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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8월 25일 연중 제21주일
제1독서 : 여호 24,1-2ㄱ.15-17.18ㄴㄷ
제2독서 : 에페 5,21-32
복 음 : 요한 6,60ㄴ-69
그때에 60 제자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 말하였다.
“이 말씀은 듣기가 너무 거북하다. 누가 듣고 있을 수 있겠는가?”
61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당신의 말씀을 두고 투덜거리는 것을 속으로 아시고 그들에게 이르셨다.
“이 말이 너희 귀에 거슬리느냐?
62 사람의 아들이 전에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보게 되면 어떻게 하겠느냐?
63 영은 생명을 준다. 그러나 육은 아무 쓸모가 없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이며 생명이다.
64 그러나 너희 가운데에는 믿지 않는 자들이 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믿지 않는 자들이 누구이며
또 당신을 팔아넘길 자가 누구인지 처음부터 알고 계셨던 것이다. 65 이어서 또 말씀하셨다.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고 너희에게 말한 것이다.”
66 이 일이 일어난 뒤로, 제자들 가운데에서 많은 사람이 되돌아가고
더 이상 예수님과 함께 다니지 않았다.
67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에게,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 하고 물으셨다.
68 그러자 시몬 베드로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69 스승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 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오늘의 묵상>
안소근 실비아 수녀
“제자들 가운데에서”(요한 6,66) 많은 이가 돌아갔다는 구절이 눈에 들어옵니다.
단순히 빵을 찾아왔던 군중이 아니라, 그래도 그들 나름으로
예수님의 가르침을 배우려고 하던 이들이 돌아서서 떠나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붙잡지도 않으십니다.
그래도 이 말씀이 생명의 말씀이라며
남아 있겠다는 이들만 예수님 곁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듣기에 거북할까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일까요?
듣기에 거북하다고 한 이들도 틀린 말을 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요한복음서 6장에서는,
예수님께서 당신의 살을 먹고 그 피를 마시라고 하신 말씀 때문에 떠나갑니다.
성경의 다른 부분들에서는,
예를 들어 예수님께서 당신의 수난과 부활을 예고하실 때
제자들은 듣기 거북해합니다.
포도밭의 일꾼들은 포도밭 주인이 후하다고 하여 화를 내고,
집을 나갔다가 돌아온 둘째 아들을 아버지가 받아주자
첫째 아들은 집에 들어가지 않으려 합니다.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는 말씀도,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고 따라오라는 말씀도
듣는 이에게는 편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듣던 그 시대 사람들만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말씀이 영원한 생명의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떠나가는 이들에게 이것을 굳이 다시 설명하지 않으십니다.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6,65)
당신 곁에 머무를 수 없다는 것을 아시기 때문일 것입니다.
거북하게 들리는 그 말씀, 따라가면 죽을 것만 같은 그 말씀을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라고 믿고 뛰어들 수 있는 이들만 끝까지 예수님을 따라갑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프랑스 예술가 마이클 뒤샹은 1917년 뉴욕에서 열린
독립 예술가전시회에 말도 안 되는 작품 하나를 출품했습니다.
그것은 도자기로 만든 소변기였습니다.
소변기는 옆으로 눕혀 있었고, 그 위에 검은색 물감으로 드문드문 서명을 해두었으며,
‘샘’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었습니다.
독립 예술가 협회는 너무나 터무니없다는 이유로 이 작품을 전시하지 않겠다고 거절했고,
이런 작품을 출품한 뒤샹은 사람들에게 엄청난 항의를 받았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시각적인 것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것으로 변화되어야 한다.”
눈에 보이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내면의 것을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그 어떤 사람도 알아주지 않아서 전시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100년도 채 나지 않은 2004년, 예술가와 역사학자 500명의 투표를 통해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예술 작품’으로 선정되었습니다.
진리라는 것이 무엇일까요?
겉으로 보이는 것만 진리라며,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믿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이 과정 안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주장했던 사람들이 세상으로부터 박해를 받았습니다.
과거 우리 교회의 역사 안에서 많이 봐왔던 모습입니다.
과학의 발전으로 현대 세계는 더 눈으로 보고 입증할 수 있는 것만을 믿으려 합니다.
그러나 나약하고 부족한 존재인 인간이 모르는 것은 아직도 너무 많습니다.
주님에 대해 안다고 말하지만, 아주 일부만을 알 뿐입니다.
주님을 믿을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진리로부터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예수님을 믿고 따랐던 제자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이 말씀은 듣기가 너무 거북하다. 누가 듣고 있을 수 있겠는가?”라면서 예수님을 떠납니다.
당신 자신을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이라 하시고,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른다.’라는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세상의 관점으로 이해하려고 하니,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열두 제자를 대표해서 베드로가 말합니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과거 광야에서 이스라엘을 이끌던 여호수아는
“누구를 섬길 것인지 오늘 선택하여라. 나와 내 집안은 주님을 섬기겠다.”라고 말했고,
이에 이스라엘 백성은
“우리도 주님을 섬기겠습니다. 그분만이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라고 응답합니다.
이처럼 우리도 결정해야 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만을 믿는 세상의 관점을 가지면 주님을 떠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 이상의 것을 바라보는 주님의 관점을 따른다면
우리는 주님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됩니다.
베드로의 고백을 힘껏 외칠 수 있는 우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자신을 내어주고 생명으로 들어가는 성체성사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우리는 지난 5주 동안 주일 복음으로
<요한복음> 6장의 말씀을 계속해서 들었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6장의 마침 부분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요한복음> 6장은 '성체성사'에 대한 장입니다.
그리고 오늘 말씀전례는 '성체성사'를
계약과 관련하여 이해할 수 있도록 인도해 줍니다.
제1독서에서는 스켐에서의 있었던 계약의 갱신을 들려줍니다.
스켐은 아브라함이 하느님을 만나 뵌 곳이요,
제단을 쌓아 봉헌한 거룩한 장소였습니다.
또한 야곱이 메소포타미아에서 가져온
온갖 제물과 우상을 파묻은 장소였습니다.
아브라함과 야곱이 하느님을 만나 신앙을 다짐한 이곳, 스켐에서
이제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님의 사랑과 충실함을 깨우쳐주고,
시나이산에서 주님과 맺은 계약을 갱신 합니다.
여호수아가 백성들을 모아 놓고,
“누구를 섬길 것인지 오늘 선택하여라.
나와 내 집안은 주님을 섬기겠다.”(여호 24,15)고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자, 백성들도 같이 신앙을 고백합니다.
“다른 신들을 섬기려고 주님을 저버리는 일은 결코 우리에게 없을 것입니다.
~ 우리도 주님을 섬기겠습니다.
그분만이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여호 24,16-18)
제2독서는 남편과 아내가 서로 나누어야 할
혼인의 사랑에 대한 아름다운 가르침입니다.
그것은 혼배성사라는 ‘계약’의 실현을 말해줍니다.
그 사랑은 그리스도께서 아내인 교회에 대한 사랑과
교회가 신랑인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에 바탕을 둔 것이요,
자신을 건네주는 성체성사로 이루는 사랑의 일치를 말해줍니다.
곧 상호 신뢰와 사랑에 바탕을 둔 계약의 삶이요, 성체성사의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는 생명이신 주님을 택할 것인지
아니면 우상과 죽음을 택할 것인지를 묻습니다.
사실 오늘 복음의 앞 장면에서 예수님께서는 스스로를
'생명의 빵'(35절과 48절)이요, '하늘에서 내려온 빵'(41절)이라 밝히시면서,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54절)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는 당시의 유대인들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던
참으로 당혹스럽고 황당한 말씀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서로 수군거리고(41절) 다투기(52절)까지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과 마찬가지로 제자들 가운데 많은 이들도
“이 말씀은 듣기가 너무 거북하다
. 누가 듣고 있을 수 있겠는가?”(요한 6, 60) 하고 말하였고,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투덜거리는 것을 속으로 아시고 이르십니다.
“이 말이 너희 귀에 거슬리느냐?
~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이며 생명이다.”(요한 6,61-63)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몸이 생명의 빵’일 뿐만 아니라,
이제 한술 더 떠서 ‘당신의 말씀이 영이요 생명’이라고 하십니다.
바오로 사도의 표현대로, 당신 '말씀'이 '생명을 주는 영'(로마 8, 2)이요,
'영'인 말씀을 통하여 생명을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의 몸’과 ‘말씀’은 ‘생명의 빵’으로 동일시됩니다.
참으로 신비롭고 놀랍게도, 이제 영원한 생명이
‘예수님의 몸’으로 뿐만 아니라 ‘말씀으로 육화’하심을 밝히십니다.
그러자 많은 이들이 떠나갔고,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에게 스켐의 계약의 갱신에서처럼,
‘자유로운 선택’을 요청하십니다.
그러자 시몬 베드로가 생명이신 주님을 따르기로 서약합니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스승님께서는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 왔고 또한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요한 6,68-69)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계시한 바에 따라,
'주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임을 고백합니다.
곧 '말씀'이 ‘생명의 빵이신 주님’이심을 고백합니다.
그리고 덧붙여 '스승님께서는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심을 믿음으로 서약합니다.
그러니 그리스도의 몸과 말씀을 영하는 성체성사는
곧 그분의 생명을 선택하고 지키는 결단이요,
그분을 주님으로 받아들이는 계약의 갱신이 됩니다.
결국 오늘의 말씀 전례는 우리를 ‘계약의 삶’으로의 초대입니다.
곧 자신을 내어주고 생명으로 들어가는 성체성사의 삶으로의 요청입니다.
그것은 매 순간 생명과 사랑을 택하는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요한 6,67)
주님!
제가 떠나야 할 것은 당신이 아니라 제 자신이오니,
저 자신을 떠나게 하소서.
떠나온 자신마저 떠나게 하소서.
흔들리지 않는 것이 아니라 흔들리더라도 당신 장막에 머물고,
흔들림 속에서도 저의 희망이 아니라 당신 희망에 매달려 있고,
흔들릴수록 더욱더 뿌리 깊게 내리는 믿음의 나무가 되게 하소서! 아멘.
가려거든 가시오.
반영억 라파엘 신부
찬미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분의 사랑을 늘 느끼는 것은 아닙니다. 시편 저자는
“당신 말씀이 제 혀에 얼마나 감미롭습니까!
그 말씀 제 입에 꿀보다도 답니다”(시편119,103).“
당신 말씀은 제 발에 등불, 저의 길에 빛입니다.”(119,105)하고 고백했습니다.
한 번 그분을 알면 더없이 큰 갈증을 느끼게 되거늘 미처 알지 못하니 안타깝습니다.
그러나 먼저 알고 그분을 믿는 것이 아니라 믿고 나서 알게 되는 것이니
이 시간 믿음을 더해 주시길 기도 합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끝없는 선택의 여정을 걷게 됩니다.
무엇을 할까? 성당에 갈까? 밭에 일하러 갈까? ‘이리 갈까? 저리 갈까?
아니면 차라리 돌아갈까?’ 음식은 뭘 먹을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때가 되면 결단을 내리게 됩니다.
그러나 그 선택의 결정이 행복과 불행을 드러내게 됩니다.
오래된 얘기지만 ‘순간의 선택이 10년을 좌우한다.’는 광고도 있었습니다.
물건을 하나 잘못 고르면 10년 동안 마음고생을 할 수도 있다는 얘깁니다.
우리에게는 매 순간의 선택이 영원한 생명, 구원을 좌우합니다.
고달프고 힘들지만, 주님을 택하면 생명이요, 육적인 욕망을 택하면 죽음입니다.
1독서를 보면 여호수아는 백성들에게 결단을 촉구합니다.
“만일 주님을 섬기는 것이 너희 눈에 거슬리면,
너희 조상들이 강 건너편에서 섬기던 신들이든,
아니면 너희가 살고 있는 이 땅 아모리족의 신들이든,
누구를 섬길 것인지 오늘 선택하여라. 나와 내 집안은 주님을 섬기겠다.”
그러자 이스라엘 백성도 다짐했습니다.
“다른 신들을 섬기려고 주님을 저버리는 일은 결코,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우상숭배를 멀리하고 주님을 선택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구원이 주어졌습니다.
오늘 복음도 같은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 빵 두 개, 물고기 다섯 마리로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신 기적을 행하시고
배를 이용해 한적한 곳으로 떠나셨을 때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쫓아갔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너희가 나를 쫓아온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 하고 속을 콕 찔렀습니다.
그리고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요한6,27)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시면서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하며
영원한 생명에 대해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살과 피를 먹는다는 말을 이해할 수 없었고
오히려 냉혹하고 잔인하게 들렸습니다. 그래서 충격을 받고 사람들이 떠나갔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떠나가고 열두 제자들만 남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하고 물으셨습니다.
그러자 시몬 베드로가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스승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요한6,68-69)
베드로는 오직 주님만을 선택하고 따르겠다는 고백을 하였습니다.
이 고백이 우리의 고백일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신앙은 결단입니다.
하느님이냐? 세상이냐?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세상의 것과 영원한 것을 동시에 누릴 수는 없는 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루가16,13)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선택의 결단은 삶의 매 순간 이루어집니다.
오늘도 확실한 선택을 요구받고 있습니다.
하느님을 선택하는데 있어서 어영부영, 우물쭈물, 할까 말까? 망설여서는 안 됩니다.
더군다나 양다리를 걸치고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묵시록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나는 네가 한 일을 알고 있다. 너는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면 좋으련만!
네가 이렇게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않고 차지도 않으니,
나는 너를 입에서 뱉어 버리겠다.”(3,15-16).
그런 의미에서 미사참례에 함께하신 여러분은 하느님을 택하셨으니 복됩니다.
행복하십니다. 하늘의 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길을 찾아 헤매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지나가는 사람을 붙들고 길을 물었습니다.
“이 길은 어디로 가는 길입니까?” 그러자 그 사람이 대답했습니다.
“길이 어딜 가다니요? 길은 여기 있고 당신이 어디론가 가고 있지 않소?”
길은 이미 있고 그 길을 우리가 가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이미 구원의 길이 열려있습니다. 그리고 영생의 약속이 주어져 있습니다.
천상, 하느님의 나라는 우리 집이기 때문에 가야 하는 곳입니다.
그렇다면 그 집을 향해 걸어가야 합니다.
그 길이 험하고 굴곡이 있어도 목적지에 닿아있다면 묵묵히 가야 합니다.
아무리 멋있고 아름다운 길이라도 목적지에 연결되지 않았다면 가던 길을 멈춰야 합니다.
결단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똑같은 말씀을 들어도 능력을 체험하는 것은
받아들이는 사람의 마음 자세에 따라 달라집니다.
예수님께서 진리의 말씀을 하셨지만, 많은 사람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아니라 입맛에 맞지 않는다고 거북해하며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근심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누가 믿음이 있고 누가 믿음이 없는지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 오셔서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셔라.’ 하셨다면
우리도 매우 당황했을 것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떠난다고 나도 떠날 수는 없는 법입니다.
다수가 옳다고 해서 다 옳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남의 말에 흔들리지 말고, 친구 따라 강남 가지 말며
매 순간 하느님과의 관계를 잘 지키는 용기 있는 결단을 하시기 바랍니다.
많은 사람들은 착각합니다. 알고 나서 믿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믿는 것이 아닙니다. 아는 것을 확인하는 것은 지식의 검증일 뿐입니다.
사람이 어떻게 모든 것을 다 알 수 있겠습니까?
선생님이 ‘그렇다’고 하면 일단 선생님을 신뢰하고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진리를 알게 됩니다. 따라서 만약 우리가 먼저 알고 싶어 한다면,
우리는 알 수도 없고 믿을 수도 없게 됩니다.
실제로 제자들은 주님께서 ‘나를 따르라’ 했을 때 자기의 모든 것을 버리고 따랐습니다.
따름으로써 알게 되었고, 그 믿음을 견고히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먼저 믿어야 합니다.
믿음에 능력이 따르고 치유가 따르며 위안도 평화도 기쁨도 함께합니다.
그러나 한 순간에 모든 것이 완성되지 않습니다.
은총은 이미 주어졌고 역사하고 있으며 앞으로 열매를 맺게 될 것이지만
믿음을 고백하는 사람 안에서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결단을 내리십시오.
떠나든지, 주님 안에 머물던지…..
가려거든 가시오!
성 안나 할머니를 기억합니다.
눈이 나빠서 고생을 하셨지만, 성경을 읽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습니다.
눈이 더 나빠지면 성경을 읽을 수 없다고 하시며
틈만 나면 성당에 오셔서 큰 소리로 성경을 읽으셨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할머니의 눈이 밝아졌습니다.
영적인 눈과 함께 육적인 눈도 밝아졌습니다. 놀라운 역사입니다.
주님 말씀을 갈망한 믿음이 그의 눈을 뜨게 하였습니다.
믿음이 있는 곳에 주님은 언제나 역사하시고 당신의 능력을 드러내 주십니다.
그러므로 믿으십시오. 주님의 모든 것을 얻게 될 것입니다.
오늘은 ‘하느님 앞에 있는 나’를 살펴 보시기 바랍니다.
소크라 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고 했습니다.
수학 선생님이 말한다면 ‘네 분수를 알아라’고 했을 것입니다.
국어 선생님께서 말하면 ‘네 주제를 알라’
그리고 지리 선생님은 ‘네 자리를 알라’고 하십니다.
미술 선생님은 ‘네 꼬라지를 알라’고 했을 것이랍니다.
나는 과연 믿음의 사람인가? 주님의 사람인가?
생각하는 가운데 주님의 은혜를 입길 바랍니다.
내가 바라는 주님을 만들지 말고, 그분의 마음에 드는 나를 가꾸어야 하겠습니다.
주님, 저는 당신을 떠날 수 없습니다.
“당신이 저에게 바라는 일이 무엇인지 알려 주십시오.
저는 저의 뜻을 버리고 당신의 뜻에 저의 뜻을 맞추겠습니다”(성 알퐁소).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삼권분립인 나라에서 국회는 ‘청문회’ 제도를 통해서
과거에 있었던 불의와 부정을 밝혀내고,
현재 발생한 사건과 사고의 진상을 규명하고,
미래에 있을 정부 관료의 능력을 검증합니다.
과거에 있었던 불의와 부정을 밝혀내려 했던 청문회로 ‘5공 청문회’가 있습니다.
이때 청문회 스타로 활약했던 의원으로 이해찬, 노무현 의원이 기억납니다.
의원들은 송곳 같은 질문과 잘 준비된 자료로 증인들의 잘못을 밝혀냈습니다.
최근에 발생했던 사건과 사고의 청문회는
작년 7월에 숨진 해병대원에 대한 청문회가 있습니다.
증인들은 거짓과 허위를 말할 때는 처벌받을 수 있다는 ‘선서’를 하게 됩니다.
의원들의 질문과 증인들의 답변이 있었습니다.
몇몇 증인은 현재 수사 중인 사건이기에 재판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이유로
증인 선서를 거부하기도 했습니다.
미래에 있을 정부 관료에 대한 청문회는 ‘방송·통신 위원장’에 대한 청문회가 있었습니다.
이런 청문회 과정을 거치면서 어떤 후보는 자진하여 사퇴하기도 하고,
어떤 후보는 오히려 검찰의 조사를 받기도 합니다.
능력과 자질을 보여 준 후보는 대통령에 의해서 임명됩니다.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사회가 되기 위해서는 ‘청문회’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엄격한 과정을 넘어서지 못할 후보는 알아서 사퇴하는 것도 좋습니다.
성직자가 되기 위해서 10년 동안 신학교에서 공부합니다.
기도와 성찰을 통해서 영성(Sanctitas)을 배우고,
학업과 독서를 통해서 지성(Scientia)을 배우고,
내규와 운동을 통해서 건강(Sanitas)한 몸과 마음을 가꾸게 됩니다.
선배들은 이것을 3S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준비가 되었어도 또 하나의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서품 대상자들이 걱정하기도 하고, 두려워하는 ‘서품 공시’입니다.
서품 후보자가 사제가 되기에 합당한지, 중대한 허물이 있는지 물어보는 것입니다.
청문회처럼 치열한 과정을 거치는 것은 아니지만
당사자인 서품 후보자들에게는 긴장되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저는 성소국장으로 근무할 때, 서품 후보자들의 서류를 확인했습니다.
대부분은 사제가 되기에 이상이 없었습니다.
제가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에 올 때도 검증을 거쳐야 했습니다.
먼저 댈러스 교구에서 초청하는 절차를 거쳐야 합니다.
제가 속한 서울 대교구에서 저에 대한 서류를 보내야 합니다.
미국에서 합법적으로 머물 수 있는 비자를 발급받아야 합니다.
서류작업이 완료되면 댈러스 교구에서 실시하는 교육프로그램을 받아야 합니다.
저는 10개의 영상을 보았고, 영상에 대한 문제를 풀었습니다.
문제를 다 풀면 확인서를 받습니다.
그 확인서를 댈러스 교구로 보내면서 모든 검증이 끝났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여호수아는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백성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만일 주님을 섬기는 것이 너희 눈에 거슬리면,
너희 조상들이 강 건너편에서 섬기던 신들이든,
아니면 너희가 살고 있는 이 땅 아모리족의 신들이든,
누구를 섬길 것인지 오늘 선택하여라. 나와 내 집안은 주님을 섬기겠다.”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하느님을 섬겨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하느님의 이름을 헛되이 부르면 안 됩니다.
주일을 거룩하게 지내야 합니다. 우상을 섬기면 안 됩니다.
그러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렇게 응답했습니다.
“다른 신들을 섬기려고 주님을 저버리는 일은 결코 우리에게 없을 것입니다.
우리와 우리 조상들을 이집트 땅에서, 종살이하던 집에서 데리고 올라오셨으며,
우리 눈앞에서 이 큰 표징들을 일으키신 분이 바로 주 우리 하느님이십니다.
그분께서는 우리가 걸어온 그 모든 길에서,
또 우리가 지나온 그 모든 민족들 사이에서 우리를 지켜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주님을 섬기겠습니다. 그분만이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
그렇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하느님만을 섬기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약속의 땅으로 들어갔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
많은 사람이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떠났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스승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 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주님을 믿고 따르기 위해서는 주님의 가르침을 실천해야 합니다.
그것은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같은 마음과 정성을 다해서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 시작은 가정입니다. 아내는 남편을 하느님처럼 여겨야 합니다.
남편은 아내를 하느님처럼 여겨야 합니다. 이것은 교회 공동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가장 보잘것없고, 가장 굶주리고, 가장 헐벗은 이에게 해 준 것이
곧 나에게 해 준 것이다.”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신앙생활을 한다면 우리들 역시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이 없으면 온갖 심오한 진리도, 화려한 건물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조욱현 토마 신부
오늘 복음은 성체성사에 관한 말씀에 대한 군중들의 반응을 전해주고 있다.
복음에서 예수님 말씀의 핵심은 당신을 만나려면 무엇보다도 믿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성체성사를 통하여 주님의 몸과 피는(참조: 요한 6,54-56)
확실히 볼 수 있는 빵과 포도주라는 실체를 통한 상징으로 나타나고 있다.
빵과 포도주라는 형상 때문에 믿기가 어려운 것이다. 이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이다.
예수님께 반감을 품었던 유다인들뿐 아니라, 그리스도를 따르던 제자들 사이에서도
예수님의 말씀을 수긍하지 못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 말씀은 듣기가 너무 거북하다. 누가 듣고 있을 수 있겠는가?”(60절)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믿음에 대해 집중시키기 위해,
그래서 하느님의 지혜를 다시 입게 하려고 당신의 말씀을 설명해 주신다.
그리스도인들이 육(살) 대신 영(성령)에 의탁한다면 더 위대한 사실을 볼 수 있다.
“영은 생명을 준다. 그러나 육은 아무 쓸모가 없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이며 생명이다.”(63절) 하셨다.
이 말씀은 인간은 육으로는 하느님의 신비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여기서 믿음의 문제가 나온다.
“그러나 너희 가운데에는 믿지 않는 자들이 있다.”(64절) 하신다.
그러므로 肉이 아무 쓸모 없는 것이라고 하시는 것을 알 수 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반발심과 배척감을 불러일으키고,
어떤 이들에게는 신앙의 원인이 되고 있다. 그래서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제자들에게 이루어지는 모든 것은 육에서가 아니라,
하늘로부터 왔음을 주님께서는 가르쳐 주신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들은 모두 성체성사에 관한 말씀이며,
그 말씀을 통해 생명의 빵이신 당신 자신을 점차 드러내고 계시다.
이 말씀들은 신앙을 통해 받아들여질 때, 영이며 생명이 된다.
성령을 통해 살아있는 그 말씀들은 이미 영원한 생명을 주는 말씀들이다.
그분의 뜻을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시는 말씀도 성사로 이해한다.
말씀과 성사는 그리스도의 실재 전체를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67절) 하고 물으신다.
제자들이 당신 편에 설 것인지 아니면 반대편에 설 것인지 결정하라는 말씀이다.
베드로가 대답하는데 처음에는 자신이 없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68절)
그러나 곧 그리스도께서 구원의 원천임을 깨닫고는 기쁨과 확신에 차서 확실하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68절) 고백한다.
마침내 베드로는 예수님을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 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69절) 한다.
예수님께서는 생명을 주는 말씀을 주시고 우리를 구원하실 능력을 갖추고 계심을 고백한 것이다.
“믿고 알고 있습니다.”라는 말이 있다.
이것은 믿는 것이 아는 것보다 선행하는 것이며, 앎을 생기게 하는 것이다.
사실 믿음은 앎의 최고 형태이다.
그러나 그 인식의 기원은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이시다.
오늘 복음을 보면 신앙의 위기는 성체성사의 신비를 받아들이느냐 거부하느냐에서 온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신앙의 결핍이 무엇보다도 사랑할 능력이 부족한 데서 기인한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신앙의 새로운 결단을 촉구하신다.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67절)
우리가 성령 안에 살고 있다면 베드로와 같은 고백을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여호수아는 약속의 땅을 차지하여 이스라엘 열두 지파에 나누어주고 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느님 편에 설 것인지
아니면 하느님을 저버릴 것인지를 결정하고 선택하게 한다.
여기서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께서 베풀어주신 은총을 기억하고서는 주님을 선택한다.
“다른 신들을 섬기려고 주님을 저버리는 일은 결코 우리에게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주님을 섬기겠습니다. 그분만이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여호 24,16.18)
우리도 우리의 신앙생활을 통해 구원을 체험하면서 항상 그분을 선택할 수 있다.
그러므로 말씀과 성사는 항상 살아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이며 생명이다.”(요한 6,63)
바오로 사도는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로 설명하며,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돌아가시고 끝없는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시듯이 그러해야 한다고 한다.
남편에 대한 아내의 순종 요구는 당시의 상황이다.
남편과 아내가 서로 사랑한다면 누가 첫째이고 누가 나중인가를 따지지 않는다.
바오로는 첫째가는 사람이란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하셨듯이 더 많이 사랑해야 하는 사람을 말한다.
이 사랑의 관계에서 둘은 서로 간에 사랑의 대상으로서 남게 될 것이다.
또한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특히 남편과 아내가 상호 신뢰심으로 서로 사랑함으로써
모든 형태의 폐쇄적인 태도와 이기주의적인 모든 것을 극복하는 데
필요한 힘을 얻는 원천으로 제시하고 있다.
혼인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랑의 위대한 신비가 되어야 한다.
“이는 큰 신비입니다. 그러나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를 두고 이 말을 합니다.”(에페 5,32)
이러한 혼인 생활은 오늘날의 위기를 극복하고
사회와 교회를 쇄신시켜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성체성사의 신비를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우리의 삶 속에 실천하며 언제나 하느님의 편에서 살아가면서
그분의 참된 자녀로서 사랑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우리가 되도록 열심히 노력하여야 한다.
지금 어디를? 누구를? 찾아가고 있습니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하고 있는 일들이 술술 잘 풀리면 좋겠는데, 꼬이고 꼬입니다.
인생이 괴롭습니다. 그럴 때 누구를 찾아가십니까?
요즘 ‘영적 동반’이란 용어가 유행입니다.
기꺼이 내 고민을 들어주고, 신앙 안에서 성찰할 수 있도록 방향을 제시해 주는
좋은 영적 스승을 찾아간다면 그보다 더 좋은 일은 다시 또 없을 것입니다.
오랜 세월 동고동락했던, 그래서 세상 편한 절친을 찾아가는 것도 좋은 일입니다.
차 한잔하면서 훌훌 다 털어놓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그런데 어떤 분처럼 혹시라도 이상야릇한 분위기의
철학관이나 도사님을 줄창 찾아가는 것은 아닙니까?
사랑하는 자녀의 시험 철이 다가오면 어디를 찾아갑니까?
아무런 의미도 없는 바위덩어리를 찾아가지는 않습니까?
승진을 앞두고, 선거철을 앞두고 어디를 찾아갑니까?
결코 기대서는 안 되며, 절대로 찾아가서는 안 될,
그리고 언젠가 허망함만을 느낄 ‘유력인사’를 찾아가는 것은 아닙니까?
그렇다면 참으로 큰 실수를 하는 것이며, 잘못 찾아가는 것이 분명합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베드로는 이렇게 자문합니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그리고 이어서 지체하지 않고 이렇게 다짐합니다.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이러한 고백 이면에는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동안 좋다는 곳, 정말 대단하다는 사람, 참 진리를 가르쳐준다는 스승, 효험이 있다는 곳...
세상 곳곳을 다 찾아다녀 봤지만, 모두 부질없는 행동이었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결국 주님만이 영원하신 분, 주님만이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
그분만이 내 존재 전체를 내어 맡겨도 괜찮은 분이라는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왜 누군가를 찾아갑니까?
그 이유는 너무나 분명합니다. 명쾌한 자문을 구하기 위해서입니다.
의견을 구하기 위해서입니다. 삶의 이정표를 세우기 위해서입니다. 삶의 진리를 얻기 위해서입니다.
유한한 것, 잠시 지나가는 것, 의미 없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것, 참 진리를 찾기 위해서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아무 데나 찾아가서는 안 되겠지요.
그들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것은 참으로 보잘것없는 것들입니다.
잠시의 위로 정도겠지요. 감언이설이겠지요. 거짓된 공약이겠지요.
그들의 가르침에는 오류투성이입니다. 괜히 잘못 찾아갔다가는 패가망신입니다.
결국 우리가 찾아갈 곳은 베드로 사도의 고백처럼 주님이십니다.
그분만이 우리를 참 진리의 길로 인도할 것입니다.
그분만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의 양식을 주실 것입니다.
마르틴 루터는 말씀을 강조했는데 왜 성체를 떠났을까?
전삼용 요셉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성체성사의 신비를 설명해 주시는데,
사람들의 반응은 대부분 싸늘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떠납니다.
예수님은 성체에 대해 말씀하시기보다는 ‘말씀’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이 말이 너희 귀에 거슬리느냐? 영은 생명을 준다.
그러나 육은 아무 쓸모가 없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이며 생명이다.”
열두 제자들에게도 너희도 떠날 것이냐고 물으십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생명’이라고 믿고 실천하려는 이는 성체를 떠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마르틴 루터는 ‘성경만으로’(Sola Scriptura)라고 하며
말씀을 강조했는데 왜 성체를 떠났을까요?
그는 말씀을 생명으로 실천하려 하지는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해석하려 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는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사람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말씀에 순종하려고 하지 않는 이들은 말씀을 ‘해석’하려 듭니다.
말씀을 해석한다는 말은 말씀을 자기보다 낮은 수준에 두는 것입니다.
마치 의대생이 죽은 시신을 해부하듯이 말씀을 자신 뜻대로 해석하겠다는 뜻입니다.
자신들이 실행하는 대로 해석하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수백, 수천 개의 성경의 다른 해석과 종파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여기서는 성체의 역할이 사라집니다.
루터는 실천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는 야고보서를 성경에서 빼려고 했습니다.
부자 청년에게 예수님께서 가진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주고
당신을 따르라고 했을 때 그는 그렇게 할 수 없었습니다.
그 말씀을 실천할 힘이 없었던 것입니다.
말씀을 실천하려고 하면 힘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 힘을 찾기 위해 성사에 머무를 수밖에 없습니다.
저 같은 경우도 말씀을 통해 늦게나마 사제 성소에 응답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응답에 힘차게 따를 힘이 없었습니다.
그때 성체를 영할 때
“그래, 너 나에게 많이 주었니? 난 네게 다 주었다.” 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다 주시는데 내가 뭘 드린다고 유세를 떨었던가?’라며
크게 회개하고 그 힘으로 지금까지 살고 있습니다.
이렇게 말씀을 실행하려고만 한다면 성체는 떠날 수 없는 존재가 됩니다.
이는 마치 거울과 물의 관계와 같습니다. 거울은 말씀이고 물은 성사입니다.
거울을 보면 물을 찾게 됩니다.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얼굴이 더럽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물로 씻으면 다시 거울을 찾습니다. 잘 씻겼나 봐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말씀과 성체는 마치 자전거의 두 페달처럼 서로를 필요로 하게 됩니다.
말씀이 생명이 된다는 말은 말씀의 실천이 곧 생명이라는 뜻입니다.
만약 십일조를 내라는 성경 말씀을 읽으면 어떨까요? 순종하지 않고 해석합니다.
‘그건 그때 당시나 그런 것이고, 또 개신교나 하는 것이지 이젠 그런 율법은 없어.’
이렇게 되니 모든 것을 주시는 성사가 의미가 없어집니다.
그러나 다 주신 분을 성사 안에서 만나면 어떨까요?
소득의 십분의 일 바치는 것은 일도 아니게 됩니다.
디즈니플러스에서 ‘삼식이 삼촌’(2024)이란 드라마가 방영되었습니다.
삼식이 삼촌은 어렸을 때부터 자기 사람은 세 끼니를 다 먹인다고 하여
별명이 삼식이라고 붙여졌습니다.
그렇게 사람이 많으니, 뒤에서 나라를 좌지우지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돈은 기업가들의 모임인 청우회 회장이 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죽고 어리바리해 보이는 아들이 수장을 맡자
그를 무시하고 자기 뜻대로 정권을 잡으려 합니다.
그러다 죽게 됩니다. 삼식이 삼촌은 말합니다.
“저는 평생 청우회를 위해서 열심히 뛰었습니다. 사냥이 끝났다고 사냥개를 잡아먹습니까?”
“사냥이 끝나서 잡아먹는 게 아니죠. 사냥개가 지가 사람인 줄 알더라고.
왜 자꾸 식탁 위에 올라와? 잡아먹어 달라는 거 아니에요?”
이에 비해 가나안 여인의 자세는 어떻습니까?
예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을 개처럼 여깁니다.
그러니까 성사, 곧 마귀 들린 딸이 낫습니다.
개에게 주인의 말은 생명입니다. 그래서 밥을 얻어먹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저희는 『하.사.시.』를 읽고 매일 하루를 살 한 문장을 공유하며 말씀으로 나아갑니다.
이렇게 살면 결코 성체성사의 은총에서 멀어질 수 없습니다.
정답은 나와 있는데 우리의 대답은?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요즘 젊은이들에게 선택 장애 또는 결정 장애가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래서 수도원만 해도 나이 먹어 문을 두드리는 사람의 수가 늘어났고,
결혼을 안 하거나 하더라도 늦게 떠밀려 결정하는 사람 수가 늘어납니다.
그런데 이것은 요즘 젊은이만이 아닙니다.
옛날에도 젊은이들은 선택의 고민이 많았습니다.
사실 젊은이들은 늙은이보다 선택이 어렵습니다.
그것은 젊을수록 선택의 폭이 넓기 때문이고
뒤집어 말하면 늙을수록 선택의 폭이 좁기에
늙을수록 선택의 여지가 없거나 자기의 선택에 안주하곤 합니다.
그리고 젊은이들에게 선택의 폭이 넓다는 것은 아직 가능성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렸을 때는 대통령이 되는 것도 선택지 가운데 하나였지요.
그러다가 나이를 먹어가면서 자기 능력에 따라 그리고 자기 욕망에 따라
하나하나 선택지를 좁혀가게 되고 그래서 선택지가 좁아지기 마련이지요.
그러니까 젊을수록 능력도 많고 욕망도 많기에
선택지가 많고 그만큼 선택하기 어려웠는데
나이를 먹을수록 할 수 있는 것이 줄어들고
욕망도 줄어지면서 선택지가 좁아지기 마련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나이를 얼마간 먹은 지금의 제게 좋은 것은
이제 거의 모든 것이 정해졌고 선택의 고민이 별로 없는 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갈수록 죽는 것밖에 다른 것이 없고
천국이냐 지옥이냐 그것밖에 없습니다.
그렇긴 한데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기에 선택에 안심하고 안주합니다.
그리고 안심하고 안주하기에 새롭게 선택하지 않습니다.
하느님 나라를 오늘 또 그리고 새롭게 선택해야 하는데
1년 전에 또는 십 년 전에 선택해 놓고 새롭게 선택하지 않습니다.
이는 마치 연인이었을 때나 신혼이었을 때는 사랑이 매일 새롭고
매일 뜨겁게 사랑 고백을 했는데 내 사람이 되고 십 년이 지나자
이제는 더 이상 가슴이 뛰지도 않는 것과 같습니다.
이럴 때 성무일도 초대송 때 부르는 시편이 생각납니다.
“주님의 목소리를 오늘 듣게 되거든 너희 마음을 무디게 가지지 말라!”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이라는 말이 있지요.
매일 새로워지고 또 새로워진다는 뜻입니다.
출전이 정확한지 모르지만 전해져 내려오는 말입니다.
옛날 은나라 탕왕이 매일 자신을 새롭게하기 위하여
이 글이 적힌 세숫대야로 매일 세수를 했다고 하지요.
오늘 여호수아는 백성에게 이렇게 선택을 요구합니다.
“누구를 섬길 것인지 오늘 선택하여라. 나와 내 집안은 주님을 섬기겠다.”
오늘 복음에서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 하고 물으시며
주님께서도 제자들에게 선택을 요구하십니다.
이에 시몬 베드로가 제자들을 대표하여 예수님께 대답합니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도 같은 질문과 선택을 요구받습니다.
정답은 나와 있는데 우리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