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철수 결정
11월 28일 사태가 심각하다는 보고를 받은 맥아더 유엔군 사령관은 워싱턴에 유엔군이 전적으로 “새로운 전쟁”에 직면해 있다고 보고했다.
미 8군은 이미 한반도의 북서쪽에서 철수를 시작하였다. 장진호 부근의 미 해병1사단과 미 육군 7사단 31연대 전투단의 전황도 급박해지자, 미 10군단도 최초에 세웠던 북진계획을 재검토하기 시작했다.
11월 30일 장진호 남단 하갈우리에 위치한 미 해병1사단 지휘본부에서 미 10군단장 알몬드 소장과 해병1사단장 올리버 스미스 소장, 7사단장 데이비드 바 소장이 참석한 가운데 작전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에서 알몬드는 장진호 부근의 모든 부대를 함흥∼흥남 지역으로 철수시키는 작전계획을 발표했고, 스미스 장군에게 철수에 지장을 줄 수 있는 모든 장비를 파괴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고, 탄약과 각종 보급품뿐만 아니라 파괴한 장비는 다시 공중 보급해 주기로 약속하였다.
철수작전명령에 따라서 스미스 소장은 우선 유담리에 갇힌 해병5연대, 7연대가 포위망을 돌파하여 하갈우리로 철수하게 한 다음, 단계적으로 하갈우리 및 고토리 포위망을 돌파하면서 함흥∼흥남 지역으로 이동하는 사단 철수계획을 수립하였다.
한편 7사단장 바 소장은 페이스 중령이 지휘하는 31연대 병력을 해병1사단에 합류시키기로 하고, 페이스 중령에 하갈우리로 집결하라고 지시했다.
12월 1일 아침 스미스 장군은 장진호 전투 전체의 양상을 바꾸는 결정적인 명령을 내린다. 유담리의 5연대는 유담리 지역 전부를 방어하고 7연대는 5연대가 시간을 끄는 동안 전 부대원을 이끌고 하갈우리 쪽으로 돌파하라. 그리고 7연대가 하갈우리 쪽으로 접근하면 5연대도 서서히 유담리 지역을 벗어나 하갈우리로 철수하라는 내용이었다.
드디어 오전 8시 철수가 시작되었다. 철수가 진행되는 동안 동시에 주변 고지에 매복하고 대기 중이던 중공군의 협공과 추격전, 이를 격퇴하고 철수 로를 확보하기 위한 미 근접 전폭기의 공중지원으로 전투는 맹렬하게 벌어졌다.
그런대, 때마침 희미한 희망의 불빛이 보였다. 스미스 장군이 장진호 전투 초기부터 진행시켰던 하갈우리 야전 활주로가 12월 1일 경 부분적으로나마 개통된 것이었다. 전투 초기 스미스 장군이 유담리, 하갈우리, 고토리 등지에 야전 비행장 건설을 강력히 추진하는데 대해서 일부에선 야전지휘관이 너무 신중을 기하는 것 아니냐?는 비판이 있었다. 그러나 훗날 역사가들은 만약 이 당시 야전비행장이 건설되지 못했다면 철수부대는 전멸을 면치 못했을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왜냐하면 이 활주로가 고립무원의 해병1사단과 외부를 연결해 주는 구원의 유일의 통로가 되었던 것이다. 오후 2시경 C-47수송기가 활주로에 착륙을 시작하여 보급품, 부상자와 보충병이 수송이 시작되었다.
12월 1일 09시경 해병 7연대 3대대는 도로상의 주력부대가 1542고지의 동쪽을 통과할 때까지 엄호하기 위해 1419고지, 1542고지에 대한 공격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그 동쪽 경사면에 임시 방어진지를 구축했다.
중공군 79사단 235연대의 4개 대대도 이날 아침부터 다음날 새벽에 걸쳐서 1542고지의 동쪽 경사면에 포진한 7연대 3대대에 대하여 끊임없이 공격을 가해왔다.
이 치열한 공방전에서 G중대와 I중대의 병력은 4백여 명에서 절반 수준인 2백 명으로 줄어들었다. 얼어붙은 들판에 적군과 아군의 시체만 쌓여갔다.
적은 12월 1일 심야부터 새벽에 이르기 까지 철수부대의 첨병대대인 5연대 3대대에 대해 맹렬한 공격을 가했다. 그래서 I중대의 병력은 또다시 2백 명에서 절반 수준으로 줄어 들 만큼 큰 희생을 입었다.
당시 기록에 의하면 땅이 얼어붙어 전사자의 시신을 채 묻지도 못하고 산 아래 노천에 방치할 만큼 혹독한 추위였다고 했다.
한편 측위 부대인 해병 제5연대 1대대는 북쪽을 향해 진지를 구축하고 유담리 분지와 장진호로 부터의 공격에 대비하고 있었다. 이날 밤 9시경부터 중공군 전위부대의 침투공격은 밤새도록 지속되어 아군을 괴롭혔다.
대대는 2일 새벽에 진지를 철수하여 주력부대의 좌측방을 엄호하라는 임무를 부여 받는다. 제7연대 1대대는 영하 35도의 혹한과 적설을 뚫고 밤 9시에 1419고지로 출발했다.
이날 1대대는 미군으로서는 드물게 폭설과 세찬 바람 속을 헤치며 야간 산악행군을 감행하여 중공군의 저항을 피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내친김에 1620고지 동쪽 경사면에서 단위 미상의 중공군 부대를 격멸하고 12월 2일 새벽 3시경에 재편성을 완료하였다.
그런데 부대를 정지시키자마자 몇 날 몇 밤 동안 지칠 대로 지친 해병대원들은 얼어붙은 맨땅 눈 위에 그대로 엎어져 추위도 적탄도 아랑곳없이 잠에 골아 떨어져 지휘관들이 이들을 독려하느라 무진 애를 썼다고 한다.
한편 워싱턴의 긴급 훈령에 따라 조지 스트레이트 마이어 공군 중장이 지휘하는 유엔군 공군사령부 예하 전폭기 부대는 즉시 장진호 부근으로 출동하여 본격적인 구출작전에 나섰다.
아울러 항공모함을 주축으로 하는 미 해군 제7함대를 동해안으로 긴급 발진시켜 미 해군과 미 해병 제1항공대 함재기가 합동 작전에 참가하는 동시에 연포비행장에서 발진하는 항공기들도 이들의 구출작전에 필사적으로 지원한다.
또한 월리엄 터너 소장이 지휘하는 유엔 공군 전투물자 공수사령부에서는 미 육군 병참 공수단의 협조로 이날 이후 매일 250톤씩 전투에 필요한 보급물자를 공중 투하해 철수 부대를 지원했다.
첫댓글 스미스장군의 야전 비행장건설이
부대를 사지에서 구하고 살렸네요
만일 야전비행장을 건설하지 않았다면
보급품 부상병 지원병도 없어 전부
항복 내지는 전멸 하였을것입니다
해병과 육군이 살인적인 추위
기상 온도에도 중공군의 맹렬한
기습과 야습을 끝까지 결사 방어
전투를 하였네요
죽기로 싸우면 이기고 살려고 싸우면
진다는 전투병법에 있습니다
어찌되든 미공군의 무진장 보급물자
지원과 중공군 전방 출몰지역
공중폭격으로 도움받으면서
가까운거리 중공군과는 치열한
백병전으로 처절히 싸우면서
철수를 하게 되었군요
다음 연재편 기대되고
흥미진진 함니다 수고 했습니다
우리는 625가 발발한지75년이 지나서 단지 그 당시 그랬구나하며
눈물없이 갸 보고 아 ! 그랬구나 합니다.
당시 피비린내나는 현장에서 살아남으려는자 무찌르려는자
갈등은 얼마나 어려웠들까요?
미국사람이 자기 아버지가 625참전용사였는데
평생을 포소리와 중공군 처들어오는 공포를 돌아가실 때까지 느꼈다합니다.
드디어 많은 희생을 내고 후퇴를 하는 군요.
우리는 이런 글을 통해서 사실만 전해듣습니다만
당하는 군인들의 마음도 헤아려야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