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설명: 조계종 총무원장과 학교법인 동국학원 이사장을 역임하며 교단발전과 학원안정화에 크게 기여한 정대스님
이(理).사(事)를 넘나들며, 교단발전과 종단의 사회적 위상 제고(提高)를 위해 헌신해왔던 학교법인 동국학원 이사장 정대스님(조계종 제30대 총무원장 역임)이 지난 18일 새벽5시 안양 삼막사에서 세수 67세, 법납 42세로 입적했다.
한시대를 풍미한 선승(禪僧)이자, 조계종단 역사에서 주역의 일인으로 살다 간 정대스님은 1937년 전북 전주시 다가동 1번지에서 태어났다. 달성 서(徐)씨 상섭(相燮)을 아버지로, 전주 최(崔)씨 은수(恩壽)를 어머니로 세상에 나온 정대스님의 속명은 병식(炳植). 어릴 때부터 영민하고 인자해 살생을 싫어했다. 살아 있는 목숨을 죽이는 일을 보면 하루 종일 음식을 먹지 않을 만큼 생명에 대한 외경심이 강했다. 유년시절부터 자기를 비우고 남 돕는 덕성을 기른 소년 병식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전북대 영문과에 진학, 4학년까지 다니다 군대에 입대했다.
군 입대 중, 청년 병식의 삶은 새로운 단계로 진입한다. 일생 동안 체험해야 될 삶의 좌절과 고통, 슬픔을 군대에서 맛보았던 것. 그렇다고 육체적 즐거움이나 물질적 욕구론 정신적 허기를 채울 수 없었다. 구도자의 길을 걸어가야만 할 운명을 지니고 태어났다는 것을, 군대에서 홀연 깨달았다. 제대 후 대학을 졸업한 청년 병식은 수행자로 태어난 운명에 따라 1962년 완주 위봉산 위봉사로 출가했다. ‘행자(行者) 병식’이 됐다.
62년 전강스님을 은사로 득도
板齒生毛 화두받아 일념으로 참구
진여자성의 불빛 체감
당시 위봉사엔 당대의 선지식 전강(田岡)스님이 계셨다. 몸 속에 머물고 있는 세속적 번뇌를 몰아내기 위해 공양주도 하고 채공도 했다. 부잣집 아들이 사람 되고 인격을 바로 세우기 위해 자청한 일이었다. 그것은 고통이 아니라 즐거움이었다. 동시에 전강선사의 법문을 들으며 ‘존재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해탈의 자유’를 조금씩 터득해 갔다. 1962년 가을 병식 행자는 은사 전강스님을 따라 인천 용화사로 옮겼다. 이곳에서 종신토록 사문의 길을 걸을 것을 다짐하며 사미계를 받았다. 전강스님을 모신 지 1년 만의 일이었다. 스승은 ‘정대(正大)’라는 법명을 지어주었다.
다음해 정대스님은 수원 용주사로 다시 옮겼다. 전강선사가 용주사 주지 겸 중앙선원 조실로 추대됐던 것. 용주사에서 정대스님은 전강선사를 시봉하며 일대시교(一代時敎)를 두루 배웠다. 그후 1967년 통도사에서 월하스님을 계사로 구족계를 받았다. 사미에서 운수(雲水)로 태어나 삼계를 자유롭게 거닐게 된 것이다.
출격장부가 된 그즈음 정대스님은 스승으로부터 ‘판치생모(板齒生毛. 판때기 이빨에서 털 난 도리가 무엇인가)’라는 화두를 받았다. 한 스님이 조주스님(778~897)을 찾아와 “달마대사가 서쪽에서 온 뜻이 무엇입니까”하고 묻자, 조주스님이 “판치생모”라 답한 데서 유래된 이 화두를 정대스님은 참구를 거듭하며 정진에 몰두했다.
한 번 가부좌를 틀고 앉으면 시간 가는 것을 잊어 버렸고, 먹고 자는 일 역시 떠올리지 못했다. 삼매의 무중력 상태에서 제불제조의 진면목만 참구했다. 용주사 중앙선원, 도봉산 망월사 선원, 수덕사 선원 등에서 정진을 계속한 지 3년 만에 스님은 자신을 감싸고 있는 벽이 무너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몸 안에서 번뇌와 결탁하고 있던 어둠이 서서히 걷히고 진여자성의 불빛이 보였다.
그러나 스님은 스스로 견성이나 오도란 말을 사용하지 않았다. 다만 수행을 통해 견성을 체험했다고만 했다. 겸손과 하심이 몸에 배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때부터 스님의 운명은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모든 일에 자신감이 생겼고, 직관력은 누구도 따를 수 없었다.
총무.재무부장 등
종단 요직 두루 거쳐
총무원장 동국학원이사장 역임
종단 3대 불사 중점 추진
스님의 수행력은 신륵사 주지를 맡은 1969년부터 본격적으로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신륵사 주지로 14년간 재임하며 도량을 정비하는 등 가람의 면모를 일신시켰다. 특히 1973년 조계종 사회국장에 취임하며, 수행과 행정을 결합, 화려한 삶을 개막했다. 뛰어난 친화력과 명석한 판단력으로 이(理)와 사(事)에 구애됨 없이 종무행정을 돌보며, 교단 발전에 일익을 담당했다. 이후 재정국장, 규정국장을 거쳐 70년대 후반부터는 두 차례의 사회부장, 네 차례의 재무부장, 8년 이후부턴 두 차례의 총무부장을 거쳐 총무원 부원장에 오를 만큼 탁월한 행정능력을 발휘, 종단 안팎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이것만이 아니다. 1975년 제4대 중앙종회의원에 피선된 이래 무려 8선의 경륜을 쌓으며, 왕성한 종회 활동을 펼쳤다. 뛰어난 친화력과 월등한 행정력을 바탕으로 스님은 종회부의장을 거쳐 88년부터 90년에 이르기까지 종회의장을 두 차례나 역임했다. 스님이 교단발전과 종단 안정에 크나큰 업적을 남긴 것도 바로 이 시기였다.
단순히 경력만 쌓은 것은 아니었다. 요직을 수행하던 중 이룩한 성과도 눈부셨다. 총무원의 소임을 맡았을 때는 행정체계와 사찰재산 관리의 기틀을 마련했고, 종회의장 재직 시엔 승가대학 설립허가, 불교방송 건립, 불교관계법 개정 등을 이뤄내 한국불교의 위상을 크게 높였다. 종립 동국대가 혼란에 빠지자 이사로 취임(1991~2003년), 학교발전의 토대를 마련하는데 이바지 한 것도 길이 기억될 만한 일이다.
종단 발전을 견인하는 한편, 용주사 주지를 맡아(83~94년), 3임을 거치며 용주사를 명실상부한 본사로 만들었다. 그리고 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등 지극한 효심으로, 용주사를 ‘효행 본찰다운 사찰’로 만들었다. 특히 스승 전강선사가 개원한 중앙선원의 문이 닫혀있던 것을 안타깝게 여긴 스님은 다시 선원의 문을 열어 선풍을 진작하고, 운수납자들을 뒷바라지했다.
94년 용주사 주지 소임을 넘긴 후, 내심자증(內心自證)의 세계에 소요유(逍遙遊)하던 스님을 종단과 교단은 그냥 놔두지 않았다. 1998년과 1999년 종단 내분을 거치며 교단이 어렵게 되자 전 종도들은 스님을 모시고 싶어 했다. 결국 종도들의 간절한 원력을 받아들여 제30대 조계종 총무원장에 취임(1999년 11월20일~2003년 2월), 종단의 혼란을 수습하고 종단안정화와 중흥의 기틀을 닦았다. 총무원장 재임 중 90년대 이후 조계종의 3대 불사인 ‘중앙승가대 김포학사 이전 불사’,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건립 불사’, ‘조계종 정보화 불사’에도 매진, 남다른 업적을 남겼다.
‘중앙승가대 김포학사 이전 불사’만 해도, 남들은 다들 힘든 일이라고 말했다. 그래도 스님은 인재양성이 종단의 가장 중요한 일이라며 끝까지 책임지고 ‘이전 불사’를 완수했다. ‘중앙승가대 이전 불사’ 못지않게 기억에 남는 것이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건립’이다. 1998년과 1999년의 내분으로 종단과 종단이 입주해있던 청사는 세인(世人)들에게 그리 좋은 인상을 주지 못하고 있었다. 정대스님은 그래서 한국불교 1700년의 역사와 전통을 간직한 새로운 청사를 짓고 싶어 했다. 결국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은 정대스님이 원하는 대로 진행돼 완공을 눈앞에 두고 있다. 스님은 3대 사업을 추진하며 종단의 기틀을 잡았고, 종단의 일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종도들에게 선명하게 보여주었다.
종단 3대 사업이 순조롭게 추진되고, 교단이 안정을 되찾자 스님은 ‘불교종합병원 개원 문제’로 난항을 거듭하고 있던 동국학원 이사장에 취임, 동국학원 발전을 위해 노심초사했다. 교육과 인재양성만이 종단의 살길이라는 평소의 지론을 실천하기 위해 스님은 남다른 관심과 노력으로 동국학원을 이끌었다. 교단과 동국학원 발전을 위해 노력하던 와중에도 스님은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40억원의 유산과 사재를 출연, 은정(恩正)장학재단을 설립해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학업에 전념하는 인재들을 지원하기도 했다.
이처럼 밝은 안목과 헌신으로 교단발전과 안정화에 남다른 업적을 남긴 정대스님은 이제 세연(世緣)을 마감했다. 그러나 스님이 남긴 ‘인재양성, 한국불교의 사회적 위상 제고’라는 유지(遺志)는 후인들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올 때도 죽음의 관문을 들어오지 않았고, 갈 때도 죽음이 관문을 벗어나지 않았다”는 정대스님의 가르침을 중생구제로 이어가는 일은 남은 후인들이 해야 될 몫이기 때문이다. “삼성산 꼭대기에 달을 비추고, 한강수를 만리까지 물결치게 만들었던” 정대스님의 법력이 항상 종단의 앞날에 비춰졌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정대스님 임종게
내불입사관(來不入死關) 올 때도 죽음의 관문에 들어오지 않았고
거불출사관(去不出死關) 갈 때도 죽음의 관문을 벗어나지 않았도다.
천지시몽국(天地是夢國) 천지는 꿈꾸는 집이어니
단성몽중인(但惺夢中人) 우리 모두 꿈 속의 사람임을 깨달으라.
첫댓글 나무대성대자대비대원대원본존지장왕보살마하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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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칠전 스님 다비식에 다녀 왔었는데...큰 스님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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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으로 다시 오소서...나무석가모니불 나무석가모니불 나무시아본사석가모니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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