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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8월 21일 수요일 성 비오 10세 교황 기념일
제1독서 : 에제 34,1-11
복 음 : 마태 20,1-16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런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1 “하늘 나라는 자기 포도밭에서 일할 일꾼들을 사려고 이른 아침에 집을 나선 밭 임자와 같다.
2 그는 일꾼들과 하루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고 그들을 자기 포도밭으로 보냈다.
3 그가 또 아홉 시쯤에 나가 보니 다른 이들이 하는 일 없이 장터에 서 있었다.
4 그래서 그들에게, ‘당신들도 포도밭으로 가시오. 정당한 삯을 주겠소.’ 하고 말하자,
5 그들이 갔다. 그는 다시 열두 시와 오후 세 시쯤에도 나가서 그와 같이 하였다.
6 그리고 오후 다섯 시쯤에도 나가 보니 또 다른 이들이 서 있었다.
그래서 그들에게 ‘당신들은 왜 온종일 하는 일 없이 여기 서 있소?’ 하고 물으니,
7 그들이 ‘아무도 우리를 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그는 ‘당신들도 포도밭으로 가시오.’ 하고 말하였다.
8 저녁때가 되자 포도밭 주인은 자기 관리인에게 말하였다.
‘일꾼들을 불러 맨 나중에 온 이들부터 시작하여 맨 먼저 온 이들에게까지 품삯을 내주시오.’
9 그리하여 오후 다섯 시쯤부터 일한 이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 받았다.
10 그래서 맨 먼저 온 이들은 차례가 되자 자기들은 더 받으려니 생각하였는데,
그들도 한 데나리온씩만 받았다.
11 그것을 받아 들고 그들은 밭 임자에게 투덜거리면서,
12 ‘맨 나중에 온 저자들은 한 시간만 일했는데도,
뙤약볕 아래에서 온종일 고생한 우리와 똑같이 대우하시는군요.’ 하고 말하였다.
13 그러자 그는 그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말하였다.
‘친구여, 내가 당신에게 불의를 저지르는 것이 아니오.
당신은 나와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지 않았소?
14 당신 품삯이나 받아서 돌아가시오.
나는 맨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당신에게처럼 품삯을 주고 싶소.
15 내 것을 가지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이오?
아니면,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
16 이처럼 꼴찌가 첫째 되고 첫째가 꼴찌 될 것이다.”
<오늘의 묵상>
안소근 실비아 수녀
복음의 마지막 구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꼴찌가 첫째 되고 첫째가 꼴찌 될 것이다.”(마태 20,16)라고 하십니다.
어제 복음의 마지막 구절인
“그런데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19,30)라는 말씀과 연결되지요.
19장에서 베드로는, 모든 것을 버린 제자들이 무엇을 받을 것인지 여쭈어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족과 재산을 버리고 당신을 따라나선 이들에게 백 배의 상급을 약속하시면서도,
그가 많은 것을 버렸으니 많이 받으리라는 생각을 깨뜨리십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이를 다시 풀어 설명하십니다.
계산적인 사람에게 이 복음이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생각하여 보는 것은 어떨까 싶습니다.
그 후한 포도밭 주인이 품삯으로 주는 한 데나리온은 무한대와 같이 큰 것이어서,
한 데나리온만 받았다 하여도 더 바랄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한 데나리온은 보통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라고 하지요.
그러나 그 품삯이 하늘나라의 갚음을 말한다면 그것은 결코, 적지 않습니다.
“꼴찌”가 되어 가장 적게 받았다 하여도 그것은 이미 차고 넘치는 양입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이 받는 것을 시기할 여지는 없을 것입니다.
사도들은 첫 새벽부터 와서 일한 일꾼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사도들이 천국에서 큰 영광을 누리고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사도들에 견주어 아무런 수고도 하지 않은 우리가
하늘나라에 들어간다고 해서 사도들이 불만스러워할까요?
하늘나라는 그런 곳이 아니리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부족한 사람이라도 그가 들어오는 것을 모두 기뻐하는 곳,
그곳이 참으로 하늘나라일 것입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상대방이 원하는 것을 먼저 주는 것이 맞을까요?
아니면 내가 먼저 원하는 것을 받아야 할까요?
이것도 아니라면 동시에 서로 원하는 것을 주고받아야 할까요?
많은 사람이 자기 받을 것을 먼저 생각하고 있으며, 받아야 줄 수 있는 것처럼 여깁니다.
그래야 각박하고 불합리한 세상에서
손해보지 않고 지혜롭게 사는 것이라면서 미소 지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계산적으로 사는 것이 올바른 것일까요?
실제로 사람들은 계산적인 사람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영어에서도 ‘take and give’라고 하지 않고, ‘give and take’라고 하지 않습니까?
물론 내가 먼저 많은 것을 베풀었는데도 전혀 자기에게 되돌아오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돌아오지 않는다고 억울해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점에 대해 하늘나라에 보화를 쌓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순간의 만족보다 영원한 만족을 위해 힘쓰는 사람만이 진정으로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동창 신부 중에 항상 앞서서 무엇인가를 하는 신부가 있습니다.
지난 일본 성지순례 때도 다른 동창의 불편을 생각하면서
약국도 다녀오고 편의점도 다녀오면서 동창의 불편을 해소해 주었습니다.
날도 더워서 귀찮을 법도 한데, 자기 돈까지 쓰고 땀도 뻘뻘 흘리면서 앞서서 행동합니다.
또 아픈 동창을 챙겨주다가 코로나 확진까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친구는 억울해하거나 힘들어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돕는 일을 무척이나 기뻐합니다.
‘주는 것이 손해’라는 어리석은 생각은 버려야 합니다.
사랑을 실천하지 않는 사람의 구차한 변명이 아닐까요?
포도밭 일꾼의 품삯에 대한 비유 말씀을 봅니다.
이른 아침부터 일한 사람이나, 아홉 시부터 일한 사람, 열두 시와 오후 세 시,
그리고 무엇보다 오후 다섯 시부터 일한 사람이
모두 똑같이 한 데나리온을 주는 포도밭 주인의 처사가 불합리해 보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런 분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느님의 일을 많이 하건, 적게 하건, 그 누구도 차별하지 않고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무조건 주시는 데에 있습니다. 여기서 문제가 있습니다.
주님을 따른다고 하면서도 우리는 받는 것에 집중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 봉사에 대한 대가를 바라고 있습니다.
이렇게 열심히 봉사했으니 이 세상 안에서 더 많은 것을 누려야 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저 사람은 성당도 나오지 않는데도, 많은 것을 누리냐며 불공평하다고 말합니다.
주님께서는 충분한 보상을 주십니다.
단지 세상의 기준이 아닌, 주님의 기준에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당장은 보상을 알아채지 못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면 얼마나 큰 보상이었는지를 발견합니다.
참고 견디면서 주님의 뜻인 ‘주는 사랑’에 집중해야 합니다.
그저 하느님의 포도밭에 와 있음에 감사해야 할 일입니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복음은 하늘 나라에 대한 ‘선한 포도밭 주인의 비유’입니다.
이 속에는 하느님 자비의 신비가 숨겨져 있습니다.
그런데 이 비유에는 세 가지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첫째는 포도원 주인은 대체 때를 가리지 않고 품꾼을 불러들인다는 점입니다.
그러면서도 일의 실적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을 쓰지도 않습니다.
도대체 계산이라고는 모릅니다.
사실 그는 애시당초부터 일을 부리기 위해 품꾼들을 불러들인 것이 아니라,
그들을 살리기 위해 불러들였던 것입니다.
그러니 부르심 그 자체가 이미 은총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늘나라는 당신 자신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불쌍한 우리를 살리기 위하여 주어진 은총입니다.
둘째는 품삯을 줄 때에 맨 나중에 불려 온 자부터 준다는 점입니다.
무능하여 맨 나중에 올 수밖에 없었던 이들에 대한 깊은 배려와 자비였습니다.
사실 그들은 능력이 없는 까닭에 자비에 내맡길 수밖에 없는 '꼴찌'들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가장 필요한 자에게 우선적으로 흘러들 수밖에 없는 하느님의 자비입니다.
셋째는 먼저 온 이들에게나 나중 온 이들에게나 똑같이 품삯이 주어진다는 점입니다.
일한 시간이나 일의 실적 따위는 전혀 고려하지도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먼저 온 품꾼에 대한 부당한 대우인 것도 아니었습니다.
모두에게는 계약을 맺은 정당한 대가가 지불되었고, 뒤에 온 이들에게는 자비가 베풀어졌을 뿐입니다.
사실 주인은 품삯을 셈 해줌에 있어서, 정당함에 자비를 더하여 쳐주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주인의 권한 행사와 너그러운 처사는 절대적인 하느님의 주권과 자비를 말해줍니다.
그렇습니다.
하늘나라는 인간이 일한 대가로 획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하느님의 주권적인 사랑입니다.
이처럼 ‘꼴찌가 첫째가 되는 이 이유’는 하느님의 무한하신 자비와 사랑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마치 포도원 주인이 애초부터 은혜를 베풀기 위해
품꾼들을 포도원으로 불러들였듯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기 위해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불러들이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먼저 온 이든 나중에 온 이든 모두가 자비를 입은 이들입니다.
이 모두가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포도원 주인은 아침 일찍 포도원에 와서 일한 사람들이 불평하자, 이렇게 말합니다.
“친구여, 내가 당신에게 불의를 저지르는 것이 아니오.
당신은 나와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지 않았소?
~ 나는 맨 나중에 온 사람에게도 당신에게처럼 품삯을 주고 싶소.”(마태 20,12-13)
사실 은혜를 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마치 포도원 주인이 애초부터
은혜를 베풀기 위해 품꾼들을 포도원으로 불러들였듯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기 위해,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당신의 교회로 불러들이셨습니다.
여기에는 먼저 온 이와 나중 온 이가 따로 없으며, 모두가 자비를 입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은혜를 받은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첫째라고 뻐기거나,
혹은 꼴찌라고 의기소침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저 하느님의 포도밭에 와 있음에 감사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당신들도 포도밭으로 가시오. 정당한 삯을 주겠소.”(마태 20,4)
주님!
당신은 무능하여 맨 나중에 올 수밖에 없었던 꼴찌들부터 품삯을 주시니
애시당초 일을 부리기 위해 불러들인 것이 아니라 살리기 위해 불러들이신 까닭입니다.
당신은 일한 시간이나 실적 따위는 전혀 고려하지도 않으시고 똑같이 품삯을 주시니
애초부터 은혜를 베풀기 위해 당신 포도밭에 불러들인 까닭입니다.
이토록, 부르심이 이미 은총이요, 은총은 계산이 아니라 자비오니, 주님의 자비를 찬미합니다.
당신 부르심이 제게는 영광이오니
오, 나의 주 나의 임이시여!
찬미 영광 받으소서. 아멘.
그저 감사하라.
반영억 라파엘 신부
어려서는 삼촌이나 누나에게 용돈을 얻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특히 명절이 되면 서울의 일터로 떠난 누나를, 삼촌을 동네 어귀에서 기다렸습니다.
누나를, 삼촌을 기다렸다기보다 용돈을 기다렸습니다.
그 액수가 얼마가 되든지 상관없이 기쁘기만 했습니다.
그런데 학년이 높아질수록 더 많은 용돈을 기대하게 되었고
기대에 미치지 못할 때 서운함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용돈을 받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는데 어느 날 그 기쁨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사실 삼촌께서, 누님이 용돈을 줄 의무가 있는 것도 아닌데……
겉으로는 아닌 척했지만, 용돈을 달라고 떼를 쓰고 있었습니다.
주면 주는 대로 감사해야 할 것인데 그렇지 못할 때가 많았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죄송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오늘 복음은 하느님의 나라를 포도원 일꾼의 품삯에 관한 비유로 들려주고 있습니다.
포도원 주인은 아침 아홉 시에 일을 시작한 사람이나 열두 시, 오후 3시에
그리고 다섯 시에 시작한 사람과 똑같은 조건으로 계약을 맺었습니다.
일꾼들은 계약을 맺을 때는 그저 일을 할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족했습니다.
그러나 품삯을 받게 되는 시간이 되자 일찍 일을 시작한 사람은
뒤늦게 시작한 사람보다는 더 많이 받으려니 했지만,
그 기대를 채울 수 없었고 그래서 투덜대며 급기야 따지기까지 하였습니다.
상대적으로 비교를 하는 순간 자기의 첫 마음을 모두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분명 그는 계약한 만큼 받았습니다. 그런데도 받지 못한 것처럼 느꼈습니다.
누가 용돈을 주면 주는 대로 감사히 받을 것이지 투덜댈 자격이 어디 있단 말입니까?
계약대로 받았으면 족해야 지 왜 따집니까? 주인은 분명 정의를 지켰습니다.
부당한 대우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개인적인 시기심 때문에 반발하고 있었습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마태5,45).고 하셨습니다.
이렇듯 하느님께서는 모두에게 자비와 사랑을 베푸십니다(로마11,32).
주님께서는 언제나 후하십니다. 어떤 사람에게나 선을 베풀고자 하실 뿐입니다.
그리고 그 선은 주님께서 자유로운 선물로 주시는 것입니다.
인간의 공로가 아니라 그분의 자비입니다.
그러므로 그 자비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가 중요합니다.
품삯을 받기 위해 일을 한 사람과 일 자체를 고마워하며 일을 한 사람과는
분명 구별이 되는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느냐가 중요하지만 어떻게 했느냐가 더 중요한 것입니다.
이렇듯 하느님 나라에서는 결과보다는 동기가 중요합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상급은 인간이 노력해서 이룬 업적에 따라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선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물은 감사히 기쁘게 받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항상 일하시나 조용히 하십니다.
그러나 인간들은 얼마나 말이 많은가?”(성 아우구스띠노).
포도원에서 일을 할 수 있음만으로도 감사하고 행복한 마음을 간직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많은 일을 해도 해야 될 일을 안 한 사람은 적게 일한 것이고,
적게 일해도 해야 될 것을 한 사람은 많이 일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만 앞서거나 부산함만 피우지 마십시오”(성 요한보스코).
꼴찌가 첫째가 되고 첫째가 꼴찌가 되는 비결이 여기 있습니다(마태20,16).
하느님 아버지는 너그러우시고,
나는 쩨쩨하고 시기 질투하며 불평불만이 가득한 사람임을 뉘우칩니다.
인력시장에 가보신 적 있으시나요?
많은 사람들이 이른 새벽부터 일을 하기 위해서 기다립니다.
그러나 그야말로 매일 팔려나가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날은 누구도 자기를 사 가지 않습니다.
종일 기다리다 허한 마음으로 쓰디쓴 하루를 마감할 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재수가 좋아서 일찍 팔려나갑니다.
그들의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일을 할 수 있다는 것만 해도 기쁨이고 감사입니다. 일을 할 수 없다는 것이 고역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일찍 일을 나간 사람이 뒤늦게 일을 한 사람과
똑같은 임금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일찍부터 일을 한 것이 재수가 좋았다고 생각했는데 그 마음이 한순간에 사라졌습니다.
주인에게 실망해서 불평불만을 털어놓았습니다.
그렇다면 정말 주인이 잘못한 것인가요?
실망과 좌절로 기다림에 지쳐있다 뒤늦게 일을 한 사람은 얼마나 다행한 일입니까?
주인의 자비가 얼마나 크고 사랑이 많은지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에게는 그것이 기쁜 소식이고 복음입니다.
만일 우리의 업적에 따라 보상이 결정된다면 우리는 더 이상 희망할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부족함에도 후하게 주시기에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초심을 잃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거저 주시는 주님의 은총에 감사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댈러스 성당에는 새 신자 분과가 있습니다.
한국에서도, 타 주에서도 전입한 교우들이 많은 편입니다.
한 달에 한 번 전입교우 소개를 하는데 지난달에는 6가구 20명이 넘었습니다.
새 신자 분과는 전입 교우들에게 점심식사를 제공하고 구역과 반으로 안내합니다.
저도 점심에 함께 하면서 인사를 나누곤 합니다.
한국에서 오면 이것저것 필요한 것들이 있습니다.
주택, 학교, 자동차, 의료보험, 구직과 같은 것입니다.
주재원으로 오면 큰 어려움이 없지만 이민으로 오면 직장을 구할 때까지 마음을 졸이게 됩니다.
아이들이 낯선 환경에 적응하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새 신자분과는 영적인 도움뿐만 아니라 현지 생활에 적응하도록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전입한 교우들은 성당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큰 위안을 얻습니다.
최근에 서울에서 후배 신부님이 문자를 보냈습니다.
본당에서 활동하던 청년이 댈러스로 갔다고 합니다.
숙소, 자동차, 직장까지 구하려고 하는데 도움을 원했습니다.
저는 청년과 연락했고 본당 교우들이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주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낯선 이웃을 귀하게 대하여라. 너희도 이집트 땅에서 이방인이었다."
스웨덴은 특이한 월세 계약이 있습니다.
한번 계약을 맺으면 몇 년이 지나도 월세를 올리지 않는다고 합니다.
물가 상승으로 관리비는 올릴 수 있지만 월세는 안 올린다고 합니다.
그래서 세입자는 월세 걱정 없이 아이들 교육시키고 생활할 수 있다고 합니다.
20년 전이나 20년 후나 같은 월세라면 세입자 입장에서는 큰 혜택입니다.
스웨덴은 집을 재산증식의 수단으로 여기지 않는다고 합니다.
집이 더 있으면 월세계약을 맺고,
한번 계약을 맺으면 물가가 올라도 집세를 올리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것이 사회적인 합의이고, 이런 합의가 있으니,
집이 없는 사람도 큰 걱정 없이 생활할 수 있다고 합니다.
집이 재산증식의 수단이 되면 집이 많은 사람은 더욱 부유해지고,
집이 없는 사람은 집세 걱정하면서 더욱 가난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한국이나 미국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제도입니다.
오늘 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나 이제 내 양 떼를 찾아서 보살펴 주겠다.”
‘트렌트 코리아 2024’를 읽었습니다.
책의 마지막 부분은 ‘돌봄 경제’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돌봄에는 3가지 차원이 있다고 합니다.
배려 돌봄, 정서 돌봄, 관계 돌봄입니다.
배려 돌봄은 혼자서는 정상적인 활동을 할 수 없는 이들에 대한 돌봄입니다.
아이, 장애인, 노인에 대한 돌봄입니다.
영국에서는 조부모가 손자를 돌보면 그에 대한 보상을 지급한다고 합니다.
가족이라도 고령의 부모를 돌보면 그에 대한 보상을 지급한다고 합니다.
이제 배려 돌봄은 가족만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가 함께 책임져야 한다는 인식이 생겼습니다.
정서 돌봄은 방황하는 청소년들에 대한 돌봄이 있습니다.
자살에 대한 충동이 있는 청소년, 약물 중독의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청소년에 대한 관심과 돌봄이 있습니다.
외로운 노인에게 말벗이 되어주고, 프로그램을 통해서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도록 활력을 주는 돌봄입니다.
관계 돌봄은 건강한 사람도, 전문적인 직업을 가진 사람도 도움이 필요하다는 인식입니다.
많이 배웠어도, 많이 가졌어요, 전문적인 직업을 가졌어도 외로운 사람들이 있습니다.
수도자들도, 성직자들도 이런 관계 돌봄이 필요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아침부터 일한 사람, 낮부터 일한 사람, 오후에 나와서 일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주인은 모두에게 같은 품삯을 주었다고 합니다.
아침부터 일한 사람은 주인에게 더 받을 것이라는 기대를 하였지만
똑같은 품삯을 받은 것에 대해서 불평했습니다.
하지만 주인은 ‘나는 맨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당신에게처럼 품삯을 주고 싶소.
내 것을 가지고 내가 할 수 없다는 말이요?’라고 대답합니다.
미국 정부는 흑인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고 합니다.
흑인들의 주거와 복지, 문화와 교육에 대한 지원을 해야 한다고 합니다.
흑인들의 동네에 도서관을 세워주고, 깨진 유리창은 갈아주고,
노후 되어서 허물어져 가는 건물은 다시 세워주면 된다고 합니다.
그렇게 해서 흑인들의 자존감을 세워주고, 흑인들이 바로 설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렇게 하면 흑인 재소자들의 비율도 줄어들 것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흑인들에 대한 지원이 아니라, 흑인들의 슬픈 역사에 대한 보상이 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오늘 독서는 우리가 하고 있지 않는 일을 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전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약한 양들에게 원기를 북돋아 주지 않고 아픈 양을 고쳐 주지 않았으며,
부러진 양을 싸매 주지 않고 흩어진 양을 도로 데려오지도, 잃어버린 양을 찾아오지도 않았다.
나는 내 양 떼를 그들의 입에서 구해 내어, 다시는 그들의 먹이가 되지 않게 하겠다.”
포도밭의 일꾼들
조욱현 토마 신부
오늘 복음의 밭 임자는 포도밭에서 일할 일꾼들을 구하기 위해 이른 아침부터 집을 나섰다.
주인은 품삯을 한 데나리온으로 정하고 사람들을 자기 포도밭으로 보낸다.
이른 아침 여섯 시에, 아홉 시에, 열두 시에, 세시에
그리고 다섯 시에 자기가 만난 사람들을 포도밭으로 보냈다.
교부들은 이 하루를 구원의 역사로 해석하고
이른 아침에 아담과 에녹의 시대에 살던 이들을 부르셨고,
아홉 시에는 노아와 그와 함께있던 이들을 부르셨고,
열두 시에는 아브라함을 부르셨고, 오후 세 시에는 모세와 다윗을 부르셨으며,
오후 다섯 시에는 다른 민족들을 부르신 것이라고 한다.
저녁에, 시대의 끝자락에 밭 임자는 맨 나중에 온 이들부터 시작하여 품삯을 준다.
맨 나중에 온 사람들은 고생은 하지 않고 주인의 후한 덕으로 가장 먼저 보수를 받는다.
다른 사람들보다 영광을 받은 것이다.
맨 먼저 온 사람들은 나중에 온 사람들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다.
나중에 온 사람들이 받는 품삯을 보고 자기들은 더 받을 것으로 기대한다.
그러나 주인은 똑같이 한 데나리온을 주고 있다. 그들은 불평한다.
“맨 나중에 온 저자들은 한 시간만 일했는데도,
뙤약볕 아래에서 온종일 고생한 우리와 똑같이 대우하시는군요.”(12절)
그들은 다른 이들이 받은 축복을 기분 나빠했다. 그것은 시기와 질투였다.
이제 밭 임자는 그 사람의 시샘을 꾸짖는다.
“당신은 나와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지 않았소? 당신 품삯이나 받아서 돌아가시오.
나는 맨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당신에게처럼 품삯을 주고 싶소.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15절) 하였다.
“이처럼 꼴찌가 첫째 되고 첫째가 꼴지 될 것이다.”(16절)
언제 부르심을 받았든지 자기에게 주어진 삶을 잘 사는 것이 중요하다.
마지막 한 시간을 열심히 일하여 하루의 품삯을 받은 이들처럼
우리의 삶도 지금 최선을 다하는 삶이어야 한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해 마련해 주신 품삯을 모두 받을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지금, 이 순간 최선을 다한다는 것은 항상 깨어있는 자세를 말한다.
이것은 품값이라기보다 은총이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것은 우리가 일한 대가가 아니라,
그분의 선하심과 은총으로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선물이다.
우리가 불림을 받은 후의 삶을 충실히 하여 그 선물을 받도록 하자.
주님께서는 좋은 것으로 우리를 채워주실 것이다.
심판 이후에 받게 될 영광에 대한 기대가 지금 행복을 좌우한다.
전삼용 요셉 신부
존 뉴턴은 반항적이고 도덕적으로 타락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대서양 횡단 노예무역에 참여하며 노예들을 가혹하게 다루었고
고난과 도덕적 타락으로 가득 찬 소란스러운 삶을 살았습니다.
1748년 3월, 그의 배 그레이하운드(Greyhound)는 북대서양에서 격렬한 폭풍에 휘말렸습니다.
배는 심하게 손상되어 침몰할 것이 확실해 보였습니다.
배의 키잡이였던 뉴턴은 폭풍 속에서 배를 조종할 때
배 밖으로 떠내려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키에 몸을 묶어놓아야 했습니다.
생명을 위협하는 이 시련 동안 뉴턴은 심오한 영적 각성을 경험했습니다.
배가 파도에 부서지자, 뉴턴은 어렸을 때 돌아가신 어머니의 종교적 가르침을 떠올렸습니다.
배의 운명이 정해져 있는 것처럼 보였을 때
뉴턴은 하느님의 자비를 구하며 절박한 기도를 드립니다.
“주님,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기적적으로 그레이하운드는 폭풍에서 살아남았습니다.
뉴턴은 깊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자신과 같은 사람도 천국에 갈 수 있다는 희망이 생긴 것입니다.
지금은 그런 기대를 할 수 없었고 정말 지옥에 갈 사람처럼 살아왔습니다.
그는 점차 이전 삶의 방식을 버렸고, 1754년에는 노예무역에서 완전히 벗어났고,
성공회 신부가 되어 노예 폐지 운동에 영향력 있는 목소리가 되었습니다.
그가 쓴 찬송 “놀라운 은혜”(Amazing Grace)에 그의 마음이 잘 나타납니다.
“놀라운 은혜, 감당할 수 없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그 은혜.
잃었던 나를 찾았고, 눈먼 날 보게 하셨네. 놀라운 하느님의 은혜….”
오늘 복음에서 하늘나라는 자기 포도밭에서 일할 일꾼들을 사려고
이른 아침 집을 나선 밭 임자와 같다고 하십니다.
그는 일꾼들과 하루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고 아침에 만난 이들을 자기 포도밭으로 보냈습니다.
아홉 시에도, 열두 시와 오후 세 시, 그리고 다섯 시쯤에도 나가 그렇게 하였습니다.
주인은 다섯 시부터 온 이들에게 먼저 한 데나리온씩 주며 집으로 돌려보냈습니다.
세 시에 온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가장 먼저 와서 일한 이들은 조금 더 받을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주인은 그들에게도 한 데나리온밖에 주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불평합니다.
“맨 나중에 온 저자들은 한 시간만 일했는데도,
뙤약볕 아래에서 온종일 고생한 우리와 똑같이 대우하시는군요.”
그러자 주인은 그들을 꾸중합니다.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고 일해놓고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적게 받았다고 불평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바로 첫째였다가 꼴찌가 되는 이들입니다.
한 데나리온으로 그들을 포도밭에서 일하게 한 이유는
그들을 행복하게 하려는 목적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행복하지 못했습니다.
반면 존 뉴턴과 같은 사람은 어떨까요?
지옥에 갈 줄 알았고 또 지옥의 사람처럼 살았던 뉴턴은 늦었을 때 주님께 돌아왔고
자신과 같은 죄인을 살리신 놀라운 하느님의 은혜를 노래하였습니다.
그가 나중에 성공회 사제로 살았지만,
그의 봉사는 자신이 받은 은혜에 비해 너무 작은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힘이 들 수 없었습니다.
지금 행복할 수 있는 사람이 하늘나라에서 높은 자리에 앉습니다.
그러려면 더 높은 영광을 기대해야 합니다.
저 같은 경우도 ‘비르짓다의 7기도’를 바치면서
연옥에 가지 않고 순교자의 지위에 오른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달랑 그 기도를 한다고
피를 흘리며 순교하신 분들의 영광이 주어진다는 것에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때문에, 지금 내가 하는 봉사는 그 은혜에 비하면 너무나 작은 것이 됩니다.
그런데 이런 마음 때문에 진짜 하늘나라에서 그런 지위에 오를 것을 압니다.
지금부터 행복 하려면 한 데나리온의 값을 무한히 큰 것으로 여겨야 합니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자신이 갔어야 할 지옥을 보고 체험하면서
자신에게 주어지는 구원이라는 한 데나리온의 값이 얼마나 큰지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평생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사는 삶이 결코 힘들게 느껴지지 않게 되었습니다.
크리스마스 캐롤의 ‘스크루지 영감’은 자신이 죽고 난 후의
무덤과 비석에 사람들이 침을 뱉는 미래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이젠 자신의 무덤에 많은 이들이 꽃을 놓아주는 상상을 합니다.
그리고 그 기대만큼 삶을 변화시켰습니다.
이전 수전노의 지옥의 삶이 아닌 천국의 삶을 살기 시작한 것입니다.
하늘나라의 더 큰 영광을 기대 합시다.
그리고 하늘나라에 들어가게 되는 한 데나리온의 값이
하느님 아드님의 피 값임을 믿읍시다.
그러면 그분 안에 머물기 위해 그분 뜻을 따르는 삶이
전혀 고생스럽게 느껴지지 않고 항상 부족하게 여겨질 것입니다.
이 행복이 진짜 영원한 행복을 보증합니다.
이 세상의 첫째인 저세상의 꼴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어제 복음의 끝과 오늘 복음의 끝은 같은 내용입니다.
첫째가 꼴찌가 되고, 꼴찌가 첫째가 된다는 내용입니다.
“이처럼 꼴찌가 첫째 되고 첫째가 꼴찌 될 것이다.”
그리고 이 말씀은 종말에 인생 역전이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세상에서 잘 나가던 사람이 저세상에서는 꼴찌가 될 거라는.
그런데 이 세상에서 첫째이던 사람은 무조건 꼴찌가 되는 건가요?
그렇다면 이 세상에서 선정을 펼친 세종대왕은 어떻게 되고
저처럼 이 세상에서 첫째도 꼴찌도 아닌 사람은 어떻게 될까요?
그러므로 첫째인 사람의 뜻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아야 할 것입니다.
이 말씀은 종말에 인생이 역전된다는 것이니
역시 인생 종말에 어떤 인생이냐가 관건입니다.
그러므로 종말의 순간에도 다시 말해서 죽을 때까지
아직도 이 세상이 첫째이고 저세상은 꼴찌인 사람이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하느님 나라에서 꼴찌가 될 첫째입니다.
그리고 종말의 순간에도 이 세상을 집착하여
하느님 나라 갈 생각도 없고 채비가 안 된 것이 문제이지
마지막에라도, 그러니까 저녁 6시를 1시간 앞둔 5시에라도 가겠다고 하면 됩니다.
이는 마치 마감 1초 전이라도 응시 원서를 내면 되는 것과 같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선착순으로 천국 지원자를 자르지 않고,
10시간 전에 응시한 사람과 1초 전에 응시한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십니다.
심지어 평생 착하게 산 사람과 평생 악하게 산 사람도 차별하지 않으십니다.
평생 악하게 산 사람이라도 죽기 전에 회개한다면
다시 말해서 평생 악하게 산 것을 후회하고 하느님께 애원한다면
평생 착하게 산 사람과 마찬가지로 그를 하느님 나라에 받아들이십니다.
이때 평생 착하게 산 사람이
저 사람은 악한 사람인데 왜 나와 똑같이 받아주시냐고 따진다면
그 사람이 실은 착한 사람이 아니고 악한 사람입니다.
평생 신앙생활 열심히 하고 수도 생활 열심히 한 사람일지라도
마지막에 대세 받는 사람을 시기한다면,
그 신앙인과 수도자는
신앙생활과 수도 생활을 헛되이 한 것이고 불행한 자들입니다.
신앙생활을 착실히 한 착한 사람이란 하느님의 후하심을 닮아
다른 사람, 악한 사람에게도 후하고 특히 구원 문제에 있어서 후할 것입니다.
나만 하늘에 오르고 다른 사람이 구원받는 것을 원치 않는 사람은
자기만 지붕에 오르고 사다리를 걷어차는 세속인과 다르지 않지요.
사실 일찍부터 포도밭에서 일한 사람 다시 말해서 신앙생활을 일찍부터 한 사람은
일찍 하느님을 알고 하느님 나라를 위해 봉사한 것을 행복으로 여겼어야 했습니다.
하느님을 일찍 안 것이 불행입니까?
하느님 나라를 위한 봉사를 일찍부터 한 것이 손해입니까?
하느님 나라를 위한 봉사를 고역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손해 봤다고 할 것이고,
그런 사람은 일생 고역을 치렀으니 일생 불행한 사람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신앙인이란 하느님 나라를 위한 봉사가 진정한 행복이요,
하느님 나라를 위한 봉사를 할 수 있는 것을 영광으로 여기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후하심을 닮아 다른 사람도 구원되길 바라는 사람입니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에서는 관대한 포도밭 임자이시며
착한 목자이신 주님의 진심이 드러납니다.
"하늘 나라는 자기 포도밭에서 일할 일꾼들을 사려고
이른 아침에 집을 나선 밭 임자와 같다."(마태 20,1)
밭 임자가 이른 아침에 일꾼들을 구하러 장터로 나갑니다.
그는 첫 새벽에 만난 일꾼들을 자기 포도밭에 보내고도,
아홉 시, 열두 시, 오후 세 시, 오후 다섯 시, 이렇게 네 차례나 더 장터에 나갑니다.
거기에 일을 얻으려 기다리는 이가 있으면
자기 포도밭으로 보내어 일을 할 수 있게 해주지요.
주인 중심이 아니라 일꾼의 바람을 우선하는 고용 방식입니다.
"맨 나중에 온 저자들은 한 시간만 일했는데도,
뙤약볕 아래에서 온종일 고생한 우리와 똑같이 대우하시는군요."(마태 20,12)
분명 밭 임자가 첫 일꾼들과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를 보았는데도 그들이 불평합니다.
가장 먼저 선택되었던 기쁨은 사라지고, 노동은 고생이 되었으며,
일한 시간과 수고가 억울한 일이 되어 버렸습니다.
자본주의 경쟁문화에서 자라난 우리에게 이 항변은 그리 낯설지 않습니다.
공정과 평등의 기치 아래 상위 1%를 제외하고는
인간의 가치, 노동의 가치를 숫자로 환산하는 데 익숙한 세상이니까요.
타인이 덜 받는 것에 함께 분노한다면 정의, 연대, 사랑이겠지만,
타인이 동등하게 받는 것에 분노하는 것은 질투이고 시기일 확률이 높습니다.
하루 밥값을 벌기 위해 하루 종일 가슴 졸인 수고까지를
노동에 준하는 가치로 보아주는 주인의 마음 씀씀이와 관대함이 놀랍습니다.
"당신은 나와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지 않았소?"(마태 20,13)
주인이 그들에게 첫 마음을 일깨웁니다.
오히려 합의를 뛰어넘는 허상을 품은 이는 첫 일꾼들인 셈이지요.
그들은 '조금만' 일한 이들이 자기와 같은 대우를 받는 것에 분노한 나머지,
가장 먼저 선택되어 마음 놓았던 기쁨을 잃어버립니다.
온종일 뿌듯했던 노동의 보람을
박탈감과 상실감으로 맞바꾼 형국이니 주인은 얼마나 안타까울까요...
우리의 주인이신 하느님은 당신이 사랑하고 싶은 만큼
자유롭게 무한히 사랑하는 분이십니다.
각 사람의 됨됨이와 자격을 따져 사랑의 양을 제한하거나 계산하는 분이 아니시지요.
만일 그렇다면 주님께 사랑받을 만한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도 안 될 겁니다.
누군가는 이런 주님 못마땅할 수도 있겠고, 누군가는 감사할 것입니다.
오늘 비유 속 일꾼들처럼 말이지요.
우리는 주님을 닮아 관대한 구석이 있으면서도
가끔은 깃털 하나 꼽을 자리 없이 마음이 편협하고 옹졸해지니,
남이 무얼 더 받았는지를 살피기보다
주님께서 내게 주신 선물에 더 주목하는 것이 평화를 얻는 길입니다.
사실 어쩌면 이런 주인 덕분에 우리는 무수한 죄와 약함에도 불구하고,
턱걸이로라도 포도밭 울타리에 아슬아슬 매달려,
아직까지 희망을 가지고 순례 여정을 계속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제1독서에서는 목자들을 호되게 꾸짖는 주님의 노한 목소리가 들립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이 우리를 사랑하시듯 목자들도 그렇게 대해 주길 바라셨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나 이제 내 양 떼를 찾아서 보살펴 주겠다."(에제 34,11)
착한 목자이신 주님께서 다시 우리를 그들 손에서 거두어
친히 보살피시겠다고 선언하십니다.
사랑하는 양들을 사람들의 손에 그들의 방식에 맡겨놓았더니,
사랑이 숫자나 도식으로 대치되어,
온기 없이 건조하고 냉랭한 조건 아래 갇혀버렸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마음으로 양 떼를 돌보실 착한 목자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그분은 우리가 누구이건 어떤 몰골이건 더, 더, 더 사랑하고,
그래서 더, 더 더 주고 싶어하는 분이십니다.
끝내는 목숨까지 내놓으실 만큼 말이지요.
우리 주님이 그런 분이시니 이미 우리는 과분하게 받았음이 틀림없습니다.
이런 목자 앞에서 보상과 代價의 양을 비교하고 따지는 자체가 부끄러운 일이지요.
사랑하는 벗님!
잘났건 못났건, 의인이건 죄인이건
당신 포도밭으로 불러 함께할 기회를 주신 주님께 감사드립시다.
괜한 곁눈질은 마음만 흐트릴 뿐이지요. 오직 주님만 바라보고 갑시다.
관대한 주인이시고 착한 목자이신 주님의 오직 하나의 관심사는 "나"뿐이랍니다.
주인의 이 눈먼 "내 맘 대로" 사랑 안에서 나는 온전한 주인공입니다.
그 주인이 그토록 아끼시는 벗님을 축복합니다.
정 세레나 수녀
“꼴찌가 첫째 되고 첫째가 꼴찌 될 것이다.”
가끔 착각에 빠집니다.
‘열심히 노력하고 착하게만 살면
하느님 나라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가까이 다가올 것이다.
혹은 내 것이 될 것이다.’ 라고 말입니다.
착한 일에 보상을 바라는
어쩌면 당연한 인간의 심리에서
나오는 자연스런 생각일 겁니다.
그러나 이 말은 때론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합니다.
그리고 얘기치 않게 시간이 흐른 뒤
다른 측면에서 그 은총이 드러나기도 하지요.
하느님께서는 우리 인간의 상상과 마음과
추측을 뛰어넘어 계신 주인이시다는 것을
오늘 포도밭 일꾼들의 삯을 헤아리는
포도밭 주인의 마음을 이야기한 복음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의 논리로는 일한 만큼의 보상을 받는 것이
당연한 이치이고 남들보다 더 한 노동이 큰 보속이라 여겨지겠지만
주님께는 열심히 일한 자도, 이제 일을 막 시작하는 자도
모두 그저 당신의 사랑받는 제자요,
불쌍한 죄인에 불과한 것이 아닐런지요?
우리는 그저 예수님이 알려주신
하느님의 일을 묵묵히 수행할 뿐입니다.
꼴찌를 첫째 자리에, 첫째를 다시 꼴찌에 앉히시고
그 품삯과 은총을 결정하는 것은 오직 하느님 한 분이십니다.
[출처] 툿찡포교베네딕도수녀회대구수녀원 : 복음묵상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