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실천이란 무엇입니까』
- 김대호 시집 / 시인동네 시인선 199
김천에서 추풍령 가는 길
옛날 지명으로 신암리 길가에
‘시남’이란 커피집을 차려 놓은 김대호 시인.
커피 파는 일보다는
시를 더 많이 쓰고 있을 것 같은 그가
두 번째 시집을 냈다.
첫 시의 제목이 ‘곡선’이었다.
그의 말대로 적당히 통속해진 탓일까?
직선 같았던 그의 성격이 곡선으로 변한 것일까?
무엇을 이기려는 마음을 매일 거세했다고 했다.
감정의 절반을 덜어내는 노력을 했다고도 했다.
서정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던 그의 시
여기저기서 저릿한 서정이 느껴졌다.
자연산 밥 냄새를 그리워하는 그.
헌 잡지 같은 동네에 있는
고향집 폐가의 삭은 나무마루같이 무엇이 무너져도
모르는 척 고분고분 살아간다는 그.
구석을 혈육 보듯이 본다는 그를
그냥 따뜻하게 안아주고 싶다
* 곡선 / 김대호
당신이라는 간이역을
경유하지 않고 나의 세상으로 직항하는 노선은
애초에 없었다는 얘기
당신을 만져야 내가 만져지는 얘기
만나면 서로 혀를 나누는 키스를 이제 포옹으로 대신하는 사이가 되었다는 얘기
그리고 적당히 통속해진 당신이 보기 좋았다는 얘기
그것이 슬퍼질 때, 눈물 대신 주먹을 꽉 쥐게 되더라는 얘기
밥값을 서로 내려고 살짝 밀쳤다는 얘기
당신이 사라지기 전 거리에 내리는 첫눈
첫 세상
반짝이는 불빛들
* 신암 일기 / 김대호
신암에 들어와 커피 집 차린 지 십 년이 지났다
나의 상업은 기술도 없이 웃는 것
무엇을 이기려는 마음을 매일 거세하는 것
좋은 기분은 노력하면 만들어 낼 수 있었다
그 노력이란
내 감정 절반을 덜어내는 일이었다
내일의 날씨를 매일 검색했고 종교도 없이 지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날들이지만 오히려
십 년 후의 내 모습은 잘 보였다
지금의 모습이 십 년 후의 모습이라고 믿었기에
내 헛헛한 웃음의 주기가 길어질수록 남은 생의 표정은 단순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신암에 살면서 배웠다
내가 부풀어서
그늘이 없어서
구석이 없이
터지기 직전의 그 무엇이 되었을 때
그 압력은
내가 매일 만들어냈던 헛헛한 웃음에서 온다는 것을 느꼈다
화려한 슬픔을 이해하는 순간이었다
* 자연산 밥 냄새에 대한 기억 / 김대호
자연산 밥 냄새는 어디로 갔는가
솔밭에서 뛰어놀다가 저녁연기를 보고 대문간을 들어서면
자연산 밥 냄새가 퍼덕이며 콧등을 쳤다
밥을 목구멍으로 부어 넣는 동안에도 밥 냄새는 활어 상태를 유지했다
척박한 밑바닥에서 아무렇게나 길러낸 밥 냄새였지만 밥을 먹는
그 순간만큼은 무엇도 부럽지 않았다
자연산 밥 냄새가 사라진 후 나는 도시에 살면서
자연산 깡다구 대신 양식 눈치를 먹으며 기생했다
자연산 밥 냄새의 기법이란 밥을 약간 태우는 것
그러나 도시의 가정엔 모두 전기밥솥이 있었다
버튼만 누르면 밥이 정확하게 익었다
그 정확하게가 항상 불만이었다
어느 가정에서나 사용법대로만 밥솥을 작동하면 모두 비슷한 밥 냄새가 난다
밥을 태울 수도 태울 필요도 없다
이 양식 밥 냄새는 가장 밑바닥에 있는 허기를 불러오지 못한다
아직 소화가 덜된 속으로 밥통에서 퍼 온 밥을 깨작대며 먹는다
꼭 먹어야 할 이유도 없이 그냥 먹는다
예상치 못한 일로 며칠 집을 비우면 전기밥솥에 남은 밥은
서서히 찰기를 잃으며 말라간다
끼니를 때우기 힘든 시절 못 먹어서 윤기 없이 배배 돌아가던 뒷골 사는 아이같이
이제 자연산 밥 냄새는 씨가 말랐다
그까짓 자연산 밥 냄새가 없어도 우리는 잘 산다
코보다 눈으로 냄새를 계산하며
양식 냄새를 자연산으로 속아 먹으면서
우리는 너무 잘 산다
* 절벽 / 김대호
당신이 떠나고 /
고개 숙이면 /
어깨부터 발끝까지가 /
절벽이다 /
* 구석에게 / 김대호
구석을 혈육 보듯이 본다
구석을 보면
너 밥은 먹었니? 하고 묻고 싶어진다
구석에는 아무것도 없다
자신의 빛나는 것을
구석에 배치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찬밥 한 덩이로 웅크린 구석들
눈물을 닦고 코를 푼 휴지를 너에게 주마
씩씩하게 밖을 향해 나가는 내 발걸음 소리를
또한 너에게 남기마
내가 구석이 되어 다시 돌아왔을 때
그 발걸음과 쓸쓸을 내가 기억하게 해다오
* 폐가와 폐허 / 김대호
손만 대면 무너질 것 같은 고향집 폐가
아귀가 눌려서 열리지 않는 큰채 문을 포기하고
뒤안
푸르른 대숲과 그 옆에 죽은 살구나무를 본다
동네 사람들이 빈집인 줄 알고 필요할 때마다 대나무를 베어가고 잔챙이는 그냥 버려두었다
나는 깨끗한 면티와 청바지를 입고 있었는데
도대체가 저 폐가의 풍경들보다 내가 더 폐허 같았다
이 집을 떠난 지 삼십여 년이 지났으니 그 거리만큼 죽음 쪽으로 가깝게 간 것
고향에 들를 때는 최대한 웃는 표정을 연습한다
어릴 때 우물가에서 똥 싼 내 몸을 씻어주었던 아줌마는
차창을 열고 인사하는 나를 알아보지도 못한다
헌 잡지 같은 동네에는 이제 아이의 울음이 들리지 않는다
이곳에서 첫 울음을 내었던 내 또래들은
평생 일해서 서른 몇 평쯤 되는 공중의 집을 열었다
그 허공의 집 한 채 얻은 대가로 몸은 폐허가 되었다
소주 몇 잔에 울컥해서 객기를 부리는 일도 이제 옛일이 되었다
자신의 어둠을 인정한 후
고향집 폐가의 삭은 나무마루같이 무엇이 무너져도
모르는 척 고분고분 살아간다
첫댓글 자연인 처럼
마음을 거세하고
감정을 누르는 서정...이
무겁게 느껴집니다.
정말 커피 보다
시를 많이 쓰고 계실까요?
하하, 실제로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조용한 카페거든요.
잘 읽고 감동 받아 갑니다.
고맙습니다.
깊은 사유에서 나온 것들이 시로 잘 표현된 것 같아요.
시집 김대호 곡선~~!!!
구입 하고자요 .생각합니다.
시집 제목은 '실천이란 무엇입니까'인데
일부러 그 시는 올리지 않았습니다.
실천하는 게 삶이겠지요.
신암에 카페 '시남' 이 있군요.
카페 이름 너무 잘 지으셨어요.
시를 쓰는 남자?^^*
시의 구절구절이 많이 공감됩니다.
꼭 지금의 내 생각이랑 비슷하다는 느낌 들어요.
저도 시골 출신인지라
늘 제 마음속에 머물고 있는 단어들이 시 속에 있어
자연스레 그림이 그려집니다.
봄이면 더 그리운 옛생각들~~
그렇습니다.
한번 들으면 잊을 수 없는 카페 이름이지요.
김대호 시인이 이제 근본을 생각하는 나이가 되었나 봐요.
저도 시를 잘 모르겠지만 삶에 대한,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점점 늘어나는 것 같아요.
김대호 시인 <실천이란 무엇입니까> 시인동네
두 번째 시집 출간 축하드립니다.
세상에 시집을 두 권이나 낸다는 건 그리 쉬운 게 아니지요.
정말 축하할 일입니다.
언젠가 시남카페에
들렸던기억이 있습니다
글들이 조금 어렵게 느꼐집니다만 공감하는 부분들이 더러있어서 정겹습니다
그분이 저의 姪壻 (질서) 친구분이라 익히 아는바라
아하, 그러셨군요.
저도 여전히 어려운 내용이지만 그래도 뭔가 짚이는 게 있더라고요.
<실천이란 무엇입니까>
어쩌다보면 작은 약속도 말이 앞서고 실천을 못하는 경우가 많은데
시집 제목이 가슴에 와닿습니다.
우리네 사는 모습 하나하나가 모두 작은 실천이겠지요.
시인의 삶이 고스란히 보이더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