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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사장 : 용부(龍府)의 비밀호위대(秘密護衛隊) - 01
- 내 딸을 건들면 죽는다.
단엽은 막총과 그 일행에게 무공을 전수 하면서 밤만 되면 파사랍
을 불러 들여 치료를 하였다.
파사랍의 내외상이 얼마나 대단한지 몰라도 단엽 정도라면 가볍게
치료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관패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예상외로 많은 시간을 파사랍의 치료에 허비하는 단엽이었다. 그
렇다고 남은 시간에 무공을 전수하거나 하는 것도 아니었다.
파사랍을 치료한 지, 오 일째 되는 날에야 관패의 의문은 풀어졌
다. 원래 소뢰음사에서 금강인을 키울 때, 하나의 사술을 시술하여
이들의 정신을 지배한다. 그 사술로 인해 금강인은 소뢰음사의
승려만 보면 저절로 존경심과 두려움을 가지게 되었고, 그들의 명
령을 거역하지 못했었다.
파사랍의 경우도 금뢰불이 살아 있었거나 소뢰음사가 가까운 서장
지역이었으면, 지금 단엽을 쫒아 다닐 생각 따위는 전혀 할 수 없
었을 터였다.
단엽은 이 기회에 파사랍의 몸에 걸러 있는 사술을 풀어 주었고,
탁해진 혈을 터 주었으며, 파사랍은 단엽의 이야기를 듣고 치를
떨었다. 그는 설마 자신의 몸에 그런 사술이 걸려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었다.
다시 시간이 흘러갔지만, 막총이나 황보룡 여소운, 그리고 장곽
남매는 단엽이 자신들에게 왜 무공을 전수하는지 아직도 묻지 못
하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그 어디서조차 들어 보지 못한, 무공 전수 방법은 그
들로서도 너무 신기했고 무공을 배우기에 정신이 없었다.
단엽의 무공 전수는, 습득 시간이 일반적인 전수 방법에 비해 십
여 배 이상 빨랐고, 이해도 쉬었다. 즉 상대에게 뜻을 전달하는 방
법이기 때문에 무공에 대한 이해력과 단엽의 뜻을 받아 드리는 것
이 아주 쉽고, 억지로 외우려 들 필요도 없었다.
관패는 그런 모습들을 보며, 자신이 힘들여 무공을 연마한 것이
무척 억울하다는 표정을 짓곤 하였다.
막총과 그 일행은 혹여 궁금한 것을 물어보고 싶어도, 단엽의 서
늘한 표정을 보고 주눅이 들어 말 붙이기가 어려웠기에 그냥 포기
하고 말았다. 드디어 칠일이 지났다. 이제 어느 정도 무공 전수가
끝나자 단엽은 막총 일행을 불러 모았다.
“이제 더 이상 지체할 수 있는 시간이 없기에 무공 전수는 여기서
멈춘다. 나는 하나의 대법으로 내가 아는 무공의 도해와 사용법,
그리고 초식의 흐름과 구결을 전부 여러분의 머릿속에 옮겨 놓았다
. 그 안에는 초식을 가장 효과적으로 사용하는 방법과 나의 경험
에서 얻은 새로운 이론까지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무공의 종류는
각자에게 가장 어울린다고 생각하는 것만 우선적으로 주입했다.
이제 머릿속에 기억을 끄집어내어 각자 부지런히 수련하고 연습하기
바란다. 이후로 무공의 발전 속도는 무두 각자의 노력하기 나름
에 달렸다. 그리고 반드시 명심해야 할 것이 있다.”
단엽은 잠시 호흡을 고른 후에 다시 말을 이었다.
“지금 내가 전수한 무공은 용부의 무공이다. 아울러 이 무공을 익
힌 이상 용부에 적을 둔 것이고 여러분은 바로 청룡당 소속의 호
위무사들에 임명되었다.”
막총 일행은 물론이고 관패, 파사랍의 안색마저 아연해 버리고 말
았다.
단엽은 누가 놀라던 말든 신경 쓰지 않고 말했다.
“혹시라도 그 부분에 대해서 불만이 있으면 지금 말해라! 만약 용
부의 호위무사가 되는 것이 싫다면 머릿속에 있는 무공을 모두 잊
어라!”
막총 일행은 잠시 서로의 얼굴을 보았다.
용부의 호위무사라면 무공을 배운 젊은 청춘남녀들이 가장 선호하
는 지위 중 하나였다. 그 내실이 어떻든 호위무사에 대한 인식은
남자라면 그 누구든지 한번쯤 해보고 싶은 자리였었고, 사공운 이후
엔 거의 모든 무림의 청소년들에게 있어서 용부의 호위무사는 꿈
의 자리였다. 물론 내택 호위무사는 아직까지 가장 꺼리는 자리로
남아 있었다.
장곽이나 황보룡은 용부의 제자가 되고 싶어도 불가능했었다. 우
선 신분 보장을 해줄 사람이 없었고, 나이가 많은 치고는 무공도
보잘 것 없었다. 한데 지금 기회가 왔으니 기쁘지 않을 수 없었다.
장곽의 경우 최소 자신이 용부의 호위무사라면 백룡표국의 입지
역시 지금과는 비교하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얼떨떨한
것은 단엽이 누구냐? 하는 점이었다. 과연 지금 응락 한다면 정말
호위무사가 가능할 수 있을까? 그들이 아는 한 임의로 호위무사
를 지정할 수 있는 사람은 용부의 부주이거나 영환호위무사만 가
능한 것으로 알고 있었다.
영환호위무사는 자신이 호위해야 하는 사람을 위해서는 그 어떤
권한도 다 가질 수 있었다. 필요하면 악마라도 데려다 보조 호위
무사로 지정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던 것이다.
단엽은 그들의 의문에 쐐기를 박았다.
“나는 영환호위무사다.”
모두 입이 쩍 벌어진다. 강심장으로 유명한 관패조차 이번엔 어지
간히 놀란 표정이었다.
모두 궁금한 표정이었다.
“내가 어떻게 천금마옥에서 천살마부를 구해 올 수 있었겠나 생각
해 보면 의문은 쉽게 풀릴 것이다. 내가 지켜야 할 호위대상은 바로
용취아다. 이것은 당분간 비밀이 되어야 할 것이다.”
관패는 다시 한번 놀란 눈으로 단엽을 보았다. 설마 용부의 영환
호위무사일 줄은 생각도 못했다. 그러나 그에게 새로운 의문이 떠
올랐다.
단엽이 천금마옥에 들어온 것은 대략 십 년 전이다. 그럼 십 년
전에 영환호위무사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천금마옥에 들어왔단 말인가? 그리고 일개 호위무사치고는 단엽
의 무공이 너무 고강했다.
최소 관패가 아는 단엽의 무공 수준으로 말한다면 우내육존 중 그
누구와 겨루어도 크게 밀리지 않는 수준이었고, 사실 그게 단엽이
지닌 무공의 끝인지 조차 장담할 수 없었다. 아무리 영환호위무사
가 대단하다고 해도 단엽의 실력이면, 그 정도가 뭐 대수겠는가?
납득 할 수 없는 사실에 관패가 무엇인가 물어보려 하였지만, 단
엽의 시선을 보고 그냥 참고 말았다. 그의 시선은 나중에 라고 말
하고 있었다. 차후에 물어볼 때가 있으리라.
한참 청운의 꿈을 가슴에 품은 청년 막총과 장곽, 황보룡에게 지
금 일어나는 꿈에나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가슴이 두근거린다. 그것은 두 소녀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강호를 여행하다 은자의 영웅을 만나 강호 무림의 공주라 할 수
있는 용취아의 비밀 호위무사가 된다.
생각만 해도 가슴이 설레는 일이었다.
여소운이나 장령 역시, 강호의 영웅전설에서나 있음직한 일이 자
신들에게 실제 벌어졌다고 생각하니 두근거리는 가슴을 주체하기
어려웠다.
이제 그들은 최소 단엽에 대한 의심은 풀었다. 그들이 생각하는
단엽의 정체는 용취아의 비밀 영환호위무사였으며, 지금 용부의
복잡한 사정으로 인해 천금마옥에서 관패를 빼 주는 조건으로 호
위행을 돕게 했으리라.
평생 감옥에서 썩다 죽어야 하는 관패가 은혜를 생각해서 단엽을
주공이라 부르는 것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주 작은 오해
지만 이런 오해는 있어도 좋은 기분 좋은 오해라 하겠다. 그러나
관패를 잘 아는 사람들이 들으면 웃을 일이었다.
‘그 괴물이 누군데 천금마옥에서 나오게 해준다고 그 하나의 조건
으로 다른 사람을 주공으로 부르겠는가? 차라리 거기서 늙어 죽고
말겠지.’
그들이 막총 등의 생각을 알았으면 이렇게 말했으리라.
단엽은 얼굴이 달아오른 그들을 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단엽이 영환호위무사임을 의심한다면, 막총이나 청년들은 자신들
이 지금 막 입에 문, 이 달콤한 꿈을 깨야 했다. 그들로서는 무조건
단엽을 믿고 싶었으며, 믿을 수 있는 근거는 충분했다.
단엽이 거짓말을 하기엔 그의 무공이 너무 높아 보였고, 그의 수
하인 관패가 너무 유명했다. 그들로서는 이것이 꿈이라면 잠에서
깨기 싫었다.
단엽은 그들의 마음을 헤아렸다.
이제 시작이다.
단엽은 자신이 아무리 강해도 한 손으로 열손을 당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또한 용부가 용취아에게 넘어간 후에도 그의 옆
에서 그를 보필해 줄 심복들이 필요할 것이고, 이제 이들은 용취아
의 충실한 심복으로 남을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가지지 못한
자들이었기에 성취욕과 충심을 가질 수 있으리라. 성격이나 인품도
믿을 만 했다.
딸의 미래를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다.
막총이나 황보룡을 보던 단엽의 눈에 섬뜩한 살기가 나타났다 사
라진다.
‘이 세상에 선과 악은 나에게 무의미하다. 누구든 내 딸을 건드리
는 자는 죽을 것이오. 내 딸에게 관대한 자는 살아남을 것이다.’
단엽의 시선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관패는 옆에서 단엽을 보고 있다가 그의 미세한 기운을 느끼고 움
찔하면서 그를 다시 돌아보았다. 보이는 모습은 그저 담담해 보인다.
그러나 관패는 감각적으로 그의 마음에 품은 차가운 한기를 느꼈다.
단엽과 관패, 그리고 파사랍은 전력을 다해 달리고 있었다.
관패는 단엽이 이렇게 조바심을 내며 급해 하는 이유를 모르는 바
가 아니었지만, 그러려면 뭐 하러 칠일씩이나 막총 등을 가르치며
허송세월을 했는지 따지고 싶었다.
“이제 쉬어 갑시다. 주공 파사랍이 너무 지쳤소.”
관패가 숨이 턱에 닿아 있는 파사랍을 눈으로 가리키며 말하자,
단엽은 군말하지 않고 신형을 멈춘 다음 근처 바위위에 앉았다.
관패는 부지런히 단엽의 옆에 가서 주저앉으며 들으라는 듯 투덜
거렸다.
“도망친 마누라 소식이라도 들었소? 왜 그리 급하게 움직이는 거
요.”
“빨리 가야 늦지 않게 때문일세.”
“늦지 않다니 뭐가 말이요?”
“내 생각에 용취아가 산동성을 넘으면 봉성의 습격이 시작 될 거
란 말일세. 그러니 우린 산동성 경계 부근까지 가서 용취아를 기
다려야 하네.”
“그 정도라면 지금처럼 급하게 서두르지 않아도 늦지 않을 텐데.
뭐가 그리 급하단 말이요. 그리고 그럴 거면 뭐 하러 칠일이나 허
비하며 그들에게 무공을 가르친 거요? 뭐 그들에게 여러 가지 일을
시키긴 했지만, 그 정도 무공으로 별반 도움도 안 될 텐데.”
“지금은 미약하지만 앞으로 큰 재목으로 자라 취아를 도와줄 수
있으면 된다.”
관패는 자신의 맞은편에 주저앉는 파사랍을 조금 고소한 눈으로
보면서 단엽에게 말했다.
“취아라니, 아무리 영환호위무사라도 그렇게 부르니까 마치 딸을
부르는 아비 같소.”
단엽이 관패를 보았다. 그리고 담담한 목소리로 말한다.
“내 딸 맞네.”
“하하, 딸같이 생각되는 것도 다 나이 탓....... 커억, 지금 뭐라 했
소? 따........ 딸이라니. 정말 딸이란 말이오?”
관패는 입이 딸 벌어졌고, 파사랍은 앉은 자리에서 다시 벌떡 일
어섰다.
관패는 단엽을 살펴보면서 그의 진의가 무엇인지 알고 싶어서 안
달이었다.
파사랍 역시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눈으로 단엽을 보았다.
단엽의 지금 표정은 담담했다. 최소한 지금 그의 얼굴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관패는 한가지만은 잘 알고
있었다.
단엽이 이런 일로 농담할 정도의 실없는 인간이 아니란 사실이었
다. 그렇다면 용취아가 정말 단엽의 딸이란 말이 된다.
관패는 열심히 머리를 굴려 보았다. 그리고 보니 유독 용취아 이
야기가 나왔을 때마다 단엽의 행동이 이상했다. 세상이 무너져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사람이 단엽이라고 생각하는 관패였다. 그런
단엽이 용취아 이야기만 나오면 조금씩 달라진 것은 단순하게
용취아의 영환호위무사이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라, 더 깊은 무엇인
가가 있을 것이란, 막연한 짐작은 하고 있었던 참이긴 했다. 그러
나 딸이라니, 그것은 전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던 일이었다.
관패는 단엽이 그 실력으로 왜 용부의 영환호위무사가 되었는지
이해할 것 같았다. 하지만 단엽의 말이 사실이라면, 지금 용취아가
용부의 부주인 천룡검(天龍劒) 용무성(龍無聖)의 딸이라고 알려진
사실은 무엇인가? 그리고 단엽의 진정한 정체는?
관패가 한 숨을 쉬면서 단엽에게 말했다.
“대체 정체가 뭐요?”
단엽의 시선이 하늘을 향했다.
지금까지 강하게 보이던 단엽의 모습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아주 잠시였지만, 마치 세상의 슬픔과 아픔은 홀로 다 짊어진 듯한
표정이었다. 다시 담담해진 그를 보면서 관패와 파사랍은 가슴을
꽉 채워오는 진한 감정을 느꼈다.
단엽은 마치 남의 이야기하듯이 말했다.
“내가 사공운일세.”
관패의 입이 쩍 벌어졌고, 파사랍은 다시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관패는 이제 이 젊은 주공으로 인해 더 이상 안 놀라겠다고 다짐
을 했었다.
천금마옥에서 그 엄청난 무공에 질려서 더 이상은 질리거나 놀랄
일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 생각은 지금 두 번 깨졌다.
관패와 파사랍은 단엽에게 복잡한 사연이 있음을 알았다. 그러나
물어보기엔 단엽의 표정이 너무 단조롭다.
감정이 격한 것도 어렵지만, 그 감정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 경우
도 무엇이가를 물어보기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상대가 그 감정을
표현하고 싶지 않다는 뜻으로 보였고, 지난 이야기를 하다 보면
다시 그 감정의 늪에 빠져야 한다.
관패는 단엽을 보다가 자신의 아둔함을 탓했다.
‘나도 참 멍청하구나, 이미 주공이 유령무공을 쓰고 있다는 사실
을 알고 있었으며, 사공운이 유령대제의 전인이란 사실을 들었으
면서도 두 사람이 동일인이란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니. 에라 이
멍청한 놈아.’
관패가 갑자기 자신의 머리를 쥐어박기 시작하자 파사랍은 저놈이
이제 미쳤나 하는 표정으로 본다. 그러나 관패가 두 사람이 한 명의
인물임을 눈치 채지 못한 것은 결코 그의 눈치가 늦어서가 아니었다.
사실 관패는 덩치에 비해 눈치가 늦은 사람은 아니었다. 그러나
우선 관패는 자신의 주공으로 이미 윗사람으로 본 상황이었다. 무
공이나 독함이나 자신보다 한 수 위인 인물이었고, 그 수준이 결코
우내 육존의 아래가 아닐 것이라 짐작하고 있던 참이었다. 반대
로 사공운은 아무리 세상이 추앙하는 영웅이라도 자신 이상으로
무공이 강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둘 사이에 십년이란 시간이 있었지만, 십년이란 시간만으로 계산
하기엔 단엽의 무공이 너무 강했다. 또한 단엽 정도의 고수가 영
환호위무사나 하고 있을 인물로 생각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무엇
보다도 현재 그의 성격은 어떤 단체에 들어가 있을 정도로 작은 그
릇이 아니었으며, 누군가를 목숨 받쳐 사랑할 인물로 보이지도 않았다.
단지 스스로 영환 호위무사라고 밝혔을 때, 알아챘어야 할 일이었
다. 그 점은 관패도 아쉬워하는 부분이었다.
관패는 가볍게 한 숨을 쉬면서 단엽을 보았다.
“이제 속 시원하게 말 좀 해 보시오. 궁금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
니라서 이해하기 어렵소. 그러니 좀 자세하게 설명을 해 달란 말
이오. 특히 주모님이 누구요. 용취아의 어머니가 누구요?”
“때가 되면 이야기해 주겠네. 지금은 말하고 싶지 않네.”
관패와 파사랍은 멍한 표정으로 단엽을 보았다.
관패는 정말 알고 싶은 것이 있었지만 꾹 눌러 참았다. 바보가 아
니라면 짐작할 수 있는 일이 있었지만, 그것을 믿자니 더욱 복잡
하고, 무엇인가 틀이 이상했다. 그렇게 어색한 침묵이 흐르고 나자
관패가 고개를 돌리며 다시 물었다.
“그래 어떻게 할 셈이오?”
관패의 말에 단엽의 얼굴이 차갑게 굳어졌다.
“누구든 내 딸을 건들면 죽는다.”
단호한 그 한마디에 관패와 파사랍은 가슴이 시린다.
그 한마디엔, 딸에 대한 사랑과 용설아에 대한 그리움이 그대로
묻어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관패는 단엽의 표정을 보면서 무너지는 봉성을 보고 있었다.
‘담가 놈들, 정말 성질 더러운 인간을 건드렸다. 하필이면 주공과
적이 되다니.’
관패가 봉성을 불쌍하게 여길 때, 파사랍은 입안이 타는 느낌이었
다. 자신의 뿌리라 할 수 있는 소뢰음사가 너무 큰 강적을 만들었
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사술로 인해 소뢰음사를 본능적으로 동
경했었고, 이제 사공운으로 인해 그 뿌리까지 제거되었지만, 나름대
로 자신을 지금까지 키워준 소뢰음사라 그들을 적으로 삼기엔 무
엇인가 껄끄러운 점이 있었다. 반대로 소뢰음사에 받아야 할 빛도
있지만 그 부분을 생각하기엔 소뢰음사에 대한 두려움이 아직도
강하게 자리 잡고 있는 파사랍이었다. 그의 기분은 그래서 묘했다.
파사랍과는 반대로 관패가 도끼를 휘두르며 빙긋 웃었다.
“앞으로 신나는 일이 많겠군.”
그 다운 말이었다. 그 모습을 보던 단엽이 말했다.
“잘 부탁하네, 그래도 자네의 질녀 뻘이 아닌가?”
덤덤한 그 말에 관패는 그만 잠시 멍한 표정이었다.
질녀라는 말이 그의 귀를 번쩍 트이게 해 주었다.
질녀라면 취아에게 있어서 자신과 단엽의 관계를 친구로 본다는
말이었다.
관패는 단엽을 보았다. 담담한 표정이었다. 마치 태풍이 불기전의
그 고요함과 너무도 닮아 있었다. 결코 빈말이 아니란 것을 가슴
으로 느꼈다. 그는 진정으로 자신을 친구로 생각하는 것이다.
관패는 코 끗이 찡해지는 것을 느꼈다.
우선 단엽의 마음 한 끗 자락을 본 듯해서고, 자신을 일개 하인이
아니라 최소한 마음속에서는 동료로서 친구로서 인정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었으며, 취아라는 귀여운 질녀가 생겼다는
뿌듯함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그 질녀가 용부의 후계자 아닌가?
관패가 돌아섰다. 그의 눈가에 물기가 배어 나온다. 왜인지 모르
게 뭉클한 감정이 그를 돌려세웠다. 자신과는 너무 낯설고 이질적인
감정이라 혼자 무안한 마음까지 들었다. 그러나 그의 가슴엔 이
미 하나의 결심이 들어서고 있었다.
‘취아라 했지, 걱정 말거라! 이 아저씨가 너를 해꼬지 하는 자들의
목을 모조리 장작 패듯 해 주마.’
단엽의 한 마디로 인해 관패에게 죽어야 할 숫자가 조금 늘어난
감이 있었다.
관패는 한손으로 코 한 끗을 누르고 팽하는 소리와 함께 코를 풀
며 말했다.
“여하간 갑시다. 빨리 가서 미리미리 살펴보아야 취아의 안전을
지킬 것 아니요.”
역시 관패의 넉살다웠다. 언제 보았다고 단엽의 단 한마디에 용부
의 소공녀를 취아라고 친근하게 부르는가?
파사랍은 뭐 보듯이 관패를 본다.
언제 봐도 이해하기 어려운 괴물이었다. 관패는.
진충의 신법은 빨랐다.
숲을 헤치고 날아가는 질풍처럼 빠른 그의 신형은, 산속에 있는
제법 큰 마을에 이르러서야 멈추었다.
신형을 세우고 바라본 진충의 시선에 들어온 전경은 실로 아름다
웠다. 약 오십여 호의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마을 뒤로는 산이
있고 앞에는 논과 밭이 가득한 벌판이었으며, 그 벌판을 끼고 제
법 커다란 개울이 흐르고 있었다.
강이라고 하기엔 작고 개울이라고 그냥 무시하기엔 제법 컸으며,
수량도 적지 않았다.
이제 막, 해가 저무는 산마을의 풍경은 노을과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아직 파릇하게 새싹이 돋아날 계절은 아니었지만, 마을
앞 강가에 나란히 들어선 계단식 논과 밭이 정겨운 풍경으로 진
충에게 인사를 하고 있었다.
‘여기가 청계현은 확실할까?’
진충의 시선이 음울해졌다.
처음 봉성의 밀실을 나와서 은밀하게 자신의 가족을 찾았다. 그러
나 뜻밖에도 그의 가족은 살던 곳에서 사라진 다음이었다. 우선
자신의 가족이 봉성에게 화를 당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그를 안심하
게 하였다.
가족이 어디로 갔을 거란 생각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세상을 떠돌며 살던 외삼촌이 호남성 청계현이란 마을에 정착해서
살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비밀이라면 부
모와 자신 이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는 사실이니, 가족이 봉성을
피해 움직인다면 그 곳밖에 없을 것이다.
문제는 자신의 부모 형제들이 어떻게 살던 곳을 빠져 나갈 수 있
었느냐 하는 점과, 호남성까지 먼 여정을 가면서 무슨 수로 봉성의
추적을 뿌리쳤느냐 하는 점이었다.
많은 의문을 지니고 진충은 청계현을 향해 몸을 날렸다.
마침 청계현은 악양에서 약 오백여리 떨어진 관도에 있는 청계산
너머에 있었다.
청계산 자체가 큰 산은 아니었지만, 강남에 있는 산치고는 제법
험했고, 깊었다.
관도에서 청계산을 돌아, 보통 사람 걸음으로 약 반나절 거리에
청계현이 있었다. 그 정도 거리라면 절정의 신법을 지닌 진충에게
그리 먼 곳은 아니었다.
진충은 자신의 가족이 무사한지만 알아보고 바로 떠날 작정이었
다. 자신이 그 곳에 머물면 혹여 가족까지 위험해질 수 있다는 걱정
때문이었다.
위치만 알았지 처음 와 보는 곳이라 사실상 이곳이 청계현인지조
차 확신을 가질 수 없었다. 그러나 부모에게 들었던 자신의 기억이
확실하다면, 이 정도의 위치에 청계현이 있어야 하고 마침 이
마을이 나타났으니 틀림없어 보였다.
진충의 신형이 그림자처럼 움직였다.
마을 입구에 다다른 진충은 신법을 멈추었다.
마을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마을 입구로 들어서자 왁자한 소리와 함께 아이들이 뛰노는 소리
가 크게 들려왔다. 마을 집들의 굴뚝, 여기저기에 연기가 모락, 모
락거리며 피어오르고 있는 모습도 보인다.
밥 짓는 냄새와 시골 아낙네의 걸죽한 음성도 여기저기서 향기처
럼 풍겨오는 모습은 더 없이 평화로운 마을이었다.
마을 안으로 들어 왔을 때, 여기저기서 얼굴을 내밀던 아이들이
제일 먼저 진충을 발견하고 그의 곁으로 모여들었다.
진충이 아이들의 모습을 보고 이 동네에 낯선 나그네가 나타난 것
도 오랜만이고, 또한 타지 사람들이 거의 나타나지 않는 동네란
것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곧 이어 아이들의 웅성거리는 소리를 들은 동네 어른들이 한두 명
나타나더니, 그 중에 나이가 들어 보이는 노인이 진충에게 다가왔다.
진충은 얼른 앞으로 한 발 나서며 노인에게 정중한 예의를 차리
고 물었다.
“어르신, 여기가 청계현이란 곳이 맞는지요?”
노인은 밝은 미소를 머금고 진충을 보았다.
노인은, 오랜만에 동네를 찾아온 이 낯선 사내가 비록 눈이 하나
없는 애꾸였지만, 선해 보이는 인상과 맑은 눈으로 보아 악인은
아닐 것이라 생각 했다. 자연히 말도 부드럽게 나왔다.
“젊은이, 여기가 청계현이 맞네만, 무슨 일로 왔는가?”
진충의 표정이 밝아 졌다.
“동네에 친척이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혹시 연철랑이란 분이 이
마을에 살고 있으신지요.”
연철랑이란 말을 들은 노인이 얼굴에 이채를 띠며 말했다.
“호....... 혹시, 진충님이 아니십니까?”
진충의 얼굴에 얼떨떨한 표정이 떠올랐다.
낮선 땅에서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노인이 있을 줄이야! 더군다나
진충님이란다. 그러나 곧 이 노인이 자신의 부모와 막연한 사이일
거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아직 존칭의 이유를 납득할 수 없었다.
“맞습니다. 어르신.”
진충의 답을 들은 노인은 물론이고, 동네 어른들의 표정에도 반가
운 표정이 어렸다.
노인은 반가운 표정으로 진충을 보면서 말했다.
“오! 오! 철랑의 매형인 진대인의 큰 아들이시구먼요. 돈을 벌러
장사를 떠나셨다고 들었습니다. 거의 십년이 다 되어서야 돌아오
시다니 참으로 무심 하셨습니다. 진대인도 그렇지만 부인께서 참으
로 맘고생을 많이 하셨습니다.”
“부....... 부인.”
진충은 무엇인가에 호되게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자신이 언제 장가 갈 시간이나 있었나? 그런데 난데없이 부인이라
고 하였다. 더군다나 노인은 부인이라고 할 때, 아주 공경한 표정
이었다. 그 모습은 누군가를 진심으로 존경하고 고마워 할 때나
보여주는 모습이었다.
진충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노인을 보았다.
동네 어른들이 모두 앞으로 나와 진충에게 인사를 하면서 반가와
하는데, 마치 은인을 보듯 하면서 말을 이었다.
“진마님의 신세를 너무 많이 졌습니다.”
“진마님 같은 보살님이 이 마을에 오신 것은 마을의 복이었습니
다.”
“어쩌면 그렇게 아름다우시고 많은 제주를 지니셨는지 모르겠습니
다.”
동네 어른들은 서로 앞 다투어 인사를 하면서 있지도 않은 자신의
부인을 칭찬하였다. 더군다나 그 진실한 모습들 속에는 더 없이
상대를 존경하는 모습들이었다.
진충은 얼빠진 모습으로 인사를 받고 있었지만 도무지 실감이 나
지 않았다. 대체 무슨 일이란 말인가? 아니 자신에게 뭔 부인이
있었단 말인가? 혹시 잘못 안 것이 아닐까 생각했지만 무엇인가
곡절이 있으리라 생각했다. 의문은 가득했지만, 부모님을 만나면 알
수 있으리라.
진충은 일단 인사를 받으면서도 상당히 껄끄러웠다. 이윽고 서로
간에 인사가 끝나자, 노인이 앞장을 서며 진충에게 말했다.
“저를 쫒아 오십시오.”
얼떨떨한 마음의 진충은, 노인의 안내를 받아 마을 안으로 들어갔
다. 마을 중심으로 들어가자 그 곳에는 제법 커다란 서당이 하나
있었고, 그 서당 바로 옆에 제법 큰 집 한 채가 붙어 있었다.
노인은 진충을 그 집으로 안내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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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건강 하고 행복 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