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빛의 긴 수염을 쓰다듬던 백발의 노인이 푹 한숨을 내쉬었다. 그것은 자신이 그토록 경애하고 숭상하는 여신 때문이였다. 아니, 여신이 근본적인 문제인 게 아니라 자신을 비롯한 여신의 종들의 지엄한 신의 계시를 제대로 해석하지 못하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라나르시여….'
신탁에는 별 말이 쓰여있지 않았다. 단지,
[어둡고 타락한 거리에 성스러운 꽃이 피었을지니.]
라는, 소위 '성녀'를 찾으라는 계시가 적혀있었을 뿐이다. 성녀. 여신의 대리인인 자신 - 교황 '아시엔'과는 달리 여신의 권능의 일부를 가지고 약간의 권능을 행할 수 있는 대륙이 어둠으로 빠질 위험이 있을 때만 나타나는 존재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대신관이 후에 제단의 황제와 마찬가지인 교황이 된다는 것과는 달리 성녀의 위치는 묘연하여 자칫하다가는 못 찾는 경우도 있을지 몰랐다. - 물론 지금까지 그런 경우는 한 번도 없었지만. -
내일은 대륙의 고귀한 구원의 빛 - 성녀의 묘연한 단서의 추정을 위한 회의가 열리는 날이였다. 아시엔은 성수로 얼굴을 깨끗이 씻고 잠이 들었다. 새벽에 일어나 새벽 공기와 함께 기도라도 올려야겠다… 라고 생각하면서.
'빛의 여신, 주신 라나르시여. 여신님의 미천한 첫번째 종이 기도를 올리나이다. 성화(聖花)의 행방은 아직 묘연하나… 반드시 찾고 말습니다, 여신이시여…. 오늘도 온 대지에 여신님의 숨결이 함께 하시기를 비나이다.'
경건한 자세로 성호를 그은 교황은 무릎을 꿇고 앉아 자신의 생명과 마찬가지인 여신에게 기도를 올렸다. 산뜻한 새벽 공기가 아시엔의 마음을 한 층 더 차분하게 만들어줬다. 왠지, 예감이 좋은 날이였다. 이 기세를 타고 이제야말로 '구원의 빛'을 찾을 수 있기를….
그 날 정오, 성녀를 찾기 위한 회의가 열렸다. 교황과 대신관을 비롯한 주신의 제단의 가장 높은 직위의 사람들은 물론, 이제 막 신관까지 회의에 참석했으므로 회의가 열린 곳은 교황청에서 가장 큰 대회의실에서였다. 여신을 찬송하는 성가를 부른 이들은 이내 조금은 들뜬듯한 분위기를 가라 앉히고 다들 침착히 의견을 제시했다.
"여신의 뜻을 받드는 87위의 신관입니다. 발언의 기회를 주시길 바랍니다."
"좋소."
갈색 머리의 안경을 낀 20대의 여성이 대신관과 눈을 마주치며 당당히 말했다. 여성인 대신관 로시에는 당당한 여사제의 자태를 마음에 들어하며 발언을 허용했다. 정식신관 중 서열 87위인 여사제는 거의 수천 수만은 될 듯한 인원의 시선을 받으며 입을 열었다.
"여신께서는 신탁에 '어둡고 타락한 거리'라고 하셨습니다."
여사제는 이렇게 말하고 잠시 입을 다물었다. 여기저기서 그렇다는 반응이 흘러나오자, 그녀는 자신감 있는 어조로 다시 말을 잇기 시작했다.
"대륙을 구원할 성스러운 꽃, 성녀께서 나타나실 장소는 아니라 생각합니다만… 여신의 종인 저는, 성녀께서 환락가에 계시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동시에 이곳 저곳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환락가… 일명 뒷골목이라 불리는 그 곳은 신성 제국이라 불리는 '라나시스'에서는 단 한 곳밖에 없었으므로, 진짜 성녀가 거기에 있을 경우 범위가 상당히 좁혀지지만 아무리 그래도 고귀한 성녀가 소위 뒷골목이라는 곳에 있다는 것은 상당히 어이없는 일이였다. 그러나, 그녀의 말이 일리가 있었기 때문에 회의에 참석한 모든 이는 골똘히 생각에 빠졌다.
여사제는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성기사 두 분을 동행시켜 주시면 꼭 성녀님을 찾아오겠습니다."
환락가!
아무리 신관이라지만 여성인 그녀가 홀로 가기는 두려운 장소였다. 게다가 그녀는 신관. 혹여 나쁜 일이라도 당하면 큰 일이였다.
"…좋소. 여신의 87번째 종이여, 꼭 성녀님을 데려오시기를 바라오이다."
"그리 할 것입니다. 여신의 광명(光名)에 누가 되지 않도록, 여신의 뜻을 이룰 수 있도록."
대신관은 여사제의 굳건한 의지에 흐뭇한 웃음을 짓고는 급히 회의를 마무리지었다. 오늘은 그녀의 의견만으로도 충분하리라.
빛의 여신, 주신 라나르의 87번째 종 '메이케'는 그녀와 잠시 동행하게 될 성기사에게 여신의 힘을 빌어 축복을 걸고는 환락가로 떠났다. 성수를 마신 말은 평소보다 두, 세배는 더 잘 뛰었으므로 신성제국의 유일무이한 환락가 '카이저 크로스'로 꼬박 2일만에 도착할 수 있었다.
"메이케 님, 힘드시지 않습니까?"
"아니요. 성지 순례를 하는 듯 오히려 마음이 들뜨는 것이, 괜찮은 듯 싶군요. 그러는 하르켄님이야 말로 힘이 드시지 않으시는지요? 아, 라데노아님. 라데노아님은 괜찮으십니까?"
'카이저 크로스' 에 도착하기 일 보 직전, 자신의 안부를 묻는 성기사 '하르켄'의 말에 되려 성기사들을 걱정하던 메이케는 눈 앞에 펼쳐진 화려한 도시에 절로 입을 벌렸다.
"우와- 확실히, 굉장하군요."
"흐음, 그래봤자 더러운 유흥가가 즐비한 도시. 도박장에, 술집에. 이런 곳에 성녀님이 계시는 것이야 말로 여신께서 우리를 버리셨다는 것 같은."
지금껏 말이 없던 은발의 성기사 라데노아는 비꼬듯 입을 열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짙푸른 눈동자는 남을 비평하는 것에만 반응하는 듯, 평소와는 유달리 멍해 보이던 눈이 조금 반짝였다.
'이상한 분이셔.'
메이케는 자신을 비꼰 것은 뒷일 치고 평소에는 멍하던 눈이 이상한 핀트에서 빛나자 고개를 갸웃했다. 저 성기사, 분명 여신님께 기도를 드릴때도 멍하지 않았나? 하면서.
"여신께서 우리를 버리다뇨. 그런 끔찍한 소리를…. 그럴리가 없어요. 아아, 빨리 성녀님을 뵙고 싶네요. 그렇죠, 하루켄 님?"
자신의 안부를 묻고는 조용히 묻혀진 하루켄에게 빙그레 웃으며 말을 걸었다. 라데노아는 달리 상당히 다정하고 부드러운 하르켄은 마주 웃어주고는 대답했다.
"신성 제국의 환락가가 여기가 다여서 다행입니다만, 이 도시… 상당히 넓군요. 뭐, 제국 전체에서 도시로 줄어든것만으로도 행운이지만요. 자, 어서 카이저 크로스에 들어가도록 하죠."
카이저 크로스!
신성 제국의 유일무이한 환락가이자, 대륙 최고의 환락가이기도 했다. 그만큼 치안이 좋았는데, 병사들의 눈이 흉흉했다. 못 보던 사람들이기 때문이리라.
"신분패를 보여주시오."
메이케는 품에 싸고 있던 대신관의 인장이 있는 신분패를 내밀었다. 신관의 복장과 성기사의 갑옷만 있으면 바로 통과할 수 있었을텐데, 위장 잠입이 중요했기 때문에 별 수 없이 신분패를 지니고 다녀야했다.
"흐음…. 헉! 신전에서 오신 분들입니까아?"
방금 전까지만해도 살기등등한 모습은 어디로 사라지고, 보초를 서고 있던 경비병이 바로 꼬리를 내린 채 아부하듯 말했다. 메이케는 조용히 고개만 끄덕였다. 경비병은 '말이 지쳐보이는데, 마구간을 빌리겠느냐' 같은 심심한 말을 늘어놓으며 출입을 허가했다.
"카이저 크로스에서 즐거운 시간 되시길!"
"빛의 여신, 주신 라나르님의 행운이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우습게도 환락가 '카이저 크로스'는 엄연히 합법적인 장소였다. 신의 제국인데 어째서 환락가를 수용하는가에 대해 용감한 누군가가 황제에게 물었는데, 카이저 크로스는 보통의 환락가와는 달리 성매매같은 것은 하지 않으며, 신성제국의 특이한 관광지인 동시에 매달 수많은 세금을 납부하므로 괜찮다는 대답을 했다.
고로 신관인 그녀가 여신의 축복을 일개 병사에게 보내는 것은 아무런 제재가 가해지지 않았고, 실제로 병사는 아름답고 현명해보이는 그녀의 외모에 반쯤 넋이 나간 상태인데다 신의 축복이란 더없이 감사한 것이기에 즐거워했다.
"고맙습니다! 다시 한 번, 즐거운 시간 보내십시오."
여신관은 경비병에게 싱긋 웃어주고는 점심 시간이라며 식당에 가자고 하르켄에게 조용히 말했다. 그녀의 예상대로 하르켄은 고개를 끄덕였고, 라데노아는 아까부터 뭔가 홀린듯 멍해 있었다.
"음, 저 식당이 깨끗하고 말끔해보이네요."
그녀가 선택한 새하얀 외벽의 식당의 이름은 '바람의 이야기'였다. 동화처럼 아기자기한 이름에 쿡쿡 웃음 짓던 메이케는 먼저 식당에 들어가버린 라데노아로 인해 별 수 없이 뛰어야만 했다. 입고 있던 기나긴 원피스가 밟힐 듯 말듯, 아슬아슬했다.
휘청, 휘청.
넘어지지는 않았지만 몇번이나 원피스를 밟아 넘어질 뻔 했던 그녀는 남들이 자신을 보고 웃을것만 같아 얼굴을 약간 붉혔다. 그 때, 뭔가 날카로운 목소리가 그녀의 귀에 꽂혔다.
"뭐야, 이 언니. 대낮에 낮술 먹고 휘청거리면 돼? 우리 식당이랑 붙어 있는 여관에 머물기라도 하지 그래. 음, 벌써부터 술 냄새가 퍼지는 것 같군. 밥 먹고 빨리 여관에 가 씻기나 하라고."
긴 은빛의 생머리에 커다란 금안, 핏빛마냥 붉고 도톰한 입술, 눈꽃처럼 새하얀 피부. 그리고 기나긴 속눈썹. 더없이 청초해보이는 아름다운 소녀가 조금은 야해보이는 메이드복을 입고 불량한 자세로 친절히 충고 해 주었다.
그리고, 그녀에게서는 더없이 순결하고 정순한 기운이 느껴졌다.
털썩.
"아오- 쌰앙. 이봐, 아저씨! 술 취한 여자가 비틀대다가 넘어졌어! 헹. 이거 어쩔거야? 시체 치웟!"
소녀가 뭐라고 외치든 말든 무릎을 꿇은 메이케는 성호를 긋고 입을 열었다.
"…드디어 뵙게 되는군요, 성녀여…. 신의, 화신이시여…."
"…… 이 여자 미친 것 같아, 아저씨! 신고 해!"
더 없이 감격스러웠던 메이케는 성녀(?)의 전혀 숙녀스럽지 않은 말투는 듣지도 못한 듯, 은 쟁반에 옥구슬 굴러가듯 아름다운 목소리에 감동의 눈물이라도 흘리고 싶었다.
- end
음, 메이케와 두 성기사가 주인공이 아닙니다.
읽으셨으면 감상평을 써 주세요! :)
첫댓글 오오~~주인공이 멋진데요~~
실제로 시니컬한 주인공이 되어야할텐데요 ㅎㅎ;
하...하하..드센 주인공이군요 ㄷㄷ
음, 앙칼진 고양이 느낌? ㅋㅋ /뭐
주인공이 미쳤다!!
미쳤다고 표현하나요, 저런 성격[]
ㅋㅋ 기분나빴다면 ㅅㄱ드림 하지만 제 말은 그만큼 활발해보인다는../
'ㅅ' ... 생기발랄(?)한 주인공이군요오~
네, 발랄(?) 하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