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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8월 23일 연중 제20주간 금요일
제1독서 : 에제 37,1-14
복 음 : 마태 22,34-40
그때에
34 예수님께서 사두가이들의 말문을 막아 버리셨다는 소식을 듣고
바리사이들이 한데 모였다.
35 그들 가운데 율법 교사 한 사람이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물었다.
36 “스승님,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
37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38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39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40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
<오늘의 묵상>
안소근 실비아 수녀
심판을 선고하던 에제키엘이, 예루살렘이 함락된 뒤에는 구원을 선포합니다.
심판 선고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던 자들이 막상 멸망하고 나니 절망에 빠지는데,
심판을 선고하였던 예언자는 오히려 희망을 선포합니다.
희망이라는 것, 쉽지 않은 덕목입니다.
문명이 발달하였다고 하는데, 사람들은 전보다 더 간절히 희망을 이야기합니까?
어떻게 희망을 말할 수 있을까요?
에제키엘에게서 분명히 볼 수 있는 것은,
그가 선포하는 희망은 하느님에 대한 믿음에서 온다는 것입니다.
마른 뼈들이 살아날 수 있을지 여부에 대해서, 에제키엘은 판단하지 않습니다.
“당신께서 아십니다”(에제 37,3).
다른 많은 사람이 그러하였듯이 에제키엘이 보기에도
마른 뼈들이 살아나는 것은 하느님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에제키엘은 하느님을 믿고, 그분께서 하라고 하시는 대로 합니다.
마른 뼈들에게 살아나리라고 예언하라는 것은,
아무런 희망이 없다고 여기던 이스라엘에게 희망을 선포하라는 것과 같은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 에제키엘은 그 말씀을 믿고 선포합니다.
그가 부르심을 받던 장면이 떠오릅니다.
하느님께서는 심판을 선고하라고 에제키엘을 보내시면서,
이스라엘이 완고하여 듣지 않으리라고 하시며
그들이 듣든 듣지 않든 선포하여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이 듣든, 또는 그들이 반항의 집안이어서 듣지 않든,
자기들 가운데에 예언자가 있다는 사실만은 알게 될 것이다”(2,5).
모두 절망하고 있을 때 희망을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은 그가 예언자이기 때문이고,
그가 자신의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희망은 오직 하느님에게서 옵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느리고 힘없어 보이는 나무늘보는
멸종 위기를 걱정하지 않아도 될 만큼 개체 수가 많다고 합니다.
실제로 나무늘보는 한 시간 내내 움직여도 200여 미터밖에 못 가는데,
그 시간 동안 쉬지 않고 움직일 수도 없기에 숫자 자체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이렇게 느리다는 것은 야생에서 치명적인 약점이 되지 않겠습니까?
천적을 만나도 재빠르게 도망갈 수 없으니 말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멸종 위기를 걱정하지 않아도 될 만큼
개체 수가 줄어들지 않는 비결은 무엇일까요?
퓨마와 독수리 같은 동물은 뛰어난 동체 시력을 가지고 있어
재빠르거나 반사적으로 움직이는 동물은 쉽게 알아보지만,
나무늘보처럼 천천히 움직이는 동물은 오히려 잘 인식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약점인 줄 알았던 느린 움직임이 야생에서 살아남는 데 큰 이점이 되는 것입니다.
게다가 나무늘보는 나무와 구분하기 어려운 보호색을 갖추고 있어
다른 동물들이 알아보기가 더 어렵습니다.
이런 이유로 나무늘보는 빨라지려 하지 않습니다.
어차피 그럴 수 없으니까요. 그런데도 살아남았습니다.
어쩌면 자신의 부족함을 껴안고 살아가는 것이 삶의 비결이 아닐까요?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빠르게 움직입니다.
그 속도에 맞춰서 우리도 ‘빨리빨리’를 외치면서 행동합니다.
그래서 빠른 결과를 원하고, 자기 모습도 빠르게 변화시키려고 합니다.
하지만 부족한 자기 모습도 사랑할 수 있는 이유를 찾아야 합니다.
느리게 움직이는 이 나무늘보도 지그시 눈을 감고 행복한 표정을 지을 때가 있다고 합니다.
언제일까요? 바로 똥 눌 때입니다.
우리도 행복의 순간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행복할 때는 바로 사랑할 때가 아닐까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사랑을 말씀하셨고, 당신 삶을 통해 사랑을 보여 주셨습니다.
“스승님,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라고 말하는 율법 교사를 향해
예수님께서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으시고 ‘사랑’을 이야기하십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과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모든 삶 안에서 사랑의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것과 인간을 사랑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보통 사랑하는 사람이 원하는 것이 있다면 어떻게든 실천하려고 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인간을 사랑하는 하느님의 바람을 행동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결국 늘 사랑의 삶을 살라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세상의 속도에 지쳐 사랑을 포기하려고 할 때가 있습니다.
그때마다 하느님의 속도를 바라보십시오.
빠르기보다 천천히 그 속도를 바라보면서 사랑의 삶, 행복의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사랑은 변화와 실천안에서 성취되고 완성 되어 집니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한데 묶으십니다.
아버지이신 하느님 안에서 우리는 모두 형제요, 자매들인 까닭입니다.
그러니 ‘하느님께 대한 사랑’은 형제에 대한 참사랑을 가져오며,
반면에 아버지의 아들, 딸을 미워하면서 아버지를 사랑한다고 말할 수는 없게 됩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말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자기의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거짓말쟁이입니다.”(1요한 4,20)
사실 이 사랑의 계명은 우리에게 새로운 관점을 요구합니다.
새로운 변혁, 새로운 틀의 패러다임을 요구합니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이웃을 ‘남’으로 보지 않는 관점입니다.
아니, 애시 당초 ‘남’이란 없다는 관점입니다.
단지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한 몸, 한 생명’이 있을 뿐이고,
한 아버지 안에 있는 한 형제자매가 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기도’에서 “우리 아버지”라는 말마디가 이를 잘 말해줍니다.
교종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교회문헌 <새 천년기>(43항)에서
친교의 영성에 대해서 다루면서, 바로 이러한 점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친교의 영성은 삼위일체의 심오한 신비체 안에서 타인을 '나의 일부인 사람들'로 생각하고,
형제들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선물을 '나를 위한 선물'로 여길 줄 아는 능력을 의미한다."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야 비로소 이웃과 자신이 분리되지 않고
‘한 몸의 일부’가 되고, 이웃도 내 몸처럼 사랑하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암수동형처럼 섞여 혼합되어 한 몸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한 몸의 일부’, 곧 지체로서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결합하여 한 몸을 이루게 됩니다.
곧 생물학적인 한 몸을 이루거나 철학적이거나 관념상의 한 몸이 아니라,
‘사랑 안에서의 인격적인 한 몸’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웃 사랑은 남에게 베푸는 시혜나 자선이 아니라,
인격 안에서 ‘한 몸’으로 결합되어 있는 이웃에게 베푸는 사랑이 됩니다.
그리하여 형제 사랑이 진정한 하느님 사랑이 되고,
그 사랑 안에서 한 몸을 이루고, 한 생명을 이룹니다. 곧 사랑의 인격체를 이루게 됩니다.
이처럼 ‘사랑의 계명’은 새로운 관점, 새로운 사고와 새로운 인식의 틀을 요구합니다.
그것은 새로운 탄생, 새로운 인격체인 자기에로의 전환입니다.
곧 ‘남’인 이웃이 아니라 ‘하느님’인 이웃을 사랑하는 것으로의 전환이며,
‘남’을 사랑하는 이웃 사랑이 아니라 ‘자신의 몸’인 이웃을 사랑하는 것으로의 전환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처럼 사랑은 변화와 실천안에서 성취되고 완성 되어집니다.
이를 요한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면, 하느님께서는 우리 안에 계시고
또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완성되어 있는 것입니다.”(1요한 4,12)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마태 22,39)
주님!
당신 사랑으로 새로 나게 하소서!
내 자신을 통째로 바꾸어 새로워지게 하소서!
이웃을 타인이 아니라 내 자신으로 사랑하게 하소서.
그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그의 기쁨을 내 기쁨으로 삼게 하소서.
이웃 안에서 주님이신 당신을 섬기게 하소서. 아멘.
견고한 사랑은 그리스도인의 명함
반영억 라파엘 신부
하느님은 사랑 자체이시고(1요한4,16) 우리가 깨끗하지 못해도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하느님은 사랑 자체이시기에 사랑하실 수밖에 없으십니다. 따라서
“선한 사람에게나 악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주시고
옳은 사람에게나 옳지 못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주십니다”(마태5,45).
우리가 아무리 큰 죄를 지어도 주님에게는 가장 소중한 존재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에는 한계가 없고 그 깊이 또한 헤아릴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성 요한은
“하느님께 대해 어떤 특별한 것을 알려 하거나 느끼고 싶어 하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가득 찬 마음을 지닌 채 주님을 향하는 것으로 만족하시오!
사랑에 불타는 영혼은 조금도 피로하지 않고 또 남을 피로하게 만들지도 않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사막의 은수자 까롤로 까레또도
“이해하려 들지 마시오, 결코 성공하지 못할 것입니다.
알려 들지 마십시오. 결코 알지 못할 것입니다. 다만 사랑하기를 힘쓰십시오.
사랑 안에서, 사랑 안에서만 버림받은 예수님과 이 세상에서 버림받은
모든 사람들에게 다가갈 수 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계명은 사랑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사랑한다면 그 사랑이 구체적인 이웃 사랑으로 드러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자기의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거짓말쟁이입니다.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가 어떻게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의 형제도 사랑해야 한다는 이 계명을
우리는 그리스도에게서 받았습니다”(1요한4,20-21).
"견고한 사랑은 그리스도인들의 명함입니다.
다른 명함은 거짓이며 필요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그분의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요한 13.35 참조).
우리는 지치지 말고 일치로 향하는 길과 서로를 갈라놓는 장애와 장벽을 넘어
하나가 되는 다리를 만들고 또 만들라는 부름 받았습니다.
믿는 이들은 언제나 상호 존중과 대화로서,
‘주님의 제자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경쟁은
누가 더 큰 사랑을 내어놓을 수 있는지를 찾는 것'(요한 바오로 2세, 2001.09.27 강론)임을 알고,
모범이 되어 서로 도와야 합니다"(프란치스코 교황).
성호경을 기억하십시오.
십자가를 긋는 동작을 통해서 위로부터 아래로의 하느님과 나의 사랑을,
동시에 옆으로의 이웃과 나의 사랑을 생각하게 합니다.
"아름다운 얼굴이 초청장이라면, 아름다운 마음은 신용장입니다".
초청장은 유효기간이 있지만 신용장은 유효기간이 없습니다.
아름다운 마음을 가지고 끝까지 사랑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의 근본이고 우리가 행하는 모든 일에 가치를 부여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을 회피하지 마십시오. 사랑은 가까이 다가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을 산다는 것은 아무런 내색도 없이
어떤 요구도 없이 그저 베푼다는 의미입니다”(리지외의 성녀 데레사).“
사랑은 이유를 묻지 않으며 이익을 따지지 않습니다.
사랑이란 존재에 있습니다. 존재하기 때문에 사랑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존재합니다”(성 베르나르도).
그러므로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당신이 원하는 바를 하십시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기도,
이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는 선물, 그것은 사랑입니다"(성 아우구스띠노).
그러므로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주님을 사랑합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지금부터 33년 전, 1991년 8월 23일 금요일입니다.
저는 교구장인 고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님으로부터 사제서품을 받았습니다.
그날의 설렘과 감동은 빛바랜 사진처럼 추억의 책장에 묻혀있습니다.
보좌 신부 8년, 본당 신부 8년, 교구청에서 8년을 살았습니다. 해외에서 9년을 살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제게 축복을 주셨습니다. 부족한 저를 위해서 좋은 분들을 보내 주셨습니다.
본당 신부님들은 제게 이정표가 되어 주었습니다.
기도하는 사제의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
포근하게 감싸 안는 사제의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 사목의 열정을 보여 주었습니다.
책을 가까이하고, 성실한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
제가 33년을 사제로 지낼 수 있는 것은
모두 제게 이정표가 되었던 신부님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본당에서 2명의 사제와 교구청에서 2명의 사제와 함께 지냈고,
이곳 댈러스에서 1명의 사제와 함께 지내고 있습니다.
먼저 사제가 된 선배로서 이정표가 되어야 했는데, 부족함이 많았습니다.
8년간 본당 신부로 지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저의 부족함을 아시고, 이미 성당이 완공된 곳으로 보내 주셨습니다.
적성에서는 초대 신부님이 성당과 사제관을 신축하였습니다.
저는 2대 신부로 부임했습니다. 초대 신부님이 잘 차려놓은 밥상에
저는 교우들과 함께 말씀의 공동체를 반찬으로 만들었습니다.
본당 교우는 작았지만, 관할 구역은 넓었습니다.
33년 사제 생활 중에 보람 있고, 행복했던 시간이었습니다.
2번째 본당인 시흥 5동 성당도 전임 신부님이 성전 신축을 하고 떠났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저의 부족함을 아시고, 좋은 봉사자들을 보내 주셨습니다.
교우들은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지혜를 보여 주었습니다.
태풍 곤파스의 영향으로 성당 뒷산의 토사가 밀려왔습니다.
서울 시장도 와서 피해 상황을 살폈습니다. 저는 산의 높이를 낮추자고 제안했습니다.
서울시와 관할 구청에서도 저의 의견을 받아들였습니다.
성당 뒷산의 높이를 낮추니 성당에 큰 마당이 생겼습니다.
교우들은 마당에 잔디를 심었습니다. 철쭉과 유실수를 심었습니다.
태풍이 지나간 자리에 아늑한 마당이 생겼습니다.
함께 하면 위기는 기회가 된다는 걸 실감했습니다.
뉴욕에서 5년을 지냈고, 지난 2월부터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에서 지내고 있습니다.
이 또한 감사할 일입니다. 뉴욕에서는 팬데믹의 터널을 지나왔습니다.
동북부에 있는 사제들이 함께했기에 팬데믹 중에도 기쁘게 지낼 수 있었습니다.
함께 캠핑도 다녔고, 함께 사목에 관한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뉴욕에서 제가 했던 일은 신문을 제작하고, 홍보하는 일이었습니다.
팬데믹의 여파로 신문 홍보가 쉽지 않았습니다. 가톨릭 신문은 경영난으로 문을 닫았습니다.
제가 운영하던 가톨릭 평화신문은 팬데믹의 파도를 무사히 넘을 수 있었습니다.
힘든 시간들 함께 했던 직원들과 봉사자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저는 하느님의 사랑을 넘치게 받았습니다.
팬데믹 중에 미국에 더 머물 수 있도록 영주권 신청을 해 보라는 권유가 있었습니다.
2년이 안 되어 영주권이 나왔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서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으로 왔습니다.
댈러스 한인 성당의 전임 신부님이 저의 동창신부님입니다.
동창 신부님이 있던 곳이라서 마음이 편하고, 예전부터 잘 알고 있었던 느낌입니다.
이 모든 것이 주님의 은총입니다.
오늘 율법교사는 예수님께 이렇게 질문하였습니다.
‘스승님,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
그리고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사랑은 관념이 아니고 사랑은 실천이며, 사랑은 삶입니다.
“내가 너희 안에 내 영을 넣어 주어 너희를 살린 다음, 너희 땅으로 데려다 놓겠다.
그제야 너희는 나, 주님은 말하고 그대로 실천한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며 사제서품 33년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지내려 합니다.
진정한 사랑은 역동적인 것, 누군가를 위해 기꺼이 움직이는 것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저희 살레시오회 창립자 성 요한 보스코가
청소년 교육을 위해 창안한 교육 방식을 ‘예방교육’이라고 칭합니다.
예방교육을 한 마디로 ‘마음의 교육학’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저도 처음 이 용어를 접하고 마음의 교육학? 무슨 뜬금없는 말인가? 했습니다.
그런데 살레시오 회원으로 연륜이 조금씩 쌓이면서
아주 조금씩 마음의 교육학에 대해서 수긍을 하게 되고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습니다.
매사에 마음이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모릅니다.
수많은 교사들을 만났는데, 아이들을 위한 마음이 조금도 없는 교사들도 계시더군요.
마음이 없으니 열정도 없고, 사랑도 없습니다.
아이에 대한 기대도 없고, 그저 때 되면 월급 나오고, 일 년 지나면 헤어지고...
마음이 없는 교사들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반면에 마음이 있는 선생님들, 스승님들, 정말이지 대단합니다.
아이들에 대한 마음이 관심을 지닙니다.
그의 미래에, 그의 성적에, 그의 내면에 신경을 씁니다.
그를 위해 시간을 내고, 그를 위해 헌신합니다.
자신에게 맡겨진 아이들 하나하나가 내 자식 같습니다.
마음이 없는 사목자들도 만납니다.
자신에게 맡겨진 양들을 위한 마음이 조금도 없습니다.
그의 마음이 늘 다른 데 가 있습니다.
양들의 영혼, 그들의 건강과 행복, 구원과 영생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습니다.
마음이 없으니, 헌신도 희생도 없습니다.
예수님 말씀에 따르면 그들은 삯꾼일 뿐입니다.
그저 자기 자리 잘 보전하고 자기 한 몸 지키는데 급급합니다.
그런 상황에서 성장이나 쇄신은 조금도 기대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과 관련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 없이 드리는 제사, 건성건성 바치는 봉헌, 습관처럼 해치우는 미사,
그저 하나의 요식행위일 뿐입니다.
목숨도 마찬가지입니다. 목숨이라고 다 같은 목숨이 아닙니다.
주변을 둘러보면 파리목숨 같은 목숨도 있고, 너무나 어이없고 하찮은 목숨도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단 한 번뿐인 이 목숨, 얼마나 소중한 것인데 말입니다.
가끔 후배들에게 한마디 할 기회가 생기면 어쩔 수 없이 ‘왕 꼰대’가 되고 맙니다.
“여러분들, 시편 말씀 기억하십니까?
우리가 아무리 난다긴다 할지라도 숨 한번 끊어지면 즉시 흙으로 돌아가고 맙니다.
뭐 그리 아끼고, 애지중지하고, 그렇게 목숨 걸고 관리합니까?
움직일 수 있을 때, 누군가에게 도움 줄 수 있을 때, 아낌없이 팔 걷어붙이고 움직이십시오.
진정한 사랑은 역동적인 것, 누군가를 위해 부지런히 움직이는 것입니다.”
가장 큰 계명
조욱현 토마 신부
“스승님,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36절).
바리사이는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려고 그렇게 부르고 있다. 예수께서는 그에게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 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37절) 말씀하신다.
이것이 가장 큰 계명이며 첫째 계명이다.
첫째 계명은 하느님을 공경하는 것과 관련한 모든 것을 가르쳐 준다.
마음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선의 바탕이기 때문이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39절)는 것이다.
둘째 계명은 다른 사람들에 대한 사랑이다.
첫째 계명은 둘째 계명을 실천할 수 있도록 준비해 주고, 둘째 계명으로 입증된다.
하느님의 사랑 안에 굳게 서 있는 사람들은 모든 일에 있어 이웃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 안에 가치관이 확실히 서 있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모든 것 위에, 첫 자리에 하느님이 자리하고 계셔야 한다.
하느님보다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하느님이 아닌 다른 것이 첫 자리를 차지한다면, 그것이 우상이다.
우상 숭배는 다른 것이 아니다.
하느님이 계셔야 할 자리에 재물이나, 자식이나 사상이나 이념이 자리하는 것이다.
하느님-인간-세상-재물로 순서가 되어야 한다.
이렇게 가치관이 서 있을 때, 우리는 첫째 계명과 둘째 계명을 올바로 실천할 수 있다.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라고 하셨다.
하느님의 모습대로 창조된 사람은 사랑할 줄 알고 사랑을 해야 하고,
사랑을 받아야 하는 사랑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존재이다.
하느님께서 사람을 당신의 모습대로 지으셔서 이 세상에 당신의 대리자로 세우셨다면,
우리는 그 인간의 모습을 통해서 하느님을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에 우리가 보는 나의 이웃은 바로 눈에 보이는 하느님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눈에 보이는 하느님을 사랑하면서
우리는 또한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을 것이다.
눈에 보이는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어찌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하겠는가?
그런 사람은 거짓말쟁이라고 하였다.
상대방도 하느님의 모습이고 나 자신도 하느님의 모습이라면
인격적인 사랑의 나눔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스승님,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22,36)
김준수 아오스딩 신부
여러분 혹시 우리나라 헌법은 몇 장 몇 조문으로 구성되어 있는지 아십니까?
사실 저도 처음 알았지만, 대한민국 헌법은 제10장 130 조문과 부칙으로 되어 있더군요.
그런데 유대교의 율법은 무려 613가지나 되는데,
그 가운데 248가지는 ‘~해야 한다.’는 명령이고,
나머지 365가지는 ‘~해서는 안 된다.’라고 하는 금령에 해당한다고 합니다.
참으로 놀라운 사실은 유대인은 이렇게 많은 계명을 어찌 다 지켰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율법 교사 한 사람이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스승님,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22,36)하고 물었듯이,
그들 전통에 의하면 탁월한 율법 교사들은
이토록 많은 계명 가운데 어느 것이 가장 중요한 계명인지 논하곤 했다고 합니다.
어쨌든 이런 기회를 맞아 예수님 또한 당대 경건한 유대인들이 잘 알고 있고
생활화된 신앙고백문의 첫 부분인 신명 6,5절을 인용해서
‘하느님 사랑’과 레위기 19장 18절을 인용한 ‘이웃 사랑’으로 응답하시면서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22,40)라고 답변하십니다.
결국 어느 분의 표현처럼 구약과 신약이라는 약(?)을
약탕기 잘 달여 꽉 짜서 나오는 것이, 바로 사랑의 이중 계명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십계명의 첫돌 판에 새겨졌던 전반부의 네 계명은 순전히 하느님과의 관계에 관한 것이라면,
둘째 돌 판에 새겨진 여섯 계명은 순전히 이웃과의 관계입니다.
두 돌 판은 서로 인과관계를 맺고 있듯이
하느님을 사랑하면 그 사랑이 자연히 이웃과의 사랑으로 흘러넘치게 마련입니다.
요한 사도가 전하는 말씀도 동일한 음조입니다.
“누가 나는 하느님을 사랑한다.’ 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
눈에 보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1요4,20)
제가 알았던 한 분은 늘 언제나 제게 동일한 질문을 몇 년 동안 계속 물으셨습니다.
신부님은 아직도 주님을 사랑합니까?, 라고 말입니다.
그분은 제게 주님을 믿습니까?, 도 아니고 늘 주님을 사랑합니까?, 라고 물으셨는데
이제야 그분의 의도를 깨닫게 됩니다.
어느 분이 수도원을 방문했을 때 수도원 신부님이 방문객에게 묻기를,
혹시 이 세상 사람들이 제일 많이 어기는 법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라고 하자,
그 방문객이 되묻기를 수도자들도 어기는 법인가요?, 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신부님이 대답하시기를 수도자들도 어기지요.
특히 수도자들이 더 많이 어긴답니다, 고 했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가 마치 제게 한 이야기인 듯싶습니다.
여러분 잘 아시겠지요?
제가 자주 많이 어기는 법, 그것은 알면서도 제대로 사랑하지 않은 죄입니다.
아는 만큼 살지 못하고 말한 만큼 실행하지 못한 죄입니다.
어느 분의 표현처럼 마르크스나 모택동처럼 온 인류를 변화시키려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단 한 사람을 구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사람, 한 사람이 바로 모든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의 운동은 결국 사랑의 운동이었기에,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은 결국 사랑하느냐 사랑하지 않느냐, 그가 본질이고 핵심입니다.
이제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 딱 하나면 됩니다.
오늘 나는 사랑하며 살았나!
성 아오스딩은 “하느님을 사랑하라. 그리고 하고 싶은 대로 하라.”
십자가의 성 요한은 마태오 복음의 최후 심판을 바탕으로
“하루가 저물 때 우리는 사랑한 것을 기준으로 심판받을 것이다.”(25,31~46참조)라고 하셨습니다.
결국 매일 매일 잠자리에 들기 전에 정말 중요한 것은 무엇을 했느냐가 아니라
그 일을 어떻게 했느냐에 달려 있다는 점입니다.
적은 사랑으로 많은 일을 하는 것보다 많은 사랑으로 적은 일을 하는 것이 훨씬 낫습니다.
결국 내가 엄청나게 큰일을 했다고 하더라도 곧 선행을 베풀고,
“내가 모든 재산을 나누어 주고 내 몸까지 자랑스레 넘겨준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1코13,3)
다시금 오늘 하루도 사랑하면 살았나?, 라는 질문을 자신에게 던지고,
그 질문에 ‘예!’라고 응답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고 족하리라, 믿습니다.
“주님을 찬송하여라. 그분의 자애는 영원하시다. 아멘.”(화답송 후렴)
그런 사랑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프란치스코는 “덕들에게 바친 인사”에서 지혜를 여왕 덕이라고 합니다.
“여왕이신 지혜여, 인사드립니다.”
이에 대해 우리는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왜 다른 덕들은 그저 귀부인이라고 하고,
지혜를 덕들 가운데서 여왕이라고 하는지.
그것은 오늘 주님 말씀과 같은 맥락일 것입니다.
율법의 모든 계명 가운데서 제일 중요한 계명이
사랑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 지혜이잖습니까?
그런데 어리석은 사람은 다른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지난주 저의 가난 역시에서 말씀드린 것이지만
저만 해도 가난을 제일 중요시하는 우를 범했고
가난하지 않다는 이유로 형제들을 미워함으로써
가난 때문에 더 중요한 계명인 이웃 사랑을 놓치는 큰 잘못을 범했었지요.
그리고 실로 많은 공동체 구성원들이 서로 싸웁니다.
시비(是非)를 많이 가린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시비의 시(是) 자가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옳다. 바르다’라는 뜻이 기본이지만
‘옳다고 하다’라는 뜻과
‘바르다고 인정하다’라는 어찌 보면 상반된 뜻이 들어있습니다.
그런데 네가 옳다고 인정해 주면 싸움이 되지 않을 텐데,
내가 옳다고 하기에 싸움이 되는 것이지요.
결국, 의(義) 또는 정의(正義) 때문에 사랑을 놓치는 것입니다.
내가 한 것이 옳기 위해서는 남이 한 것은 그른 것이 되어야 하고,
나의 주장이 옳기 위해서는 남의 주장이 틀렸다고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많이 경험하는 분쟁적인 공동체에는
같이 옳은 것을 찾아가는 사랑의 정의는 없고,
서로 자기가 옳다는 독선적 주장만 있으며,
같이 하느님의 뜻을 찾는 사랑의 긍정은 없고
서로 자기 뜻을 관철하려는 고집만 있을 뿐입니다.
사랑과 반대되는 이 ‘자기(自己)’는 없고,
사랑을 사랑하는 참 ‘자아(自我)’ 있어야 하는데
그 반대이기에 하느님 사랑도 이웃 사랑도 뒷전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 자신처럼 이웃을 사랑하라는
오늘 주님 말씀의 뜻을 잘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이 말 안에는 이웃을 나 자신처럼 여기라는 뜻도 있고
내가 나를 사랑하는 것처럼 이웃을 사랑하라는 뜻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란 나와 하느님과 이웃이 하나가 되는 합일적이고
공존적인 나 또는 자아이어야 하는데
나만 있고 하느님도 이웃도 없는 분열적이고 공멸적인 자기(Ego)이기에
나를 사랑한다는 것이 진정 나를 사랑하는 것이 되지도 못하고
하느님 사랑이든 이웃 사랑이든 아무 사랑도 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너 없이 나 없습니다.
독불장군은 없습니다.
독불장군(獨不將軍)은 홀로 장군인 사람은 없다는 뜻이지요.
훌륭한 병사들 없이 훌륭한 장군도 없다는 뜻이기도 하고요.
그러므로 네가 있기에 나도 있고,
너를 긍정하기에 나도 긍정 받는,
너를 사랑하기에 나도 사랑받는 그런 사랑,
그리고 하느님을 사랑하기에
나를 포함하는 하느님의 모든 조물도 사랑하는
그런 사랑을 배우는 오늘 우리입니다.
연애와 사랑은 무엇이 다른가?
전삼용 요셉 신부
2010년 한 여성이 치명적인 자동차 사고를 당해 식물인간이 되었습니다.
당시 임신 4개월 때였습니다. 다행히 태아는 건강한 상태였습니다.
이후 그녀는 제왕절개 시술이 가능해질 때까지 5개월간 집에서 남편의 보살핌 속에 누워있었고,
9개월이 되자 병원으로 옮겨져 아들이 태어났습니다.
하지만 산모는 상태가 더 안 좋아졌습니다.
의사들은 산모는 회복하기 어려우니 준비하라고 말했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를 지키던 가족들도 다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끝까지 그녀를 지키는 이가 한 명 있었습니다.
바로 그의 아들 가오 친빠오였습니다.
아기는 엄마의 머리맡에 앉아 시간 대부분을 보냈습니다.
서툰 말투로 대화도 건네며 단 한 번도 칭얼대지 않았다고 합니다.
더 놀라운 일이 벌어졌는데 이도 제대로 나지 않은 아기가
엄마의 병원 음식을 씹어 자기 입으로 엄마의 입에 넣어 주기 시작한 것입니다.
마치 어미 새가 새끼에게 먹이를 먹여 주는 것처럼 행동하던 2013년 5월,
아기가 작은 소리로 엄마를 부를 때 엄마가 눈을 떴습니다.
중국 장롱샹 씨의 기적 같은 이야기는
영국의 일간지 ‘데일리 메일’에 기사화되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인터뷰에서 엄마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그때야 3년의 세월이 지났다는 걸 처음 알았어요.
제 머리맡에서 미소 짓는 아기가 제 아들이라는 사실도 그제야 알게 됐고요.”
의사들은 의아해했습니다.
혼수상태에 빠진 엄마는 음식을 겨우 삼킬 수만 있었고
씹지 않은 것들은 소화를 시키지 못했습니다.
아기가 어떻게 이것을 알고 음식을 씹어 엄마의 입속에 넣어주었을까요?
[출처: ‘왓칭 2: 시야를 무한히 넓히려면’, 김상운, 정신세계사]
정말 대단한 아기의 사랑입니다.
그런데 이 아기의 사랑은 정말 순수할까요?
아기가 무슨 정신으로, 어디서 배워서 사랑을 실천할 수 있었을까요?
아기는 엄마가 필요했기 때문에 그런 행위를 한 것입니다.
나중에 엄마가 다 나아서 아이에게 사랑을 퍼부어 줄 때
아기는 자신이 투자한 것에 비해 돌아오는 게 작다고 불평을 할 것입니다.
오 헨리의 ‘마지막 잎새’에서 아픈 여자를 위해 비를 맞으며
마지막 잎새를 벽에 그려 넣은 나이 든 화가는 정말 사랑이 많았기 때문에 그렇게 했을까요?
그는 지금까지 자신이 평생 그림을 그려왔지만,
누구도 자신을 인정해 주지 않자 그렇게라도 한 여자에게 인정받고 싶었던 것입니다.
너무 사랑 자체를 이기적인 것으로 비하하는 것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면 저는 이것을 ‘연애’라고 하겠습니다.
연애는 사랑이 시작되기 이전의 단계입니다.
많은 이들은 연애를 사랑으로 착각합니다.
좀 심하게 얘기하자면 연애는 모기 두 마리가 하는 거지만,
사랑은 예수님과 성모 마리아가 하는 것입니다.
둘이 모르는 사이였을 때는 오히려 싸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둘이 서로 연애하게 되었을 때는
자신이 지금까지 투자한 것을 돌려받고 싶어 합니다.
원하는 것이 더 많아진다는 뜻입니다. 둘 다 똑같이 그렇습니다.
말은 하지 않지만 서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네가 나를 이렇게 좋아하게 만드는 데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
네가 나를 좋아하는 감정으로 행복하다면 이제 나도 행복하게 해 줘야지!’
결국 사랑을 한 것이 아니라 투자를 한 것입니다.
연애는 투자입니다. 투자는 내가 투자한 것보다 더 벌어야 만족합니다.
그러나 서로 연애하게 된 이상 이전보다 더 열심히 투자가 이루어질 수는 없습니다.
여기에서 서로 서운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랑이 투자가 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계명 중 가장 큰 계명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라 하십니다.
그다음이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여 하느님으로부터 계명을 받아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나의 사랑이 나 자신을 만족시키는 것을 넘어서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고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 됩니다.
이것으로 이미 이웃에게 합당한 보상이 오지 않더라도 서운하지 않습니다.
이 때문에 이웃 사랑은 기필코 하느님 사랑과 연합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아우슈비츠에 투옥되었던 동안 가족이 있는 다른 수감자와 교환하여
자신의 생명을 바친 성 막시밀리안 콜베 신부의 예를 생각해 보십시오.
성 막시밀리안의 사랑은 개인적 이익이나 감정적 감정에 기초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계명에 대한 순종의 행위였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사랑에 상대가 반응이 없어도, 오히려 나는 빵을 주는데
그 사람이 칼을 주더라도 나의 사랑은 멈추지 않습니다.
진정한 사랑은 보상이나 인정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명령에 기초를 두었기 때문에 진실합니다.
그러면 언제 연애에서 사랑이 될까요?
하느님께서 상대를 사랑하라고 하신 명령을
주님을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 따르기로 결심했을 때
그 사람은 이제 연애에서 사랑으로 옮겨오게 됩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