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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링크 http://cafe.daum.net/Europa/1AT/6625
세계력 6732년, 4월 28일. 비잔틴 황제 폴리카르포스 1세는 친정군과 함께 알바니아 땅에서 4월의 마지막을 보내고 있었다. 본디 비잔틴 제국의 황제라면 제국 행정부의 최고수장으로서 콘스탄티노플 황제궁에 거주하며 동쪽으로는 예루살렘과 아크레까지 뻗혀나가고 서쪽으로는 알바니아와 불가리아까지 뻗혀나가는 강대한 제국의 영토를 경영해야겠지만, 시대의 험난함은 그런 사치를 허락해주지 않았다.
폴리카르포스 1세의 전임자이자 부친인 사자심황 헬리아스 1세(Helias Komnenos I, The Lion Heart) 서방과 동방으로 많은 군사원정을 떠나며 제국의 위신을 사방에 떨쳤지만, 재정과 인력소모에는 그리 심각한 생각을 가지지 않고 있었다. 헬리아스 1세는 소 아르메니아의 험준함을 감안하지 않고 안티오키아 왕국에 3번이나 친정을 가행해 3번 모두 실패하였고, 그 결과 약화된 제국의 국경방위를 뚫고 동방에서는 터키 부족들이 물밀듯 쏟아져들어왔고 유럽에서는 알바니아와 세르비아를 노리며 헝가리-크로아티아 왕국과 양 시칠리아 왕국이 원정군을 보냈다. 결국 안티오키아 왕국과 평화를 맺을 뿐만 아니라 그들로부터 3천의 정예병과 함께 막대한 양의 황금을 선물로 받고 나서야 겨우겨우 국경방위를 해결할 수 있었으니 그 상황의 심각함을 알 수 있으리라. 게다가, 그렇게까지 해놓고도 결국 알바니아 지역은 시칠리아 왕국에게 10년간 상실했다 겨우겨우 회복했고, 그 10년동안 알바니아의 정교회세력은 씻은듯이 사라져버려서 시칠리아 왕국에게 카톨릭 신자를 수호하기 위해서라는 전쟁명분을 선사해줌으로서 폴리카르포스 1세의 두통거리가 돼버렸다.
사실, 그 시칠리아 왕국에게 줘버린 그 전쟁명분이 바로 폴리카르포스 1세가 알바니아 지역에서 친정군과 함께 4월의 마지막을 보내는 이유였다. 시칠리아 왕국은 아드리아해에 대한 영향력을 증가함으로서 북방의 라이벌인 베네치아를 압박하고, 비잔틴 제국과의 관계가 악화될 시 막강한 군사원정을 수행하는대 사용 될 튼튼한 군사기반을 얻기 위해, 2만의 강대한 원정군을 알바니아 땅에 파견하였는대 이때 시칠리아 왕이 내세운 전쟁명분이 바로 카톨릭 신자의 수호였다. 로마의 바로 턱 밑에 드리워진 단검이나 다름없는 시칠리아 왕국이 강성해지는 것을 교황이 원할리 만무했지만, 카톨릭 신자를 수호하기 위해서 병력을 파견한다는대 어찌 교황이 그 전쟁을 비난할 수 있겠나. 다 헬리아스 1세가 제국의 위신을 생각한답시고 종교 대통합을 짓밟음으로서 정교회와 카톨릭이 서로를 거의 이단 수준으로 바라보게 된 탓이였다.
폴리카르포스 1세의 장군과 조언가들은 알바니아를 포기해야한다고 강하게 주장했다. 실제로 알바니아 전쟁은 그리 낙천적으로 흘러가지 않고 있었다. 베라트 땅에서 폴리카르포스 1세의 친정군은 알바니아 내륙까지 파고들어온 1만의 시칠리아 군을 공격해 무찔렀지만 피해가 극심하기 그지 없었고 이대로 간다면 병력은 병력대로 상실한채 전쟁까지 패배할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당장 알바니아에 주둔중인 친정군도 헬리오스 1세가 싸지르고 떠난 재정문제들 때문에 7천명 뿐이 못 됬다. 친정군이란 명칭이 무색할 지경이였다. 그러니 어떻게 해도 알바니아를 잃을 수 뿐이 없다면, 병력과 재정손실이 더 심각해지기 전에 손을 때고 시칠리아 왕과 협상하는 것이 가장 이성적이지 않겠는가.
한 장군은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제국의 서쪽이 제국의 얼굴이라면 제국의 동쪽은 제국의 망할 똥꾸멍입니다. 더럽고, 지저분하고, 신경쓰기도 힘들지만, 그렇다고 무시하면 똥구멍 뚫려서 뒈진단 말입니다."
거칠긴 하지만, 아주 적절한 말이였다.
13세기 제국의 동방전선은 그 어느 때보다 위험천만하고 불안정했다. 제국은 안티오키아 왕국의 반대를 무릅쓰고 제국 해군을 총동원하여 예루살렘과 아크레를 수복해 제국의 영토로 합병했다. 6백년만에 예루살렘의 총대주교좌가 수복되었다는 것은 제국의 위신을 크게 신장시켰지만 동시에 제국의 재정에 심각한 부담이 되었다. 우선 제국의 행정력을 6백년동안 벗어났던 땅에 다시 행정구조를 수복하는 것도 아주 힘겨운 일이였고, 베두인 족 약탈자들을 상대로 기나긴 방위선을 유지하는 것은 미친 짓이나 다름 없었고, 베두인 족과 게르만 족이 원주민들과 이리저리 뒤엉켜 민족의 용광로가 되버린 레반트 땅에서 치안을 유지하는 것도 지저분하기 짝이 없었다. 안티오키아 왕국과의 관계가 얼음물을 끼얹은듯 차갑게 식었다는 것도 훗날 심각한 문제점이 될 가능성이 있었다. 하지만 위에 적은 저 수많은 문제점들의 심각성에도 불구하고 가장 심각한 문제점은 저 문제들중 하나가 아니였다. 가장 심각한 문제점은 바로 레반트 지역의 균형이 무너지다못해 산산조각나 버렸다는 것이였다.
알샴 술탄국은 그런 혼란기를 틈타 10년전에 만들어진 동방의 신생 국가였다. 레반트에서 탈출한 투르크 부족들은 아라비아 땅에서 3만의 기마병을 모아 북상한 다음 비잔틴 제국의 다마스커스 테마를 점령하고 수도로 삼아 알샴 술탄국을 만들었는대 북쪽으로는 모술을 중심으로 유프라테스 강 상류지역에까지 힘을 떨쳤다. 그 3만의 기마병을 이끄는 수백의 부족장들중 베르칸 부족의 쿠네이드 부족장이 가장 강성하고 지혜가 출중했기에 알샴 술탄국의 술탄으로 추대됬는대 쿠네이드 술탄의 첫째아들 멩귁은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비상한 지성이 출중하기 그지없었기에 쿠네이드 부족장이 죽은 후에도 멩귁이 술탄국을 물려받을 수 있었다.
그런대, 멩귁 술탄이 술탄국을 물려받은지 바로 1달만에 동방에서 무시무시한 재앙이 술탄국을 들이닥쳤다. 그들은 유목민이였지만 베두인족이 아니였고 피부색은 짙었지만 검지 않고 황처럼 누리끼리했다. 그들은 바로 몽골이였다.
이스파한의 셀주크 술탄과 바그다드의 수니 칼리프를 차례대로 굴복시킨 몽골은 훌라구 칸이라는 자가 이끌고 있었는대 잔악하고 강대하기가 지중해의 황제들과도 비교할 수 없어 순식간에 모술을 함락시킨 다음 유프라테스 강 상류를 손에 넣었다. 스스로가 아주 대단하다 믿었던 둥귁 술탄은 그 몽골의 막강한 위력에 어마어마한 충격을 받아 일주일동안 식음을 전폐한채 다마스커스 술탄궁의 방에서 두문불출 하였다. 13살 인생중 단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했던 실패와 공포가, 지성은 비상할지언정 여전히 어린 동귁 술탄이 쉽게 견딜만한 종류의 것이 아님은 확실했다. 하지만 동귁 술탄은 힘겹게 그 감정들을 이겨낸 후 술탄국과 가문의 미래를 위해 어떤 결정을 내려야 살아남을 수 있을지 고민했고 마침내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정교회로의 개종이였다. 이슬람을 버리고 기독교 제국들과 힘을 합쳐야만 저 무시무시한 몽골 대군으로부터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라 판단한 것이였다. 그 선택이 과연 옳은지 혹은 옳지 않은지는 오로지 후대의 역사가들만이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동귁 술탄, 아니 동귁 군주의 개종이 민중과 부족장들에게 좋게 보이지 않았던 것은 확실했다. 많은 부족장들은 알라를 배신한 동귁 술탄을 비난하고 증오했으며 민중들의 불만은 극도에 달했다. 게다가, 동귁 술탄이 비잔틴 제국과의 관계를 향상하기 위해 레반트 지역의 약탈을 금지하기까지 했으니 민중들로서는 더 이상 동귁 술탄의 폭정을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런 민중들의 불만을 이용해 바스부가라는 사내가 유명해졌다.
바스부가는 마치 검은 역청을 시커멓게 집어삼켜 타오르는 지옥의 역청불처럼 무시무시하고, 동시에 매우 맹목적이기도 한 증오를 무기삼아 민중의 불만을 강하게 폭발시켰고 순식간에 수만의 전사들이 바스부가의 깃발아래 모였다. 바스부가는 그들을 모두 알라의 첫번째 도구라 칭찬한 후 동귁 군주를 겁쟁이라 욕하며 레반트 지역에 성전을 선포했는대 동귁 군주는 바스부가를 막을 힘이 없었기에 그저 발만 동동 구르며 바라볼 수 뿐이 없었다. 제국과 힘을 합쳐야 하는대, 당장 서로간의 집안싸움을 멈춘 후 몽골부터 막아야하는대, 어째서 저 극단주의자들은 그런 합리적인 선택을 따를 수가 없는 것인가! 동귁 군주의 가슴 속은 시커멓게 타들어갔다. 지중해의 군주들중 매일같이 두통에 시달리는 사람이 비잔틴 황제 폴리카르포스 1세만 있는 것은 아니였다.
한편, 안티오키아 왕 프레리 1세는 헬리오스 1세가 싸지르고 떠난 난장판에 전혀 끼어들지 않으며 조용히 침묵한채 상황이 어떻게 흐르는지를 관조하고 있었다. 프레리 1세는 비잔틴 제국에게 3천의 정예병을 지원해줄 의무가 있었지만, 안티오키아 왕국에 거주중인 비잔틴 대사가 매일같이 애걸복걸을 함에도 불구하고 병을 핑계로 만나주지 않았다. 실제로 프레리 1세는 잔병치레에 고생하고 있었으니 거짓말을 하는 것은 아니였다. 물론 프레리 1세가 진짜 잔병치레를 하고있다고 해서 프레리 1세가 폴리카르포스 1세의 뒷통수를 맛깔나게 후려치지 않은 것은 아니였다.
안티오키아 왕국은 극도의 안정과 부유를 누리고 있었으며 언제든지 2만명이나 되는 막대한 군대를 동원할 수 있었다. 만약 안티오키아 왕국이 그 2만의 정예병으로 레반트에 원정을 떠난다면 바스부가의 오합지졸 군대가 순식간에 와해될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였다. 그 후 안티오키아 왕국이 말머리를 돌려 알바니아로 군대를 보내 폴리카르포스 1세의 친정군과 힘을 합쳐 시칠리아 왕의 원정군을 물리친다면 알바니아도 성공적으로 수비해낼 수 있었다. 폴리카르포스 1세가 가지고 있는 모든 문제, 심지어 재정적자마저도 안티오키아 왕국이 비잔틴 제국을 도와줄시 해결될 수 있었다. 콘스탄티노플 로부터 동방무역을 빼앗아간 안티오키아는 안티오키아 왕에게 막대한 부를 벌어다주고 있었다. 다만, 문제점이 하나 있었다. 바로 프레리 1세가 죽었다 깨어나도 그런 자원봉사를 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였다.
헬리오스 1세의 예루살렘 합병은 프레리 1세에게 비잔틴 제국은 안티오키아의 친구가 아니라는 사실을 너무도 절절하게 각인시켜주었다. 비잔틴 제국은 언제든지 그 제국주의적 야욕을 드러내며 레반트의 안정을 깨트릴 것이며, 사실상 이미 깨트렸다는 사실은 안티오키아 왕국이 다른 강대국의 의존국으로서 지낸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천만한지를 절실하게 드러냈다. 프레리 1세는 비잔틴의 구원요청을 매몰차게 거절했고, 오히려 비잔틴이 처해있는 위기상황을 마음껏 이용해먹기로 결정했다. 바스부가를 왜 무찔러야하는가. 바스부가를 무찌르지 않고 그냥 두면 알아서 레반트를 점령하고 극도의 혼란상태로 만들어줄텐데. 그럼 프레리 1세는 2만의 정병을 남쪽으로 파견하여 바스부가와 투르크 족을 무찌른 다음 레반트의 패권을 차지할 수 있을 것이고 예루살렘과 안티오키아를 양손에 든채 레반트 지역의 패권국으로서 자리잡게 될 것이였다.
사실, 폴리카르포스 1세도 그런 프레리 1세의 속셈을 잘 알고 있었다. 폴리카르포스 1세는 전혀 바보가 아니였다. 아니, 오히려 왠만한 자들보다 더 현명한 자였다. 폴리카르포스 1세도 현재 국제정세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뻔히 알았고 알바니아를 포기한 다음 레반트의 바스부가를 무찔러서 프레리 1세의 야욕을 중단시켜야 비잔틴 제국이 살아남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렇다면 왜 폴리카르포스 1세는 알바니아를 포기하지 않았을까? 바로 사랑 때문이였다. 헬리오스 1세 시절에 제국의 행정력은 크게 주춤했고 테마 제도는 만인의 웃음거리가 되었으며 제국의 테마들은 공공연하게 아버지에게서 아들로 상속되는 봉건제의 성격을 띄게 되었다. 테마가 중앙정부의 영토가 아닌 지방영주들의 재산이 된 것이였다. 그중 알바니아 땅의 디라키온 테마는 텔미소스 가문의 제노비아라는 여자가 영주로 있었는대 그녀의 미모는 평범했지만 색기가 대단하기 그지없었다. 그녀는 폴리카르포스 1세가 헬리오스 1세와의 공동황제이던 시절부터 불같은 연애를 나누었고 디라키온이 시칠리아 왕에게 점령 된 이후에는 폴리카르포스 1세의 친정군과 함께 지내고 있었다. 매일 밤마다 그녀는 폴리카르포스 1세의 막사에 찾아가 사랑의 밀어를 은밀히 속삭였고 폴리카르포스 1세가 알바니아로부터 철수하지 못하도록 온 힘을 다해 막았다. 폴리카르포스 1세는 불같은 사랑과 제국의 미래를 두고 힘겨운 저울질을 해야만 했다. 과연 그 저울의 눈은 어디에 기울어질까.
한편, 비잔틴 제국을 중심으로 전쟁과 음모가 화염처럼 몰아치는 가운대 비교적 관심을 덜 받고 있는 동방에서는 일칸국의 훌라구 칸이 셀주크 잔당들을 몰아내고 있었다. 그의 목적은 단 하나, 하늘의 텡그리 신과 오래전에 죽은 선조들의 넋을 기릴 수 있을 위대한 대제국을 이 땅에 건설하는 것. 과연 셀주크 조의 페르시아가 그의 기준을 만족시킬 수 있을까? 그것은 아무도 몰랐다. 그리고 훌라구 칸은 원한다면 세계의 가장 멀고 험난한 곳까지 떠날만한 인물이였다.
그리고 훌라구 칸이 세계의 가장 험난한 끝까지 간다면, 그리고 그곳의 왕과 황제들을 무릎 꿇리기 위해 말에 올라탄다면, 훌라구 칸의 10만 기마병이 함께 따라가 세계의 왕과 황제들을 말발굽 아래 짓밟을 것이였다. 비록 지금은 알샴 군주국의 둥귁 군주만이 훌라구 칸을 두려워하지만, 만약 훌라구 칸이 안장위에 올라탄다면, 온 세상의 사람들, 그 잘난 왕들과 황제던 농노와 노예들이던 이슬람이던 기독교이던, 모든 인간이 조금의 차이도 단 한명의 예외도 없이 훌라구 칸을 두려워하게 될 것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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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으으 이건 대작의 냄새가!
ㄳㄳ합니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양면전쟁에 시달리고 또 시달리니 나름 현실적이라 해야할까요.
와 소설책 읽는줄 알았어요 ㄷㄷ
오오 ㄳ합니다.
무슨 모드 인가요?
pb+swmh 입니다.
ㄷㄷ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