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의 정원
아득히 멀어져간 어린 시절, 여름방학이 되어 산에 올라 숲속으로 들어가다 보면 어느 순간 정적의 영역이 나타난다.
거기엔 아랫마을에서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나 개 짖는 소리 등 속세의 소음이 끊기고
시간이 멈춰버린 것 같은 순정한 침묵이 내재한다.
군대에서 전방 근무를 하던 시절에도 숲 속 깊이 들어가면 그런 체험을 하곤 했다.
그 침묵은 세상을 살아오면서 나도 모르게 내 안에 축적됐던 청각적 오물을 소탕해준다.
또 그 침묵은 물이나 양식과는 종류가 다른 생기로운 자양분을 조용히 영혼에 흘려보내준다.
숲속의 피톤치드가 용해된 그 침묵 그 고독은 내 혼란된 감정을 진정시키며 원초적 평정심을 일으켜준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던 그 원초적 공간과 시간도 그랬을 것이다.
주님의 눈은 신성과 생명과 진리와 사랑이 함유된 정적의 눈이요,
주님의 얼굴은 신성과 생명과 진리와 사랑이 함유된 정적의 형상이다.
사람은 주님의 얼굴에서 이 세상 오류의 흔적이 없이 신적 생명이 가득한 정적의 신성을 발견한다.
그것은 이 세상의 더러운 소요와 인생고에 지쳐버린 인생들을 향하여
아무런 대가를 요구함 없이 두 팔을 벌린 하나님의 마음이다. 인간은 대화가 필요하듯이 인간은 또한 침묵이 필요하다.
책을 펼치면 하얀 종이 위에 인쇄된 활자로 이루어진 문장과 문장의 행간에는 하얀 침묵이 있지 않은가.
만일 책이라는 게 온통 활자로 가득하다면 그것은 책이 아니며 그런 책을 누구도 읽으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존재와 침묵은 서로에게 속해있다”고 막스 피카르트가 ‘침묵의 세계’에서 한 말은 진리에 속한 말이다.
지금의 세상은 침묵을 압살한다.
방에는 TV 소음과 잡동사니로 가득하고, 인간의 소중한 입은 농담이나 잡담으로 오염되고,
세상 가요는 마치 침묵을 박살이라도 내자는 식으로 온통 알아들을 수 없는 지껄임으로 부식되고,
쇼 프로는 무익한 가십으로 인생을 모독한다.
그래서 그렇게 떠들고 난 후 사람은 영적 공허 현상에 사로잡혀 우울의 바다로 빠져 들어가는 것이다.
끝없이 떠들어대고, 끝없이 비아냥대고, 끝없이 비평하고, 끝없이 잡담하면서 취해버린 시간이 지나간 후 남는 것은,
사람들이 떠난 백사장에 남은 발자국 속에 깃든 공허와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일정 시간 육지에서 움직인 개구리가 물을 찾는 이유를 아는가?
변온동물인 개구리가 피부의 수분이 말라 뜨거워진 체온을 식히기 위해서이다. 인간은 영적인 양서류이다.
사람은 떡으로만 살아가는 게 아니다. 사람은 학문으로 살아가는 것도 아니다. 사람은 문화로 살아가는 것도 아니다.
사람 안에는 빵을 넘어서, 학문을 넘어서, 문화를 넘어서 하나님만이 채우실 수 있는 영적인 공간이 있다.
이 영적 공간이 세속적인 것에 침해되지 않은 순결한 침묵을 통해 하나님으로 충만하게 되지 못하면
그 사람 안에는 심각한 불균형과 피폐가 발생한다. 쉼표가 없는 문장은 사람을 질식시킨다.
생활과 생활 사이에, 생각과 생각 사이에, 전투와 전투 사이엔 침묵이 필요하다.
그 사람이 식구이든 친구이든 직장 동료이든 가끔씩은 사람들을 떠나 혼자만의 공간으로 들어가라.
자기의 품으로 들어오라고 끝없이 손짓하는 이 시대의 거짓된 문화의 도구들을 떠나
우주가 창조되던 때의 원초적 침묵의 정원으로 들어가라.
나의 경우 그것은 하나님과 독대하는 기도의 시간과 묵상과 자연의 고요였다.
2012. 6. 11
이 호 혁
첫댓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