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털썩.
솜구름처럼 작은 흙먼지가 일어 흑동의 명부행(冥府行)을 애도했지만 당사
자로는 그것을 목도하지 못했다. 죽은 자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
으니까.
돌연한 사태였고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던 결말. 비록 몇 십 년을 은거해 있
었다고는 해도 사방신의 이름은 이리 쉽게 지워질 성질이 아니었다. 피와
공포로 점칠된 명호의 무게감으로나 본연의 실력만으로도 그들을 맞상대할
이는 별로 없었다.
그런 그들이 합공까지 했건만 이제 서른의 청년 하나를 당해내지 못하고 불
귀의 객이 된 것이다. 본 실력을 놓고 봤을 때 능히 검정오존을 압도하는
사방신을.
물론 대가는 컸다. 그만한 무위의 노강호를 무려 셋이나 명부에 적을 올린
사람답게 북궁단야의 상태는 그가 무림이라는 대지에 출두한 이래 최악이었
다.
멋대로 뛰노는 기혈, 몸 이곳저곳에 피어난 잔 상처는 형태의 미세함과 달
리 뼛골까지 아릴만큼의 아픔을 주었고 무엇보다 내공이 거의 바닥이었다.
최초로 시전한 일현성화가 무지막지한 공력을 소진했음은 물론이다. 검속(
劍速)과 검기를 최대한으로 끌어 올려 통상적인 쾌검과 달리 - 일반적으로
쾌검은 대기를 갈라버릴 만큼의 빠름을 추구한다 - 대기를 눌러 마찰열을
일으키는 일현성화이기에 공력의 소진이 어마어마함은 당연하다.
쾌와 중, 양쪽을 동시에 구현하기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니까.
그러나 일현성화 이전의 일검, 언제나 사용했던 사무귀일이 엄청난 부담으
로 작용했다는 사실을 안다면 그를 아는 모든 이가 고개를 갸우뚱거릴 것이
다. 늘 써왔던 검식이었고 시전 후에도 별 다른 후유증을 보인 적이 없었다.
이유는 간단하다.
북궁단야는 일현성화를 예비한 일검으로 그가 여태까지 그었던 최상의 선,
최고의 사무귀일을 날렸었으니까.
흑동의 청룡박(靑龍縛)은 무서운 위력으로 그의 전신을 옥죄었지만 청룡박
이라는 무공 자체가 가지는 본연의 성질은 일현성화의 구현에 역으로 아주
좋은 터전을 마련했던 것이다.
일현성화는 마찰할 대기의 밀도가 높으면 높을수록 제 위력을 발휘할 것이
고 청룡박은 기본적으로 기세를 유형화하여 상대를 묶어버리는, 아니 유형
화된 기세만으로 상대를 압사까지 시킬 만큼 대단한 위력의 무공이다.
기세로 상대를 어떻게 한다고 함은 주위의 공기를 차용한다는 것과 진배없
는 얘기.
문제는... 청룡박을 일순간에 산산이 깨트려야 한다는 거다. 그래야 상대방
의 허점도 노릴 수 있을 터였고 집결된 공기 또한 달아나지 않을 거다.
그래서 최고의 사무귀일이 필요했던 것이고 북궁단야의 계산은 멋들어지게
맞아떨어졌다. 아직도 완벽하지 않은 일현성화이기에 일검으로 분산된 두
명을 격살시킬 자신이 없었던 그였지만 밀집된 공기가 미완성의 일현성화에
두 배, 세 배의 힘을 실어 주었으니 흑동으로는 저승에서도 땅을 칠 일이다.
그렇게 세 명을 상대했지만 이제부터가 문제다.
또르륵.
그의 볼을 타고 흐르는 땀은 그저 긴장감의 파생물만은 아닐 터였다. 과도
한 진기사용으로 인한 피로도가 피와 살로 이루어진 육체에 가감 없이 전달
되었고 그것이 이런 식으로 표출된 것이다.
문득 고개를 돌린 북궁단야가 한 구석에서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방
교명을 멀거니 응시했다. 지금 당문의 늙은 장로를 보자니 그야말로 ‘이보
다 더 놀랄 순 없다’는 표정인데 다른 말로 풀어보자면 ‘지금 펼쳐진 광
경이 과연 사실인가’ 이기에 조금 씁쓸했다.
말은 안 했지만 어지간히 걱정되었었나보다. 아니면 자포자기였거나.
어떻게 말 하든 결론 자신을 믿지 못했었다는 말이니 기분이 좋을 리는 없
었지만 지금 그것에 관해 왈가왈부할 입장은 아니었기에 숙였던 어깨를 펴
고 한마디 툭 던지는 것으로 기분을 대변해야 했다.
“그저 명주 정도로는 안 되겠습니다. 지금 무척 목이 마르거든요.”
“음?”
황당한 말에 방교명이 멍한 눈동자를 바로 했지만 도통 그 뜻을 몰라 고개
를 갸웃거려야 했다. 갑자기 웬 명주 타령인가?
아직도 첩첩산중인데 말이다.
“이 싸움 후에는 천하에서 으뜸가는 술로 목을 축여야겠다는 말입니다.”
“무, 물론일세! 그런데 갑자기 왜 그런 말을...?”
씨익.
좀처럼 보기 힘든 북궁단야의 미소. 피곤에 절어 초췌한 모습이었지만 하얀
이를 드러내며 다소 조소적인 느낌을 주는 그의 웃음은 싸늘한 일검 만큼
이나 매력적이었다.
늙은 장로의 가슴이 다 뛸 정도로.
“명주 정도로는 손익이 맞지 않습니다. 손해 보는 장사는 하지 말자는 주
의라.”
“......”
웃어야할지 어쩔지 몰라 하는 방교명에게서 몸을 돌린 북궁단야의 앞으로
홀로 남은 홍북이 천천히 다가왔다.
“모두 가버렸군.”
“당신이 남았구려.”
둘의 눈이 허공에서 격하게 한번 부딪쳤다. 북궁단야의 말은 홍북의 가슴을
세차게 할퀴었지만 경거망동 하지는 않았다. 눈앞의 상대는 비록 어리지만
무서운 검법을 소지하고 있다.
무인으로서 가질 기본적인 소양, 즉 뚝심이라든가 평정심. 그리고 승부감각
도 있으니 어찌 두려워하지 않겠는가.
허나 놈은 지쳤다. 지금 상태는 서서 쉰다고 나아질 계제가 아니다. 그 정
도 쉬어서 고갈된 단전이 딱딱 채워진다면 누가 내공 걱정을 하겠는가?
훅동과 백서의 죽음이 비록 일검에서 비롯되었지만 그만한 무인을 쓰러트리
려면 그만큼의 위력을 실은 초식이었어야 할 것이고, 내공 손실에의 피로도
는 육안으로 식별 가능하리 만치 뚜렷하다.
“어린 녀석이 제법 매운 입을 가지고 있구나. 그렇지만 허세부릴 힘 밖에
없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다. 자...”
사실 홍북에게 세 명의 죽음에 관한 추모의 념 같은 감상이 자리할 공간 따
위는 없었다. 어차피 계약적으로 만난 사이였고 같은 뿌리의 무공이라고는
하지만 그 또한 계약적으로 얻은 터라 사방신에게 일반적인 동료의식은 찾
기 어려웠다.
무언가 일이 생기면 모였다가 그것이 끝나면 각자의 삶으로 돌아가는 사람
들이기에 이런 마음은 당연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으나마 한줄기 감정이 가슴으로 파고듬은 어쩌지 못하니 오랜 세
월동안 함께했던 정(情)이라는 녀석이 어느 틈엔가 자리했었나보다.
이유 없이 밀려오는 고독감. 잃은 것도 없는데 밀려오는 상실감이 가슴 한
구석을 아려왔기에, 익숙하지 않은 감정이기에, 마땅히 해소시킬 방법을 모
르기에 그 모든 분노가 한곳으로 집결되었다.
저놈만 없었더라면...
“이제 어찌할 셈이냐. 속이 텅텅 빈 그 몸으로...”
저 어린 녀석 때문에...
“그저 주둥이를 놀리는 것으로 지금의 상황을 타개할 수 있겠느냐.”
감상 따위에 젖어야 한다니...
저벅저벅 걸음을 옮기며 홍북이 천천히 공력을 끌어 올렸다. 일견 평범해
보이던 노인이었는데 내공을 운기하자 마치 차돌처럼 단단한 중압감으로 장
내를 뒤흔들었기에 위태롭게 서있던 북궁단야의 신형까지 흔들렸다.
“이런, 이런... 그 정도의 기운조차도 받아내지 못한단 말이냐? 아까까지
의 오연하던 기개는 어디다 두고 이렇게 초라한 모습이냐?”
홍북의 빈정거림에 대꾸할 겨를도 없이 휘청거리는 신형을 땅에 박은 거검
에 의지하며 가까스로 버텨내는 북궁단야의 모습은 눈물겨웠지만 방교명이
해줄 수 있는 것은 마음으로 보내는 응원이 전부였다.
‘여기서 쓰러진다면 자네가 아니지. 암, 내가 아는 북궁공자는 이번에도
상대를 베고 요구치를 높일 것이야. 그게 바로 북궁공자 아닌가!’
음성 없는 절규가 전달되었을까. 일엽편주처럼 흔들리던 북궁단야의 눈망울
이 한순간 멈춰졌다.
온 몸의 기운을 양팔로 모으며 씹어 뱉듯 홍북이 한마디를 내던졌다.
“네놈을 갈가리 찢어 주마.”
그때까지 숙여져있던 북궁단야의 고개가 갑자기 쳐들렸다.
“어떻게?”
돌발적인 물음.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응대였기에 순간적으로 홍북의 표정
에 변화가 생겼다. 쳐들린 손이 주춤했음은 물론이다.
슉!
짧은 파공성.
그리고...
어느새 땅을 박차고 나온 북궁단야의 검은 하늘을 비스듬히 가르고 있었고
홍북은 두 팔을 치켜든 그대로 땅에 다리를 박은 듯 움직일 줄을 몰랐다.
반짝.
햇살이 그의 검을 타고 눈부신 빛을 사방에 흩뿌리자 검극에서 핏방울 한줄
기가 흘러내렸지만 그때까지 움직임을 보인 이는 아무도 없었다.
“아아...”
억눌린 신음을 터트리며 방교명이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긴장 뒤에
찾아온 허탈감이 다리의 힘을 모두 앗아간 탓이다.
팍!
영원히 대치하고 있을 것만 같았던 두 사람의 균형은 홍북의 목에서 터져
나온 피분수와 함께 깨졌다. 무슨 일이 벌어진지도 모른 상태로 당했는지
물음에의 황당함으로 얼룩진 표정을 거두지 못한 얼굴이었다.
“꿈이 많으면 밤이 긴 법이지...”
북궁단야의 독백과 함께 무너지듯 홍북의 몸이 쓰러졌다. 그 모습을 망연히
바라보던 북궁단야도 가쁜 숨과 함께 무릎을 꿇었다.
사실 이번 싸움은 도박이었다. 일검을 겨우 쳐낼 힘밖에 남아있지 않았기에
, 도약은커녕 한걸음도 뗄 기운이 없었던 그였기에 만약 상대가 원거리에서
공격했더라면 어찌해볼 도리가 없는 상태였다.
탈진한 적을 상대로 붙어서 싸울 아무런 이유가 없었던 홍북에게 동료애라
는 감상이 끼어든 것은 당사자에게 최고의 불운이요, 북궁단야로는 그야말
로 천고의 행운이라 아니할 수 없었다.
평정심을 상실한 홍북이 북궁단야에게 접근하지만 않았다면 지금 피를 흘리
고 있을 사람이 누구였을지는 명약관화한 일이었다.
기세를 끊은 북궁단야의 물음 또한 승패의 향방을 바꿔 놓는데 커다란 기여
를 했다. 아무리 거리를 허용했다고 해도 만약 홍북이 그의 절기인 현무갑(
玄武甲)을 재대로 펼쳐냈다면 싸움은 예측하지 못할 방향으로 흘렀을 것이다.
만약 장추삼이 보았더라면 투덜거렸을 순간.
싸움하는데 말은 무슨...
짝짝짝.
“멋진 쾌검이로군. 이건 도대체 손 쓸 방법이 없었어.”
박수를 치며 사내가 앞으로 나서자 북궁단야의 볼에 세 가닥의 선이 아로
새겨졌다.
‘문제는 이 자다!’
앞서의 네 노인도 강했지만 사내는 외면적인 강인함은 풍기지도 않으면서
장내에 그자의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이런 게 바로 존재감이라는 걸까.
노태상께 뭐라고 변명하지, 하며 머리를 긁던 사내가 북궁단야의 앞에 떡
버티고 섰다. 방금 전의 일검을 보았으면서도 걸음에 한점의 주저도 없다
함은 기력이 완전히 탈진되었다는 것을 파악했거나 절대적인 자신감을 가지
고 있다는 얘기다.
“일어날 수는 있겠나?”
“음?”
“내 비록 자네를 죽여야 하지만 무릎 꿇은 상대에게 손을 댈 수는 없다.
적당히 끝내지고 싶지만 자네가 진 핏값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아서 안타깝
구나.”
“동정이라는 거요?”
“남에게 동정을 베풀 만큼 가진 게 많은 사람으로 보이나?”
사내의 말에 북궁단야가 의외로운 눈을 던졌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건가, 이
자는.
“무인이라는 이름에 보내는 최소한의 예의라고 생각하라...”
‘이런...’
불행히도 상대는 진짜다. 그저 위압감만이 아닌 힘과 명예를 알고 있는 진
짜 무인. 문득 북궁단야는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최고의 상태에서 자웅을
결해 보고픈 상대를 찾기란 그리 쉽지 않은 법이다.
‘부질없는 생각이지.’
칼을 쥔 손에 불끈 힘을 불어 넣고 땅에 검극을 박아 넣으며 겨우 일어서는
북궁단야를 보던 사내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아까운 친구로군...’
조금이라도 더 쉬었다면 그나마의 가능성이 불어났을까, 물론 아니다. 사내
의 말대로 그는 동정 같은 사치스런 감정으로 일을 그르칠 만큼의 바보가
아니니까. 단지 상대가 일어설 수 있는 힘만 있으면 족했다. 만약 그 이상
의 힘을 축적한다면 주저 없이 손을 썼을 것이다.
한마디로 북궁단야가 이길 가능성은 전무 한 거다. 그것을 잘 알기에 일어
선 북궁단야고.
“북궁단야라 하오. 예를 취하지 못함을 양해하시오.”
뚫어지게 그를 보던 사내가 포권으로 화답을 했다. 이정도의 예의는 지켜주
고 싶은 상대였으니까.
“아, 자네가 북궁단야였나? 그렇군, 그랬었어...”
“날 아시오?”
사내의 입이 묘하게 뒤틀렸다. 뭐라고 말을 해야 할까하는 얼굴. 그러나 곧
그는 설명하기를 관두었다. 지금 무룡숙이나 그의 사제에 관한 언급을 해
봐야 쓸데없는 공염불이고 사내는 말을 즐기는 편이 아니었다.
이를 눈치 채고 북궁단야도 묻기를 포기했다. 삼성이라는 이름은 재법 알려
진 편이니 오가다 들었을 수도 있는 노릇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건암(乾巖)이라고 하네. 이하는 생략하기로 하지.”
“한 가지 물어 봐도 되겠소?”
“ ? ”
사내가 포권을 풀고 북궁단야의 전신을 훑어보았다. 시간을 벌려면 일어서
지 않았을 터인데.
“황야진수산은 어디다 쓰려고 했던 거요?”
“그건 말 할 수 없네.”
그렇군, 하고 고개를 끄덕인 북궁단야가 힘껏 칼을 쥐고 중단으로 검극을
이동시켰다. 지기 위해, 멋들어진 패배를 안겨주려 일어선 것이 아니다. 누
구나 웃겠지만 이기려고 일어났다.
한번의 공격을 막아낸다면 그에게도 기회가 있을 것이다. 어떤 식으로든 말
이다.
그러나...
꽝!
“크억!”
건암이 어깨를 한번 움직이자 북궁단야는 입에서 피화살을 쏟으며 나뒹굴어
야했다. 이건 방비고 뭐고 할 사이도 없었거니와 밀려온 잠력의 강대함은
막아낼 성질이 아니었다.
질끈 눈을 내리 감은 북궁단야의 앞에 수많은 영상이 스쳐 지나갔다. 이름
다운 누이, 아버지, 세가, 실회조에서의 나날, 장추삼과 하운과의 동행, 그
래도...
‘혜란, 미안하다. 이자는 마지막 기회조차 주지 않는군.’
치명상을 입은 몸으로 칼만은 놓치지 않는 북궁단야의 전의는 건암에게 신
선하게 다가왔지만 생각은 마음의 틀에 맡기기로 했다. 끝낼 싸움이라면 빠
를수록 좋다.
“잘 가게...”
“그건 곤란한걸?”
꽝!
건암의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또 한번의 폭음이 들렸다. 그러나 이번의 소
리는 아까와 달리 지면과 기운이 마찰이었기에 비산하는 흙먼지가 동반되었
다.
‘음?’
가까스로 눈을 뜬 북궁단야의 귀에 어떤 음성이 맺혔다. 평소에도 편안하고
부드러웠지만 이 순간만큼은 천상의 화음보다도 아름다운 목소리가.
“설마 내가 많이 늦은 거요?”
흐릿한 가운데 잡히는 영상 하나. 이토록 무지막지한 일검을 날린 사람이라
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선한 얼굴을 한 청년이 천천히 다가왔다. 봄바람처
럼 부드러운 미소를 한 아름 가지고.
“늦었지, 많이 늦었어... 후후후”
툴툴거리며 웃는 북궁단야의 입가에도 비슷한 내음의 바람이 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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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또 뭐야?’
갑작스런 청년의 출현에 놀란 건암을 싹 무시하고 북궁단야에게 다가간 청
년이 칼을 쥐지 않은 왼 손으로 그를 부축했다. 표정은 웃음이 가득했지만
눈에 담긴 그늘이 차가운 청년의 몸으로 와 닿았기에 북궁단야가 다시금 피
식거렸다.
“뭐야? 사람을 그런 눈으로 보다니. 쿠, 쿨럭. 내가 그리 추해 보인다는
건가... 커헉!”
“동경이나 보고 그런 말을 하시오, 북궁형같은 미남이 추하다느니 어쩌고
한다면 나 같은 사람은 대로를 걸어 다니지도 못하겠소이다.”
“쿨럭, 쿨럭... 그럼 다리 다친 제비새끼 대하듯 던지는 눈빛부터 치우라
고. 후후후... 쿨럭!”
“내 이런저런 사람들을 많이 봐왔지만 다친 후에 말이 많아지는 사람은 처
음 봤소이다. 하하하!”
한가로운 말을 나누며 걸음을 옮기는 둘의 모습을 보노라니 어쩐지 기가 막
혀서 어이 없는 눈으로 망연자실해 하던 건암이 곧 정신을 차렸다. 비록
그의 일격을 검 한번 휘두름으로 와해시킬 만한 무위를 가지고 있다고 하지
만 방금 전의 암경은 자신이 가진 힘의 극히 일부를 표출한 것뿐이다.
감히 누구 앞에서 이따위 망동(妄動)이라는 건가?
빠직!
그의 눈동자에서 소름끼치는 살광이 폭사되었다. 우연일까, 그 순간 청년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늘어트린 검을 귀찮은 파리 쫓듯 흩뿌린 것은.
그리고...
꽝!
제차 들려온 폭음. 이번에도 지면과 기운의 마찰이었는데 작은 웅덩이가 만
들어질 만큼 강한 충돌이었다.
‘이, 이런 이화접목(梨花?木)이라니!’
이번에는 건암의 표정도 딱딱하게 굳었다. 지금의 암경은 살의를 가득 담은
그의 마음과 조화되었기에 그 음험한 위력은 말로 설명할 성질이 아니었다
. 그런데 이런 회심의 일격을 뒤도 돌아보지 않고 흘려낸다?
소리의 크기와 패인 지면의 크기로 미루어 볼 때 얼마만한 위력의 기운이
발생했다가 소멸되었는지 짐작이 갔지만 이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정작 청년
의 반응은 지극히 침착했다.
“서두르지 마시오.”
“뭐?”
여전히 걸음을 옮기면서 뱉은 말이기에 얼핏 이해하지 못한 건암이 되물었다.
“서두르지 말라고 했소. 서두르지 말라고...”
너무도 침착하여 상대방으로 하여금 묘한 서늘함을 안겨주는 태도.
청년의 본래 심성을 아는 북궁단야이기에 새삼스러운 눈으로 그를 올려 보
았다. 언제나 훈풍 같은 미소를 입가에 머금고 상대방에 대한 배려를 잊지
않는 사람이었기에, 이유 없이 뺨을 맞더라도 그저 한번 웃어 버릴 마음을
가진 이었기에.
얼빵한 표정이었던 건암의 신색이 서리라도 내린 대지처럼 차갑게 식었다.
뭐 서두르지 말라고?
“감히 나더러 명령을 하는가? 감히 내게?”
엄청난 위압감. 단지 몇 마디 말로서 자신의 존엄을 충분히 살리는 그의 무
게감은 강호에서도 일절이라고 불릴 만 했다. 사나흘을 굻어 포악해질 대로
포악해진 호랑이라도 건암이 흘리는 기세를 대한다면 그 자리에 엎어져 죽
은 시늉을 할 판이었다.
그러나...
상대가 달랐다. 청년은 비단 사나흘을 굻지도 않았을 뿐더러 맹수의 발톱을
지니지도 않았지만 수정처럼 투명한 마음을 닦았기에 이런 압박에 흔들릴
여지가 없었다.
“명령으로 알아듣든, 부탁으로 알아듣든 그건 당신의 소관이니 내 알바가
아니요.”
“이, 이런 고얀...”
그 말에 대한 반응일까? 터덜터덜 걸음을 옮기던 청년이 고개를 돌려 건암
을 똑바로 응시했다.
번쩍!
태양이라도 한번에 녹여 비릴 듯한 눈빛. 순간적으로 건암은 어떤 감정을
품었다가 발작적으로 마음속의 이물질을 털어냈다.
‘이런, 내가...’
찰라 간이지만 그의 마음에 잠시 깃들었던 불청객의 정체는 다름 아닌...
‘내가 저런 애송이에게 공포심을 느끼다니...’
말없이 건암을 바라보던 청년은 곧 고개를 바로 하고 북궁단야를 나무 등걸
에 기대게 했다. 품속에서 요상약을 꺼내는 청년의 손길이 미약하게나마 떨
리는 것을 보고 한성이라는 별호처럼 차가운 마음의 청년도 뭔가 뭉클한 것
이 올라왔지만 그저 약을 건내는 손을 움켜쥐는 것으로 마음을 대신하기로
했다.
말이란 때로 감정을 훼손시키니까.
“화낼 줄도 알았소?”
“가끔은 미치기도 한다오.”
둘의 시선이 한곳에서 엉켰다가 파안대소와 함께 흩어졌다. 웃음 뒤에 찾아
온 격한 기침의 통증 때문에 괴로워하는 북궁단야의 등을 말없이 쓰다듬던
청년이 감자기 벌떡 일어섰다.
“이리 오십시오.”
그가 이렇게 감정적이었던 건 처음이다. 청년은 놀라움과 공포로 찌들어 목
석처럼 굳어있는 당문의 늙은 장로가 지금 더없이 미웠다. 동료가 흘린 피
의 원인을 알기에 방교명의 굼뜬 동작이 야속하기까지 했다.
말은 차분하게 나갔지만 그 속에 담긴 뜻을 헤아리고는 마법에서 풀린 사람
처럼 몸을 떨었다.
저리 유하던 청년에게 이런 면도 있었다니...
“어서요!”
추상같은 부름. 장내는 훈풍처럼 부드럽던 청년의 완벽한 통제 하에 놓여
있었다.
“가, 가네!”
인사조차 나누지 않고 서로는 어색하게 스쳤다. 방교명은 나무에 기대어 있
는 북궁단야를 돌보기 위해 몸을 숙였고 청년은 몸을 돌려 그때까지 국외자
처럼 서있던 건암을 마주했다.
“이제 대충 정리가 됐소.”
“그거 잘됐군.”
차분한 말에 역시 차분한 응대. 어느새 건암은 평정심을 되찾았다. 워낙 갑
작스러웠던 일이고 한번도 당해보지 못했던 상황이라 흔들렸던 마음이었지
만 이토록 빨리 마음을 안정시켰다 함은 그만큼의 수양이 있었다는 말이다.
청년 역시 사내의 변화를 바로 눈치 채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만류귀종이라는 말이 있다. 어떤 것이든 마지막에 다다르면 결국 하나로 귀
일된다는 말이니 도로서 자신을 다스리는 청년이나 도가 아닌 무엇 - 아무
리 봐도 도를 닦았다고 보긴 어려웠으니까 - 으로 자신을 다스리는 건암이
나 일종의 궁극을 본 경험이 있다는 얘기다.
그저 얼핏 엿본 정도라도 말이다.
“하운이라 하오.”
가벼운 포권. 사실 예를 나눌 마음이 아니었다. 경위야 모르지만 북궁단야
의 상세는 응급처지만으로 해결될 수준이 아니었고 시기를 놓치면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할지도 모른다.
내상이란 오상과는 그 성질을 달리 하기 때문이다.
“하운이라, 하운... 이것 참, 오늘이 날은 날이로군. 무림을 떨쳐 울리는
강호삼성 가운데 무려 둘이나 만나는 영광을 누리다니 말이야.”
유성(流星)이라고 했다. 별호처럼 부드럽고 유한 사내라고 들었다. 그런데
오늘 보니 이건 유성이 아니라 폭성(爆星)이 아닌가?
‘역시 소문이란 믿을 것이 못 되는군.’
빈틈없이 잡은 자세와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만 같은 분위기. 어느 결에 집
어넣었는지 검집에 들어가 있는 칼은 언제라도 찬연한 빛을 누리에 뿌릴 준
비가 되어 있어 보이니 어디를 봐서 유유히 흐르는 별이라는 건가.
세 개의 별 가운데 가장 특징이 없고, 그래서 주목받지 못했던 이름이었거늘.
건암은 직감적으로 느꼈다. 유성이 가진 무위는 북궁단야와 겨루어도 손색
이 없다는 사실을. 아니, 한성을 뛰어 넘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건암이라고 하네.”
포권을 푼 두 사내의 사이로 한줄기 바람이 지나갔다. 마른 낙엽 하나가 빙
글빙글 돌며 허공으로 오르는 순간 건암의 눈에 광채가 일렁였다.
꽝!
하운의 옆으로 길게 패인 자국이 생겨났다. 물론 칼은 검집을 벗어나 지면
으로 향해 있었고 그 끝에서 피어오르는 흙먼지만이 둘의 형태 없는 격돌을
증언해 주었다.
뚜벅.
하운이 한 걸음 나섰다. 평상시의 그로서는 좀처럼 보이지 않는 전진.
꽝!
또 다시 폭음이 들렸지만 이번에는 반대편으로 깊은 웅덩이를 만드는 것이
건암이 할 수 있는 전부였기에 그의 눈썹이 찡긋 올라갔다.
‘내 강기를 비껴내며 앞으로 나서기까지 한다?’
물론 기분 좋은 일이 아니다. 천고의 절기는 아니라지만 어기상인이라 이름
붙여진 자신의 경지는 능히 절대오존을 넘볼 수도 있는 단계라고 생각했었
으니까. 겨우 당문 앞에서 막 강호에 이름을 올린 애송이한테 꺾일 만큼 우
스운 것은 아닐 텐데.
뚜벅.
다시 한걸음을 나서자 또 한번의 폭음이 들렸지만 상황은 동일했다. 하운의
검은 어떠한 기운이라도 땅바닥에 팽개쳐버릴 것처럼 한 치의 흔들림 없이
지면을 바라보고 있었고 언제나 상대방에게 치명타를 주던 건암의 무형강
기는 불과 사척에도 미치지 못하는 쇠붙이에 번번이 가로 막혔다.
유령 같은 공격만으로는 어림도 없다는 말을 하려는 것일까. 무표정한 얼굴
로 걸음을 옮기는 하운의 모습은 흡사 몽유병에라도 걸린 사람처럼 무의미
해 보였지만 그래서 건암에게는 부담이 되었다.
뚜벅.
다시 한걸음을 내딛자 둘의 거리는 지척으로 좁혀졌다. 대체 무슨 심산으로
이렇게 접근법을 택하는지 알 도리가 없었지만 여기서 밀릴 수는 없었기에
사내가 처음으로 손을 들어 올렸다.
이건 자존심의 문제란 말이다.
손을 들어 올리자 주위의 공기가 무섭게 요동쳤고 내려져있던 하운의 검이
가슴까지 끌어 올려졌다.
“가라!”
꽝! 꽝!
한바탕 광풍이 건암을 진원지로 하여 몰아치듯 하운에게로 들이 닥쳤다. 일
개 바람일진대 검을 타고 흐르면 뭉텅뭉텅 땅을 베어 먹으니 어찌 바람이라
부를 수 있겠는가 만은 그렇다고 강기는 분명 아니었다.
두 가닥의 바람을 흘리기는 했지만 더 이상의 전진도 불가능했는지 걸음을
떼지 못하는 하운이었고 그에 고무된 건암의 손이 맹렬하게 움직였다.
파바바방!
여기서 끝장을 보자는 심산인지 그는 무섭게 하운을 다그쳤고 검을 든 청년
은 속수무책처럼 변변한 저항 한번 해보지 못하고 마냥 장풍을 감내하고만
있었다. 이건 도저히 싸움이라 부를 수 없으리만큼 일방적인 공세이자 수세
였다.
후두둑.
몇 장(掌)이나 날렸을까? 장내는 뿌연 흙먼지로 뒤덮여 한 치도 분간하기
어려웠다. 이정도로 몰아 붙였으면, 이정도의 공격이라면 항우장사라도 뼈
조차 추리기 어려운 형편이었기에 북궁단야를 돌보던 방교명의 눈이 휘둥그
레졌다.
참새도 죽을 때는 짹소리 한번 낸다고 하는데 어떤 식으로든 칼질 한번 해
보지 못하고 당하는 하운의 모습이 답답하고 안타까웠다. 흙먼지에 휩싸여
정황은 모르겠지만 아마도 적잖은 타격을 입었을 것이다.
휘이잉-
날리던 흙먼지가 천천히 땅바닥으로 가라앉아 서로의 몸을 보듬자 새벽안개
에 몸을 숨긴 사람들처럼 희미했던 두 사람의 형체가 낱낱이 드러났다.
그리고 어떤 신음성.
“이럴 수가... 내가 지금 본 것이 뭐란 말인가?”
망연자실 두 팔을 내리고 억눌린 듯한 탄식을 토하는 건암과 비껴 세운 검
으로 상단과 중단을 완벽하게 보호하고 있는 하운. 얼핏 보면 그의 칼이 조
금 높이 올라간 것 이외에는 변한 게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미동조차 없이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하운의 주위는 폭약이라도 터진 들판
마냥 철저히 파괴되어 본래의 형태를 상상하기 어려웠다.
무려 마흔 여덟 개의 장력. 그것도 봇물 터지듯 순식간에 몰아닥쳤기에 수
비식만으로 도저히 감당할 수 없어 보였지만 하운에게는 단 한 개의 장풍도
범접하지 못했다. 그저 스치지도 못했다는 말이다.
스륵.
어이가 없었는지 뒤로 신형을 이동시키면서도 연신 허탈한 탄식을 토해내던
건암이 검 사이로 여전한 눈빛을 보내던 하운에게 불쑥 물었다. 제아무리
천고의 수비식이라고 해도 이건 말이 안 된다.
“술법이라도 쓴 건가? 천하제일의 방어법이라도 뚫어버릴 공세였거늘...”
“맞소, 귀하의 방금 전 공격은 어떠한 방어라도 무력화 시켰겠지. 하지만
난 방어 같은 것을 하지 않았소.”
“뭐?”
검을 내리지 않고 여전히 반짝이는 눈으로 하운이 답했다.
“흘러가기 편하도록 바람의 길을 열어 주었소. 어차피 난 장애물에 불과하
니까 부딪치지 않고 지나가도록 말이오.”
“길을 열어 주었다... 아무리 그래도 무려 마흔 여덟 개의 장력이었는데...”
처음으로 하운이 웃었다. 그러나 미소의 의미가 불분명하여 어떤 의도로 지
은 것인지는 알 길이 없었다.
“귀하도 마흔 여덟 번 팔을 내치지 않았소?”
해서 나 역시 마흔 여덟 번의 검로를 밟았소...
188
말은 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하운은 그 어떤 미사여구보다 쉽고 명쾌하게
상황을 설명했던 거다.
마흔 여덟 번의 팔놀림.
마흔 여덟 개의 장력.
마흔 여덟 번의 팔놀림.
마흔 여덟 개의 검로(劍路).
같은 수가 네 번 겹쳐진 자리에 침착하면서도 굴강한 하운의 마음이 깃들었
다. 문자도 아니었고 음성도 아니었지만 그 어떤 의미보다도 뚜렷했기에 건
암에게 천둥소리처럼 전달되었는지도 몰랐다.
동등(同等)!
당신이나 나나 피와 살로 이루어진 사람이니 당신이 한 일을 내가 못할 이
유 따위는 없다!
반짝이는 하운의 눈을 보면서 건암은 생각을 고쳐야 했다. 늘 상대를 짓눌
렀고 그런 분위기가 연출되었기에 그의 반대편에 선 쪽은 제대로 엉켜보기
도 전에 위축되곤 했다. 기세가 꺾인 상대의 목을 취하는 것에 익숙했었고
그렇게 강호를 종횡했었다.
싸움은 반드시 무공의 공하로 가려지지 않으니까. 자신감을 가지고 대전에
임하는 사람과 싸워보기도 전에 얼어붙은 사람은 뻗는 일수 일각이 다른 법
이다.
늘 상대를 내려 보았고 상대는 알아서 몸을 굽혔었다.
그런데 이 청년은 달랐다. 처음부터 자신의 기운을 신경 쓰지도 않았고 자
신의 공간에서 오히려 장내를 주도했다. 하룻강아지 법 무서운 줄 모르는
오만이었다면 상관이 없었겠지만 청년에겐 그런 행동을 뒷받침할만한 무위
마저 가지고 있었다.
여러 단상이 어지러이 그의 머리를 헤집고 다녔지만 건암이 가진 가장 큰
의문은 따로 있었다.
마흔 여덟 개의 검로. 그런데...
“자네, 화산문하인가?”
“음?”
침착하던 하운의 눈망울이 무섭게 흔들렸다.
화산, 화산...
어찌 잊을까, 마음의 고향을.
어찌 부를까, 쳐다보기 조차 힘들만큼 위대한 이름을.
어찌 그릴까, 제 아무리 커다란 화폭으로도 담지 못할 천고의 대지를.
어찌 돌아갈까...
벅찬 감정이 밀려왔지만 곧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그는 화산의 일초 반식
도 펼치지 못하는 상태. 하운의 검식은 그저 상대의 부름에 따라 움직이는
형편이라 화산의 내음은 찾아보기 어려운데.
“무슨 말이오?”
당당히 그렇다고 말하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가 한심했지만 사문에서도 일단
은 숨기라고 했으니 별 도리가 없다. 그래도 왜 이런 질문이 가능했는지 알
고 싶다.
“아니지, 이건 말이 안돼...”
눈을 내리깔고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던 건암이 하운의 따가운 시선을 느
끼고 어깨를 한번 으쓱였다. 일단 말을 뱉었으니 뭐든 설명은 해줘야겠는데
당최 설명이 안 된다.
“별건 아니야. 아까 자네의 검로가 왠지 이십사수매화검법을 거푸 두 번
펼쳐낸 느낌이었거든. 하지만 매화검법 따위로 내 공세를 흘린다는 건 말이
되지 않고. 그런데 정말 흡사했어. 뭐가 뭔지 모르겠군.”
“이십사수매화검법...”
이런 곳에서 이 이름을 듣게 될 줄이야.
잘 알려진 대로 이십사수매화검법은 삼재검법과 함께 화산의 입문무공이라
부를만한 기초 검법이다. 일초에 스물 네 번의 변화를 준다고는 하나 화식
에 가까운 검로였고 대전시 상대방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기대하기도 어렵다.
그렇지만 화산의 복잡하고 심오한 검정(劍頂)에 다다르기 위해서는 필수불
가결의 경로였고, 그래서 화산에 적을 둔 이라면 모르는 이가 없는 검법이
었다. 하운도 잘 알고 있음은 물론이다.
그리고 십오 년 전부터 한번도 펼쳐본 적이 없는 무공이기도 하다.
무예의 수련과정상 그 다음 과정으로 넘어간다고 함은 이전 단계를 몸으로
나 마음으로 완전히 숙지한 경우이기에 그가 이십사수매화검법을 완전히 자
신의 것으로 만든 상태라고는 하지만 위 단계의 무공에 매달리다 보면 이전
의 무예는 펼쳐볼 겨를이 없어진다.
또한 실용적인 측면에서 거의 쓸모가 없는 검법일진대 무엇 하러 되새기겠
는가.
건암의 말인즉슨 설마하니 그런 기초검공에 자신이 막혔겠느냐는, 그저 평
범한 얘기였지만 하운으로는 손이 부들부들 떨릴 만큼의 충격적인 일이었다.
‘그래, 그런 거였나...’
머리로 이해한다고 다가 아니다. 몸으로 부딪쳐보면 알게 될 거다. 하긴,
피하고 싶어도 돌처럼 단단한 사내가 놔줄 리도 만무하지만.
아무려면 어때, 하고 생각을 정리한 건암이 신형을 바로 했다. 비록 목숨을
놓고 행하는 싸움이지만 천상이 무인들이라 무예에 대한 의문점이 피어나
자 그만 세상모르고 열중해했었다, 자존심도 어느 정도 개입되었지만.
“아무튼 대단한 무공이었고 뛰어난 검법이었네. 그렇다면 그에 합당한 대
우를 해줘야겠지.”
각오하라든가 이제부터가 진짜라는 말 따위를 건암은 뱉지 않았다. 만약 그
의 입에서 그런 진부하디 진부한 포고가 터졌다면 하운으로도 적이 실망했
을 터였다.
각진 턱처럼 다부져 보이는 사내의 궁극이 무형강기를 날리는 정도나 일수
에 마흔 여덟 개의 장력을 생성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합
당한 대우라는 말이 무겁게 와 닿았다.
칼을 고쳐 잡는 하운을 넌지시 바라보던 건암이 슬쩍 어깨를 움직였다.
스륵.
저면에 위치하던 그의 신형이 꺼지듯 사라졌다. 미동도 없이 눈동자만으로
상대의 움직임을 쫓는 하운에게 그의 움직임이 포착되었고 몸을 돌리려는
그에게 뭔가의 위험신호가 감지되었다.
무의식적으로 한발 나섬과 동시에 그가 머물던 공간이 폭발했다.
꽝!
‘뭐지?’
놀랄 사이도 없이 건암의 신형이 한 곳에 자리했으며 육안으로의 확인이 가
능할 무렵 또 다시 그의 신형은 사라졌다. 수반되는 위기감.
꽝!
가까스로 피했지만 하운으로는 어이가 없었다. 어떻게 공간 자체가 파열되
는가?
‘이런 무공이라니!’
듣도 보도 못했다. 통상적으로의 강기공이라면 기로서 상대방에게 타격을
주는 것을 원칙으로 하기에 목표한 대상을 격중시키지 못한다면 그대로 흘
러서 소멸되거나 주위의 물체와 마찰을 일으키게 된다.
그런데 이건 뭔가? 여긴 벌판이란 말이다. 마찰을 일으킬 사물이라고는 무
성하게 자란 잡초들이 전부다. 그럼 강기와 잡초가 부딪쳐서 폭음을 동반한
균열이 일어났다는 건가?
폭약이라도 매설되어 있었다면 몰라도 이건 말이 되지 않는다.
그의 눈동자에 맺힌 당황이 재미있었는지 바로 신형을 이동시키지 않고 하
운을 빤히 쳐다보던 건암이 문득 한마디 했다.
“이런, 벌써 이러면 곤란한 걸? 이제 시작이라네.”
하운의 검극이 이동하자 약속처럼 그의 신형이 흔들리고 앞으로 한발을 떼
자마자 다시 폭발이 일어났지만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가까스로 피해내는
것이 전부였다.
이제 시작이라면...
스륵.
건암이 하운의 오른편에서 신형을 드러냈다... 고 생각하는 순간 거의 동시
에 그의 왼편으로도 단단한 체구의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두 번의 위치 이동!
‘이런!’
꽝! 꽝!
순식간에 두 곳에서 폭음이 들리며 겨우 신형을 이동시킨 하운의 입가에 실
핏줄이 가느다랗게 흘러내렸다.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워낙 순식간에 펼쳐
진 공세라 완전히 피하지 못하고 그만 기혈이 놀랐다.
본래 강기공은 기를 이용하여 적의 외면만이 아니라 내면을 건드리는 공격
이기에 직접적으로 격중되지 않더라도 단지 스친 것만으로 심대한 타격을
입을 수 있다.
외상이란게 눈으로는 심각해 보이지만 간단한 금창약으로 처치가 가능한 반
면 내상을 입은 경우는 문제가 달라진다. 인체의 내부를 돌아다니는 기혈은
작은 충격에도 놀라기 쉽고 그것은 사람의 신진대사를 급격히 위축시키기
때문이다.
제아무리 뛰어난 무공을 지녔더라도, 심후한 내외공을 겸비했더라도 기본적
으로 인간에서 벗어나지 못하기에 신진대사를 관장하는 기혈에 타격을 받으
면 강호를 내집 앞마당처럼 종횡하는 고수라도 견디기 어렵다.
이것이 강기공의 무서움이다.
시작이라고 했다. 이번엔 두 번의 공격이 연속되었지만 앞으로 세 번, 네
번의 공세가 동시다발적으로 터져 나올지도 모른다.
아직도 건암의 표정에서 최선이라는 단어를 찾아보기 어려웠으니까.
‘이렇게 되면 전진 밖에 없나?’
형체를 모르는 공격이지만 결국 건암에게서 나오는 강기공이다. 그렇다면
근원지를 공격하는 것이 빠를지도 모른다. 비록 그의 움직임이 물처럼 유연
하다고는 해도, 눈으로 확인하기 어려울 만큼 빠르다고는 해도 하운의 감각
을 속일 정도는 아니었으니까.
하운의 검이 미묘한 호선을 그리며 허공에서 궤적을 그렸다. 쾌검을 구사하
지 않는 그로서 매우 이래적일만큼 빠른 칼놀림이라 그의 유연한 컴로를 기
억하고 있던 건암에게 의외로운 공세였다.
꽝!
이에는 이의 공격인가?
그의 칼은 지면을 스치듯 지나쳤고 뒤따르는 폭음과 함께 미친 듯한 광풍이
불어 닥쳤다. 잡초와 흙먼지가 자욱하게 날리고 앞뒤를 분간하기 어려운
상태에서 무언가가 빠르게 움직였다.
물론 하운이었다.
그의 움직임은 자신이 불러온 여파를 충분히 감안한 상태에서 행해진 돌격
이라 폭음과 기타의 부산물들 철저히 무시했다. 계산에 의한 상황이니 놀라
고 말고 할 일이 없음은 당연하지 않겠는가.
파박!
뚜이어 들어가는 그의 눈에 검기의 충격을 피하는 건암의 모습이 보였다.
돌발적인 충격이라 제아무리 뛰어난 신법을 가진 이라고 해도 완전히 피해
내지는 못했을 터.
슉!
하운의 검이 횡으로 기다란 선을 그려내자 그의 전방은 사 척의 칼 아래에
완전히 베어졌다. 무척이나 강력한 일검이었는데도 천성은 어찌하지 못하는
지 선의 유려함은 기녀의 춤사위만큼이나 아름다웠다.
공간까지 잘라버릴 정도로 매서우면서도 빠른, 그렇지만 승상집의 지붕 선
처럼 완만한 곡선을 자랑하는 아름다운 궤적을 피해갈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창졸간에 터진 일검이기에 위력의 체감도는 말로 설명할 필요도 없
을 터.
‘잡았다!’
그러나...
꽝!
공간을 베었을지언정 하운의 칼은 목적물의 근처에 도달하지 못했다. 뒤따
르는 폭음은 건암의 신형이 완전한 방향전환을 이루었다는 반증이리라.
회심의 일격은 보기 좋게 실패했다. 이 두 번의 칼질로 승부를 결정짓겠다
는 망상 따윈 하지 않았지만 적어도 상대의 발 정도는 묶어둘 만큼의 타격
은 기대했었다. 하지만 건암은 처음처럼, 아니 처음보다도 더 자연스러운
움직임으로 하운을 압박해왔다.
꽝! 꽝!
여기 저기 들려오는 폭음. 대상은 간곳이 없고 폭발의 원인조차 파악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하운의 발은 기묘한 각도로 교차되며 어떻게든 치명적인
충격만은 피해내고 있었지만 시시각각 닥쳐오는 강기의 그물은 그의 발목을
죄어 왔다.
피하기만 한다면 절대로 이길 수가 없다는 걸 잘 알지만 어떻게 해볼 도리
가 없다. 그렇지만 이대로 낙담할 하운은 아니었다.
어려울수록 돌아가라고 했다. 그는 지금 현상에 쫓겨 본질을 보지 못하는
우를 범하고 있는지도. 절대로 풀리지 않을 것만 같았던 매듭도 근원을 알
고 보면 허탈할 정도로 쉬운 법이다.
‘자, 하운 넌 지금 무엇을 하고 있나!’
하운의 눈이 지그시 감겼다. 어차피 밀려오는 강기폭은 눈으로 확인해서 어
쩌고 할 부분이 아니고 그의 발은 본능이 시키는 대로 움직이고 있을 뿐이
다. 지금 하운에게 육안은 그저 거추장스러운 방해물에 불과하다.
차라리 시야를 차단시키는 편이 나을지도.
‘이제 보자.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번쩍!
감았던 그이 눈이 다시 한번 터진 폭음과 함께 만개했다.
‘네가 무엇을 봐야 하는지!’
189
꽈앙~.
눈꺼풀이 열림과 동시에 또 한번의 폭음이 들렸고 자잘한 흙먼지가 하운의
시야를 가렸다. 바람 한줌에도 지장을 받는 연약하디 연약한 눈동자이기에
자연 눈꼬리가 날카로워졌지만 그의 시선은 흔들리지 않았다.
딱히 뭔가를 기대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이대로의 전개로는 승산이 없고
해서 어떻게든 계기를 만들어 보려는 시도였다.
그런데...
스륵.
꽝!
습관적으로 공세를 피하던 하운의 눈에 문득 우스운 영상이 잡혔다. 그건
실제적인 것이 아니라 지금 벌어지고 있는 상황의 연장선이 만들어낸 환각
과도 같은 허상이었지만 아무튼 재미있는 상상이었다.
‘가만... 보니...’
검 한번 놀릴 사이도 없을 정도로 비쾌한 움직임을 보이는 건암의 모습인데
약간 비틀어 생각해보니 그저 바쁘게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전령(傳令)과도
같지 않은가.
웃음이 나올 법한 공상일진대 하운의 눈은 왠지 모를 긴장감으로 촉촉이 젖
었다.
‘수령인이 없는 명령서를 든 전령사라...’
아니, 그게 아닐지도 모른다. 만약 건암이 전령이라면 그가 전해야할 명령
은 다름 아닌 패배일 테고 그렇다면 수령인은 명령을 거부하는 하운일 것이
다.
물론 명령서는 폭음을 동반한 공격일 것이고.
‘가만?’
명령서는 하나다. 한 가지 명령을 한번에 몇 개씩이나 보내는 사람은 없다.
그렇기에 전령으로는 한번의 전달만으로 임무를 완수하게 된다.
그런데 건암은?
그저 하운의 상상일 뿐 진짜 전령이 아니다. 물론 명령서도 한 개일 리 없
고 한 개일 필요도 없다.
바꿔 말한다면 한번에 두 세 개의 명령서, 즉 공격을 하는 편이 이롭다. 한
번에 여러 개의 강기를 날린다면 그만큼의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단 말이다.
그런 평범한 진리를 모를 만큼 바보 같은 상대로 보이지도 않는다.
쉽게 말해 한번의 움직임으로 단 한번의 공격만이 가능하다는 얘기다.
왜일까?
하운의 눈빛이 더욱더 촉촉하게 젖어들고 그의 두뇌는 마치 흥분한 심장처
럼 불컥불컥 뛰었다. 이것이 열쇠다. 미진하지만 이것만이 정체를 알 수 없
는 공격의 비밀을 풀어줄 유일한 단서다.
스륵.
또다시 폭음이 터지고 관습화된 행위처럼 하운이 빠르게 피했다. 그에 따라
건암의 신형도 옆으로 한걸음 물러섰다. 물론 폭음이 있었고 다시 하운이
피하고 건암이 사라졌다.
늘 그렇지만 단 한걸음으로.
‘단 한걸음?’
꽝!
문득 든 생각에 놀랐지만 일단 신형을 이동시키며 하운은 헝클어진 머릿속
의 상념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사람은 생각의 영역을 확대하는 동물이기도 하지만 생각의 영역 속에 종종
자신을 가두어 버리곤 한다. 어떤 현상에 관해 ‘이럴 것이다’라고 정의
내려 버리면 좀처럼 그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일반화된 공통사고의 함정.
‘정말로 저 것이 가능한가?’
고착되어버린 틀 속으로의 안주.
‘불가능하다고 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단지 그걸 한 이가 없었기에 생각
지도 못했던 거다.’
그곳에서 벗어나보려는 절규의 메아리.
‘살아가는 주체는 자신일진대 난 왜 남이 만들어놓은 가위로 세상을 재단
하려고 드는가!’
하운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맺혔다. 도를 닦네, 삶을 조명하네 했지만 그
는 아직도 선대의 굴레를 벗어던지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 자책이나 곱씹을 겨를 따윈 없다. 하운의 눈은 빠르게 냉정을
찾았고 그의 시선은 다음번의 폭발을 기다렸다.
스륵.
건암이 움직였다.
스륵.
하운이 움직였다.
꽝!
폭발이 일었다, 하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하운은 아까의 그가 아니었다.
‘역시...’
그가 혀를 조금 빼내 잘근 물었다. 어이가 없고, 탄식이 다 나오지만 건암
의 공격은 그의 생각대로 일반적인 강기공과는 그 궤를 전혀 달리하는 것이
었기에 하운의 주먹에 불끈 힘이 들어갔다.
그는 거짓말과도 같은 사실을 목격했던 것이다. 자신이 머물렀던 자리에서
갑자기 솟아오르는 강기의 분수를.
통상적으로 모든 강기공은 손이나 여타의 움직임에 의해서 상대방에게 전달
된다, 물론 시야로 확인 가능한 공간에서. 흔히들 그래왔고 그렇게 생각을
했다. 전설상의 어기상인이라도 그 공식에서 벗어나지는 않는다.
그런데... 지면을 통해 공세가 밀려왔다. 물론 건암은 두 다리로 꼿꼿이 서
있었으며 땅을 손으로 만진 적조차 없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다.
한 걸음에 한번의 공격... 그건 발로 강기를 밀어냈다는 거다!
그랬기에 손을 사용한 장법보다 빠르고 예측하기 어려웠던 거다. 장법에 절
대적인 자신이 있는 고수라고 해도 제자리에 두 다리 떡하니 붙이고 팔만
놀리는 경우는 거의 없다.
고수건 뭐건 몸을 강철로 두르지 않은 다음에야, 꿈에서나 가능하다는 금강
불괴를 이루지 않았다면 상대의 공세를 피해내야 할 테니까. 그리고 장법이
라고 손으로 모든 걸 해결하는 공격이 아니니까.
건암은 이 두 가지를 한번의 움직임으로 단일화한 것이다. 비록 한걸음이지
만 위치를 바꿈으로서 상대의 공격을 사전에 피해내고 그와 동시에 중심축
이 되는 발을 구름으로서 강기를 밀어내었던 거다.
이른바... 족강기(足?氣)라고 할까?
지면을 타고 흘러왔기에 잡아내기 어려웠고 밑에서부터의 공세이기에 방비
조차 어려운, 그저 피하기에 급급한 공격. 무림사에 처음으로 나타난 공격
법이라 눈치 채지 못한 건 어쩌면 당연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모든 게 끝난 건 아니다. 아니, 이제부터가 시작이다. 비밀을 풀
었지만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다. 그저 건암이라는 무인의 실체에 대해 조
금이나마 엿본 게 다일까?
검을 들어 흘리기도 어렵다. 이화접목과도 같은 수법을 생각해 보았지만 건
암의 공격은 특이함도 특이함이려니와 그 강함은 그저 흘려보낼 만큼 편안
한 성질이 아니었다.
솔직히...
피하기도 바쁘다!
기초부터 확실했기에 망정이지 제대로 된 몸 가눔이 아니었다면 벌써 바닥
에 누었을 판이다. 그렇지만 이제 서서히 피곤이 몰려온다. 정순한 내공과
최소의 몸놀림으로 버티고는 있지만 피와 살로 이루어진 사람인 이상 체력
에는 한계가 있고 이제 그것도 바닥이 보인다.
“후욱~”
처음으로 하운의 입에서 지친 한숨이 터져 나왔다. 가까스로 억누르고 있었
는데 강기공의 비밀을 확인하자 급작스레 긴장이 풀어지며 저도 모르게 근
육이 이완된 모양이다.
그러나 이것은 실수였다, 그것도 치명적인.
팟!
다소 여유롭던 건암의 눈에 어떤 독기가 서리며 그의 움직임에 속도가 배가
되었다. 물론 수반되는 강기의 파고는 더욱더 매섭게 하운을 몰아쳤고 힘없
이 검을 늘어트린 청년검수의 이맛살엔 깊게 내 천(川)자가 파였다.
꽝! 꽝! 꽝!
끝장을 보려는 사람처럼 바쁘게 움직이는 건암의 보보마다 여기저기서 강기
의 화산이 터져 올라왔고 하운은 속절없이 피하기에만 급급했다.
원래 싸움도 기세가 승부의 절반을 차지한다. 승기를 잡았을 때 마무리 짓
지 못한다면 그 여파는 고스란히 자신에게 돌아온다. 몰아친 뒤에 발생하는
힘의 공백과 꺾인 기세는 그야말로 치명적인 독일 테니.
마냥 피하던 하운이었는데 어느 순간 발목에 힘이 빠지며 솟아오르는 강기
의 기둥을 미쳐 피해내지 못했다.
쿵!
‘헉!’
정타는 아니었지만 허벅지를 스치고 간 강기의 무게는 참고 감당할 만한 수
준과는 거리가 있었기에 하마터면 주저앉을 뻔했으나 이를 악물고 지친 다
리를 움직이는 하운의 모습은 처절 그 자체였다.
자연 그의 사고는 싸움을 썩이나 잘하던 동료의 입장으로 옮겨갔지만 그는
북궁단야의 패기(覇氣)나 장추삼의 단순 무식함을 닮기엔 무리가 있었다.
그는 유성 하운이었으니까.
꽈광!
연속된 두 번의 폭음이 마치 하나처럼 합쳐진 건 그 빠름을 반증하는 것일
테고 당연히 하운에게 작으나마 타격을 안겨주었다. 천근만근처럼 무거워지
는 다리와 가빠오는 숨으로 여기까지 버틴 것이 대단할 지경이었으니까.
전신이 쑤시고 아파왔다. 피한다고 피했는데 슬쩍슬쩍 비껴간 강기들은 그
저 스쳐 지나간 것이 아닌가보다.
바람 선선히 부는 그늘에 앉아 두 다리 쭉 뻗고 쉬고 싶은데...
불가능한 일만은 아니다. 눈앞의 사내만 쓰러트린다면 편안한 휴식뿐 아니
라 시원한 냉차로 터질 듯 타오르는 목을 축일 수도 있을 거다, 낮잠은 물
론이고!
그런데 어떻게 쓰러트린단 말인가?
처지는 어깨를 가까스로 추스르며 하운이 쳐져있던 검을 바로 세웠다.
‘자자... 생각을 하자, 생각을...’
그때!
썩을, 뭔 놈의 생각은 생각이야!
소리가 들려온 건 아니다. 그건 말이 되지 않으니.
이것 역시 하운이 만들어낸 상상 가운데 하나였지만 아까 ‘전령상상(傳令
想像)’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실체감을 가졌기에 현실처럼 다가왔다.
‘장형?’
힘들지만 웃음이 나온다. 이 친구는 어떻게 목소리 하나 만으로, 아니 상상
하는 것만으로 타인에게 즐거움을 줄 수 있을까?
‘그래, 생각하지 말고 뭘 해야 하오?’
뭘 하긴, 싸워야지!
그걸 누가 모르는가. 솔직히 말해 피하는 것도 싸움의 일환이다. 일보전진
을 위한 이보 후퇴는 괜히 있는 말이 아니다. 그런데 저 유쾌한 동료에게는
별로 좋아 보이지 않는 모양이다.
허탈한 하운의 심정으로 그려낸 주관적 장추삼이 뚱한 얼굴로 그를 내려다
보다 불쑥 한마디 던졌다. 그것 역시 주관적인 사고가 만들어낸 상상이었는
지 모르지만 아마 지금의 하운을 대변하는 가장 효과적인 말이었을 것이다.
피하라고.
‘음?’
지금 피하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뭘 더 피하라는...
제대로, 딱 한번만 피하라고.
말뜻은 이해한다. 하지만 방법이 없다. 그의 몸놀림으로는 겨우 피하는 것
이 다란 말이다.
말로야 뭘 못하겠는가.
장추삼이 씨익 웃었다. 그나마 잘생긴 하얀 이빨까지 드러내고. 그래서 하
운도 마주 웃어 주었다. 좋아서가 아니라 그저 허탈해서. 그래도 장추삼은
뭐가 우스운지 계속 웃었다.
그를 따라 웃던 하운의 얼굴이 갑자기 굳었다. 그와 동시에 풀어져있던 그
의 두 다리에 힘찬 기운이 전달되었다.
“으음...”
망가진 몸으로 운기조식에 열중하던 북궁단야가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
다. 아직 몸을 움직일 계제는 아니었지만 나몰라라 하고 쉴만한 상황이 아
니었기에 도움은 못 될지언정 깨어난 것이다.
그렇지만 싸움은 매우 안 좋은 모양새로 전개되고 있었다. 마구 밀리는 하
운의 주위로 폭죽처럼 터지는 강기의 소용돌이는 그가 보아온 어떠한 공격
보다도 무서운 형태였다.
힘으로 부딪치는 그의 성격상 한번 해볼만한 것이기도 했지만 하운은 어디
까지나 하운이기에 북궁단야와는 검의 쓰임새가 판이하기에 그가 뭐라고 할
성질도 아니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 하운의 움직임이 딱 멈췄다. 마치 실 끊긴 인형과도 같았
기에 북궁단야는 그만 땅을 손으로 짚으며 일어서려했다.
파박!
땅을 크게 박차는 소리.
그리고 하운의 신형이 마치 거짓말처럼 분열했다.
“산무영?”
190
북궁단야의 감탄성처럼 하운은 복제되었다. 완벽하게 둘의 ‘그’ 로. 분열
되었다 싶었는데 둘 가운데 하나는 폭음과 함께 소멸되었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팍!
산무영이라는 소리에 눌려 들리지 않은 소음이 또 하나 있었고 이번에는
관전자가 뭐라 할 사이도 없이 두 번째이자 본래의 하운은 정면으로 육박
해 들어갔다.
미처 건암이 신형을 움직일 사이도 없이.
이정도의 속도를 갖춘 보법이라면 무림에 단 하나가 존재한다. 북궁단야가
자주 보았고, 그래서 친근했지만 앞서의 산무영처럼 이 순간에 매우 이질적
으로 다가오는 이름이기에 그의 얼굴엔 당혹감이 서렸다.
추뢰보!
산무영이 보조적 수비식이라면 추뢰보는 장추삼이라는 인간을 가장 잘 표현
하는 최고의 직진돌격보법이다. 순간의 상황판단으로 적의 빈틈을 노려 상
대와 거리를 좁히는, 그야말로 최고의 보법.
허나 지금의 주제는 하운이다. 아무리 그가 장추삼과 오래 지냈다고 해도,
근 한 달여를 동굴에서 같이 보냈다고 하더라도 눈썰미나 들은 풍월만으로
펼쳐내기 어려운 고도의 몸놀림이다.
만약 자신에게도 저러한 몸가눔이 가능했더라면, 부러움 반 감탄 반으로 늘
심통 맞은 동료가 남긴 보법의 자취를 그저 눈으로 쫓던 북궁단야였다.
그리고 또 한명의 동료가 그걸 펼치고 있다. 그와 같이 검수로의 길을 걷는
자의 발에서 추뢰보가 구현되고 있다.
‘하형, 당신은...’
돌진하는 상태 그대로 가만히 내렸던 칼을 비스듬히 그으며 건암의 옆을 스
쳐지나간 하운의 동공에는 그를 곤혹스럽게 만들었던 적의 신형이 맺혀있지
않았다. 비산하는 흙먼지도, 주위의 경물도 하운은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흐리멍텅한 가운데 가끔씩 예광(銳光)이 발산되어 마치 넋 나간 사람의 그
것과도 같은 눈으로 대체 뭘 담고 있는 걸까?
서걱!
무언가 베어지는 소리가 들리고 건암의 옆을 지나친 하운이 유려하게 몸을
세우며 빙글 몸을 돌려 돌처럼 단단한 사내와 마주섰다.
휘이잉~
짧게 몰아치는 돌개바람의 가운데에서 침묵으로 서로를 말없이 응시하던 둘
의 정적은 건암의 오른쪽 허벅지에서 솟구쳐 오르는 피분수가 깨트렸다.
푸슉!
“이, 이익!”
고통으로 내지른 신음성이 아니다. 하운의 단 두 번의 움직임에 의해 너무
도 간단히 파훼당한 매룡보(魅龍步)때문도 아니다. 그의 마음을 후벼 파는
건, 검을 쓴다는 상대의 발걸음에 의해 그의 보법이 부정되었다는 거다.
물론 검사라고 해서 몸놀림이 나쁘라는 법은 없다. 아니 검이건 창이건 도
건 간에 기본적으로 보법의 뒷받침이 없으면 무기의 효용성을 충분히 살리
지도 못할뿐더러 변변히 휘둘러보지도 못하고 패배하게 된다.
무기를 들었다는 것은 어느 정도의 상승요인으로 작용하는 정도지, 좋은 무
기를 들었다고 꼭 싸움을 이기는 것도 아니요 무기착용자라 해서 적수공권
의 무인을 반드시 꺾는다는 보장 같은 건 없다.
어디까지나 무기는 보조수단이란 말이다.
하지만 병기를 들고 싸운다고 함은 그 무기를 다루기 위해 일정한 시간을
투자해야만 한다. 기본적으로 무기사용자는 무기를 위한 보법과 심법 위주
로 무학의 방향을 잡는 게 당연하다는 거다.
그런데...
무기 가운데에서도 다루기 가장 어렵다는, 만병지왕(萬兵之王)이라는 소리
를 듣는 검을 사용하는 자에게 졌다. 만약 그가 검을 허투루 배웠다면 그나
마 위안이겠지만 상대는 그가 아는 어떤 검수보다도 훌륭하게 검을 다루는
자다.
이정도로 검을 알고 이해했을 정도라면 검과 함께 지낸 시간이 평생의 절반
은 넘을 터였다. 그만큼의 각고가 없다면 결코 이루기 어려운 경지의 선을
그려내는 자란 말이다.
그런데... 졌다!
검법이 아닌 보법으로!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건 억울하고 어이가 없다. 그가 창조해낸 건 아니지만
매룡보는 이렇게 깨져서는 안 되는 무학이다.
일보공수겸전(一步攻守兼全)!
단 한걸음을 옮겨 공격과 수비를 같이 한다는 뜻이니 이대로라면 무인이란
이름을 걸고 살아가는 이라면 누구나 얻고 싶은 초식이자 경지가 아닌가?
그것을 가장 효율적으로 구현해낸 것이 바로 매룡보였다. 비록 천하최강의
초식이라고 자부하지는 않으나 이렇게 허무한 모양새로 사그러들만한 무학
이 아니란 말이다!
상대는 단 두 번 움직였다. 한번 피하고 한번 쇄도했다.
그것으로... 매룡보는 산산조각이 났다.
물론 놀라울 만큼 유연하고 빠른 움직임이었다. 그래서, 그래서 패배를 받
아들여야 할까? 혹시 자신은 매룡보를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해서 정확한 구
현을 못하는 건 아닐까?
그가 분노와 스스로에의 자책에 몸을 떨고 있을 때 하운은 여전히 풀린 동
공으로 그가 깨트린 상대를, 아니 전방을 응시하고 있었다.
‘하형, 대체... 뭘 어떻게 하려고 그리 정신을 놓고 있는 거요...’
북궁단야의 절규는 그의 목 밑에서 맴돌았을 뿐 입을 타고 흘러나가지 못했
다. 왠지는 모르지만 지금의 하운을 건드려서는 안 될 것만 같은 기분이 들
었기 때문이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건암이 허벅지에 흐르는 피를 방치하듯 내버려두고 양
손을 가슴께로 들어올리며 천천히 머리를 들어올렸다. 한번의 격돌에서 패
퇴했지만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순간의 포착은 상대에게 밀렸지만 하운도 그에게 치명상을 입힐 만큼의 기
회를 잡지는 못했다.
‘끝낼 시간이 조금 늦춰진 것뿐이지...’
휘르릉!
그가 공력을 끌어 모으자 펄럭이는 옷자락과 함께 허벅지의 상처는 더 벌어
졌고 그곳을 타고 흐르는 피로 건암의 바지는 빨갛게 물들었다. 눈에서 발
산되는 형형한 광채까지 더해지자 그의 모습은 그야말로 야차처럼 보였다.
하지만 하운은 차분했다. 뭘 보고 있어야 놀라든 말든 할 거 아닌가?
단 한 가지 변화라면 건암이 기를 모으자 무심히 쳐져있던 오른손을 들어
명치에 한번 가져갔다는 것이 전부였다.
그건 검례(劍禮)였다. 검을 사용하는 무인이 보내는 최고의 예의.
그럼 하운은 지금 건암에게 어떤 예의를 표하는 걸까? 아니, 예의를 보내는
대상이 건암인걸까?
아무도 모른다. 그걸 아는 이는 오로지 하운 혼자고, 그의 입에서 어떠한
말을 기대하는 것은 어려웠으니까.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던 건암이 손을 한번 바닥으로 힘차게 털어내었다.
꽈릉!
굉음과 함께 그의 손이 향했던 지면에는 작은 웅덩이가 생겨났다. 앞으로의
공세가 얼마나 흉험함을 미리 예고하는 모양새 같기도 했고 이제 결판을
짓자는 신호탄과도 같았다.
명치에 머물던 하운의 손이 천천히 내려갈 때 문득 건암이 고개를 옆으로
꺾었다. 몰랐는데 상대의 눈은 정상이 아니지 않은가. 타격을 받아 정신이
멍해진 거라면 승부는 불을 보듯 뻔하다.
문제는 그의 허벅지를 벤 상대의 기세인데, 그만큼의 충격을 받았다면 당연
히 약해져야만 하거늘 처음의 기세 그대로 조금의 변화조차 없다는 거다.
그럼 순간적으로 돌기라도 했다는 건가?
그럼 가끔씩 비치는 예광은? 단지 미친 자의 광기로 치부하기에 너무도 날
카로운 빛깔은 어떻게 말해야 할까?
“지금 뭘 보는 건가?”
멍하니 전방을 바라보던 하운의 입술이 아주 조금 열렸다. 그리고 한숨처럼
작은 목소리가 건암에게 전달되었다.
“어둠...”
“뭐?”
“어둠과 달...”
하운의 웅얼거림은 알아듣기 힘들만큼 작았지만 건암은 가까스로 알아들었
다. 그렇지만 당최 말뜻이 이해가 안 되어 뭐라고 하려는데 다시 한번의 속
삭임이 들려왔다.
마치 꿈결처럼.
“어둠과 달과 죽음의 춤(暗月光殺舞)...”
“뭐라고!”
그의 말은 건암을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지만 뒤따르는 하운의 말에 건암의
표정은 다시 굳어졌다.
“미련이지만 아직도 살아볼만 하니까...”
쿠쿵!
뭔가에 홀려버린 사람처럼 정신없이 주절거리는 하운의 말은 흘려버려도 괜
찮을 만큼 관념적인 성질의 것이었지만 묘하게 건암의 마음을 두드렸다. 부
드럽지만 단호한 의미였기에 뒷말은 어렵잖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제야 건암은 알았다. 지금 하운이 상대는 건 자신이 아님을. 무언가 다다
르기 위해 치열한 싸움을 하고 있다는 것을. 또한 그로서도 이대로 꺾일 수
는 없다.
여기서 멈추면 그의 인생은 아무것도 남길 것이 없기에.
하고 싶은 일이 아니라 해야 할 일이 있기에.
언젠가는 하고 싶은 일을 해 보기 위해.
살아볼만하다는 걸 느껴보고 싶기에.
“오라!”
막혀 있던 것이 뻥 뚫린 느낌이다. 이제 제대로 어우러져 볼 수 있을 것 같
다.
반드시...
‘반드시 이긴다!’
건암에게도 하운에게도 이번의 충돌은 결정적인 무엇을 상대에게 안겨 줄
것이다. 그것이 패배와 승리라는, 아니 삶과 죽음이라는 양 갈래의 선택이
라도 마주한 이상 피해가지 못한다.
그래서 건암은 편안해졌다.
이기면 사는 거고, 지면 죽으리라. 그게 뭐 대수겠는가. 어차피 무인인 것
을. 의사전달수단이 오로지 힘이고 그것이 무사의 숙명인 것을.
그냥 마음껏 싸우는 거다. 결과나 미래 따위는 잠시 잊자!
멍청하게 서 있던 하운도 그가 뿜어내는 순수한 투기에 반응하는 걸까?
쿠쿠쿠.
급작스런 기세의 상승. 온순하고 유연한 무공을 장기로 하던 하운으로는 보
기 드믄 패도였다. 과연 저 사람이 유성이 맞을까 싶을 만큼 강인한 기도를
뚝뚝 흘리며 칼을 고쳐 잡는 하운의 모습은 충분히 가공스러웠다.
하지만 건암은 개의치 않았다. 그가 유성이든, 한성이든, 전설의 오존이라
고 해도 더 이상 거리낄 것이 없었다.
그저 최고의 자신을 입증하면 된다!
스르륵.
하운의 검이 미묘하게 움직임을 보이자 건암도 옆으로 한걸음을 옮겼다...
고 생각되는 순간 폭음이 들리며 패기를 뿌리는 유성의 칼날에 얇은 서리가
걸렸다.
“검강!”
북궁단야는 자신의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 차이가 없었던 둘이었다. 무학적인 면이나 초식적으로의
비교로도 두 검수의 차이는 백지장 하나가 드나들 정도였다. 솔직히 말해,
무공 외적인 면으로 본다면 하운과의 생사결을 가정할 때 우위에 서있다고
자부했던 그다.
대전시의 기세와 은연중에 상대를 압박하는 분위기, 그리고 누구보다 단호
한 결정력을 고려한다면 아무래도 승산은 자신 쪽으로 기운다고 생각했고,
또한 그들을 아는 사람이라면 이구동성으로 하운보다는 북궁단야의 손을 들
어 주었을 터였다.
검강이란다.
비록 한 치도 안 되지만 동료의 애검을 수놓는 새벽 서리 같은 얇은 막은
분명 검강임에 틀림없다. 얼마 전까지도 검풍과 검기를 섞어서 쓰던 서로의
차이가 불과 한달 남짓 지나서 이렇게 벌어지다니.
검강... 검을 다루는 이라면 누구나 이뤄 보려는 지고지순한 경지. 신검합
일의 경지까지 검을 닦은 고수가 체내의 기운을 응축시킨 강기막을 검에 두
른다는 의미다. 말로는 간단하지만 그와 같은 깊이를 이룬 검수가 몇이나
있을까?
검으로 바람을 일으킨다는 검풍도 어려운데 검기를 지나 검강을 이루었다
함은 더 이상 검에 구애받을 필요도 없는 고수의 반열에 올랐다는 뜻이다.
한마디로 검기와 검강은 하늘과 땅 차이의 거리가 있는 경지라 할 수 있다.
‘대체, 대체 지난 한달이 어떤 의미로 다가왔기에...’
그러나 검강을 이룬 하운은 그저 무심하게 검을 치켜 올릴 뿐이었다. 단 한
점의 감흥도 못 느끼는 나무인형처럼 표정조차 변화가 없었다.
‘검강이라... 대단하다. 하지만!’
몸을 빙글 돌리며 세차게 발을 구르는 건암의 표정도 전혀 두려움이 없었다
. 전설상의 경지를 맞닥트린 사람이건만 추호의 흔들림을 보이지 않는 건
자신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이 아니면 어떤 식으로든 관조적인 마음을 가졌
다는 거다.
콰콰콰!
보보마다 솟구쳐 오르는 형체 없는 용들을 이끌고 조금씩 전진하던 건암이
일순간 쌍장을 뒤집었다.
쿠릉!
장심에서 구름처럼 일어나는 강기의 소용돌이!
그가 손을 한번 휘젓자 사방은 마치 광풍에 휩싸인 들녘처럼 일순간 미친
듯한 요동을 쳤다. 형체가 없다고 해도 워낙 맹렬한 강기였기에 아주 짧은
시간이지만 대기 자체에 영향을 미친 탓이다.
밑으로는 화산처럼 솟아나는 기세와 전면으로 뻗어오는 강기의 막에 둘러싸
인 하운은 풍전등화라는 말이 꼭 어울리는 형상이었다. 제아무리 검강을 이
룬 칼일지라도 그를 돕기 위해서는 움직여야 할 텐데 아직까지 그의 팔뚝엔
힘줄 하나 솟지 않았다.
말없이 보법을 밟으며 매룡보의 기운을 피해내던 하운의 어느 순간 허리를
움직여 건암이 발출한 강기 하나를 무력화 시켰다.
그때를 노렸음인가. 매룡보로 한걸음 다가선 건암이 두 손을 교차하며 어떤
모양을 허공에 그려냈다. 흡사 만(卍)자를 비스듬히 세워 놓은 형태였고
그대로 멈추었던 건암의 손이 무언가를 잡아 떼어내듯 떨어졌다.
쿠르릉.
장심과 장심이 교차하며 스쳐 지나간 자리에서 어떤 기운이 파생되는 순간
그것은 일직선으로 쏘아져 나갔다.
첫댓글 매룡보?
즐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