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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8월 27일 화요일 성녀 모니카 기념일
제1독서 : 2테살 2,1-3ㄱ.14-17
복 음 : 마태 23,23-26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23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박하와 시라와 소회향은 십일조를 내면서,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처럼 율법에서 더 중요한 것들은 무시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십일조도 무시해서는 안 되지만, 바로 이러한 것들을 실행해야만 했다.
24 눈먼 인도자들아! 너희는 작은 벌레들은 걸러 내면서 낙타는 그냥 삼키는 자들이다.
25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그 안은 탐욕과 방종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26 눈먼 바리사이야! 먼저 잔 속을 깨끗이 하여라. 그러면 겉도 깨끗해질 것이다.”
<오늘의 묵상>
안소근 실비아 수녀
테살로니카 2서는 종말과 주님의 재림이라는 주제를 다룹니다.
그런데 오늘 독서는 너무 평온합니다.
이 서간의 배경은 재림이 지체되는 것으로 보이는 상황입니다.
재림의 때는 예상보다 늦어지는데
한편으로는 신자들 가운데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들도 생기고,
다른 한편으로는 재림의 때가 언제일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바오로 사도는 한마디로, 걱정하지 말라고 합니다.
사람들을 동요시키고 불안하게 하는 자들이 나타났다 하더라도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종말이 오기 전에 나타나리라고 이미 예고되어 있습니다.
오늘 독서 중간에 생략된 부분에는, 스스로 신이라고 하는 자가 나타나서
“멸망할 자들을 상대로” 속임수를 쓰겠다고 말합니다(2테살 2,10 참조).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이들은 “멸망할 자들”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뽑으시고 부르신 이들이니,
종말에 대하여 누가 무슨 일을 하더라도 걱정할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재난 영화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결과가 예상되기 때문입니다.
어떤 위험한 상황에서도, 대부분의 경우
결국 주인공은 죽지 않으리라는 것을 압니다.
어쩌면 오늘 독서의 상황을 여기에 비길 수 있겠습니다.
언제 종말이 온다고, 몇 명만 구원된다고,
어떻게 하여야 살아남는다고 말하는 이들에게 흔들릴 필요가 없습니다.
속임수를 쓸 자가 나타나리라고 미리 걱정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속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일 종말이 온다고 하더라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구원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희망을 간직하며 하루하루 살아가면 됩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프란치스코 성인에 관한 일화 하나가 있습니다.
어느 날, 초라한 행색의 여인이 어린 두 아이를 데리고 성인을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너무나 어려운 상황임을 말하면서 성인에게 도움을 간절히 청했습니다.
성인께서는 수도회 관리를 맡고 있는 수사를 불러서 이 여인을 어떻게 도울 수 있는지를 물었습니다.
관리 담당 수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녀에게 줄 만한 것이라고 집 안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성무일도서도 없고, 조과 때 독서로 읽는 신약성경 한 권만 있습니다.”
그러자 프란치스코 성인께서는 곧바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녀가 그 신약성경을 팔아 요긴하게 쓰도록 드리시오.
우리는 신약성경에서 가난한 사람을 도우라는 깨우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독서하는 것보다 희사하는 것이 훨씬 더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것이라고 진심으로 믿고 있습니다.”
이 글을 읽는 순간, 제 책상에 놓여 있는 수많은 것들이 보였습니다.
기도의 수단인 신약성경까지 나누지 않더라도 그밖에 나눌 수 있는 것이 차고 넘쳤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만을 간직만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성인의 말씀처럼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찾는다면,
내어놓아야 할 것은 많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기 편리와 풍요로움을 좇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쪽이 아닌, 내가 기뻐하는 쪽만을 선택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더 중요한 것을 실행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들이 불행 선언의 주인공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가장 중요한 것을 실행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십일조를 열심히 지켰지만, 하느님의 뜻이 담겨 있는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 등의 가치는 소홀히 하고 무시했습니다.
겉으로 보이는 부분은 깨끗하게 하려고 했지만,
보이지 않는 마음은 탐욕과 방종으로 가득 차 있어서
하느님 뜻의 반대쪽에 서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불행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상태에서는 하느님과 함께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기뻐하는 쪽만을 선택하는 것이 아닌,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쪽을 선택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느님과 함께하면서 하느님 안에서 참된 기쁨과 행복을 차지할 수 있습니다.
탐욕과 방종으로 가득 채운 그릇을 비우는 방법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복음은 어제 복음에 이어 네 번째와 다섯 번째의 불행 선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전히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을 신랄하게 질타하십니다.
사실 여러 가지 부패 중에서도 종교적 부패는 항상 가장 신랄한 지탄의 대상이 됩니다.
특히 종교 지도자들에 대한 부패는 더욱 그렇습니다.
또 종교지도자들의 윤리적 부패 못지않게 탐욕에 의한 부패는 더욱더 그렇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종교적 부패와 분열은
<요한 묵시록>에서는 세상 종말의 징표로 제시되고 있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의 네 번째와 다섯 번째의 불행 선언은
종교 지도자들의 탐욕에 대한 경고입니다.
네 번째 불행 선언은 그들의 십일조에 대한
형식적이고 맹목적인 태도에 대한 경고입니다.
그들은 율법에 대해서는 규정 이상으로 열성적이었고 철저했고 엄격했습니다.
그러나 율법의 정신인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를 행하는 일은
실천하지 않았던 것입니다.(마태 23,23)
그들의 마음을 탐욕으로 채웠기 때문입니다.
다섯 번째 불행 선언은 속은 감추고 은폐하면서
겉은 기만과 허위로 깨끗이 닦는 정결법에 대한 경고입니다.
곧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하게 하지만,
그 안은 탐욕과 방종으로 가득 차'(마태 23,25) 있음을 경고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단지 속을 씻는 일이, 겉을 씻는 일보다 낫다는 차원을 넘어서,
애초에 그릇 안에 담고 있는 음식을 정당하게 취득하였는지를 문제 삼습니다.
곧 불의와 착취, 부정과 탐욕, 이기와 방종에 대한 경고입니다.
앞의 첫 번째에서부터 네 번째 불행 선언에서 ‘무엇이 더 중요하냐?’ 하시며,
본질적이고 우선적인 것을 깨우쳐주신 예수님께서는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무엇을 먼저 해야 하는지’를 깨우쳐주십니다.
“먼저 잔 속을 깨끗이 하여라.
그러면 겉도 깨끗해질 것이다.”(마태 23,26)
동시에 <루카복음>의 병행 구절에서는 깨끗해지는 방법,
곧 더러움을 비워내는 방법도 가르쳐주십니다.
“그릇 속에 담긴 것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다 깨끗해질 것이다.”(루카 11,41)
결국 탐욕과 방종으로 가득 채운 그릇을 비우는 방법은
다름 아닌 ‘이웃사랑’이라는 말씀입니다.
이는 정결법의 정신이 자신을 지키는 데 있기보다
사랑하는 데 있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렇습니다.
잔 속을 깨끗하게 하는 일,
그것은 그릇 속에 담긴 것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는 일입니다.
그러면 모든 것이 다 깨끗해질 것입니다(루카 11,41).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먼저 잔 속을 깨끗이 하여라.
그러면 겉도 깨끗해질 것이다.”(마태 23,26)
주님!
제 마음속, 탐욕과 방종을 비우소서!
깨끗한 것을 깨끗한 채로, 더러운 것을 더러운 채로 드러내게 하소서!
속은 탐욕과 이기로 채우면서 겉모양만 깨끗이 닦고 치장하지 말게 하소서!
당신 사랑을 채우소서.
제 잔과 접시를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로 채우소서!
제가 당신의 것인 까닭입니다.
제 잔은 당신의 피요, 제 접시는 당신의 몸인 까닭입니다. 아멘.
마음은 신용장
반영억 라파엘 신부
매일 같이 이를 닦고 얼굴을 씻고 옷매무새를 고칩니다.
외출을 하려면 거울을 보고 다시 한번 몸단장을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일상입니다.
어떤 이는 ‘아름다운 얼굴이 추천장’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성형수술도 하고 외모를 가꾸려 많은 정성을 기울입니다.
그에 비하면 마음을 가꾸는 일에는 너무도 인색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마음이 깨끗하면 표정이 맑고, 얼굴이 빛납니다. 그‘아름다운 마음은 신용장’입니다.
그리고 “마음이 똑바로 향해 있으면 행동 또한 바릅니다.
그리고 마음과 행동이 일치할 때 구원의 은혜를 입을 것입니다"(성 아우구스띠노).
그럼에도 마음을 가꾸는 것에 정성을 기울인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여러분은 현세에 동화되지 말고 정신을 새롭게 하여 여러분 자신이 변화되게 하십시오.
그리하여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하느님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 분별할 수 있게 하십시오”(로마12,2). 라고 권고합니다.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정결 예식에 대한 법을 지키고 가르치는 데 신중을 기했습니다.
그럼에도 ‘위선자’소리를 듣는 것은 중요한 것은
외적인 의식(컵을 닦고 그릇을 닦는 것)이 아니라 속마음이라는 것을 간과했기 때문입니다.
겉을 깨끗이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먼저 닦아야 할 속을 버려두고
겉만 닦는 데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잔이 아무리 좋은 잔이고 화려해도 속이 더러우면 쓸 수가 없습니다.
속이 깨끗하면 다른 것은 문제가 될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 형식적 의로움에 사로잡히지 말고 영적이고 참된 의로움을 추구할 줄 알아야 합니다.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히지 않는다.
더럽히는 것은 오히려 입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힌다”(마태15,11).
“입에서 나오는 것은 마음에서 나오는 것인데 바로 그것이 사람을 더럽힌다.
마음에서 나쁜 생각들, 살인 간음, 불륜, 도둑질, 거짓증언, 중상이 나온다”(마태15,19-20).
그러므로 마음을 깨끗이 하고 하느님과 스스로에게 정직할 수만 있다면
외적 행동 또한 빛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가꾸는 데 인색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신독"(愼獨)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홀로 있어도 부끄러움이 없다는 뜻입니다.
사실 우리는 홀로 있을 수가 없습니다. 언제나 하느님 앞에 있습니다.
하늘의 그물은 누구도 빠져나갈 수가 없습니다.
혹여 내가 누구를 속였어도 그것은 내가 빠져나간 것처럼 여길 뿐입니다.
사람들 앞에 선 내 모습이 하느님 앞에 선 모습보다 우선일 때 위선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 앞에 선 내 모습은 사람들의 평판에서 자유롭습니다.
나 자신을 하느님 앞에 세울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성경은 말 합니다.
“마음이 즐거우면 얼굴이 밝아지고 마음이 괴로우면 기가 꺾인다”(잠언 15,13).
“무엇보다도 네 마음을 지켜라. 거기에서 생명의 샘이 흘러나온다”(잠언 4,23).
그러니 기도합니다.
“주님, 당신께 찬미 노래 부르오리다.
흠 없는 길에 뜻을 두리니, 언제 저에게 오시렵니까?
저의 집 안에서 온전한 마음으로 걷고 불의한 일을 저의 눈앞에 두지 않으오리다.,,,
그릇된 마음 제게서 멀리 떨어지고 악한 것을 제가 알지 않으리이다.”(시편101,2. 4).
삶의 여정 안에서 ‘더 중요한 것’들이 무엇인지 생각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프랑스 파리에서 2024년 33회 파리 올림픽이 개최되었습니다.
프랑스는 1924년에 올림픽을 개최하였으니, 100년이 되었습니다.
이번 올림픽에서 한국은 초반에 돌풍을 일으켰습니다.
‘사격, 양궁, 펜싱’에서 금메달을 얻었습니다.
이 종목은 총, 활, 칼로 승부를 겨루는 경기입니다.
한국인의 DNA에 무기를 잘 다룰 수 있는 유전자가 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올림픽의 정신은 경쟁이 아니라, 인류의 화합과 평화의 축제입니다.
올림픽에 함께 했던 모든 선수에게 응원을 보냅니다.
바오로 사도는 우리의 신앙을 악과의 싸움으로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악한 날에 그들에게 대항할 수 있도록,
그리고 모든 채비를 마치고서 그들에게 맞설 수 있도록,
하느님의 무기로 완전한 무장을 갖추십시오.
진리로 허리에 띠를 두르고 의로움의 갑옷을 입고 굳건히 서십시오.
발에는 평화의 복음을 위한 준비의 신을 신으십시오.
무엇보다도 믿음의 방패를 잡으십시오.
여러분은 악한 자가 쏘는 불화살을 그 방패로 막아서 끌 수 있을 것입니다.
구원의 투구를 받아쓰고 성령의 칼을 받아 쥐십시오.
성령의 칼은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이냐시오 성인도 우리의 신앙을 두 개의 깃발로 표현했습니다.
하나는 그리스도의 깃발이고, 다른 하나는 사탄의 깃발입니다.
올림픽이 평화와 화합의 축제라면,
우리의 신앙은 영원한 생명을 위한 고독한 싸움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악과 싸워서 이기는 방법을 설명해 주십니다.
하느님께 바치는 십일조도 중요하다고 하십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의로움과 자비 그리고 신의라고 하십니다.
교회에 헌금하고 교무금 내야 하지만, 정말 중요한 건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눈먼 바리사이야! 먼저 잔 속을 깨끗이 하여라. 그러면 겉도 깨끗해질 것이다.”
운동선수에게 중요한 건 외모가 아닙니다. 꾸준한 연습과 노력으로 실력을 키우는 겁니다.
신앙인들은 무엇으로 속을 채워야 할까요? 말씀에 귀 기울이는 겁니다.
매일 주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사람은 어둠 속에서도 빛을 찾을 수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양날의 칼보다도 더 예리합니다."
성체를 모시는 겁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성체를 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실 때마다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예수님께서는 빵을 나누어 주시기 전에 제자들이 발을 씻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의 발을 씻어 주는 건, 너희도 그렇게 하라고 본을 보여 주는 것이다.”
성체를 모시는 신앙인은 주님께서 하셨던 것처럼
이웃을 위해서 희생하고 헌신해야 합니다.
교우들의 가정을 방문하면 성상을 볼 수 있었습니다.
세례 때 선물로 받기도 하고, 축일에 선물로 받기도 하고,
마음에 드는 성상을 마련하기도 합니다.
좋은 것을 보면 좋은 마음이 생기듯이,
성상과 성물을 보면 우리의 부족한 신앙에도 도움이 될 것입니다.
본당에 주보 성인을 정하고 모시듯이,
가정에도 가족들이 상의를 해서 주보성인을 모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가족들이 기도할 때 주보 성인의 전구 하심을 청하면 주보 성인이 함께 하실 것입니다.
상징과 표징도 필요합니다. 성물과 성상도 필요합니다.
주보성인의 전구하심을 청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주님께 대한 항구한 믿음이며,
믿음을 삶을 통해서 드러내는 것입니다.
성물과 성상이 집 안에 있는 것도 필요합니다.
성물을 차 안에 놓는 것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가족들이 함께 모여 기도하는 것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굳건히 서서 우리의 말이나 편지로 배운 전통을 굳게 지키십시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또 우리를 사랑하시고 당신의 은총으로
영원한 격려와 좋은 희망을 주신 하느님 우리 아버지께서,
여러분의 마음을 격려하시고 여러분의 힘을 북돋우시어
온갖 좋은 일과 좋은 말을 하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
먼저 속을 깨끗이 닦아라.
조욱현 토마 신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십일조를 바친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법규였다.
박하와 회향, 근채는 대량으로 생산되는 것이 아니라
정원 같은 조그마한 터에 조금 양념 정도로 심을 뿐이었다.
이것들의 십 분의 일이란 아주 소량이어서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 사람들만이 실행하였다.
그런데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그런 십일조까지도 드렸다.
이들은 십일조에 대해서는 철저하면서도 다른 이들에게 불의를 범하고 잔인하였으며
자비를 바라는 이들에게는 귀를 막고 있었다.
예수님은 그렇게 행하면서도 하느님을 제대로 모시고 있다고 자부하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을 향하여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박하와 시라와 소회양은 십일조를 내면서,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처럼 율법에서 더 중요한 것들은 무시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십일조도 무시해서는 안 되지만, 바로 이러한 것들을 실행해야만 했다.
눈먼 인도자들아! 너희는 작은 벌레들은 걸러 내면서
낙타는 그냥 삼키는 자들이다.”(23-24절) 하시면서 책망과 회개를 촉구하신다.
율법에서 더 중요한 것은 정의를 실천하는 일과 하느님을 향한 사랑, 즉 자비이다.
하느님을 향한 정의와 자비와 믿음이 십일조나 맏물보다 나은 것이기 때문이다.
“공정을 실천하고 자비를 구하고 사랑하며
네 주 하느님을 따를 준비가 되어있는 것 아니냐?”(미카 6,8).
하느님을 따를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들에게서는 진심에서 우러나는 믿음이 보이는 법이다.
우리가 참으로 정의를 실천하고 선을 행하는 것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이루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는 이웃에 대해서 정의롭게 살아가며, 다른 이를 자비롭게 대하며,
다른 이들에 대해서 신의를 지키고 있는가?
그렇지 못하다면 우리 역시 사람들 눈에 보이는 겉이야 번들 하지만
실상은 위선자, 현대판 율법학자이며 바리사이파 사람들이라는 책망을 예수께 듣게 될 것이다.
율법의 근본정신을 좀 더 깨달아 알고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진정한 관계를 이루면서 살아가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율법 조문이 우리를 얽매어서는 안 될 것이다.
모든 하느님 공동체의 법은 우리의 영적인 이익이 되도록 만들어진 것이지
구속하기 위한 것이 아님을 알고 살아가야 하겠다.
법의 근본정신이 무엇인지를 올바로 알고 실천하도록 하여야 한다.
하느님 관상 앞에서 나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옛날과 비교하여 관상에 대해 더 많이 얘기하는 요즘입니다.
기도하면서 좀 더 차원 높은 기도를 하고 싶은 갈망 또는 열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관상이란 근본적으로 보는 것,
다시 말해서 직관 또는 지복직관의 문제이기에
관상을 잘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바로 눈이 멀었기 때문이요
반대로 관상을 잘하고 있다면 그것은 눈이 멀지 않았기 때문이겠지요.
그러니 그만큼 눈이 멀지 않는 것이 중요한데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들은 눈이 멀어서 불행하다고,
눈이 멀어서 하느님 관상을 못 하기에 불행하다고 오늘 주님께서는 말씀 하십니다.
"눈먼 바리사이야!
먼저 잔 속을 깨끗이 하여라. 그러면 겉도 깨끗해질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왜 눈이 멀고 어떻게 하다가 눈이 멀게 되었을까요?
이것은 제가 자주 얘기하는 것으로서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하나는 욕심 때문입니다.
흔히 욕심에 눈이 멀었다고 할 때의 그것입니다.
무엇에 욕심이 있어서 욕심을 부리면 우리는 그것에 잡착하게 되고,
이 집착이 그것 만 보고 그것 밖의 다른 것은 보지 못하게 하는 겁니다.
예를 들어 돈 욕심이 있고 돈에 집착하면 눈에 보이는 것은 돈뿐이고
돈 외에는 다시 말해서 돈 밖에 있는 모든 것은 못 보게 되는 겁니다.
그 사람 눈에는 돈만 있고 돈 밖의 다른 것은 그 어느 것도,
하느님도 인간도 다른 피조물도 없고 심지어 자신도 없기 때문입니다.
다른 하나는 교만 때문입니다.
그런데 욕심이 집착하는 무엇에 가려 눈이 멀지 않았는데도 못 보는 눈멂이라면
교만은 이것보다 심각한 그야말로 진짜로 눈이 멀어서 보지 못하는 눈멂입니다.
그러기에 교만으로 인해 눈먼 사람이 욕심으로 인해 눈먼 사람보다
볼 수 있게 되기가 더 어려운 것은 자명합니다.
욕심 눈멂은 욕심내는 것을 버리기만 하면 되지만
교만 눈멂은 바로 자기를 버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눈 수술로 치면
욕심 눈멂은 백내장 수술 정도라면
교만 눈멂은 개안 수술 정도이지요.
교만은 지독한 자기중심이요 자기 집중이기 때문입니다.
욕심이 눈에 돈밖에 없는 것이라면 교만은 자기밖에 없는 것입니다.
돈을 버리는 것이 어렵습니까? 자기를 버리는 것이 어렵습니까?
돈을 버리는 것이 쉽습니까? 자기를 버리는 것이 쉽습니까?
오늘 주님께서 나무라시는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의 눈멂은
두 가지 다이고 그래서 돈 욕심만 있는 보통 사람보다 더 불행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하느님 관상에 앞서 나-관상, 자기-관상을 해야 합니다.
나는 무엇을 욕심내고 무엇에 집착하는지,
나의 교만은 어느 정도인지 그것을 보는 나-관상을 해야겠습니다.
그릇보다 음식이 중요하다는 말이 그릇이 더러워도 된다는 뜻인가?
전삼용 요셉 신부
어제 저희 성당 어떤 신자분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제가 빚을 많이 내서 죽을 만큼 힘이 들 때 신부님 강론을 들었습니다.
바로 십일조로 하느님을 시험해 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생겼는지 한 달 적자가 600만 원, 십억 이상의 빚을 지고 있었음에도
십일조를 내어 주님을 시험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코로나 때가 되어서도 적자가 흑자로 바뀌었고 매년 1억 이상씩 빚을 갚아나가고 있습니다.
오늘 다른 곳에 분점을 계약하고 왔습니다.
남편은 자신이 잘해서 그렇다고 말하지만, 저는 하느님께서 보살펴 주심을 확신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의 위선을 비판하십니다.
“너희가 박하와 시라와 소회향은 십일조를 내면서,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처럼 율법에서 더 중요한 것들은 무시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십일조도 무시해서는 안 되지만, 바로 이러한 것들을 실행해야만 했다.”
이제 가톨릭교회에서는 더는 십일조에 대해 말하지 않습니다.
저는 확신하건대 십일조를 내는 개신교 신자들이 더 평균 재산이 많고
하느님께서 함께 계심을 믿는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이 비유를 통해 설명해 보겠습니다.
한 아버지의 아들들이 아버지의 멀리서 온 편지를 받고 유산을 받으러 길을 떠났습니다.
그곳에는 협곡이 많았습니다. 어떤 아들들은 아버지의 사랑을 의심하고 있었습니다.
계곡을 건너려면 수백 미터는 내려갔다가 다시 수백 미터를 올라와야 합니다.
도중에 뱀도 만날 수 있고 물살이 센 개울도 건너야 합니다.
그런데 그 계곡들에는 다리가 하나 있습니다.
하나 같이 안전하게 보이지는 않습니다.
그 다리는 바로 아버지가 만들어놓은 것입니다.
그리고 매 다리마다 거의 피가 묻은 글씨로 나무 판에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나를 믿어라. 보기엔 위험해 보여도 실제로는 아래로 가는 길이 훨씬 위험하단다.
그래서 내가 먼저 이 길을 가며 다리를 마련해 놓았다.
네가 나의 사랑을 의심할 수 있지만, 제발 한 번이라도 시험해 보려무나.
나는 이것을 만들다가 많은 피를 흘려 너에게 돌아갈 수 없었단다.”
성경에도 이런 말씀과 같은 말씀이 나옵니다.
“너희는 십일조를 모두 창고에 들여놓아 내 집에 양식이 넉넉하게 하여라.
그러고 나서 나를 시험해 보아라.
─ 만군의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
내가 하늘의 창문을 열어 너희에게 복을 넘치도록 쏟아붓지 않나 보아라.”(말라 3,10)
아버지를 굳게 믿은 자녀들은 다리를 건너서 아버지께 빨리 이르러 잔치에 참석했습니다.
아버지를 믿지 않은 아들들은 계곡을 건너다 떠내려가거나 뱀에 물려 죽었습니다.
간신이 도착한 아들들은 이미 잔치가 마무리되는 때였고
자신들의 몰골이 심하게 구겨져서 감히 아버지의 잔치에 들어갈 용기를 낼 수 없었습니다.
십일조는 우리가 하느님 사랑과 보살핌을 믿고 시험하는 도구입니다.
이것만큼 믿음이 증가할 도구는 없습니다.
사실 구약성경의 모든 내용이 십일조를 내라는 말씀임을 알아야 합니다.
에덴동산의 선악과부터 아브라함이 십일조를 바칠 때
멜키체덱이 빵과 포도주를 바치는 것, 그리고 구약의 맨 마지막 방금 읽은 말라키서까지.
우리는 어쩌다 이런 십일조 계명을 버리게 된 것일까요?
오늘 복음 때문일 가능성이 큽니다. 십일조는 내면서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처럼 율법에서 더 중요한 것들은 무시하게” 되지 않으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잘 묵상해 봅시다.
“눈먼 인도자들아! 너희는 작은 벌레들은 걸러 내면서 낙타는 그냥 삼키는 자들이다.”
그렇다면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 같은 계명은 낙타입니다. 낙타를 삼키면 죽습니다.
그렇더라도 벌레들을 먹는 사람이 있을까요? 벌레는 여기서 십일조를 의미합니다.
사실 십일조는 작은 것을 걸러 내면서 큰 것도 먹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닫기 위한 방책입니다.
예수님은 또 말씀하십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그 안은 탐욕과 방종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십일조는 그러면 그릇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 그릇 안에 담겨야 하는 것은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 같은 것들입니다.
그릇이 필요하고, 또 그릇을 닦는 이유는 그 안의 것들을 맛있게 먹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매우 맛있는 음식을 내어놓는다면 그릇이 필요 없거나 닦을 필요가 없다는 뜻일까요?
예수님은 십일조를 내되 제대로 내라는 뜻입니다.
십일조의 의도를 알고 제대로 내라는 뜻입니다.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의 음식이 더 중요하다고 하면서
그릇은 신경 쓰지 않는 것도 또 다른 위선일 수 있습니다.
“십일조도 무시해서는 안 되지만, 더 중요한 것들을 실행해야만 한다.”(23,23)
김준수 아오스딩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위선자이며 눈먼 인도자인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박하와 시라와 소회향의 십일조를 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들을 실행”(23,23)하는 것임을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이는 곧 예수님께서 이미 밝히신 것처럼,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5,17)하고 하신 말씀을 바탕으로
더 구체적인 실례를 언급하신 것이라 봅니다.
그런데 인자하시고 너그러우신 예수님께서
왜 이토록 모질게 그들에게만 혹독한 질책을 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바로 그들은 누구보다도 성서를 연구하고 있는 사람들이기에 성서를 잘 알고 있으며,
또한 날마다 기도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그들은 하느님에 관한 전문가들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에 관해 전문가들인 그들은 무엇이 껍데기이고 무엇이 알맹이며,
무엇이 본질적이며 무엇이 부수적인가를 잘 아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런 그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독점해서는, 자기들의 기득권 유지를 위해서,
그리고 자신들은 잘 지키지 않으면서도 많은 율법 조항을 만들어
“다른 사람들 어깨에 올려놓고, 자기들은 그것을 나르는 일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23,4)
오늘의 정치 지도자들처럼, 법을 잘 아는 이들은
미꾸라지 그물코를 빠져나가듯 잘도 빠져나갔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죽을 때가 되신 것을 이미 아셨기에
작정하시고 그들의 위선적인 행동
곧,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그 안은 탐욕과 방종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에”(23,25)
그들을 질책하시면서 정말 중요한 것은 말과 행동이 기인하는 생각을 바꾸고,
그 생각을 바꾸기 위해서 그 생각의 밭인 마음을 다시 일구어,
마음을 갈아엎도록 (=회개) 촉구하신 것입니다.
저 역시 사제이기에 신자들의 고민을 들을 때마다 자주 사용하는 문구가 있지요.
본당신부가 변화되면 본당이 변화된다,
그리고 주교가 생각을 바꾸면 교구가 변화된다, 고 말입니다.
물론 본당 신부님들이 들으시면 무척 배신감 느끼시듯 섭섭해하거나 따질지 모르겠지만
이것이 한국교회의 현실입니다. 이 표현 역시 수도자에게도 해당합니다.
우리는 분명 교회 변화의 바람이 가장 큰 어른이신
교황님으로 시작되고 있음을 보고 듣고 체험하고 있지 않습니까?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도 맑다는 격언이 결코 허튼소리가 아님을 목격한 세대입니다.
교회는 변화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복음으로 되돌아가야 하며, 그때만이 세상의 표지를 읽을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알았습니다.
우리가 교회라는 울타리 안에서 말하고 행동하기보다
세상과 대화하고 소통하면서 세상의 문제를 함께 아파하고 함께 짊어지면서
우리가 사는 이 땅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이 진리와 평화 그리고 정의가 넘치는 세상이 되도록
우리가 먼저 영적 잔(=마음)의 겉만 닦지 않고, 잔의 안에서부터 깨끗하게 정화해야 합니다.
누가 누구를 판단하고 단죄하기보다,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면서,
다 함께 자신의 그릇의 안에서부터 겉에 이르기까지 깨끗이 닦으면서 나아갑시다.
오늘 복음에서
“십일조도 무시해서는 안 되지만,
더 중요한 것들을 실행해야만 한다.”(23,23참조)라는 말씀을 들으면서,
예전 인터넷 뉴스에서 읽었던 기사를 인용하고자 합니다.
『예장 총회에서 십일조와 각종 헌금을 해야 한다, '는 조항이 포함된
교인의 의무를 교인 자격 정지 판단의 조건으로 삼기로 준비 중이다.
또한 소속 신도가 십일조를 하지 않으면 교인으로서 자격 정지를 당하고,
십일조를 반대하는 부류는 이단이다.』
여러분은 이 뉴스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오늘은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어머니 성녀 모니카 축일입니다.
성녀는 하느님께 나아갈 시간이 오자 아들 아우구스티노에게 이렇게 당부합니다.
“아들아, 내 몸뚱이야 어디다 묻든지 그 일로 해서 조금도 걱정하지 말거라.
한 가지만 너에게 부탁한다.
네가 어디 있든지 주님의 제단에서 날 기억해다오.”
오늘은 돌아가신 제 어머니 조 모니카의 축일이기도 합니다.
모든 모니카 축일을 맞이하신 분들에게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저 역시도 성녀 모니카가 아들 아우구스티노에게
‘주님의 제단에서 날 기억해다오’라고 당부하신 유언대로
제 어머니와 함께 축일을 맞는 모든 분을 위해 ‘주님의 제단’에서 기도 하겠습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