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는 헤어져야 한다고 어렴풋이 짐작하였지마는, 이렇듯 덧없이
떠나게 될 줄이야 미처 몰랐다. 그러나 이대로 영원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산기슭에는 어느새 저녁 그늘이 내리고, 대덕산에 얼비치는 마지막
노을이 그립도록 곱기만 하다. 여름철에는 그토록 생기롭던 나뭇잎이
계절을 따라 벌써 잿빛으로 이울어 간다. 비 갠 뒤의 늦바람이 가슴에
사무치도록 싸늘하기만 하다.
아침 저녁으로 그렇게도 다정하게 속삭이던 이웃들도 이제는 바래고
헤어진 누더기바람으로 길을 떠날 채비를 서두른다. 익혀 온 풍토와
그리운 나뭇가지를 버리고 차마 어찌 떠나랴마는, 달이 차고 계절이
가면 자리를 물러나는 것도 또한 자연의 도리요, 신의 다스림인가 한다.
길고도 짧은 일생이었지마는, 바라는 곳에 정열을 불사르고 다하지 못한
미련을 깊이 간직한 채 떠나면 그만이지, 여기에 비단옷을 휘감고 간들
무엇하겠는가?
잘은 모르지만 부처님이 말씀한 열 두 인연으로 말미암아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오고 가는 것이 세상이요 세월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바람에
휘날려서 밀려다니기만 하는 가랑잎은 아닐 것이다. 하늬바람을 타고
호젓한 산모롱이나 어느 골짜기에 새로운 삶의 터전을 마련해야 할
가랑잎의 몸부림이다.
산청군 대원사 골짜기의 [가랑잎 학교] 뜰에는 오늘도 가랑잎이 시나브로
진다. 산토끼처럼 뛰노는 어린것들의 티없는 웃음소리가 유난히도 밝게
들리는 어스름 저녁이다. 여기에는 성급한 마음도 없거니와 그 무엇을
원망하거나 화를 낼 만한 아무런 트집거리도 없는 성싶다.
별안간 회오리바람이 가랑잎을 쓸어안고 하늘 높이 솟구쳐 오른다.
그러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고요하기만 하다.
어린이들이 서로 [안녕]을 나누는 갈림길의 돌담 위에도 가랑잎이
휘날린다. 끝내는 한낱 가랑잎으로 돌아갈 어린것들의 머리 위에도
가랑잎은 떨어지고 있다.
지금은 몰라도 먼 뒷날 언젠가는, 그 머리 위에 떨어지는 가랑잎의
뜻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 바스락거리는 사연을 알게 될 날도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또렷이 가슴팍을 울릴
무렵이면, 그들도 어디론가 멀리 떠나게 될 것이다.
전라북도와 충청북도의 접경선에 우뚝 솟은 민주지산의 중턱에도
계절이 바뀌고 가랑잎은 진다.
홀로 버섯을 가꾸는 외딴집 할아범이 바스락바스락 가랑잎을 긁어
모으고 있다. 한가로운 산속의 심심풀이가 아니라, 손톱 끝이 멍들도록
마디게 살아 온 일생을, 아름다웠던 꿈의 껍질을 차분히 정리하고 있는
것이다.
술도 담배도 모르고 지낸다는 이 버섯 할아범에게는 밤마다 가랑잎의
사연을 엿듣는 것이 보람이란다.
해가 지자마자 깊은 밤중으로 접어드는 두메 산골에는 부엉이도 울지
않는다. 가랑잎이 솔잎더러 바스락거린다고 한다지만, 배설 묻은 개
커녕 겨 묻은 개도 골생원도 드나든 일이 없는 산골이다.
오동잎이 진다. 쓴 맛 단 맛 가리지 않고 두루 감싸오던 어머님의 치마
끈이 끊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가지 많은 나무 바람 잘 날이 없다는데,
그 여린 가지의 마디마다 심줄이 튀어나도록 보살피던 버섯 할아범의
가느다란 숨결이 뚝 끊어지는 것만 같다.
오동잎 떨어지는 소리가 또 들린다. 행여나 한밤의 창문을 가볍게 두드리며
그대로 지나가는 나그네의 발자국 소리가 아닌지?
문득 [열조시집]에 담긴 한 토막이 저절로 떠오른다.
이 외딴 곳 찾는 이도 적으며,
깊은 산 속이라 속된 일도 드물다.
가난하여 술도 한 잔 없으니,
머무를 나그네도 한밤에 돌아가다.
술이 없어서 그대로 가버린다는 나그네도, 알고보면 한밤에 지는 가랑잎을
두고 하는 말인지도 모른다.
따지고 보면 이 세상에 가랑잎 아닌 것이 없을 것이다. 천연스럽게 피고 지는
계절 속에, 한밤을 지키는 버섯 영감의 가느다란 숨소리가 다정하기만 하다.
여윈 창살을 어루만지면서 자꾸만 스쳐 지나가는 가랑잎의 밤이다.
그 무거운 산등성이를 등에 지고 평생을 버섯과 더불어 사는 버섯 영감...
낮이면 골짜기로부터 불어오는 골바람에 어지러운 세상을 걸러 마시고,
밤에는 산마루에서 불어내리는 산바람에 마음의 귀를 기울이며 사는 버섯
영감이다.
흑산도의 갯마을에도 가랑잎이 맴돌고, 지리산의 칠선계곡 바위틈에도
가랑잎은 쌓여 있다. 그런데, 아무리 엿듣고 헤아리고 애써도, 아직껏
속시원히 풀리지 않는 것은 바스락거리는 가랑잎의 사연이다.
태백산의 가랑잎은 너무나 성스러워서 엿듣기에도 황송스럽고, 설악산의
까다로운 철학에는 마음이 뒤숭숭해진다.
아무래도 가랑잎의 바스락거리는 사연을 깨닫기에는 아직도 마음의 귀가
덜 열렸나 보다.
(송규호 님의 수필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