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청(현 중구청)의 동쪽에 있다’해서 그 이름을 얻은 동인천(東仁川). 그 영역은 사람마다 느낌이 다르다. 좁게는 기차역과 그 관련 시설이 있는 중구 인현동 일부 정도, 넓게는 용동마루턱을 넘어 신포동과 자유공원 그리고 반대편의 중앙시장과 배다리까지 본다. 이곳은 ‘한때’ 인천 최고의 중심지였다. 그 한때는 60년대부터 80년대까지를 말한다. 역사(歷史)까지는 가지 않더라도 이 땅에 처음 기찻길이 놓인 1899년부터 2016년 오늘까지 동인천이 만들어 낸 갖가지 서사(敍事)가 있다. 2015년에 발행한 <동인천, 잊다 있다> (유동현 著)에서 발췌한 이야기를 시리즈로 진행한다.
‘동인천역’이란 이름을 얻기 까지 곡절이 참 많았다. 1899년 경인선 개통 당시 이름은 축현역이었다. ‘축현(杻峴)’은 싸리재의 한자 이름이다. 당초 승객들만 타고 내릴 수 있도록 설계되었던 축현역사는 처음엔 판자식 건물이었다.
사람들이 큰 봇짐과 화물을 들고 와 기차를 타는 바람에 역 구내는 항상 복잡했다. 역 시설을 확장해야 하는데 매일 사용하는 역을 부수고 다시 지을 수 없어 1908년 아예 역을 앞 쪽 넓은 공터로 옮겨 버린다. 그곳이 현재의 동인천역 자리이다.
역사를 옮기면서 철길 방향도 약간 틀어져 현재의 선로가 된 것이다. 이름은 그대로 축현역을 갖고 갔다. 1920년대 들어서자 ‘축현역’이라는 이름이 인천을 대표하지 않을 뿐 만 아니라 부르기도 어렵다는 여론이 조성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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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명소'로 소개된 초창기 축현역 모습이 담긴 엽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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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천항구도(仁川港口圖)에 '축현뎡거장' 이라고 표시돼 있다. | |
1926년 조선매일신문사는 인천부민을 대상으로 역명을 공모했다. ‘상인천역’ ‘동인천역’ ‘인천중앙역’ ‘신인천역’ 등이 후보로 거론되었다. 그중 상인천과 동인천이 1, 2위로 선정되었다. 상인천은 종착점인 인천역과 인천부청의 위쪽이어서, 동인천은 역이 부청의 동쪽에 있다고 해서 선정되었다. 결국 축현역은 상인천역으로 바뀌었다. 부민을 상대로 공모를 했지만 당시 분위기를 봤을 때 일반 부민들은 많이 참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일본인을 중심으로 한 일부 계층의 의사가 절대적으로 반영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아니나 다를까 ‘상인천역’에 대한 거부 반응이 바로 나오기 시작했다. 상인천의 ‘상(上)’의 의미는 내지인(일제강점기 때 일본인을 지칭) 측에서 해석이 용이한 일종의 내지 방언에 불과하다는 게 그 이유다. 승강객 대부분이 조선인임을 감안할 때 이 역의 명칭으로 부적합하니 차라리 동인천역으로 개칭하는 것이 낫다는 목소리가 곳곳에서 나왔다.
그러나 축현역은 결국 상인천역으로 확정되었고 그때부터 이 일대는 상인천 지역으로 불렸다. 1960년대 초 배다리철교 인근에 있던 인천고와 전동에 있던 인천여고에 병설 중학교가 개교했다. 그 이름을 각각 상인천중과 상인천여중으로 붙였다. 1970년대 초 이 두 학교는 교명을 그대로 가지고 남동구 간석동으로 각각 이전한다. 1987년 두 학교 인근에 개교한 초등학교의 이름도 상인천초등학교로 명명되었다. 졸지에 간석동 일대가 ‘상인천’이 돼 버렸다.
1974년 5월 24일 동아일보에 택지 분양광고 하나가 실렸다. 제목이 ‘상인천 전철역 1㎞ 이내 택지 분양’이다. 상인천 중심가 동암 전철역에서 1㎞ 이내 거리에 있는 택지를 분양한다는 내용이었다. 동암역이 상인천의 중심지로 표현되었다. 약도에는 지금의 간석동 지역을 아예 ‘상인천 지역’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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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上仁川'이란 표지판이 찍힌 거의 유일한 사진 | |
광복 후 역명은 다시 바뀐다. 일본인들이 명명한 역 이름이 싫다고 해서 1948년 6월 1일 상인천역을 다시 축현역으로 환원했다. 이때 하인천역을 인천역으로, 인천항역을 수인역으로 함께 개칭했다.
그런데 서울에서 오는 사람들이 역 이름이 어렵다고 하자 1955년 축현역을 동인천역으로 또 바꿨다. 역 이름이 동인천역이 되면서 이 일대는 이때부터 인천을 대표하는 동인천 지역이 된다.
* 축현역(1899)-상인천역(1926)-축현역(1948)-동인천역(1955)
경인선의 시발역인 인천역은 개항장 ‘제물포’ 지역에 자리 잡고 있어 개통 당시 기차표에는 ‘제물포(Chemulpo)’라 표기돼 있다. 1957년 11월 철도청은 지금의 도화동에 ‘숭의역’을 신설했다. 2년 뒤인 1959년 7월 역명을 엉뚱하게 ‘제물포역’으로 바꿔 버렸다.
그러면 ‘제물포’라는 말은 어디에서 유래가 되었을까. ‘제물(濟物)’이라는 말은 조선 초기부터 인천 해안에 있었던 수군 기지 제물량(濟物梁)에서 비롯되었다. 향토사학자들은 ‘제물’을 ‘제수(濟水)’ 곧 ‘물을 건넌다’, ‘물가의 나루터’ 등의 뜻으로 해석하고 있다. 인천 앞바다의 밀물과 썰물의 차이가 워낙 커서 물때에 맞춰 배를 대야하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생겼다는 설명도 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인천군 서쪽 15리에 제물량이 있고, 성창포(城倉浦)에 수군 만호(萬戶)가 있어 지킨다’라고 기록돼 있다.
인천시가 한때 ‘제물포시’로 불린 적이 있다. 광복 후 미군정청은 1945년 10월 10일 인천부를 ‘제물포시’로 바꾸었다. 그러나 명칭 변경에 따르는 행정상의 어려움과 혼란으로 10월 27일 제물포시를 다시 인천부로 환원했다. 제물포시는 ‘17일’ 천하였다. 동인천역과 주인역 사이에 신설된 숭의역을 1959년 제물포역으로 바꿀 만큼 지역에서는 ‘제물포’라는 명칭에 애착이 많았다. 제물포역이 엉뚱한 곳에 생기는 바람에 바닷가가 아닌 남구 도화동 일대가 마치 제물포인 것처럼 오해하는 소지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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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0년 전후의 '발전하는 인천항 지도'(화도진도서관) .중앙에 '상인천역'이 표시돼 있다. | |
120년 전 경인선 노선 설계도를 그릴 때 ‘동인천 지역’은 없었다. 경인철도 부설권을 따내기 위한 일본과 미국 등 열강의 다툼은 치열했다. 처음에 부설권을 손에 쥔 것은 일본이었다.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미·영·독·러 등 4개국이 연합해서 일본의 독점권에 딴지를 걸었다. 마지못해 일본은 부설권을 토해 놓게 되었고 이를 1896년 3월 미국인 모오스가 갖게 되었다.
모오스는 철도 노선을 우각리(지금의 남구 숭의철교 부근)에서 독갑다리(숭의로터리 부근)를 지나 탁포(터진개) 부근 지금의 인천여상 까지 가는 것으로 설계했다. 문제는 이 노선에 일본인 소유의 땅들이 많았다. 철도부설권을 미국인에게 빼앗긴 것에 앙심을 품은 일본인 지주들이 턱없이 높은 가격만 부르고 땅을 팔거나 대여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철길 방향을 틀었다. 우각리에서 배다리를 거쳐 참외전 거리에 이르러 축현역을 두고, 응봉산(자유공원)을 깎아서 끼고 돌아 월미도 건너편 부둣가에 인천역을 설치하게 됐다. 그것이 현재의 경인선 노선이다. 만약 당초 노선대로 철길이 깔렸다면 인천, 특히 동인천 지역은 어떠한 모습이 되었을까.
▲ 1892년 영국병원(현 성공회내동교회)에서 내려다 본 동인천지역(사진 성공회대자료관).
군데군데 물이 고여 있는 모습이 보인다.
▲ 인천부내철도 약도. 경인선 최초 예정선과 현재선 그리고 구역(舊驛 : 축현역)의
위치가 표시돼 있다.
경인철도가 놓일 당시 동인천 지역은 논과 밭이 있었지만 대부분 늪 지대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도 이 지역의 땅 모양을 보면 작은 산이나 언덕으로 둘러싸여 있다. 응봉산(자유공원), 율목공원(옛 시립도서관)언덕, 용동고개, 수도국산, 화도고개 등이 동인천을 감싸 안은 지세이다. 송현동과 화수동 쪽으로 난 갯골을 통해 겨우 숨통이 터져 있는 모습이다. 지대가 낮다보니 항상 물이 고였고 특히 사리 때는 바닷물이 인근까지 밀려 왔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의 양키시장, 중앙시장 옆 길 아래에는 지금도 바닷물이 복개된 수문통을 통해 밀려왔다 밀려나간다. 애초 이곳은 철길 깔기에는 부적합한 땅이었다. 지대가 낮은 동인천 지역에 철도를 놓기 위해서 매립 공사를 했던 것으로 보인다.
▲ 개통초기 경인선을 달리던 기차(1902년, 화도진도서관)
▲ 70년대 배다리철교에서 동인천역까지 항공사진(화도진도서관). 철길과 도로의
갈림이 선명하다. 선로주변 낮은 건물들은 40년이 지났지만 별반 다르지 않다.
축현역 앞에는 커다란 연못이 있었다. 1923년 11월 1일 오전 10시 난데없이 축현역 앞에서 소방연습이 벌어졌다. 경성 남대문소방대 서장을 비롯해 용산, 소사, 인천 소방대가 출동해 축현역 앞 너른 연못가에 모였다. 이날 인천소방대는 이 연못물을 이용해 새로 사들인 펌프 자동차를 처음으로 시험 가동해 보았다.
경인기차통학생들은 여름철에 이 연못가 서늘한 아카시아 숲에서 삼삼오오 모여 시를 암송하거나 책을 읽기도 했다. 겨울엔 이 연못은 훌륭한 스케이트장 역할도 했다. 1924년 인천일본인기독교청년회는 스케이트구락부를 조직해 축현역 앞 연못 약 500평을 스케트장으로 만들어 회원을 모집했다.
연못의 깊이는 만만치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1925년 4월 7일 화평리 15번지에 사는 김명학(42)이 신병을 비관해 이 연못에 투신했다. 이를 통학학생이 발견하고 즉시 축현파출소에 신고해 구출했다. 이듬해에는 치매를 앓던 일본인 노파가 연못에 빠져 죽기도 했다.
▲ 1920년대 축현역. 오른쪽에 연못(늪)의 일부가 보인다.
1920년대 중반까지 축현역 인근에는 넓은 갈대밭과 논이 펼쳐져 있었다. 역 일대의 거주민은 이곳을 매립해 금융조합, 우편소 등을 설치할 것을 관계 당국에 진정했다. 약 4만평 갈대밭의 매축 공사가 시작되면서 송현리 산록(수도국산)에 거주하는 2백여 호의 주민들이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낮은 곳을 메우기 위해 산을 깎는 바람에 절벽 위 가옥들이 붕괴 위험에 처했고 통행로가 차단되자 리민(里民)대회 까지 열어 당국에 공사 중지를 요구하는 진정(탄원)서를 제출했다. 매립 공사 인부들은 대부분 중국인 쿨리들로 그들의 포악한 행동도 문제가 되었다.
결국 사고가 터졌다. 1926년 1월 14일 오후 2시 경 매립 공사 중 25척 되는 언덕의 흙이 별안간 무너져 내려 나주군에서 온 일꾼 박문오(30대)가 흙덩이에 치여 오른편 다리가 부러지고 가슴에 중상을 입어 그대로 의식을 잃었다. 즉시 인천병원에 수용하여 치료했지만 결국 사망했다. 그곳에서 일하던 조선인 인부 50여명은 조의를 표하기 위해 하루 휴업했다. 이후 공사는 재개되었으나 사고가 빈번했고 여름철 침수 등으로 작업 진척이 쉽지 않았다.
글 유동현 (굿모닝인천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