼 수 있다. 심의 민주주의자 코헨 역시 자신이 선호취합적 민주주의관을 가진 이론가로
지목하는 달(Robert Dahl)이 공동선 개념에 대해 다소 회의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비판하였다.138) 달에 따르면, 공동선의 개념은 다음 세 가지
중에 하나에 속한다. 지침을 주기에는 너무 비결정적이거나, 결정적이지만 수용135) Samuel Freeman, "Deliberative Democracy: A Sympathetic Comment", Philosophy and
Public Affairs, Vol. 29, No. 4, 371~418 (Autumn, 2000), (이하 Freeman 2000으로 표기)
p.375
136) J. A. Schumpeter, Capitalism, Socialism, and Democracy, 3rd ed. (New York: Harper,
1950), chs. 21~23 (위의 프리만의 논문에서 재인용)
137) Freeman 2000, p.375
138) Joshua Cohen, “Institutional Argument... Is Diminished by the Limited Examination of
the Issues of Principle Democracy and Its Critics. by Robert A. Dahl ”, The Journal of
Politics, Vol. 53, No. 1, 221-225 (Feb. 1991) (이하 Cohen 1991로 표기) pp.224~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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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수 없거나, 결정적이고 수용 가능하지만 그 자체로 민주주의를 제한할 근거를 제공할 수 없을 만큼 절차적이다. 물론 달이 이러한 분류를 한 까닭은 이
중에 세 번째, 즉 공동선을 민주적 과정 그 자체로 규정하는 입장만이 성립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공동선은 집단적 선택이 민주적 과정을 통해
이루어지고 계몽된 이해의 조건 하에서 그러한 절차를 통해서 도달된 결과로
구성되는 것으로 간주한다. 달은 공동선의 개념을 완전히 기각하지 않았지만
이렇게 어떤 실질적인 해석도 거부함으로써 공동선의 개념을 거의 무용지물로
만들었고 코헨은 이러한 시각을 바로잡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일단 공동선 개념이 성립한다거나 그것에 대한 어떤 실질적인 해석이 가능하고 보는 이론가들 간에도 공동선이 무엇인지에 대한이 규명이 여전히
또 다른 이견을 낳는다. 그래서 심의 진영 프리만과 코헨이 염두에 둔 공동선
개념을 구체적으로 거론하기 전에, 이 부분에 대한 전체적인 조망을 먼저 제공하고, 심의 민주주의 이념의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칸트 윤리학의 전통
자체에서 어떤 의미의 공동선 개념이 존재할 수 있는지부터 살펴보도록 하자.
하버마스의 저서 사실성과 타당성(Faktizität und Geltung)을 영역(英譯)
했으며 보만(James Bohman)과 함께 심의 민주주의(Deliberative Democracy:
Essays on Reason and Politics)라는 논문집을 편찬한 레그(William Rehg)는
이러한 궁금증을 해결할 수 있는 분석을 제시하였다.139) 그는 일단 공동선에
대한 다양한 인식들을 양극단을 가진 스펙트럼 상에 위치시킬 수 있다고 보았으며, 양극단의 시각을 각각 개인주의적(individualistic) 견해와 집단주의적(collectivistic) 견해로 규정하였다. 레그에 따르면, 개인주의자들은 공동선이
항상 “개인들의 선들(the goods of individuals)”로 환원될 수 있다고 보는 반면, 집단주의자들은 일부 공동선들은 “비환원적으로 사회적(irreducibly
social)”이라고 주장한다. 양자 모두 공동선이란 한 사람 이상의 개인들이 추구하거나, 성취하거나, 소유하거나, 혜택을 입거나, 가치를 느끼거나, 즐길 수 있는 무엇이라는 일반적인 이해를 공유한다. 하지만 비환원적으로 사회적인 선(goods)에 대한 개념이 성립함을 주장하는 측에서는 테일러(Charles Taylor)
139) 이하의 레그의 논의는 모두 William Rehg, "Solidarity and the Common Good: And
Analytic Framework", Journal of Social Philosophy, Vol. 38, No. 1, 7~21, Spring 2007.
(이하 Rehg 2007로 표기)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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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럼 문화와 우정과 같이 개인들에게 돌아가는 이익이나 혜택으로 분해될 수
없는 가치가 존재한다고 주장하거나 매킨타이어(Alasdair MacIntyre)와 같이
어떤 관행(practice)에 내재하는 공동선, 즉 그러한 협력적 활동에서 추구하는
탁월성(excellence)에 주목한다. 레그는 자신의 논의를 두 가지 공동선 개념 모두 성립될 수 있음을 보이는
데에서 출발하였다. 레그는 먼저 스펙트럼의 한 쪽 극단을 설명하는데, 그것은
우연적으로 모인 군중은 아니며 어떤 의도에 의해 조직된 집단인 “자발적인 도구적 연합체(voluntary instrumental associations)”이다. 예를 들어, 여러 명의
남성 독신자들이 휴가 때 사용할 목적으로 하나의 콘도미니엄을 돌아가며 이용하는 모임을 만들었다고 해보자. 각자는 특정 지역에 위치한 콘도미니엄에 대해 개인적인 이해관심을 가지고 있지만 혼자서는 그 비용을 감당하기 어렵다. 서로 다른 기간에 이용할 수 있는 콘도는 일종의 사적 가치재(a private good)
이지만, 그것을 사용하는 것은 시간적으로 분리가능하기 때문에 그 집단에서는
공동의 가치재, 즉 구성원들이 공유할 수 있는 무엇으로 기능한다. 이러한 도구적 기능을 하는 다른 연합체로는 공동 투자 조직, 금전적 상호 이익에 기초한
혼인관계, 일시적 연립 단체들(coalitions)을 들 수 있다.
레그는 이러한 집단의 특징들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첫째, 구성원들은 서로 자신의 이해관심에 의해 단체가 생겼다는 것을 모두 인식하고 있다. 그래서
각 성원은 그러한 단체가 개인들의 목적을 획득하는 수단으로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여기서는 사적 가치재를 예로 들었지만 깨끗한 공기와 같은 공공재
역시 개인적인 이해관심에서 추구될 수 있다.) 따라서 구성원들은 다른 성원들이 불만을 품고 단체를 이탈하지 않도록 하는 이해관심 외에는 다른 이들이 개인적 선을 즐기는 데에 대해서 특별히 관심을 가질 필요는 없다. 둘째, 여기서의 공동선은 개인들의 선호의 만족이 모두 더해진(the aggregate satisfaction
of individual preference) 어떤 사물(thing), 여건(condition), 또는 사태(state
of affairs)를 의미하므로 매우 옅은(thin) 의미, 그리고 분해가능한(decomposable) 의미의 공동선이다. 셋째, 도구적인 연합체를 형성하기 위해서는 개별 구성원들은 그들 자신의 이해관심이 하나로 모아진다는 것을 알 수 있도록 공동선을 규정하는 가치들과 개념들이 구성원들에게 충분히 이해 가능하여야 한다. 하지만 이 공유가능성(commonablilty)은 그다지 심층적인 것일 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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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는 없다. 가령 콘도를 함께 사용하는 미혼 남성들은 한 휴가지에 서로 이해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으로 충분하며 무엇이 만족스러운 휴가인지에 대한 이해는 공유할 필요가 없다. 넷째, 하나의 도구적 연합체는 그것이
각 성원이 자신의 이해관심을 만족시킨다고 결정했을 때 성립되는 것이므로 그것에 가입하는 것이 선호를 만족시켰는지를 결정하는 가장 신뢰할만한 권위는
그러한 선호를 가진 개인 당사자에게 있다는 합리적 선택의 가정 위에서 작동한다.
한편, 레그가 제시하는 스펙트럼의 다른 쪽 극단은 생활세계 내에서 비환원적으로 사회적인 가치, 가령 전체로서의 집단적 선이나 탁월성을 추구하는 경우이다. 그리고 단체 스포츠가 이러한 경우의 명백한 예가 된다. 단체 스포츠에서는 경기에서 승리하는 것이 공동선이다. 이 경기자 또는 저 경기자가 아닌
팀 전체가 이러한 선을 성취하고 그것으로부터 혜택을 받는다. 일단 경기에서
승리하는 것은 단지 그 단체의 성원들에게 혜택을 주어서뿐만 아니라 팀 자체에 이익이 되기 때문에 좋은 것이다. 그래서 팀이 승리하기 위해서 어떤 경기자는 게임에 출전을 하지 못하게 될 수도 있다. 이는 경기자 개인의 측면에서
보면 자신의 기량을 연마할 기회를 포기하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팀을 승리로 이끄는 탁월한 경기는 팀 자체를 완성하는 것이며 개인들의 탁월함의 총합
이상의 것을 포함한다는 의미에서 공동의 선이 된다. 가령 볼룸 댄스(ballroom
dance)를 하는 제임스와 자넷이 하나의 커플로서 특유의 탁월함을 발휘한다면
그들이 함께 성취하는 선은 비환원적으로 사회적인 사태가 된다. 그래서 우리는 두 사람이 상대가 아닌 다른 파트너와 춤을 추게 될 경우에는, 예컨대 자넷이 제임스가 아닌 톰과 함께 춤을 추었을 때는 제임스와 함께 할 때처럼 높은
수준의 공연을 할 수 없게 되는 것을 상상할 수 있다. 정리하면, 탁월한 팀워크의 공동선은 비환원적으로 사회적이며 그 이유는, 첫째 그것이 팀 전체를 서술하는 동시에 완성시키고, 둘째 그것이 개인의 탁월성에 논리적으로 선행하며, 셋째 그것이 개인적 선의 추구를 좌우하기 때문이다. 도구적 연합체들에서는 개인의 선들이 논리적 우선성을 갖는다. 여기서 말하는 공동선은 개인들이 이미 자신들의 개인적 이해관심을 알고 있다는 것을
전제하여 공동선으로 간주되는 것이다. 나아가 그러한 공동체는 문제의 공동선이 진정으로 자신에게 좋은 것인지에 대한 “해석적 권위(interpret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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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ity)”가 개인에게 있다는 가정 하에서 작동한다. 반면에 팀(team), 오케스트라, 밀접한 인간관계에서 찾아볼 수 있는 생활세계의 연대 집단은 집단적
탁월성이라는 공동선을 추구하며, 그러한 공동선은 무엇이 개인의 성취로 간주되는가를 부분적으로 결정한다. 테일러나 맥킨타이어가 지적하듯이 그러한 관행들에 내재하는 공동선들은 공유된 문화나 전통 내에서만 개인들에게 의미를
갖는다. 공유된 문화나 전통이 모종의 권위로 간주됨에도 불구하고, 테일러와
맥킨타이어 모두 그러한 권위를 개인들의 기여와 계속적인 비판과 혁신에 의해
형성되는, 가단성(可鍛性) 있는 권위(malleable authority)로 이해한다. 이는 그러한 관행들의 선을 누리는 데에 필요한 개념들과 가치들의 공유가능성(commonability)이 그 집단 내에서 발생하는 문화적 투과(transmission)의 과정에 의존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도구적 연합체들이 선에 대한 선재하는 이해
위에 기초하여 형성되는 반면에, 생활세계 유대들은 개인들이 그 집단에 가입하고 그것의 관행에 참여함에 의해서만 성취되고 유지되는 상호 이해에 의존한다. 이것은 구성원들의 해석적 권한(interpretive competence)이 어떤 주어진
구성원에게 전제될 수도 없고 모든 구성원들에게 동등하게 할당될 수도 없다는
것을 함축한다.
이러한 두 가지 유형의 연합체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레그는 칸트적 전통의 도덕성을 토대로 형성된 공동체가 이러한 공동선 개념의 스펙트럼 상에서
어디에 위치하는지를 본격적으로 논하기 시작한다. 레그에 따르면, 칸트의 도덕
이론의 연대적 특징은 정언명령의 제 2 공식과 제 3 공식에서 엿볼 수 있다. 이 두 공식을 종합하면 구성원들이 서로를 목적으로 대하는 보편적인 도덕적
공동체가 드러난다. 칸트에서 목적의 왕국(the kingdom of ends)은 경험적인
구체적 공동체가 아니라 이성의 관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덕의 관점에서
의식적으로 선택하고 행위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러한 공동체의 성원이 된다는
것이 실제적인 사회적 유대를 구성하며, 그러한 유대는 실생활에서 조화로운
협력을 가능케 하고 때때로 인권 운동이나 인도적 원조와 같은 특정한 도덕적
기획을 추진하는 동력이 될 수 있다. 도덕적 행위와 협력을 하려는 마음가짐은
(스스로 행위를 도덕적으로 규율한다는 의미의) 자율(autonomy)의 능력을 가진 존재로서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상호인정에 근거한다. 칸트는 도덕적 덕성, 즉 자율의 능력을 실현하는 것이 “최고의 선(the supreme good)”을 이룬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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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는데,140) 레그는 이러한 칸트의 목적론적 언어가 목적으로서의 자율이 하나의 공동선, 즉 그 공동체를 하나로 유지하는 핵심 가치로서 기능하고 있음을
암시한다고 보았다. 종합하면, 칸트의 도덕적 공동체는 의식적인 헌신을 통하여
사람들을 하나로 묶고, 자율성이라는 가치에 대한 상호 인정을 포함하고, 서로를 위해 구체적인 행위를 하는, 사회적 연대의 기본적 요소들을 담지하고 있다. 구체적인 행위의 수준에서 칸트의 자율성은 “의무로부터”, 즉 사람들을 목적으로서 대우하는 행위의 규칙들의 토대에서, 선택하고 행위하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들을 목적으로 대하는 것은 두 차원의 행위를 포함한다. 소극적으로는 그들의 자율적인 목적으로서의 지위를 격하시키지 않는 방식으로 존중해야하며, 적극적으로는 그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그들의 자율성을 증진시키는 방식으로
행위해야 한다. 그런데 자율의 목적론적 차원은 칸트의 도덕 형이상학에서 그가 정언 명령을 “자신의 목적이 모든 이들도 이러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는 보편적 법칙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격률에 따라 행위하라”는 공식으로 재정식화하는 가운데 표현되었다.141) 칸트는 그러한 목적들을 자신의 완성과 타자의 행복이라고 말하는데, 후자는 또한 다른 이들의 목적을 (부도덕한 것이 아닌 한)
자신의 목적인 것처럼 여기는 의무로서 표현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얼마만큼 타자의 도덕적으로 허용 가능한 목적을 자신의 목적인 것처럼 여겨야 되는지는 자신이 가진 자원과 필요를 포함한 여건들에 달려있는 것으로 말한다.
레그에 의하면, 도덕성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 소유되고 실현되는 능력으로서의 자율성은 개인적 선이다. 비록 나의 도덕적 행위로 말미암아 도덕적 공동체의 다른 구성원들이 혜택을 입지만 자율성은 그것이 공동체에게 좋은 것이라는 단지 그 이유만으로 나에게 좋은 것이 될 수 없다. 그런 식으로 이해하면
자율적인 행위자를 단순한 수단으로 만드는 역설적인 상황이 벌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만일 개인들이 자기 주도적으로 도덕적인 행위를 하는 능력을 가진, 스스로 목적인 존재들이라면 무엇보다도 그러한 능력의 실현은 개인적 선, 즉
그 개별 인격체에게 좋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좋은 무엇이어야만 한다. 하140) Kant, Critique of Practical Reason, 110~111(Akademy edition numbers) (Rehg 2007
p. 16 에서 재인용)
141) Kant, Metaphysics of Morals, 395 (Akademy edition numbers) (Rehg 2007 p. 16 에서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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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만 이와 동시에 서로의 자율이라는 개인적 선에 대한 공유된 헌신(commitment)으로 말미암아 자율성은 도덕적 연대감으로 사람들을 한데 묶는
근본적인 공동선이 된다. 이러한 헌신은 자율적인 행위자들로 하여금 타자들의
자율성에 적절하게 대응하는 특정한 방식으로 행위를 하거나 행위를 삼가도록
요구한다. 그래서 자율적인 행위자들은 어떤 이에게 하나의 개인으로서 좋은
것을 모든 이의 관심사로 만든다. 이를 테면 스스로 선택할 여지를 주고 특정한 행복을 추구하는 데에 적극적인 지지를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칸트의 도덕적 자율성은 파생적 의미의 공동선이라 할 수 있다고 레그는 설명한다. 도덕적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들이 각 구성원들의 자율이라는 개인적 선을 모든 이에게
좋은 것, 즉 공동선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레그가 보기에, 하나의 집단이 연대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단지 공동선에 대한 헌신을 공유하는 것뿐만 아니라 공동선이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견해 차이를 해결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 두 번째 측면에 대한 논의를 위해서는 우리가 칸트에서 머무를 수 없다고 레그는 지적한다. 칸트는 도덕적 판단의 상충 문제에 대해 충분히 논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칸트는 행위자들이 자신의 도덕적 의무에 대해 잘못 생각할 수도 있고 어떤 주어진 개인의
특정한 목표가 도덕적 공동체의 다른 구성원들에게 도덕적 요구를 할 수 있는지 여부에 대해서 의견이 다를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하지만 칸트는 이러한 차이를 그의 도덕적 인식론에 대한 이론적 문제로 간주하지 않고 단지 도덕 교육과 양심의 함양에 대한 실천적 문제로 간주하였다. 이론상으로, 반성적인 각 행위자는 어떤 주어진 경우에 자율성이 요구하는 구체적인 행위에 대해
같은 결론에 도달해야 한다. 그 결과 칸트는 공동선을 해석하는 권위를 반성적
행위자에게 부여하는데, 이러한 권위는 개인이 사고 실험에 기초하여, 어떤 행위나 무위(無爲)를 불편부당하게 정당화하는 논리적 논변을 구성하는 능력 위에 성립한다. 그러한 논변들은 바로 정언 명령을 사용하는 방식을 예시할 때
칸트 자신이 구성한 것들이다.
레그는 신(新)칸트주의자 하버마스의 접근처럼 칸트의 도덕적 관점을 대화
형식으로 재정식화 함으로써 이러한 빈틈이 메워질 수 있다고 보았다. 레그가
보기에, 이러한 시도는 도덕적 정당화의 토대를 바꾸었다. 이제 도덕적 행위자들은 충분히 합당한 실제 담화 속에서 그들의 판단을 정당화하는 논변들의 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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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부당성을 시험해야만 한다. 참여자들은 주어진 어떤 개인의 이해관심 또는
(생명, 건강, 직업, 결혼 등과 같은) 선의 추구가 타자들로부터 모종의 (소극적) 존중이나 (적극적) 관심을 요구한다는 것을 합당하게 설득시킬 수 있는
한, 서로에 대한 도덕적 의무들에 관해 의견일치에 도달한다. 그러한 의견일치에 도달할 때, 그들은 그러한 개인적 선들(individual goods)을 공동선들(common goods), 즉 타자들에게 도덕적 요구를 할 수 있는 개인들의 가치나
이해관심(values or interests)으로 인정한다. 물론 그러한 의견일치는 이후에
오류였던 것으로 판명될 수도 있다. 개인적으로 수행하는 사고 실험이 아닌, 실제 도덕적 담화를 요구함으로써 담론 윤리학은 자율성이라는 가치의 공유가능성이 항상 공동체 수준에서 접근되어야하는 개념임을 인정한다.
정리하면, 레그가 보기에 칸트의 전통에서는 자율성이 공동선을 구성한다. 그리고 도구적인 연합체들의 공동선과 마찬가지로, 공동선으로서의 자율은 개인적 선들, 각 개인의 자율적인 번영(flourishing)으로 분해가능하다. 그러나 자신의 이해관심을 추구하기 위해 모인, 상호 무관심한 행위자들과는 달리, 칸트의 도덕적 공동체의 구성원들은 상대의 자율성에 능동적인 관심을 갖기 때문에
각자의 개인적 선이 공동선이 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도덕적 공동선은 도구적 연합체들의 취합된 공동선과 다르다. 비록 도덕적 공동선이 개인적 선들로
분해가능하지만 그것은 취합된 선이 아니라 항상 매 경우마다 도덕적 공동체의
다른 구성원들에게 존중할 것을 요구하는 자율성을 가진 한 개인의 선이다. 또한 공동선에 대한 개인의 해석은 그 개인이 도구적 연합체에서 누리는 것과 같은 종류의 최고의 권위를 누리지 못한다. 오히려 개인은 대화 속에서 도덕적
공동체와 해석의 권한을 공유하는데, 이는 분배받은 인식적 권위를 개인적 선의 도덕적 의미에 대한 논의를 할 때 행사하는 것이다. 그리고 공동의 도덕적
선은 개인적 선들로 환원될 수 있으므로 도덕적 연대는 구체적인 생활세계의
연대와도 다르다. 하지만 도덕적 연대는 구체적인 생활세계의 연대와 두 가지
흥미로운 측면에서 유사한데, 이는 도구적 연합체들로부터 이들을 구분한다. 첫째, 두 경우 모두 개인의 선들의 지위는 선행하는 공동선의 해석에 의존한다. 구체적인 생활세계의 연대에서 집단적 탁월성이라는 짙은 의미의 공통성(thick
commonalities)이 선행하는 반면, 도덕적 연대에서는 자율성이라는 공통적인
가치(commonable value)가 선행한다. 둘째, 개인의 선들의 지위를 판단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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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의 권한은 그 사람이 그 집단 내에서 분배받는 권위의 몫에 의존한다. 이
때 도덕적 연대에서는 도덕적 공동체 대화 속에서 행사되는 권위를 의미하고, 구체적 생활세계의 연대에서는 하나의 사회문화적 관행(practice)이 복잡하게
요구하는 바를 정복한 구성원들이 행사하는 권위를 말한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살펴본 세 가지 종류의 연대가 구현하는 공동선 중에서
심의 민주주의적 정치가 추구하는 공동선은 어느 것에 가까운가? 레그는 이 문제에 직접적으로 답하고 있지 않다. 하지만 나는 일단 국가와 같은 정치적 공동체가 추구하는 공동선은 레그의 스펙트럼의 양극단의 모델들이 추구하는 공동선, 즉 단순히 공통된 선호의 취합이나 어떤 특정 문화나 탁월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기에는 너무나 복합적이고 다원적인 집단이라는 사실을 지적할 수 있다. 우선 정치적 공동체의 공동선이 구성원 모두가 공통적으로 선호하는 것이라고 본다면 그것은 이견의 여지가 거의 없이 좋은 것으로 인식되는 것들, 가령 깨끗한 물과 공기와 같은 좋은 자연 환경과 롤즈가 말하는 사회적 기본선들(primary goods), 가령 기본적 권리와 자유, 기회와 권한, 그리고 소득과 부(富)와 같이 모든 목적의 추구에 필요한 수단과 자존감의 사회적 토대를 나열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기본선들을 열거할 수는 있지만 그것들을 공동선들로 지목하는 것만으로는 공동선을 거론하는 의미가 없다. 다양한 배경을 가진
다수의 사람들이 이러한 기본선들을 어떻게 확보, 유지, 또는 분배해야하는지에
대한 문제가 반드시 해결되어야 하므로 결국 규범적인 차원의 논의가 포함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정치적 공동체의 공동선을 어떤 특정 문화나 탁월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규정한다면 그러한 특정 문화나 탁월성의 추구에
헌신할 마음이 없는 이들에게는 일종의 강요가 된다. 그래서 비단 심의 민주주의자들뿐만 아니라 이 점을 인정하는 이론가들이라면 레그의 스펙트럼의 양극단의 공동선 개념은 정치적 공동체에 적용되기 어렵다는 데에 동의할 것이다.142)
이러한 분석과 더불어, 심의 민주주의 이념에 대한 이제까지의 논의를 통해142) 급진적 민주주의(radical democracy)를 표방하는 무페 역시 공통의 공적 관심이 없는 개인들이 공유하는 도구적인 공동선 개념이나 전근대적으로 하나의 단일한 공동선을 추구하는
것이 정치적 공동체에서는 모두 적절하지 않다고 보았다. Chantal Mouffe, "Democratic
Citizenship and the Political Community", in Dimensions of Radical Democracy: Pluralism,
Citizenship, Community, ed. by C. Mouffe, Verso London: New Work, 1992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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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우리는 심의 민주주의 이념이 추구하는 공동선이 칸트의 도덕적 공동체의
공동선 개념에 가깝다고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이러한 결론은 심의 민주주의가
하버마스의 담론 윤리학을 정치에 적용한 것이라는 인식과 실제로 심의가 작동하는 방식을 근거로 지지될 수 있다. 담론 윤리학은, 레그의 설명에서 다시 언급되었듯이, 칸트의 윤리학적 전통의 연장선상에서 형성된 것이므로, 그런 측면에서 도덕적 공동체의 연대를 함축하고 있다. 그래서 심의 민주주의 이념이 담론 윤리학을 정치에 적용하는 시도라고 보고 승인하는 것 자체가 정치적 공동체를 도덕적 공동체로 간주함을 의미한다. 또한 심의가 작동하는 방식이 지향하는 것, 즉 사안에 대한 모든 관련된 관점들을 대표할 수 있는 충분한 수의
참여자들을 포함하고, 각 참여자에게 동등한 발언권의 기회를 주고, 사실과 불편부당성의 측면에서 더 나은 논변의 힘 이외에는 어떠한 내적 강제나 외적 강제에 의해서도 지배받지 않는 심의 과정을 통해서 추구하는 것은 적어도 불편부당성(또는 비편파성) 개념을 포함하는 도덕적 옳음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측면에서 역시 심의 민주주의 이념이 염두에 둔 정치적 공동체는 옳음을 추구하는 도덕적 공동체임이 드러난다. 이러한 칸트적 도덕적 공동체의 특징은 옳음을 공동체 구성원 모두가 추구해야하는 공동의 가치로 인식한다는 것이고, 이를 좀 더 구체적으로 표현하면
정의(justice)를 공동선으로 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앞서 레그는 (도덕적) 자율성을 칸트적 공동체가 추구하는 특유의 공동선으로 지목하였는데, 이 역시
정의와 연관된다. 따져 보면 서로의 도덕적 자율성을 존중하고 보존하는 것은
구성원의 도덕적 자율성뿐만 아니라 그것을 실제로 유지하는 데에 불가결한 여타의 실존적 여건들까지도 공평하게 보장하는 것을 함의해야한다. 롤즈가 사회적 기본 가치라고 부르는 것들이 공정하게 분배되지 않는다면, 사회 구성원들
모두가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거나 서로에게 연대감을 갖기 어려울 것이며, 이런 상태에서는 구성원들이 도덕적 자율성, 가령 롤즈가 말하는 두 가지 도덕적
능력인 정의감과 가치관을 함양하고 발휘할 수 있을지 의심스럽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회 구성원들의 도덕적 자율성은 사회 정의를 도모하고, 사회 정의의
구현은 다시 구성원들의 도덕적 자율성을 유지시킨다는 점에서 양자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심의 민주주의 이념이 추구하는 정치적 공동체의 공동선은 결국 정의(justice)로 규정될 수 있다.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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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다시 프리만의 논의로 돌아가서 그가 염두에 두었던 공동선 개념을 살펴보면 공동선을 정의로 규정하는 시각이 두드러짐을 알 수 있다. 우선 프리만은 공동선의 성립가능성 자체를 부정하는 견해가 적절하지 않다고 비판한 후, 공동선을 단지 표출된 선호들의 취합으로 보는 견해와 대조되는 관점으로서 루소(Jean Jacques Rousseau)를 주목한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루소는 민주적
입법자들이 “사적인 의지(private will)”나 특수한 이해관심에 치우지지 않고
공중의 의지 또는 “일반의지(the general will)”에 기초하여 투표를 해야한다고
주장하였다.144) 그리고 프리만은 일반의지가 공동선을 목표로 삼는다고 규정한다. 그에 따르면, 루소에게 공동선은 다수의 선(the good of majority)과 같지
않으며, 단지 모든 이들에게 혜택을 줄 수 있는 어떤 파레토 효율적 조치(Pareto efficient measure)도 아니다. 대신 루소에게 공동선은 곧 정의로서, 각 시민의 자유와 평등에 그 근거를 두고 있으며 그 안에 시민들의 “가장 큰
선(greatest good)”이 있다.145) 루소는 각자의 동등한 자유와 독립성이야말로
모든 이들이 가지고 있는 기본적 이해관심이며, 자유롭고 독립적인 인간이 되는 것과 다른 이들과 동등한 지위를 가지는 것이 좋은 삶을 사는 데에 필수적이라고 라고 보았던 것이다. 시민들의 자유, 평등 그리고 독립성을 보장하고 유지하는 데에 필요한 조건들로 해석된 공동선은 시민들의 심의의 초점으로 간주되며, 이 사실이 심의 민주주의라는 정치적 이상의 핵심적 특징을 드러낸다고
프리만은 강조한다.146)
심의 민주주의 이념에서 공동선에 대한 논의가 정의에 대한 논의로 귀결된다면, 심의와 구체적인 정의 이론과는 어떤 관계에 있는가? 가령 심의에서 롤즈의 두 가지 정의의 원칙을 토대로 문제를 풀어나가는 것은 허용될 수 있는가? 사실상 특정한 정의 이론이 심의를 진행하는 공식적인 기준으로 채택되는
143) 사실상 정의를 공동선으로 보는 시각의 예는 자연법 전통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예컨대
머피(Mark C. Murphy)는 아퀴나스(Aquinas)가 공동선을 정의와 평화로 이루어진다고 보았다고 해석한다. 정의와 평화는 공동체 전체를 위한 조건들인데, 정의는 사람들 간의 적절한
관계, 모종의 평등이 보존되는 공동체의 상태에서 성립되는 것이고 평화는 시민들 간의 불화가 부재하고 적절한 질서가 존재함으로써 확보된다. Mark C. Murphy, "The Common Good",
The Review of Metaphysics 59, 133~164 (September 2005). p.148 참조. 144) J. J. Rousseau, The Social Contract, Bk,IV, ch.2, par.8. ((Freeman 2000에서 재인용)
145) J. J. Rousseau, The Social Contract, Bk,II, ch.11, par.1. (Freeman 2000에서 재인용)
146) Freeman 2000, p.3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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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은 심의 민주주의의 민주적 요소와 어긋난다고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굿만과 톰슨은 (롤즈의 공정으로서의 정의관을 포함한) 특정 정의의 원칙들에 의존하는 것은 시민들의 정치적 자율성을 지나치게 제한할 수 있으며, 민주적 심의가 정치적 진리를 발견할 가능성이 더 높은 방법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들에
따르면, 롤즈의 접근이 충분히 심의적이지 않으며, “심의 과정보다 정의의 원칙들을 더 우선시한다는 점에서 ... 입헌주의적(constitutionalist)”이다.147) 하버마스 역시 철학적인 정의 이론들을 고수하는 것이 시민들의 정치적 자율을 위협한다고 생각하였으며,148) 나아가 자유롭고 평등한 시민들 간의 실제 담화만이
이상적인 민주적 담론에서 가상적인 참여자들이 합의할만한 실질적 정의 규범을 발견할 수 있다고 보았다.149)
하지만 단 하나의 정의 이론만을 표준으로 삼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서, 심의 과정에서 잘 알려진 철학적 정의 이론들을 인용하는 것은, 프리만이 지적한
바와 같이, 단지 어떤 철학자의 권위에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원칙들이
제공하는 근거들을 수용하기 때문이라면 시민들이 정치적 자율성을 훼손한다고
볼 수 없다.150) 때문에 심의 과정에서 서로 다른 정의 이론을 옹호하는 이들
간에 논쟁이 일어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심의 민주주의자가 롤즈처럼
자신의 정의 원칙을 표준으로 삼을 것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떤 특정한
시각을 높이 평가하는 것은 허용될 수 있는가? 이러한 의문은 앞서 언급했던
달의 공동선 견해에 대한 코헨의 비판에서 발생한다.
이 절의 서두에서 나는 달이 공동선의 개념이 지침을 주기에는 너무 비결정적이거나, 결정적이지만 수용할 수 없거나, 결정적이고 수용가능하나 그 자체로
민주주의를 제한할 근거를 제공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으며 코헨은 이를 비판하였다고 소개하였다. 이 때, 코헨은 사실 달의 두 번째 주장, 즉 결정적인 동시에 수용가능한 공동선의 개념의 가능성을 부정한 것에 이의를 제기하였던 것이147) Gutmann and Thompson, Democracy and Disagreement, Harvard University Press,
1996, (이하 Gutmann & Thompson 1996으로 표기) p.44. (Freeman 2000에서 재인용. pp.408~409 참조)
148) Habermas 1990, p.211. (Freeman 2000에서 재인용. p.408 참조)
149) Habermas 1990, p. 57, pp.67~68, p. 94, p.211. (Freeman 2000에서 재인용. p.408 참조)
150) Freeman 2000, pp409~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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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코헨은 적어도 롤즈의 정의 이론의 최소극대화 규칙이 결정적인 동시에 수용가능한 공동선의 개념의 가능성을 보여준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코헨은 달이 최소극대화 규칙에151) 구현된 공동선의 실질적인 해석을 거부하는 이유들에 설득력이 없으며, 최소극대화 규칙이 공동선에 대한 설득력 있는 민주적 설명을 제공할 가능성을 달이 충분히 심각하게 고려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152)
그런데 이러한 주장은 일견 코헨이 롤즈의 특정한 분배 이론을 공동선 해석의 유력한 모델로 간주하고 있으며, 이것이 심의를 통해 옳은 결정을 찾아가자는 심의 이념에 위배되는 것이 아닌가하는 의구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면, 코헨이 강조하는 것은 롤즈가 구체화한 원칙들 자체보다는, 그러한 원칙들에 “생기를 불어넣는” 직관적 통찰이다.153) 그리고 그러한 원칙들을 도출하는 토대가 되었던 도덕적 통찰은 코헨의 말처럼 “자연적 능력의
분배에 의해 자원의 분배가 결정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으로 표현할 수도 있고154), 보다 더 근본적으로 어떤 자연적 속성을 소유하게 된 것이 자신의 책임(노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면, 그 개체는 그 속성을 소유함으로써 얻게 되는
혜택에 대해 도덕적 자격이 없으므로155) 재능을 포함하여 타고난 사회, 인종, 경제, 성별 등의 배경에 의한 불평등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통찰이라고 풀이할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코헨은 최소극대화 규칙이 이러한 통찰의 가장 완벽한
표현은 아닐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인정하였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코헨이 높이 평가한 것은 정식화된 롤즈의 원칙들 자체라기보다는 그것들을 가능케 한 도덕적 통찰 또는 숙고된 판단이다. 이제까지 살펴본 바에 따르면, 코헨과 프리만의 공동선에 대한 이해는 정의151) “최소 극대(maximin)”란 문자 그대로 최소 중의 최대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여러 대안들의 우열을 가릴 때, 그것들 각각이 가져 올 수 있는 최악의 결과들을 서로 비교하여 그 중에
그나마 가장 덜 나쁜 결과를 초래하는 대안을 택하는 것이다. Rawls 1971, p.152 (번역본
p.171)
152) Cohen 1991, pp.224~225
153) Cohen 1991, p.225
154) Cohen 1991, p.225
155) 롤즈의 직관을 이러한 방식으로 정식화하는 것은 롤랜즈의 분석을 참고하였다. Mark
Rowlands, Animal Rights: Moral Theory and Practice, Palgrave Macmillan, 2nd edition,
2009 (1st ed. 1998) pp.133~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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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개념을 중심에 두고 있다는 측면에서 공통점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코헨은 이에 그치지 않고 공동선으로서의 정의에 대한 실질적인 해석이 어느 정도 가능하다고 보았으며 롤즈의 정의 원칙들을 모두 언급하지는 않았으나, 그의 분배 이론의 유용성을 높이 평가하는 태도를 보였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코헨의 태도가 심의 민주주의 이념과 크게 충돌한다고 볼 필요는 없을 것이다. 우선 코헨이 예로 든 것은 정식화된 롤즈의 원칙들 자체라기보다는 그것을 가능케 한 어떤 숙고된 판단이며, 이러한 숙고된 판단은 많은 사람들이 공유할
만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사실상 심의의 개방성 또는 민주성은 논의가 어떤
숙고된 도덕적 판단도 전제하지 않는 상태로부터 출발할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러한 논의는 애초부터 가능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우리가 부정하거나 거부하기 어려운 기본적인 도덕적 통찰들을 구체화하거나
이들을 서로 조율해 나가는 것이 심의의 역할이라고 볼 수 있다. 게다가 코헨이 최소극대화 규칙을 언급한 맥락은 가장 적절한 분배의 정의 이론을 배타적으로 선택한 것이 아니라, 달이 지나치게 절차적인 의미로 공동선을 규정하려는 접근을 경계하려는 목적에서 하나의 실질적인 도덕적 통찰의 존재를 지적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끝으로 공동선이라는 개념이 목적론적인 어휘이기 때문에 옳음을 기본으로
삼는 의무론적 접근과 다소 일관되지 않는 측면이 있다는 지적이 가능하기 때문에 이 점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내가 보기에도, 가능하면 좋음과 옳음의 구분을 좀 더 엄격하게 적용하여 좋음의 범주에 속하는 공동선(the common
good)이라는 개념보다는 옳음이나 정의 개념을 전면에 내세우는 것이 더 일관적이라고 생각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동선을 정의로 재규정하는 일부 심의
민주주의자들의 작업은 무의미하지 않아 보인다. 그 이유는 이미 민주주의 논의에서 개인의 이해관심만을 추구하는 태도에 반대하는 의미에서 공동선에 호소하는 전통이 자리잡은지 오래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옳음이나 정의 개념이
공동선 개념을 대신하기 전까지의 과도기 동안에는, 누군가 공동선 개념을 언급할 때마다 공동선에 대한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하며 그 중에서 공동선을 정의로 인식하는 것이 심의 이념에 비추어볼 때 가장 적절하다는 것을 분명히 밝힐 필요가 있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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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좋음에 대한 옳음의 우선성
이 절에서는 민주주의가 ‘데모스를 위한 정치적 결정’을 내리는 체제라고 전제할 때, 협의의 심의 이념이 함축하는 ‘정치적 결정의 성격’이 무엇인지를 논하도록 하겠다. 먼저 첫째 의미의 옳음의 우선성 테제가 공리주의의 문제점을
적극적으로 규명하는 내용을 살펴볼 것이다. 여기서는 협의의 심의 이념이 내포하는 첫 번째 의미의 옳음의 우선성 테제가 공리주의와는 달리 다수를 위해
소수의 권익을 희생시키는 종류의 결정을 배제함을 밝힌다. 그 다음 여러 가치관들에 대해 국가의 중립성을 유지하는 둘째 의미의 옳음의 우선성 테제가 오히려 공동체주의자들의 비판을 받았던 내용을 고찰할 것이다. 상세한 분석을
통해서 협의의 심의 이념의 반완전설적 입장은 이러한 비판에 충분히 대응할
수 있으며 공동체주의자들의 완전설에 대한 옹호도 그리 성공적이지 않았음을
드러내고자 한다. 이는 협의의 심의 이념이 내포하는 두 번째 의미의 옳음의
우선성 테제, 즉 정치적 결정이 시민들이 개인으로서 추구하는 삶에 과도한 간섭을 배제하는 입장이 고수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4.2.1. 옳음의 우선성과 공리주의
공리주의는 옳음을 좋음의 최대화로 규정하는 목적론적 또는 결과주의적 시각을 대표하는 이론이다. 그런데 이 같은 결과주의적 접근을 거부하는 시각이
존재하는데, 그 연원은 칸트에게로 거슬러 올라간다. 칸트가 결과주의를 거부했던 이유는 그것이 도덕적 사유의 핵심을 빗겨간다고 여기기 때문이었다. 칸트가 보기에 도덕적 사유의 핵심은 좋은 결과보다는 올바른 동기에 있다. 그래서
어떤 행위를 그것이 단지 옳다는 이유로 행하는 선의지(a good will)야말로 무제한적으로 선한 것이며 그것이 노력 끝에 아무것도 성취하지 못하더라도 그
자체로 가치 있는 것이라고 주장한다.156) 어떤 행위가 쾌나 불쾌, 혹은 복이나
156) 칸트(I. Kant) 저, 백종현 역 윤리형이상학 정초, 아카넷, 2005, pp.77~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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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를 불러오는지 여부는 우리가 감각적 존재로서 갖는 관심이며 경험을 통해
알려진다. 이와 달리 옳음이나 선함은 감수성의 영역에 속한 것이 아닌, 순수
이성의 이념이다.157) 결국 도덕적 물음은 어떻게 하면 복을 얻고 화를 면하여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만들 것인가를 묻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옳은 행위를 행하고 그릇된 행위를 삼가함으로써 우리가 행복할 가치가 있는 존재가
될 수 있는지를 고민하는 것이다.158)
롤즈는 결과에 대한 고려가 도덕적 사유에서 완전히 배제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도덕적 판단의 본질에 대한 칸트의 중요한 통찰을 계승한다. 칸트는 이성이 우리의 욕구를 만족시키는 도구적 기능을 하기 위해 내리는
가언 명령과 이성이 옳음의 법칙을 통해 오히려 욕구를 제한하는 정언 명령을
구분하고 후자를 도덕적 사유로 규정했다. 다음 구절에서 우리는 좋음을 효과적으로 추구하는 것보다는 좋음을 추구할 때 이성이 명하는 바에 따라 규율하는 것을 옳음에 대한 바른 규정이라고 보는 칸트의 윤리설의 핵심적 견해가 롤즈의 정의관에 반영되었음을 알 수 있다.
공정으로서의 정의관에 있어서 우리는 사람들이 갖는 성향이나 경향성을 그 내용에
상관없이 전제하고 그것들을 만족시킬 최상의 방법을 강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처음부터 사람들의 목적 체계가 준수해야 할 한계를 밝히는 정의의 원칙들을 통해서
그들의 욕구와 포부를 제한하려는 것이다. 이러한 것은 공정으로서의 정의관에 있어서는 옳음이라는 개념이 좋음이라는 개념에 선행한다는 말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159)
이렇게 롤즈는 자신의 성향이나 경향성이 형성하는 좋음에 대한 관념보다 자신이 마땅히 지켜야할 바를 의미하는 옳음의 관념을 우위에 놓는 도덕적 사유를
우리의 사회적 삶 또는 정치적 실존에 적용하여 공정으로서의 정의관을 제시한다. 공정으로서의 정의관에서 옳음의 우선성은 정의의 원칙이 허용가능한 삶의
방식의 한계를 설정한다는 것을 함축하며, 따라서 정의의 원칙의 제한을 어기는 시민들의 요구들은 존중되지 않는다.160) 157) 칸트(I. Kant), 윤리형이상학 정초, p.113
158) 칸트(I. Kant) 저, 백종현 역 실청이성비판, 아카넷, 2002, p.271
159) Rawls 1971, p.31 (번역본 p.52)
160) J. Rawls, “The Priority of Right and Ideas of the Good", Philosophy and Publ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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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롤즈는 옳음의 우선성의 칸트적 테제에 다시 상식적인 정의관과 자연권 사상을 접목하여 정의의 우선성이라는 테제를 탄생시킨다.161) 이는 (한 개인이 행위자로서 자신이 감각적 존재로서 원하는 욕구를 이성의 명령으로 제한해아 하듯이) 한 사회가 사회 전체의 복지 향상을 추구할
때는 정의관이나 자연권에 입각하여 이를 제한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정의관
또는 자연권에 입각하여 우리는 각 개인이 불가침성을 지닌다는 신념을 갖는다. 이는 곧 이러한 불가침성을 표현한 개인의 권리들이 다른 명분으로 희생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공리주의가 표방하는 모든 이들의 복지
증진이라는 명분으로 침해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바로 롤즈가 정의의 우선성이라는 이념을 통해 강조하려는 바이다. 이렇게 공리의 추구에 대해 정의의
관점이 선행하면, 일부 사람들의 자유의 상실이나 권리의 침해가 다른 이들에게 돌아갈 더 큰 이익에 의해 정당화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롤즈에 따르면, 공리주의는 욕구의 만족을 최대화하는 것을 옳음을 규정함에 있어 본질적인 것으로 보기 때문에 욕구 만족의 최대량을 달성하도록 제도를 만드는 데에 주안점을 두게 되고, 결국 여러 측면에서 중요한 것을 놓치게
된다. 우선 공리주의는 욕구 만족의 원천이나 성질에 대해서는 이차적으로밖에
접근하지 못한다. 가령 타인을 차별한다거나 타인의 자유를 구속함으로써 쾌락을 얻는 경우 이런 종류의 만족이 억제되어야 한다면 그것은 그러한 욕구의 파괴적인 성격 때문에 다른 방식에 비해 보다 큰 복지를 달성하지 못하기 때문으로 설명한다. 그러한 결과와는 별개의 문제인, 그러한 욕구 자체의 부당함에 대해서는 침묵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정의에 대한 고려가 복지에 기여하는 평상시에는 정의가 명하는 바를 준수하지만 그렇지 않은 예외적인 상황에서는 이익의 총량의 극대화를 위해 소수자의 권익의 희생을 요구한다. 공리주의의 시각에서 정의에 대한 신념은 사회적으로 유용한 착각에 불과한 것이다. 또한 공리주의는 욕구의 만족을 최대화하려는 데에 초점을 맞춘 나머지 모든 인간이
마치 하나로 융합된 듯이 다루는 결함이 있다. 공리주의는 전체 효용을 전망하는 하나의 시각으로 동정심을 가진 공평한 관망자를 전제한다. 공평한 관망자는 “타인의 욕구를 제 것인 것처럼 경험하고 동일화할 수 있는 완전히 합리적Affairs, Vol.17, No. 4 (Autumn, 1988) p.251
161) Rawls 1971, p.28 (번역본 p.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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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 개인”이다. 그런데 이러한 관망자의 상상력을 통해 문제에 접근하게 되면
실제로 개인들 간에 존재하는 차이를 신중하게 다루지 못하게 된다. 이렇게 각
개인의 개별성을 독립적으로 존중하는 데에 소홀하면 우리가 상식적으로 갖고
있는 자유와 권리를 보호하고 응분을 요구하는 신조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할
우려가 크다.162)
하버마스 역시 칸트의 기준에 비추어 공리주의가 도덕적 행위의 동기의 측면에 있어 가장 높은 도덕적 인식에 미치지 못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도덕적
언어의 인지적 내용을 단지 개인의 감정 또는 결단으로 보는 강한 비인지주의와는 달리, 공리주의는 비인지주의의 “계몽되지 않은 자기이해”를 관찰자의 시점에서 수행되는 효용 계산으로 대체함으로써 도덕 언어 게임에 이론적 정당화를 가능하게 한다. 하지만 이런 방식으로 확보된 객관성은 약한 비인지주의와
유사한 단계에 머무른다고 하버마스는 평가한다. 이는 도덕적 행위자로서의 주체의 자기이해의 차원에서는 큰 문제가 없다. 객관적으로 보아 문제가 없는 행위를 함으로써 도덕을 어느 정도 구현하는 것이다. 하지만 동기의 측면에서 주체가 좋은 것으로 보는 목표에 달성하는 합리적인 판단을 전제하기 때문에 도덕적 판단자로서는 아직 도덕의 본질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합리적 동기만으로는 아직 도덕적 객관성을 표현할 수 없다.163) 다른 각도에서 설명하면, 공리주의는 개인이 자신의 쾌락과 이익을 최대화하는 전략적 행위를 다른 모든
이들이 자신들의 쾌락과 이익을 최대화할 수 있는 기회와 양립가능한 범위 내에서만 허용한다는 측면에서 어느 정도 보편성을 획득한다. 하지만 행위가 진정으로 도덕적이라고 평가되기 위해서는 단지 보편적인 법률들에 일치할 뿐만
아니라, 칸트가 말한 것처럼 오직 보편적인 법률들에 대한 공경심이라는 동기에서 유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하버마스의 생각은 칸트가 쾌와 복을
목적으로 두고 도덕적 행위를 하는 것을 타율적인 행위이며 오직 도덕 자체에
대한 존경심으로 도덕적 행위를 하는 것을 자율적인 행위라고 보았던 것과 일치한다.164)
심의 민주주의 논의와 관련하여 공리주의를 본격적으로 고찰하는 굿만과 톰162) Rawls 1971, pp.25~32 (번역본 pp.47~53)
163) Habermas 1998, pp.5~6 (번역본 p.24)
164) Habermas 1973, pp. 88~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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슨은 좋음에 대한 옳음의 우선성의 테제를 전면에 내세우지는 않는다. 대신 그들의 논의에서 우리는 공리주의의 실체를 장단점을 가능한 균형감 있게 드러내려는 노력을 엿볼 수 있다. 굿만과 톰슨에 따르면, 정치에 적용되는 공리주의는
우선 도덕적 갈등을 해결하는 데에 유리한 세 가지 특징을 갖고 있다.165) 첫째, 공리주의는 공리(utility)라는 단일하고 포괄적인 목적을 제시함으로써 시민들이 추구하는 상호 양립가능한 서로 다른 목적들을 모두 포용하는 특징을 갖는다. 이와 비교하면 오히려 다른 정치 이론들이 특정한 몇 가지 가치를 내세우는 것으로 보인다. 가령 홉스의 이론에서는 안전(security), 로크에서는 생명과 자유와 재산, 루소에서는 공동체가 강조되는데 이 모두가 다른 목적을 배제하고 있다. 하지만 공리는 이것들 모두와 그 이상을 포함한다. 벤담의 고전 공리주의에서는 누군가가 추구하는 어떤 목적도 일종의 공리로 간주되는 것이다. 일단은 모든 요구들을 포용하는 방법론이라는 측면에서 공리주의는 민주적 논의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라고 굿만과 톰슨은 평가한다.
둘째, 공리주의가 결과에 초점을 맞추는 것도 어떤 측면에서는 장점이 될
수 있다. 공리를 규정하는 선호들은 일차적으로 사태를 지칭하는 것이지 행동이나 동기 또는 인격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벤담의 시각에서는 어떤 제안을
하게 된 동기나 그런 제안을 한 사람의 인격에 대해 공격하는 것이 시민들로
하여금 오히려 문제의 본질에서 멀어지게 만든다. 그에 따르면 어떤 정책을 제안한 사람이 나쁜 동기를 가지고 있다는 주장으로부터 그 정책이 나쁜 것임을
도출하는 추론은 정치적 오류의 하나로서 “나쁜 동기로의 전가(imputation of
bad motive)”이다. 이것이 오류인 이유는 우선 동기라는 것은 인간의 마음 속게 숨겨져 있기 때문에 어떻게 해도 확인할 수가 없고, 제안이 유익하다면 그것의 제안자의 동기를 이유로 들어 거부하는 것이 불합리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정책 제안자의 인격이 나쁘기 때문에 그가 제안한 정책을 거부하는 것도 “나쁜 인격에의 전가(imputation of bad character)”라는 오류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불신을 조장하여 정치적 담론을 숨겨진 것이나 정책 배후에 있는 무엇을 볼 수 있는 이들에게만 가능한 것으로 만드는 것은 민주적 심의에 도움이
되지 않으며, 이를 경계하는 태도는 심의 민주주의의 관점에서 권장할만하다고
165) Gutmann & Thompson, pp.169~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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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만과 톰슨은 주장한다.
셋째, 공리주의의 결과주의적 성격 때문에 장기적 효과에 민감하고 이는 도덕적 갈등에 대해 더 광범위한 관점을 제공할 수 있다. 그래서 공리주의에 입각하여 정책을 만드는 이들은 현재 논의에 참여하지 못하는 이들의 도덕적 요구도 고려해야한다. 가령 어떤 정책 때문에 병에 걸리게 되는 이들이 있다면
지금은 그러한 사실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혹은 아직 태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러한 정책에 반대할 수 없으나 공리주의는 이들도 고려 대상에 포함해야하는
것이다.
하지만 언급된 공리주의의 장점은 공리주의가 심의를 이끄는 주된 원리로
채택되어야할 근거라기보다는 공리주의자들이 심의에 참여함으로써 정치과정으로서의 심의에 기여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줄 뿐이다. 사실은 이러한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공리주의가 심의를 주도하는 공식적 토대가 될 수 없는 이유들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 이유들은 심의 정치의 과정을 규제하는 것으로 굿만과
톰슨이 제시한 세 가지 원칙과 공리주의가 충돌한다는 사실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이들이 말하는 세 가지 원칙이란 상호성(reciprocity), 공지성(publicity),
그리고 설명의 책임(accountability)을 일컫는데, 각각은 심의에서 제시되어야할 논거의 종류, 논거가 제시되는 논의의 장(forum), 논거를 교환하는 행위자들에 대해 규정하고 있다.166) 이 중 상호성은 가장 주요한 원칙으로서 시민들과 관료들이 공공 정책을 정당화할 때 그 정책에 의해 구속받는 모든 이들이
수용할 수 있는 근거들을 제시할 것을 요구한다. 공지성의 원칙은 시민들과 관료들이 정치적 행위들을 정당화하기 위해 제시하는 근거들과 그 근거들을 평가하는 데에 필요한 정보들은 공적으로 개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책임성은 심의의 장에서 각자는 다른 모두에게 자신이 지지하는 바에 대한 설명의 책임을 져야한다는 원칙이다.
우선 굿만과 톰슨에 따르면, 공리주의는 설명의 책임에 대해서 제한을 가하는 문제를 안고 있다.167) 비록 관료들에게 모든 시민들이 정보가 숙지된 상태에서 형성된 선호를 심각하게 고려할 것을 권장하지만 민주적 과정에서 시민들이 도덕적 갈등을 해결하는 데에 오직 공리주의적 방법을 사용하도록 해야만
166) Gutmann & Thompson 1996, p.52
167) Gutmann & Thompson 1996, pp.173~1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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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기 때문이다. 굿만과 톰슨은 공리주의가 심의적 설명의 책임을 수행함에 있어 두 가지 장애물에 부딪친다고 설명한다. 첫째, 공리주의자들은 정치적 과정에 의해 시민들의 선호가 바뀔 수 있다는 사실을 적절히 고려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공리주의자들은 더 많은 그리고 더 좋은 정보가 시민들의 선호들을 바꿀 수 있고 바꿔야한다는 것을 인정하거나 주장하지만 민주적 심의는
그 이상을 기대한다. 그것은 정치에 참여함으로써 타인의 선호를 이해하게 되고 이전에는 고려하지 않았던 정책의 선택지를 발견하기 위해 타자와 협력하는
것을 배우는 것이다. 심의적 정치 과정은 단지 자신이 원하는 것뿐만 아니라
사회적 견지에서 무엇을 바라는지에 대한 견해를 형성하도록 권장하는 측면에서 사적으로 이루어지는, 정보가 숙지된 정치적 의사결정과 다르다. 반면에 공리주의는 모든 가치들을 개인들의 선호로 대우하지만 사회적 이상들을 발전시키고 표현하지 못하는 시민들을 비판하지 않는다. 둘째, 공리주의는 시민들이
정치적 과정 자체에 대해 견해를 가질 수 있음을 제대로 인정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시민들이 정보가 제공되는 사려 깊은 토의 후에 공리주의적 원칙들이
공공 정책을 만드는 지침으로 사용되면 안 된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고 가정해보자. 여기에 공리주의자 정책 입안자들은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사회의 공리를 최대화하지 않을 것이라는 근거로 그 견해를 무시한다면 공리주의는 보존되지만 민주주의에 대한 충절을 의심받을 것이다. 반대로 그 견해가 대부분의 시민들의 정보가 숙지된 선호를 나타낸다는 근거로 반공리주의적 결론을 수용한다면 민주주의에 대한 충절은 보존하지만 공리주의가 위험에 빠지게 된다. 또한 공리주의적 방법은 공지성의 원칙과도 문제를 일으킨다.168) 만일 공리주의자들이 시민들로 하여금 더 공리주의적인 사고방식을 갖도록 설득시킬 수
없다고 믿게 되면 그들이 결정을 내릴 때 사용하는 방법을 시민들에게 알리지
않거나 공리주의를 정치적 의사 결정의 일반적 방법으로 사용하는 것을 포기해야하는 딜레마에 빠진다. 특히 공리주의를 정책 분석에 유용하게 만드는 요소들 중의 하나, 즉 선택의 모든 결과를 철저하게 조사하는 경향이 정책 입안자와 시민들 사이의 간극을 만드는 위험을 안고 있다. 대표적인 예로 공중은 생명의 가치를 돈으로 환산하는 것에 대해 저항감을 가지고 있는데 이러한 분석168) Gutmann & Thompson 1996, pp.178~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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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말로 결과주의의 관점에서 이루어지는 표준적인 관행이다. 그래서 이러한
작업을 하는 일부 공리주의적 정책 입안자들은 생명에 대한 금전적 계산의 공개를 꺼리게 된다.
마지막으로 모든 이들이 수용할 수 있는 근거들을 제시할 것을 요구하는 상호성의 원칙에 대해 공리주의는 여러 가치들을 효용이라는 하나의 일반적 통화로 번역하고 그것을 최대화할 것을 요구함으로써 긴장을 조성한다. 우선 번역은 두 가지 문제를 드러낸다. 첫째 개인 각각의 선호를 효용으로 번역하는 데에 어려움이 있다. 일단 사람들은 가령 직장, 건강, 가족, 휴식 간에 선택을 할
때 분명한 계산을 하지 않은 상태에서 결정하는 경우가 있다. 이에 대해 공리주의자들은 “노출된 선호”를 통해 한 개인이 어떤 내적인 계산을 하였는지 추론할 수 있다고 대응할 수 있지만 그것이 진정한 선호인지 알 수 없다. 선택에
필요한 정보에 접근하지 못한 상태에서 형성된 것일 수 있으며, 비록 정보가
가용하다 할지라도 어떤 선택에 따르는 위험이 충분히 고려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일반적으로 선택은 그러한 선택이 이루어진 조건들에 대해 말해주는 바가 거의 없기 때문에 누군가의 선호를 추론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게다가
선호로 모든 요구를 환원하는 것에도 문제가 있다. 자유와 같은 기본적인 가치들의 경우 누군가가 선호하지 않을 수 있는 것으로 간주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둘째, 시민들 간에 제기되는 요구들의 상호 비교를 위해 선호를 효용으로
번역할 때도 공리주의는 난관에 부딪친다. 예를 들어 공해를 배출하는 공장을
폐쇄하고 맑은 공기를 얻을 것인지, 아니면 그것을 가동함으로써 고용을 유지할 것인지에 대한 선호를 조사할 때, 한 시민의 선택이 다른 시민의 것만큼의
효용을 창출하는지 어떻게 판단할 수 있을까? 각자의 효용을 비교하려면 효용을 수치화할 수 있다는 기수적 효용 측정을 전제해야 한다. 그리고 기수적 효용을 측정하는 여러 방법들 중에 선택을 해야 하며 이는 최대 효용이나 평균
효용 중에 어느 것을 더 정의로운 것으로 보는가에 부분적으로 의존한다. 이에
대한 해답이 쉽지 않기 때문에 현대 공리주의자들 중, 특히 공공 정책에 관련하는 이들의 대부분은 상호주관적 비교의 문제를 피하려 한다. 이들은 개인의
효용을 각각 개별적으로 고려하는 파레토 우위(Pareto superiority)의 개념을
활용하여 적어도 한 시민의 처지를 나아지게 하고 아무도 처지가 나빠지지 않는다면 제안된 정책은 기존의 정책보다 우위에 있는 것으로 판단한다. 그런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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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처지가 나빠지지 않아야 한다는 조건을 만족시키는 선택지를 찾기는 쉽지 않아서 파레토 기준을 이런 방식으로 사용하는 것은 현재의 상황에 머무르게 할 수 있다. 그래서 이를 피하기 위해 어느 정도 여러 사람들에게 혜택이
돌아갈 수 있으면 불이익을 받는 소수의 이들에 보상을 하는 방법을 쓰기도 한다. 하지만 이 역시 공정한 보상의 수준을 결정하는 문제를 야기한다. 그래서
일부 현대 공리주의자들은 어떤 도덕적 견해도 사람들의 이해관심의 상대적 가치를 평가해야하며 정책 입안자들은 늘 이러한 작업을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오히려 비교를 거부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는 것이다. 적어도 소극적 공리주의의 접근을 취하면 불행을 초래하는 것들을 회피하는 것에 있어서는 개인의 차이가 크지 않으므로 비교 결정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공리주의의
순수성을 훼손한다. 굳이 공리주의가 아니라도 그러한 비교를 한다면 비교가
가능한 경우에 그 공적이 굳이 공리주의에 돌아갈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이렇게 여러 가치들을 효용이라는 하나의 일반적 통화로 번역하는 난점보다는 효용을 최대화할 때 대두되는 문제들이 사실은 우리의 논의와 직접적으로
연관이 있다. 여기서 문제는 공리주의가 최대 효용의 산출 이외에 원칙적으로
다른 도덕적 고려 사항을 추가할 수 없다는 데에 있다. 그리고 설령 다른 도덕적 고려 사항을 추가하더라도 그것을 효용의 최대화에 이바지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면서 다시 공리로 환원한다면, 이러한 환원 자체에 반대하는 의견도 있을 수 있다. 그리고 비록 환원하는 데에 반대 의견이 없어서 공리의 문제로 환원을 하더라도 공리를 계산하기 어려운 상황들에 부딪쳐 문제 해결 능력을 증명할 수 없다. 그래서 다시 모든 이들이 수용할 수 있는 근거들을 제시할 것을
요구하는 상호성의 원칙은 만족되지 않는다. 굿만과 톰슨은 이런 문제들을 구체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여러 가지 예를 제시하고 있는데, 이 중 사회적 책임, 기본적 자유, 기본적 기회와 같은 여러 가치들이 관련되어 있는 사례들을 살펴보자.169) 이러한 가치들은 정책을 선택하는 데에 매우 중요한 도덕적 통찰을
제공하지만 공리주의는 이것들을 공리의 최대화의 원칙으로 흡수하기 어렵다.
우선 첫 번째 예는 생명의 가치를 다루는 정책의 경우로서 여기서는 생명에
값을 매기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구해야할 생명의 숫자를 최대화하는 목표가
169) 이하의 세 가지 사례들은 Gutmann & Thompson 1996, pp.189~194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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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기 객실 화재 방지 0.1
석탄 탄광 전기 용구 사용 9.2
작업장 비소 노출 106.9
작업장 포름알데히드 노출 82,201.8
문제가 된다. 사실상 이러한 목표가 기초하는 단순한 도덕적 원칙을 거부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다른 조건이 같다면 정부는 더 적은 것보다는 더 많은 생명을 구하려고 노력해야한다. 굿만과 톰슨은 다음의 상황을 예시하면서 문제가
그리 단순하지 않음을 지적한다. 먼저 10억 달러의 예산이 건강과 안전을 위한
규제의 새 정책에 가용하게 되었다. 그리고 정책 분석가들은 다음과 같은 분석을 내놓았다. 아래의 숫자들은 각 항목에서 한 사람의 목숨을 구하는 데에 드는 비용이다. (단위는 백만 달러)
이 경우, 우리는 생명의 가치를 계산하는 것을 수용하더라도 반드시 가장 많은
생명을 구하는 목표를 추구하지 않을 수 있다. 생명을 가장 많이 구하는 목표는 모든 생명이 동등한 고려를 받아야 한다는 견해에 기초하며 이는 도덕적으로 요구되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러한 원칙만이 정책 결정을 주도하게 되면 다른 도덕적 고려 사항이 간과될 것이다. 비행기 객실 화재를 방지하는 것은 탄광의 작업 환경을 개선하는 것보다 동일한 인명을 구할 때 비용이 덜 들기 때문에 같은 재화로 더 많은 목숨을 구할 수 있다. 하지만 정부는 사회적으로 더 수혜를 받지 못하고 열악한 상황에 있는 이들에게 특별한 책임이 있다는
근거에서 비록 가장 많은 인명을 구하는 것은 아니지만 다른 교통수단을 사용할 수도 있고 상대적으로 덜 취약한 비행기 승객보다는 탄광의 인부들을 구하는 대안을 선택할 수도 있다. 이러한 사회적 약자에 대한 특별한 배려는 공리주의의 원칙과는 별개이다.
두 번째 예로 다음과 같은 장기 추첨이라는 가상의 정책을 생각해보자. 우선 모든 장기가 안전하게 이식될 수 있는 지점까지 장기 이식의 의술이 발전해서 한 사람에게서 장기를 적출하여 죽어가는 다른 두 명의 환자에게 나누어 주면 이들 두 사람의 생명을 구할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자연사나 자발적 기증으로 더 이상 장기를 구할 수 없게 되자 정부는 컴퓨터로 하여금 모든 건강한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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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들 가운데 적당한 사람을 무작위로 지명하도록 하여 그 사람이 자신을 장기들을 내어주어서 여러 환자들의 생명을 구하도록 하는 정책을 실시한다는 이야기이다. 비록 기괴하기는 하지만 최대한 인명을 구하고자 실제로 이러한 제비뽑기를 구상한 공리주의자가 있었으나, 다른 많은 공리주의자들은 공리주의적
이유로 이러한 정책에 반대하였다. 심리적 불안, 부패의 가능성, 관리의 어려움, 도덕적 해이 등이 문제가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근거들도 나름대로 강력한
이유가 될 수 있지만 시민들은 이와는 다른 근거를 들어 그러한 추첨에 반대할
것이라고 구트만과 톰슨은 지적한다. 가능한 한 많은 생명을 구해야한다고 믿는 시민들조차 정부가 그러한 목적을 위해 장기 추첨을 강제하는 것에 반대할
이유는 그것이 기본적 자유(basic liberty)에 대한 침해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자유의 경계는 명료하지 않지만 이러한 강요된 희생을 포함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공리주의는 이러한 종류의 고려사항을 포함하지 않기 때문에 상호성의 원칙의 요구에 부응하지 못한다.
또한 공리주의의 최대화의 원리는 분배의 문제에 대해서 침묵하기 때문에
또 다른 근본적 가치인, 기본적 기회(basic opportunity)를 간과하는 단점을 가지고 있다. 다음의 예를 살펴보자. 1970년대 초반 미국 의회는 일련의 환경 보호 법률들을 통과시켰고 1970년 12월에 설립된 환경보호국(the Environmental
Protection Agency)의 위상은 더욱 강화되기에 이르렀다. 한편 미국에서 유일하게 산업 비소를 생산하는 기업인 미국제련회사 (American Smelting and
Refining Company)는 워싱턴 주의 타코마(Tacoma)라는 중소 도시에 인접한
작은 마을 러스톤(Ruston)에서 공장을 가동하였는데, 그 공장은 당시 중서부의
공해발생의 진원지로 악명이 높았다. 공기 중으로 방출된 비소는 적은 양의 증가로도 암 발생률을 높인다고 알려졌고 환경보호국의 전문가들은 제련공장이
방출하는 비소의 양으로 인해 반경 12 마일 이내 지역에서 연간 적어도 네 명이 암으로 사망한다고 분석하였다. 그래서 환경보호국은 기존보다 더 엄격한
규제를 고려하게 되었는데, 새로운 기준의 도입은 더 나은 환경을 보장하지만
기업의 이윤추구에 방해가 되어 최악의 경우 공장이 문을 닫고 그곳에서 일하던 러스톤의 주민들이 대량 실직할 우려가 있었다. 분석가들은 엄격한 기준이
향후 10년간 총 3백 5십만 달러의 효용을 창출하는 반면 이보다 느슨한 기준은 3백만 달러의 효용의 가치가 있다고 보았다. 전체효용은 엄격한 기준을 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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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득 집단 느슨한 기준 엄격한 기준
중상층(바숀 섬) +1.0 +4.5
중류층(타코마) +1.5 +2.0
저소득층(노동자들) +0.5 -3.0
계 +3.0 +3.5
용할 때 더 높은 것이다.
그런데 위의 도표에서 알 수 있듯이 엄격한 기준의 가장 큰 수혜자는 공장
폐쇄로 인한 불이익이 가장 적게 돌아가는 러스톤 근처에 위치한 바숀 섬(Vashon Island)의 비교적 부유한 주민이며 가장 불이익을 당하는 이들은 고용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 공장 노동자들이다. 그래서 효용의 분배 측면에서 보면 비교적 느슨한 기준을 유지하는 것이 더 공정하다. 엄격한 기준 때문에 공장의 노동자들이 실직을 하게 되어 결국 미래의 기본적 기회를 잃게 되는 것을
우려한다면 공리주의자는 효용의 계산에 이것을 반영할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이미 계산에 포함된 전체 효용과 비교하여 평등주의적인 배분에 얼마나 더 비중을 두어야 하는지의 문제가 여전히 남아있다. 이렇게 공리의 최대화와 효용을 공정하게 배분하는 데에는 갈등이 여전히 존재하며 공리주의는 그러한 갈등을 해결할 명확한 방법을 제공하지 않는다. 또한 단순히 평등주의적
선호를 계산에 추가하는 전략은 공정한 분배와 동등한 기회를 중시하는 시민들의 관심에 부합하지 못한다. 시민들은 그들의 관심이 여타의 선호와는 같은 도덕적 지위를 갖는다고 생각지 않는다. 그러한 관심은 어떤 선호 취합의 결과에도 우선하는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믿음에 기초하기 때문이다. 이 믿음은 두
가지 방식으로 우선한다. 첫째 그것은 어떤 분배 방식은 복지를 최대화하더라도 배제될 수 있다는 의미에서, 둘째 최대화 계산 자체는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모종의 충절을 전제한다는 의미에서 최대화에 우선한다. 일부 공리주의자들이 명시적으로 이러한 우선성을 인정한다는 것은 상호적 관점에서 정합적이고
필요한 것이지만 그렇게 인정함으로써 공리주의는 단일한 포괄적 목적으로 도덕적 갈등을 다루겠다는 약속은 지키지 못하게 되는 셈이다. 만일 정책 입안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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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이 공리주의를 자신의 절대적인 원칙으로 사용한다면 그들은 시민들이 제기하는 일부 정당한 주장들, 특히 기본적 자유와 기회의 가치를 표현하는 요구들의 의미를 무시하거나 왜곡할 수 있다고 굿만과 톰슨은 비판한다.
굿만과 톰슨의 논의를 정리하면, 공리주의는 적어도 심의 민주주의의 이념
하에서는 다른 모든 도덕적 접근에 비해 우선시될 수 없다. 도덕적 문제의 불일치 해결의 측면에서 다양한 도덕적 고려 사항을 온전히 포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굿만과 톰슨은 공적 논증에서 시민들은 공리주의적 고려사항에 호소할
수 있지만 시민들은 또한 다른 종류의 도덕적 고려사항들에도 호소할 수 있기
때문에 특정한 상황에서 어떤 종류의 것이 더 지배적이어야 하는지에 대해 논쟁할 것으로 내다본다. 그리고 그것은 계속되는 논쟁이며 그 안에서 공리주의는 여러 접근방식 중에 하나일 뿐이라고 설명한다. 만일 공리주의자들이 심의
민주주의자로 남으려면 심의가 공리주의를 제자리에 놓도록 허용해야하고, 시민들은 공리주의와 공리주의적 정책 분석이 심의 민주주의의 통제 하에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굿만과 톰슨의 결론을 수용하기 전에 분명히 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공리주의와 의무론이 현실을 파악하거나 사태에 접근하는 방식에 간과할
수 없는 차이가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가령 유명한 광차문제(鑛車問題, The Trolley Problem)의 예를 들어 보자. 광차가 운행 중 이상이 생겨 제어
불능 상태가 되었는데, 그대로 진행한다면 선로에 묶여 있는 5명이 광차에 치여 죽게 된다. 그런데 바로 내가 전철기(轉轍機) 옆에 서있고 그것을 돌리면
광차를 다른 선로로 보냄으로써 5명을 살릴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그 다른
선로에 1명이 묶여있어서 그 사람이 죽게 된다는 것이다. 이때 도덕적 관점에서 나는 전철기를 돌려야 하는가? 이 문제는 흔히 5명을 살리기 위해 1명을
죽여도 되는가의 문제로 인식되고 있으며 공리주의적인 관점에서는 1명을 희생해서라도 5명을 구할 것을 주장한다. 그리고 종종 공리주의자들은 이러한 결정의 합당성을 내세워 공리주의의 우월성을 증명한 것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의무론자들 중에서도 이러한 급박하고 피할 수 없는 상황에서 공리주의적 결론에 수긍하는 이들이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공리주의자들이 이러한 가상의 상황과 현실 간에 유비관계가 성립된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음을 드러낼 뿐이다. 즉, 실제로 어떤 대안을 택해도 누군가는 희생되기 마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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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며, 그 희생을 최소화하는 것이 바로 공리주의 원칙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이렇게 불가피한 비극적 선택을 강요하는 사고실험과 같지 않다. 다행스럽게도 우리가 심의를 통해서 해결하고자 하는 정책적 문제들의 대부분은
어느 정도 숙고할 시간을 허락한다. 그래서 공리주의자들처럼 손쉽게 생각할
수 있는 몇 가지 대안들을 나열하고 그것들의 득실을 계산하고 그 중에 비교적
적은 희생을 요구하는 대안을 선택하는 대신에, 누구도 억울하게 희생되지 않는 숨겨진 대안이 존재할 수 있으며 그것을 반드시 찾아야만 한다는 도덕적 의무감으로 정치적 논의를 진행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일은 실제로 심의를 통해서 일어났다.170) 환경보호국의 행정관인 러켈스하우스(William Ruckelshaus)는 앞서 소개한 미국제련회사와 타코마, 러스톤, 바숀섬의 주민들의 이해관심이 얽혀있는 문제에 대해 공리주의적
분석과 더불어 제시된 대안들 중에서 단순히 하나를 택하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제시된 두 가지 제안은 모두 누군가는 반드시 해악을 당하는 불만족스러운 것이었기 때문이다.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면 대기 환경은 좋아지지만 제련회사가 문을 닫아 대규모 실직 사태가 벌어질 것이고, 느슨한 기준을 적용하면 실직 사태는 일어나지 않지만 대기 환경이 계속 나빠져
암 발생률을 높일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대신 인근의 모든 주민들이 토의를 통해서 문제를 해결하도록 유도하였다. 그러자 예상치 못했던 새로운 의견들이 나타났다. 주민들은 제련회사의 근로자들에게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주고 공해를 발생시키지 않는 새로운 산업을 유치하는 논의를 시작했던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제련회사가 정작 환경 규제 때문이 아니라 국제적인 경제적 흐름의 결과로 문을 닫았을 때, 타코마는 이미 이러한 목표들을 추구하여 지역경제의 원천을 다양화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주민들이 취한 접근은 환경보호국이
공리주의적 분석이 제시한 두 대안 중에서 엄격한 기준을 도입하는 대안을 택한 것과 일견 동일한 것으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그러한 대안이 초래할 수
있는 실직 사태에 대한 대책의 유무를 따져보면 양자가 서로 다름을 알 수 있다.
방금 살펴본 예에서도 나타나듯이, 공리주의의 접근이 광차 사고실험과 같170) 이하의 사례는 Gutmann & Thompson 1996, p.197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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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한계 상황에서 해악이 더 적은 대안을 택해 문제를 해결하라는 처방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은 그것이 현실에서도 사태를 파악하거나 문제에 접근할 때 최선의 도덕적 처방을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현실에서는 오히려 누구도 비소에 노출되거나 대책 없이 갑자기 실직하는 해악을 당해서는 안 되며 모두가 예외 없이 존중되어야 한다는 불편부당한 의무론적 관점을 고수하고 그것을 관철시킬 수 있는 방안을 창의적으로 모색하는 것이 더 나은 처방이며 협의의 심의 이념이 함축하는 바이다. 그리고 이렇게 더 적은 수의 사람이 해악을
당하는 대안을 찾는 접근과 아무도 해악을 당하지 않는 대안을 찾는 접근이 서로 다른 것이라면, 공리주의가 심의 민주주의에 기여할 수 있는 부분은 굿만과
톰슨이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적을 수 있다.
4.2.2. 옳음의 우선성과 공동체주의
앞서 우리는 칸트적 법칙론에 연원을 둔 옳음의 우선성의 테제를 바탕으로
도덕 이론으로서의 공리주의의 한계를 지적하였던 롤즈와 하버마스의 논의와, 공리주의 한계가 심의 민주주의와 관련하여 구체적으로 어떻게 드러나고 있는지를 보여준 굿만과 톰슨의 논의를 살펴보았다. 그것은 옳음의 우선성을 앞세운 심의 민주주의자들이 좋음의 극대화를 옳음으로 규정하는 공리주의에 대해
적극적인 비판을 펼쳤던 예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와 사뭇 대조적으로 옳음의 우선성을 전제하는 이론가들이 오히려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바로 공동체주의라고 불리는 일군의 철학자들이 좋음에 대한 옳음의 우선성의 두
번째 의미, 즉 좋음에 대한 국가의 중립성을 고수하는 “의무론적 자유주의” 입장에 대해 강력히 이의를 제기했던 것이다.
의무론적 자유주의가 공적으로 좋음에 대한 중립성을 고수하는 이유 역시
칸트의 윤리학에서 큰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칸트가 보기에 모든 이들이 따라야할 옳음을 구현한 도덕률은 가장 굳건하고 절대적인 토대 위에 기초해야
한다. 그런데 좋음과 관련된 것들, 즉 사람들이 느끼는 욕구, 가지고 있는 선호, 추구하는 목적은 변화할 수 있고 서로 다른 까닭에 행위의 지침이 될 만큼
보편성을 지니지 못한다. 심지어는 모든 이들이 추구하는 행복도 막상 그것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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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를 내릴 때에는 서로 생각이 다르다는 것이 드러나기 마련이다. 각자가 그의 행복을 어디에 두어야 할 것인가는 각자의 쾌와 불쾌에 대한 특수한 감정에 달려 있으며, 동일한 주관에 있어서도 이 감정의 변화에 따른 필요의 상이함에 달려 있다. (중략) 이것은 서로 다른 주관들에 있어서 아주 서로 다를 수 있고, 다를 수밖에 없으며, 그러니까 결코 어떤 법칙을 제공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171)
이렇게 좋음의 문제는 각 개인이 어떤 것을 욕망하거나 열망하는 존재로서 묻는 물음이며 개인의 특수성과 대상의 우연성이 많이 개입되어 있다. 반면에 옳음의 문제는 타자와 더불어 살아가는 존재로서 고민하는 물음이다. 이러한 논의에서 중요한 개념인 권리는 “전적으로 인간들의 외적 관계와 관련된 자유의
개념에서 파생되는 것이며, 모든 인간들이 본래 갖고 있는 목적이나 그 목적을
달성해주는 수단들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고 칸트는 설명한다.172) 옳음과 좋음의 분리는 주체와 주체가 추구하는 가치의 분리를 함축한다. 주체는 주체이기
때문에 존중을 받으며 특별히 어떤 가치를 추구하기 때문에 존중받는 것은 아니다. 옳음의 문제인 주체들 간의 관계는 보편적 도덕률의 지배를 받지만 좋음의 문제인 주체들의 목적의 추구에 있어서는 그렇지 않다.
이러한 칸트의 사상은 자유주의자들에게 계승되었고 그것의 철학적 배경과
정치적 함축은 공동체주의자들과 충돌하게 된다. 자유주의자들은 옳음의 문제가 특정한 좋음에 대한 견해에 의해 정당화되는 것이 아니라는 의무론적인 도덕 철학적 입장을 견지하고, 옳음에 대한 문제만이 공적이고 정치적인 논의와
결정의 대상이 된다는 정치 철학적 입장을 고수한다. 반면에 공동체주의자들은
정의와 권리는 좋음에 대한 해명에 의해 정당화되어야 한다는 목적론적인 도덕
철학을 펼치고, 정의나 권리의 문제뿐만 아니라 좋은 삶과 인간의 최고선에 대한 논의도 공적이고 정치적인 논의에 포함될 수 있다는 정치 철학적 입장을 취한다. 이제 자유주의에 대해 제기한 공동체주의자들의 비판을 도덕 철학적 차171) 칸트(I. Kant), 백종현 역, 실청이성비판, 아카넷, p.75
172) Kant, “On the Common Saying: 'This May Be True in Theory, But It Does Not Apply
in Practice'", in Hans Reiss, ed. Kant's Political Writings, 1793;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70. p. 73, 샌델(M. Sandel), 안진환, 이수경 역 왜 도덕인가, 한국경제신문 p.180에서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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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과 정치 철학적 차원으로 나누어 차례로 살펴보되, 정치 철학적 차원의 논의에 좀 더 집중하도록 하겠다. 공동체주의자 매킨타이어(Alasdair MacIntyre)는 목적론의 견지에서 의무론의 문제를 지적하는 논의를 진행함으로써 매우 원론적으로 접근한다. 좋음에서
옳음이 도출되고 옳음은 좋음에 의해 정당화될 수 있다는 것은, 사실(is)로부터
당위(ought)가 도출됨을 의미하는 것으로 풀이될 수 있다. 매킨타이어는 그의
저서 덕의 상실(After Virtue)에서 바로 사실로부터 당위 도출의 가능성을
환기시킨다. 그는 우리가 어떻게 행위 해야 하는가의 문제는 우리가 어떤 존재인가에 대한 숙고를 통해 해결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173) 가령 시계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우선 시계의 목적 내지 기능은 시간을 알려주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시계의 목적 내지 기능에 대한 사실적 전제에서 어떤 시계가 부정확하고 불규칙적이라면 “나쁜 시계이다”라는 가치 평가적 결론이 나올 수 있다. 이를 조금 변형시키면 시계는 시간을 알려주는 존재라는 ‘사실’에서 시계는 시간을 정확히 알려주어야 한다는 ‘당위’가 도출되는 것이다. 농부의 예도 마찬가지다. 농부가 특별히 수행할 것으로 기대되는 목적과 기능에 대한 사실 판단으로부터 농부가 어떻게 행위 해야 하는가의 당위 판단이 나올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비교적 단순한 목적과 기능에 입각하여 사물이나 사람들 볼
때, 그러한 추론이 가능하다고 인정하더라도, 이러한 추론이 어떻게 복잡한 인간이라는 대상에 적용될 수 있을까? 매킨타이어는 그러한 시도를 했던 고전적
전통이 존재했었음을 보여줌으로써 대답을 대신하는 듯하다. 고전적 전통에서는 ‘인간’과 ‘좋은 인간’의 관계가 ‘농부’와 ‘좋은 농부’의 관계와 같다고 매킨타이어는 설명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과 ‘잘 사는 것’의 관계가 ‘하프 연주자’와 ‘하프를 잘 연주하는 것’의 관계와 유비적이라는 통찰에서 자신의 윤리적
탐구를 출발했던 것이다. 매킨타이어에 따르면, ‘인간’을 기능적 개념으로 사용한 것은 아리스토텔레스 이전부터 있었던 일이며 그의 형이상학적 생물학에서
처음 유래하는 것은 아니다. 그 전통에서는 인간으로 존재하는 것이 일련의 역할, 예컨대 가족 구성원, 시민, 신앙인과 같은 고유한 목적과 기능을 충족시키는 것이다. 인간을 모든 역할로부터 분리된, 그것들에 선행하는 개인으로 생각173) 이하의 내용은 Alasdair MacIntyre, After Virtue, University of Nortre Dame Press,
1981 (번역본 덕의 상실 pp.96~100)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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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때만 기능적 개념은 사용되지 않는다. 사실로부터 당위가 도출되지 않는다는 원리를 수용하는 것은 이러한 차원의 논의를 배제하고 “메마른 도덕 어휘‘만 남기는 것이라고 매킨타이어는 개탄한다.
그러나 사실상 어떤 특정한 역할에 대해 그것에 해당하는 선을 말하는 것은
자유주의자들도 반대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이 조심스러워하는 것은 더욱 보편적인 문제, 즉 인간으로서의 좋은 삶이나 최고의 선에 대해서 논하는 것이다. 그리고 공동체주의자들이 좋은 삶이나 최고의 선에 대해서 논하게 되면 상당한
형이상학적 부담을 안게 되는 것을 피할 수 없음은 분명하다. 인간의 본성에
대한 형이상학, 가령 정확히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적 생물학이 아니더라도 그것에 상응하는 형이상학을 전제해야할 것이다.174) 이는 칸트의 의무론이
예지계에 속하는 초월적 주체라는 개념을 도입하기 때문에 떠안게 되는 이론적
부담보다 더 과중하다고 볼 수 있다. 칸트의 경우, 그가 말하는 초월적 주체는
현상적 자아로부터 독립된 형이상학적 실체라기보다는 오히려 충동이나 자기
이익만의 추구에서 벗어나 보편적인 관점에서 사유하는 순간의 주체를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에 불과하다고 해석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175) 따라서 반완전설적 옳음의 우선성 테제를 도덕 철학적 차원에서 논박하려던 매킨타이어의 시도는 그리 성공적이지 못한 것으로 결론을 내려도 될 듯하다. 이제 우리 논의의 주요 고찰 대상인 샌델로 넘어가보자. 샌델은 공동체주의자로 불리는 이들 중에서도 일반 시민을 대상으로 하는 철학적 저술뿐만 아니라 강연을 통해서도 민주적 토론의 중요성을 널리 알리려 노력한다는 측면에서
독보적이다. 이런 측면에서 그는 공동체주의와 관련된 심의 민주주의 논의에서
집중적인 조명을 받을만하다. 샌델은 정의나 권리의 문제뿐만 아니라 좋은 삶과 인간의 최고선에 대한 논의도 공적인 토론과 결정의 대상에 포함되어야 한다는 정치 철학적 입장을 고수함으로써 “의무론적 자유주의”와는 다른 노선을
걷고 있다. 그는 정의와 선(좋음)을 연결하는 자신의 방식은 정의의 원칙의 도덕적 힘이 특정 공동체 혹은 전통이 공유하는 가치에서 나온다는 주장과 무관174) 매킨타이어는 실제로 After Virtue 제 3판의 서문에서 자신이 모종의 형이상학을 전제하고 있음을 비로소 시인하고 있다. 175) 이런 종류의 비형이상학적 칸트 해석은 Henry E. Allison, Kant's Theory of Freedom,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0. 참조. 하버마스 역시 칸트를 최초의 postmetaphysical
철학자로 간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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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다는 것을 강조한다.176) 특정 공동체의 전통이 어떤 관행을 지배한다는 사실만으로는 그 관행을 정의롭게 만들기에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그의
통찰은 의무론적 자유주의자들도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다.) 샌델은 오히려 특정 공동체를 뛰어넘는 “좋은 삶과 인간의 최고 목적”의 개념에 의존한다. 그가
보기에 정의의 원칙은 좋은 삶의 본성 및 인간의 최고 목적에 대한 고찰이 선행된 이후에 그러한 선과 목적의 본래적 가치를 바탕으로 할 때 비로소 정당화될 수 있다. 바꿔 말해 어떤 권리를 인정하려면 그 권리가 인간의 선을 고양시킬 수 있음을 보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샌델은 이러한 주장에는 공동체주의라기보다는 완전설이라는 명칭이 더 적합하다고 보았다. 그가 완전설의 옹호자로서 의무론적 자유주의에 대해 갖는 불만은 그들이 정의의 문제만을 공적
논의의 대상으로 삼고 다른 도덕적 문제는 정치적 논의에서 제외시키려 한다는
사실에 있다.
그런데 샌델의 논의를 고찰함에 있어서 문제는 그의 완전설적 입장이 주로
롤즈의 이론에 대한 비판을 통해 전개되었다는 점이다. 사실상 롤즈의 이론은
의무론적 자유주의의 한 형태에 불과하기 때문에 설령 그의 이론에 문제가 발견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의무론적인 정치 철학적 접근 전체의 취약점은 아닐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샌델의 롤즈 비판이 어느 정도로 타당한지 뿐만 아니라 그의 비판이 정확히 지적한 취약점이 롤즈의 이론에만 해당하는지 아니면
반완전설의 경향을 띠고 있는 심의 민주주의 이론 전반이 공유하는 것인지를
구분하는 것이 중요하다.
반완전설적인 옳음의 우선성을 옹호함에 있어서 롤즈는 전후기 저작에서 상이한 접근을 취하고 있다. 전기 저작인 정의론에서 롤즈는 옳음에 대한 논의를 칸트의 윤리학의 전통 내에서 정초하려하였던 반면에, 후기 저작인 정치적
자유주의에서는 현대 사회의 다원성에 좀 더 적합하도록 옳음에 대한 논의가
다양한 포괄적 교설들의 중첩적 합의에 의해 정당화되는 것으로 묘사하였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정치적 논의와 포괄적인 도덕적, 철학적, 종교적 논의를 분리하는 접근을 취하였다. 내 생각에는 롤즈의 전기 접근에 대한 샌델의 비판은
칸트에게서 영감을 받아 반완전설을 고수하는 의무론적 자유주의 전반에 대한
176) Sandel 1994, p.17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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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으로 확대 적용될 수 있기 때문에, 그것이 타당하다면 반완전설 자체에 타격을 줄 수 있지만, 롤즈의 후기 접근에 대한 샌델의 비판은 이렇게 확대 적용될
수 없는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는 비판의 여지가 있는 상당 부분이 롤즈 특유의 접근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롤즈의 후기 접근에 대한 샌델의 비판이 어떤 부분에서 타당하더라도 그것은 반완전설 전체를 흔들 수는 없을 것으로 본다.
샌델에 따르면, 롤즈의 전기 저작의 문제는 칸트에서 도덕적 주체가 경향성과 욕구들로부터 거리를 취하고 오히려 자율적으로 그것들을 반성하고 규율했던 것처럼 롤즈의 자아도 다양한 가치와 목적들로부터 독립되어 그것들을 스스로 선택한다는 데에 있다. 이는 자아의 자발주의적(voluntarist) 개념을 전제한
것으로서, 자발적인 자아는 공리주의에서 말하는 욕구의 총합이나 아리스토텔레스가 생각하는 자연이 부여한 목적을 실현함으로써 완전해지는 인간과는 달리, 다양한 좋은 것들, 즉 목적들을 (도덕법이 허용하는 한도 내에서) 취사선택할 수 있는 자유로운 존재이다. 그리고 우리가 이러한 능력을 존중한다면, 여러
목적들에 대해 중립적인 권리 체계를 확립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목적에 대한 자아의 우선성이 좋음에 대한 옳음의 우선성을 지지하고 반완전설적
입장을 옹호하는 토대가 된다. 샌델은 이러한 자아관의 취약성을 지적함으로써
옳음의 우선성의 토대를 약화시킬 수 있다고 보고, 목적을 스스로 선택하는 자아관은 결국 자아를 도덕적 의무로부터도 벗어나도록 한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인정하는 도덕적·정치적 의무들은 선택과는 무관한 이유들 때문에
준수해야하는 것들로서 개인적인 이유로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이다.177)
이러한 샌델의 주장에서 반완전설이 목적을 스스로 선택하는 자아관을 전제하고 있다는 분석은 정확한 듯하지만, 이로부터 그러한 자아관이 자아를 도덕적 의무로부터 벗어나도록 만든다는 그의 결론이 반드시 도출되는 것은 아니다. 그가 여기서 언급하는 도덕적 의무는 개인이 크고 작은 특정 공동체들에
대해 지고 있는 도덕적 의무를 의미할 터인데, 가령 내가 어떤 가정의 일원이며 어떤 국가의 국민이라는 정체성으로부터 비롯되는 의무들이다. 하지만 목적을 스스로 선택한다는 것과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 대한 도덕적 의무를 수행하177) Sandel 1994, pp.1768~17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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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것은 극단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양립가능하다. 기본적으로 여기서 말하는
목적의 추구는 좋음의 영역에 속하지만, 공동체에 대한 의무는 대개 보은의 의무의 성격을 띠는 것으로 옳음의 영역에 속하므로 문제의 차원이 다르기 때문이다. 예컨대 어떤 이가 평생 철학을 탐구하기로 선택한 것과 공동체를 수호하는 의무를 수행하는 것은 양립가능하다. 후자의 의무가 중요하기 때문에 철학에 대한 열망을 접고 반드시 직업 군인이 될 필요는 없다. 일정 시기에 자신의
학업 일정과 조정 가능한 범위 내에서 국방의 의무를 수행하면 된다. 물론 특정한 종교를 믿음으로써 군사훈련을 거부하는 극단적인 경우는 개인적 목적의
추구와 공동체에 대한 도덕적 의무가 일견 양립불가능해 보인다. 하지만 심지어는 이 경우에도 다른 방식으로 조국에 봉사할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근거에서 샌델이 목적을 선택하는 자아와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지는 도덕적 의무를 대립시킨 발상은 다소 과장되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다양한 가치와 목적들로부터 독립되어 그것들을 스스로 선택하는 자아관을 전제하는 반완전설 전체에 대한 샌델의 비판은 타당하지 않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이제 롤즈의 후기 저작인 정치적 자유주의에 대한 샌델의 비판으로 넘어가보자. 여기서 문제는 주로 롤즈가 좋음에 대한 중립성을 지지하기 위해 새롭게 제시된 근거로 현대 민주사회의 시민들은 좋음에 대해 다양한 견해를 가지고 공존하며 이들이 도덕적, 종교적, 철학적으로 동일한 신념을 공유하게 될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자유주의의 논거를 철학적, 형이상학적인 것이 아니라 정치적인 것으로 규정한 것에서 발단되었다. 모든 것을 고려할 때, 어느 도덕 판단이 참인가는 정치적 자유주의의 문제가 아니다. (중략) 포괄적 교설들 간에 불편부당함을 유지하려면 이 교설들을 갈라놓는 도덕적 주제를 구체적으로 거론하지 않아야 한다.178)
이러한 접근을 취함으로써 롤즈는 적어도 세 종류의 반박에 노출된다고 샌델은
주장한다.179) 첫째, 롤즈의 정치적 자유주의는 포괄적인 도덕적, 종교적 교설들
178) Rawls 1993, pp. xx~xxviii
179) Sandel 1994, p.17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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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에 이루어지는 진리주장의 경합에 관여하지 않는 것으로 되어있지만 사실상
임신중절이나 노예제와 같은 중대한 도덕적 물음에 괄호를 치는 것이 합당한지
여부 자체가 경합하는 도덕적 또는 종교적 교설들 중에 어느 것이 참인지 여부에 달려 있다. 둘째, “합당한 다원주의 사실”180)에도 불구하고 반성적 평형의
방법, 즉 숙고된 판단과 원칙 간의 상호 조정 과정을 통해 정의의 원칙이 추론된다면 같은 방법으로 선관(좋음에 대한 견해)이 추론되지 말란 법은 없다. 셋째, 롤즈의 "공적 이성의 이상(the ideal of public reason)"181)의 제약으로 인해 두 가지 손실이 발생한다. 하나는 도덕적 손실로서, 이러한 손실은 공적 이성으로 인해 배제한 도덕적, 종교적 교설의 중요성과 타당성에 비례한다. 또 다른 손실은 정치적인 것으로서, 정치가 도덕적, 종교적 문제에 대해 함구하게 될수록 이러한 문제에 대한 논의의 열망은 다른 출구를 통해 독단적이고 광적인
도덕주의의 형태로 분출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반론 중에서 첫째와 셋째는 롤즈의 고유한 접근에 대한 비판이기 때문에 설사 샌델의 반론이 타당하더라도 롤즈와 같은 접근을 취하지 않는 반완전설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첫째 반박에서 샌델이 주장한 것처럼, 임신중절 문제의 경우, 만일 가톨릭에서 주장하는 바와 같이 인간의 삶이 착상부터
시작된다고 보는 것이 맞는다면, 정치적으로 인간 생명의 시작에 대한 도덕적
또는 신학적 문제를 고려하지 않은 것은 합당하지 않게 된다. 반대로 태아와
신생아와는 도덕적 지위가 다르다고 확신할수록 태아의 도덕적 지위에 대한 논쟁을 배재하는 정치적 정의관이 쉽게 지지된다는 것에 우리는 수긍할 수 있다. 또한 롤즈가 제시한 정치적 정의관에 호소하는 것만으로는 중대한 도덕적 문180) 합당한 다원주의의 사실이란 현대 민주주의 사회는 서로 양립가능하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합당한 포괄적인 종교, 철학, 도덕적 교설들이 존재하며 이러한 교설들 중에 어느
것도 시민들 전부로부터 지지를 얻지 못할 것이라는 관측을 일컫는다. 그리고 합당한 교설들
사이의 이견은 일시적으로 존재하는 조건이 아니라 자유로운 제도 하에서라면 늘 있을 수밖에 없는 “인간 이성 활동의 정상적인 결과”로 간주된다. 181) 공적 이성의 이상이라는 것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지적, 도덕적 능력으로서의 이성이
시민으로서 공동선과 근본적 정의의 문제들을 주제로 삼아 공개적으로 검토할 때 사회의 정치적 정의관에 의해 표현된 이상과 원칙에 입각하여 발휘되어야 함을 뜻한다. (Rawls 1993,
p.213) 이를 바꿔 표현하면, 정치적 담론은 모든 시민들이 수용할 것으로 기대되는 ‘정치적
가치’의 견지에서만 이루어져야 하며, (포괄적인 도덕적, 종교적 교설들은 모든 시민들에 의해 공유되지 않으므로) 이러한 교설들에서 나온 개념들을 언급하거나 그것들에 호소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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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들을 해결하기에 부족하다는 점도 어느 정도 수용가능하다. 시겔(Andrew
W. Siegel)의 분석에 따르면182), 정치적 정의관만으로도 노예제를 반대하는 논거는 충분히 마련된다. 일단 “공정으로서의 정의관에 대한 정치적 설명 내에서
도덕적 행위자로서의 온전한 능력을 가진 도덕적 인격체로서의 인간관은 그러한 능력을 갖춘 시민관으로 전환된다.”183) 시민들은 선관(좋음에 대한 견해)을
형성하고 수정하고 추구할 수 있는 능력과 정의감에서 행위 할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한다는 의미에서 자유롭고, 이러한 능력들을 사회에서 온전히 협력하는 구성원이 되기 위해 요구되는 최소한도로 갖추고 있는 만큼 평등하다. 그런데 노예제는 개인의 정치적 지위를 인정하지 않으며 시민들 간의 사회적 협력의 공정한 조건을 관장하는 원칙들을 위반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임신중절의 문제에서는 상황이 달라진다. 시겔은 롤즈가 임신중절에 대한 논의에서 세 가지 중요한 정치적인 가치들, 즉 인간 생명에 대한 존중, 오랜 기간에 걸친 정치 사회의
재생산, 동등한 시민으로서의 여성의 평등 중에서 어느 것이 우선하는지를 여타 조건에 따라 판단할 수 있다고 보았다고 설명한다. 가령 임신 기간 중 초기
삼분의 일에 해당하는 시기에는 여성의 평등이라는 정치적 가치가 우선하므로
임신중절을 할 것인지 여부를 결정할 수 있는 권리를 여성에게 부여할 수 있다는 것이다.184) 그런데 시겔은 이러한 롤즈의 설명에 표면상으로는 드러나지 않지만 태아의 도덕적 지위에 대한 가정이 암묵적으로 내재하고 있다고 분석한다. 즉, 롤즈는 적어도 초기 태아의 도덕적 지위를 성인과 동등하게 간주하지
않았기 때문에 초기 임신중절을 허용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와 달리 임신
기간 삼분의 일 이전의 태아를 중절하는 것이 무고한 사람을 죽이는 것과 도덕적으로 동등하다고 보는 사람들은 롤즈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고 태아의 생명이
여성에게 낙태권을 부여함으로써 증진되는 여성의 평등의 가치를 능가한다고
생각할 것이다.185) 182) Andrew W. Siegel, "Moral Status and the Status of Morality in Political Liberalism",
Debating Democracy's Discontent, ed. by Aninta L. Allen and Milton C. Regan, Jr.
Oxford University Press, 1998. pp.147~158
183) Rawls 1993, p.xiv
184) Rawls 1993, p.243 n.32
185) 시겔은 드워킨의 예를 살펴본 후, 적어도 태아의 도덕적 지위에 대한 가정이 없이 정치적
가치들에 대한 고려만으로 접근하는 것이 가능할 수는 있지만 결국 그러한 접근마저도 자유주의자들이 수용하기 어려운 함축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시겔에 따르면, 드워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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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러한 결론이 정치적인 도덕적 논의에서 옳음의 문제뿐만 아니라
좋음의 문제도 다루자는 샌델의 완전설적 입장을 바로 보장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샌델은 우리가 두 개의 양극단의 입장인 정치적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
중에 한쪽을 반드시 선택해야함을 암암리에 가정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가정과는 달리, 철학을 포함한 모든 포괄적 논의와 정치를 분리시키려는 롤즈의
입장이나 정치에 좋음의 문제를 포함한 모든 포괄적인 철학적, 도덕적, 종교적
논의를 포함시키려는 샌델의 입장이 아닌 제 삼의 입장도 가능하다. 그리고 이러한 대안적 관점을 제시하는 하버마스의 접근은 지금까지 살펴본 두 가지 극단적인 관점들의 난점들을 피할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버마스의 분석에 따르면, 롤즈의 체계에서 “형이상학적”이라는 용어는 “정치적”이라는 용어에 반대되는 것으로서 특별한 의미를 갖고 있다. 종교적, 문화적으로 다원적인 현대 사회에서는 상이한 세계관들에 대해 중립적인 정의의 원칙에 대한 합의가 요구된다. 그리고 하버마스는 그러한 합의를 이끌어내려는
목표를 가진 이론은 그런 의미에서 “형이상학적인 것이 아니라 정치적”이어야만 한다는 데에 동의한다. 하지만 정치적 이론이 전적으로 정치적인 영역 내에은 임신중절 반대의 입장의 근저에 (태아의 생명의) 신성함을 경외하는 종교적 또는 종교에
준하는 견해가 존재한다고 보았다. 그래서 이들이 이러한 자신들의 종교적 입장에 다른 이들이 동조할 것을 요구하는 것은 미국 헌법의 제 1 수정조항이 보장하는 종교적 자유를 침해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드워킨의 논변은 샌델이 피할 수 없다고 본, 태아의
도덕적 지위에 대한 가정이 없이 논리를 전개하고 있다. 그래서 드워킨의 사례는 샌델을 주장의 반례가 된다. 하지만 실제로 모든 경우에 자유주의자들이 태아의 도덕적 지위가 신생아나 성인의 것과 다르다는 견해를 취하지 않고도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시겔도
의문을 품는다. 예컨대 어떤 종교 집단이 종교 의식을 위해 신생아를 (고통 없이) 제물로 바치려 하는 경우를 생각해보자. 자유주의자들은 그러한 관행을 끔찍하게 여기고 그것을 허용하지 않아야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하지만 이 경우 초기 단계의 임신중절을 허용하는 자유주의자들이 자신들이 태아의 도덕적 지위에 차등을 둔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려면, 남은 방법은 신생아의 생명권을 지지하는 다른 형이상학적 가정을 끌어들이는 것이다. 단지 신생아가
고통을 느끼는 존재이기 때문이라는 대답은 수용될 수 없는데, 그 이유는 우리가 도살하는
동물들도 고통을 느끼는 존재이기는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들은 신생아는 동물과는 다른 본래적 가치를 가진다고 설명하는 방법을 취해야할 것이다. 하지만 자유주의자들이
이렇게 형이상학적 개념에 호소하려하지 않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자유주의자가 태아의 도덕적 지위에 대한 가정을 하지 않은 채로 정치적 가치들에 호소하여 임신중절의 대한 해법을
제시하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지만 결국에는 자유주의자들을 원치 않는 방향으로 인도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정치적인 문제에서도 도덕적 논의가 불가결하다는 것을 지적한
샌델의 첫 번째 비판이 성립함을 인정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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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만 작동하면서 철학적 논쟁들을 피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하버마스는 지적한다. 다양한 합당한 포괄적 견해들로부터 독립적이면서도 그러한 견해들의
일부가 될 수 있는 정치관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는지에 대한 설명을 하려면
이성과 진리에 관한 비정치적인 질문들에 답해야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질문들은 형이상학의 범주에 들지 않으면서도 정치적인 것의 영역을 넘어서는 철학적
물음이다. 그리고 하버마스는 그러한 물음들의 답을 “합리적인 시민들이 각자가 개인적으로 가지고 있는 포괄적인 교설들과는 독립적이며 그것에 선행하는
도덕적 관점”을 나타내는 실천이성의 개념에서 찾을 수 있다고 본다.186) 이러한 하버마스의 이론은 정치적인 논의가 개인들 각자의 자기 이해를 반영하는
최고선이나 좋은 삶에 대한 물음에 관해 중립을 지키는 동시에 정의의 원칙을
도출하고 정당화할 수 있는 만큼의 철학적 논의를 포함시키는 중도적인 관점을
제시한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갈 부분이 있다. 롤즈가 정치적 정의관을
포괄적인 종교적, 도덕적, 철학적 교설들로부터 분리시킨 것은 두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는 것이다. 롤즈에 의하면, 정치적 정의관과 다른 도덕관은 범위에서
차이가 난다. 포괄적 교설은 우리 삶의 전체를 포괄하여 “인간의 삶에서 가치
있는 것”, “비정치적 행위들의 지침이 되는 개인적 덕목과 인격에 관한 이상”에
대해서도 관점을 제공한다. 그리고 종교적, 철학적 관점들은 포괄적인 것이 되는 경향이 있다고 롤즈는 말한다.187) 만일 우리가 종교적, 철학적 관점들은 포괄적이 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롤즈가 정치적 논의에서 철학적 논의를 완전히 제외할 것을 주장했다고 이해한다면, 샌델이 해석한 것처럼 롤즈가 심지어는 태아와 신생아 간의 도덕적 지위가 동등한지 여부와 같은 논쟁도 포함시키지 않는 것으로 보고 비판할 수 있다. 이를 편의상 ‘자비롭지 않은 해석’이라고
부르자.
하지만 이와 달리, 설령 포괄적인 것으로 되는 경향이 있더라도 그렇지 않은 맥락에서는 충분히 정치적 논의에 철학적 논의를 포함시킬 수 있다는 것이
롤즈의 생각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이는 일종의 ‘자비로운 해석’이다. 사실상
우리가 철학적 사유라고 부르는 것은 여러 차원의 논의로 이루어진다. 여기에186) Habermas 1998, pp.76~77 (번역본 pp.105~106)
187) Rawls 1993, p.175 (번역본 p.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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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우리의 사유와 행위의 배후에 놓인 전제나 기존의 사고의 틀에 대해 반성하는 비판적 사고가 기본이며, 때때로 세계, 지식, 자아, 우리의 사회적, 정치적
실존의 이해를 위해 새로운 사고의 틀을 창출하여 새로운 이론을 구성하는 작업이 동반되기도 한다.188) 말하자면 모든 철학적 작업이 반드시 인간의 목적이나 궁극적 가치에 대한 사변적 조망이나 거대 이론으로 종결되지는 않는 것이다. 때문에 철학적 논의는 종교적 논의와는 달리 하나의 포괄적 교설을 배경에
두지 않고도 논리 연관에 대한 엄밀한 접근만으로도 그것의 고유성을 나타내기에 충분하다. 롤즈가 포괄적 교설을 경계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그것이 인간의
최고선이나 좋은 삶에 대한 완전설적 논의를 전개하기 때문이므로, 좋음이 아닌 옳음에 대한 철학적이고, (철학의 하위 분야로서의) 도덕적 논의는 롤즈도
얼마든지 허용할 것이라고 자비롭게 추측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가 자비로운
해석을 가한다면 롤즈에 대한 샌델의 첫 번째 비판은 애초에 성립하지 않는다. 샌델의 해석과는 달리 실제로 롤즈는 샌델이 제외된다고 생각한 논의들을 정치적 논의에 포함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나는 자비롭지 않은
해석, 즉 샌델처럼 롤즈가 정치적 논의에서 논쟁적인 도덕적, 철학적인 논의를
철저히 배제한다는 해석을 하더라도 샌델의 비판을 면할 수 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논의를 진행했으며, 자비롭지 않은 해석을 하면 롤즈는 어느 지점에서 비판을 피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이제 샌델의 셋째 비판으로 돌아가 보자. 그것이 논박하는 롤즈의 공적 이성의 개념에 대해서는 사실상 공동체 진영뿐만 아니라 같은 자유주의 진영에서도 불만이 존재한다. 자유주의 진영 내에서 형성된 롤즈에 대한 불만 중에 대표적인 것은 심의 민주주의적 관점에서 제기된 것으로서 민주주의적 담론을 통해서 도출되어야 할 옳음의 원칙들이 미리 롤즈라는 철학자 한 사람에 의해 구성되어 모범 답안처럼 제시되었고 그러한 원칙들이 정치적 담론을 주도한다는
것에 대한 불만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포르스트(Rainer Forst)는 롤즈의 모델을 “원칙에 구속된 담화(principle-bound discourse)” 라고 부르고, 여기서 논의를 구속하는 원칙들이 단지 형식적이고 절차적인 것에 그치지 않고 내용적인
측면에 개입한다는 것을 문제 삼는다. 롤즈의 이론에 따르면 어떤 근거가 “좋188) Christopher Falzon, Philosophy goes to the movies: An Introduction to Philosophy,
Routledge, 2002, (이하 Falzon 2002로 표기) pp.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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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근거”인지는 롤즈가 도출해낸 원칙들에 대한 일치 여부에 달려있다. 근본적인 정의의 문제에 있어서 근거들은 그 원칙을 반영해야 하고 다른 정치적 사항들의 경우에는 적어도 그러한 원칙들을 침해하지 않아야 한다. 정당성(legitimacy)의 기준들은 기본적인 정의의 원칙들에 기초하기 때문에 정치적
담론은 원칙 발생적(principle-generating)이라기보다는 원칙 해석적(principle-interpreting)인 성격을 갖게 될 뿐이다.189) 하버마스 역시 옳음의
논의에 어떤 규칙이 적용되어야 한다면, 그것은 (정의에 대한) 내용을 예단하지 않아야 한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의 시각에서 롤즈의 정의론은 어디까지나
시민들이 행하는 옳음에 대한 논의에 기여할 수 있는 하나의 제안으로서만 유용한 것으로 간주된다.190)
그렇다면 샌델의 둘째 비판은 어떠한가? 여기서 샌델은 (자신도 어느 정도
설득력을 인정하는) 롤즈의 차등의 원칙과 같은 분배 정의의 원칙이 추론될 수
있다면 같은 방법으로 선관(좋음에 대한 견해)이 추론될 수 있다는 주장을 제시했다. 그런데 이러한 주장은 단지 반완전설을 비판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좀
더 적극적으로 어떤 선관은 다른 것보다 더 합당한 것으로 드러날 수 있음을
논증하는 성격의 것이다. 이것은 샌델의 롤즈의 비판과는 무관하게 독립적으로
제시되어도 완전설을 옹호하는 논변으로 인정될 수 있기 때문에 자세히 살펴볼
가치가 있다. 일단 샌델은 동성애의 예를 들어, 만일 어떤 이들이 동성애가 생식이라는 인간의 최고 목적을 충족시킬 수 없기 때문에 용납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면, 이에 대해 우리는 이성애도 피임을 하거나 불임인 경우에는 이러한 목적을 충족시키지는 않는다고 반박하면서, 생식이 인간 성관계에 도덕적 가치를
부여하는 유일한 목적은 아니라고 지적한다. 오히려 성의 도덕적 가치는 사랑과 책임에 있으며 동성애에서도 이는 가능하기 때문에 존중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동성애는 문란하기 때문에 사랑과 책임이 실현될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반론이 다시 제기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는 동성애 자체가 아닌 문란함에 대한 공격이다. 그리고 이성애도 문란할 수 있기는 마찬가지이다. 샌델은 이러한 논변을 통해서도 동성애의 도덕적 허용가능성에 대해 논란의 여지가 사라189) Rainer Forst, "The Rule of Reasons, Three Models of Deliberative Democracy", Ratio
Juris, Vol.14 No.4, 345~378, December 2001, pp.351~352
190) Habermas 1990, p.94 (번역본 p.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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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인정한다. 하지만 논박될 수 없는 대답이 제시될 수
없는 것은 정의에 관한 논증에서도 마찬가지라고 강조한다. 그리고 정부가 자유지상주의자의 반대가 있어도 재분배적 정의를 받아들일 수 있는 것처럼 동성애를 죄악시하는 사람들의 반대가 있어도 동성애의 도덕적 정당성을 법으로 긍정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 문제는 이러한 예를 통해서 과연 샌델이 옳음에 대한 판단과 좋음에 대한
판단 사이의 유비관계를 보여주었는지 여부이다. 유비관계가 성립됨을 보여야
비로소 전자처럼 후자에 대해서도 공적 판단이 가능하고 필요하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갖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면, 오히려 양자는 다른 차원의 판단임이 더욱 뚜렷해진다. 우선 샌델은 사랑과 책임을 동반하는 것이라는 전제조건을 바탕에 두고 동성애의 도덕적 정당성을 주장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자. 그런데 이렇게 사랑과 책임 중심의 가치관을 바탕으로 동성애를 옹호하는
것은 동성애 자체를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사랑과 책임이 구현된 동성애만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사랑과 책임은 옳음과 좋음 중에 어느 영역에 속하는 기준인가?
만일 옳음의 영역에 속한다면 그것은 일단 샌델이 애초에 의도에서 벗어난다. 그는 옳음의 문제뿐만 아니라 좋음의 문제에서도 더 합당한 관점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을 주장하려는 맥락에서 동성애를 거론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사랑과 책임이라는 기준이 과연 옳음의 기준으로 적합한지 여부도 도전을 받을
수 있다. 샌델의 접근과는 대조적으로 성적 만남에 서로에게 부당한 요소의 개입 여부, 가령 강제와 기만의 유무에 초점을 두고, 서로에게 해악을 끼치지 않는 성인 간의 충분한 정보에 기초한 상호 동의를 도덕적 성관계의 기준으로 삼는 성도덕도 존재하기 때문이다.191) 이러한 성도덕의 시각에서 보면 서로를 깊이 사랑하거나 결혼과 같은 장치를 통해 책임을 지지 않은 상태에서도, 상대를
기본적으로 존중하고 배려하는 성적 만남이 존재할 수 있기 때문에 사랑과 책임을 전제조건으로 내세우는 입장은 개인의 자유를 구속할 정당한 이유 없이
191) 이러한 허용적 성윤리를 제시한 철학자들로 바노이(Russell Vannoy) 프리모라츠(Igor
Primoratz) 등을 들 수 있다. 바노이(R. Vannoy) 지음, 황경식, 김지혁 역, 사랑이 없는
성: 철학적 탐구, 철학과 현실사, 2003, Igor Primoratz, Ethics and Sex, Routledge, 1999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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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정한 가치관을 강요하는 것이 된다. 따라서 다른 모든 영역에서도 옳고 그름을 따질 때, 당사자 권익의 침해 여부를 기준으로 삼듯이 성적 문제에서도 이러한 기준을 적용하는 것이 옳음의 문제에 적합한 기준이라는 강한 반론에 부딪치게 된다.
반면에 만일 사랑과 책임이라는 조건이 좋음의 영역에서 작동하는 것, 즉
좋은 성의 조건이라면 이러한 시각은 오히려 무거운 전제조건이 없는 성적 만남을 선호하는 사람들의 선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밝혀야 하는 부담을 지게
된다. 하지만 이때 샌델은 딜레마에 봉착한다. 사랑과 책임이 없는 성은 결국
누군가에게 피해를 줄 수 있다는 가능성에 호소한다면 좋음의 문제를 다시 옳음의 문제로 전환하게 되어 (이는 샌델의 원래 의도가 아니므로) 문제가 되고, 이와 다른 근거에 호소하게 되면 상대의 선호를 바꾸게 할 동기 유발을 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가령 사랑과 책임이 없는 성은 추구할만한 가치가 없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면 순환적인 논변이 될 것이고, 사랑과 책임이 없는 성은 아름답지 않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면 그러한 판단은 개인의 미적취향에 달려있다는 반발이 돌아올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옳음의 관점에서의 도덕적 논의는
권익 침해 여부를 기준으로 전개되고 좋음의 관점의 윤리적 논의는 그렇지 않기 때문에 다르다는 통념을 깨고 양자의 유비관계를 보여줄만한 근거는 샌델의
논의에서 제시되지 않았다. 오히려 샌델의 논의는 옳음과 좋음의 영역 중에 어디에 속하더라도 설득력을 얻지 못하는 딜레마 상황을 보여준다. 따라서 옳음의 논의에 공적 결론이 가능하고 필요하듯이 좋음의 논의에 공적 결론이 가능하고 필요하다는 샌델의 두 번째 반론은 수용되기 어렵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정리하면, 샌델의 완전설을 옹호하는 두 종류의 논변은
모두 성공적이지 못했다고 볼 수 있다. 롤즈의 입장을 비판하는 소극적이고 우회적인 논변은 우선 롤즈가 반완전설적 접근이 철학적 논의를 모두 배제한다고
자비롭지 못하게 해석할 경우에 국한하여 설득력을 얻을 수 있으나, 철학적 논의를 배제하지 않는 다른 유형의 반완전설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더욱이 롤즈의 접근이 철학적 논의를 배제하지 않는다고 자비롭게 해석할 경우에는 샌델은
롤즈의 접근도 논박할 수 없다. 다른 한편으로 샌델의 적극적이고 직접적인 논변, 즉 정의의 원칙이 추론될 수 있다면 같은 방법으로 선관이 추론될 수 있다는 주장은 옳음의 논의와 좋음의 논의 간의 유비관계를 입증하지 못함으로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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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득력을 얻지 못하였다. 완전설을 경계하는 철학자들은 샌델이 묘사했던 것처럼 정치가 도덕적, 종교적 문제에 대해 그저 함구할 것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정치가 좋음의 문제에 대해 과도한 개입을 하는 것의 부작용을 철학적으로 설명한다. 샌델이 정치가 도덕적, 종교적 문제에 대해 함구할 때 이러한 문제에 대한 논의의 열망이 다른 출구를 통해 독단적이고 광적인 도덕주의의 형태로 분출되는 것을 염려하듯이, 완전설을 거부하는 이들은 좋은 삶과 최고의 가치에 대해 하나의 모범적 답안이 있다는 신념에 찬 접근이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다른 가치를 추구하는 이들에 대한 편견을 낳고
그들과의 화합을 저해할 것을 염려하는 것이다. 샌델도 도덕주의를 경계했지만, “의무론적 자유주의”의 관점에서는 완전설이 오히려 철학적 얼굴을 한 도덕주의로 비춰진다. 샌델에게는 역설적으로 들리겠지만, 애초부터 이러한 세련된 도덕주의마저도 철저히 경계하는 자유주의적 사회에서야말로 샌델이 우려하는 “독단적이고 광적인” 도덕주의의 출현이 더 어려워 보인다. 협의의 심의 이념의
강한 인지주의적 요소는 이러한 통찰을 내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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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 “더 나은 논변”에 의한 지배의 의의(意義)
앞의 III 장과 IV 장에서는 심의 민주주의관이 민주주의 진영 내에서 해결해야할 대내적 과제인 절차적 요소와 실질적 요소를 구체적으로 해명하는 논의에
어떻게 기여할 수 있는지에 대해 살펴보았다. 이 장에서는 대외적인 과제, 즉
민주주의에 대한 회의론자들에게 민주주의의 탁월성과 실현가능성을 동시에 보여주는 과제를 심의 이념이 어떻게 풀어나갈 수 있는지 보이고자 한다. 그런데
이 지점에서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과연 절대 다수가 민주주의를 신봉하는
시대를 살면서 새삼스럽게 민주주의의 반대자를 의식하고 민주주의를 옹호하는
작업이 필요한가? 그러한 이론적 작업은 수많은 민주주의 이론가들에 의해 이미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았던가?
하지만 일견 더 이상 논의가 불필요해 보이는 주제를 다시 거론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민주주의의 적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욱 세련된 모습으로 진화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제 민주주의에 대한 회의의 목소리는 민주주의 진영 밖에 머무르는 대신, 민주주의 진영 내로 스며들어 모종의 민주주의 모델의 형태를 취한 채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시민들에게 정치인들을 선출하거나 낙선시킬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하는 것으로 민주주의의 외관을 유지하면서도, 실질적으로는 이들을 이해관심과 선호에 따라 움직이는 수동적인 정책
소비자로밖에 인정하지 않는 선호취합적 민주주의관이야말로 그 대표적인 예라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민주주의에 대한 결코 사라질 줄 모르는 회의는 바로
스스로 통치하는 존재로서 데모스의 인지적, 의지적 자질에 대한 의심에 기초하고 있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 협의의 심의 민주주의 이념은 이제까지 등장한
민주주의관 중에서 유일하게 이 난제를 정면 돌파할 수 있는 극한(極限)의 처방을 담지하고 있다. 그리고 나는 그 비결이 바로 ‘민주주의’와 ‘철학(philosophy)’의 결합에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바로 이 장에서 심의 민주주의 이념의 거시적 의의를 민주주의에 대한 회의론과 연결하여 고찰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 대목에서 심의를 중시하는 것을 왜 민주주의와 철학을 결합으로 규정하는지에 대해서 설명이 필요할 것이다. 이 부분은 이하의 논의에서도 차차 드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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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게 되지만, 일단 간단히 말해서 제대로 심의 이념을 제도화하고 그 이념이
필요로 하는 시민성을 함양하기 위해서는 하나의 구심점 역할을 하는 개념이
필요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목적을 위해서라면 심의라는 개념을 계속 사용해도 무방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심의 민주주의가 요구하는 것은 심의적 제도, 심의적 시민성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심의라는 개념은 적어도
심의 이념이 활용하는 방법론적인 부분은 어느 정도 명시할 수 있으나 협의의
심의 이념이 담고 있는 정신을 표현하지 못하는 한계가 있다. 핵심 개념은 협의의 심의 이념이 요구하는 여러 선결 조건들, 가령 방법론뿐만 아니라 인지적
요건과 의지적 요건을 포괄하는 설명력을 그 용어 안에 함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런데 철학(philosophy)은 일견 적어도 세 가지 측면에서 이러한 필요에 부응한다. 첫째, ‘지혜에 대한 사랑’이라는 문자 그대로의 의미는 협의의 심의 이념이 어떤 열망에서 나왔는지, 그 정신적 뿌리에 대한 이해를 돕는다. 둘째, 심의가 의지하는 논증(argument)의 방법은 하나의 학문적 전통으로서 철학이 사용하는 대표적 도구이다. 셋째, 심의 이념이 그려내는 정치적 논의는 철학이라는 학문의 고유한 하위 분야 중의 하나인 도덕 철학에서 다루는 도덕적 추론을 포함한다.
이하에서는 크게 두 가지 논의에 초점을 맞춘다. 우선 협의의 심의 민주주의의 새로운 규정, 즉 철학과 민주주의의 결합이라는 규정을 도입함으로써 반(反)민주주의적 우려에 대해 더욱 근본적으로 대응할 수 있음을 보이도록 하겠다. 그리고 이러한 새로운 규정이 심의 민주주의의 제도와 시민성의 논의에 분명한 방향제시를 할 수 있음을 밝힐 것이다.
5.1. 철학과 정치
이 절에서 나는 민주주의의 반대자인 고대 철학자 플라톤의 대화편 국가
에 나타난 통치 이념과 협의의 심의 이념을 비교할 것이다. 여기에는 매우 중요한 이유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고대 플라톤의 정치철학과 현대 심의 민주주의관이 묘하게 교차하기 때문이다. 이 둘은, 이상적 통치의 해법이 정치와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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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결합에 있다는 통찰을 통해 잠시 만났다가, 정치 체제의 표방함에 있어서는
한쪽은 반민주주의, 다른 한쪽은 민주주의라는 정반대 방향으로 나아간다. 플라톤은 이상적 통치와 통치자의 철학적 지식을 명시적으로 연관시키고, 심의 민주주의 진영은 이상적 정치에 도달하기 위해 시민의 철학적 소양에 암묵적으로
의존한다는 측면에서 서로 중첩됨에도 불구하고, 철학함의 본성과 데모스의 잠재력에 대한 상이한 인식으로 인해 대조적인 행보를 보인 것으로 생각된다. 안타까운 것은, 정작 철학과 통치의 연관을 공언한 플라톤의 시도는 상당한 문제를 안고 있었던 반면, 오히려 적절한 접근을 취하고 있는 심의 민주주의 진영은 자신들의 작업이야말로 철학과 정치를 결합하는 것임을 제대로 자각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이제 플라톤이 어느 지점에서 잘못된 길로 들어섰고 심의 민주주의 이념은 이를 어떻게 바로잡을 수 있는지를 밝힘으로써 철학과 정치를 접목시키는 작업에 있어서 심의 이념의 잠재된 가능성을 드러내려 한다.
5.1.1. 플라톤 국가: 철학과 데모스의 단절
철인(ho philosophos,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이 왕으로 다스리거나, 아니면 왕이나 최고 권력자로 불리는 이들이 철학(philosophia, 지혜에 대한 사랑)을 하게 되지 않는 한, 그래서 정치권력과 철학이 결합되지 않는 한, ... 국가들에게 아니 인류에게 재앙은 그치지 않을 것이다.192)
이상적인 통치의 희망을 정치권력과 철학의 결합에서 찾는 이 의미심장한 구절이 플라톤에 의해 민주주의를 반대하는 맥락에서 주장되었다는 것은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돌이켜 보면, 플라톤의 명성과 영향력 때문에 이 구절이 철학과 민주주의가 서로 적대적인 관계에 놓인 것처럼 곡해된 것을 되돌리는 데에
더 많은 세월이 소요된 듯싶다. 불행의 씨앗은 플라톤의 대화편 국가에 나타난 철학관 내지 철인관이 정치적 엘리트주의를 강화한다는 사실에 있었다. 물론 플라톤의 저작의 내용은 양적으로 방대할 뿐만 아니라 질적으로도 다채로워서 엘리트주의에 반대되는 평등주의적 관점조차도 플라톤의 저작 내에서
192) 플라톤, 국가, 473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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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견된다. 플라톤의 정치 철학에 대한 가장 신랄한 비판자 중의 한 사람인 포퍼(Karl Popper)는 실제로 플라톤의 저작 내에서 발견되는 두 가지 상반되는
철인관을 분리해내고, 그 중 하나는 소크라테스의 생각을 다른 하나는 플라톤
자신의 생각을 대변하는 것으로 보았다. 포퍼에 따르면, 소크라테스는 선(善)과
지(知)를 동일시하고 도덕적 탁월성은 가르쳐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의미에서 도덕적 주지주의(moral intellectualism)를 표방하며, 그가 30인의 참주 치하에서 취했던 행동을 보면 플라톤과 마찬가지고 가장 현명한 자가 통치해야한다고 보았던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하지만 소크라테스가 염두에 둔 지혜로운
자는 소위 학식이 높은 사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가 말하는 지혜는
자신이 얼마나 무지한지에 대한 자기 비판적 깨달음이다. 소크라테스의 시각이
평등주의적 성향을 띠고 있다는 것은 대화편 메논에서 교육을 받지 못한 노예도 피타고라스의 정리와 같은 추상적인 문제를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함으로써 명백히 드러난다.
또한 소크라테스는 기술은 전문가에 의해서 독단적으로 가르쳐질 수 있지만
진정한 지식, 지혜, 덕은 산파술에 의해 깨우쳐진다고 말함으로써 반권위주의적
특성을 드러낸다. 물론 교육을 받지 못한 이들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해서는 어떤 가르침이 필요하다. 하지만 사실상 그러한 가르치는 자의 권위는 “내가 아는 것이 거의 없다는 나의 자각에 의존”193)한다. 교육받지 못한 이들이 결핍하고 있는 자기비판의 필요성을 나타내 보이는 것 이상의 가르침은 행해지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소크라테스의 철학자는 진리를 소유한 자가 아니라 단지 진리의 탐구자이며 진리를 사랑하는 자로 머물 수 있다. 반면에 대화편 국가에서 드러나는 플라톤의 철학자는 진리를 사랑하는 자이기는 하지만 동시에 특별한 능력을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묘사된다. 훈련된 변증론자로서 영원한 형상을 보고 교류할 수 있는 자이다. 그리하여 “신과 같은” 또는 “신성한”194) 존재로서 일반인들 위에 군림한다.195)
그렇다면 지혜를 사랑하는 자라는 기본적인 철인(philosopher) 관념에서 동시에 출발했음에도 불구하고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사이의 이러한 간극은 어떻193) Plato, Gorgias, trans. by Robin Waterfield, Oxford University Press, 1994, 521d
194) 플라톤, 국가, 540 c
195) 포퍼(K. Popper) 저, 이한구 역, 열린사회와 그 적들 I, 민음사, pp. 179~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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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 발생한 것인가? 포퍼는 부정적인 시선으로 철인왕은 사실상 플라톤 자신이며 플라톤이 그런 방식으로 자신의 정치적 야심을 은연중에 드러낸 것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좀 더 중립적인 시각도 가능하다. 예를 들면, 산타스(Gerasimos Santas)는 플라톤의 엘리트주의적이고 반민주주의적인 통치론은
플라톤 특유의 인식론과 형이상학 때문에 초래된 것으로 설명한다. 산타스에
의하면, 국가의 4권에 나타난 통치관, 즉 무엇이 국가의 내부적 구성과 대외적 관계에 좋은 것인지에 대한 특별한 지식을 지닌 현명한 자가 통치해야한다는 입장은 그 자체로서는 반드시 엘리트주의적이거나 심지어 반민주주의적일
필요조차 없다. 왜냐하면 모든 시민이 적절한 교육을 통해서 그러한 지혜를 획득할 수도 있고, 피통치자들이 모종의 선거를 통해서 현명한 자를 통치자로 뽑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5, 6 ,7권에 등장하는 인식론과 형이상학은 이러한 가능성을 완전히 봉쇄한다. 여기서는 형상(the Forms)에 대한 형이상학에 기초하여 지식(episteme)과 의견(doxa)이 엄격하게 구분된다. 4권에서 언급된 지혜는 이제 ‘선의 형상(the Form of the Good)’에 대한 지식을 요구하는 것으로 설명되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그러한 지식은 고차적 학문들에 대한
교육을 요구한다.196)
그런데 따져보면 이러한 형이상학과 인식론적인 이론적 배경 역시 필연적으로 엘리트주의적이거나 반민주주의적인 결론을 도출하지는 않는다. 형상에 대한 지식이 단순한 의견과는 다른 것이고 획득하기 어려운 것이더라도 누구나
부단한 노력으로 성취할 수 있는 것이라는 전제가 추가된다면 결론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전제의 반대 내용을 가진 다른 전제, 다시 말해서 현실의 민주주의, 좀 더 심층적으로는 데모스에 대한 플라톤의 부정적인
인식이 더해져서 플라톤의 반민주주의적 태도가 형성되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민주주의의 미덕으로 보는 측면, 즉 민주주의가 ‘자유’와 ‘평등’을 기본 원칙으로 삼는다는 사실을 플라톤도 역시 간파하고 있다. 196) Gerasimos Santas, "Plato's Criticism of Democracy in the Republic", Social Philosophy
and Policy, Vol. 24, No. 2, (70-89) 2007. pp.78~79 사실상 ‘선의 이데아’에 대한 플라톤의 형이상학은 너무도 모호하여 20여 세기가 지난 오늘날에도 충분히 이해가능한 해석이
없는 상태이다. 국가를 잘 통치하기 위해서 누군가는 반드시 선의 형상에 대한 지식이 있어야 하는데, 플라톤이 너무나 높은 기준을 세웠기 때문에 심지어는 대화편 국가의 논의를
이끄는 소크라테스조차도 그러한 지식을 갖고 있지 못하다고 산타스는 지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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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는 도리어 이것을 문제 삼는다. 플라톤에 따르면, 민주 정체에는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유(exousia)"197)가 가득 차 있으며 "동등한 자와 동등하지 않은 자들에게 똑같이 평등을 배분"198)한다. 바꿔 말하면 민주주의에서는
통치하는 자가 갖추어야할 전제 조건이 존재하지 않는다. 즉, 통치하는 능력을
고려하지 않는 것이다.199) 그 결과, 누군가는 다른 이들보다 더 나은 통치를
할 수 있다는 사실, 즉 능력에 있어서의 불평등이 존재한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모든 구성원들이 동등한 발언권을 가지고 결정에 참여한다. 이렇게 민주주의 제도 자체가 방만한 것은 데모스의 방만함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민주 시민들은 좋은 욕구와 나쁜 욕구를 구분하고 전자를 추구하고 후자를 억제할 것을 권하는 이들의 통치를 거부하고 중요한 관직을 제비뽑기와 같은 방법으로
분배하기도 하는 것이다.200) 그리고 이것은 바로 이는 보통 사람들이 어떤 존재인지를 그대로 반영한다. 플라톤은 지혜와 덕에 대한 경험이 없는 이들이 어떤 상태에 있는지를 혹독하게 가축에 비유하여, “언제나 소처럼 아래를 보고
머리는 저녁 식탁으로 구부리고는 포식하고 살찌고 교미”하며 “마치 구멍이 뚫린 독”처럼 “만족시킬 수 없는 욕망을 가진” 자들로 묘사한다.201)
하지만 데모스가 이러한 상태에 머무르는 것 역시 진정한 지혜와 덕을 접하지 못한 탓이어서 교육을 통해 극복할 수 있는 것은 아닌가? 그러나 플라톤의
개인 간의 잠재력의 생래적인 차이에 대한 믿음은 확고하여 이러한 가능성을
부정한다. 플라톤이 국가의 4권에서 올바름(정의)의 개념이 국가와 개인의
영혼에 유비적으로 적용될 수 있다고 설명하면서 그것들의 구성요소들이 그것의 본성에 맞는 기능을 하는 것으로 정의하였음을 상기해보자. 잘 알려진 바와
같이, 국가를 구성하는 세 부류의 사람들을 각각 통치자, 전사 그리고 생산자
계급으로 지칭하면서 플라톤은 이들이 각자 자신의 자리를 지키면서 통치자는
지혜, 전사는 용기, 생산자는 절제의 덕을 발휘하게 되면 국가적 정의가 구현된197) 플라톤, 국가, 557b
198) 플라톤, 국가, 558c
199) 플라톤, 국가, 557e
200) 플라톤, 국가, 561b~c
201) 플라톤, 국가, 586a~b, (Thom Brooks, "Knowledge and Power in Plato's Political
Thought", International Journal of Philosophical Studies Vol.14 No.1 (51~77) 2006. p55
에서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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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고 주장하였다.202) 또한 이러한 분류법을 개인에도 적용하여 영혼을 이성적인 부분, 격정적인 부분 그리고 욕구하는 부분으로 삼분하였다.203) 그런데 만일 모든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이성적인 부분이 질적으로 완전히 다르지 않은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면 실제로 어떤 일에 종사하게 되었든지 이성적 능력을
발휘하여 원칙적으로 통치에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 누군가 통치에 참여하지
않는다면 그 까닭은 능력이 부족해서라는 필연적 이유가 아니라 우연적인 이유, 이를 테면 사적으로 다른 사정이 있어서일 것이다. 하지만 플라톤이 그린
그림은 이와 다르다. 어떤 이의 이성적인 부분은 국가를 잘 통치할 수 있는 원리를 파악할 수 있어서 통치자 계급의 일원이 될 수 있는 반면에, 다른 이들
가령 생산자의 이성적인 부분이 하는 일은, 단지 통치자 계급 사람들이 자신이
가지지 못한 탁월함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자신의 본분인 생산자로서 절제의 덕을 발휘하도록 욕구를 통제하는 기능을 하는 데에 그치는 것이다.204)
국가의 3권에 등장하는 허구의 이야기 역시 선천적인 개인차에 대한 플라톤의 믿음과 일관된다. 플라톤은 여기서 국가의 영속적인 통합을 위해 고상한
거짓말을 지어낼 것을 진지하게 고려하였다. 그 이야기 속에서 모든 이들은 어머니인 대지에 의해 함께 흙으로 빚어진 형제임이 강조된다. 다만 탄생 시에
황금이 섞인 이들은 통치자, 은이 섞인 이들은 이들을 보조하는 자, 그리고 청동이 섞인 이들은 일반 생산자가 되는 상이한 잠재력을 타고나게 되는 것이다. 대개의 경우 재생산을 할 때 자손들은 부모를 닮지만, 이들은 모두 동족이기
때문에 간혹 금속의 종류가 뒤바뀌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부모는 자손이 어떤
성분을 가지고 태어나는지를 예의주시하여 각자가 타고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적합한 지위를 찾아주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에게 맞지 않는 일을 함으로써 국가 전체를 위험에 빠뜨리게 된다는 것이다.205) 그런데 플라톤이 이 이야기를 허구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것이 상징하는 내용이 거짓이라고 믿었다기보다는 그것이 신화적 형태로 만들어진 데에 있다고 보아야 한다. 모두가 대지202) 플라톤, 국가, 427b~435d
203) 플라톤, 국가, 435e~441c
204) 플라톤, 국가, 441e
205) 플라톤, 국가, 414d~415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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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자손이라는 부분은 수호자들로 하여금 생산자들을 형제로서 보호해야한다는
의무감을 주기 위한 것이고 사람들이 서도 다른 금속을 타고났다는 부분은 이해 능력이 떨어지는 생산자들에게 자신들의 본래적 한계를 신속히 각인시키기
위한 것이다. 바꿔 말하자면 플라톤의 고상한 거짓말은 진정한 의미의 거짓말은 아니고 그의 관점에서 본 진실을 허구의 형식을 빌어서 표현할 뿐이라는 것이다. 이런 해석이야말로 계급을 삼분하면서 플라톤이 암시한 생래적인 개인
간의 차이에 대한 믿음과 일맥상통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플라톤이 진리에
대한 사랑을 지배자 계급의 통치를 강화해야한다는 원칙보다 하위에 두었다는
포퍼의 평가는206) 적어도 금속의 신화와 관련해서는 지나치게 가혹하다고 볼
수 있다.
어쨌든 분명한 것은 통치에 필요한 정의에 대한 지식과 철인만이 접근할 수
있는 선의 이데아에 대한 지식 간에 직접적인 연관이 없다고 생각했다면 플라톤은 ‘철인(philosopher)의 통치’라는 처방을 내리지 않았을 것이며, 개인들 간의 잠재력의 차이로 말미암아 오직 극소수만이 진정한 의미의 철인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이 없었더라면 플라톤은 민주주의에 반대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이다. 정리하면, 플라톤의 반민주주의는 크게 세 가지 요소로 이루어져 있다고 볼
수 있다. 첫째, 철학함과 정의로운 정치는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는 통찰, 둘째, 철학함은 선의 이데아에 대한 확실한 지식의 소유를 포함한다는 철학관, 셋째, 다수의 데모스는 이러한 고차적 지식에 접근할 수 없다는 믿음을 주요 전제들로 삼아 이러한 지식을 소유한 소수의 철인에게 통치를 맡겨야 한다는 결론이
도출된 것이다. 이제 나는 첫째 전제는 유효하므로 유지되어야 한다는 것과, 반면에 둘째 전제에 내재된 철학관은 다른 철학관으로 대체되어야한다는 것,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셋째 전제까지 무효화할 수 있음을 보일 것이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플라톤의 반민주주의라는 입장은 거부되지만 철학함과 정의로운 정치는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는 통찰은 유지된다. 이는 플라톤의 반민주주의의
근본적인 문제점은 철학과 정치를 결합한 것에 있는 것이 결코 아니며, 오히려
철학과 데모스의 단절에 있음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
206) 포퍼(K. Popper), 열린사회와 그 적들 I, pp.20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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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2. 철학에 대한 인식의 전환
플라톤의 반민주주의적 철인왕의 기획이 안고 있는 문제점을 분명히 드러내기 위해 그것에 정면으로 반대하는 이론가들의 논변을 고찰하는 데에서 출발해보자. 민주주의 이론가 달(Dahl)은 플라톤의 철인왕 이념에 도전하기 위하여, 그의 주저인 민주주의와 그 비판자들(Democracy and Its Critics)의 5장 6
절을 “왜 철학자는 왕이 되어서는 안 되며 왕도 철학자가 되어서는 안 되는가?”라는 물음에 답하는 데에 온전히 할애하고 있다. 그의 답은 단순명쾌하다. “두 행위는 서로 배제적이기 때문이다.” 철학자를 단순히 철학을 가르치고 철학적 글을 쓰는 이들로 보는 것이 아니라 플라톤적 의미 그대로 “정의와 인간의
선에 대한 진실, 계몽, 이해를 열정적으로 탐구하는 사람”으로 정의하면, 이들은 지배하려는 욕구를 강하게 가질 수 없다. “지배는 진리에 대한 탐구를 저해” 하는 까닭에서이다. 반대로 지배자들은 그러한 탐구에 그다지 흥미를 가지지
않을 것이라고 달은 자신 있게 못 박는다.207) 그런데 사실은 이와 유사한 견해가 이미 18 세기 말에 철학자 칸트에 의해 표명된 바 있다. 칸트는 영구평화론의 제 2추가 조항에서 왕이 철학을 하거나 철학자가 왕이 되는 것은 기대할
수 없다고 말한다. 특히 철학자가 왕이 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은데, 그 이유는 “권력의 소유가 불가피하게 이성의 자유로운 판단을 타락”시킬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게다가 칸트는 권력자들이 철학자들을 탄압할 것을 내심 우려하고, 철학자들은 본성상 반란적인 파당을 형성해 선동을 일으키지 못하니 이러한 부류의 사람들을 자칫 위험하다고 오해하여 없애거나 침묵시키려하지 말 것을 권력자들에게 당부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208)
그런데 정확히 말하면, 이러한 입장들은 철학자가 정치에 직접 관여하는 것에 대한 반대라기보다는 철학자가 정치권력을 독점하고 타자를 지배하려는 것의 모순됨을 보이는 것이다. 달과 칸트가 지적하는 것처럼 진리의 탐구와 지배욕은 상충할 수 있다. 진리를 탐구하려는 사람은 지배욕뿐만 아니라 모든 종류207) Dahl, Robert, Democracy and Its Critics, Yale University Press, 1989, pp.77~79 (번역본: 민주주의와 그 비판자들 pp.163~165)
208) Kant, “Perpetual Peace”, In Kant's Political Writings, ed. by Hans Reiss,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70, p.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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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사리사욕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으면 진리 탐구에 집중할 수 없으며, 진정한
탐구자들은 예외 없이 세속적 욕망들로부터 자유로운 모습을 보여준다. 비록
달이 일반화한 것처럼 모든 지배자가 진리 탐구에 무관심한 것은 아니지만, 지배에 눈이 먼 독재자가 권력을 유지하려면 진리 탐구에 관심을 가질 여력이 없고 오히려 매우 빈번하게 진실을 은폐하거나 왜곡할 필요가 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권력을 독점하려는 것은 정치에 관여하는 여러 방식 중에
하나일 뿐이다. 철학자가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 다른 시민들과 동등한 위치에서 참여하는 방법도 존재하며, 이는 진리 탐구의 결과물이 정치에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다는 측면에서 단순히 바람직한 것이 아니라 도덕적으로 요구될 수도 있다. 적어도 이런 방식이라면 철학자와 정치 참여는 상충하지 않는다. 하지만 내가 강조하려는 바는 단지 철학함과 정치는 상충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아니다. 이 보다 더 나아가 철학 또는 철학함(philosophizing)과 정의로운
정치는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는 통찰이 유효하다는 것이다. 이 사실은 이 장
서두에 인용된 플라톤의 구절을 현대적으로 음미할수록 뚜렷해진다. 우선 철학, 즉 ‘지혜에 대한 사랑’이 의미하는 바를 좀 더 구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협의의 심의 민주주의 이념에 큰 영향을 미친 근대 철학자 칸트의 개념틀을 활용할
수 있다. 칸트는 기본적으로 이성의 관심을 이론적인(또는 사변적인) 것과 실천적인 것으로 나누고, 전자의 관심에서 “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라는 물음을, 후자의 관심에서 “나는 무엇을 행해야만 하는가?”라는 물음을 던지는 것으로 보았다. 물론 칸트가 추가한 것처럼, 우리는 실천적이면서 동시에 이론적인
물음인 “나는 무엇을 희망해도 좋은가?”를 물을 수도 있지만, 이 경우에도 여전히 이론과 실천이라는 두 개념이 기본적인 틀을 구성한다.209) 그래서 우리가
이론적 탐구의 목적을 진리의 파악, 실천적 탐구의 목적을 옳음의 실현으로 규정한다면, ‘지혜에 대한 사랑’은 ‘진리와 옳음에 대한 열망’으로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이와 더불어 진실로부터 멀어짐으로써 범하게 되는 실천적 오류를 ‘불합리’로, 옳음에 심하게 미치지 못함으로써 저지르는 해악을 ‘부정의’라고
규정해보자. 그러면 정치가 진리와 옳음에 대한 열망과 단절될 때, 세상이 더욱
불합리와 부정의로 넘쳐날 것임은 자명하다.
209) 칸트(I. Kant) 저, 백종현 역, 순수이성비판, 아카넷, 2006, A805 B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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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과 정의로운 정치의 내적 연관이 어느 정도 밝혀졌으니, 이제 데모스와
철학 사이에 단절된 관계의 회복 가능성을 타진할 차례이다. 사실상 플라톤의
문제는 철학함에 대해 ‘전부가 아니면 전무(all or nothing)’라는 이해방식을 고수함에 있다. 정도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선의 이데아나 정의에 대한 확실한
지식의 유무를 기준으로 철인과 일반인이 구분되는 것이다. 그래서 소수의 철인이 이러한 지식으로부터 소외된 다수의 일반인을 통치하지 않으면 재앙을 면할 수 없는 것으로 인식된다. 하지만 우리가 더 이상 다수 철학자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는 플라톤의 형이상학과 인식론에 근거한 철학관을 반드시 유지할 이유는 없어 보인다. 오히려 모든 철학자들이 기본적으로 공유하는
요소들의 집합으로 철학에 대한 인식을 재구성할 필요가 있다. 이를 테면, 철학함은 ‘지혜에 대한 사랑’ 또는 ‘진리와 옳음에 대한 열망’으로부터 동기부여 되며, 논변의 분석과 제시를 통해 생각을 교류하는 방법을210) 취하며, 항상 자신의 판단의 오류가능성을 염두에 두는 겸손한 태도를 취하는 탐구 활동이라고
보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철인과 일반인 사이의 단순 이분법을 양 극단 사이에 무수한
정도 차이를 허용하는 연속체(continuum)로 대체한다. 이러한 관점에 비추어
보면, 누구나 다소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철학을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미
철학을 하고 있다. 직업적인 철학자가 특별한 점이 있다면, 그것은 이러한 기본210) 방법론적으로 철학의 기본은 논변(argument)이라는 인식은 철학자들 사이에 매우 널리 퍼져있고 여러 문헌에서 발견된다. 가령 로젠버그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철학적 탐구의 방법들에 대해 의견일치는 거의 이루어질 수 없다. 하지만 만일 철학적 스타일의 문제로부터
방법론적 문제를 분리해보면, 방법론적 문제에 대해서는 일반적인 의견일치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들 중에서 가장 근본적인 것은 아마도 철학적 견해들 또는 입장들이 논변에
의해 뒷받침될 것이 요구된다는 점이다. ... 가장 넓은 의미로 논변은 믿음에 대해 근거들을
제공하는 것이다. 만일 철학적 작업의 근본적인 기본 원칙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어떤 견해이든, 그것이 얼마나 황당하든지 간에, 그것의 옹호자가 논변에 의해 충분히 그것을 뒷받침하도록 노력한다면 토론에 소개될 수 있다는 것이다.” Jay Rosenberg, The Practice of
Philosophers, Englewood Cilffs: Prentice Hall, 1978, p.13. 한편 네이글은 이렇게 말한다. “철학은 과학과 수학과는 다르다. 과학과는 달리 그것은 실험 또는 관찰에 의존하지 않고 사유에 의존한다. 수학과 달리 그것은 증명의 형식적 방법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것은 물음들을 묻고, 논증하고, 이런 저런 생각을 해보고 가능한 반대 논변을 예상해보고, 우리의 개념들이 실제로 어떻게 작동하는지 고민하는 것에 의해 행해진다.” Thomas Nagel, What Does It
All Mean? A Very Short Introduction to Philosophy, New York and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87, p.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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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 요소들에 학문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의 자각과 활동, 가령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철학적 문제들에 대한 논의를 숙지하고 이어나가는 일을 추가적으로 행하고, 그러한 일에 비교적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지금 내가 제안한 시각에서는 누군가의 정치적 소양을 평가할 때, 그 사람이
철학자인지 여부가 아니라 얼마나 철학적(philosophical)인지 초점을 두게 된다는 것이다. ‘철학적’이라는 평가는 어떤 직업이나 배경을 가진 사람과도 결합
가능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제도에도 적용될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철학’,
‘철학자’ 또는 ‘철인’이라는 명사적 이해를 ‘철학적’이라는 형용사적 이해로 전환한 효과이다. 그렇다면 이제 정의로운 정치의 가능성은 ‘철학적인’ 시민과 ‘철학적인’ 제도를 충분히 확보할 수 있는가의 문제로 전환된다. 그리고 그러한 전망은 적어도, 평생을 오로지 진리와 옳음의 탐구에만 헌신하거나, 국가의 논의를 이끄는 소크라테스조차도 갖고 있지 못한 선의 이데아에 대한 지식을 소유한 ‘철인’의 출현과 집권에 의지할 때보다는 밝아 보인다.
그런데 그 전망을 좀 더 밝혀줄 수 있는 이론적 근거는 심의 이념의 토대를
제공한 의사소통행위 이론과 담론 윤리 이론에서 발견된다. 앞서 II 장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언어행위의 구조 속에 이미 데모스는 성공을 지향하는 전략적인 언어행위뿐만 아니라, 이해를 지향하는 언어행위를 하는 존재임이 함축되어
있다. 비록 데모스는 플라톤이 우려했던 것처럼 자신의 욕구를 만족시키지 위해서 전략적인 대화를 하기도 하지만, 적어도 타당성을 요구하는 이성적 의사소통에 참여할 때만큼은 암묵적으로 타당성의 두 세계에 관계하며, 그 두 세계를 대표하는 두 가치인 진리와 옳음을 지향하는 존재인 것이다. 그리고 이는
데모스가 의사소통을 하는 존재로서 살아가는 한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런 의미에서 플라톤의 허구의 금속 신화는 의사소통행위 이론에 비추어 변형될
수 있다. 신화에 등장하는 금(金)이 상징하는 통치에 필요한 잠재력을 진리와
옳음에 비추어 타당성을 검토할 수 있는 잠재성이라고 전제하면, 플라톤이 그려낸 이야기와는 달리, 특정인만 그것을 가지고 태어나는 것은 아니다. 이해 지향의 언어활동을 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진 모든 존재자, 즉 데모스 각각이 어느 정도의 금을 함유하고 태어나는 것이다. 이와 더불어 플라톤에게서 극소수에게만 접근이 가능했던 통치의 원천적 지식, 즉 선의 형상에 대한 지식은 누구나 이해하기 쉬운 보편화 원칙으로 대체될 수 있다. 이것은 관련된 모든 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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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자들이 모두 수용할 수 있는 불편부당함이 정의로운 정치를 규율하는 원칙임을 인정하는 사람들이라면 모두 정치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규범적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인정된다는 의미에서 그러하다.
5.2. 철학과 민주주의의 결합
정치적 이상으로서 민주주의 이념의 탁월성은 그것의 도덕적 우월성에 있으며, 민주주의의 도덕적 우월성은 그것이 실질적 요소와 절차적 요소라는 두 가지 구성 요소를 모두 갖추고 있다는 사실에 근거한다. 민주주의는 우선 구성원을 어떤 결정의 영향을 받는 피동적 존재로서 동등하게 존중한다. 구성원은 자신이 속한 사회의 법, 제도, 정책의 영향을 받는 처지에 있는 피통치자이고 사회적 협력을 통해 얻어진 혜택의 잠재적 수혜자이다. 그래서 이러한 피통치자들의 이해관심(interest)을 동등하게 고려하고 권리를 동등하게 존중하는 것이
민주주의의 실질적 요소이며, 민주주의를 정의할 때 “국민을 위한(for the
people)”이라고 표현하는 부분이 의미하는 바이다. 그런데 민주주의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구성원을 스스로 결정하는 능동적 존재로서 평등하게 존중한다. 구성원은 자신이 속한 사회의 법, 제도, 정책을 스스로 수립하는 존재이어야 한다. 이것이 민주주의가 “국민에 의한(by the people)” 것이라는 규정의
함의이다. 그런데 이 두 가지 헌신의 연관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민주주의는 상이한 도전에 당면하는 것이다. 첫째, 민주주의자들은 절차적 요소와 실질적 요소 사이에 강한 연관을 주장함으로써 민주주의를 정당화하려 할 수 있다. 이를테면, 민주적 절차가 정의로운 의사결정을 낳는 가장 유력한 또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주장을 하는 것이다. 이렇게 절차적 요소에 실질적 요소에 대한 도구적 가치를 부여하면, 민주주의자들은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할 수 있는 경험적 증거를 확보해야 하는 과제에
직면한다. 그런데 설사 대체로 그러할 수 있다는 높은 개연성을 확보할 수 있더라도 우리는 예외의 경우, 즉 민주적 절차가 정의로운 의사결정을 낳지 못하는 경우를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둘째, 절차적 요소에 도구적 가치가 아닌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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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만의 고유한 독립적 가치, 이를 테면 민주적 절차가 서로를 자율적인 존재로서 존중함을 표현한다고 주장할 수 있다. 절차적 요소가 상호 존중의 표현이라는 주장은 어떤 행위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진위를 따지는 것은
의미가 없다. 단지 이러한 주장은 그러한 의미를 가지는 행위에 반대되는 행위를 했을 경우 도덕적 비난을 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할 뿐이다. 물론 두 가지
정당화 관점은 논리적으로, 그리고 법칙적으로 양립가능하기 때문에 동시에 수용하는 것도 가능하다. 그래서 많은 민주주의 이론가들이 절차적 요소의 도구적 가치와 내재적(또는 표현적) 가치를 동시에 인정한다. 또한 둘 중 하나만
수용해도 비민주적 체제에 대한 비판 근거는 확보된다. 어떤 계층의 사회 구성원을 집단적 의사결정에서 배제한다면 그것은 그 사람의 이해관심이 충분히 보호받지 못하는 위험에 빠뜨리거나 설령 그렇게까지는 아니더라도 동등한 시민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분석이
맞는다면, 우리가 도덕적 정치 이상으로서 민주주의를 추구하는 이유는 두 요소 간에 연관이 이미 경험적으로 확보되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두 요소 중 하나를 결여하는 것이 정치적 이상으로서의 도덕적 결함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애초부터 민주주의의 탁월성이 두 가지 요소 간에 필연적인 연관이 존재하기 때문이라기보다는 각각이 표방하는 두 가지 중에 하나, 즉 서로를 스스로를
통치하는 자율적 시민으로서 인정하지 않는 것에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기 때문이라면, 민주주의의 옹호자들이 당면한 과제는 두 요소들이 서로 조화를 이루는 방법을 찾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모두에게 정치적 참여의 문을 열어 놓고
그렇게 얻어진 정치적 결정이 정의로운 것이 되도록 하는 것이다. 물론 민주주의를 비판하는 측에서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지적하지만, 어쨌든 이러한 과제에 도전하는 데에는 두 가지 접근이 가능하다. 포퍼가 플라톤의 정치사상을 비판하는 맥락에서 언급했듯이, 우리는 누가 통치해야하는가라는 문제에 접근할 수도 있고 통치자들을 제도적으로 통제하고 그들의
권력에 제도적으로 균형을 유지하게 하는 문제에 접근할 수도 있다. 물론 포퍼는 플라톤이 전자의 접근인 “최선의 지배자를 희망”하기 전에 후자의 접근인 “최악의 지배자에 대비”할 것을 권하였다. 정치사상은 처음부터 나쁘거나 무능한 정부의 가능성에 대비하여 그들이 너무 심한 폐해를 끼치지 않도록 정치제도를 조직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플라톤이 타고난 지도자를 뽑고 그들에게 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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련시키는 일을 가장 절박한 문제로 본 것은 이런 시각에서 볼 때도 문제가 많다는 것이 포퍼의 생각이다. 211)
비록 포퍼는 높기만 한 이상보다는 열악할 수 있는 현실에 초점을 맞췄고, 그래서 통치자의 자질 향상보다는 제도의 정비를 더욱 강조했지만, 그가 덜 강조한 부분도 중요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여기에는 적어도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좋은 제도가 확립되어있다고 해서 반드시 누가 정부를 구성하든지 최악의 사태는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좋은 제도 역시 무능하거나 나쁜 정부에 의해 유명무실해지거나 개악될 수 있다는 논리적 가능성이 현실화된 사례들이 사실상 도처에서 발견된다. 둘째, 최악의 사태의 발생만
막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는 아니다. 무능하거나 나쁜 이들이 적은 피해라도 끼치지 않도록 근본적인 대책을 세우는 것이 가능하다면 이러한
노력을 기울이는 데에 반대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는 포퍼의 권고를 좀 더 균형 잡힌 명령으로 다음과 같이 전환할 수 있다. “우리는
‘최악의 지배자에 대비’하면서도 ‘최선의 지배자를 희망’하기를 멈추지 않아야
한다!”라고. 여기서 제도의 확충이 최악의 상황에 대비하는 방법이라면, 민주주의 체제에서 최선의 지배자를 길러내는 것은 바로 시민성의 함양의 문제이다.
그런데 심의 민주주의 이념은 이제까지 등장한 민주주의관 중에서 민주주의와 철학의 결합을 통해 이러한 대조적인 과제 모두에 대해 가장 근본적인 처방을 제시할 수 있다. 심의가 논변을 중시함으로써 제도적으로 정당한 소수의 목소리에 더욱 힘을 실어주고 전략적 의도를 가진 이들이 공정함을 가장하여 사적인 이득을 추구하도록 빠져나갈 틈을 최소화할 수 있다는 측면은 여러 심의
민주주의자들에 의해 강조된 바 있다. 반면에 미래의 통치자를 교육함에 있어서 가장 수준 높은 시민상을 제시하는 작업은 아직 만족할만한 수준에 도달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앞서 밝힌 바와 같이, 기존의 논의를 보완하고 새로운
제안을 가능하게 하는 실마리는 바로 제도와 시민성이 철학적이어야 한다는 규정에 있다. 이제 이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자.
211) 포퍼(K. Popper), 열린사회와 그 적들 I, p.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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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1. 철학적 제도
민주주의 옹호자들의 시각에서 정치적 결정은 민주적 절차를 통해 도달했을
때만 정당성(legitimacy)을 인정받을 수 있다, 하지만 민주주의의 비판자들은
민주적 절차를 통해 도달한 실질적 판단이 때로 근본적인 정치적 또는 비정치적 가치들과 갈등하기 때문에 정당하지 못하게 되는 경우에 대해서 우려한다. 토크빌이 지적했던 다수에 의한 횡포(tyranny of majority)가 그러한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토크빌은 단순히 다수가 결정을 주도하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 다른 의견을 가진 소수를 탄압하는 과격한 사례들까지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예를 들면 1812년, 전쟁 중이었던 미국의 볼티모어에서 전쟁을 지지하는
다수가 그렇지 않은 입장을 취한 어떤 신문사에 분노하여 인쇄시설을 부수고
편집인들의 집을 습격한 사건과 같은 것이다. 토크빌은 앞서 살펴본 포퍼처럼
최악의 사태를 억제하는 제도적인 접근의 필요성에 대해서 언급하기에 이른다. 그는 제도적인 처방으로서 입법권이 다수의 감정에 휘둘리는 일이 없이 다수를
대표하고, 행정권은 권한을 적절히 나누어 가지며, 사법권은 다른 두 개의 권력으로부터 독립을 유지할 수 있도록 구성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212)
현대의 민주주의 비판자들은 다수의 횡포보다는 좀 더 현대적이고 섬세한
표현을 사용하어 유사한 우려를 표명하기도 한다. 민주주의가 다른 실질적 가치에 위협이 되기 때문에 민주적 권위가 축소되어야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어떤 정치 체제가 충분히 민주적이라도 여전히 자유, 평등, 그리고 공동선을 보장하지 못할 수 있다고 말한다. 심의 민주주의자들은 심의 민주주의
모델이 이러한 우려들을 해소함에 있어 제도적으로 선호취합적 민주주의 모델보다 우월하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 비결은 바로 공적 심의 절차에 있다. 이하에서는 우선 심의 민주주의 이론가 코헨이 선호취합적 민주주의 이론가인 달이
민주주의에 대한 비판에 대응하는 방식을 비판적으로 분석한 내용을 살펴볼 것이다. 이는 공적 추론(public reasoning)이 부재한 상태에서 민주주의에 대한
우려에 대응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살펴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다음으로 미국과 프랑스의 제헌국민회의 사례들을 분석하면서 공적 심의
212) 토크빌(A. Tocqueville) 저, 임효선, 박지동 역, 미국의 민주주의 I, 한길사. 2006,
pp.338~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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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차의 긍정적인 효과를 조명한 엘스터의 논의를 고찰할 것이다.
코헨의 분석에 의하면, 민주주의 이론가 달은 민주주의 비판자들에 의해 제기된 문제의 해결을 민주주의를 선호취합적 기제로 보는 이해방식 내에서 해결하려하였다. 달이 전면에 내세우는 것은 민주주의가 각 구성원의 이해관심에
동등한 고려를 요구하는 원칙을 제도화한다는 것이다. 그는 여기에 "개인적 자율성의 추정(presumption of personal autonomy)"을 추가하여 각 성인은 자신의 이해관심에 대해서 최선의 판단자이며 가장 열렬한 옹호자임을 가정한다. 따라서 필요한 절차는 시민들에게 자신의 선호를 형성하고 표현할 수 있는 충분하고 동등한 기회를 제공하고, 의사결정을 하는 단계에서 시민들의 판단들에
동등한 비중을 보증하고, 공적인 의제에 대한 권위를 시민들에게 귀속시키고, 모든 이성적 성인에게 시민으로서의 권한을 제공하는 것이다.213) 그러면 비판자들의 우려는 해소될 수 있다는 것이 달의 기본적인 생각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점은 선호취합적 민주주의관에서는 절차적 요소와 실질적 요소가 비교적 단순한 등식 관계를 이루고 있다는 점이다. 각 구성원의 이해관심을 동등하게 고려하기 위해서는 정치적 참여, 결사, 표현의 권리들을 보장하는 집단의사결정 체제를 확립하면 되고, 역으로 이러한 민주적 절차가 확립되면 각 구성원의 이해관심이 동등한 고려된 결정이 확보된다.
하지만 코헨이 보기에 이러한 접근으로는 충분하지 않다.214) 우선 자유에
대하여 살펴보자. 비판자들이 민주주의가 종교적 자유, 사생활과 개인의 안전과
연관된 자유, 비정치적인 문제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표현할 자유를 충분히 보호하지 못할 수 있음을 지적하는 것에 대해서. 달은 일단 화해하는 전략을 취하여 비정치적인 자유에 대한 권리가 존재한다는 것에 동의하고, 그것들이 사실은 동등한 고려의 원칙에 근거한다고 주장한다. 그러한 권리들은 연합의 자유와 같이 민주주의의 이상에 함축된 것들을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연권과
같은 전적으로 독립된 가치들에 근거하지도 않으며, 대신 민주주의 자체를 가장 잘 정당화하는 원칙들에 근거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달은 동등한 고려의 원213) Cohen 1997b, p.411.
214) 이하의 논의는 Joshua Cohen, “Institutional Argument... Is Diminished by the Limited
Examination of the Issues of Principle Democracy and Its Critics. by Robert A. Dahl ”,
The Journal of Politics, Vol. 53, No. 1 Feb., 1991, (221-225)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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칙이 요구하는 자유들을 열거하지도 않고 특정한 권리들이 어떻게 그 원칙에
의해 지지되는지를 설명하지도 않기 때문에 이러한 주장은 모호한 채로 남는다고 코헨은 지적한다. 달이 제시한 유일한 예는 공정한 재판에 대한 권리이기
때문에 그가 사생활, 종교 활동,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는 범위, 또는 세속적 정당화의 요구와 같은 연관된 문제들과 도덕의 법적 시행을 어떻게 다루는지 명확치 않다. 이러한 원칙의 문제들을 정교화 하는 대신, 달은 제도적 차원으로
넘어가버린다. 여기서 그는 민주적 과정을 가령 대법원의 사법심사제도와 같은
것을 통하여 제한함으로써 자유를 보호해야한다는 익숙한 주장에 반대한다. 그러한 제한이 불필요한 이유는 자유의 토대가 동등한 고려의 원칙에 있음을 이해하는 “민주적 공중”에 의해 내려진 집단적 선택들을 통하여 보호를 받아야할
권리들이 똑같이 잘 보장될 것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권리들을 보호하기로 되어있는 법원이 자신들의 특권을 방어하는 데에 권한을 사용할 수도 있다고 달은 지적한다. 하지만 선호된 자유들이 무엇지에 대해 잘 알지 못한 상태에서는
상이한 제도적 전략들이 그것들을 어떻게 보호하는지 평가하기 어렵다. 동등한
고려의 원칙은 비정치적 자유들에 대한 권리를 지지하는 데에 어떻게 이용될
수 있는가?
한 가지 설명방식은 그러한 자유들의 침해가 통상적으로 소수자에 대한 적대감을 반영하고 적대감에 의해 결정된 결과는 동등한 고려의 원칙을 위배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하지만 적의가 항상 권리 침해의 원천은 아니므로 그러한
상황에서 동등한 고려의 원칙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고찰할 필요가 있다고 코헨은 설명한다. 예를 들어서, 입법자들이 태동은 ‘신이 육체에 영혼을 불어넣는
순간에 처음 생긴다’는 믿음을 바탕으로 태동이후의 임신중절 금지를 주장하고, 더불어 이러한 믿음은 인간 생명의 시작에 대한 다수의 종교적 신념을 충실하게 반영한다고 가정해보자. 이러한 조건들을 전제하면 그러한 법은 동등한 고려의 원칙을 만족시키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법을 옹호하는 이들은 그러한
법에 의해 여성들의 이해관심이 무시된 것이 아니라, 태아의 이해관심과 무고한 인간 생명을 보호하는 환경에서 살고자하는 대다수의 이해관심이 여성들의
이해관심보다 중대하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그래서 만일 우리가 단지 집단적
선택들이 각자의 이해관심을 동등하게 대우하는 방식으로 이해관심을 취합하는
것만을 요구한다면, 여기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를 발견하기 어렵다. 하지만 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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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에는 분명 문제가 있는데, 문제는 바로 그러한 법을 지지하는 것으로 사용된
근거들에 있는 것이다. (이 밖에 수용할만한 다른 근거가 있는지 여부는 또 다른 문제이고 현재 논의와는 관련이 없다.) 그러한 이유들은 임신의 부담을 지고 있고 생명의 시작에 대한 다수의 견해를 거부하는 여성에게 제시할 수 있는
근거들이 아니다. 코헨은 바로 이 지점에서 심의 민주주의관이 선호취합적 민주주의관에 비해 유리하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입법에 있어서 이러한 과오를
지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심의관은 집단적 선택의 민주적 과정들을 공적 추론의 과정으로 보고 단순하게 여성의 이해관심이 고려되어야함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법은 그러한 법에 의해 부담을 지는 이들에게, “신이 태동의 순간에 영혼을 불어 넣는다”는 것과는 다른, 수용할만한 근거들을 제공하는 고려사항들에 의해 지지되어야 함을 요구한다.
다음으로 평등의 문제, 특히 기회의 평등에 대해서 살펴보자. 달은 (비정치적) 기회의 평등의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지 않지만 그가 다른 문제들과 관련하여 언급한 말들을 살펴보면, 진정으로 반대할만한 기회의 불평등은 집단적 선택의 과정이 진실로 민주적지지 못함을 반영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기회의 평등은 민주주의를 제한할 이유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민주주의를 완벽하게 만든다고 보았다. 가령, 인종적 소수에 대한 적대감을 반영하는 법이 채택되었다고 가정해보자. 소수자들은 특히 의사결정의
절차 중에 결정적인 단계에서 평등하지 못했다고 주장하면서 그러한 정치적 과정이 진정으로 민주적인 것이 아니었다고 반박할 수 있다. 그들은 다수의 적대감이 결과적으로 그들의 투표를 무용지물로 만들었으며 다수가 그들에게 해로운 제안에 찬성할 준비가 되어있기 때문에 자신들은 투표권을 아예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달의 생각처럼
동등한 고려의 원칙으로 충분하다고 보면, 이러한 불만은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고 코헨은 지적한다. 만일 우리가 달처럼 모든 이해관심을 동등하게 고려하는 방식으로 이해관심을 취합하기만 하는 정치적 절차를 요구하고, 투표가 이해관심을 반영한다고 추정한다면, 차별적인 선호에 근거한 투표가 인정되는 상황에서는 과정에서 어떤 과오도 없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만일 다수의 이해관심에 토대를 두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법률의 제정이
거부된다면, 다수는 그러한 과정이 그들의 이해관심을 비민주적으로 간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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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불평할 수 있음을 코헨은 인정한다. 그러나 코헨은 직관적으로 이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렇게 함으로써 다수의 동등한
가치를 부정하고 다수의 구성원들을 모욕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문제는
차별적 법률을 창안한 이해관심에 있는 것이 코헨의 설명이다. 코헨은 심의관이 이러한 차이를 적절하게 보여주고 차별적 법률의 비민주적인 측면을 잘 설명한다고 주장한다. 심의관은 법률이 근거들에 의해 지지되어야하며 그러한 근거들은 다른 이들을 동등한 존재로 인정함과 일관되어야한다고 요구함으로써
차별적인 법률의 문제를 포착한다. 차별적인 선호에 기초한 법률은 이러한 요구를 위배하고 그래서 심의 민주주의의 근본적 규범과 상충한다는 것이다.
코헨이 실제로 보여주는 바와 같이, 심의 민주주의자가 어떤 결정이 다수의
지지를 받는다는 사실보다는 어떤 근거로 그러한 지지가 형성되었는지에 주목하는 것은 건전한(sound) 논변을 탐구의 기본 단위로 보는 철학적 방법론을
반영하는 것이다. 개인들이 각자 논변을 제시하도록 기대되는 것뿐만 아니라, 특정한 의사결정의 과정 자체가 철학적 논변에 비유될 수 있다. 의사결정의 결과는 논변에 있어서의 결론이고 그러한 결정에 도달하는 이유들은 논변의 전제에 해당한다. 그래서 철학적 관점에서는 단지 전제에서 결론이 도출된 것이 타당한 형식을 갖춘 것으로는 부족하고 전제들이 (사실적인 진술인 경우에는) 참이고 (규범적인 진술인 경우에는) 수용가능한 것이어서 도출된 결론의 진리성
또는 옳음, 즉 건전성을 보장해야 한다. 선호취합적 모델과 심의적 모델은 민주주의 옹호자로서 최종 단계에서는 다수의 견해를 좇는다는 전제를 가지고 있다는 측면에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지만, 심의 민주주의관에서는 또 다른 전제들, 즉 우리가 좇을 다수의 견해가 참이거나 수용가능한 믿음에 기초하는지 여부가
명시적으로 중시된다. 코헨은 중절을 원하는 임산부들이 태동이 신이 영혼을
불어넣은 것이라는 믿음을 왜 수용할 수 없는지에 대해서 분석적으로 설명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 코헨이 그러한 믿음에 기초한 결정을 임신부들이 거부하는 것을 당연시하는 이유는 임산부들에게 그러한 결정이 단지 불리하다는 것을 인정해서만은 아니다. 그것은 앞의 임신중절의 예에서는 제시된 전제가 그것의 진위를 확실히 따지는 것이 이성의 한계를 넘는 특정한 형이상학
또는 종교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가정을 하지 않는다면 제 삼자는
임산부들이 이러한 논변에 문제가 있음을 지적하면서 다수의 결정을 거부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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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그것이 더 나은 논변에 의해 지지될 때도 임산부들이 거부 할 때를 구분하여 임산부들에 동조할 것인지 여부를 결정하는 것이 불가능해진다. 결국 중요한 것은 다수의 지지를 정당화하는 것이 논변의 건전성이듯이, 소수의 거부를
정당화하는 것 역시 그들의 논변의 건전성이라는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인종차별의 예에서는 규범적으로 수용불가능한 인종차별적 관점을 반영하는 전제가
추론에 반영되어 결론의 건전성을 해치고 있다는 것이 명백하고 그래서 소수가
다수의 결정에 항변하는 것은 정당화된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심의 민주주의의 접근은 다수에게 소수의 자유나 평등과 같은 실질적 가치를 침해하려할 때
정당화의 부담을 지움으로써 근본적으로 다수가 소수의 권익을 부당하게 침해하는 것을 막는다는 것이다. 심의적 관점에서 건전한 추론을 거친 것이 아니라면 도출된 결론이 다수의 결정이라도 받아들일 수 없다. 공적 심의는 건전한 추론만을 허용하는 방식을 취함으로써 보편적으로 수용가능한 근거가 부족한 다수의 의지를 차단한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자유나
기회와 같은 실질적 가치를 존중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접근은 다수가 자신들의 견해가 참이거나 정당하다고 잘못 생각하고 있는 상황에서 공적 결정을
내리려고 할 때뿐만 아니라, 참여자가 자신들의 의도를 그대로 드러낼 경우 그것을 관철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인지한 상태에서도 효과를 발휘한다. 그러한
메커니즘은 엘스터의 다음과 같은 분석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엘스터에 따르면, 본래 이해관심이 다양한 당사자들이 합의에 이르는 데에는 크게 두 가지
주요 방식이 존재한다. 그 중 하나는 '이성적인 논변(rational argument)'을 통해서 타자를 설득하려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위협(threats)이나 약속(promises)을 통해서 동의를 유도하는 것이다. 전자인 이성적 논변의 방식은
하버마스가 조명한 바와 같이 타당성(validity)을 주장하면서 이루어지며, 대표적인 예로서 법을 제정하는 논의를 들 수 있다. 반면에, 후자인 협상 또는 흥정(bargaining) 방식은 경제학자 셀링(Thomas Schelling)이 밝힌 바와 같이 신뢰성(credibility)에 기초하여 작동하고, 임금 교섭이 가장 전형적인 예이다. 그런데 내심으로는 자신의 이해관심을 관철시키려는 의도를 가지면서 표면적으로는
이성적 논의에 참여하게 될 때, 두 가지 접근이 교차하게 된다.215) 그것이 바215) 엘스터는 논변의 전략적 사용에 대한 자신의 논의는 셀링의 렌즈를 통해 하버마스를 읽는
것이라고 표현한다. 이하의 논의는 Jon Elster, "Strategic Uses of Argument", in Barri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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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엘스터가 분석의 대상으로 삼은 “논변의 전략적 사용(strategic uses of
argumentation)”인데, 이러한 현상은 실제로 종종 일어나곤 한다. 협상에 임하는 이들 가운데에는 상대에게 바로 위협을 가하는 대신, 이를 우회적인 경고, 즉 위협에 맞먹는 사실적 주장으로 대체하기도 하며, 자신의 이익에 관심을 둔
행위자들은 빈번하게 그들의 주장을 불편부당한 원칙에 근거지우려는 시도를
하는 것이다.
우리의 논의에서는 이러한 현상들에 대한 분석을 통해 엘스터가 내린 결론이 주목할 만하다. 순수하게 이해관심에 기초하여 전략적인 동기에서 출발하더라도 불편부당한 추론을 사용하게 되면, 이는 협상보다 더 공평한 결과를 산출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특히 공적인 논의의 장에서는 강자가 자신의 흥정력을 철저히 자신을 위해서만 사용하는 것을 방지한다. 이는 어찌 보면 매우
당연한 결과이다. 자신의 제안을 관철시키려면 그것을 관철시키는 데에 가장
기여할 수 있는 어떤 비편파적 원칙을 거론하고 이에 호소할 수밖에 없다. 그러면 그 결과 그러한 원칙이 보장하는 한도 내에서 약자의 이해관심도 함께 고려되고 강자의 이해관심은 더 희석되기 마련인 것이다. 예를 들면 1920년대
미국의 예일 대학이 펼친 정책이 이러한 사례이다. 유대인의 입학을 제한하기를 원했으나, 그러한 시도를 먼저 하면서 추문을 일으켰던 하버드 대학의 전례를 답습하고 싶지 않았던 예일대학 당국자들은 명시적인 쿼터제를 사용하지 않기로 하고, 대신 지역적 다변화(geographical diversity)의 정책을 채택하기에
이른다. 지역적 다변화라는 원칙은 그 자체로 좋은 명분을 제공하면서도, 실제로는 뉴욕시로부터 대거 유입되는 유태인 입학희망자들의 수를 감소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전략의 장점은 자신들의 정책이 편향적이지 않게 비춰지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비록 많은 수의 유태인들이 이러한 원칙의 영향을 받게
되지만 그것은 본질적으로 반유태인 원칙은 아니었다. 종교에 관계없이 적용되는 지리적 정책이었기 때문에 그것은 밀워키에 사는 유태인이나 덜루스에 거주하는 가톨릭교도에게 똑같이 유리한 것이었고, 뉴욕의 무신론자나 호보켄의 개신교도에게 똑같이 불리한 것이었다. 이렇게 지역적 다변화 정책의 예에서도
드러나듯이, 비편파적인 논거를 도입함으로써 그렇지 않은 것보다 더 공평한
to Conflict Resolution, ed. K. Aorrow, L. Ross, R. B. Wilson, R. H. Mnookin, A.
Tversky, W. W. Norton & Company, 1995 (236~257)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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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를 산출하는 효과를 엘스터는 “위선의 교화력(the civilizing force of
hypocrisy)”이라고 부른다.
정치적 토론의 참여자들로 하여금 기본적으로 사실적 측면에서는 (참인 사실을 반영하기 때문에 이치에 맞는다는 의미의) 합리성에 규범적 측면에서는
불편부당성에 호소하도록 요구하는 심의 민주주의관은 엘스터가 말하는 위선의
교화력의 효과를 톡톡히 활용한다고 볼 수 있다. 사실상 정치적 논의의 모든
참여자들이 불편부당성을 최우선적으로 구현하기 위해 토론에 참여하는 것을
아니다. 어떤 이들은 정치적 의사결정이 불편부당하기보다는 오히려 자신의 이해관심에 더 많이 기여하는 쪽으로 기울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을 품을 수 있다. 하지만 심의 민주주의의 이념은 이를 명시적으로 허용하지 않기 때문에, 그러한 제도 하에서 이러한 부류의 사람들은 비록 전략적인 의도에서 나온 것이지만 공평한 기준을 도입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위선의 교화력은 단지 공정한
결과만을 산출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러한 위선적 행위를 한 행위자의 심리에도 적용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심의에 참여함으로써 밀이나 여러 심의
민주주의자들이 강조하는 진정한 의미의 교육적 효과를 보거나, 적어도 자신의
제안이 원래부터 공평함을 추구했었던 같은 착각을 일으켜 일종의 긍정적인 자기기만이 일어날 수도 있을 것이다. 코헨과 엘스터의 논의를 살펴보고 내릴 수 있는 결론은 심의 민주주의관이
다수의 선호나 의지를 합리성과 불편부당성의 요구에 부응하도록 함으로써 포퍼가 말하는 “최악의 통치자”에 대비할 수 있는 가장 엄격하고도 가장 효과적인 기준을 제시한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의 논의의 맥락에서 최악의 통치자는
자신들의 믿음이 잘못되거나 근거 없는 것임을 인식하지 못하거나 자신의 이해관심을 추구하는 데에 몰두하여 전략적 사고를 하는 시민과 정치인들을 말한다. 이들에 대비함에 있어서 심의는 이제까지 제시되었던 방법들, 가령 단순히
권력의 분산으로 상호견제를 도모한다든지, 또는 다수가 결정한 내용의 정당성
심사를 소수의 엘리트인 대법관들에 의뢰하는 수준을 넘어선다. 데모스와 그의
대표자들에게 자신들의 제안이 합리성과 불편부당성에 비추어 타당하거나 건전한 것임을 직접 증명하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제도는 결국 사실 연관과 논리
연관의 측면에서 문제가 없는 논변의 구성과 분석이라는 방법론을 통하여 진리와 옳음을 추구한다는 의미에서 철학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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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의가 지닌 특성을, 사유하고 행위하는 존재로서 자신의 오류가능성을 경계하면서도 엄밀한 논변을 통해 진리와 옳음을 추구한다는 의미에서 철학적인(philosophical) 것으로 규정하는 것은, 그 동안 심의 자체에 대해 비판을 가했던 왜곡된 시각을 바로잡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 중에서 특히 영(Iris
Marion Young)은 대담하게도 이성적 논변을 통하여 문제에 접근하는 심의의
방식을 일종의 특수한 문화라고 주장한다. 그것은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철학과 정치, 그리고 중세 아카데미에 창시자를 두고 있는) 과학적 논쟁과 근대 의회 그리고 법정과 같은 근대 서구의 특정한 제도적 맥락에서 유래한다는 것이다. 게다가 심의는 “엘리트주의적”이고, “배재적”이며, 일부 사람들의 화법을 폄하하고, 누군가는 패배를 인정해야하는 화법으로 묘사된다. 그리고 중상류층의
백인 남성이 이러한 화법을 구사하는 부류로 지목되고 있다. 의회의 토론이나
법정과 같은 전형적인 심의의 장에서는 단정적(assertive), 대립적(confrontational) 언설이 잠정적(tentative), 설명적(explanatory), 화해적(conciliatory) 언설보다 높이 평가받는다는 것이 영의 주장이다. 영은 샌더스(Lynn M. Sanders)가 인용한 미국의 배심원에 대한 사례 분석을 재인용하면서 단언적 주장과 논변을 주로 사용하는 것이 여성보다는 남성에게서 더 많이
발견되는 의사소통 방식이라는 주장의 근거로 삼는다.216)
하지만 이러한 영의 주장은 여러 결함이 있는 가정들에 기초하고 있다. 그
중에서 중요한 몇 가지만 살펴보면 첫째는 논변 전개가 반드시 단언적이며 공격적이어서 상대를 압도할수록 강력하고, 따라서 더 인정받을 것이라는 가정이다. 그러나 이것은 성급한 일반화에 해당한다. 단언적이며 공격적인 논변은 여러 논변 제시 방식 중에 하나일 뿐이다. 다른 각도에서 보면, 이는 교정해야할
현실과 추구해야할 모범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 양자를 구분하면 논리의 정합성, 사실과의 일치성, 규범적 정당성이야말로 좋은 논변을 평가하는 진정한 기준이므로 현실에서 관찰되는 고압적이고 단정적인 태도는 억제되어야 하는 것이다. 자신의 오류가능성을 염두에 두는 반독단주의적 요건에
충실하다면 오히려 단언을 피하고 겸손한 어투를 구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216) Iris M. Young, "Communication and the Other: Beyond Deliberative Democracy", In
Democracy and Difference: Contesting the Boundaries of the Political, ed. by Seyla
Banhabib, Princeton Unversity Press, 1996 (이하 Young 1996으로 표기) p. 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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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이러한 영의 가정은 적어도 협의의 심의 이념이 추구하는 심의 상황과는 동떨어져 있다. 둘째는 논변 전개에 취약한 집단이 따로 존재하며 그러한 경향은
영속될 것이라는 가정이다. 하지만 이러한 가정은 불리한 현실에서 비롯된 현재 상황을 어느 정도 묘사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미래에 관해서는 함부로 비관적인 예측을 하는 것이다. 게다가 이는 이성적 의사소통 능력에 관한한 특정
인종과 성별이 늘 더 유리할 것임을 함축하여 오히려 인종차별적이고 성차별적인 인식으로 평가받을 수 있다. 셋째 영은 특히 전형적인 젠더의 개념에 사로잡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여성과 남성이 소통 방식이나 사고방식, 그리고 도덕적 추론에 있어서 차이가 있다는 심리 연구만을 선택적으로 수용하여 편향된
판단을 내리는 것이다. 하지만 심리학계 내에서도 심리적 양성인의 존재를 확인하는 연구를 통해서 젠더의 관념을 해체하는 작업 역시 진행되어 왔으며 상당한 설득력을 인정받고 있다.217)
영은 논변을 통한 이성적 의사소통을 보편적인 것이 아니라고 (즉, 문화특수적인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다른 세 가지 언어적 소통 방법, 즉 인사하기(greeting), 수사적 표현(rhetoric), 이야기하기(storytelling)을 비판적 논변(critical argument)과 함께 병행할 것을 제안한다.218) 그런데 만일 영이 주장하는 것처럼 논변적인 화법이 문화특수적인 것에 불과하다면 그녀가 추가적으로 도입한 세 가지 양태의 의사소통이 비판적 논변과 동등한 위치를 차지해야
한다. 하지만 영은 곳곳에서 이것들이 논변을 보완할 수 있다고 설명하는데, 이는 세 가지 양태의 의사소통이 논변에 보조적인 역할을 하기 위한 것이라는 인217) 심리학자 벰(Sandra L. Bem)은 남성과 여성의 장점을 골고루 갖춘 심리적 자웅동체의 존재를 밝혀냄으로써 젠더의 통념에 도전한다. 그녀가 성역할을 연구하는 주요 목적은 “인간의
인격을 전형화된 성역할이라는 감옥으로부터 해방시키고 문화적으로 부여된 남성성과 여성성의 규정들로부터 자유로운 정신 건강관을 발전시키기 위한 것”이다. 자신의 논문 “The
measurement of psychological androgyny", Journal of Consulting and Clinical Psychology, 42, 155-162, (1974)에서 그녀는 바람직한 남성전형적인 특성(자기주장, 분석적, 독립적)과
바람직한 여성전형적 특성(동정심, 온화, 이해심) 양자가 조화된 남성과 여성이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벰의 모델에서 남성성과 여성성은 인격에 있어 두 개의 분리된 차원으로서, 그 조합에 따라 남녀라는 이분법을 대신하는 네 개의 범주가 도입된다. (바람직한 ”남성적“의 특징을 많이 갖지만 바람직한 ”여성적“ 특징은 거의 갖지 않는 여성 또는 남성은 M
gender-typed, 그 반대는 F gender-typed, 두 가지 모두를 많이 갖춘 여성이나 남성은
androgyny, 두 가지 모두를 거의 갖추지 못한 사람은 undifferentiated로 지칭된다.)
218) Young 1996, p.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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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을 주기도 한다. 그런데 둘 중 어떤 입장을 취해도 영에게 불리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영이 전자의 강경 노선을 취하면 그녀의 주장은 설득력이 없어지고, 후자의 온건 노선을 취하면 정치적 의사소통에 있어 논변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심의적 접근과 본질적인 차이가 없어진다. 사실 후자의 경우에 해당하는
용두사미식의 논의 전개는 미국사회에서는 심의 민주주의의 도입이 아직은 요원하다는 주장을 펼친 샌더스(Lynn M. Sanders)에게서 발견된다. “심의에 반대하여”라는 샌더스의 논문 제목과 그녀의 결론은 상당한 괴리가 있다. 왜냐하면 그녀가 제안한 ‘증언 또는 고백(testimony)’이라는 화법 역시 미국 시민들
모두가 논변을 충분히 잘 활용하기 전까지 현실에 보조를 맞추자는 맥락에서
제시된 것이지 이성적 논변을 근본적으로 대체하지 않기 때문이다.219)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영이 추가한 세 가지 화법은 비판적 논변과 동등한 지위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인사하기'는 영이 직접 설명하듯이 논의의 분위기를
부드럽게 해주는 효과가 있기 때문에 이성적 논변이 반감이나 적의에 오염되지
않도록 하는 보조적 역할을 한다. 그런데 ‘수사적 표현’은 영이 강조하는 것처럼 토론을 덜 지루하고, 생기 있게 만드는 차원에서 허용될 수 있지만 궤변으로 발전하여 논의의 참여자들의 판단을 흐리는 것은 용납될 수 없다. 그리고
영이 말하는 ‘이야기’나 샌더스가 말하는 ‘증언(고백)’은 논변 구성에 필요한 경험적 증거들을 모으는 단계에서 중요한 자료로 활용될 수 있지만 그 자체로는
어떤 독립적 제안의 형태를 띠지 않기 때문에 온전한 제안으로 제시되려면 논변의 형식을 갖추어 모종의 결론을 갖추어야 한다. 물론 논변 작업은 이야기나
고백을 한 당사자가 반드시 직접 할 필요 없이 다른 사람이 도와줄 수도 있다. 사실상 단적으로 말하면, 영과 샌더스의 비판은 심의 민주주의관을 위협할 어떤 요소도 가지고 있지 못하고 그들의 대안은 비판 대상을 전복시키는 대안이
아니라 비판 대상에 탄력성을 가미하는 제안일 뿐이다. 탄력성을 준다고 해서
무엇이 주된 요소인지를 결정하는 본질이 변하는 것은 아니다. 어쨌든 심의 이념에 대해 아직 충분한 이해를 가지고 있지 않은 이들을 자칫 오도할 수 있는 이러한 종류의 과장된 비판을 종식시키기 위해서도 논변적인 화법은 문화특수적인 것으로 상대화될 성질의 것이 아니며, 심의 이념이 제219) Lynn M. Sanders, "Against Deliberation", Political Theory, Vol.25, No.3, (347~376)
June, 1977, pp. 370~3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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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하는 논변 중심적 제도는 사유하고 행위하는 존재에게 보편적으로 잠재된 철학적 능력과 열망을 표출하는 제도임이 명확히 주장되어야 할 것이다. 다시 강조하지만, 심의 이념이 그려내는 정치적 의사결정 과정은 어떤 사안에 의해 촉발된 문제에 대해 가장 합리적이고 옳은 해답을 찾아가는 하나의 협력적인 철학적 추론이며 철학적 탐구이다. 그 과정에서 다양한 양태의 진술들이 포용될
수 있는 것은 그것들이 이러한 탐구에 일정부분 기여한다는 전제 하에서 이다.
5.2.2. 철학적 시민
심의 민주주의 이념은 포퍼가 중시했던 제도 확립을 통해 최악의 통치자에
대비하는 문제뿐만 아니라, 그가 제도적 대비보다 덜 비중을 두었던 과제인 최선의 통치자를 길어내는 과제에서 더욱 진가를 발휘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심의 민주주의 진영에서 지금까지 진행된 논의가 이러한 면모를 충분히 드러내었는지에 대해 다소 의구심이 든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주된 원인은 심의 이념이 겨냥하는 시민성의 본질에 대한 규정이 충분히 명확하게 이루어지지 않은
데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사실상 한 사회가 목표로 삼는 시민성이 어떤 시민성인지에 대한 규정은 특히 자라나는 세대를 대상으로 하는 공교육의 교과 과정과 교육 방법에 지침을 제시하는 중대한 사항이다. 그래서 심의 민주주의자들은 같은 이념에 동조하는 교육학자들이 심의 능력과 의지를 배양할 것으로
기대되는 여러 가지 학생 지도법이나 학습활동들을 제안해줄 것을 기다리기 전에 먼저 이들에게 심의 이념이 요구하는 시민상이 정확히 무엇인지를 제시할
필요가 있다. 그러한 규정은 심의 이념의 고유성을 명료하게 드러내는 개념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그리고 나는 심의 이념이 요구하는 시민을 한 마디로 철학적(philosophical) 시민이라고 규정하고자 한다. 철학적이라는 개념은 본고에서 추출한 심의 이념의 요건들을 꿰뚫는 가장
적절한 개념이다. 앞의 논의를 잠시 상기해보면, 심의 이념의 첫 번째 조건은
인지적 요건으로서 사실적 주장뿐만 아니라 규범적 주장에 대해서도 객관적 기준을 전제하고 타당성을 요구하며 나아가 좋음과 옳음의 문제를 구분하며 옳음의 문제를 엄격한 의미의 규범적 타당성의 논의 대상으로 규정함을 의미했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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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그리고 두 번째 조건은 의지적 요건으로서 이론적 탐구의 목표인 진리와
실천적 탐구의 목표인 옳음을 추구하되 겸허한 자세로 자신의 오류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독단을 경계하는 것이다. 이렇게 인지적 요건이 이론과 실천의 양대
영역에서 최고의 가치를 동시에 추구함은 주어진 세계와 당위적 세계의 질서를
아울러 탐구해온 철학적 사유의 포괄성과 조응한다. 또한 의지적 요소는 자신
안에서 이미 형성된 견해와 의지를 고수하고 관철시키는 것보다 진리의 이해와
옳음의 구현을 우위에 놓는 것은 문자 그대로 “지혜에 대한 지극한 사랑 내지
열망(philosophy)‘의 태도를 표출한다.
물론 혹자는 철학이 고유한 탐구 영역을 가진 하나의 학문임을 강조하면서, 적어도 철학의 하위 분야들 중에서 하나 이상의 영역에서 지속적으로 학문적
논의에 참여해야 진정한 의미에서 철학적이라는 수식어가 어울린다는 더 높은
기준을 추가하려할 수 있다. 이에 대해 적어도 세 가지 사실을 지적할 수 있다. 첫째, 현재 논의는 ‘철학자’ 혹은 ‘철인’을 규정하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학자가
아닌 대상에도 적용될 수 있는 수식어를 다루는 맥락이라는 것이다. 둘째, 심의에서 진행되는 정치적 논의는 옳음을 추구하는 까닭에, 철학의 고유한 하위 분야 중의 하나인 도덕 철학의 도덕적 추론을 포함한다는 점에서 일종의 철학적
논의라는 것이다. 그래서 여기에 참여하는 이들은 실제로 철학적 논의에 참여하는 이들이다. 셋째, 영국의 저명한 철학자 러셀(Bertrand Russell)이 “대학의
철학과에서 가르치게 되는 것이면 무엇이든 철학”이라고 말한 바 있듯이220) 철학은 그 탐구 대상에 있어 개방적이며 오히려 끝까지 파고드는 정신과 엄밀한
논변을 구성하는 방법론이 철학의 고유한 특성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그러한 정신을 가지고 그러한 방법을 활용할 수 있는 모든 이들을 철학적이라고 평가하는 것은 정당화될 수 있다.
이러한 추론에 문제가 없다면, 나는 이를 토대로 심의 민주주의 사회에서
차세대의 시민성 교육이 추구해야하는 시민성을 철학적 시민으로 규정하고 철학적 시민이 갖추어야할 3대 요건을 제안하고자 한다. 철학적 시민은 첫째, 철학이라는 학문에 대한 최소한의 이해를 갖춰야 한다. 여기에서 말하는 최소한의 이해란 철학이라는 학문의 존재와 그것의 고유한 각 하위 분야들의 특성에
220) Falzon 2002, p.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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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 인식을 의미한다. 이러한 이해는 근본적으로 사유하고 행위하는 존재로서
추구할 만한 가치가 있다는 사실 외에도, 다음의 둘째와 셋째 요건을 갖추는
데에 도움이 되기 때문에 더욱 요구된다. 둘째 요건은 철학적 사유, 즉 타당한
논변을 구성하고 논변의 타당성을 평가할 수 있는 사유를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셋째 요건은 자신의 오류가능성을 인식하면서도 진리와 옳음을
추구하는 정신을 갖추는 것이다. 이는 빠질 수 없는 요건으로서 처음의 두 요건이 갖추어지더라도 이러한 정신을 결여한다면 진정한 의미에서 철학적이라고
인정받을 수 없을 것이다.
방금 제안한 철학적 시민의 3대 요건은 다른 방식으로도 표현될 수 있다. 그리고 그 중 한 가지 방법은 ‘덕성(virtue)’이라는 개념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이를 테면 심의 민주주의는 ‘진리 지향적 덕성’과 ‘옳음 지향적 덕성’을 요구한다고 주장할 수 있다. 덕은 세 가지 측면, 즉 ‘지성적 또는 인지적(intellectual)
측면’, ‘욕구적 또는 감정적(affective) 측면’, ‘성향적 또는 의지적(dispositional) 측면’으로 구성되는 것으로 분석된다.221) 이러한 분석을 반영하면, 전술된 3대 요건 중에서 철학에 대한 최소한의 이해를 동반한 철학적 사유
능력과 오류가능성에 대한 인식과 경계는 덕의 지성적 측면을, 진리와 옳음을
추구하는 정신은 덕의 감정적 측면과 의지적 측면을 가리키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심의 이념의 두 가지 덕성을 덕의 세 가지 측면에 대한 분석을 활용하여 설명하면 이러하다. 우선 ‘진리 지향적 덕성’의 경우는 지성적으로 진실을 추구하는 데에 필요한 적절한 인지적 기능을 수행할 수 있으면서도 오류가능성을 의식하며, 감정적으로는 진실을 추구하는 것에서 즐거움을 느끼고, 성향적으로는 진실추구를 지속적으로 의지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옳음 지향적
덕성’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방식으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두 가지 덕성들은 롤즈가 말하는 시민의 능력들 중에서 합당성 개념과 비교하면서 조명될 수 있다. 롤즈는 원초적 입장에 참여하는 사람들을 합리적(rational)이고 합당한(reasonable) 이들로 전제한다. 그런데 합리성은 자신의 이해관심을 추구하는 개인적 요소를 표현하기 때문에 현재 논의와 직접적인
관련은 없고 오히려 정의감과 관련된 합당성이 공적인 것이라서 민주주의적 덕221) 이러한 덕의 세 가지 측면에 대한 논의는 황경식, 덕윤리의 현대적 의의, 아카넷, 2012,
pp.120~123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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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의 일종으로 해석되기도 한다.222) 롤즈에 따르면, 합당성의 첫 번째 기본적인 측면은 다른 이들도 기꺼이 동참한다는 전제 하에 협동의 공정한 조건을 제안하고 준수하는 것이고, 두 번째 측면은 판단의 부담을 인식하여 정치적 권력의 행사에 있어 공적 이성을 사용한 논의의 결과를 수용한다는 것이다.223) 그런데 여기서 합당성의 첫 번째 측면인 정의감은 심의 이념의 옳음 지향적 덕성과 연관되는 부분이며, 두 번째 측면인 판단의 부담은 심의 이념의 실천적인
옳음 지향적 덕성뿐만 아니라 이론적인 진리 지향적 덕성과도 유관하다. 그런데 약간의 차이점은 롤즈가 올바른 판단을 내리는 어려움의 근거들을 지적하는
데에 초점을 맞춘 반면, 심의 이념이 전제하는 오류가능성을 의식하는 지적 겸양은 여러 가지 판단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논의에서 부단한 진리와
옳음의 추구를 강조한다는 측면에서 좀 더 적극적인 함의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제 이하에서는 나는 철학적 시민성을 두 가지 시민성 논의와 비교하면서
그것의 특징을 선명하게 드러내고자 한다. 비교 대상 중의 하나는 심의 민주주의자 굿만(Amy Gutmann)의 교육에 대한 논의이고 다른 하나는 심의 민주주의 논의와는 무관하게 제안된 빌라(Dana Villa)의 소크라테스적 시민성(Socratic citizenship)이다.
굿만이 1987년에 출간한 민주화와 교육(Democratic Education)은 교육의
문제들을 풀어나감에 있어서 민주적인 심의의 강조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 저서로서 민주주의자가 미래 시민의 교육에 대해 어떤 청사진을 제시하고 있는지를
고찰할 수 있는 대표적 문헌으로 평가받는다. 그래서 굿만의 저서는 심의 이념222) 롤즈의 심의 민주주의와 덕성에 대한 논의는, 목광수, “민주주의적 덕성과 공론장”, 사회와 철학, 제 25집 2013. 4 (366~398) pp.374~378 참조
223) Rawls 1993, pp.54~58 (번역본 pp.68~73). 여기서 롤즈가 말하는 “판단의 부담”은 우리가 이론적이거나 실천적인 판단을 함에 있어서 합당성을 갖추고 있는 개인들 사이에 불일치가 있을 수밖에 없는 원천적 이유들을 총칭하는 표현이다. 그 이유들을 간략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① 관련된 경험적·과학적 증거가 상충하고 복잡하며, ② 관련 고려 사항들에 두는
비중이 서로 다르며, ③ 사용되는 개념들도 다소 모호하여 이에 대한 해석이 분분하고, ④ 증거를 평가하고 가치를 따지는 방식에 영향을 주는 각자의 총체적 경험과 인생 경로가 서로
다르며, ⑤ 하나의 문제에 대해 서로 대립하는 양측에 종종 상이한 강도의 상이한 규범적 고려사항이 존재하여 전체적인 판단이 어렵고, ⑥ 어떤 사회제도도 가치들을 수용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가치들 중에 선택이 불가피하고 우선순위를 정함에 있어 어려움이 있다. 롤즈는 이러한 판단의 부담을 토대로 관용이라는 민주주의적 개념을 강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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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교육에 적용하는 논의에서 빈번하게 인용되고 있다. 굿만은 이 책에서 미래
시민의 교육을 누구에게 맡겨야 하는지의 의문으로부터 시작하여 학교에서의
도덕 교육, 교육 기회 균등, 대학 교육과 성인 교육에 이르는 광범위한 문제들을 다룬다. 이 중에서 굿만의 기본적인 민주적 접근 방식과 심의의 능력을 함양하는 논의가 등장하는 초중고 학교의 교육 목표를 다루는 장이 우리의 논의와 가장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우선 굿만은 자신의 접근을 민주적 접근으로 특징짓고 그것을 다른 접근방식들로부터 차별화한다. 공리주의나 권리론과 같은 철학적 접근, 교육이라는 용어의 의미로부터 규범을 도출하는 개념적 접근, 보수적 또는 자유주의적 정치적 접근, 사회적 재생산을 강조하는 기능주의적 접근과 같은 여타의 접근들이
하나의 관점에서 단일한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과는 달리, 굿만은 자신이 취하는 민주적 접근은 민주적 심의(democratic deliberation)를 중시한다고 강조한다. 그녀에 의하면 민주적 심의는 교육의 도덕적 이상에 있어서의 차이를 조정하는 수단일 뿐만 아니라 민주적 교육의 중요한 요소이기도 하다.224) 굿만은
교육의 민주주의 이론으로부터 미래 시민의 교육은 부모와 국가 그리고 전문
교육자들 중에 어느 한 쪽이 독점할 수 없으며 모두가 함께 참여해야한다는
것225)과, 이들 모두가 준수해야할 두 가지 원칙이 도출된다고 주장한다. 그 중
첫째 원칙은 '비억압(nonrepression)'의 원칙으로서, 국가와 국가 내의 어떤 집단도 좋은 삶과 좋은 사회에 대한 여러 경쟁적인 견해에 대한 이성적 검토(rational deliberation)를 제한하는 데에 교육을 이용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
것이다. 둘째 원칙은 '비차별(nondiscrimination)'의 원칙으로서 모든 아동들이
차별 없이 교육적 기회를 부여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비차별의 원칙은 결국
모든 아동들에게 교육을 통해 좋은 삶과 좋은 사회에 대한 상이한 관점들을 검토할 수 있는 기회가 확보되지 않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므로 비억압의 원224) A. Gutmann, Democratic Education,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87. (이하 Gutmann
1987로 표기) pp.7~11 (번역본 민주화와 교육 pp.18~24)
225) 이는 정치적 결정에 있어서 어느 누구도 철인왕처럼 필요한 모든 지식과 도덕성을 완전히
갖춘 권위적 존재로 인정될 수 없고, 데모스 각자에게 자신을 통치할 권리를 인정해야한다는
근거에서 민주주의가 정당화되는 것처럼, 부모와 국가 그리고 전문 교육자들 중에서 어느 누구도 아동에게 완벽하게 이상적인 교육자로 인정될 수 없으며 동시에 이들 모두가 교육에 참여할 권리를 어느 정도 가지고 있다는 근거에서 정당화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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칙과 연장선상에 있다.226)
이러한 굿만의 접근에서 탁월한 점은 교육을 논할 때 민주적 심의를 반드시
필요한 절차로 인식시킴으로써 이중적 효과를 거두고 있다는 것이다. 먼저 교육을 하는 입장에 있는 이들이 교육과 관련된 중요한 사안들을 결정할 때 반드시 여러 관련 당사자들의 심의를 거치도록 하는 것은 심의 절차가 도출되는 결과에 정당성(legitimacy)을 부여한다는 심의 민주주의 이념을 교육에 관한 집단적 결정에 그대로 구현한 것이다, 또한 교육을 받는 학생들에게도 심의를 강조하면서 심의 절차를 통해서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을 직접 학습시키는 것은
심의를 통해 문제 해결하는 접근의 영속화를 꾀하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굿만이 좋은 삶과 좋은 사회에 대해 여러 다른 입장과 견해들을 폭 넓게 접하고
자율적으로 사고할 수 있게 하는 것에 초점을 두는 것도 주목할 만하다. 굿만이 말하는 좋은 삶과 좋은 사회는 롤즈가 말하는 도덕적 인격의 두 가지 특성227), 즉 목적을 추구하는 존재로서 자신의 가치관을 형성하는 능력과 정의의
원칙들을 적용하고 그것들에 따라 행위 하려는 정의감이라는 개념틀과 일맥상통하면서도 롤즈가 하나의 정의관을 고수했던 것과는 달리 개인적으로 선택할
좋음(가치관)의 문제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 논의할 옳음(정의)의 문제에 있어서까지도 더 개방된 자세로 여러 가능성을 타진하게 한다고 평가할 수 있다. 자라나는 세대들이 미래의 시민으로서 어떤 교육을 받아야하는지에 대한 굿만의 논의는 심의 민주주의를 이끌어나가는 데에 필요한 전반적인 능력의 함양을 언급하고 있다. 굿만의 논의에서는 보통 시민들이 자신의 자녀들이 초중고등 교육을 통해서 얻기를 희망하는 것과 굿만 자신이 심의 민주주의자로서 필요하다고 보는 교육이 어느 정도 대조를 이룬다. 시민들은 대개 도덕과는 무관한 의미에서 좋은 삶을 영위할 수 있는 방법을 배우는 데에도 관심을 갖는다. 그리고 읽고, 쓰고, 셈하는 초보적인 교육(3R: reading, writing, arithmetic)에서 시작하여 문학, 과학, 역사, 수학 등에 대한 지식을 습득하고 음미할 수 있으며 체육을 통해 체력을 단련하는 것이 그러한 목표에 기여한다고 본다. 반면에 굿만은 이러한 교육보다 도덕적 목적과 정치적 목적에 부합하는 교육을 더욱 강조한다. 이는 기본적인 학과 교육이 덜 중요해서가 아니며 실은 이러한
226) Gutmann 1987, pp.42~45 (번역본 pp.67~71)
227) Rawls 1971, p.505 (번역본 p.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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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이 시민의 도덕 교육에 이바지 할 수도 있지만, 도덕적 교육과 정치적 교육이 상대적으로 간과되었으며 민주적 시민의 교육에 필수적이라고 보기 때문이라는 것이 굿만의 설명이다.
도덕적 교육에서 굿만은 품성(character)을 함양시키고 도덕적 추론을 가르치는 것을 동시에 중시한다. 도덕적 품성을 결여하고 논리적 추론에 능한 사람들은 자신의 목적을 위해 논리를 이용하는 궤변론자(sophists)들에 불과하고, 반면에 강한 도덕성만을 가지고 추론 능력이 발달되지 않은 사람들은 습관과
권위에 의해 통치될 뿐 자신의 주권을 제대로 행사할 수 없기 때문이다. 특히
굿만은 심의적 인성(deliberative character)의 계발을 정치적 교육으로서 민주적 주권 사회의 시민으로서 이러한 이상을 실현하는 데에 필수적인 것으로 보고 특히 강조한다.228) 그리고 민주적 시민의 주권을 직접 행사해보는 하나의
모의훈련으로서 학교 내에서 교사들과 함께 협의체를 만들어 지난 학습과 앞으로의 학습에 대해 함께 토론하는 등 학교의 정책결정에 직접 참여하는 여러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것도 도움이 될 수 있다.229)
이러한 굿만의 논의는, 내가 앞서 제안한 철학적 시민의 3대 요건을 미래
시민들이 갖추도록 교육하는 것과 충돌하는 측면은 없다. 하지만 대신 그러한
제안이 함축하는 교육 개선안에 의해 상당 부분 보완될 필요가 있다.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굿만은 학교에서 심의를 가능하게 하는 능력을 배양하는 방법으로서 도덕적 품성과 논리적 추론 능력의 균형 잡힌 교육을 제안하였다. 그런데 굿만이 이 두 가지 능력을 어떻게 교육할 것인지에 대해서 논의할 때 새롭고 구체적인 접근은 발견되지 않는다. 굿만은 기존의 프로그램이나 교과 과목을 통해서 이러한 품성과 능력이 어떻게 길러지는지에 대해 설명한다. 굿만에
의하면 학교는 배경이 다른 학생들이 서로 어울리고 협력하며 학교생활을 하도록 유도함으로써 도덕적 품성을 자연스럽게 강화시킬 수 있으며, 학생들은 과학과 수학을 통해 논리적 능력을, 문학을 통해서는 해석 능력을, 체육을 통해서는 스포츠맨 정신을 기를 수 있다. 굿만은 도덕적 품성과 더불어 어떻게 "논리적으로 생각하고(think logically), 정합적이고 공정하게 논증하는지(argue
coherently and fairly)“를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이러한 교육을 위해 기228) Gutmann 1987, pp. (번역본 pp.77~80)
229) Gutmann 1987, pp (번역본 pp.127~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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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의 교과과정 이외에 무엇이 더 추가되어야 하는지, 아니면 기존의 교과과정을 그대로 유지하되 가르치는 방법을 바꾸어야하는지와 같은 문제에 대해서는
특별한 언급이 없다. 굿만은 그러한 논의가 심의 민주주의관에 공감하는 교육자와 교육학자들의 몫이라고 생각했던 것일까?
하지만 심의 민주주의의 이상을 민주적 교육에 반영하고자하는 일부 교육학자들은 오히려 심의 민주주의 이론가인 굿만에게 묻고 있다. 굿만의 논변은 다음과 같은 질문들에 대해 답하지 않고 있다. 시민성의 교육의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토론에 있어 어떤 지도의 형태를 취해야하는가? 어린 시민들은 어떻게
합당한(reasonable) 방식으로 심의하는 것을 배울 수 있는가? 그들은 논변 과정에 대한 한정된 지식이나 정보의 부족에도 불구하고 빈번한 연습을 통해서 이러한 과정들을
체득할 수 있는가? 어떻게 그러한 토론의 방법이 시민성 교육에 도입될 수 있는가?230)
이러한 반응은 사실상 예견될 수 있는 일이었다. 이러한 현상이 발생한 것은, 내가 앞서 강조했던 것과는 달리, 굿만은 심의 이념이 요구하는 시민상의 핵심을 구체적으로 드러내는 명료한 개념을 떠올리지 못했거나 그럴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여 그러한 개념이 특수하게 함의하는 바를 끌어낼 수 없었다. 그래서
결국 심의 민주주의적 시민이 되기 위해서는 심의 능력 배양에 필요한 도덕 교육과 추론 교육을 해야 한다는 의미상 거의 동어 반복이나 마찬가지인 제안을
하고, 학교 내 민주적 의사결정 활동을 다양하게 도입해서 참여하는 민주적 시민으로 길어야한다는 것과 같은, 다른 민주주의관을 옹호하는 이론가들도 똑같이 강조할 수 있는 지침을 제공하는 데에 그쳤기 때문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심의 이념이 요구하는 시민성을 철학적 시민으로 규정하고, 그러한 철학적 시민이 갖추어야할 요건을 밝히게 되면, 훨씬 더 구체적인
교육적 제안이 가능하다. 그리고 내가 제안하려는 바는 바로 초중고 학교에서
학생들의 인지 수준에 맞추어 철학을 하나의 독립된 교과 과목으로 도입하여
교육하는 것이다. 우선 이러한 철학 교육은 철학적 시민의 3대 요건 중에서 첫
번째 요건이 명시하는 바와 같이 철학이라는 학문에 대한 최소한의 이해를 가230) David Lefrancois & Marc-Andre Ethier, "Translating the Ideal of Deliberative
Democracy into Democratic Education: Pure Utopia?", Educational Philosophy and
Theory, Vol. 42, No. 3, (271~292) 2010. pp. 286~2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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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하게 해야 한다. 이를 테면, 만학의 학으로서 철학이 학문으로서 어떻게 태동하였으며 경험적인 분과 학문들이 어떻게 독립해나갔는지, 그래서 현재 남은
고유한 하위 분야들은 무엇이며 이들은 어떤 문제의식들로 발전되어 왔는지를
소개하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교육은 연령대에 맞추어 흥미를 유발할 수 있는
창의적인 방법을 동원해야 할 것이다. 가령 어린 아동에게는 애니메이션이나
그림책과 같은 시청각 교재를 활용하여 호기심을 유발하는 스토리텔링의 접근을 활용할 수 있다. 그런데 이는 단순한 이야기 전달이 아닌 기본적인 사고능력을 키우는 교육자와 아동의 상호작용을 활성화하는 프로그램과 밀접하게 연계되어야 한다. 그리고 학년이 올라가면서 실제로 철학의 하위분야인 형이상학, 인식론, 논리학, 도덕 철학, 정치 철학 등의 문제들의 발전사를 순차적으로 직접 접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이때에도 단순히 철학자들의 이론을 무미건조하게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문학이나 영상예술 작품과 시사문제 심지어는
게임들과 관련지어 거론함으로써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특정한 철학적 문제에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유도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그리고 학년이 높을수록 토론의 비중을 높일 수 있다. 이러한 폭넓고 다양한 철학 학습을 통해서 첫 번째 요건을 충족시키는 가운데 차세대 시민들은 일단 기본적으로 철학적 시민의 3대 요건 중에서 두 번째
요건인 철학적 사유, 즉 타당한 논변을 구성하고 논변의 타당성을 평가할 수
있는 사유 방식을 어느 정도 체득할 수 있다. 하지만 두 번째 요건을 철저히
갖추려면 체계적인 논리 교육이 필요하고 이는 논리학과 비판적 사고의 집중
학습을 요구한다. 주지하다시피 과학과 수학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추리 능력은
논리학을 정식으로 공부함으로써 얻는 논리적 능력을 대체하기 어렵다. 과학적
추론은 가설 정립과 관찰과 실험을 통해 가설을 입증하거나 적어도 아직 반중되지 않았음을 확인하는 특정한 논리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탐구의 초점도 논리 연관보다는 경험적 지식을 확장하는 데에 있다. 한편 수학적 추론은 우리가
실존적으로 부딪치는 각종 문제들 중에서 수리적 논리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에 한정하여 도움을 준다. 때문에 다양한 형식의 추론에 대한 전반적인 전망과
타당한 논증과 각종 논리적 오류에 대한 기초적인 지식은 논리학을 통해 얻어야 하고 결론을 수용할 수 없는 추론에서 숨겨진 문제의 전제를 찾아내서 의문을 제기하는 등의 비판적 사고가 독립적으로 교육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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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더불어 민주 시민은 논리적 능력을 실천적인 해답을 찾는 데에 활용해야하는 만큼, 실천 철학에 대한 탐구가 필수적이다. 도덕 철학의 교육은 주요
윤리 이론들에 대한 깊이 있는 학습을 통해서 옳음에 대한 경쟁적인 이론적 해석이 존재한다는 매우 중요한 지식을 제공해주는 동시에 관습적 도덕의 맹종이
아닌 비판적 사고를 통한 새로운 도덕 구성의 가능성과 필요성을 환기시킨다. 그리고 사회 철학과 정치 철학에서 소개되는 이상적 사회와 이상적 정치에 대한 논의는 사회와 정치를 단지 주어진 현상으로 수용하기보다는 개선시킬 수
있는 대상으로 볼 수 있는 관점을 제공한다. 이러한 교육이 부재한 가운데 시민들에게 협의의 심의 민주주의 이념의 인지적 요건, 즉 사실적 주장뿐만 아니라 규범적 주장에 대해서도 객관적 기준을 전제하고 타당성을 요구하는 논의에
참여할 수 있는 기본적 능력을 기대하는 것은 매우 비현실적이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요건인 오류가능성을 인정한 가운데 진리와 옳음을 추구하는 정신을 갖추는 것은 협의의 심의 민주주의 이념의 의지적 요건인 반독단주의적 요건을 충족시키는 전제 조건이다. 먼저 이러한 태도는 기본적으로
진리와 옳음에 대한 열망을 철학에 대한 헌신으로 표출한 동서고금의 철학자들의 치열한 삶의 여정을 접하게 함으로써 일종의 본보기(role model) 교육을 통해 길러질 수 있다. 이러한 교육이 효과적으로 이루어지면, 성공한 사업가 빌
게이츠나 스티브 잡스, 유명한 과학자 아인슈타인이나 스티븐 호킹을 동경하고
그들의 사업 전략과 과학 이론에 호기심을 가졌던 평범한 청소년들이, 가까운
장래에 피터 싱어의 동물해방 사상에 열광하고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의 매혹적인 삶을 그린 전기(傳記)를 탐독하며 김재권의 심신 이론에 대해서 궁금하게
여기게 될 수 있다. 특히 하버마스와 같이 이론적 작업뿐만 아니라 사회적 문제의 해결에 직접 참여하는 수많은 철학자들의 예는 단지 흥미진진한 탐구에만
열중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하는 지성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사회적 참여와 정치적 참여의 동기를 유발한다.
물론 철학자들의 삶뿐만 아니라 철학의 하위분야에 대한 직접적인 학습 자체가 인식의 지평을 열어주고 개방적 사고를 가능케 한다. 예컨대 형이상학과
존재론은 상이한 세계관들과 존재론들이 서로 경쟁적인 시각을 제공하므로 이들을 비교하면서 자신의 세계관을 대상화할 수 있도록 도와주며, 종교마저도
하나의 형이상학적 입장일 수 있음을 깨닫게 한다. 게다가 당장 앞에 보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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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세계에 매몰되지 않고 눈을 돌려 존재 전체를 관조하는 것은 정치에 전략적으로만 접근하는 태도의 주된 동기인 세속적 욕망의 추구를 억제할 수 있다. 또한 인식론과 지식론에서 다루는 인간의 인식의 본성과 그 한계에 대한 논의들을 접하면서 자라나는 세대들은 자신의 믿음도 확실한 것일 수 없음을 의식하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결국 더 좋은 논변에 의해 설득될 수 있는 열린 사고를 할 수 있도록 돕는다. 이러한 제안에 대해 실천적 측면에서 적어도 세 가지 반론이 제기될 수 있다. 첫째, 철학은 성인에게도 어려운 학문이기 때문에 청소년에게 가르치기 어렵다는 주장이 있을 수 있다. 이러한 주장은 현대 분석철학의 매우 전문적이고
기술적인 논의들에 대해서는 적용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대체로 철학자들과
교육자들이 연계하여 연령에 맞게 좋은 교재를 개발하고, 지도 지침을 마련하고 유능한 교사들을 양성함으로써 해결될 수 있는 문제이다. 게다가 여러 국가에서 아동과 청소년에게 철학 교육을 어느 정도 이미 시행하고 있거나 도입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231)
둘째, 첫째 반론을 다소 변형한 것으로서, 진리와 옳음을 추구하는 시민을
양성하는 데에 과연 세분화된 전문적인 철학 교육이 반드시 필요한가에 대한
의구심이 제기될 수 있다. 어느 정도의 논리 교육이나 윤리 교육 정도는 괜찮지만, 굳이 형이상학이나 인식론과 같은 시민 교육과 직접적 연관이 없어 보이는 하위 분야까지 다루는 것은 불필요해 보인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반론이 제시하는 대안으로도 어느 정도는 철학적인 시민 교육이 가능하다. 그러나
심의 이념이 담고 있는 반독단주의적 요건을 미래의 세대들이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인간 이성의 인식의 한계에 대한 자각을 가능케 하는 인식론이나 지식론을 접한 경험이 없이 이 요건을 충족시키는 것은 매우 어렵다고 본다. 그리고
인식론은 세계에 대한 포괄적 이해에 대한 열망과 긴장관계에 있으므로 형이상학을 배제하고서는 인식론을 논하기 어렵다. 이렇게 철학의 하위분야들은 서로
231) 많은 유럽 국가에서 철학이 고등학교 교육 커리큘럼에 포함되어있다. 오스트리아, 크로아티아. 불가리아, 프랑스, 그리스, 이탈리아. 포르투갈과 폴란드 등이 그러한 예이다. 미국의
경우는 대학이전의 과정에서 아직 철학을 가르치지는 않지만 ‘비판적 사고’와 ‘아동을 위한
철학’과 같은 운동을 통해 부분적으로 커리큘럼에 철학이 포함되기 시작하였다. (http://en.wikipedia.org/wiki/Philosophy_education 참조) 특히 프랑스는 이미 백년이 넘는
철학 교육의 전통을 자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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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관을 가지고 있으므로 일부를 제외하는 것은 철학교육의 효과를 저하시킬 수
있다.
셋째, 현재 우리나라의 대학 입시 체제 하에서 철학을 교과과정으로 도입하는 것은 학생들에게 학업 부담을 가중시킬 것이라는 우려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이러한 우려를 경감시킬 방법이 여럿 존재한다. 그 중 하나는
입시에 본격적으로 압박을 받기 전에 가령 고등학교 1, 2학년까지만 철학 교육을 실시하고 이들 수업의 평가는 학생부에만 반영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와 달리 철학의 하위 분야 중 일부를 입시 과목에 포함시킨다면 다른 과목의 비중을
상대적으로 줄이는 것도 방법일 수 있다. 결론적으로 철학 과목의 도입의 대의가 명확하면 실천적 측면의 어려움들을 극복하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다는 것이다. 오히려 관계자들의 창의적 노력에 의해 철학 수업은 학생들이 손꼽아 기다리는 시간이 될 수 있다.
이제 지금까지 제시한 철학적 시민의 이상을 빌라의 ‘소크라테스적 시민성’ 과 간략히 비교하고자 한다. 여기서 빌라의 시민성을 언급하는 이유는 그의 시민성이 심의 민주주의와 관련하여 제시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철학적”이라는 용어를 빈번히 사용하는 까닭에 내가 제안한 협의의 심의 민주주의 이념의 철학적 시민상과 혼동될 소지가 있기 때문이다. 2001년에 간행된 저서 소크라테스적 시민성(Socratic Citizenship)에서
빌라는 소크라테스를 비교적 있는 그대로 묘사했다고 해석되는 플라톤의 전기
대화편들에 등장하는 소크라테스에 대한 묘사를 토대로 그를 일종의 “도덕적
개인주의(moral individualism)”와 “지적인 깨어있음(intellectual sobriety)"의
상징으로 내세워, 공동체의 주류 사상을 공유하고 공적 덕목을 갖추고 공적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시민성과 대조되는 "이견을 가진(dissident), 철학적(philosophical)“ 시민상을 제시한다. ”양심적이고(conscientious), 다소 집단으로부터 소외된(moderately alienated)"232) 빌라의 시민상은 분석철학자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이 제시한 “철학자는 어떤 생각의 공동체의 시민도 아니다”233)라는 명제를 상기시킨다. 빌라가 비판적 사고를 철학적 소양의
232) Dana Villa, Socratic Citizenship,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01. (이하 Villa 2001로
표기), pp.xi~2
233) Ludwig Wittgenstein, Zettel, ed. G. E. M. Anscombe and G. H. von Wright (Berkel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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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에 놓고 잘못된 믿음을 “이성으로 용해시키는 작업(dissolvent use of
rationality)”을 높이 평가하는 것은, 정의와 각종 덕에 대한 자신의 견해에 과도하게 자신감을 가진 아테네 시민들을 ‘논파(엘렌쿠스, elenchus)’의 방법을
통해 깨우침을 주는 소크라테스의 활동으로부터 영감을 받은 것이다. 이로부터
확신과 열정에 사로잡혀 정의를 구현하겠다고 덤벼드는 것의 위험성을 차분하게 경고하고 부정의를 막는 것에 초점을 두는234) 조심스러운 접근이 제안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도시국가를 돌보기 전에 자신의 영혼을 먼저 돌보고, 행동하기 전에 멈추고 먼저 생각할 것을 권고하는 것도235) 일리가 있어 보인다.
그런데 몇 가지 중대한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우선 빌라는 도덕적 개인주의를 공동체의 주류 사상을 공유하고 공적 덕목을 갖추고 공적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시민성과 대조하였다. 그런데 첫째, 공적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속성이 반드시 공동체의 주류사상을 공유하는 것과 함께 묶일 필요가
없다. 다수의 의견과 다른 의견을 가지고 다수의 의견을 바로잡고자 정치적 회합에 참여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가 말하는 도덕적 개인주의자인 소크라테스적 시민이 공동체적, 특히 정치적 의사결정의 화합에 소극적으로 참여해야할 이유는 없다. 둘째, 빌라가 도덕적 개인주의자인 시민의 반대편으로 설정한 공동체적 개인 자체에도 의문이 생긴다. 먼저 공동체의 주류사상이란 무엇인가? 수많은 사안들에 대해 공동체의 다수가 지지하고 있는 믿음들만을 모아놓은 사상의 집합을 의미하는가? 그렇다면 이러한 사상의 집합을 자기 것으로
가지고 있는 개인은, 만일 존재한다면, 극소수일 것으로 보인다. 어떤 개인도
적어도 몇 가지 문제에 대해서는 다수와 상반되는 의견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빌라의 생각과는 달리, 대부분의 개인이 이미 도덕적 개인주의를 어느 정도 표방한다고 볼 수 있다. 오히려 공동체적 개인이라는 개념은 허구일
수 있다. 이 두 가지 통찰은 빌라의 이분법, 즉 공동체의 도덕을 공유하고 공동체 운영에 적극적인 공동체적 시민과 도덕적 개인주의를 표방하고 공동체 운영에 거리를 취하는 개인적 시민의 이분법은 성립하지 않는다는 결론을 도출한다.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70), no. 455.
234) Villa 2001, pp.2~5
235) Villa 2001 , p.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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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빌라는 자신이 제안하는 시민성 덕분에 “정치로부터 완전히 등을 지는
것”과 “철학과 정치적 개혁 간에 너무나 직접적 연관을 상정”하는 두 가지 극단적인 대안 중에 더 이상 하나를 택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는데, 과연 그 적당한 중간이 의미하는 바가 구체적으로 무엇이며, 나아가 그러한 미온적 태도를
철학적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빌라의 설명에 따르면, 그것은 “도덕적 형태의
반성을 통해서 공적 영역의 고유한 에너지를 제한”하는 것을 의미하고 그러한
반성은 “(필연적으로) 다른 곳에서 함양되고 실행”된다.236) 하지만 이러한 설명 역시 여전히 모호하다. 정치로부터 완전히 등을 지지 않는 것은 공적 회합에 자주 참석하면 통념에 휩쓸리기 쉬우니 일부러 그런 곳에는 가끔씩만 출석하라는 것인가? 빌라는 이에 대해 그렇다고 답할 수도 있고 아니면, 가능한 빠지지 않고 참여해야하지만, 동시에 별도로 자신만의 반성과 엘렌쿠스의 일대일
철학적 담소의 시간도 많이 가져야 한다고 대답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의 주장이 만일 공적 회합은 철학적 반성의 함양이나 실행과는 무관하다는 것을 함축한다면 이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집단적 의사결정을 내려야하는 자리에서는 오히려 이견이 서로 대립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이성적이고 반성적인 의견 교환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철학과 정치적 개혁 간에 너무나
직접적 연관을 상정하지 않는다는 것은 또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는 단순히 잘못된 다수의 의견에 가로막혀 소수의 올바른 제안이 좌절될 수 있으니 늘 마음의 준비를 하라는 위로의 조언인가? 어쩌면 다수로부터 핍박을 당하지 않도록
다수에 반하는 의견을 말할 때는 상황을 봐가면서 하라는 심각한 처세술적 조언일 수도 있다. 플라톤의 전기 대화편에 나타난 소크라테스의 상이한 진술들은 이러한 혼란을 증폭시킨다. 소크라테스는 용감하게 재판관에게 자신을 죽인다면 자신과 같은 시민을 쉽게 찾지 못할 것이라고 당당하게 맞서기도 하다가237), 어느 순간에는 정의와 올바른 일을 가장 우선시 했다면 그렇게 오랫동안 목숨을 부지하지 못했었을 것이라고 다소 냉소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238)
빌라의 소크라테스적 시민과는 대조적으로, 협의의 심의 민주주의 이념을
236) Villa 2001, p.29
237) 플라톤, 소크라테스의 변론, 30d
238) 플라톤, 소크라테스의 변론, 32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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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해서 내가 제시한 철학적 시민은 철학과 정치의 단절로 치닫는 회의주의와
철학과 정치의 일치를 추구하는 이상주의라는 양극단을 적당히 피하는 태도와는 거리가 멀다. 그것은 오히려 온전히 후자의 이상을 향해있다. 협의의 심의
이념의 시민은 자신의 철학적인 반성을 다른 곳이 아닌 바로 심의의 장으로 끌어들여 정치적 논의에 기여할 것으로 기대된다. 시장터의 한쪽 구석에서 엘렌쿠스를 행할 때만 철학적인 것이 아니라 정치적 토론장 한 가운데에서도 철학적이어야 하는 것이 바로 협의의 심의 민주주의 이념이 요구하는 철학적 시민이다. 달성하기 어려운 것임을 알면서도 철학과 정치를 결합하려는 노력을 중단하지 않는 것, 철학(哲學)의 빛으로 정치의 어두움을 밝히는 것, 그것이 민주주의를 지키는 진정한 의미의 철학적 시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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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 결 론
6.1. 본문 내용 요약
통상적으로 심의 민주주의관은 강제성을 띠는 정책들의 정당성은 공적인 이성적 심의의 과정을 통해 확보됨을 주장하는 정치적 정당성(legitimacy)에 대한 견해라고 알려져 있으며, 그 때문에 현대 대의 민주주의의 가장 촉망받는
보완책으로 인정받고 있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면, 심의 민주주의자들은 심의의 가치, 위상, 목표, 범위에 대해서, 그리고 민주 절차의 정당성이 절차의 공정성과 결과의 옳음(correctness) 중에서 어디에 있다고 보는지에 대해 서로
의견을 달리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심의 민주주의의 이념을 규정하는 작업은 모든 심의 민주주의자들이 공유하는 몇 가지 특징을 나열하는 데에 그칠 수
있다. 그러나 본고는 그러한 접근을 취하는 대신, 대부분의 심의 민주주의자들이 중시하는 “더 나은 논변”의 신조가 유래한 철학적 토대에 주목하고, 그것으로부터 두 가지 기본적 요건을 정식화함으로써 협의의 심의 민주주의 이념을
규명하였다.
협의의 심의 이념의 규명은 단지 심의 민주주의 논의 동향을 전망하는 기존의 여러 관점들에 또 다른 하나의 관점을 추가하는 것 이상의 의의가 있다. 심의 민주주의 진영이 팽창함과 더불어 “더 나은 논변”에 의한 지배의 고유한 의미를 희석시키고 정합성을 떨어뜨리는 논의들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이를 경계하기 위하여 심의 이념이 고유성과 정합성을 갖추기 위한 두 가지 요건이 제시되었다. 우선 인지적 요건으로서 사실적 주장뿐만 아니라 규범적 주장에 대해서도 객관적 기준을 전제하고 타당성을 요구하고, 좋음과 옳음의 문제를 구분하며 옳음의 문제를 엄격한 의미의 규범적 타당성의 논의 대상으로 규정한다는
‘규범적 타당성 요구의 요건’이 명시되었다. 또한 의지적 요건으로서 진리와 옳음을 추구하되 겸허하게 자신의 오류가능성을 인정하고 독단을 경계한다는 의미의 ‘반독단주의 요건’이 제시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요건을 결여하거나 약화시키는 사례를 지적하면서 인지적 요건은 심의 민주주의관이 선호취합적 민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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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로부터 자신의 고유성을 확보하는 데에 불가결하고, 의지적 요건은 “더 나은 논변”에 의한 지배의 정합성을 유지하는 데에 필수적임을 밝혔다. 하버마스의 의사소통 이론과 담론 윤리학이 빚어낸 상호소통적인 이성에 의한 지배라는 테제를 토대로 구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협의의 심의 이념을 하버마스의 심의 민주주의 이론이라고 규정하지 않는 데에는 세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협의의 심의 이념은 특별히 하버마스에 의해 명시적으로 제시된 것이 아니다. 둘째, 본고가 규명한 협의의 심의 민주주의는 다소 추상적인 이념이며 심의 민주주의 논의가 이미 시작된 이후에 합류한 하버마스의 정치적인 논의를
포함하지 않는다. 그래서 하버마스의 구체적 처방에서 발견될 수 있는 취약점을 협의의 심의 이념에 귀속시킬 수 없으며 협의의 심의 이념은 하버마스의 제안과 다른 방안에 의해 더 적절하게 구현될 가능성이 있다. 셋째, 민주주의와
철학의 결합이라는 협의의 심의 이념의 거시적 의의 역시 심의 민주주의의 잠재력에 대한 본고의 독자적인 해석을 담고 있다.
본고는 협의의 심의 이념을 바탕으로 민주주의의 절차적 요소와 실질적 요소라는 개념틀을 활용하여 심의 민주주의가 하나의 민주주의 이론으로서 다른
민주주의 이론보다 민주주의 발전에 더 기여할 수 있는 바와, 심의관의 고유한
특성으로 인해 직면하게 되는 문제들과 해결 방법들을 고찰하였다. 우선 국민에 의한다는 것이 심의적 관점에서는 어떻게 해석될 수 있는지를 다루고, 그
다음 국민을 위한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논의에 협의의 심의 이념은 어떻게 접근할 수 있는지를 살펴보았다. 먼저 “국민에 의한”이라는 민주주의의 절차적 요소와 관련하여 본고는 심의
민주주의가 어떤 수준의 정치적 평등을 요구하는지에 대해 다루었다. 우선 정치적 평등을 추구하기엔 개인 간에 도덕성, 지력, 지식의 차이를 무시할 수 없다는 우려에 대해 심의 민주주의는 정치적 영향력의 차이를 공적으로 제시된
논변의 설득력에 의해서 정당화하는 '논변 중심적 접근'을 취함으로써 '개인 중심적 접근'을 취할 때 피하지 못하는 차별의 색채를 완화시킬 수 있음을 조명하였다. 한편, 심의 민주주의관이 절차적 측면에서 받는 도전은 크게 두 가지가
있다. 그 중 하나는 심의 참여자들이 정치적 논의에 참여하여 논변을 교환할
수 있으려면 능력상으로나 여건상으로 제반 조건을 갖춰야 하는데 이러한 선결
요건을 충족시키는 것은 요원하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심의 민주주의 진영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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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는 자원 중심적 접근과 능력 중심적 접근이 서로 경합을 벌이고 있으며, 본고는 각각의 장점을 종합하는 시도로서, 정치적 평등을 구현하기 위한 목표는
어떤 기본적인 능력의 계발에 두되, 그러한 능력의 유무는 어떠한 자원의 제공
유무로 추정하고, 그러한 자원의 목록에는 기본적인 교육이나 훈련을 가장 기본적인 것으로 포함시킬 것을 제안하였다. 다른 한편으로, 심의 민주주의관에
직면한 또 다른 도전은 심의 절차 자체가 의사결정에 엄청난 물리적, 시간적
부담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본고는 모든 수준의 심의에 대한 조건 없는 개방이라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한쪽 극단과 시민이 제도권의 심의에
오직 간접적인 영향만을 미치는 다른 극단을 피하는 제안을 하였다. 적어도 특정 사안의 논의에 가시적 기여와 강력한 참여 의지를 증명한 시민들의 비공식적 공론장에서의 활동을 비주체적이거나 익명적인 것으로 인식하는 일은 삼가고 이들을 심의 주체로 존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가령 이들을 ‘시민 전문가’로
인정하고 제도권의 심의에 직접적으로 참여할 기회를 보장하는 것이 하나의 방법이다. 그 다음, “국민을 위한”이라는 민주주의의 실질적 요소와 관련하여 본고는
심의 민주주의관에서 발견되는 강한 도덕 인지주의적 요소에 주목하였다. 도덕
이론에서 하버마스가 말하는 강한 인지주의는 정의(justice)에 특별한 지위를
부여하여, 옳음은 좋음으로부터 구분되며 나아가 좋음에 대해 우선하는 것으로
보는 입장이다. 이러한 특징 때문에 심의 이념은 옳음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공동선을 논할 때, 무의미한 도구적인 공동선 개념이나 위험한 집단주의적 공동선 개념 대신에 유의미한 동시에 비억압적인 도덕적 공동선 개념, 즉 정의라는
공동선을 제시할 수 있다는 사실이 조명되었다. 우선 레그의 공동선에 대한 논의를 통해서 칸트적 도덕적 공동체의 특징은 옳음을 공동체 구성원 모두가 추구해야하는 공동의 가치로 인식한다는 결론을 내리고, 심의 이념이 추구하는
정치적 공동체는 바로 이러한 칸트적 공동체에 가깝기 때문에 공동선을 곧 정의(justice)로 규정할 수 있음을 보였다. 그리고 심의 민주주의 진영의 프리만과 코헨의 논의를 소개하면서 공동선을 정의로 이해하는 접근을 구체적으로 예시하였다. 그 다음, 심의 이념이 함축하는 옳음의 우선성 테제가 심의 민주주의
사회가 내리는 정치적 결정에 두 가지 방향을 제시한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첫
번째 의미의 옳음의 우선성은 공리주의와는 달리 다수를 위해 소수의 권익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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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생시키는 종류의 결정을 배제한다. 이 부분에서 본고는, 굿만과 톰슨이 생각한 것보다 공리주의가 심의 민주주의에 기여하는 바가 더 적을 수 있음을 지적하였다. 그리고 두 번째 의미의 옳음의 우선성은 가치관들에 대해 국가의 중립성을 유지함으로써 정치적 결정이 시민들이 개인으로서 추구하는 삶에 과도한
간섭을 배제한다. 이를 논하면서 본고는 샌델의 완전설적 주장이 옳음의 논의와 좋음의 논의 간의 유비관계를 입증하지 못하기 때문에 설득력이 약하며, 그의 롤즈에 대한 비판은 롤즈를 비자비적 해석할 때만 적용될 뿐, 심의 이념의
반완전설 입장에는 적용되지 못함을 밝혔다.
본문의 마지막 부분에서 본고는 심의 이념의 거시적 의의를 철학과 민주주의의 결합으로 규정함으로써 플라톤적인 반민주주의적 시각에 대응하여 심의
이념이 가장 근본적인 처방을 내릴 수 있음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작업이 필요했던 이유는 방법론뿐만 아니라 인지적 요건과 의지적 요건까지 함의하는 중심
개념을 명시함으로써 제도와 시민성의 논의에 방향제시를 분명히 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그 개념이 철학(philosophy)이어야 하는 이유는 적어도 세 가지이다. 그것의 문자 그대로의 의미가 심의 이념의 정신적 바탕을 드러내는 데에 적합하고, 심의의 도구인 논증(argument)은 철학이라는 학문이 사용하는 대표적 도구이며, 심의 이념의 정치적 논의는 철학의 하위 분야인 도덕 철학의
도덕적 추론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우선 심의 제도는 코헨이 강조한 바와 같이
데모스나 그들의 대표자들에게 보편적으로 수용가능한 전제들에 바탕을 둔 건전한 논변을 요구하는데, 이는 최악의 시민과 정치인들조차도 철학적으로 사유하고 행위하도록 통제하는 장치라고 볼 수 있으며, 그런 의미에서 철학적 제도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심의가 지닌 특성을 철학적인(philosophical) 것으로 규정하여 보편성을 지적하게 되면 영과 같이 논변을 문화 특수적으로 보는
시각을 바로잡는 데에 효과적이다. 이성적 논변, 인사하기, 수사적 표현, 이야기이라는 네 가지 화법의 관계가 애매한 영의 제안보다는 탐구적인 추론을 중심에 놓고 다른 의견을 가진 이들을 합리적이고 옳은 해답을 찾아가는 탐구의
협력자로 존중하는 철학적 제도라는 이상이야말로 영의 제안마저도 체계적으로
포용할 수 있는 틀을 제공한다. 한편 심의가 요구하는 시민성을 철학적 시민성으로 재규정하게 되면, 그렇게 하지 않았던 굿만의 경우와는 달리, 최선의 시민을 길러내는 교육을 기획함에 있어 좀 더 뚜렷하고 효과적인 청사진을 제시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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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있다.
6.2. 중우정치(衆愚政治)에 대한 근본적 처방
본고의 논의는 심의 민주주의 이념을 해석함에 있어서 크게 두 단계의 도약을 통해 완성되었다. 심의 민주주의 논의로부터 협의의 심의 민주주의 이념을
분리해낸 것이 첫 번째 이행(移行)이고, 그 결과로 새롭게 규명된 심의 민주주의 이념을 철학과 민주주의의 결합으로 규정한 것이 두 번째 이행이다. 그리고
사실상 첫 번째 도약은 두 번째 도약을 준비하는 의미가 크다. 결국 두 번의
도약은 민주주의가 중우정치(衆愚政治)로 전락할 수 있다는 우려에 대해 근본적인 처방을 내릴 수 있는 이론적 발판을 마련하기 위한 것이다. 그 근본적인
처방이란 바로 민주사회의 시민이 어리석은 대중에 머물지 않고 그것과 정반대인 지혜를 열망하는 자로 거듭나는 것이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이러한 해법의 실마리는 민주주의를 가장 불신했던 플라톤에게서 발견된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플라톤은 철인통치의 비전(vision)은
정치권력과 철학적 정신이 일체가 되지 않는다면 인류에게 재앙이 그치지 않을
것이라는 통찰에 근거한다. 이러한 통찰에는 사실상 이견이 있을 수 없다. 인류의 불행이 상당부분 불합리와 부정의로부터 초래되었다면, 그것을 교정할 수
있는 지력과 도덕적 열망을 두루 갖춘 이들에게 그 과업을 수행할 수 있는 권한이 부여됨으로써 그러한 불행이 종식될 수 있다는 생각은 어찌 보면 너무나
당연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플라톤의 문제는 이러한 능력과 소양의 정체를 신비화하면서 오직 소수만 그러한 범주에 들 수 있는 것으로 단정한 데에 있다. 그래서 심의 민주주의 이념은 플라톤의 선의 형상에 대한 지식을 누구나 이해
가능한 보편화 원칙으로 대체하고, 플라톤의 통치자가 갖추어야할 철학적 지식에 대한 ‘전부 또는 전무’의 개념을 무수한 정도 차이를 허용하는 연속체로 대체하며, 플라톤의 차별적 금속 신화를 평등적 의사소통행위 이론으로 대체할
수 있음을 보였다. 이제 이러한 기획에 대해서 제기될 수 있는 세 가지 중요한 의구심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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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를 돌려보자. 그 중 첫 번째는 바로 협의의 심의 이념 역시 완전설로 보인다는 반론이다. 즉, 협의의 심의 이념은 옳음의 문제에 대해서만 공적으로 관여하고 좋음의 문제는 개인의 자유에 맡기는 반완전설적 입장을 취한다고 하는데, 사실상 차세대에게 체계적인 철학 교육을 시키고 시민들에게 철학적일 것을 기대하는 것은 철학적인 삶을 높이 평가하는 것이므로 어떤 삶이 좋은 삶인가에 대해 중립적이지 않은 일종의 완전설적 입장이며, 그래서 비일관된 것이
아닌가라는 의구심이다. 그런데 이러한 의문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여기서 말하는 철학적이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앞의 5장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본고에서 철학적이라는 수식어가 사람에게 적용될 때에 그것은 진실과 옳음을 추구하려는 마음가짐과 그것을 추구하는 데에 필요한
최소한의 소양과 능력을 갖춘 것을 의미한다.
먼저 그것이 교육에 적용될 때를 생각해보자. 우리는 자라나는 세대에게 학교에서 여러 교과목들을 가르치는데 그 목적은 삶을 살아가는 데에 필요한 실용적 지식을 제공하는 것, 어떤 대상에 대한 탐구심을 충족시켜 주는 이론적
지식을 주는 것, 그리고 자신에 대한 이해를 심화시켜주는 것 등 다양하다. 가령 읽고 쓰고 셈하는 것은 실용적이고, 사회과학과 자연과학은 이론적 지식을
제공하고, 역사는 자기 이해를 돕는 성격이 두드러진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반드시 하나의 과목이 배타적으로 한 범주에만 속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예컨대 역사 과목은 자신의 뿌리에 대한 이해를 도우면서도 과거에 일어난 일에 대한 탐구심을 충족시켜주며 때로는 그 지식을 실용적으로 사용할 수도 있다. 철학 교육도 마찬가지이다. 심의 민주주의의 관점에서는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자신의 주권을 심의를 통해서 올바로 행사하는 시민으로서 필요한 지식과 능력을
키운다는 측면에서 실용적이며, 존재와 인식과 가치 등과 같은 주제들에 대한
탐구인 동시에, 사유하고 행위하는 존재로서의 자기이해와도 관련이 있다.
그런데 우선 첫 번째와 두 번째 효과, 즉 실용성과 탐구심의 충족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철학 교육이 어떤 특정한 삶을 종용하는 것이라고 볼 여지는 거의
없다. 하지만 적어도 자기이해의 측면에서 철학이 결국에는 삶에 대한 태도에
어떤 영향을 미친다는 주장이 제기될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이 지점에서 주목해야할 것은 여기서 말하는 철학적 존재로서의 자기이해는 다름 아니라 바로
진리와 옳음을 추구하는 존재로서의 자기이해라는 것이다. 본래 심의 이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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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설을 반대하는 이유는 바로 완전설이 특정한 삶을 편향되게 권함으로써 개인의 자유를 과도하게 제한할 여지가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하지만 진리와 옳음을 추구하는 존재로서의 자기이해를 강조하는 것을 이러한 의미의 완전설, 즉 특정한 삶을 편향되게 권함으로써 개인의 자유를 지나치게 제한하는 입장으로 규정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그러한 자기 이해의 부재나 결여가 함의하는
것은 불합리와 부정의에 대한 무감각이기 때문이다.
심의 이념이 철학적 시민성을 중시하는 배경도 마찬가지이다. 여기서 시민이 철학적일 것을 독려하는 것은 적어도 시민으로서 공적인 판단을 내려야할
때 이성적인 논변을 통해서 진실과 옳음을 추구할 것을 권하는 것이다. 이를
바꿔 표현하면, 정치적 집단 결정에 임할 때, 불합리와 부정의를 피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정치적 활동에서 불합리와 부정의를 지향하지 않는 한. 개인 간의 차이를 간과하고 자유를 억압할 여지가 거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일
철학적 시민의 이상이 불합리와 부정의를 지향할 자유를 제한한다는 주장이 제기된다면, 이에 대해 심의 민주주의자는 우선 불합리와 부정의를 추구하거나
방관할 자유를 자유로서 당당히 요구할 수 있는지 반문할 수 있다. 하지만 누군가 여전히 진실과 옳음을 추구하거나 불합리와 부정의를 타파하는 삶을 표방하는 것도 어떤 특정한 삶을 종용하는 것이니 일종의 완전설이라고 주장한다면, 이는 분명히 완전설의 의미를 확장한 것이다. 애초에 심의 민주주의 이념이
경계하고자 했던 완전설은 좋음의 관점에서 특정한 삶을 추구하도록 종용하는
입장이었으며, 심의 민주주의 이념이 중시하는 것은 옳음의 관점에서 삶을 규율하도록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누군가 완전설의 의미를 확장하여 심의 이념을 굳이 완전설이라고 부르고자 한다면, 심의 민주주의자의 입장에서는
그러한 완전설은 본래 심의 이념이 경계하고자 했던 종류의 완전설과는 다른
종류의 것이므로 심의 이념의 내부에 이론적으로 비일관적인 측면은 없다고 충분히 대응할 수 있는 것이다.
심의 이념에 대한 두 번째 의구심은 그것을 일종의 엘리트주의(Elitism)로
보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엘리트주의란 뛰어난 능력을 가진 소수의 사람이
사회나 국가를 이끌어야 한다고 여기는 견해를 의미하는데, 평등주의적 시각에서 상당한 반감을 일으키는 부정적인 함의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의구심을 갖는 배경에는 심의에서는 결국 남보다 논변을 잘 제시하여 다른 이들을 설득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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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있는 능력 있는 사람들, 즉 엘리트들의 의견이 존중되고 다수는 그들을 좇아가게 되어있다는 생각이 자리 잡고 있다.
이에 대한 대응으로는 다음과 같은 시각의 전환이 제안될 수 있다. 우선 단순히 형식적으로 특정 학력이나 학벌을 기준으로 삼지 않고 실질적인 능력에
의해 엘리트를 규정한다면, 이러한 엘리트주의는 각 개인의 도덕성과 지식과
지력을 함께 묶어 개인 간의 비교가 가능하다는 것을 가정하고 있다. 앞서 3장
2절의 서두에서 정치적 평등을 논하면서 밝힌 바와 같이, 이러한 가정은 개인의 사고력에 관한 '통합적 비교론'라고 부를 수 있는데, 사실은 이러한 가정이
성립한다고 보기 어렵다. 사고력의 스펙트럼 상에서 누가 더 우위에 있는가는
양쪽 극단에 속하는 이들, 가령 현자와 정신 지체자를 비교하지 않는 한, 중간
지대에 위치하는 다수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비교 판단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상이한 개인들은 상이한 능력의 조합을 가지고 있을 터인데, 도덕성과 지식과 지력이 서로 비교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이 개념들 각각이 다시 여러 하위 항목으로 나뉘므로 각 영역 내의 비교도 어렵기 때문이다. 따라서 극단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누가 진정한 엘리트인가를 사전(事前)에 규정하는 것 자체가 복합적인 것을 단순화하는 무리한 시도이다.
오히려 정치적 영역에서 엘리트라는 호칭이 적절한 사람은 사후(事後)에 인정된다. 즉, 어떤 사안에 대해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는 이들이 있다면 그러한
판단을 내린 것이 확인된 이후에 비로소 우리는 그들을 엘리트라고 불러야할
것이다. 그런데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의 범주에는 단지 더 나은 논변을 제시할 수 있는 사람뿐만 아니라 여러 논변들을 듣고 그 중에 가장 나은
논변을 가려낼 수 있는 사람도 속한다고 보아야 한다. 더 나은 논변을 지지하는 것은 단순히 그 논변의 제공자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그의 논변을 또 다른
판단자로서 승인(承認)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엘리트의 외연은 확장될 수 있다. 게다가 정치적으로 사안은 다양하므로 어떤 대표자나 일반 시민이
모든 사안을 섭렵하는 것은 어렵고 오히려 특정 사안에서 더 두각을 나타낼 가능성이 높고, 이는 엘리트의 외연을 더욱 넓히는 효과가 있다. 이러한 연유에서
심의 이념의 틀 안에서는 누구나 잠재적인 엘리트라고 할 수 있다.
심의 이념의 기획에 대한 세 번째 의구심은 그것의 실현가능성에 대한 것이다. 과연 심의 민주주의 이상은 실현 가능한가? 과도하게 이상주의적(理想主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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的)인 것은 아닌가? 이러한 의구심에 대해 우선 두 가지를 지적하고 싶다. 첫째, 숭고한 이상은 설령 그것에 도달하는 것이 불가능해 보일 때조차, 그것을
향한 진보를 가능케 하기 위해서라도 분명하게 주어져야한다. 이상의 존재 가치는 근본적으로 올바른 방향의 제시에 있는 것이다. 둘째, 실현가능성을 논할
때, 우리는 신중할 필요가 있다. 논리적, 법칙적으로 가능하지 않은 것을 추구하는 것이 불합리하다는 데에는 누구나 동의할 것이다. 하지만 논리적, 법칙적으로 가능한 구체적인 처방의 실현가능성 여부의 판단은 경험적 지식을 바탕으로 이루어진다. 그런데, 관련된 경험적 지식의 확보는 두 가지 가변적 요소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먼저 판단 당사자의 의지와 능력에 따라 정보의 양과 질과 균형이 좌우되며, 또한 경험적 지식 자체가 새로운 사실의 발견으로 수정되거나 확장될 수 있는 것이다.
심의 민주주의는 크게 두 가지 측면, 즉 제도와 시민성에 있어서 실현가능성을 의심받을 수 있다. 이 때 제도적인 측면에서는 심의 절차를 도입함으로써
부과되는 물리적 부담을 경감시키는 방법이 고안될 수 있다는 점에서 실현가능성의 문제에 비교적 탄력적으로 대응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면, 관심사를 중심으로 일종의 분담화(分擔化)가 이루어져 각 시민은 자신이 특별히
중시하는 문제의 심의를 위주로 참여하는 것이다. 이는 각자가 심의에 참여함으로써 소요해야하는 시간과 습득해야하는 정보와 지식의 부담을 줄일 수 있다. 또한 제도권의 심의에 대한 정보, 특히 특정 제안과 그것에 관한 토론의 논리적 구조를 간결하게 정리한 자료를 인터넷을 통해 열람할 수 있도록 문서작업을 보완할 필요가 있다. 현재 국회의 회의록을 보면 회의 대화 내용을 그대로 기록되어 있는데, 질의응답 형식으로 되어있고 빈번하게 질의에 대한 응답을 서면으로 대체하고 있다. 그런데 질의응답 방식의 대화뿐만 아니라 상정된
법안이 주요 전제들과 결론의 형식으로 분석된 자료가 함께 제시된다면 문제
파악 시간을 절약하여 질이 높은 토론의 시간을 확보할 수 있으며, 추후에 개정을 논의할 때도 어떤 전제에 문제를 제기하는 것인지를 분명히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심의 민주주의 이념의 실현가능성에 대한 의구심은 이제 그것이
제안하는 시민성에 집중될 수 있다. 어떻게 다양한 배경과 특성을 가진 시민들
모두가 철학적이기를 바랄 수 있는가? 이러한 의문에 대해 본고는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분명히 하고자 한다. 협의의 심의 이념이 제안하는 시민성의 실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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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세대보다는 미래 세대를 겨냥하며, 이들에 대한 다년간의 체계적이고 창의적인 철학 교육을 전제로 추진되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미래 시민이 그러한
교육을 거친 후에 단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만족할만한 수준 이상의 철학적
소양과 열망을 갖는 것에 의존하지도 않는다. 다만 그러한 문지방을 넘는 이들이 수적으로 충분해져서 정치적 의사 결정에서 늘 다수를 이루어 합리적이고
불편부당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가능성에 희망을 거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더 나은 논변”에 의한 지배의 테제를 핵심에 둔 협의의 심의 이념은 다수의 철학적 시민들로 플라톤의 소수의 철인 통치자들을 대체하는 정치적 이상(理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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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이 외 국외자료는 생략. 끝.
첫댓글 하버마스를 인용하는데 모두 허상이라 본다 주관 상호주관 객관사회들의 대립은 하하 글쎄? 허상이 아니면 무엇일까
하긴 뭐어~ 내가 지극히 혐오하는 센델 변문숙이 인용하는 그 친구도 그렇고 쨔스팃쓰는 없다 있을 수가 없는 개소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