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기도 오소서 성령님, 아버지 하느님께 온전히 의탁하고, 그분께 모든 것을 바라는 마음을 갖추게 해주소서.
세밀한 독서(Lectio) 오늘 복음 속 등장인물들의 관계가 ‘기도’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음이 흥미롭다. 먼저 예수님과 아버지의 관계가 눈에 들어온다. 예수님이 기도하시는 장면은 아버지 하느님과의 내적이고 긴밀한 관계의 또 다른 표현이다. 예수님은 기도를 통해 이 세상에서 아버지의 뜻을 실현할 힘을 얻으셨다.(루카 10,21-24 참조) 기도는 이 세상과 아버지의 세상을 엮어주는 다리와 같았다.
예수님은 당신의 기도를 제자들과의 관계 안에서 확장시킨다. 제자들에게 가르치시는 기도 안에서 당신의 아버지 하느님을 제자들의 아버지로 소개하신다.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 전체에 해당한다.(신명 32,6) 여기에 덧붙여 한 가지 주목할 것은 예수님이 사용하신 ‘아버지’라는 말이 아라메아어로 ‘압빠Abba’에 해당한다는 점이다. 친밀하고 다정다감한 우리의 ‘아빠’와 같은 의미다. 예수님은 당신의 제자들에게 하늘의 아버지를 이 땅의 사랑 가득한 아버지로 소개하고 계신다. 저 멀리 높은 곳의 무서운 아버지가 아니라, 살 내음 나는 바로 옆에 계신 아버지 말이다.
그래서일까. 예수님은 일상의 삶 안에서 빵을 주시도록 청하는 기도를 하라고 말씀하신다. 루카복음은 마태오복음과 달리 현재 명령형이 사용된다. 빵을 달라는 기도가 지금 이 자리의 ‘일상적’이고 현실적인 기도라는 말이다. 언제 올지 모르는 그 시간을 위해 기도하라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세상, 이곳에서 모든 것을 하느님 아버지께 의탁하고 내어 맡기라는 말씀이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유혹에 빠지지 않아야 한다. 유혹은 본디 파멸을 지향하는 악한 행위다.(루카 10,25) 예수께서는 우리가 유혹을 통해 더 건강해지고, 더 굳건해지기를 바라신다. 마치 광야에서 유혹받으신 예수님이 그 유혹을 통해 하느님 아버지에 대한 신뢰를 강조하신 것처럼(마태 4,1-11 참조) 말이다.
이제 남은 건 하나다. 아버지 하느님께 온전히 의탁하고, 그분께 모든 것을 바라는 마음, 그래서 모든 것이 그분으로부터 나온다는 전적인 신뢰가 그것이다. 이 신뢰는 단순한 의지의 문제가 아니다. 당연히 해야 할 숙제이고 의무에 가깝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찾아온 친구를 배불리 먹여야 했던 유다 사회의 문화적 관습은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 아니라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이었다. 아버지께 매달리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 내 신앙의 업적이 아닌 것이다.
이 당연함은 한순간이 아니라 지속적이어야 한다. 계속되는 ‘당연함’이어야 한다. 그래서 기도는 아버지와의 관계를 지속하는 것이다. 이는 그 어떤 것보다 ‘좋은 것’이다. 왜냐하면 기도 안에서 하느님은 아버지이신, 당신(성령)을 우리에게 주시기 때문이다. 기도의 끝은 아버지를 만나는 것이다. 그것도 이 세상에서, 이 세상을 위한, 이 세상 안에 부대끼며 살아갈 너무나 좋으신 아버지 말이다.
묵상(Meditatio) 사업하는 사람의 목표는 ‘이익 발생’이다. 사업적 관계는 너를 통해 나를 먼저 챙긴다. 속된 말로 ‘돈 놓고 돈 먹기’가 사업이다. 친구를 만나는 사람의 목표는 말 그대로 친구를 만나는 것이다. 친구 관계는 너를 통해서 너를 챙긴다. 식당이나 커피숍에서 “내가 낼게.” 하며 돈 내는 것을 전혀 아까워하지 않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굳이 비유하자면, ‘돈 놓고 너 먹이기’가 친구 관계일 것이다.
기도 안에서 맺는 하느님과의 관계에는 친구 관계의 따뜻함이 녹아 있다. 구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는 것, 모두가 하느님을 찾기 위함이다. 내 삶의 흥신소처럼 하느님을 찾거나 내 삶의 이익 발생을 위해 묵주기도를 바치는 게 아니라, 내 삶을 함께할 친구로 그분을 맞아들여 내 삶이 곧 그분의 삶과 맞닿도록 기도하면 좋겠다. 기도 때마다 ‘이것 해주세요, 저것 해주세요.’ 하는 습관이 나를 부끄럽게 한다.
기도(Oratio) 제 마음 다하여 당신을 찾습니다. 당신 계명을 떠나 헤매지 않게 하소서.(시편 1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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