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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계사년 6월 (1593년 6월)
434
6월 초1일 (갑신) [양력 6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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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탐후선이 들어왔다.
436
어머니 편지도 왔는데. 평안하시다고 한다. 다행 다행이다. 아들의 편지와 조카 봉의 편지가 한꺼번에 왔다.
437
명나라 관원 양보(楊甫)가 왜놈의 물건을 보고 기뻐 날뛰었다고 한다. 왜놈의 말안장 하나를 가지고 갔다고 한다.
438
순천부사 ∙ 광양 현감이 와서 봤다. 탐후선이 왜놈의 물건을 가져 왔다. 충청수사 정걸(丁傑) 영감이 왔다. 나대용(羅大用) ∙ 김인문(金仁問) ∙ 방응원(方應元)과 조카 봉도 왔다. 그 편에 어머니가 평안하심을 알았다. 다행다행이다.
439
충청수사 정걸(丁傑) 영감과 함께 조용히 이야기하였다. 저녁밥을 대접했는데, 그 편에 들으니, 황정욱(黃廷彧) ∙ 이영(李瑛)이 강가로 나가서 같이 이야기했다고 한다. 한심스러움을 이기지 못하겠다.
440
이 날은 맑았다.
441
6월 초2일 (을유) 맑다. [양력 6월 30일]
442
아침에 본영의 공문을 적어 보냈다.
443
온양의 강용수(姜龍壽)가 진에 와서 명함을 드리고 나서 와 보고서 먼저 경상도 본영으로 갔다. 판옥선과 군관 송두남(松斗男) ∙ 이경조(李景祚) ∙ 정사립(鄭思立) 등이 본영으로 돌아갔다.
444
아침을 먹고나서 순찰사 군관이 공문을 가지고 왔다. 적의 정세를 알아서 돌아가는데 우수사와 상의하여 답하여 보냈다.
445
강용수(姜龍壽)도 왔다. 양식 다섯 말을 주어 보냈다. 원훈(元塤)이 같이 왔다고 한다.
446
정 영감도 배에 와서 같이 이야기했다.
447
가리포첨사 우경(虞卿: 具思稷)과 같이 한 시간이나 이야기하였다.
448
저녁에 송아지를 잡아서 나누어 먹었다.
449
6월 초3일 (병술) 새벽에 맑더니 저녁나절에 비가 많이 왔다. [양력 7월 1일]
450
지휘선에 연기를 그을리려고 좌별선에 옮겨 탔다. 막 활쏘기를 하려는데, 비가 많이 왔다. 온 배에 비가 새지 않는 곳이 없어 앉을 만한 마른 곳이 없다. 한심스럽다.
451
평산포만호 ∙ 소비포권관 ∙ 방답첨사가 함께 와서 봤다.
452
저물 무렵에 순찰사(권율) ∙ 순변사(이빈) ∙ 병사(선거이) ∙ 방어사(이복남) 등의 답장이 왔는데, 딱한 사정이 많았다.
453
각도의 군마가 많아야 오천 마리를 넘지 못한다 고 하고, 양식도 거의 다 떨어졌다고 했다.
454
왜적들의 발악이 날로 더해 가는 이 때에 일마다 이와 같으니 어찌하랴! 어찌하랴! 초저녁에 상선으로 돌아와 잠자리에 들었다.
455
비가 밤새도록 내렸다.
456
6월 4일 (정해) 종일 비가 내리니 긴 밤이었다. [양력 7월 2일]
457
아침밥을 먹기 전에 순천부사(권준)가 왔다. 식사한 뒤에는 충청수사 정걸(丁傑) 영감과 이홍명(李弘明) ∙ 광양현감(어영담)이 와서 종일 군사에 관한 이야기하였다.
458
6월 5일 (무자) 종일 비가 내렸다. [양력 7월 3일]
459
비가 억수로 쏟아져서 사람들이 감히 배 밖으로 머리를 내밀기가 어려웠다.
460
오후에 우수사가 왔다가 날이 저물어서 돌아갔다.
461
저물 무렵 바람이 바람이 몹시 세차게 불므로 각 배들을 간신히 구호했다.
462
이홍명(李弘明)이 왔다. 저녁에 밥을 먹은 뒤에 돌아갔다.
463
경상수사가 웅천의 적도들이 혹감동포(부산시 북구 구포동)로 들어올 수도 있으니 들어가 치자고 공문을 보냈다. 그 음흉한 꾀가 가소롭다.
464
6월 6일 (기축) 비가 오락가락하였다. [양력 7월 4일]
465
순천부사가 와서 봤다. 보성군수(김득광)은 갈려가고, 김의검(金義儉)이 되었다고 한다.
466
충청수사가 배에 와서 이야기했다.
467
이홍명(李弘明)이 오고 방답첨사도 왔다가 곧 돌아갔다.
468
저녁에 본영 탐후인이 와서 어머니께서 편안하시다고 한다.
469
또 소문에 흥양현감의 말이 낙안에 이르러 죽었다고 한다. 몹시 놀랬을 따름이다.
470
6월 7일 (경인) 흐리되 비는 오지 않았다. [양력 7월 5일]
471
순천부사 ∙ 광양현감이 왔다. 우수사 ∙ 충청수사도 왔다. 이승명(李勝明)도 와서 종일 서로 이야기했다.
472
저녁에 본도(전라도) 우수사의 우후(이정충)가 와서 봤다. 서울안의 소식을 낱낱이 전한다. 몹시 가증스럽고 한탄스러움이 그지없다.
473
6월 8일 (신묘) 잠깐 맑다가 바람이 불고 온화하지 않다. [양력 7월 6일]
474
아침에 영남수사의 우후가 군관을 보내어 산 전복을 선사했다. 그래서 구슬 서른 개를 대신 보냈다.
475
군관 나대용(羅大用)이 병으로 본영에 돌아갔다. 병선 진무 유충서(柳忠恕)도 병으로 사임하고 육지로 갔다.
476
광양현감이 오고 소비포권관도 왔다.광양현감은 소고기를 내어 같이 먹었다.
477
탐후선이 들어왔다.
478
각 고을의 색리 열한 명을 처벌했다. 옥과의 향소(鄕所)는 전년부터 군사를 다스리는 일에 많이 부지런하지 못하여 결원이 거의 수백 명에 이르렀는 데도 매양 속이어 허위보고를 했다. 그래서 오늘은 사형에 처하여 목을 높이 메달아 보였다.
479
모진 바람이 그치지 않는다. 마음이 괴롭고 어지러웠다.
480
6월 9일 (임진) 맑다. [양력 7월 7일]
481
수십 일이나 괴롭히던 비가 비로소 개이니, 진중의 장병들이 기뻐하지 않는 이가 없다.
482
순천부사 ∙ 광양현감이 와서 집노루 고기를 차려 놓았다.
483
몸이 몹시 불편하여 종일 배에 누웠었다.
484
접반관의 공문이 왔는데, 제독 이여송(李如松)이 충주에 이르렀다고 한다.
485
지방의 의병인 성응지(成應祉)가 돌아올 때 본영의 군량미 쉰 섬을 실어 왔다.
486
6월 10일 (계사) 맑다. [양력 7월 8일]
487
우수사(이억기)와 가리포첨사가 이곳에 와서 작전계획을 세부적으로 의논하였다. 순천부사도 왔다.
488
뜸 스무 닢을 짰다.
489
저녁에 영등포 척후병이 와서 보고하는 내용에,
490
"웅천의 적선 네 척이 본토(일본)로 돌아갔고, 또 김해 어귀에 적선 백쉰 여 척이 나타났는데, 열아홉 척은 본토로 돌아가고, 그 나머지는 부산으로 갔다."
491
고 했다. 새벽 두 시쯤에 온 수사 원균(元均)의 편지에,
492
"내일 새벽에 나아가 싸우자."
493
고 한다. 그 하는 흉계와 시기(猜忌)하는 꼴을 말로서는 못하겠다. 그래서 밤이 되어도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 네 고을의 군량에 대한 공문을 만들어 보냈다.
494
6월 11일 (갑오) 잠깐 비가 오다 개었다. [양력 7월 9일]
495
아침에 적을 쳐부수 공문을 작성하여 영남우수사 원균(元均)에게 보냈더니, 술에 취하여 정신이 없더라고 한다.
496
이를 핑게삼아 대답이 없었다.
497
정오에 충청수사의 배에 갔더니, 충청수사는 내 배에 와서 앉아 있었다. 잠깐 이야기하다가 헤어졌다.
498
그 길로 우수사의 배에 갔더니, 가리포첨사 ∙ 진도군수 ∙ 해남현감 등이 우수사와 같이 술자리를 베풀었다. 나도 몇 잔 마시고서 돌아왔다.
499
탐후인이 와서 고목을 바치고 갔다.
500
6월 12일 (을미) 잠깐 비가 오다 개었다. [양력 7월 10일]
501
아침에 흰 머리카락 여남은 올을 뽑았다. 그런데 흰 머리칼인들 어떠랴마는 다만 위로 늙으신 어머니가 계시기 때문이다.
502
종일 홀로 앉아 있는데, 사량만호가 와서 보고는 돌아갔다.
503
밤 열 시 쯤에 변존서(卞存緖)와 김양간이 들어왔다.
504
행궁(전주의 광해군 숙소)의 기별을 들으니, 동궁(東宮:光海君)께서 평안하지 않다고 하니, 그지없이 걱정이 된다.
505
정승 유성룡(柳成龍)의 편지와 지사 윤우신(尹又新)의 편지도 왔다. 소문에 종 갓동( 同) ∙ 종 철매(哲每) 등이 병으로 죽었다 하니 불쌍하다.
506
중 해당(海棠)도 왔다.
507
밤에 명나라 군인 다섯 명이 들어 왔다고 수사 원균(元均)의 군관이 와서 전하고 갔다.
508
6월 13일 (병신) 맑다. 저녁나절에 잠깐 비오다가 그쳤다. [양력 7월 11일]
509
명나라 사람 왕경(王敬)과 이요(李堯)가 와서 수군의 상황을 살폈다.
510
소문에 들으니, 제독 이여송(李如松)이 나가 치지 않아서 명나라 조정에서 문책을 했다고 한다. 그들과 조용히 이야기하는 가운데 느껴지는 게 많았다.
511
저녁에 진을 거제도 세포(거제시 사등면 성포리)로 옮겨 머물렀다.
512
6월 14일 (정유) 비가 잠깐 오다 개었다. [양력 7월 12일]
513
아침밥을 먹은 뒤에 낙안이 와서 봤다. 가리포첨사를 청해다가 같이 아침밥을 먹었다.
514
순천부사 ∙ 광양현감이 왔다. 광양현감은 노루고기를 차려냈다.
515
전운사(轉運使) 박충간(朴忠侃)의 공문과 편지가 왔다. 경상좌수사의 공문과 그 도우수사의 공문이 왔다.
516
저물녘에 비바람이 세게 치더니 곧 그쳤다.
517
6월 15일 (무술) 비가 잠깐 오다 개었다. [양력 7월 13일]
518
우수사(이억기) ∙ 충청수사(정걸) ∙ 순천부사(권준) ∙ 낙안군수(신호) ∙ 방답첨사(이순신)가 불러와서 철맞이 음식을 먹으며 놀다가 저물어서야 헤어졌다.
519
6월 16일 (기해) 잠깐 비왔다. [양력 7월 14일]
520
저녁나절에 낙안군수를 통하여 진해의 고목(告目)을 얻어 보니, 함안에 있는 각 도의 대장들이, `왜놈들이 황산동(黃山洞)으로 나가 진을 쳤다'는 소문을 듣고 모두 물러나, 진양과 의령을 지킨다고 하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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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부사 ∙ 광양현감이 왔다.
522
초저녁 쯤에 영등포의 척후병이 와서 보고한 내용에,
523
"김해 ∙ 부산에 있던 적선 무려 오백 여 척이 안골포 ∙ 제포 등지로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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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한다. 다 믿을 수는 없지만, 적도들이 세력을 모아서 옮겨 다니며 침범할 계획도 없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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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우수사(이억기)와 충청수사 정걸(丁傑)에게 공문을 보냈다.
526
밤 열 시쯤에 대금산 척후병이 와서 보고하는 것에도 마찬가지여서, 송희립(宋希立)을 경상우수사(원균)에게 가서 의논케 하니,
527
"내일 새벽에 군사를 거느리고 오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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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것이다. 적의 꾀란 무척 헤아리기 어렵다.
529
6월 17일 (경자) 비가 오다가 개이다가 한다. [양력 7월 15일]
530
이른 아침에 경상우수사 원균(元均) ∙ 전라우수사 이억기(李億祺) ∙ 충청수사 정걸(丁傑) 등이 와서 의논했는데, `함안에 있던 여러 장수들이 진주로 물러가 지킨다'는 말이 과연 사실이었다.
531
식사를 한 뒤에 경수(景受) 이억기(李億祺) 영감의 배에 가서 앉을 자리를 고치게 하여 우수사의 배에서 종일 이야기했다.
532
조붕(趙鵬)이 창원에서 와서 `적세가 엄청나게 대단하다'고 했다.
533
6월 18일 (신축) 비가 오다가 개이다가 한다. [양력 7월 16일]
534
아침에 탐후선이 들어왔다. 닷새만에 여기 이르렀다. 아주 옳지 않다. 그래서 곤장을 쳐서 보냈다.
535
오후에 경상우수사(원균)의 배로 가서 같이 앉아 군사일을 의논하고 왔다.
536
연거푸 한잔 한잔 마신 것이 몹시 취하여 돌아왔다.
537
부안 ∙ 용인이 와서 그 어머니가 갇혔다가 도로 풀려 나왔다고 했다.
538
6월 19일 (임인) 비가 오다가 개이다 했다. [양력 7월 17일]
539
바람이 세차게 불며 그치지 않다. 진을 오양역(烏揚驛: 거제시 사등면 오량리) 앞으로 옮겼으나, 바람에 배를 고정할 수가 없으므로, 다시 고성 역포(亦浦: 통영시 용남면)로 옮기다.
540
봉과 변유헌(卞有憲) 두 조카들을 본영으로 보내어 어머니의 안부를 알아서 오게 했다.
541
왜놈의 물건과 명나라 장수의 선물 및 기름 등을 아울러 본영으로 보냈다. 각 도에 공문을 보냈다.
542
6월 20일 (계묘) 흐리며 바람이 세게 불었다. [양력 7월 18일]
543
제삿날이라 종일 혼자 앉아 있었다.
544
저녁에 방답 ∙ 순천부사 ∙ 광 양현감이 와서봤다.
545
조붕(趙鵬)이 그의 조카 조응도(趙應道)와 함께 와서 봤다.
546
이날 배 만들 재목을 운반해 오는 일로 그대로 역포에서 잤다.
547
밤이 되니 바람이 잤다.
548
6월 21일 (갑진) 맑다. [양력 7월 19일]
549
새벽에 진을 한산도 망항포(閑山島 望何應浦)로 옮겼다.
550
점심을 먹을 때 원연이 왔다. 우수사도 청해서 같이 앉아 술을 몇잔 마시고 헤어졌다.
551
아침에 아들 회가 들어왔다. 그 편에 어머니 께서 편안하시다는 소식을 들으니, 다행이다.
552
6월 22일 (을사) 맑다. [양력 7월 20일]
553
전선(戰船)에 자귀질을 시작했는데, 자귀장이 이백열네 명이다. 물건나르는 사람은 본영에서 일흔두명, 방답에서 서른다섯 명, 사도에서 스무다섯 명, 녹도에서 열다섯 명, 발포에서 열두 명, 여도에서 열다섯 명, 순천에서 열 명, 낙안에서 다섯 명, 흥양 ∙ 보 성에서 각 열 명이었다.
554
방답에서는 처음에 열다섯 명을 보냈기에 군관과 아전을 처벌하였는데, 그 정상이 몹시 간교하였다.
555
제2호 지휘선의 급수군 손걸(孫乞)을 본영으로 돌려보냈던 바, 못된 짓을 많이 하고 돌아다니다가 갇혔다기에 붙잡아 오라고 하였더니, 이미 들어와서 현신하였으므로, 제 맘대로 드나든 죄를 다스리고, 아울러 우후의 군관 유경남(柳景男)도 처벌하였다.
556
오후에 가리포첨사가 왔다. 적량의 고여우(高汝友)와 이효가(李孝可)도 왔다.
557
저녁에 소비포 이영남(李英男)이 와서 봤다.
558
초저녁에 영등포 척후병이 와서 보고하기를,`별다른 소식은 없지만 적선 두 척이 온천(칠천량)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왔다'고 했다.
559
6월 23일 (병오) 맑다. [양력 7월 21일]
560
이른 아침에 자귀장이들을 점호하였더니 한 명도 결근이 없었다고 했다.
561
새 배에 쓸 밑판을 만드는 것을 마쳤다.
562
6월 24일 (정미) 비가 내렸다. [양력 7월 22일]
563
식사를 한 뒤에 비가 많이 오고 바람이 세게 불더니 저녁까지 그치지 않았다.
564
저녁에 영등포 척후병이 와서 보고하였다.
565
"적선 오백 여 척이 23일 밤중에 소진포(거제시 장목면 송진포)로 모여 들어갔는데, 그 선봉대는 칠천량에 이르렀다."
566
는 것이다. 초저녁에 또 대금산 정찰군과 영등포 정찰군이 와서 보고하는 것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567
6월 25일 (무신) 종일 비가 많이 왔다. [양력 7월 23일]
568
우수사(이억기)와 함께 같이 앉아서 적을 칠 일을 의논하는데, 가리포첨사도 왔다. 경상우수사(원균)도 와서 함께 상의했다. 소문에
569
"진양에는 성이 포위되었는 데도 감히 아무도 나가 싸우지 못한다"
570
고 한다. 연일 비가 내려서 적도들이 물에 막혀 날뛰지 못하는 것을 보면, 하늘이 호남지방을 잘 돕고 있는 것이다. 다행다행이다.
571
낙안에 군량 백서른섬 아홉 말을 나누어 주고, 또 순천부사(권준)가 군량 이백 섬을 가져 와서 바치고서 벼를 찧어 쌀을 만들었다고 했다.
572
6월 26일 (기유) 비가 많이 오고 마파람이 세게 불었다. [양력 7월 24일]
573
복병선이 와서 변고를 보고하여 말하기를,
574
왜적의 중선 ∙ 소선 각 한 척이 오양역(烏揚驛) 앞까지 이르렀다.
575
했다. 호각을 불어 닻을 올리고 모두 적도(통영시 화도)로 가서 진을 쳤다.
576
순천이 군량 일백 오십 섬 아홉 말을 받아들여 의능의 배에 실었다.
577
저녁에 김붕만(金鵬萬)이 진양의 적정을 살피고 오서 보고하기를,
578
"적도들이 동문 밖에서 무수히 진을 합쳤는데, 연일 비가 많이 와서 물에 막혀 있고, 독하게 날뛰며 싸우고 있으나 큰물이 적의 진을 침몰시키려 한다면 군량을 대주고 구원병을 이어 줄 길 도 없으니, 대군을 합쳐 쳐들어 가기만 한다면 한꺼번에 섬멸할 수 있다."
579
고 하였다. 그런데 이미 양식이 끊어졌고, 우리 군사는 편히 앉아서 고달픈 적을 맞이 하는 것이니, 그 형세가 마땅히 백승할 수 있는 것이다. 하늘이 또한 도와주고 있으니, 비록 수로에 있는 적이 오 ∙ 륙백 척을 합하여 오더라도 우리 군사를 당해 낼 수는 없을 것이다.
580
6월 27일 (경술) 잠깐 비가 오다 개이다 했다. [양력 7월 25일]
581
오정 때에 적선 두 척이 견내량에 나타났다고 했다. 그래서, 온 진이 출항하여 나가 보니, 이미 달아나고 없었다. 그래서 불을도(통영시 적도 ∙ 화도) 바깥 바다에 진을 쳤다.
582
아침에 순천부사 ∙ 광양현감을 불러 와서 군사 문제를 토의했다.
583
충청수사가 그 군관을 시켜 흥양 군량이 떨어졌으니 석 섬을 꾸어 달라고 하기에 꾸어 주었을 따름이다.
584
강진의 배가 적과 싸우고 있다는 것을 들었기 때문이다.
585
6월 28일 (신해) 잠깐 비가 오다 개이다 했다. [양력 7월 26일]
586
어제 저녁에 강진의 척후선이 왜적과 싸운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래서 온 수군이 출항하여 견내량에 이르니, 왜적들은 우리 군사들을 바라보고 놀라 황급히 달아났다.
587
역풍과 역조류를 받아 들어올 수가 없어 그대로 머물러 밤을 지내고 새벽 두 시쯤에 불을도에 도착했다.
588
이 날이 곧 명종의 제삿날이기 때문이다.
589
종 봉손(奉孫) ∙ 애수(愛守) 등이 들어와 분산(墳山:무덤이 있는 선산)소식을 자세히 물어서 알게 되니, 참으로 다행이다.
590
원 수사와 우수사와 같이 와서 군사일을 의논했다.
591
6월 29일 (임자) 맑다. [양력 7월 27일]
592
하늬바람이 잠깐 불더니 청명하게 개였다.
593
순천부사 ∙ 광양현감이 와서 봤다. 어란만호(정담수) ∙ 소비포권관(이영남)등도 와서 봤다.
594
종 봉손(奉孫) 등이 아산으로 가는데 홍(洪) ∙ 이(李) 두 선비와 윤선각(尹先覺) 명문(明聞)에게 편지를 써서 보냈다.
595
진양이 함락되었다. 황명보(黃明甫) ∙ 최경회(崔慶會) ∙ 서례원(徐禮元) ∙ 김천일(金千鎰) ∙ 이종인(李宗仁) ∙ 김준민(金俊民)이 전사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