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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안으로 식별 가능할 만큼 확연한 모양새를 갖춘 강기. 고수들 간의 대결
에서 공격 방향을 보여주는 것만큼 멍청한 행위도 없다. 오는 길이 뻔히 보
이는데 막거나 피하지 못한다면 그를 어찌 고수라고 하겠는가.
암경의 은밀함은 그런 의미에서 치명적으로 상대를 위협하는 공격법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화살 한대가 백주에 쏴대는 몇십대의 화살보다 무서운 이
치와도 같다.
그런데 건암은 위의 이점을 버리고 정공법을 택했다. 장점을 버리고 택한
정식의 공격. 패하고자 마음먹은 것이 아니라면 분명 이유가 따를 터였다.
암경의 무서움을 상회하는 무엇을 가진 공격이라는 말이다.
직선으로 뻗은 공세는 하운의 미간을 향해 날아갔으나 그가 목을 옆으로 한
번 꺾음으로서 헛되이 목표물을 잃어야 했다. 아무리 무아지경이라고 해도
눈에 뻔히 보이는 공세를 얻어맞을 하운은 아니었으니까.
순간 건암의 손이 춤을 추듯 작게 움직였다.
스륵.
그에 따라... 하운의 뒤로 흘러나갔던 기운이 천천히 선회했다. 마치 눈이
라도 달린 생명체처럼.
“저, 저게 뭔가!”
비명과도 같은 소리를 내지르고는 방교명이 북궁단야를 쳐다보았지만 방금
조식을 끝낸 그로서도 마땅히 대답해줄 말이 없었다. 사실 놀라서 일어서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었다.
쫙!
강기의 머리 부분이 방향을 바꾼 순간 하운에게 빠른 속도로 쇄도했고 그가
한 발 옆으로 피하자 마치 땅바닥을 헛친 채찍의 소리가 들리고 하운이 머
물던 지면에 긴 구덩이가 파졌다.
‘뭐지? 저런 무공은 들어본 적이... 혹시?’
궁리하던 북궁단야의 눈이 갑자기 크게 떠졌다. 언젠가 들어본 적이 있는
것도 같은 공격법. 그러나 정말로 저런 공세가 구현되다니.
그의 입에서 무슨 말이 터져 나오기도 전에 건암에게 통제를 받는 강기는
먹을 노리는 독사처럼 하운의 주변을 배회하다 틈만 나면 무섭게 쇄도해 들
어갔다.
쫙!
쿵-
한번 공세가 빗나갈 때 마다 지면에는 무거운 쇠사슬이 지나간 자리처럼 깊
은 홈이 패여 나갔다. 문제는 그런 자국을 만드는 것이 형체조차 없는 무형
물이라는 거다.
잘라내지도, 막아낼 수도 없다.
형체를 갖추고 있지만 그건 외면일 뿐 하운을 공격하는 기운의 실체는 어디
까지나 건암이 만들어낸 강기였으니까. 하지만 건암도 그의 강기를 다루기
에만 급급해 보였다. 강기가 하운을 위협하면서 매룡보의 흔적은 찾아보기
어려웠으니까.
“타앗!”
건암의 입에서 기합성이 터졌다. 그와 함께 뱀처럼 요사스러운 움직임을 보
이던 강기가 사이한 빛을 띠어갔다. 아마도 공력을 배가시킨 모양이었고 건
암의 목덜미에 맺혀있는 굵은 땀방울은 그것을 반증해 주었다.
쿠쿠쿠
그저 노리는 모양새였는데 그 모습만으로도 상대의 기백 따위는 충분히 꺾
을 만큼 기괴로운 강기의 모습에 방교명은 혼이 다 달아날 지경이었다.
그의 육십 평생에 저런 광경은 처음 보았고 처음 대하는 경지였으니까.
어기상인? 그런 건 지금 아무런 의미도 되지 못했다. 강기라는 것도 보기
드믄 일인데 그것을 발출한 상태에서 완벽하게 통제하는 사람이라니.
“저, 저게... 말이 되는가? 지금 저자는 강기를 마치 수족처럼 부리고 있
지 않은가? 세상에 이런 일이...”
“으음...”
아직 확신이 서지 못해서 북궁단야도 말없이 무거운 침음성만을 흘렸다.
스릉.
어떤 소리가 들리지는 않았지만 하운을 노리던 강기가 천천히 위로 솟아오
르자 관전하던 두 사람에게 잘 갈린 칼이 검집을 벗어나며 내지르는 금속성
의 전율이 전달된 건 단지 우연만은 아닐 터였다.
하운은 방교명과 북궁단야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저 멍한 얼굴로 서
있었다. 무엇이라도 분쇄할 듯한 강기가 그를 위협하고 있지만 그의 눈은
먼 곳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쫘~악!
쿠~웅!
길게 꼬리를 끌며 내려쳐진 강기는 하운을 맞추지는 못했지만 그가 있던 자
리를 거의 파괴시켰다. 숨 돌릴 사이도 없이 방향을 바꾼 강기가 재차 넋을
놓고 있는 청년검수를 노리고 고개를 쳐들었다.
이런 가공할 공세를 펼쳐내는 건암도 건암이거니와 잘도 피해내는 하운의
보법 역시 강호를 질타할 만큼 훌륭했다. 꼭 필요한 거리를 움직이기에 화
려해 보이지는 않지만 어떤 보법보다도 효과적으로 자신을 보호하는 보법.
기본의 충실함은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일 거다.
쿠르르!
꽈~앙!
또 한번의 공격이 허공을 가르고 종이 한 장 차이고 그것을 피해내는 하운
의 얄미웠는지 건암의 입이 꼭 다물어졌다.
똑.
그의 목에 위태롭게 매달려있던 땀방울이 흘러내리고...
쿠르르!
꽝! 꽝! 꽝!
무차별적인 공격!
천하제일의 편법을 사용하는 이라도 이처럼 무서운 채찍질을 구사할까 할
정도로 현란하게 강기가 춤을 추었다.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는 강기의 실로 짜인 그물막.
“강편(?鞭), 저건 분명히 강편이다!”
“음?”
북궁단야의 외침에 방교명은 멍청한 표정이 되었다. 강편이라, 말은 그럴
듯 하고 건암이 사용하는 강기의 방식으로 보아 강기를 채찍처럼 부리니 그
야말로 말 되는 비유인데 뭐 그리 놀라는가.
“그게 뭐 그리 놀라운...”
“아아...”
북궁단야가 다소 허탈한 신음을 터트렸다. 원론적으로 반응하는 방교명의
말을 신음성으로 잘라내기는 했는데 어리둥절한 당문의 늙은 장로를 보자니
뭐라고 설명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 고개를 숙여야 했다.
“강편이라, 강기의 채찍이라는 말 아닌가? 그 정도는 나도 안다고!”
“아아, 그게 아니라...”
볼멘 음성으로 툴툴거리는 방교명에게 뭐라고 설명을 하려던 그가 마땅한
비유를 찾지 못하고 한숨을 쉬었다.
눈높이가 다른데 무슨 설명이고 나발이고가 먹히겠는가!
그의 반응이 방교명의 기분을 썩 나쁘게 한 건 물론이었다. 자고로 노인네
들이 한번 심통을 부리면 약도 없다.
“흥! 비록 노부가 무공도 약하고 하는 일도 없는 밥버러지라지만 나이도
새까만 후배에게까지 무시를 받을 정도는 아니라네! 나도 들은풍월과 무공
을 볼 줄 아는 눈과 귀 정도는 있다고! 북궁공자, 그렇게 안 봤는데 사람이
아주 못 쓰겠구먼. 남을 그리 업신여기는 자는 언젠가 자신도 그런 꼴을
당하는 법이라지. 암, 그렇고 말고!”
‘이런 상황에서도...’
기가 막혔지만 별 달리 대꾸하지 못하고 지그시 눈을 내리감았던 북궁단야
가 곧 고개를 끄덕였다. 검의 경지나 무공의 깊이로는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자신이 소속된 가문 쪽으로 돌려 말한다면 어떻게든 설명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장로님, 어기회선(御氣回旋)이라는 암기의 경지를 아시겠지요?”
“내가 무슨 바보인가, 어기회선도 모르게!”
당당한 방교명의 반응은 북궁단야의 한마디에 의해 잘렸다.
“보신 적이 있습니까?”
“어?”
왕방울만큼 커진 눈으로 북궁단야의 얼굴을 보던 방교명의 우물쭈물 말을
뱉어냈다. 어기회선? 말이야 많이 들었지만 그걸 어떻게 본단 말인가?
“만천화우와 함께 지난 몇 백년간 구현되지 않았기에 장로님께서 대하지
못한 건 당연하겠지요. 그렇다면 어기회선이 단순히 기로서 암기를 부리는
경지를 말하는 것 같습니까?”
“음?”
말 그대로 어기회선이라 함은 기로서 암기를 완벽하게 통제하는 경지를 일
컫는다. 그것이 허공에서 회전을 하기도 하고 목표물을 비껴갔다면 되돌아
오기도 한다는 거다. 당연히 관성 따위를 무시하고 말이다.
그런데... 그것을 기로 통제하지 않는다면?
“기로 물체를 통제하는 것에는 한계치가 있는 법입니다. 일단 기라 함은
발출하는 즉시 사라지는 특성이 있기에 지속적으로 기운을 유지하려면 계속
해서 내뿜어야만 합니다. 아무리 막강한 내공을 가진 고수라고 해도 끊임없
이 기를 쏟아낸다면 일다경만에 진기가 고갈됨은 불을 보듯 뻔합니다. 그래
서 초식에 구결과 보법이 따름이지요. 간단한 호흡식으로도 어느 정도의 기
력을 보충할 수 있으니까요.”
정론이다.
내공, 내공 하지만 천고의 고수라고 해도 내공을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다니
는 건 아니다. 고수들 간의 내력대결이라고 해봐야 일각 정도의 시간이면
승패가 판가름 난다.
무림을 쩌렁쩌렁 울리는 고수들끼리 몇날 며칠을 싸우는 경우가 있긴 하지
만 그건 어디까지나 시간적으로의 계산일 뿐 실제적으로 들어가 보면 전투
중에도 구결에 맞춘 심법과 보법을 밟으면서 숨을 돌리는 것을 알게 된다.
“나한전을 무려 한 식경이나 허공에서 춤추게 했다는 당문의 고수가 있었
다고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분은 한 식경 내내 기를 발출한 걸까요?”
말을 못하고 머리를 긁는 방교명을 우두커니 보던 북궁단야가 고개를 돌렸
다. 그곳에는 이리저리 춤추는 강편과 그 세례에 갇혀 겨우겨우 피해내는
하운의 모습이 보였다.
동료의 안타까운 모습에 절로 관자놀이에 힘줄이 생겼지만 북궁단야는 하던
말을 계속했다. 어차피 도울 수 없고 힘이 되어주지 못한다면 조금이라도
휴식을 취하는 편이 낫다.
하지만 강편이 어떤 것인가를 반드시 말하고 싶다. 하운이 밀리고 있는 것
은 어디까지나 약해서가 아니라는 것을 알리고 싶다고나 할까.
“시범이 끝나고 땅에 떨어진 나한전을 어떤 고수가 기념으로 가지려고 집어
들었다가 손가락이 데었다는 것도 아실 겁니다. 왜일까요?”
북궁단야의 질문에 방교명은 그저 눈을 꿈뻑였다. 지금 그가 언급한 얘기는
당문 역사상 최고의 고수이자 팔대문주였던 일전여의(一錢如意) 당만우의
전설과도 같은 일화였다.
나한전의 열기? 그건 풍속에 의해 뜨거워진 것쯤으로 넘어갔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고수의 피부를 태울만큼의 열기가 풍속에 의해 생겨났다고는
보기 어렵다.
가만히 허공을 보던 북궁단야가 툭 내뱉은 말은 그 모든 얘기의 해답이 되
었다.
“그건 간단합니다. 나한전은 기가 아니라 강기에 의해 움직였던 거지요.”
“강기라고?”
“그렇습니다. 기를 유형화 시킨 강기라면 그것을 통제하기 위해 지속적으
로 내공을 소진할 필요가 없지요. 순간적으로는 많은 공력을 필요로 하지만
일단 생성된 후에는 강기의 흐름에 따라 필요시에 내력을 쓰면 되니까요.
일회성으로 흩어지는 기와 모양을 갖춘 강기의 차이가 바로 그것이지요.”
“그랬었던 거였군.”
방교명이 탄식처럼 고개를 끄덕이자 북궁단야는 다시 전장으로 시선을 돌렸
다. 검강까지 이룬 동료는 무슨 생각인지 그저 이리저리 피하기만 할 뿐 칼
을 들 생각이 없어 보였다.
“칼을 들어도 마찬가지겠지만...”
“그게 무슨 말인가?”
자신보다도 당문의 고사(故事)에 정통한 청년의 시선을 따라 전황을 보던
당문의 늙은 장로가 놀라 또 한번 물었다. 검학에 대해 조예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하운이 검을 들면 뭔가의 반전이 있을 거리고 기대하고 있었는데
웬 찬물 뿌리는 소리인가.
“강편... 강기를 세 치 이상 뽑아 낼 수 있는 고수가 그것을 허공에서 마
치 채찍처럼 부린다는 전설의 경지지요. 강기에 의한 타격을 말로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겁니다. 문제는 수비 수단인데... 같은 타격치로 막아내는 것
외엔 어떤 방어도 통하지 않는다는 거지요.”
“잘라내면?”
“기라는 물체가... 철로 만들어진 검 따위에 잘라질까요? 거기다 기를 압
축시킨 강기를? 어림없는 말씀입니다. 만약 하형의 검에 세 치 이상의 검강
이 걸려있다면 해볼 만한 시도일지도 모르지만 보다시피 검에 드리운 강기
는 그저 서리처럼 끼어있는 정도입니다. 현실적으로 자른다는 건 무리라는
소리지요.”
어떻게 저리 단호할까?
동료가 맞을까 싶을 정도로 냉철한 북궁단야의 분석에 방교명의 얼굴이 일
그러졌지만 워낙 정확한 말이라 반박할 여지가 없었다. 그렇다면 하운은 이
렇게 속수무책으로 당해야만 한다는 건가?
자신이 어떤 처지에 놓여 있는지 모르는 사람처럼 어지럽게 날아오는 강편
을 묵묵히 피해내는 하운의 모습은 어찌 보면 괴기스럽기까지 했다. 철저한
무표정이 있다면 지금의 하운을 보면 될 듯 했다.
“그, 그럼 방법이 없다는 건가!”
안절부절하던 방교명이 버럭 소리를 질렀지만 북궁단야의 표정은 어느새 하
운을 닳아가고 있었다. 무표정, 아니 무심(無心)이라고 할까?
그라고 안타깝지 않을까. 하지만 북궁단야은 처지로 동료를 도울 수 있는
길은 전혀 없다. 그렇다고 소리나 꽥꽥질러 응원을 한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이건 비무가 아니란 말이다!
죽음이라는 명제를 놓고 서로의 힘을 견주어 진 쪽이 삶의 전부를 내 주어
야 하는 전쟁이다.
오로지 하나...
동료를 믿는 도리 밖에 없다.
내가 하형을 알면 얼마나 알겠나.
처음 보았을 때의 유능제강(柔能制剛)?
그림만으로 실전된 초식을 복원하는 천재성?
그런 건 다 부질 없네, 난 자네를 아직 잘 몰라.
자네를 무척이나 좋아한다는 사실 정도가 다일까?
좀 더 시간을 주게, 이렇게 헤어질 수는 없지 않은가?
“자네에 대해 좀 더 알고 싶어...”
절규라고 타오를 듯 터지는 건 아니다. 북궁단야의 독백은 어떠한 부르짖음
보다 애타게 자리했고 사나이의 진심은 뜨겁디뜨거운 전장으로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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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정작 들어야할 이는 정신 자체를 닿을 수 없는 머나먼 곳으로 여행
이라도 보낸 사람처럼 근육의 잔 떨림 하나 없는 얼굴로 광풍의 가운데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부평초처럼...
쫓기는 자와 쫓는 자는 누가 더 피곤할까?
기본적으로 심리적인 압박감을 고려해 볼 때 쫓기는 자의 피로도가 쫓는 자
의 그것보다 훨씬 높다고 봐야 한다. 궁지에 몰리면 쥐도 고양이를 문다고
하지만 보통은 고양이의 희롱에 제풀에 놀라 기절하기 혼을 놓치곤 하니까.
여유의 차이.
그러나 만약 쫓기는 자가 여유롭게 대처한다면 오히려 쫓는 자의 압박감이
상승하는 역전현상이 발생한다. 아무리 때려도 쓰러지지 않는 상대를 만났
을 때 주먹을 내미는 자체가 부질없게 느껴지는 경우처럼.
때리다 지친다는 거... 격중되든 안 되든 간에 무인으로서 수치 아닌가?
부르르.
이리저리 손을 휘젓던 건암의 눈썹이 바짝 치켜 올라갔다. 머리에 꽃을 꼽
고 침만 흘린다면 딱 어울릴 상태의 상대에게 최고의 절기를 펼치면서 단
한방도 맞추지 못하고 진력만 소모하고 있자니 힘들기도 힘들거니와 무엇보
다 자존심이 상한다.
‘어떻게 처음보다 움직임이 더 좋아진단 말인가!’
피한다는 것, 그것도 강기공을 단지 발만으로 회피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지는 설명할 필요도 없다. 그런데 상대는 딱 백지장 하나의 거리로 그의 공
격을 무산시키고 있다. 순수하게 보법만을 써서.
‘이렇게 내공만 낭비하다간...’
외관상으로야 일방적인 싸움으로 보일지 몰라도 실상 얻은 것이 전무한 실
정이다. 제대로 한방 맞추지 못하더라도 기세를 꺾었다면 그나마 유리한 위
치라고 하겠지만 죽어라고 공세만 펼친 결과 허무함과 짜증만이 남았다.
고수들 간의 대결에서 흐름을 타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그리고 흐름
을 자신의 것으로 만든 건암이건만 피로도는 더 쌓여만 간다.
‘넌 대체 얼마나 지쳐있는 거냐!’
아무 것도 드러나지 않은 얼굴의 무서움. 눈동자로 심리를 읽어 보려 해도
먼지가 잔뜩 낀 창처럼 혼탁한 눈빛에서 뭘 알아내겠는가.
문득 건암의 표정에서 결연한 무엇이 흐르고...
“하압!”
그의 손이 또다시 만자의 형태로 결합을 했다가 장심의 결합과 함께 떨어졌
다.
스릉.
“이럴 수가!”
방교명은 자신의 눈을 의심해야 했다. 건암의 손은 또 하나의 강기를 불러
내었다. 세치 이상의 강기를 요구한다는 강편이 한 사람의 손에서 무려 두
개나 피어난 것이다.
“으음...”
북궁단야도 더 이상은 침착할 수 없었다. 위력은 잘 모르지만 한 개만으로
도 동료를 꼼짝 못하게 했던 강편인데 또 하나가 생성되었으니 앞으로의 공
세가 얼마나 흉험할지 육안으로 확인할 필요가 있을까.
“저게 말이 되나? 세치라고 했잖아? 강기라는 놈을 구경한 것도 처음인데
세치 이상의 그것을 무려 두개씩이나 불러낸다는 게 말이 되는 거야? 그럼
저자는 천하무적 내공을 가졌다는 건가?”
“내공의 문제는 아닌 듯 합니다. 그렇다면 먼저의 강편을 늘였겠지요.”
“강편을 늘인다구? 그게 대순가?”
방교명의 물음에 북궁단야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암기공을 주로 연마
했던 당문의 장로는 강기의 의미조차 잘 파악하지 못하나 보다.
“강기의 길이는 그 사람의 내공을 그대로 반영합니다. 또한 강편은 흔히
알고 있는 채찍과 달리 직, 곡선의 변화와 수발을 시전자의 임의대로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강편의 길이가 길면 길수록 무서운 위력을 지니게 되지
요.”
“아, 그렇다면...”
“강편의 길이를 그대로 하고 또 하나의 강기를 불러낸다는 건 그저 진력의
소모가 두 배로 가중됨을 의미합니다. 두개의 강기를 순차적으로 뽑아내는
능력은 놀랍지만 내공의 깊이와는 상관없지요. 아마 저자는 이번의 격돌로
승부를 결정짓겠다는 심산인가 봅니다.”
북궁단야의 명료한 설명에 고개를 끄덕이던 방교명이 깜짝 놀라 전장을 보
며 발을 굴렀다. 두 배의 내공을 소모해가면서 까지 불러낸 강기. 그것에
담긴 속뜻은...
사생결단!
“하공자, 제발 정신 좀 차리게! 정신을 차리고 검을 들란 말이야!”
메아리 없는 외침은 폭음 속에 묻혀 버렸다. 애당초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
럼.
부르르.
강편을 불러낸 건암의 손목이 떨렸다. 하나의 강편을 부리는 것만으로도 충
분히 힘들었었다. 모르는 이가 본다면 그저 까딱거리는 손만으로 편안하게
싸운다고 하겠지만 알고 보면 어떤 싸움보다도 힘든 게 강기를 움직이는 무
예다.
자칫 통제를 못하면 사그라들 위험도 있거니와 다시 뽑아내려면 정신까지
혼미해질 정도로 커다란 진력을 소모해야만 한다. 허공에서 한번 선회할 때
, 내리쳤던 것을 다시 들어 올릴 때의 압력은 범인의 상상을 초월한다.
그저 장풍이나 날리는 무인은 추측도 하지 못할 무게를 감수해야 한다는 말
이다.
하지만 이대로의 전개는 무의미하다. 아니, 위험하기까지 하다.
흐름이란 바뀌기 위해 있는 거니까.
그렇다면 흐름이 끊기기 전에 끝을 봐야 한다.
승부처는 지금이다!
촤라락!
솟아난 강기가 쭉 뻗어 나가자 천상을 호령하던 용 두 마리가 신장(神將)의
부름을 받고 장내로 하강하여 그 웅장한 자태를 뽐내는 듯 했다.
스르르르...
매섭게 하운을 몰아붙이던 첫 번째의 강편이 공세를 멈추고 건암의 오른편
으로 물러섰다. 왼편에 자리한 두 번째의 강기도 서서히 기운을 받아 점차
강편화 되는 모양새였기에 보는 이로서는 장관이지만 하운에게는 그리 아름
다운 광경이 아닐 터였다.
투투툭.
먹이를 노리는 독사가 잠시 숨을 고르는 것처럼 음습한 내음이 짙게 깔린
정적. 바쁘게 움직이던 하운도 더 이상의 공격이 이어지지 않자 우두커니
서서 고개를 반쯤 숙인 상태로 광풍이 지나간 자리에 눈처럼 내려앉는 흙먼
지를 바라보았다.
“꿀꺽!”
긴장감은 지켜보는 사람이 더 심했는지 두 주먹을 꼭 쥐고 전장을 주시하던
방교명의 목울대가 크게 움직였다. 두개의 강편이 그려낼 공포를 모르는
바가 아니었지만 북궁단야의 시선은 건암을 쫓지 않았다.
강함은 상대적인 개념이다. 아무리 막강한 사람이라도 그 보다 한 수 위의
고수가 나타난다면 자리를 내 주어야 하는 것이 강호의 철칙이다. 물론 두
수 위의 고수가 나선다면 한 수 위 역시 꼬랑지 내린 개 마냥 눈을 깔아야
한다.
‘하형, 저자의 이번 공격은 그저 피한다고 될 성질이 아니란 말일세. 아주
무서울 거란 말이야. 무슨 생각을 어떻게 하고 있는지 모르지만 이제는 깨
어나야 하네.’
묵묵히 하운의 모습을 바라보던 건암의 눈가에 잔 경련이 한번 일었다.
그리고...
쿠릉!
느닷없이 쏘아져나가는 두개의 강기는 모든 것을 파괴시킬 기세로 하운을
덮쳤고, 하늘을 뒤덮었으며, 전장 자체를 집어 삼켰다.
“헉!”
숨이 막힌 소리로 땅을 내리치는 방교명의 탁한 한숨과 입술을 잘근 무는
북궁단야의 거친 콧김 사이로 맑고 청명한 어떤 소리가 들렸다.
째~엥.
“음?”
부상도 잊고 벌떡 일어서려던 북궁단야가 인상을 찌푸리며 무릎을 감싸 쥐
고 풀썩 주저앉았다.
“괜찮은...”
급하게 고개를 돌려 그를 돌보려던 당문의 늙은 장로는 외면의 차가움으로
내면의 활화산을 감춘 청년의 손짓에 다시 장내로 시선을 돌려야했다.
“저기!”
“음?”
북궁단야의 중지는 한 곳을 정확히 가리켰다.
그곳엔...
“저, 저게 뭔가...”
장추삼의 미소가 걷히면서 하운은 머리를 세게 한대 두드려 맞은 듯한 충격
으로 몸을 떨어야했다. 익숙한 보법과 사고에 길들여져 있었기에 다른 것을
돌아볼 엄두 같은 건 내지도 않았었다.
심통 맞은 동료는 말을 하지 않았지만 호랑이의 포효보다도 큰 목소리로 그
를 깨우쳐 주었다.
훗, 나라면...
그렇다! 세상의 모든 변환공격이라도 흘려버릴만한 산무영이라면 발끝을 타
고 올라오는 강기의 화산을 피해낼 것이다. 그런데 그와 같이 다변은 아무
리 생각해도 무리다.
허나 장추삼은 이렇게 이죽거렸다.
단 한번만 피하라고...
단 한번의 변화!
일변(一變)의 산무영은 가능하지 않겠는가!
무엇에 끌린 사람처럼 하운의 발은 장추삼의 산무영을 복제하기 시작했고,
그 자신을 복제해 냈으며, 천지의 삼라만상을 복제하기 시작했다.
산무영으로 이동된 신형을 제동 걸 사이도 없이 추뢰보를 밟았다. 완전하지
는 않지만 비슷하게나마 속력을 낼 수 있었는지 그의 검은 무엇을 베었다.
그리고... 어둠.
꿈결처럼 아득한 정신에서 누군가가 질문을 던졌지만 사방을 덮은 어둠은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멀리서 누군가가 너울너울 춤을 추고 있지만 그건
살육을 위한 의식에 불과했다.
달마저 없었다면 너무 슬펐을 터였다.
(“뭘 해야 하지...”)
맥없는 울림이 되어 멀리멀리 퍼져나갔지만 정작 목구멍에서 벗어나지 못했
다. 말없이 춤만 추는 어둠의 살육자는 그런 그를 보며 하얗게만 웃고 있었
고.
아니, 정말 웃고 있는 걸까?
피의 검무를 추는 이는 역설적으로 너무 슬퍼 보였기에 어깨라도 감싸주고
싶은데.
멈추게 하고 싶었다, 죽음의 검무를.
하지만 무슨 자격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감정의 혼돈 속에 내팽개쳐진 하운의 주위로 지진과도 같
은 충격이 일어났지만 그와는 상관이 없었다. 때에 따라서는 산무영으로,
때에 따라서는 사문의 매화보(梅花步)로 충격의 전달을 막아내는 하운의 눈
을 사로잡는 건 오로지 검무와 검자(劍者)의 어깨였다.
너무도 굴강해서 오히려 처량한 어깨. 달빛마저 검자의 어깨에서는 안주를
하지 못하고 산산이 깨져 버렸기에 오로지 검무만을 출 수 밖에 없는 고독
한 검객의 뒤안길.
(“귀하는 뉘시오?”)
대답은 없었다. 들리지도 않았나보다. 그는 언제까지나 검무만을 출 기세로
그렇게 너풀너풀 팔을 휘두르고 있었고 하운의 마음은 검객의 마음과 동화
되지 못하여 그의 옆을 맴돌고만 있었다.
날카로운 음향과 함께 정수리를 노리고 날아오는 무엇을 피해내며 하운은
울고 싶었지만 눈물샘이 말라버린 사람처럼 단 한 방울의 액체도 배출하지
못했다.
검자는 그 누구의 접근도 거부하고 있었다, 어쩌면 그 자신까지도.
폭풍우처럼 밀려오는 기운도 하운의 안타까움을 어쩌지 못했지만 닫힌 검객
의 마음은 완벽하리만치 아름다운 검무 속으로 침전되어 고개를 내밀지 않
았다.
마음은 있지만 잇닿지 못하기에 잠꼬대처럼 허우적거리다 이내 쳐진 손처럼
하운의 외침은 그만의 노래가 되어 쓸쓸한 가을 낙엽처럼 떨어져 내렸다.
착각일까?
사위에 완전한 정적이 짙게 드리우고 하운의 고개가 옆으로 떨궈졌을 때 검
무를 추던 사내의 오른손이, 정확하게 손에 들려진 검극이 그를 향해 짧은
움직임을 보였다.
그건 분명 한 지점을 가리키고 있었다.
(“뭔데 그러는...?!”)
그가 검극을 따라 눈을 돌리는 순간...
쿠르르!
미친 듯한 기세가 하운을 덮쳤다. 그의 상념을 거부하는 사람처럼, 아예 지
워버릴 요량으로 떨어져 내리는 두 기운!
‘폭포?’
그것은 아닌 듯 했다. 시원스레 떨어지는 폭포의 천진스러움 따윈 눈을 씻
고 찾아 봐도 없었으니까.
‘용인가?’
모르겠다. 창노한 기세로 보아 그런 것도 같지만 당최 본 적이 있어야 뭐라
고 판단할 거 아닌가. 당황보다는 황당함이 앞섰다. 그것이 용인지 뭔지는
몰라도 아무튼 방해물임에 틀림없었고 하운으로는 이 시간을 방해받고 싶지
않았다.
그의 손등에 굵은 힘줄이 걸렸다.
‘베어야 하나?’
순간 사내가 복면을 벗었다.
너무도 평범하여 돌아서면 금방이라도 잊혀져버릴 얼굴. 이토록 훌륭한 검
식을 구사하는 이의 얼굴로는 믿기지 않아 하운의 마음에 미묘한 파문이 일
었다.
아니, 다시 보니 신선처럼 중후한, 다시 보니 털이 숭숭 난...
혼란으로 몸 둘 바를 모르는 하운의 귓전에 사내의 음성이 들렸다.
(“거역하지 마라...”)
쿵!
정수리를 타고 내려오는 전율. 정확한 의미를 곱씹기도 전에 기세는 파도가
되었고 하운의 검은 짧은 호선을 그리며 치솟아 올랐다.
193
벼락처럼 떨어져 내리는 기세를 상대하기에 너무도 미약해 보이는 검. 파르
라니 빛나는 검강의 성휘(星煇)도 그저 처연하리만치 아름다울 뿐, 기운은
모든 것을 파괴시킬 위력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작은 호선이 파문이 되었다...
그리 크게 팔을 움직이는 것도 아니었는데 검이 그려내는 호선의 크기는 차
츰 영역을 넓히며 무섭게 몰아치는 두개의 기세를 맞서 나갔다.
마주보며 속력을 늦추지 않고 돌진하는 쌍두마차처럼 한 치의 양보도 없이
거리를 좁혀만 가는 검과 기세.
곧 경천동지의 충돌이 있으리라.
뭔가 세상을 뒤흔들 만큼의 무시무시한 충돌!
스르륵.
검기와 기세가 허공에서 짧은 상견례를 가졌다 싶었는데 어느 순간 검을 타
고 기세와 하운이 어우러졌다. 마치 오래전에 헤어졌던 친우를 만나 서로
얼싸안고 춤을 추는 모양처럼.
‘뭐, 뭐야!’
건암의 눈썹이 역팔자를 그리며 황망한 상황에 어이없어 했지만 살짝살짝
발을 움직이며 그 어느 기녀보다도 아름다운 춤을 추기 시작한 하운에게 그
의 표정 같은 건 그리 중요하지 않았나보다.
“우우!!”
도둑을 잡으라고 풀어 놓은 맹견이 담을 넘는 양상군자에게 꼬리를 쳐도 이
보다는 기막히지 않을 것이다. 애써 불러 놓은 기세건만 바위도 부술 기세
로 뻗어나간 건암의 강편은 순한 양처럼 하운과 어우러져 허공을 수놓고 있
었다.
돌처럼 굳어있던 건암의 얼굴에 어떤 표정이 떠올랐지만 그의 생각은 강편
에게 전달되지 못했나보다. 무엇이라도 으깰 것처럼 강력한 힘으로 파동 치
던 두개의 강기는 그저 허공을 빙글빙글 돌며 하운의 춤사위를 보조하고만
있었다.
거칠어지는 호흡. 이마에 흐르는 땀은 건암의 답답함처럼 말없이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지만 이런 기사(奇事)는 처음이라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얼른
생각해내지 못했다. 아무튼 매우 좋지 않음은 분명하다.
‘이대로라면 버텨내지 못하겠다!’
슥.
주인의 의사를 철저히 무시하고 마냥 딴 짓에 열중해있던 강편을 불러들인
건암이 그에 따라 동작을 멈춘 하운을 묵묵히 응시했다. 아무리 공력의 수
발을 조절한다고 해도 본시 강기를 부리는 것은 일정시간 내내 내공의 발출
을 요한다.
다행이라면 다행이지만 하운은 선공의 의사가 없어 보였고 그래서 숨을 고
를 시간을 가진 건암인데 뭔가 찜찜한 것이 걸려 고개를 가만히 흔들었다.
뭔가 있는데 그게 뭔지 모르겠다.
‘뭐지...’
그런 생각을 하는 이가 또 하나 있었으니...
‘어? 하형의 저 검무...?’
북궁단야는 하운의 그려내는 검의 궤적과 보법에서 뭔가를 보았지만 그것이
너무 옅기에 뭐라고 단정 짓지 못했다. 무언가를 그려내긴 하는데 딱 꼬집
어서 적시(摘示)하면 속이 다 후련하겠는데 지금으로는 너무 약하다.
묘하게도 둘의 마음은 하나로 귀결되었다.
‘한번만 더 추겠소? 하형의 그 춤을 보고 싶다오...’
북궁단야의 바램을 듣기라도 한 걸까?
‘좋다! 어디 한 번 더 해 봐라!’
건암이 힘껏 손을 흩뿌리자 두개의 강편이 노도와도 같이 하운을 덮쳤다.
잠시라고는 해도 일정시간 호흡을 바로 했기에 그의 강편은 아까의 그것보
다 훨씬 생동감 있는 기세로 하운의 주위를 틀어막았다.
스릉.
검이 다시 한번 호선을 그리며 치켜 올라갔고,
너울.
뒤따라 하운의 발은 족적도 사뿐하게 지면에서 유영(遊泳)하기 시작했다.
거스르지 않되 거침없이
다그치지 않는 단호함처럼
일점일획 아로 새겨지는 검적을 따라
두서없이 엉킨 수족역시 마음을 따라
고집멸도 잊고 텅 비워진 공란에 이르니
공심여만심(空心如滿心)의 역(易)이 이런 것인가...
잡으려고 하지 않는다. 베어내려 하지도 않는다. 그는 그저 강편의 흐름에
따라 검을 맡겼으며 마음의 흐름에 따라 검을 내어 주었을 뿐이다.
어쩌면... 그는 그저 자신이 아는 가장 아름다우면서도 빈틈이 없었던 검무
를 추고 싶었는지도 몰랐다. 그것의 형식이 무엇이든, 어디서 유래되었든
상관없이.
하늘 아래 처음인 것은 없던가.
그렇지만 하운의 검무는 어떤 것의 복사에 가까울 정도로 비슷했다. 그것이
두 사람의 마음을 움켜쥐고 옥죄었지만 순간적으로 떠오르지 않는 단상에
북궁단야와 건암의 아미가 찌푸려졌다.
‘분명 저것은... 아니야, 그럴 리 없다. 하형의 말마따나 피와 살육만이
난무했던 그 춤은 너무도 슬펐지 않은가. 그런데 지금의 하형은...’
북궁단야가 저도 모르게 애검의 손잡이를 잡으려 손을 뻗었지만 곧 뒤따르
는 통증에 내밀었던 팔을 거두었다. 하지만 그의 마음은 육신의 통증을 잊
고 눈앞에 그려지는 검의 선을 분석하고 있었다.
사정은 건암쪽도 마찬가지라 공세를 펼치고는 있지만 생각은 다른 곳으로
향했기에 지리멸렬한 강편의 움직임만큼이나 어지러운 상념을 정리하지 못
하는 형편이었다.
사실 건암으로서는 기가 막힌 광경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꿈에도 생각해
본적 없는 일이 펼쳐지고 있었던 거다.
‘이건 말도 안돼! 어떻게 저 검식이 저리도 아름답다는 건가! 아니야, 저
건 그 검식일 리가 없어! 어디까지나 비슷한 거야! 암, 그렇고 말고!’
애써 부정하려고 해도 진실은 나무등걸을 타고 오르는 독사의 혓바닥처럼
은근하면서도 섬찟하게 건암의 머리를 헤집고 있었다.
어떻게 그 검식을 저 청년이 펼쳐낸단 말인가! 아니, 백번을 양보해서 그
검식이 유출되었다고 치자. 또한 우연히 익혔다고 치자. 검식의 기오막측함
은 일단 젖혀둔다고 치자.
어떻게 한가지의 검식에서 풍기는 내음이 저리도 변할 수가 있단 말인가!
너무도 붉어서 저무는 태양의 노을조차 삼켜버릴 듯한 요사함을 풍기는 검
식이었는데 지금 구현되는 저 검무는 지극히 아름다웠기에 차라리 초탈한
무엇으로 장내를 지배하고 있지 않은가.
두 사내의 당혹스러움이 묘한 일치를 보이고 있을 때 제자리를 돌며 가벼운
보법만으로 검무를 추던 하운이 마치 너풀거리는 나비처럼 작은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역시나 무겁지는 않았지만 아무튼 간에 전진이었고 이는 건암과의 거리가
좁혀지는 것이니 일종의 승부수라고 불러도 무방하겠으나 누구라도 하운의
검무를 본다면 생사결을 치르는 자의 비감함 따위는 발견하지 못할 터였다.
그러나 건암으로는 당연히 하운의 접근이 부담스러웠다. 치고 또 쳤건만 단
한방의 정타를 허용하지 않았던 상대가 이제 잠에서 깨어났다. 비록 수정
처럼 투명한 검식으로 그의 강편을 상대한다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외
피일 뿐이다.
검은 춤을 추기위한 도구 따위가 아니니까.
검은 무언가를 베기 위해 제련된 쇠붙이니까.
검은 인간이 만들어낸 가장 위대한 병장기였으니까.
검은... 어디까지나 검이니까.
“하압!”
거대한 외침과 함께 건암의 두 팔에 강철 같은 근육이 불끈 솟아나며 하운
의 검무에 취해서 해롱거리던 강편들이 꼿꼿하게 섰다.
이대로라면 필패다. 유연하지만 거침없는 하운의 돌진은 무척이나 느렸고,
그래서 더욱 가공할 무게감으로 건암을 압박해 들어왔다.
상대가 어떤 검식을 쓰든 중요한 문제가 아닐지도 모른다. 부셔버리면 되니
까. 의문은 나중에 풀어도 충분하다. 더 이상 재고 자시고할 여유 따위가
남아있지 않았기에... 선택은 오직 하나밖에 없었다.
“간다!”
외마디 비명처럼 날카로운 기합성과 함께 마주 뛰쳐나가는 건암의 모습은
실로 무시무시할 만큼 위력적인 것이라 그 기백만으로 태산조차 허물어 버
릴 듯했다.
쿠쿠쿠.
강편 역시 방금 전까지 와의 움직임과는 다르게 매서운 기운을 흘리며 하운
에게로 쇄도해 들어갔다. 과연 당문의 문주를 눈빛만으로 제압한 고수의 풍
모를 약여하게 풍기는 모습이었다.
‘승부다!’
북궁단야가 그만 주먹을 불끈 쥐었다. 감각적으로도, 흐름상으로도 확연하
게 알 수 있었다. 이번의 격돌로 승패가 갈라지리라는 것을.
빙글.
건암보다 먼저 도착한 강기가 떨어져 내리기 직전에 하운의 슬며시 몸을 돌
렸다. 그리고 돌렸다 싶었던 그의 몸은 어느새 제자리로 돌아왔고 수평으로
누워있던 검이 물가로 끌려나온 잉어처럼 퍼덕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그려지는 검의 궤적은 죽음을 관장하는 염왕의 웃음과도 같았던 살
기어린 검식을 어루만져 주었다.
피(血)와 죽음(死)으로 얼룩졌기에 처연하리만치 슬펐던 달빛아래서의 살인
춤사위(月光殺舞)였는데 그의 손을 타고 흐르는 것은...
‘베려고 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자르려고 들지도 않는다. 하형의 검은 상
대를 존중하고 포용하여 절로 무릎을 꿇게 만든다. 이것이야말로 전설처럼
전해지는 활인검(活人劍)의 경지가 아닌가?’
활인검이라고 했다. 물론 북궁단야의 지극히 주관적인 해석일수도 있기에
확실하지는 않지만 만약 차가운 미청년의 가문과 배움을 안다면 일견 수긍
하여 고개를 끄덕이게 될지도 모를 일.
검이 한번 움직이자 하나의 강편이 기꺼이 감겨와 춤을 추는가 싶었는데 어
느새 힘을 잃은 어린 새 마냥 조용히 검신에 몸을 묻었다. 경악에 젖은 건
암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또 하나의 강편도 말 잘 듣는 강아지처럼 기세를
누그러트리고 지면으로 낙하하니 이런 진풍경이 또 있을까.
그런 모든 일을 아는지 모르는지 마냥 흥에 겨운 하운의 보보는 거칠 것이
없었고 아무리 두드려도 반응 없는 상대의 모습에 절로 지친 건암의 입에서
더운김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이익!”
이를 악물고 두 손을 교차하여 이미 쓸모없어진 강편을 거둔 건암이 쏜 화
살처럼 튕겨 나왔다. 그의 두 주먹은 강기의 보호아래 돌처럼 단단해져 있
었기에 어떤 물체라도 부술 힘을 담고 있었다.
그러나 황소와도 같은 건암의 돌진을 바라보며 북궁단야는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내가 처음 그의 검을 보았을 때 유(柔)하나 굳건하여 한 치의 흔들림 없는
당당함을 느껴 한없이 기꺼웠다.
내가 두 번째 그의 검을 보았을 때 백 년 전의 검식을 재현하면서 속에 담
긴 참뜻까지 읽어 내리는 혜안(慧眼)의 슬픔에 당혹스러웠다.
이제 내가 세 번째로 그의 검을 보니 피를 향기로 바꾸고 죽음도 삶으로 치
환하는 활인검예를 얻은 동료의 움직임 하나하나가 새롭다.
늘 같은 길을 걸었으되 꿈꾸는 몽상가처럼 아득한 별빛을 담아내던 그의 검
은 어느새 이만큼 커버려 마주 보기도 눈이 부신데.
사천성을 통째로 날려버릴 힘을 끌어올린다고 하더라도 이미 대상은 창공을
노니고 있는데 무엇에 대고 소리칠 것인가.
유와 활인을 분노와 증오의 무력으로 부수려 시도한 순간
건암, 당신은 이미 하형에게 무릎을 꿇은 거다...
속력을 줄이지 않고 마주 달려오는 두개의 마차처럼 하운과 건암은 정면으
로 충돌할 기세로 거리를 줄여갔다. 성난 파도처럼 무섭고 빠른 속도의 건
암과 산보 나온 유생처럼 느긋한 하운의 걸음은 대조적인 것이라 우스웠지
만 당사자들의 입장에서는 그리 유쾌한 순간은 아닐 터였다.
그리고...
스륵.
맹렬히 돌진하는 건암을 훑듯이 스쳐지나간 하운이 실 끊긴 인형처럼 동작
을 멈추자 한없이 달려 나갈 것만 같았던 건암도 몇 보를 못 떼고 걸음을
멈추었다.
“월광활무(月光活舞)....”
숨 죽여 지켜보던 북궁단야가 격돌의 끝에 무거운 짐을 내려놓듯 나직한 독
백을 토해내자 멍하니 죽어있던 하운의 눈동자에 생기가 돌아왔다. 두어 번
눈을 꿈뻑이던 그가 자신의 검을 내려보고 등판을 보이고 있는 상대에게
눈길을 주자 마치 기다린 사람처럼 건암이 몸을 돌렸다.
“역시 안 되는 건가...”
“......”
아무런 말을 못하고 자신을 응시하는 하운의 눈동자가 버거웠는지 하늘가로
눈을 돌린 건암이 몸의 무게를 이겨내지 못하고 지면으로 몸을 눕혔다. 이
미 그의 몸은 자신이 일으킨 강기의 여파에 돌이킬 수 없는 상해를 입은 터
였다.
“이렇게 될 줄 알았지만...”
이것저것 묻고 싶은 게 많았다. 하고 싶은 말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그런 것들이 무슨 소용일까. 사형제들과 같이 하지 못하는 미안함에 잠시
쓸쓸해졌지만 그것 역시 부질없다.
그에게 주어진 시간은 이것이 다였으니까.
허허롭게 미소 짓던 건암의 고개가 푹 꺾이고 장내를 돌개바람 하나가 무심
히 스쳐지나갔다.
살고 싶었어...
194
***
북궁단야가 깨어난 건 그로부터 나흘이 지난 후였다. 성치 않은, 아니 아예
망가진 몸으로 하운과 건암의 생사결을 지켜볼 수 있었던 원동력은 어디까
지나 정신력으로 버틴 것이지 몸 상태가 호전되어서가 아니었다.
그만한 부상을 입은 사람이 진기를 한번 돌린다고 멀쩡해진다는 건 말이 되
지 않으니까.
그나마 탄탄한 내공과 하운의 속명단, 그리고 방교명의 놀라운 응급처치가
있었기에 망정이지 만약 방치되었더라면 한달은 고사하고 아예 평생을 침상
에서 보내야 했을지도 모를 만큼의 상해였다.
물론 예전의 몸을 만들려면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
“아아, 일어나지 말게.”
문을 열고 들어서는 하운을 보고 애써 상체를 세우려는 북궁단야를 방교명
이 급히 제지했다. 상처의 부기가 빠진 상태였기에 예전의 훤출함을 그대로
드러낸다고 해도 그의 내상은 아직 회복되지 않았다.
함부로 몸을 움직일만한 상태가 아니다.
“오늘은 좀 어떻소?”
의자를 끌어다 북궁단야가 누워있는 침상에 가까이 붙여 앉은 하운이 파리
해서 더욱 아름다워 보이는 그의 동료에게 미소 지었다.
“답답한 것 빼곤 그럭저럭 지낼 만 하오.”
북궁단야도 희미한 웃음으로 하운의 성의에 화답했지만 안면근육을 움직임
에 아직 무리가 있는지 이내 검미(劍眉)를 찌푸렸다. 외상이란 건 금방 회
복되지만 내부 장기에 입은 충격은 며칠 자리보전한다고 나아지는 게 아니
다.
“그래도... 벌써 이만해진 걸 보니 역시 당문이란 말이 나옵니다. 용독(用
毒)으로 천하를 울리는 당가의 의술이 죽은 자도 되살린다더니 과연 허언만
은 아니었군요.”
과분한 칭찬을 받은 방교명이 괜시리 쑥쓰러워져서 헛기침을 연발했다. 사
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당문의 의술이 황궁 어의들보다 낫다는 건 무림인이
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독이나 기타 사람을 해치는 약초를 개발하는 것으로 이름을 얻은 당문이다.
그들의 용독술이 전 무림의 간담을 서늘케 한 것은 치명적인 독성도 독성
이려니와 여태까지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즉 끊임없이 새로운 독을 개발해
낸다는데 있다.
그런 독보적인 제조를 성공시키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행착오가 따랐겠는가.
모순적이라면 모순적인 일이지만 성공의 뒤안길에 발생하는 문제점들은 자
연히 그것의 개선책을 요구하게 되고 그런 여러 가지 정보들은 세월이 지남
에 따라 축적되어 어느새 의술에도 일가를 이루게 된 것이다.
빛과 어둠은 공존하는 법인가.
“이리 오래 신세를 지니 미안할 따름이지...”
“그게 무슨 말인가! 누란의 위기에서 당문을 지켜준 북궁공자에게 이정도
로밖에 대접하지 못하는 우리가 더 미안한 일이네! 행여 라도 그런 소릴랑
입 밖에 내지 말게. 문주님께서 들으시면 섭섭해 하실 거야!”
씁쓸하게 웃는 북궁단야의 말에 손사레까지 치며 방교명이 펄펄 뛰었다. 만
약 북궁단야가 적시(適時)에 도착하지 않았더라면 당문의 육백년 전통은 여
지없이 무너졌을 터였고 지금 생각해봐도 등골이 서늘한 순간이었다.
백번을 절해도 부족한 판에 신세는 무슨!
“자자, 그런 쓸데없는 생각은 싹 잊고 푹 쉬시게.”
“그런데...”
말이 겹쳤다. 이럴 때 사람들은 종종 머쓱해져 서로 양보하곤 한다. 하지만
북궁단야는 다르다.
“먼저 말 하...”
“어제는 미처 묻지 못했는데 말이오...”
방교명이 뭐라 하건 그는 하고픈 말을 불쑥 꺼냈다. 정신을 차린 건 어제였
지만 몸 여기저기가 욱신욱신 쑤셔 와서 고갯짓으로 의사소통을 대신해야
했다.
“그때의 검무 말이오. 그거 월광살무의 변형이라고 생각되는데...”
“아마도 그럴 것이오.”
“아마도?”
하운의 대꾸에 북궁단야가 깜짝 놀랐다. 하운 정도의 고수가 자신이 사용한
검식을 인지하지 못했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 일이고 검식에서 불확실성은
없다. 그야말로 형식에 구애받지 않는 검선(劍仙)의 경지에 이른 고수가
아니라면 말이다.
“그게 말이 되오? 아마도 라니?”
“아마도 라고 밖에 얘기하지 못하는 내 심정은 어떻겠소? 그런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으니 뭐라고 하겠소. 다만...”
“다만?”
계속되는 반문. 하운의 말은 종잡을 도리가 없는 억측의 투성이다. 가뜩이
나 머리 아픈데 놀리려는 건지, 아니면 자기도 그 상황을 인지하지 못했다
는 건가.
뒷말이 매우 궁금하여 몸을 일으켜 세우고 싶었지만 어쨌든 참았다. 호기심
도 신체의 통증은 이겨내지 못했고 조금만 기다리면 말을 해줄 테니.
“다만 뭐요?”
“다만...”
무언가 말하기 거북살스러운 표정이 된 하운이 망연히 약탕기를 바라보았다
. 보글보글 소리도 구수하게 끓고 있는 약탕관의 주둥이에서는 쉴 사이 없
이 김이 뿜어져 나왔지만 이내 허공에서 흩어졌다.
기둥처럼 보이는 김의 분출도 내용물이 모두 연소되면 없어지겠지만 한참
열 받은 상태에서의 분사였기에 흩어진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연속적인 모든 개체는 순간적으로는 사라진다고 해도 형태적으로는 머문다
고 봐야 하는 걸까. 순간순간 소멸되는 단상들이 찰라의 시간동안 단편적으
로 연결을 이루어 종내에는 사고라는 생성물로 존재하는 것처럼.
그럼 그때 보고 느꼈던 무학은 무엇일까.
참을성 있게 기다리는 북궁단야의 시선을 의식하고 억지로 웃으려 했지만
안면근육은 석화라도 된 듯 움직이지 않았기에 하운은 그저 고개를 한번 저
었다.
“다만 지금 그때의 검무를 추라고 한다면 전혀 다른 무엇을 보일 것만 같
소. 그리고 그때의 사고도 완전히 복원하지 못한다오. 우습지 않소?”
쿵!
전혀 우습지 않은 얘기를 우습다는 표현으로 토하는 하운에게서 눈을 돌려
천장을 응시하던 북궁단야가 조용히 눈을 감았다.
이제야 동료의 흐리멍텅한 눈빛이 무엇을 쫓았는지 알았다.
이제야 동료를 움직였던 무엇을 알 수 있었다.
이제야 동료의 급성장이 이해가 되었다.
이제야...
“심중안...”
나직한 그의 말에 하운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산무영이 가능했던 거였군. 추뢰보도, 그리고 활인검예까지 말이야.”
“산무영? 추뢰보?”
하운의 반문에 북궁단야가 너털웃음을 터트리다 가슴을 부여잡았다. 아무래
도 된통 당하긴 당했나보다.
“하하, 으윽! 심중안에 깊이도 빠져있었나 보오. 자신이 전개한 보법도 뭔
지 모르고 말이오. 하형이 건암이라는 자의 공세를 피한...”
“내가 그자의 공격을 피한 보법이 산무영이고 공격해 들어간 보법은 추뢰
보라고 하고 싶은 거요?”
“그럼 산무영과 추뢰보가 아니면 뭐요? 순간적으로 분열하여 적의 공격을
무력화 시키고 적의 허점을 노려 가장 빠른 시간에 목표점을 점하는 보법은
내가 알기로 추뢰보와 산무영밖에 없소만?”
어이없는 표정으로 하운을 바라보는 북궁단야의 눈빛은 초롱초롱하게 빛나
고 있었지만 곧 의아함으로 그 색을 바꾸어야했다. 지금 그의 동료는 답답
하다 못해 매우 한심하다는 표정을 구현해내고 있었으니까.
“북궁형의 논리대로라면 순간적으로 분열하여 적의 공격을 무력화 시키는
모든 변환의 보법은 산무영이라 일컬어야 하며, 적의 허점을 노려 가장 빠
른 시간에 목표점을 점하는 쾌속의 보법을 모두 추뢰보라고 칭해야 겠구려?”
하운답지 않은 냉정한 분석. 일시지간 말을 잊고 뜨악한 얼굴이 되어버린
북궁단야가 마지막으로 버텨보려 했지만 이내 포기해야 했다.
“그래도 움직임이 너무나 비슷했었고 전개 방식에 따른 모습 또한 일치점
이 많았는데...”
“상대의 시선보다 빠르게 몸을 놀리면 누구나 잔상 같은 흔적을 남길 수
있고, 적의 약점을 잡아서 재빨리 파고들면 목표점을 선점하게 됨은 당연한
이치가 아니겠소?”
“흠...”
맥 빠진 신음성을 낼 만도 한 것이 거창해 보이는 하운의 논지는 알고 보면
무학의 기본 이론이기 때문이다. 어릴 때부터 귀에 딱지가 안도록 들었던
그런 교범 같은 이론 말이다.
그래서 잊혀지기 쉽다는 양면성을 지닌 이론.
“그렇다면 추삼의 몸놀림과 하형의 그것은 전혀 무관했다는 거요?”
“물론 아니오!”
이런 젠장, 하고 소리라도 치고 싶었지만 꾹 눌러 참은 북궁단야가 속 터지
도록 당당한 대꾸의 뒤를 기다렸다. 제대로 된 뒤가 나오지 않으면 비록 아
픈 몸이나마 발광할 각오를 하고.
“심중안을 이끈 장본인이 바로 장형이었소. 북궁형의 말대로 산무영과 추
뢰보는 가장 완벽한 변과 쾌의 보법이라고 나도 생각하고 있던 차에 장형의
인도가 있었다오. 그래서 슬쩍 차용해 보았던 거요.”
생각처럼 매끄럽진 않았지만, 이라 말을 맺는 하운을 보며 북궁단야도 하운
의 산무영과 장추삼의 산무영을 비교했다.
“가만 생각하니 차이가 좀 있군.”
“좀이 아니라오. 장형의 산무영은 변환이라기보다 그 자체가 하나의 생명
력을 가지고 있는 보법이라오. 그저 변(變)이나 환(幻)으로는 그런 움직임
을 구체화할 수 없다오. 단지 피하기 위해 전개하는 수비식이 아니라 대전
시의 움직임에 그대로 녹아들기에 장형이 펼칠 때마다 상대는 말려들게 되
는 거라오. 내가 전개한 것은 그저 장형의 움직임에서 변환을 옮겨본 거요.
그래봐야 단 두 번의 움직임밖에 소화하지 못했지만 말이오.”
그렇게 따지고 보니 하운이 전개한 추뢰보는 장추삼의 그것과 너무 달랐다.
만약 같은 거리에서 장추삼의 추뢰보가 펼쳐졌더라면 상대는 방어할 틈도
없이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을 터였다.
“가까이 있을 때는 그저 그러려니 했었는데... 그놈 대체 뭐야?”
“그러게 말이오.”
어설프게 둘이 마주 웃었다. 막연하게 가지고 있던 장추삼의 실체가 떨어져
있으니 그린 듯 살아나서 매우 큰 존재감으로 다가왔다.
“아무튼...”
일단 하던 말을 마저 하자는 심산으로 하운의 뒷얘기를 풀어냈다. 추삼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서 있던 복면의 흑의인. 월광살무에 그려져 있던 죽음
과 피의 냄새를 뿌리는 사내의 검무.
거역하지 말라는 소리를 들었다는 대목에서 아낌없이 박수를 쳐주는 북궁단
야의 속내가 짐작되어 하운이 쓰게 입맛을 다셨다.
심중안.
많은 것을 얻을 기회지만 자칫 폐인이 되거나 아무런 소득도 없이 꿈처럼
지나칠 수도 있는 백일몽. 하운은 얻어냈고 북궁단야로는 기회조차 주어지
지 않았다.
어찌 부러움이 없으랴.
이럴 땐 말머리를 바꾸는 편이 좋다. 어떤 것으로든.
“아 참, 방장로님!”
“나?”
둘이 논의하는 고차적인 무학이론을 거의 알아듣지 못하고, 심심하기도 하
여 동네 어귀에서 서성이는 똥개마냥 약탕기의 주위를 맴돌던 방교명이 깜
짝 놀라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여기서 무학 애기라도 나오면 그 무슨 망신이랴.
“뭐, 뭔가?”
“ ? ”
왜 저리도 당황할까, 했지만 못 물을 물도 아니라 생각하여 하운이 열 하루
전부터 묻고 싶었던 질문을 던졌다. 물론 싸움 후에 바로 궁금증을 풀 수
도 있었지만 북궁단야의 치료가 급선무였고 그렇게 지내다보니 기회를 놓쳐
버려 어지껏 미루어 두었던 질문.
“건암이라는 사내가 당문을 방문한 목적이 무엇이었습니까? 뭐, 말씀하시
기 곤란하면 대답하지 않으셔도 상관은 없습니다만...”
“아, 그거! 진작 말하지. 핫핫핫!”
뭐가 저렇게 좋을까? 하운으로는 도저히 알 길이 없어서 어깨를 한번 으쓱
였다. 그렇지만 방교명으로는 심각했던 순간이었다.
그래서일까. 당문의 늙은 장로는 매우 꼼꼼하게 당시의 상황을 설명해 주었
고 묻지도 않았는데 삼백년 전의 혈사와 황야진수산의 무서움에 관해서도
조목조목 이야기를 했다.
당문의 원죄에 관한 언급이 있었을 때 하운의 눈가에 슬픔이 머물렀지만 그
건 나타날 때처럼 빨리 사라졌기에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황야진수산이라고요... 그러면 더욱 오리무중인데...”
“음?!”
“뭐라고?!”
하운의 말은 뭔가의 단서를 제공하는 내용을 담았기에 누워있던 북궁단야가
순간적으로 침상을 손으로 짚었다가 신음성을 토했고, 약탕관 앞에 쪼그려
앉아 부채질에 여념이 없던 방교명이 그만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둘의 반응은 사뭇 재미있는 것이었지만 하운으로는 그런 우스개를 즐길 여
유가 없었다. 그의 머리는 그 어느 때보다 민활하게 돌아가고 있었으니까.
“건암이라는 자... 죽으면서 한 마디 하더군요. 살고 싶다고.”
“그거야 죽고 싶은 사람이 누가...”
“정작 죽음의 목전에서는 그런 식의 약한 소리를 뱉지 않게 되죠. 거기다
무인이라면 말입니다. 건암이라는 사내, 강호인으로서의 긍지와 자부심을
가져도 좋을 만큼 훌륭한 무위를 소유하고 있었지요.”
방교명의 말을 자르고 하운이 북궁단야를 슬쩍 쳐다보았다. 무인대 무인으
로 부딪쳐본 동료라면 그의 말을 헤아릴 것이다.
북궁단야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자 방교명 쪽으로 시선을 돌린 하운이 작
게 헛기침을 했다.
“아무리 봐도 죽음에의 아쉬움을 담은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뭘까
요? 어기상인으로 상대를 제압하고, 발로 강기를 밀어내는 사내가 황야진수
산 같은 마물(魔物)을 얻으려고 했습니다, 단지 생존을 위해서 말이죠.”
“으음...”
나직한 북궁단야의 침음성에 화답이라도 하듯 방교명이 침을 꿀꺽 삼켰다.
뭔가 이번 일의 뒤에는 무서운 어떤 것이 또아리를 틀고 있을 지도 모른다.
“그런 고수가, 대동하고 온 사방신으로 보아 어느 정도의 세력까지 규합한
사람이 두려워서 금지 마물로 버텨보려는 대상. 과연... 뭘까요?”
하운의 질문에 누구도 대답하지 못했다. 문제를 던진 하운조차도 맴도는 상
념의 이름을 몰라 그저 한숨으로 답답함을 대신했다.
한 가지 문제가 물리고 한 가지 문제가 던져진 당문의 하루는 그렇게 저물
어갔다.
195
부스럭. 부스럭.
“오! 오!”
한 사내가 편지에 얼굴을 쳐 박고 연신 감탄사를 내지르고 있었다. 달랑 한
장짜리 양피지에 뭐 얼마나 많은 내용이 수록되어 있을까 만은 사내가 편
지에 취해 있는 시간을 보면 과연 한 장이 맞을까 싶을 정도였다.
“이보게, 벌써 한 식경이 지났어. 언제까지 편지만 들여다보고 있을 건가?”
한 식경이라면 편지 스무 장도 넘게 볼 수 있는 시간이다. 그렇다면 편지를
보고 있는 사내가 심한 난독증으로 문자이해력이 현저하게 떨어지거나 아
니면 문맹에 가까울 정도로 무식하다는 얘기다.
그런데 편지를 든 청년은 비단 난독증이 아닐뿐더러 문자를 읽지 못할 정도
로 배움이 짧은 것도 아니었다.
“아 참, 가만 좀 있어요. 한참 재미나는데 왜 초를 치고 그래요? 정 심심
하면 어디 마실이라도 다녀오시구려. 자고로 나이를 먹으면 참을성이 는다
고 했거늘 어떻게 노인장은 그 모양이우?”
나이를 거꾸로 먹어서 좋겠구려, 하고 툴툴거리고는 사내가 다시 편지에 머
리를 들이 밀었다. 난독증도 아니고 문맹이 아니라면 결론은 하나다. 사내
는 편지를 몇 십 번이고 다시 보고 있다는 말이다.
면박을 받은 노인이 끄응, 하고 자리에서 일어섰지만 별로 할 일도 없고 해
서 뒷짐 지고 창밖의 저녁노을을 우두커니 바라보았다. 일견 처량함을 팍팍
풍기는 노인네 특유의 몸짓이었지만 사내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말투로 보나, 행동거지로 보나 청년에게 그런 걸 기대하기란 무리인 듯 싶
었고 노인의 표정으로 보아 그러려니~ 하는 익숙함마저 짙게 풍겼으니 편지
에 몰두하고 있는 자의 심성을 미루어 짐작하기에 충분했다.
그런데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자리에 앉는 노인의 풍모를 보면 도무지 이
런 싸가지 없는 말이나 듣고 있을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다.
신선같이 초탈한 외모와 풍성한 수염, 그리고 잘 차려입은 의관... 품위라
는 단어가 전신에서 줄줄 흘러나오는 분위기였다. 이렇게 괜찮아 보이는 노
인을 싹 무시하는 사내의 뱃심도 대단하다고 해야 할까?
“음, 그랬군! 음음, 놀라운 일이야! 오호, 그랬단 말이지?”
“거 참...”
놀리듯 감탄사를 터트리는 사내가 얄미웠지만 노인으로는 어찌해볼 도리가
없었다. 자기한테 온 전서를 자신이 보며 감탄하는데 뭐라 할 것인가?
시간? 편지 오래 들여다보는 걸로 뭐라고 한다면 세상사 걸리지 않는 일 없
을 거다. 거기다 여태까지 한 일이라곤 저녁에 먹을 요리에 관한 한담이나
나두던 형편이었으니 사내가 편지로 코를 풀든, 종이학을 접든 간에 할 말
이 없다.
“역시 하형이야! 암, 그렇고 말고!”
짝~
그래도 어떻게든 참아보려 했는데 사내의 표정은 점입가경, 이제는 손으로
무릎까지 쳐 가면서 혼자 난리를 부리니 답답함도 답답함이려니와 편지 내
용에 관한 궁금증이 슬슬 치민다.
슬금슬금.
엉덩이를 살살 이동시켜 사내의 옆에 딱 붙은 노인이 편지를 슬그머니 넘겨
다 보려했다.
그런데...
샥-
기다렸다는 듯 사내는 직각으로 몸을 틀었고 노인의 시선은 애꿏은 등판만
을 쫓게 되었다. 무지하게 약이 올랐지만 헛기침으로 민망과 쑥스러움을 대
신한 노인이 사내와 같은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샤샥-
노인이 몸을 틀자마자 다시 사내가 반대편으로 위치를 바꾸었다.
‘끄응...’
열은 받는데 어쩔 도리가 없으면 사람들은 종종 이성을 잃곤 한다. 아마도
노인의 나이가 십년만 젊었더라면 이 자리에서 사내와 생사결이라도 치를
판이었다.
또 사내 쪽으로 이동해 봐야 몸짓 한번에 바보 될게 뻔한 노릇. 그렇다고
새까맣게 나이어린 놈에게 구걸이라도 하긴 싫으니 그야말로 진퇴양난의 처
지다.
‘그냥 관둘까...’
그러자니 뭔가 자존심이 상한다. 사내가 칼을 뽑았으면 무라도 잘라야할 것
아닌가? 비록 늙어서 젊음의 패기나 뭐 그런 것은 없지만 어쨌든 노인도
사내다.
언젠가는 도도히 흐르는 구름을 보며 웅심을 가슴 가득 품었던 적도 있단
말이다!
여기서 물러날 수는 없다!
“도, 도대체 무슨 내용 이길래...”
“신경 끊으슈.”
이런 대꾸가 대명천지에 또 어디 있는가! 지보다 몇 곱절은 많은 나이도 다
굽히고 정중히 청하고 있거늘 까마득한 연장자의 얘기가 채 끝나기 전에
싹둑 잘라버리면서 던지는 말버릇이라니!
으드득-
소리는 내지 않았다. 사실 사내가 반드시 편지의 내용을 알려줘야 할 의무
도 없을뿐더러 나이가지고 유세를 부린다는 건 너무 치사한 방법이라 쓰린
속을 부여잡고 가늘게 이를 갈아 부쳐야만 했다.
여기서 화를 내거나 뭔가 안 좋은 방향으로 사건이 전개된다면 편지를 보지
못함은 물론 저 심통 맞은 놈이 무슨 수작을 부릴지 모를 일이다.
저놈은 외모 이상으로 성격이 더럽단 말이다!
이럴 땐 그저 숙이고 들어가야 한다. 궁금한 건 자신이고 목마른 사람이 우
물을 파는 법이니 어쩌겠는가. 약이 오르다 못해 뒤집어지겠지만 성질 죽이
고 들어가야지.
“불쌍하고 힘없는 노인에게 그 무슨 섭섭한 말인가. 즐거움은 함께 할 때
그 기쁨이 배가(倍加)되는 법이라네. 그 왜, 이런 말도 있지 않은가. 백짓
장도 맞들면 낫...”
자신의 처량함과 정당성에 관해 침을 튀기며 설파하던 노인이 갑자기 말문
을 닫았다. 이마에 한줄기 굵은 땀방울을 흘리며.
“그 백짓장 혼자서 많이 들고 계시우. 나는 편지나 읽을 테니.”
말도 안 되는 비유를 트집 잡아 노인의 간절한 청을 사뿐히 즈려 밟고는 사
내가 다시 편지에 코를 박았다. 뭐가 그렇게 좋은지는 몰라도 연신 싱글거
리는 모습에 노인의 눈썹이 역팔자를 그렸으나 저지른 실수가 있는지라 한
숨만 팍팍 내쉬었다.
‘왜 저 녀석과 말을 섞기만 하면 늘 얘기가 꼬이는 걸까? 저것도 하나의
특수한 절기라고 봐야할까? 사람의 신경을 있는 대로 건드려서 자제력을 완
전히 상실케 하지만 절대로 꼬투리를 잡히지 않으니 어찌 비전절예라 아니
하겠는가!’
너무 기가 막히니 말조차도 꼬인다.
그래도...
‘구, 궁금하다!’
처음부터 선선히 보여준다고 했다면 이렇게까지 집착하지는 않았을 터. 사
람의 마음처럼 간사한 것이 또 있을까.
물러날수록 잡고 싶어 안달을 하다가도 일단 손에 넣으면 그것의 가치가 예
전만 못해 보임은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별난 근성이리라. 노인도 그 범주
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듯 자존심상 어찌 하지는 못하지만 연신 청년의
옆모습을 훔쳐보았다.
정확히 말해 사내가 아니라 그가 지닌 편지겠지만.
스르륵.
뭔가가 다가오는 느낌이 들어 청년이 눈동자만 움직여 그의 좌측 어깨 부근
에서 은밀하게 접근하는 물체를 관찰했다. 그것은 타원형이었고, 털이 많았
으며, 뭔가 부담스러움을 왈칵 안겨주었다.
짜증까지도.
“얼굴 안 치워요...”
“아, 잠시 졸았구먼. 미안하이. 난 졸 때 목을 옆으로 까닥거리는 습관이
있거든. 절대로 편지를 넘겨보려거나 하지는 않았다네. 정말이야!”
차라리 보려고 했다는 게 나은 상황.
“흥!”
힘찬 콧방귀 한방으로 자신의 주변경계를 과시한 청년이 옆으로 노인을 흘
겨보고 다시 편지를 읽기 시작했다. 늙으면 느는 건 인내심이 아니라 호기
심인가보다.
얼마나 지났을까. 청년이 삼매경에 빠져 들자 제차 노인이 편지로의 접근을
시도했다.
“좀!!”
소리를 버럭 지르고 그것으로도 모자랐는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사내가
양손을 허리춤에 착 붙이고 쥐 잡는 고양이마냥 노인을 노려보았다.
웃기지 않은가. 왜 남의 사생활을 맘대로 엿보려고 하는 걸까?
“내가 왜 노인에게 내 편지를 보여줘야 하는지 세 가지의 이유를 대봐요!”
“세 가지 이유?”
갑작스런 질문에 노인이 멀뚱한 눈으로 사내를 쳐다보았다.
세 가지라, 세 가지...
‘못 댈 것도 없지.’
어깨에 힘을 주고 노인이 태평스레 입을 열었다. 절대로 흥분하지 말자고
다짐하며.
“뭐 첫 번째 이유는 홀로 시간을 죽이는 가련한 노인에 대한 예의라고 하
겠고, 두 번째 이유는 아까도 말했다시피 즐거움을 나누자는 건전한 취지의
발로이며, 세 번째라면 이제부터 함께 행동할 동료의 주변을 알고자하는
치밀하면서도 섬세한 마음 씀씀이라고 하겠지. 우린 운명공동체 아닌가?”
“운명공동체?”
벙쪄버린 사내의 표정을 즐기며 노인이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압승이다. 근자에 들어 이렇게 말빨이 선 적은 없었다. 늘 멍청하게 당하기
만 했는데 오늘따라 혓바닥이 마술과도 같은 조화를 부렸다.
그야말로 달변 아닌가!
‘청산유수를 멀리서 찾을 필요가 없구나!’
스스로에 도취되어 지그시 눈을 감고 고개를 끄덕이는 노인이 가소로웠지만
그가 댄 세 가지 장광설에 압도당하여 뒷머리를 벅벅 긁던 청년이 털썩 자
리에 주저앉았다. 처음에는 이렇지 않았는데 날이 가면 갈수록 노인은 본래
의 모습을 상실하고 있었다.
신선? 처음 며칠은 그랬다. 자태나 풍모, 그 외에 기타의 행동거지에서 달
관한 무엇을 강하게 풍겨왔었기에 청년도 노인을 함부로 대하거나 하지 못
했다.
하지만 개 버릇 남 못 주는 법.
며칠을 점잖 빼고 지내려니 죽을 맛이라 사내가 본래의 성질을 부리기 시작
했고 노인은 적이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어느 결부터 노인은 그의 심통을 유연하게 대처하기 시작하더니 요즘은 하
루하루 신경지를 개척하고 있다. 방금 전의 말빨만 해도 충분히 가공스러운
것이거늘 이젠 자아도취라니.
“예, 예, 다 좋시다. 운명공동체도 좋고, 예의도 좋고, 취지도 좋은데 노
인장이 내 동료들을 아시오?”
알 리가 없다.
“입소문은 접해봤는데...”
“소문처럼 덧없는 게 어디 있겠소? 그건 무시하고, 내 동료들과 한번이라
도 대면한 적이 없지요? 그러면서 무슨 편지라는 거요? 이건 어디까지나 개
인의 사생활이란 말이오! 같이 행동하는 건 뭐라고 하지 않겠지만 지킬 건
지켜줘요!”
“노부가 그리도 못 미더운가...”
측은한 얼굴이 된 노인이 고개를 떨구고 실의에 찬 어투로 탄식을 터트렸다
. 그의 어조에 담긴 쓸쓸함이 워낙 사실적이라 사내의 뻔뻔한 마음까지 뒤
흔들 정도였다.
“내 비록 강호에 제 이름 석자조차 날리지 못하고 이리 떠도는 신세라지만
나름대로의 신념을 가지고 삶을 살아왔다고 자부한다네. 부끄러운 인생은
아니었지. 그런데... 자네의 반응은 노부를 너무 비참하게 만드는구먼. 자
네의 말 한마디에 내 삶 전체가 부정되는 듯해서 너무 슬프다네.”
‘뭐, 뭐야! 이런 반응은!’
사내가 주춤 엉덩이를 뒤로 뺐지만 무릎을 붙이고 머리를 들이미는 노인의
행동력에 두 손 두 발을 다 들 지경이 되었다.
“그런가? 그런 것이었나? 내 인생이 그런 것이었냐고?”
여기서 인생이 왜 나오는 건지.
편지 한 장 보자고 하는 연기라면 그 정성이 갸륵하다. 목을 뒤로 젖히며
노인과의 맞대면을 최대한으로 피하던 사내가 엄청나게 튼 숨을 몰아쉬었다.
“까짓 거 보여드리죠. 보여주면 될 거 아니에요!”
손에 든 편지를 던지듯 노인에게 내밀고 침상에 벌렁 드러누운 청년의 눈은
낡은 천장을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그런 일이 있었구나. 당문이라...’
부풀리지 못하는 하운의 성격상 건암이라는 사내와의 대결은 꽤나 치열했었
을 테고, 당문의 문주를 눈빛만으로 제압했다는 고수를 꺾은 동료가 자랑스
러웠다.
‘바보 같은 얼음덩어리. 맨 날 무게만 잡더니 꼴 좋다.’
북궁단야는 노인네 네 명하고 싸우다 지쳐서 건암이라는 사내의 한방에 기
절했다고 했다. 물론 하운은 기력이 쇠진한 상태에서 어쩌구, 라고 써놨지
만 어쨌든 뻗은 건 뻗은 거다.
얼마나 당했으면 아직도 거동이 불편해서 침상생활을 하겠는가. 당문이 근
처였으면 조석(朝夕)으로 놀려줬을 텐데.
“아깝다!”
“엥?”
열심히 읽고 있던 노인, 유한초자가 깜짝 놀라 누워서 비명을 지르는 사내
에게 눈길을 돌렸다. 성격만 지랄 맞은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발작까지 한
단 말인가.
“아, 아니오. 보던 거나 열심히 보시오.”
솔직히 보여줘서는 안 된다. 다른 건 몰라도 황야진수산이나 당문의 망신이
적힌 부분은 보이기 뭐한 내용이다. 그 정도는 알만한 장추삼인데 아무리
징징거렸다고 하나 남에게 선뜻 편지를 건넨 이유가 뭘까?
말 그대로 유한초자와 그가 운명공동체이고 앞으로 함께 행보를 걸을 동료
이기 때문에? 그건 말이 되지 않는다. 둘은 아직 서로를 잘 모른다. 아니,
서로에 대해 굳이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적당한 방관과 적당한 친분?
아무튼 이런 사안을 보일만큼의 신뢰관계가 확립되어 있지도 않은 상태라는
건 누가 봐도 분명하다. 그러나 편지를 준 장추삼은 아무 걱정 없는 사람
처럼 탱자거리며 침상에서 뒹굴고 있었다.
아까의 그만큼이나 고개를 박고 편지에 몰두하고 있는 유한초자를 힐끗 쳐
다본 장추삼이 빙글 몸을 돌렸다. 뒤따르는 표정으로 미루어 얼굴을 숨기기
위해 유한초자와 등을 졌나보다.
뭔가를 궁리하는 얼굴.
요즘 그는 생각을 많이 한다. 그것이 무엇이고 어떻게 정리되어 가는지는
그 자신밖에 모르지만.
‘황야진수산이나 당문의 망신이 중요한 건 아닐지도 모르지.’
그의 눈길을 잡은 건 건암과 하운의 싸움이나 위의 두 가지 얘기가 아니었
다.
그건...
“음... 당문이 큰 봉변을 면했구먼.”
“......”
대꾸 없이 벽을 보고 고르게 숨을 쉬는 장추삼의 등을 한동안 비리 보던 유
한초자가 조용히 편지를 놓고 방을 나섰다. 그가 나가자 내리감았던 장추삼
의 눈이 번쩍 떠졌다.
평소의 그와는 어울리지 않는 심각함을 가득 담고.
“살고 싶었다... 라...”
첫댓글 편지
즐감합니다.