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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로 사회소득·사회금융 등 기본권리 찾아야
최배근 건국대 교수
사회는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집이다. 먹을 것을 나눠 먹고, 비바람을 함께 피하고, 아프면 서로 돌봐주고, 그리고 혼자라는 외로움을 갖지 않게 해주는, 더불어 사는 공간이다. 그런데 오늘날 대한민국에 함께 살아가는 집은 없다. ‘사회’가 없어졌다는 말이다. 노후 파산과 고독사는 일상화되었고, 심지어 취업의 벽과 강요된 고립으로 매년 수백 명의 청년들도 고독사 대열에 합류한 지 오래되었다. 사회로부터 고립감을 느끼고, 연결망이 끊어지고 유대감이 없어진 사회를 진정한 사회라 할 수 있는가.
사회가 존재하기 위한 경제적 조건을, 보수주의의 정신적 뿌리인 존 스튜어트 밀(John Stewart Mill)은 1848년에 쓴 「정치경제학원리」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사회적 생산물의 배분에서 최소 부분은 노동능력의 유무와 관계 없이 사회 구성원 모두의 생계 보장에 먼저 할당하고 나머지 생산물은 노동, 자본, 재능의 세 가지 요소에 따라 나눈다.” 문제는 밀의 이 주장을 이해하기 위해 특별한 지식을 필요로 하지 않음에도 대다수 경제전문가들이 모르거나 알아도 외면한다는 사실이다.
보수주의 원조가 설파한 ‘사회몫’ 선(先)분배의 원칙
과거 글에서 소개한 내용을 다시 소개하자. 사람이 사회적 동물로 살아가는 방식을 선택한 이유는 (다른 동물과 마찬가지로) 동물의 가장 강한 욕망인 생존 문제의 해결을 위해 함께 살아가는 것이 유리하기 때문이다. 사회를 구성하고 살아가는 순간 사실상 모든 활동은 ‘사회적 활동’이다. 생존 활동 중 가장 중요한 활동 중 하나인 생산활동 역시 ‘사회적 생산’ 활동이다. 일정 기간의 ‘사회적 생산물’ 혹은 화폐적 표현인 ‘사회적 생산액’이 바로 GDP 개념이다.
생산의 궁극적 목표는 ‘배분’이다. 모두 함께 만들어 낸 사회적 생산액에서 ‘사회몫’을 먼저 떼는 것이 당연하고, ‘사회몫’은 생산활동에 참여한 모두에게 생계에 필요한 최소한을 우선 배분해야만 한다. 이것은 ‘복지’가 아니라 사회 모든 구성원이 누릴 권리이다. 그리고 구성원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는 데 필요한 이른바 안보와 치안 등에 배분한다. 사회 생산액에서 ‘사회몫’을 얼마나 배분할 것인가는 사회 구성원이 1인1표라는 민주주의 원리로 결정한다. 사회몫을 제외한 나머지는 개인의 기여에 따라 1원1표라는 돈의 힘이 지배하는 시장에서 결정된다. 이처럼 인간이 사회적 동물의 삶의 방식을 선택할 때부터 정치와 경제는 분리할 수 없는 인간 삶의 영역이었고, 현대 사회에서 그것은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로 한 몸을 이루었다.
이처럼 사회 속의 모든 인간은 ‘생계에 필요한 최소 소득을 배분받을 권리’를 가졌다. 그럼에도 우리나라의 국민은 자기 권리를 제대로 찾지 못하고 있다. 그 결과가 시장임금에 대한 높은 의존이고, 최저임금 인상률에 목을 매는 이유이다. 친자본 목소리는 우리나라의 최저임금 수준이 OECD 평균보다 높다는 사실만 강조하면서 최저임금 인상을 거부한다. 그런데 한국이 OECD에서 공적 사회지출 비중이 가장 낮은 나라 중 하나라는 사실은 외면한다.
사회소득 대신 최저임금에 목매는 한국 노동자 현실
2022년 기준 한국의 사회소득은 GDP 대비 14.1%로 OECD 평균인 21.1%의 3분의 2에 불과하고, 최상위 국가군의 절반도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외면한다. 노동자들은 사회소득을 제대로 배분받지 못하다 보니 (돈의 힘의 원리가 지배하는) 시장에서 결정하는 최저임금(시장소득)에 목을 맬 수밖에 없다. 국세청 자료에 따르면 21년 기준 약 2536만 명 소득 활동자 중 37%(약 1천만 명)가 연소득 2천만 원 미만이고, 이중 절반 이상인 약 560만 명이 연소득 1천만 원 미만인 현실이다.
이런 현실에서 자본 측이 최저임금 인상의 방패막이로 삼는 것이 (영세) 자영업자의 어려움이다. 자영업자 1인당 소득은 지난 10년 넘게 연 0.7%씩 줄어 2011년 1898만 원에서 2022년에는 1763만 원에 불과하다. 을과 을의 야만적인 싸움이 반복되는 이유이고, 자본 측은 이를 즐기고 있다. 을과 을의 싸움의 결과는 사회의 파편화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이른바 분할통치(divide and rule)가 한국에서 가장 잘 작동하는 이유이다.
왜 이런 비극이 반복될까? 정치가 작동하지 않고, 민주주의가 실종된 결과이다. 사회소득이 강화되면 저임금 노동자는 최저임금 인상에 목을 맬 필요가 없다. 2023년 현재 시간당 최저임금은 1만 원에서 380원이 부족하다. 380원을 보전하는 데 필요한 소득은 연간 95만 1034원이다. 이 문제 해결은 간단하다. (2021년 기준) 소득활동자 약 2536만 명 모두에게 100만 원을 지급하기 위해 필요한 재원 25.36조 원을 현재의 소득세 납부 비율로 배분(예: 국민배당소득세 도입)할 경우 하위 40%까지 95만 원 이상의 순소득 증가 혜택을 입는다. 예를 들어, 하위 40%의 소득활동자는 2021년에 세후소득이 2163만 원이었다. 이들에게 배분되는 세금은 약 5만 원이 되고, 100만 원을 받으니 95만 원의 순소득이 발생하는 것이다.
이 사회소득을 배분하기 위해 필요한 재원 중 41%에 달하는 10조 4230억 원을 상위 1%의 25만 3593명이 부담을 진다. 이중 상위 0.1% 이내의 소득자인 2만 5359명은 각 2억 원의 추가 세금으로 전체 재원의 20%를 부담한다. 상위 11~16%에 속하는 소득활동자의 추가 세금은 2만원~64만원 정도이고, 전체 소득활동자의 83%는 (세금 납부 후) 순소득이 증가한다. 80% 이상 국민이 지지하면 대다수 사회소득은 증가시킬 수 있다. 사회소득이 증가하면 최저임금 인상률을 높이지 않아도 된다. 아래 표에서 보듯이 추가 세금에 대한 고소득자의 부담도 그리 크지 않다.
모두가 혜택 누릴 사회몫, 그 재원은 많고도 많다
사회소득을 증가시키는 방법은 법인세에도 적용할 수 있다. 소득세는 상위 0.1%의 평균 세전소득이 약 18.45억 원으로 10억 초과에 대한 최고 소득세율(45%) 적용이 일리가 있다. 그렇지만 법인의 경우 22년 기준 법인세 수입이 0.1% 이내에 해당하는 982개 법인의 평균 수입이 3조 1902억 원이었는데 법인세는 3천억 원 초과 수입에 대해 25% 세율을 적용하고 있다. 그런데 0.1%~0.2%에 해당하는 또 다른 982개 법인의 평균 수입이 3428억 원이다. 양 그룹에 같은 최고 세율을 적용하다 보니 0.1% 이내 법인은 수입의 약 1.7%를 세금으로 납부하는 반면 0.2% 이내 법인은 수입의 약 1.8%를 세금으로 내고 있다. 수입이 적은 법인이 상대적으로 더 많은 세금을 납부하는 불공정 과세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법인세의 공정성을 제고하고 사회소득에 대한 법인의 책임성을 강화하기 위해 98만2천5백여 개의 법인으로부터 소득활동자 2536만 명 전원에게 100만 원을 지급하기 위한 재원 25.36조 원을 현재의 법인세 납부 비율대로 배분할 경우 전체 부담의 67%에 해당하는 17조 400억 원을 상위 1% 이내의 법인이 부담을 진다. 특히 상위 0.1% 이내 법인이 전체 부담의 59%인 15.2조 원을 지게 된다. 아래 표에서 보듯이 상위 1% 이내의 법인이 부담을 질 추가 세금은 현재의 세후 수입 규모를 고려할 때 그리 부담되지 않는 액수이다. 나머지 법인들의 추가 세금도 부담이 된다고 보기 어려운 규모이다.
이처럼 사회소득 강화는 조세 구조를 조금만 바꾸어도 성과를 낼 수 있다. 특히 우리 사회 불평등의 핵심 분야인 자산, 특히 부동산자산에 대한 조세 구조를 조금만 바꾸어도 사회소득은 크게 강화할 수 있다. 사회소득 지원 명분으로 부과한 세금은 (기재부 관료의 개입 없이) 바로 국민에게 돌려주어야만 한다. 무엇보다 토지보유의 경우 가장 불평등이 심한 부문이기에 추가 세 부담은 상위 5%에 집중되고 그렇게 해서 조달한 재원으로 대부분 국민은 순소득이 증가할 수 있다. 게다가 이 사회소득들을 지역화폐로 주게 되면 지역경제 활성화에도 기여할 것이다.
화폐신용 공동 보증한 국민이 신용대출 못 받는 잘못된 현실
사회몫을 정상화해야 하는 또 하나의 부분이 금융이다. 사회 생산액 중 사회몫은 정부 수입(경제력)을 구성하고, 정부 경제력은 중앙은행이 발행하는 법정 신용화폐(불환화폐)의 가치를 보증하는 물적 기반이다. 그런데 정부 경제력의 기반은 모든 국민이 납부하는 세금이다. 즉 중앙은행이 발행하는 불환화폐의 신용은 모든 국민의 공동 보증의 결과물이다. 금으로 가치를 보증해야만 화폐를 발행할 수 있던 은행은 금의 제약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고, 여기에 추가로 유한책임의 (법인) 특혜를 얻었다. 중앙은행의 사실상 모델로 여기는 영란은행의 설립 목적으로 정부의 금고 역할, 공공선과 인민 모두의 혜택 촉진 등을 (공동 왕 윌리암과 여왕 메리의 칙령으로) 규정한 이유이다. 중앙은행이 발행하는 불환화폐의 신용을 공동 보증한 국민 모두는 중앙은행 신용에 대한 권리가 존재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의 현실을 보면 신용대출 이용자 중 20%에 가까운 국민이 은행의 신용대출을 이용하지 못하고 있다. 자신이 보증한 신용화폐에 대해 신용을 제한받고 있는 것이다. 사실상 국민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을 자신이 무능한 탓으로 돌린다. 금융자본 이익을 대변하는 사이비 전문가들에 의해 세뇌당한 결과이다.
따라서 정치는 모든 국민이 최소한의 신용을 이용할 권리를 찾아주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영란은행의 설립 목적인 ‘모든 인민의 혜택 촉진’에 해당한다. 모든 국민에게 1천만 원 정도를 신용등급 1등급의 금리로, 이자만 상환하며, 사실상 평생 이용할 권리를 가지면 사회경제적 약자층이 카드론이나 현금서비스, 2금융권과 대부업 등의 고금리 자금을 이용할 가능성이 크게 줄어든다. 그리고 중소기업 등에게 지원하는 한국은행의 금융중개지원 대출을 (영세) 자영업자 등에게도 확대해 자금조달 비용을 제도적으로 낮추어 주어야 한다.
민주주의로 사회소득과 사회금융 등 기본권리 찾아야
이처럼 사회소득과 사회금융에 대한 국민의 권리 회복이야말로 사회를 복원하는 출발점이 될 것이다. 나아가 국민의 삶의 질이 개선되고, 생계 압박으로 유보하였던,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시도할 기회도 가질 것이다. 특히 창업을 희망하는 이들은 5명 정도가 함께 하면 창업자금 5천만원을 이용할 수 있게 된다. 사회에 새로운 시도가 활성화되어야만 우리 사회는 저성장의 늪에서 벗어날 수 있다. 일부에서 신용이 부실화될 염려를 침소봉대하는 것은 금융자본 이익 대변에 불과하다. 한 달에 5만원 미만의 이자를 고의로 상환하지 않아 (사회활동에 지장을 받을 수 있는) 채무 불이행자가 될 사람은 거의 없다. 진짜 걱정거리라면 이자 상환에 필요한 사람에게는 지역사회 일자리를 연계시켜줄 수도 있다.
무엇보다 사회소득과 사회금융은 복지가 아니라는 사실을 국민이 깨달아야만 한다. 국민의 기본권리이기에 당당하게 요구해야만 한다. 이 모든 것은 정치에 달려 있고,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할 때 가능하다. 이러한 변화야말로 붕괴하고 있는 사회를 일으켜 세울 수 있는 출발점이 될 것이다.
지난 9월8일 국회 본청 앞에서 열린 '윤석열 정권 폭정 저지·민주주의 회복 촛불 문화제'에서 한 시민이 '무너지는 민주주의 다시 세우겠습니다'라고 쓰인 종이피켓을 들고 시위를 벌이고 있다. 연합뉴스
(더 자세한 내용에 대해 관심있는 분들은 최배근TV를 찾아 보시길 부탁드린다. 그리고 그동안 본인 글을 애독해주신 독자에게 감사드리고, 지면을 내주신 민들레에게도 감사드린다)
출처 : [최배근 칼럼] 정치와 민주주의로 사회 붕괴를 막자 < 최배근 통찰 < 민들레 광장 < 기사본문 - 세상을 바꾸는 시민언론 민들레 (mindle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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